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갈의 액소도스
구 절 : 창16:1-14 마27:32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생산치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요 이름은 하갈이라"(창 16 : 1)
본문을 히브리어로 읽으면 창 16:1은 사래로 시작하여 하갈로 끝난다.
그 사이에 아브람이 나온다. 곧 오늘의 본문의 서론은 아브람이라는 남자
를 사이에 둔 두 여인의 이야기라는 형식을 지니고 있다. 여기에서 성서
독자들은 이런 대조를 읽게 된다.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두 여인이 서로
대결하고 있는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한편은 자유인이요, 결혼한 여인이
며, 부유한 사람이다. 다른 한편은 노예요, 처녀이며, 가난한 여인이다.
한편은 이스라엘인의 조상이요, 다른 한 편은 이집트 족속의 딸이다. 이
러한 두 여인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대립 관계! 하갈 이야기의 머리말은
이러한 긴장을 우리에게 소개한다.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치 아니하셨으니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
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이집트 사람 하갈을 가져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
나안 땅에 거한지 십년 후이었더라 "(창 16 : 2 - 3)
사래가 아브람에게 말한다.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
니". 전통적으로 성서 학자들은 여기에서 사래의 불임성(불임성) 묘사를
문제 삼는다. 아브람에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창 12 :
2a)고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왜 정작 그같은 약속의 구체적인 실현 매개체인
사래는 불임케 하셨는가 하는 하나의 역설이 그들의 관심의 촛점이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관심은 약속 성취가 지연되자 이에 저항하는 사래의
몸짓에 있다.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다"고 말하면서도,
자신의 몸종 하갈을 아브람에게 동침시켜 자기들의 자녀를 만들고자 하는
사래의 당돌함! 이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맞선 여인의 모습이다. 사
래의 생각이 당대의 관습을 따른 것이냐 아니냐 하는 질문은 본문이 제기하
는 문제의 촛점이 아니다.
본문의 촛점은 사래의 당당함이다. 본문 16 :2a의 후반부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는 이렇게
번역되어야 마땅하다.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 내가 혹시 그녀로
인하여 세워지게 될까 하노라 ( I shall be built up from her : bo-na
el-siphati ulay ibaneh mimmenna )". 이 말은 하갈을 이용하여 자기의 모
자람을 채우겠다는 소리이다! 노예의 몸을 이용하여 자신의 모자람이, 부
족함이 "채워지게" 하겠다는 말이다.
이러한 사래의 명령에 하갈은 도구로 이용된다. 주인의 부족함을 채워주
는, 아니 주인의 체면을 세워주는 도구로 이용된다. 하갈은 여성이었지만
자신의 성(성 :sexuality)에 대해서 아무런 권한도 행사할 수 없다. 본문
의 서론에 보였던 한 남자를 사이에 둔 두 여인 사이의 대조가 노예를 이용
하는 주인의 이야기로, 힘없는 자를 학대하는 힘있는 자의 이야기로 발전한
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집트 여인을 박대하는 이스라엘 여인의 이야기로
발전한다(이스라엘을 학대하는 이집트인이 아니다).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잉태하매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그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
래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 (창 16 : 4 - 6)
본문의 전개에서 흥미로운 것은 아브람이 대단히 피동적이라는 사실이다.
아브람은 다만 사래의 말에 순종할 뿐이다. 하갈이 아기를 배게 된다. 그
러나 저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그 여주인을 멸시하였다"고 본문은 증
언한다. 그러나 여기에 본문 번역상의 문제가 있다. 우리말 개역 성경에
는 하갈이 주어처럼 되어 있으나, 히브리어 본문 자체는 꼭 그렇지가 않다.
"그녀의 여주인이 그녀의 눈에 하찮아졌다(watequl gebitah be`eneha)"(창
16:4b).
즉 하갈이 능동적으로 사래를 멸시했다기 보다는 하갈의 눈에 그녀의 여
주인이 "작게 비쳐졌다"(qalal)는 보도이다. 이것은 차라리 여인이 지닐
수 있는 본능적인 몸짓(natural maternal feeling)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렇지만 하갈의 이러한 본능적인 태도가 여주인 사래의 분노를 사게 된다.
아브람의 묵인 속에 사래가 하갈을 학대한다. 그랬더니 하갈이 사래의 얼
굴을 피해서 도망가게 된다.
전통적인 시각에서 볼 때, 본문 창 16: 4 - 6의 사건은 "아기를 배지 못
하는 여인"(barren woman)과 "아이를 쑥쑥 잘 낳는 여인"(fertile woman)
사이의 긴장과 대립을 소개한다. 구약성서에는 이러한 긴장과 대립이 여러
군데 나온다(예를 들면 창 30장, 삼상 1장 등). 그리고 모든 경우, 후자가
전자를 학대하는 이야기가 하나님의 구속 역사의 동기(motive)로 소개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오늘의 본문을 읽을 수도 있다.
즉 지금까지는 힘이 없던 노예가 어느 날 주인의 씨를 배게 되므로 하로
아침에 자신의 처지가 달라진 양 주인에게 대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
이 아기를 배지 못하여 한맺힌 주인의 분노를 사게 되어, 결국은 자기가 살
던 집을 떠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모든 문제의 원인
은 하갈에게 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본문 16:4b의 번역에 주
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녀의 여주인이 그녀의 눈에 하찮아졌다!" 자기가 비록 하녀이지만,
주인의 아기를 배게 되니 아기를 못낳는 여주인이 작아져 보였다. 이것은
인간의 본능을, 아기를 배는 여인의 자연스러운 반응을 보도하는 모습이다.
그렇다면 본문에 등장하는 여인 하갈은 아기를 밸 수 있기에, 아니 아기를
밴 까닭에 고난받는 여인이 되고 만다. 하갈은 부와 지위와 처지에서만 힘
없는 여인으로 그치지 않는다.
성서 기자는 오늘의 본문에서 하갈을 힘 없는 여인에서 이용당하는 여인
으로, 이용당하는 여인에서 고통받는 여인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녀에게
잘못이 있다면, 그녀가 자신이 속한 사회 구조에, 그 구조의 힘의 윤리에
순응했다는 것 밖에 없다. 이러한 문제 의식에서 본문 16 : 7 - 14을 읽을
때, 사래의 집을 뛰쳐 나가는 하갈의 엑소도스는 주어진 사회에서 약자이기
에 천대받는 사람들의 원통함을 고발하는 메시지가 된다. 그리고 그같은
하갈의 엑소도스를 지키시는 하나님의 연민에서, 본문은 억울한 민중들의
하소연을 들으시는 하나님을 증언하는 메시지가 된다. 그렇다면 오늘의 본
문 창세기 16장은 같은 인간이면서도 인간을 다스릴 수 있는 부와 지위와
능력을 가진 자들에 대한 하나님 편에서의 경고이다.
그렇지만 성서 본문의 고발이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고 있음을 지나쳐
서는 안된다. 우리가 오늘의 본문 주석에서 놓쳐서는 안되는 것 - 그것은
하갈이 자신의 성(성 :sexuality)마저도 강자의 수단으로 이용되는 약자로
만 묘사되기에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라. 이것
은 차라리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1 : 28)는 창조자 하나님
의 창조의 순리를 잘 따랐던 까닭에 당하는 수난이다.
하나님의 창조의 법칙을 순응했던 까닭에 당해야 했던 수난! 그것이 오
늘의 본문에서 독자들이 만나야 될 수수께끼이다. 더우기 오늘 본문은 히
브리인이 가나안 땅에서 이집트인을 학대하는 이야기다. 이때 히브리인은
"아기를 배지 못하는" 불임의 주인공이다. 반면 이집트인에게는 아기를 배
는 능력이 있다.
이 이집트인의 눈에 히브리인이 하찮게 보였다. 히브리인이 이집트인을
학대하게 된다. 급기야 이집트인이 광야(수르 광야)로 도망간다. 하갈의
엑소도스가, 이집트인의 엑소도스가 가나안 땅에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놀랍게도 오늘 창 16장의 본문의 이런 구조는 출애굽기에 나오는 이스라엘
의 엑소도스와 날카로운 대조를 이룬다. 거기에 보면 이제 히브리 여인은
더이상 "아기를 배지 못하는" 불임의 여성들이 아니다.
출 1장의 히브리 여인들 - 그들은 고센 땅을 온통 히브리 자녀들로 채워
놓을 것 같은 생명력을 지닌 여인이다. 이런 생명력이 이집트인의 눈에 두
려운 존재로 비쳐진다. 이제 이집트인이 히브리인을 학대한다. 히브리인
이 바로왕의 낯을 피해서 광야로, 수르 광야로 도망가게 된다(출 14 : 5a).
무엇을 말하는가? 창 16장과 출애굽기의 이 대조, 이 평행 기사에서, 우
리는 오늘의 강자가 내일의 약자로, 오늘의 약자가 내일의 강자로 변신할
수 있다는 성서 편집자들의 숨은 시각을 발견한다.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 곁 곧 술 길 샘물 곁에서 그를 만나 가로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 네 여주인에게
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 네가 네 자손으로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 네가 잉태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창 16: 7 - 12)
본문은 하갈의 엑소도스, 하갈의 탈출이다. 수르로 가는 광야 길의 어느
샘터에서 하갈은 여호와의 사자를 만난다. 아니 샘터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기다리고 계셨다가 그곳에 이른 하갈을 만나고 있다고 보고 싶다. 인간이
하나님을 만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연민을 가지시고, 도망자 하갈을 만
나기를 기다리고 계셨다! 하나님이 축복의 기득권자 이스라엘 여인을 기다
리고 계셨던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샘터에서 기다리고 있던 대상 - 그녀는 축복의 기득권에서 제외
된 것 같았던 이방여인이었다. 하나님이 이방 여인, 이집트 사람을 기다리
고 만나셨다니! 여기에 성서 기자의 예언자적 호소가 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지, 하나님이 이스라엘 만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민족적 배타주의 속에 가두어 두지 말라는 것이다.
이때 하나님의 사자가 하갈에게 퍼붓는 질문과 명령, 약속에 귀를 기울이
라!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v.8a). 이
것이 질문이다. 하갈로 하여금 자신의 정체성(identity)을 인식케 하는 질
문이다.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v.9). 이것은
명령이다. "돌아가라"(subi)와 "너 스스로를 사래의 수하에 두라"(wehit
`anni)로 읽혀져야 될 명령이다. "네가 아들을 낳으리라.
그 이름을 이스마엘 - 하나님이 들으셨다 - 로 하라"(v.11 - 12). 이것
은 약속이다. 자녀 탄생 예고의 양식으로 전달된 축복의 선언이다. v.8a
의 질문에 하갈은 대답한다. "나는 나의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합니
다." - 그러나 이에 대한 하나님의 대꾸.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
하에 복종하라"(v.9). 고난받는 현장으로 다시 가라는 명령이다! 아니 그
고난의 구조 속에서 살라는 명령이다! 이해못할 하나님의 명령이다. 무슨
뜻인가? 고난받는 현장으로 다시 돌아가라니? 이것은 무슨 소리일까? 하
갈이 이제 곧 아기를 낳을 임신부이기에, 태어날 생명을 위해서 돌아가라는
명령인가?
여기에서 우리는 v.9의 히브리어 본문에 수록된 히브리어 동서, 특별히
v.9b에 "복종하라"고 옮겨져 있는 동사의 형태에 주위를 기울이고자 한다.
우리말에 "복종하라"고 되어 있는 히브리어는 "낮아지다, 천해지다"(ana)라
는 동사의 재귀형(hithpael)으로 쓰여져 있는 명령형이다. 즉 직역하면
"너 스스로를 낮아지게 하라"(to humble yourself)이다. 곧 히브리어 본문
의 의미는 단순한 복종, 굴욕이 아닌, 스스로를 남의 수하에 두게 하는 자
원하는 복종이다. 다시 말해 하갈이 스스로를 사래의 손 밑에 낮아지게 하
라는 명령인 것이다. v.9a의 "돌아가라"는 명령이 v.9b의 이같은 해석으
로, 하갈로 하여금 사래의 집으로 돌아가 더불어 같이 살도록 노력하라는
말씀으로 들리게 된다. 그리고 이런 명령의 컨텍스트에서 후손 탄생의 약
속이 선포(vv.10, 11 - 12)되고 있는 것이다.
구약성서를 읽을 때에 "돌아가라"(sub)는 명령은 특히 예언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용어이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라". 이는 곧 하나님과 더불어의
삶을, 하나님의 뜻과의 공존의 삶을 부르짖었던 예언자들의 사상적 어조였
다. 오늘의 본문 "하갈아 돌아가라"는 어려운 과제이긴 해도 하갈로 대표
되는 그 어떤 집단과 사래로 대표되는 그 어떤 집단 사이의 공존을, "더불
어 사는 삶"을 촉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야 한다.
이 "돌아가라"는 명령이 "(너 스스로를) 사래의 수하에서 낮아지게 하라"
는 다음의 명령에 의해서 보충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무엇
보다도 이 말을 듣는 독자들이 이스라엘 사람인 것을 생각해야 한다. 그러
므로 이 말은 이집트인으로 이스라엘 사회에 들어가 살라고 하기 이전에,
이 글을 읽는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로 이집트인들과 더불어 함께 살라는 하
나님의 간접 명령인 것이다.
하갈을 버려서는 안된다. 하갈과 사래는 더불어, 같이 살아야 되는 것이
다. 야웨 하나님은 인류의 공존을 희망하시는 분이시다. 이스라엘의 꿈꾸
던 메시야 왕국이라는 것은 이런 공존사회(공존사회)의 구현이다. 야웨의
통치 아래 모든 백성이 모여 사는 것. 그때에 야웨께서는 "나의 백성 이집
트여, 나의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산업 이스라엘이여..."라고 말씀하
신다(사 19: 24 - 25).
우리 사회는 개혁을 바라고 있다. 그러나 그 개혁이 화해(화해)를 부정
하는 성격의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더불어 살기를, 서로 같이 살기(상생)
를 포기하는 성격의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더불어 살기 운동" - 잘 살기
가 아니라 "더불어 살기 운동!" 진통하는 오늘의 대학과 노사 현장에, 내
가 아니면 안된다는 정치권에, 문화, 경제, 사회 일반에, 그리고 정통과 진
보로, 복음주의와 개방주의로 갈리운 교회에, 그리고 나아가 민족과 민족,
이익과 이익으로 갈리운 이 지구 공동체에, 종교에 이런 "더불어 살라"는
야웨의 명령이 들려야 한다.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
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이러므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며 그것이 기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더라"(창 16: 13 - 14)
질문, 명령, 축복 선언에 이어 하갈의 반응이 나온다. 하갈이 하나님의
이름을 짓는다. "당신은 감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나는 여기서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뵈었읍니다". 하갈의 이 표현은 "나같은 사람까
지도 당신이 보고 계셨다니, 나같이 연약하고, 이용당하고, 고통받았던 처
지의 여인까지도 당신이 보고계셨다니..."라는 감탄사로 들린다. "나는 당
신이 족장들, 히브리인들, 부한 사람들, 편한 사람들만 보고 계신줄 알았더
니, 당신은 노예, 이집트인, 고통당하는 사람을 보고 계셨군요"라는 감탄사
로 들린다.
성서 기자는 하갈의 이런 고백을 통해서 하나님이 연약한 사람들, 고통당
하는 처지의 사람들, 비이스라엘인을 결코 버리시지 않는 분임을 깨닫게 만
든다. 하나님의 보편성, 하나님의 자비성, 하나님의 연민이 하갈의 고백을
통해서 우리에게 들리고 있는 것이다. 힘있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그런 분
이 아니셨음을 깨닫게 하는 증언이다. 하나님은 익명으로, 소리없이, 그러
나 줄기차게 하갈을 보고, 감찰하고 계셨더라는 말이다. 하갈이 그런 하나
님을 지금 만나고 있는 것이다.
광야의 이름모를 샘에서, 고통당하는 자의 여정에서 발견한 어느 샘에서,
하갈은 이제 눈을 뜨게 된다. 지금까지 그녀의 눈에는, 누르는 자 대(대)
눌리는 자만 보였을지도 모른다. 임신한 여인 대(대) 아기없는 여인만 보
였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이집트인인 자기를 보고 계셨던, 보
고 계시는, 그리고 앞으로도 보고 계실 하나님을 보고 있다! 이 고통의 자
리에서 만난 하나님 때문에, 이름모를 샘에 이름이 지어진다.
이 샘은 "브엘라해로이"다! 나를 돌보시는 생존자(생존자)의 우물이다!
이스라엘인들로 이집트인을 돌보시는 하나님을 이해시키고자 하는 이 성서
기자의 도전!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행진이 가는 그 마지막 고
난의 길(via dololoza)을 구레네 사람 시몬이 감당하게 되었다(마 27: 32)
는 복음서 기자의 증언에 대한 전조이다. 이방인이 예수의 십자가를 지고
갈보리의 언덕을 올라갔다는 것, 그것은 분명 탈민족주의(탈민족주의), 탈
종교주의(탈종교주의)를 부르짖었던 고대 이스라엘 성서 기자의 당찬 열매
이다. 야웨는 우리 모두의 하나님이셨고,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이실 것이
다. 야웨는 우리 모두의 목소리를 들으시는 분인 것이다. 야웨를 야웨되
게 하라!
"하갈이 아브람의 아들을 낳으매 아브람이 하갈의 그 낳은 아들을 이름하
여 이스마엘이라 하였더라..."(vv. 15 - 16)
본문은 에필로그이다. 필체는 사뭇 객관적이다. 또는 편집자(사제문서
기자)가 즐겨 사용하는 족보 서술의 형식을 띤 이스마엘 탄생의 보도이다.
본문 v.15a를 히브리어로 읽으면 "하갈이 아브람에게 아들을 낳아주었다"
(wateled hagar le'abram ben)이다. 하갈이 사래에게 아들을 낳아주었다고
쓰고 있지 않음에 주목하라.
물론 이런 서술은 그것이 배경으로 하는 가부장적 사회질서를 반영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의 관심은 이 v.15a가 v.2a에 표현된 사래의 기대를
뒤엎는 편집사가의 시각에 있다. 사래는 하갈의 몸을 빌려 자신의 처지를
세우고자 했지만, 하갈은 아브람에게 - 사래가 아니다! - 아들을 낳아주고
있다. 또 그것은 하갈이 야웨의 명령을 따라서 사래의 집으로 다시 돌아갔
음을 독자들로 하여금 깨닫게 한다.
그러기에 그녀는 아브람에게 아들을 낳아 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 에
필로그는 편집자의 어떤 숨은 의도를 드러낸다. 즉 이 에필로그로 이야기
의 처음(v.2)과 이야기의 말미(vv. 15 - 16) 사이에 어떤 대조가 강조된다.
그리고 그 대조 속에 야웨의 하시는 일에 인간의 궁리로 맞서려 한 한 신앙
인의 어설픈 시도가 분쇄되고, 잊혀져 있었던, 그러나 줄곧 야웨의 식구였
던 한 여인의 증언과 행동을 통해서, 야웨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가 확연
히 드러난다. 야웨께 대한 어느 이집트 여인의 순종으로 이스마엘 족속(그
도 아브람의 후손이다!)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