욥의고난
장일선교수
욥의 주제는 고난이라기 보다는 인과응보사상에 대한 재해석이다.
천상회의는 여기에 나오는 사탄은 전통적인 사탄관에 비해서 매우 이
채롭다. 신구약 어디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가 없을 정도로 특이하다. 특
정임무를 수행하는 일종의 천사나 야당의 역할을 하고 있고 천상회의에서
하나님의 아들들과 함께 당당하게 참석하여 그의 소신한 바를 아무 거리낌
없이 진술하는 것은 이채로운 광경이다.
이것은 전통적인 고정관념에 대해서 하나의 문제를 제기하려는 의도를
가지려는 것같다. 이스라엘의 후기 예언자 사상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나중에 나오는 바 "유치한 말로 사리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이
제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게 나아와 내가 네게 묻는 말에(아론처럼)대
답하라."(38:2,3)과 연관하여 생각하면 이스라엘을 하나님 앞에 성인처럼
응대하여 세우고 있는 것도 새롭다. 이사야 선지자의 "오라, 우리가 함께
변론해보자."(사1:18)도 마찬가지.
욥의 세친구
그들중 두사람의 이름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소발이라는
이름은 찾아볼 수 없다. 이들은 지역적으로 서로 멀리 떨어져 있다. 이들의
나열 순서는 연장자순이다.
지역 엘리바스는 데만-에서의 손자인 데만의 후손들이 사는 도시로
에돔의 영역에 속해 있다.
빌닷은 수아-앗수르의 비문에 의하면 유프라테스강 서편에 있
는 어느 지역인 듯
소발은 나아마-아라비아 북서부에 있는 어느 산악지방인 듯
욥의 세 친구 구세대의 상징들
욥의 자학과 독백(3:1-26)
욥이 평생동안 신봉해왔던 가치의 기반이 무너져 버린 것이다. 그는 자
학하는 긴 말들로 "어찌하여"를 연발하며 자기의 생일을 저주한다. 1장
22.23절에 표현된 "욥의 입에 찬송이 있고 어리석게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
았다"는 그 욥이하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이다.
욥과 세 친구와의 변론
그들이 논쟁에 있어서의 근본적 차이가 무엇인가? 그것은 죄관의 차이이
다. 세 친구의 죄관은 한결같이 행위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범죄행위에 상응한 하나님의 징벌은 마땅한 것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다. 욥
자신도 예전에는 그들과 같은 교리 체계의 신봉자였으나 지금은 그것이 한
낱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고 하는 것이다.
욥은 그의 답변에서 하나님의 의로움에 견주어 자기의 순결을 말하는 것
이 아니라 상대적인 의미에서 자신을 죄인으로 낙인을 찍는 것에는 결코 동
의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도 결코 친구들 못지 않은 경건하
고 의로운 생활을 해왔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그가 논쟁하려고 하는
대상이 다름아닌 하나님이라는 인상이 강하게 풍기고 있다.(9:1-10:22)
라합은 셈 족의 신화에서 우주 질서의 파괴자 티아마-트(Tiamart)와 동
일한 존재로 바다의 괴물로 알려져 있다.(욥26:12,시87:10,사51:9)
욥은 하나님을 마치 오만한 군주처럼, 한 걸음 더 나아가 도저히 시시비
비를 가려서 따질만한 상대도 되지 못하는 비정한 폭군으로 여기고 있는 것
이다.
욥은 이제까지 절대적 가치로 알고 신봉해왔던 인과응보라는 정치적인
체계가 아무런 쓸모가 없이 되어버리자 심한 가치관의 혼란에 빠져 어쩔 줄
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욥을 통해서 저자는 하나님의 보다 더 큰
섭리 안에서 독자들의 현재적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 수 있게 되기
를 요청하고 있다.
"하나님은 나처럼 사람이 아니시니 나는 그에게 대답할 수도 없고 대질
하여 재판할 수도 없구나. 그렇다고 이 두 사이에 손을 얹어(공정하게) 판
결을 해줄 자도 없구나"(9:32) 여기에서 욥은 제3의 중재자의 요청을 말하
고 있다고 본다. 이것은 이 책이 이스라엘 후기 사상의 특징인 메시야의 대
망에 그 배경을 두고 있다는 것을 추정케 하는 대목이다.
"주께서 그 막대기를 내게서 거두시고 그 위어으로 나를 두렵게 하지 마
옵소서. 그렇게 아니하시면 나는 두려움없이 나는 본래 그런 자가 아님을
말하리이다."(9:34,35)
그는 그 자신의 종교 생활이 니모데모식의 경건주의에 바탕을 둔 수련의
종교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소위 선선성(선선성)에 근거한 양심주의자로서
타고난 윤리의식을 더럽히지 않고 잘 보전해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는 아직도 성서가 말하는 인간의 행위 이전의 문제-범죄의
가능성으로 산재해있는 죄에 대하여 아직 눈을 뜨지 못한 상태에 있다.
욥의 기도(10:2-20)
욥은 진정으로 열심히 기도를 드린다해도 서로의 존재적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대화까지도 불가능한 상대 즉 "가령 내가 부르므로 그가 내 음성을
들으셨다고는 내가 믿지 아니하리라."(9:15,16) "내가 그에게 대답함도 허
사이고.."(9:32)등의 말에서 보듯이 그의 간절한 기도는 다만 넋두리
(monologue)에 불과한 것이다. 이러한 애절한 넋두리 속에도 역시 단절된
관계에서의 제3의 중재가 참으로 절실하게 요청되는 호소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양자 사이에 손을 얹어 어떤 판결을 해줄 자가 없구나"(9:33),
"지금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식 나를 변호할 이가 높은 곳에 계시다."
(16:39)
"어떤 사람은 죽는 날까지 기운이 뻗쳐 무사태평 안일한 나닐을 보내며
뱃가죽에는 기름이 돌고 뼈골이 싱싱한가 하면 어떤 사람은 죽는 날까지 근
심과 걱정으로 행복이란 맛조차 못 본 자도 있느니라. 그러나 이 둘이 흙
속에 묻히면 다같이 썩어서 구더기가 득실거리느니라."(참조 21:17-26) 이
상의 말들은 이 세계 안에는 인과율의 법칙으로 따질 수 없는 것들이 얼마
든지 있다는 것이다. 그의 친구들은 여전히 낡은 시대의 사상으로써 욥을
판단하려 하지만 그는 이미 그러한 범주 밖에 서있는 것이다. 욥은 인과율
이 지극히 단편적이고 근시안적인 역사관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
은 마치 저울로 산을 달며 바닷물을 되로 헤아리는 어리아이적 방법(사
40:12 참조)에서 성숙한 역사에로 눈을 뜨려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는 하나
지금의 그는 단호하게 새로운 세계를 제시할 수는 없다. 그는 지금 빼앗기
고 헐리운 공허한 사상의 터전 위에 적막하게 홀로 서있는 것이다.
욥과 세 친구와의 논쟁은 전혀 새로운 차원의 신학적 통찰이 없이는 결
코 해결될 수 없는 평행선상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내가 만일 악행을 했다면 앙화를 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내가 의로울
지라도 머리를 쳐들 수 없아오니 이는 내 마음이 수치감으로 가득 찼으니
(사람들이)내 환난을 목도함이니이다."(10:15) 욥은 여전히 윤리 종교의 테
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악행을 저지르지도 않았는데 지금 받고 있는
환난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수치를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욥과 하나님과
의 장벽은 욥의 죄를 바라보는 시각에 있다. 욥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일체
의 비극적인 현상을 모조리 신의 형벌로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지금 자신에게 내려져 있는 형벌만은 하나님의 오판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욥의 격앙된 감정은 하나님은 사랑도, 정의도, 자비심도 없는 힘 만능주
의자로 표현하고 있다(10:16,17). 일찌기 그의 아내가 차라리 하나님을 욕
하고 빨리 죽으라고 말하던 것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소발에 대한 욥의 답변에서는 욥의 신앙이 공리주의적임을 잘 말해주고
있다고 본다(12:4). 이를 욥기 41:11에 하나님께서 욥에게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갚게 하였느냐?"고 하는 말씀과 대조해 볼 때 그렇다. 욥은 자신
이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그가 먼저 의롭고 깨끗하며
경건한 생활을 해왔기 때문이었다는 자만심이 그의 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
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본래 그런 자가 아니다"(9:35)고 말했던 것이
다. 공리주의적 요소는 신앙에 용납될 수 없는 독소인데도 그것이 교묘하게
위장되어 하나님께 대한 경건으로 바쳐지는 태도는 하나님의 진노를 살 뿐
이요, 어깨 위의 무거운 짐인 것이다(사1:13,14).
빌닷의 3차변론(25:1-6)에서 그는 관념적인 신관은 신의 초월성을 지낯
칠 정도로 강조한 나머지 이에 대비되는 인간은 이러한 신적 존재와는 어떠
한 인격적인 교섭이나 친교 관계를 도저히 생각할 수도 없는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의 눈에는 달빛도 빛이라고 할 수 없으며 별빛인들 맑다고 할 수
없는데 하물며 구더기 같은 인생들이랴!"
욥의 마지막 답변(27:1-31-40)
"나의 권리를 박탈하신 하나님을 걸고 나에게 고통을 주신 전능자를 걸
고 나는 맹세하노라....결코 너희를 옳다하지 않으리니 죽을지언정 나의 깨
끗함을 주장하리라. 내가 내 의를 굳게 잡고 놓지 아니하리니 이 날 이 때
까지 단 하루인들 부끄러움은 없었노라." 대개의 경우 사람들은 자만심을
갖고 있다가도 예기치 못한 비극적인 상황에 처하게 되면 죄책감에 사로잡
힌다. 그러나 욥은 끝까지 자신의 무죄를 항변하겠다고 한다. 그는 만인 앞
에 자신의 결백한 종교생활의 공개장을 제시한다. 그리고 그가 지금까지 말
한 그 모든 내용에는 추호도 과장이 없는 진실임을 "보라! 나는 여기 서명
하노라."(31:35)는 대선언으로써 "전능자여! 내게 대답해주시기를 바랍니
다."라고 청원하는 것이다.
그는 현실의 물질적인 회복을 위하여 고뇌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종교
성이 허무하게 무너진 터전 위에 서서 새롭게 와야 할 그 무엇을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는 것이며 그것은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것을 갈
구하고 있다.
엘리후의 등장(32:1-37:24)
엘리후는 성전히 헐려지는 것은 하나님의 크신 섭리로 받아들였던 예언
자들의 사상의 맥락에서 역사의 새로운 해석자로 등장하고 있다.
그는 서두에서 욥에게 말하기를 지금까지의 변론을 들어보건대 자기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처사가 부당하기 때문에 승복할 수 없다고 했는데 그것은
하나님보다 자기가 더 정당하다는 망녕된 주장이 아니냐고 한다. 엘리후의
이 지적은 죄의 관점에서라기 보다는 욥의 하나님께 대한 자세를 이야기하
고 있다.
욥의 세 친구는 욥의 현실을 다만 현상적인 결과로 밖에는 보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계획, 진행, 성취라는 목적론적인 역사관 밖에 없었기
때문에 모든 세계가 필연적인 숙명론으로 이해될 수 밖에 없었다.
엘리후는 장장 다섯장에 걸쳐 욥에게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에 대하여
욥이 단 한마디의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 사실은 그가 앞에서 행한 세 친
구들의 변론과는 대조적이라는 것을 말하려 하는 것이다. 세 친구는 자신들
을 의로운 입장에 두고 욥만을 범죄자로 추궁했으나 엘리후는 "너나 나나
다같이 흙으로 지음받은 것 그러니 어찌 내가 내 위엄으로 너를 누를 수 있
으랴"고 그의 첫 발언을 시작하고 있다. 즉 엘리후는 자신이 욥과 함께 하
님 앞에 벌거숭이로 다가서는 것이다. 세 친구는 틀에 박힌 조문화된 논리
로서 하나님을 객관적인 입장에서 3인칭으로 말하고 있으나 엘리후는 하나
님의 역사의 내적 경험을 통하여 얻은 솔직한 신앙고백으로 하나님과 욥을
너와 나의 관계로 다가세우고 있는 것이다(33:8-18).
엘리후가 진술한 내용을 보면 욥이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처사가 부당하
다고 했는데 그 사고 자체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데서 연유한 것이 아니
냐고 묻는다.
욥의 하나님께 대한 태도를 "....때문에 ...이다"로 표현한다면 엘리후
는 "..하려 함이다"로 말할 수 있다. 즉 그는 현실을 과거에 의한 필연으로
보지 않고 새로올 미래에 의하여 현재를 조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으
로 악을 버리게 하여 함이라.""사람으로 교만을 막으려 함이라." "사람의
혼으로 무덤에 들지 않게 하려 함이라." "사람으로 칼에 멸망치 않게 하려
함이라."
엘리후가 말하는 악은 통속적인 의미의 비도덕적인 행위라기 보다는 인
간의 내면적인 의식구조의 본질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의
'악'이란 "그 마음에 하나님은 없다."(시1:1)고 하는 무신론적 사고를 일컫
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엘리후는 욥과 세 친구를 포함해서
사상적 근거에 있어서는 이러한 무신론과 동류가 아니냐는 것이다.
(34:4-9) 엘리후는 신앙으로 위장된 욥의 오류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기
독교가 가장 경계해야 할 적은 밖으로 드러나 있는 무신론이 아니라 안에
숨어있는 유심론이라는 폴틸리히와 같은 입장이다(34:31,32,35,36).
엘리후 역시 중보자의 필요를 말하고 있다. "만일에 일천 천사 중에 하
나가 그 사람의 중보자로 나서서 그가 마땅히 걸어야 할 길을 제시해 준다
면, 하나님은 저를 긍휼히 보시고 이르시기를 "저를 구원하여 무덤에 들지
않게 하라. 내가 이미 속물을 받았노라 "하리라."(33:23,24).
엘리후는 욥이 극한상황에 처해있는 현실자체가 살아계신 참 하나님을
만나게 하시려는 사랑의 손길임을 알라고 한다(36:15,16). "사람이 어떤 때
는 궁창의 광명을 볼 수 없어도 바람이 지나가면 맑아지느니라(37:21).
이상의 엘리후의 진술은 그의 구속 사상의 핵심인 동시에 본서 저자의
사상을 집약하여 대변하고 있는 핵심부이다. 이것은 다음에 이어질 하나님
의 등장에 앞서 소리높이 올려퍼지는 나팔 소리와도 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등장(38:1-41:34)
하나님이 드디어 욥 앞에 다가섰다. 그러나 하나님은 욥의 호출에 응하
여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엘리후의 중재로 욥이 이미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다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폭풍 중에 " 나타난 하나님의 진노의 얼굴에는 과거에 대한 징벌이 아
니라 윤리적 자만심에 삶의 근거를 둔 욥의 망상을 깨뜨리시려는 하나님의
깊은 의도가 숨겨져 있다.
욥기의 첫장면은 천상회의다. 여기서 사탄은 하나님의 원수이기보다 하
나님의 심부름꾼으로서 검찰총장과도 같이 보인다.
산문부분은 경건한 사람이 불행한 일을 당해도 끝내는 하나님께서 번영
을 다시 회복시켜 준다는 것이고, 시 부분은 경건한 사람의 고통은 인간체
험의 사실이라는 것이다. 이 후자의 견해는 정통적인 유대 신앙인 하나님은
언제나 옳은 이를 복주고 악한 자를 벌한다는 응보사상에 정면으로 도전하
는 것이다. 이같은 도전은 유명한 시편 37편 25절의 사상을 반박하는 것이
다.
욥은 자기의 고통을 통해 자기 주위를 살펴본다. 그는 인간의 행동과 그
의 운명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옳은 자가 고통을 당하고 악한 자가 번
성하며 심지어 죽음을 갈구하는 자에게 죽음까지 피해가는 세상을 본다.
엘리후의 연설(32-37장)은 새로운 점이 하나도 없다. 정통교리를 옹호하
기 위한 후대의 삽입이라고 보는 사람이 많다.
욥기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하나님이 폭풍 속에서 욥에게 대답하는 시
부분이다. 이 부분을 저술한 시인은 특출한 재능을 발휘하고 있다. 그의 시
는 극히 고양된 개인적 감정으로 차있다. 여기에는 재래적인 모방이나 의식
적인 노래의 형태도 보이지 않는다. 단지 광대하고 조화스러운 자연 세계의
묘사가 사실적일 뿐이다. 이 부분을 소리내어 낭독하면, 시의 운율과 아름
다움이 뚜렷이 나타난다.
하늘과 땅의 영광을 노래한 38장은 욥기 뿐아니라. 성서전체에서도 그
비슷한 예를 찾을 수 없는 아름다운 시이다. 시 처음에 나오는 큰 바람은
구약성서 여러 곳에서 나오는 것처럼 신의 임재를 말한다. 폭풍의 위력은
어마어마하며, 갑자기 나타나 땅을 덮는 그 무서운 모습 속에 하나님의 나
타나심이 있다.
이 시의 문학적 기교는 여러 모로 나타난다. 세상의 기초로 부터 동서남
북 광범위한 면적, 위엄에 찬 바다의 물결, 어둠과 빛이 거하는 지역을 다
루고 ..38장은 동물세계의 경이를 노래하고 있다.
시인은 인간 욥을 택하여 매 시대 평범한 인간이 인간 존재에 대해서 느
끼는 의심과 반항과 분노를 잘 그리고 있다. 욥의 최종적 결론에서 인간은
생명의 선물과 생명의 경이감 그리고 생명의 신비성을 새로이 느끼게 한다.
그러기에 욥은 비극적인 인물이 아니라 승리의 인물이다. 그는 그의 비
통한 슬픔과 당황과 의심 속에서도 자아를 잃지 않고 생존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그의 시는 어둠 속에서도 신앙을 선언하는 것이다.
다니엘서의 표현 "저희가 섬기는 하느님께서 저희를 구해 주실 힘이 있
으시면 임금님께서 소신들을 활활 타는 화덕에 집어 넣어셔도 저희를 거기
서 구해주실 것입니다. 비록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저희는 임금님의 신을
섬기거나 임금님께서 세우신 금신상 앞에 절할 수 없습니다."(단3:17)
한신대학목회학박사원
교역현장과 구약성서
1992년 1학기:4월27일
지도교수:장 일선박사
발 제 자:김 정출목사
욥기의 저자와 연대
아브라함 이 전부터 이스라엘의 포로기 이후까지의 각설이 있을 정도이
다. 추정의 근거는 이 책의 내용이 뿌리깊은 배타적인 선민의식의 테두리를
벗어나 있고 또 요나서 저자처럼 그에 대한 비판적인 안목을 지니고 있으며
가장 유력시 되는 것은 이스라엘의 그릇된 선민의식에 대한 비판적인 바탕
을 지니고 있고 인과응보 사상에 혁신적인 해석을 가할 수 있었던 때이다.
많은 학자들은 산문부문은 포로 후기 예언자 말라기 시절로 많은 사람들이
매우 실망하고 하나님을 경외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그 당시 문서화되어
졌다고 보고, 시 부분은 더 후기의 작품으로 주전 4세기 늦으면 주전 3세기
경에 되어진 것으로 보는 편이 많다.
'욥'의 역사성
유대인들은 욥이 실제적인 역사적 인물로 간주해왔고 기독교에서도 종교
개혁 때까지는 그렇게 생각해왔으나 마틴 루터가 비로소 욥기에는 역사적
요소가 약간은 있으나, 후기의 경건한 이들이 확장시킨 이야기라고 주장하
여, 현재는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학자들은 없다. 우선 우스라는 지명을
확인할 수도 없으며, 욥이란 인물 역시 에스겔서 14장14절에 근거한 대로
노아와 다니엘과 함께 그 의로움이 오래 알려진 고대 설화의 인물인 것이
다. 그러므로 이 서론 부분은 "옛날 옛날에 "하는 이야기 식으로 욥을 이상
적으로 묘사해놓고 있다. 즉 도입부문이 고담(고담)적이다. "우스 땅에 욥
이라 이름하는 한 사람이 있었다."
또 서론과 결론에서 서술하고 있는 욥의 재산목록
욥의 처음 재산
아들과 딸: 7+3=10
양과 약대: 7,000+3,000=10,000
소와 암나귀: 500+500=1,000
재난 후의 재산
아들과 딸: 7+3=10
양과 약대: 14,000+6,000=20,000
소나 암나귀: 1,000+1,000=2,000 처음의 꼭 배수(배수)
"욥의 소유가 오히려 전보다 두 배나 더하게 하시니라."(42:10,12)
이상에서 보는 것과 같이 모두가 두 가지씩으로 조를 지어 각조가 10수
인 만수로 안배되어 있다. 이러한 인위적 구성이 이 책이 하나의 작품이라
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욥기의 주제
최근 욥에 대한 새로운 이해로서 욥기의 주제를 고난으로 보지 않고 우
주의 도덕적 질서 즉 정통적인 인과응보의 원칙을 비판한 것이라고 보고 있
다. 하나님의 행위는 인과응보의 법칙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욥기의 문학형태와 구성
욥기는 일정한 문학형태로 구분하기가 힘이 든다. 성서 안의 독특한 문
학 작품이며, 많은 비평가들이 부르는 대로 "cycles of dramatic poetic
speech"라고 부르는 것이 무방하다. 익명의 시인이 산문체로 쓴 욥의 전설
에 시형태를 첨가하여 하나의 전체적인 이야기로 꾸몄다는 정도이다.
욥기는 설화체의 윤곽 안에서 시적인 대화의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설
화는 서론부와 본론부가 하나의 계속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며 시적인
대화는 욥과 세 친구와의 대화가 세 차례 계속되는 것이다. 포러는 '욥기
서'(1963)에서 시적인 대화의 저자가 어느 의로운 사람의 고통받는 이야기
를 윤곽으로 삼아 욥의 이야기를 전개시켰다고 본다. 그러나 서론부와 결론
부가 동화책에 있는 말을 그대로 사용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알트는 '욥기의 원래 이야기'(1937)에서 원래 이야기는 재산 상실만 다
룬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린드블롬은 '욥기서 구성'(1945)에서 하나님을
배신토록 한 것은 욥의 부인이 아니라 그의 친구들이며, 이스라엘 사람들이
채택한 후에 욥의 부인과 사탄이 첨가된 이라고 보았다.
게제는 [고대 지혜의 교훈과 실제](1958)에서 바빌론의 '의로운 고난자'
와 비교하면서 욥기와 공통되는 것은 첫째 고난의 묘사, 둘째 탄식, 세째
신의 응답이란 뚜렷한 범주를 형성한다고 보았다.
욥기의 내용
욥기는 모두 다섯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이야기의 서론격인 1-2장과
결론부인 42장 7-17절은 산문체로 되어 있으며 욥이야기의 골격을 이룬다.
나머지 부분은 모두 시 형태로 되어있다. 둘째 부분은 4-31장까지이며, 이
부분은 욥과 그 세친구들 사이의 길고도 지루한 논쟁이다. 세째 부분은 젊
은 사람 엘리후의 연설로 32-37장까지이고 네째는 폭풍 속에서 나타나신 하
나님의 연설이다(38-42:6)
욥은 시적인 대화 부분을 시작하면서 3장에서 자기의 생일을 저주한다.
그는 또 29자에서 31장까지 저주를 퍼붓는다. 욥의 두 저주 사이에 친구들
과의 대화가 세 차례 계속된다.
엘리바스(욥4-5장, 15장, 22장)-무죄한 자는 벌을 받지 않고 악한 자만
벌을 받는 법이니까 욥이 벌을 받는 것은 그가 악한 짓을 했기 때문이
라는 논리를 전개시킨다.
빌닷(욥8,18,25장)-여인에게서 난 자는 무죄할 수 없다는 논리다.
소발(욥11,20,27:11-23)은 악한 자의 운명을 논한다.
이들에 대한 욥의 답변은 인간의 행동은 하나님과 상관없다는 것이며 하
나님은 의로운 자나 악한 자나 다 같이 벌을 주신다는 것이다.
헴펠은 '욥의 신학적인 문제'(1929)에서 태풍 가운데 주어진 야훼의 답
변은 욥기의 원래적인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폈으나 바움가트너는 '지혜문
헌'(1951)에서 야훼의 연설은 욥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서 절대 필요한 부
분이라고 반박하였다. 크렌쇼도 [구약의 지혜](1981)에서 태풍 속의 야훼
연설은 욥의 어리석음을 폭로시키며 자아중심적인 욥의 세계관을 깨뜨려 우
주는 욥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욥이 제기한 무죄한
자의 고통과 신의 공정성 문제가 결국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
셈이라고 한다. 욥의 친구들은 인과응보라는 원칙에 노예가 된 이성적인
신에 대한 종교적인 신념만 가졌을 뿐 그 신과의 인격적인 관계는 지니지
못했다고 본다. 그런데 야훼는 우주가 이성의 원칙에 의존된 것이 아니라
'신적인 자유(divine freedom)'로 운영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크렌쇼는 [구약성서의 신정론](1983)에서 이스라엘 사람들 역시 바빌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신이 세상을 공평하게 다스리는가 하는 문제로 고심했
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장일선은 [구약성서도 하나님의 말씀인가?](1984)에서 '욥의 판정승'을
다루었다. 권투 링에서 사탄에게 얻어맞아 비틀거리면서 불신과 신앙의 소
용돌이 속에서 방황하면서도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계시니"(욥
19:25)라고 외침으로써 드디어 하나님은 그에게 판정승을 내린 것이라고 본
것이다. 욥은 태풍 속에서 창조주를 만났을 때 그는 새로운 삶의 의미를 깨
닫게 된 것이다. 레베끄는 [욥과 그의 하나님](1970)에서 태풍 속의 신현현
은 욥으로 하여금 그의 피조물성을 깨닫게 하였으며 하나님의 뜻에 복종할
때 용서와 위로가 임했다고 본다. 그리하여 레베끄의 표현대로 침묵의 대화
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문제제기
1.작가는 욥을 진정 의인이라고 소개하고 있는가?
욥의 사람됨에 대한 소개부분은 욥의 경건성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반문이 함축되어있다고 본다. 저자는 생래적인 도덕적 순결성에 종교적 수
양까지 겸비한 욥이 경건성과 향유하고 있는 부를 인과관계로 보는 통념에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욥1:16) "욥의 행사가 다 이러하였더라."(1:5c)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네가 나를 격동케 하여 까닭없이
그를 치게 하였을지라도 그는 오히여 자기의순전을 지키지 않았더냐?"는 2
차 천상회의에서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사탄은 욥의 경건성은 환경의 소
산이라는 자기의 주장을 거듭 표명하고 있다. 이것은 작가의 말이다. 즉 작
가는 욥의 경건성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 후에 나
오는 욥의 저주를 통하여 이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흔히 그러한 습관적 행위를 신에 대한 복종으로 잘못 알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자위 행위요, 독백에 불과한 것이다. 습관적 반복행
위는 생명력에 의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목표가 없고 따라서 그 목표에 도
달하기 위한 성장과정도 물론 없다. 그저 고저장단도 없고 굴곡도 없는 마
치 날마다 편지 봉투에 소인을 찍는 것처럼 같은 일의 누적을 되풀이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 가리켜 욥의 평행 반복적 경건생활이라고 말하는
것다.
2.엘리후는 욥의 다른 세 친구와 같은 입장인가?
장일선은 같은 입장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오동옥은 "세 친구들과
는 달리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사고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 인물이다. 얼핏보
면 엘리후의 욥에 대한 논박의 내용이 세 친구의 그것과 별로 다를 바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세 친구의 논쟁의 근거가
윤리적인 차원을 넘지 못하고 있는 반면에 엘리후는 신앙의 깊은 차원에서
욥의 문제를 다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바로 여기에 이 책이 지니고 있는
내면적인 독창성과 특이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엘리후의 등장으로 논조의 스타일이 달라지고 있는데 그것 때문에 이 부
분이 후대의 가필이라는 논란이 있어 왔으나 결정적인 증거자료는 없다. 그
어떤 사본에서도 이 부분이 제외되어 있는 책은 하나도 없다.
M.르낭은 이 부분이 원 저작자에 의하여 만년에 증보된 것이라고 주장하
기도 한다. 지금까지 욥과 세친국들과의 변론 과정은 도입 부분에 불과한
것이며 그들의 변론이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데 반하여 엘리후의 등장 부분
은 그 문제의 해결을 모색하기 위하여 비추는 탐조등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
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