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후의 講話에 대한 논의에는 몇가지가 있다. 엘리후의 강화는 전체 맥락에 적합하지 않다는 견해, 엘리후의 강화는 문제의 바른 해결을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말하게 한 것이라는 견해, 엘리후의 강화는 문제의 해결을 제시하고 있다는 견해, 엘리후는 제기된 문제에 해결에 대한 특정한 측면을 보여주고 있다는 견해 등 그 견해가 多樣하다.
Ⅰ. 엘리후의 강화는 전체 맥락에 적합하지 않다는 견해
Hävernick, Stähelin, hengstenberg, Delitzsch, Vaihinger, Budde 등의 학자들은 엘리후의 강화가 삽입된 것으로 판단한다. 이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엘리후의 강화가 전체 맥락에는 적합치 않다고 지적하려 한다. 이들은 엘리후는 이미 제기된 친구들의 주장을 반복하고 있으며, 엘리후는 하나님의 말씀을 미리 말하고 있고, 제기된 문제에 대해 엘리후가 제시한 해결책은 욥기서 전체의 경향과 조화스럽지 않으며, 또한 배치된다고 한다.
엘리바스 등 욥의 친구들은 하나님은 義로우시므로, 만약 하나님이 하나님이 한 인간에게 특별한 고난을 주셨다면 반드시 그 인간은 특별한 罪를 지었기 때문이며 욥 또한 罪를 지었다고 지적한다( 4:8; 22:5이하). 엘리후도 이에 대해 날카롭게 힐난한다. 특히 34:7에서 이런 면이 드러나지만 다른 친구들과는 달리 엘리후는 욥의 죄는 自身의 苦難에 대한 怨望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엘리후는 욥의 고난에 대해 욥이 범죄하였으나 그것은 일반적인 인간과 똑같이 의인도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33:13이하, 리델보스의 견해). 엘리후는 淨化가 苦難의 目的이라고 보고 있다(33:13-33;36:8-16). 엘리후는 고난에서 단지 하나님의 공의로움만을 보지 않고, 하나님의 사역하는 사랑을 보고 있다.
엘리후는 하나님의 말씀을 미리 말하고 있어서 전체 맥락에 적합하지 않다고 하는 주장은 34장과 36:22-37:24이 주로 주목된다. 대체로 후에 언급되어야 할 것을 이 부분은 미리 말하는 것으로서 전체 맥락에 그 흐름을 흐트러뜨리고 있어서 이 엘리후의 강화는 어떤 後代의 記者에 의해 욥기서 전체를 앞에다 두고서 기록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여기에서 그 흐른이 흐트러진다면, 어떤 의도에서 이 엘리후 강화의 집필자가 이미 기록한 부분을 다시 반복했겠는가 ?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후의 강화의 頂点에 명백하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여호와의 예비자로서 엘리후가 등장된 것이다. 여호와의 등장을 위한 예비자로서의 엘리후는 폭풍에 대한 서술에서 특히 드러난다(38:1).
제기된 문제에 대해 엘리후가 제시한 해결책은 욥기서 전체의 경향과 조화스럽지 않으며, 또한 배치된다고 하는 견해는 Eissfedlt와 Delitzsch가 주장한다. Eissfedlt는 "고통을 目的論的으로 설명하고 있는 엘리후의 강화는 38:1-42:6에 나타나는 내용, 즉 苦難의 문제에 대해 이론적인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저자의 의도와 즉각 모순이 된다고 결론내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Delitzsch는 "엘리후는 욥의 고난을 죄인의 징벌이라는 관점에서 보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엘리후는 욥기서의 나머지 부분과는 달리 욥의 죄가 욥의 고난의 原因이라는 입장을 취한다"고 한다.
1:8;2:3;42:8에서 욥에 대한 판단 방식과 엘리후가 말한 주장(34:7이하;33:27;36:9) 사이에는 상치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38:2 등은 다만 욥의 발언의 결과이므로 엘리후의 강화가 진짜가 아니라고 설명한다 해서 난점이 해소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序文에서 행한 설명 외에도 죄를 苦難의 원인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가능성은 부정할 수는 없다. Delitzsch가 첫 저자는 욥의 고난에서 죄와 벌 또는 징계를 완전히 서로 연결시키고 있다고 하는 주장은 1:8과 42:6 간에 일견 드러나는 듯한 모순은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서문이 완전한 해답을 주지 못하며 또한 욥의 고통에서 죄는 한 요인이라는 것을 가리켜 준다. 또한 서문이외의 부분에서 욥에 대한 고난의 설명은 나타나지 않는다. 엘리후의 강화도 최후의 설명은 하지 않는다. 엘리후는 바울의 다음의 탄성과 같이 義人의 苦難을 설명하고자 한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하리로다"(롬 11:33). 그러나 이것으로 엘리후는 모든 질문들을 해결하지 못한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나타나신 것이다. 여호와는 인간이 하나님의 행위를 책함을 힐난하신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인간이 하나님을 순종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방식을 찾아보려 하는 것을 정죄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경우 인간은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을 알게 된다.
Ⅱ. 엘리후의 강화는 문제의 바른 해결을 알지 못하는 개입이라는 견해
이런 견해들의 전체적인 것은 대체로 엘리후의 말이 욥의 시험을 더 强化시킨다는 것이다. Budde는 엘리후가 소개되는 방식(32:1-5)이 이 견해에 맞지 않으며 욥의 말이나 친구들의 견해를 거부하는 관점을 엘리후가 취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엘리후는 자신이 젊은 사람이지만 나이 든 사람보다 더 나은 생각을 갖고 있으며 그것은 거만에 의한 것이 아님을 변명한다. 엘리후는 하나님의 영이 그러한 생각을 주셨음을(32:8;33:4) 말하고 있다. 오히려 엘리후는 문제의 해결에 상당히 접근해 있다.
Ⅲ. 엘리후의 강화는 문제의 해결을 제시하고 잇다는 견해
Cornill은 "성경 전체에서 그 사고의 깊이와 의미의 고상함에 있어 엘리후의 강화에 비할 부분은 적다. 솔직히 엘리후의 강화는 욥기의 절정이며 시인이 자신의 관점에서 볼 때 유일하게 문제의 해결을 제공해 주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견해도 약간의 반대를 받는다. Budde는 욥은 확실히 경건하지만, 이러한 경건 안에도 역시 죄가 잠자고 있는데 특히 욥에게 있어서 이것은 교만이다. 이 잠든 죄에서부터 하나님은 경건한 자를 해방시키기를 원하는 것이다. 욥의 경건에 대한 물음을 먼저 제기하고 이에 의해 사탄의 의혹을 자극한 이는 하나님이시다. 즉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취하셨다고 지적한다. 하나님께서는 그 잠든 죄를 행위로 드러내시려 하셨고 그로서 그 죄를 의식하게 하여 그런 방법으로 욥을 죄로부터 정결케 하시려 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 고난은 정화에 사용되는 것이다. 시인이 욥이 어떻게 범죄했는가를 분명히 밝혀내고 있다는 사실과 욥의 겸손과 그에 따른 고난의 중단으로 시를 끝내고 있다는 사실에 Budde는 자신의 입장을 세우고 있다.
이 견해는 서문의 내용과 배치되며 42:7이하와 배치되고 여호와의 말씀의 중요성이 축소되어 진다. Budde는 하나님과 사탄간의 논쟁에 공정한 평가를 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과 사탄 사이의 논쟁 즉 싸움이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다(2:3). 그리고 만일 욥의 고난의 가장 큰 목적이 그의 죄를 드러내려는 것이라할 때 그를 마지막에 칭찬하고 있음은 매우 기묘한 것이다. 또한 Budde등의 해석에서 여호와는 사실상 새로운 아무 것도 말씀하시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여호와의 말씀의 흐름은 인간이 다가갈 수 없는 어떤 것이기에 이 견해는 무리한 해석이다.
Ⅳ. 엘리후는 제기된 문제의 해결에 대한 특정한
측면을 보여주고 있다는 견해
A. 苦難을 중재자의 대리적 고난으로 보는 것
Gelderen은 "엘리후의 강화의 핵심점은 33:23,24에 있으며 주로 이 말(내가 대속물로 얻었다)때문에 엘리후의 강화는 욥기서 전체에 있어 불가결한 것이다."라고 한다. 그는 욥이 33:23,24에 의해 자신의 대속자의 대리적 고난을 제시받았고, 은혜를 앎으로 고난의 정당성을 배울 수 있게 되었다는 견해이다. 더 나아가 그는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계셔서 세상을 자신과 화해시키셨다."고하지만, 이에 의해 욥이 주님의 대리적인 고난을 제시받았다고 하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엘리후의 강화 전체에 있어 33:23 이하의 의미에 대하여, 엘리후는 징계받는 자는 고난 안에서 회개와 인내의 길을 통해서 다시 하나님에 의해 은혜로 다시 용납된다고 말하고 있다.
B.정화과정으로 취급되는 고난
1) 엘리후 강화의 내용
엘리후는 첫 강화(32-33장)에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꿈이나 또는 심각한 질병을 통해 말씀하신다고 한다. 이 하나님의 말씀의 의도는 "범죄로부터 인간을 떼어놓기 위해서"(17절), "그를 정화시키기 위해"(27절)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가 있음을 말하고 있으며, 이와 관련해서 고난을 당하는 사람이 바로 큰 죄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결론짓는다. 그러나 고난을 당하는 사람은 자신이 고난을 피할만큼 선하지 못함과 또 반대로 고통을 초래한 것은 항상 자신의 죄임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발적인 복종과 회개를 통해서만 고난으로부터 구원받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고난을 통해 정화되어야만 하는 죄를 17절은 특별히 驕慢이라고 한다. 이것은 바로 욥이 범한 죄임을 가리키는 것이다.
둘째 강화(34장)에서 욥이 하나님을 원망한 것을 신랄하게 비난한다. 엘리후는 이 주장을 강력한 논증을 제시함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전지하심, 사랑 또한 거만한 자를 고통에 처하게 하시는 사실을 통해 제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강화의 의도는 욥으로 하여금 자신의 원망의 죄악됨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세번째 강화(35장)은 경건은 하나님이 보상해야할 만큼 하나님께 드리는 그 무엇이 아니며 그렇기에 욥은 아무 것도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네번째 강화(36-37장)는 다시 요약하고 있으며 정화를 위한 고난과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신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손상시켜서는 안됨을 부연한다.
즉 엘리후는 고난의 목적이 정화에 있으며, 이와 함께 그는 인이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의 심해서는 안됨을 보여줌으로 욥 또한 이러한 정화가 필요함을 지적하고 있다.
2) 욥기서 나머지 부분의 내용
① 일반적인 언급
욥기서는 의인의 고난, 더 구체적으로는 고난받는 의인을 다루고 있는 데,이 주제에 4개의 질문이 차례로 제기되고 있다. 즉, 의인의 고난이 있는가? 왜 의인은 고난을 받는가? 의인은 어떻게 행동했는가? 어떻게 행동해야만 하는가?라는 것들이다. 그러나 이들 중 하나의 해답을 얻는다손 치더라도 이것이 욥기서의 해결로는 들어맞지 않는다. 또한 각 물음에 대해 하나 이상의 대답이 있을 수도 있다.
욥기서가 전체적으로 통일되어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한다면 여러 부분이 진짜가 아니라고 설명할 수 밖에 없게도 될 것이다. 그렇지만 욥기서의 부분적인 역사적 성격을 주목해야만 한다. Keil은 욥기서를 엄격한 역사적 진리로도 아니고, 또는 시적인 虛構로 보아서도 안되며, 歷史的인 傳承과 詩的인 添加를 엄격히 분리시킬 수 없다고 하였다.
② 엘리후의 강화에 의해 욥기서의 내용은 한층 뚜렷히 규정된다.
저자는 의인도 고난을 당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드러낸다. 그리고 욥의 고난은 사탄의 비난을 꺾고 하나님의 영광을 떨치기 위해서 필요했음을 보여 준다. 저자는 의인이 고난을 통해 부닥쳤던 엄청난 투쟁을 생생하고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으며 신앙의 능력을 보여 준다.
③ 엘리후의 강화의 내용과 욥기서 전체 내용과의 관계
욥기서 전체에 대한 통일적인 해석을 엘리후의 강화가 방해한다고 할 수 없으며, 욥기서를 직선으로 비유할 때 엘리후의 강화의 위치가 그 직선의 한 부분으로 정의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욥기서를 다이야몬드에 비유하고 엘리후의 강화를 그 한 측면을 형성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엘리후의 강화가 어느 정도 필수불가결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데 그것은 정화의 고난이 여기서만 이론적으로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며, 그 강화가 욥을 어떤 감정 상태로 이끌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이 행위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그에게 말씀하실 수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의 선한 감화력을 받아들이도록 준비시키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