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의 웃음과 하갈의 울음
: 창 21:1-21
왕 대 일 |
감신대교수/구약학 |
구약성서 창세기의 아브라함 설화(창 12:1-25:18)에는 두 명의 여인들이 서로 얽히고 설키면서 벌이는 갈등 이야기가 있다. 창 16장과 21장에 나오는 사라와 하갈이 바로 그 장본인들이다. 우리는 이미 "하갈의 엑소도스"라는 제목으로 창 16장 본문이 개진하는 사래와 하갈의 이야기를, 아니 사래와 하갈의 갈등을 화해의 구도로 뒤집어 놓으시는 하나님이 벌이시는 상생(相生)의 이야기를 살펴 보았다. 이⧚ 창21장을 살펴 보아야 할 차례이다. "하갈아 돌아가라","네 스스로를 사래의 수하에 두라"로 읽혀짐에 강조를 두었던 창⧚16장의 텍스트가 어떻게 아브람의 가정 속에 실현되고 있는가?
ĀȀ 창 21장 본문은 우선 사라의 웃음으로, 아니 사라를 웃게 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로 시작한다(창 21:1-7). 그러나 창 21장 본문은 이삭이 탄생하고 난 후, 이삭과 이스마엘이 차지해야 될 자리 매김이 문제가 되어, 사라가 하갈을 "내어 쫓아 버리는" 한 가정의 균열로 치닫는다(창 21:8-21). 하나님은 사라를 웃게 하셨건만 사라는 하갈을 울게 하였다는 것이다. 사라의 웃음과 하갈의 울음! 이것이 우리가 창 21장 본문에서 들어야 될 소리이다.
전통적으로 성서학자들은 사라의 웃음으로 대변되는 창21장 본문의 증언(창 21:1-7)에서 불가능한 약속을 현실로 실현시키시는 하나님이 벌이시는 구속 역사의 파라독스를 듣는 데에 치중하였다. 사라의 웃음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구속사의 절정을 보았던 것이다. 또한 최근의 여성 신학의 맥락에서 구약의 본문을 대하는 자들은 하갈의 울음으로 표현되는 창21장 본문의 증언(창 21:8-21)에서 힘있는 처지의 여인이 그렇지 못한 형편의 여인을 쫓아 버리는 폭력의 현장을 고발하는 데에 치중하였다. 이때 하갈은 억압받는 자의 상징이다. 국적(nationality), 계급(class), 성(sex)에서 차별받고 쫓겨나는 희생자의 대표자이다. 하⧚님이 그런 하갈의 울음을 들으셨다는 것은 억울하게 억압받는 자들을 돌보시는 하나님 사랑의 극치이다. 전통적인 이 두 개의 해석은 우리가 구속사 신학과 해방 신학이라고 부르는 두 신학적 조류의 흐름을 반영하고 있다. 두 개의 해석 모두 본문의 정당성(validity)을 각각 다른 해석자의 정황에서 들어보고자 했던 해석학적 시도들이다. 그러나 두 개의 해석 모두 어느 한편만의 정당성을, 즉 사라의 웃음의 의미든지, 하갈의 울음의 의미든지 간에, 어느 한편의 목소리만을 듣고 말았다는 성서해석의 편당성을 보인다. 이러한 성서 해석의 편당성은 성서 해석자의 상황이 본문을 읽게 됨으로 일어난 결과이다. 성서 해석자의 어떤 상황이 둘 중의 어느 한 목소리만을 듣도록 성서해석의 방향을 틀어 놓았다. 여⧚에 우리의 질문이 있다. 사라의 웃음만이 아닌, 하갈의 울음만도 아닌, 사라의 웃음과 하갈의 울음 모두를 들어볼 수는 없을까? 창 21장 본문이 이 두 소리를 모두 듣도록 사라의 웃음과 하갈의 울음을 하나로 묶어 놓았다면,이 둘은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 것일까? 사라의 웃음과 하갈의 울음을 모두 함께 듣도록 요구하는 성서 편집자의 시각은 어떤 것일까? 필자의 주석은 여기에 관심한다.
우선 사라의 웃음을 먼저 들어보자. 사라의 웃음의 의미가 무엇인가? 사라의 웃음은 앞에서 지적 했듯이 창 21:1-7에 각인 되어 나타난다. 유형상 이 본문은 "이삭의 탄생을 보도하는 본문이다. 이삭의 탄생 보도문 속에 사라의 웃음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이삭의 탄생 보도 (창 21:1-7)
I. 아이의 탄생 : 원인 vv. 1-2
A. 아이 탄생 사건의 주체 : 야웨 v. 1
1. 야웨께서 사라를 "방문하셨다" v. 1a
2. 야웨께서 사라에게 "행하셨다" v. 1b
B. 사라의 임신과 출산 v. 2
1. 임신, 출산 보도 : 사라가 아들을 낳았다! v. 2a
2. 출산의 때에 관한 부연 설명 v. 2b
II. 아브라함과 사라의 반응 : 결과 vv. 3-7
A.아브라함의 행동 vv. 3-5
1.아브라함의 뒷처리 vv. 3-4
a. 아이의 이름을 이삭이라고 부르다 v. 3
b. 이삭에게 할례를 행하다 v. 4
2. 아브라함의 나이에 대한 서술
(이때 아브라함은 백 세의 노인이었다) v. 5
B.사라의 반응 vv. 6-7
1. 사라의 웃음 v. 6
a. 하나님께서 내게 웃음을 주셨다 v. 6a
b. 모두가 나와 함께 웃을 것이다 v. 6b
2. 사라의 자랑 v. 7
a. 수사학적 질문 : 사라가 들었던 조롱 v. 7a
b. 사라의 반박 : "내가 아들을 낳았다!" v. 7b
본문(창 21: 1 - 7)은 이삭의 탄생보도이다. 일곱절에 걸친 짤막한 기사(記事)이다. 이 기사 속에 이스라엘 족장사의 가장 핵심적인 사건(후손 탄생의 성취)인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 탄생의 보도가 소개된다. 본문은 주제에 따라 "아이의 탄생보도"(vv.1-2)와 거기에 따른 "부모(아브라함과 사라)의 반응"(vv.3-7)을 보도하는 단위로 나뉘어진다. "아이의 탄생보도"(vv.1-2)가 원인을 서술한다면 "아브라함과 사라가 벌이고 있는 몸짓, 몸놀림"(vv.3-7)은 그에 따른 결과를 보도한다. 즉 본문의 구성은 "원인 - 결과"(cause - effect)의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 이 구성 속에 "야웨께서 행하신 일"(v.1)과 "사라의 임신과 출산"(v.2)이 "아브라함의 행동"(vv.3-5)과 "사라의 반응"(vv.6 -7)을 보도하게 되는 동기의 역할을 한다. 행위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문법적으로 살필 때에 이러한 배열은 야웨(a) - 사라(b) - 아브라함(a') - 사라(b')라는, 동일 요소의 반복이라는 구성상의 특징을 보인다(히브리어 표현에서 야웨는 3인칭 단수 남성형 동사를 이끌고 있음을 기억하라). 아이의 탄생을 전하는 첫째 단원(unit)의 경우, 아이 탄생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야웨이시다(v.1). 야웨께서 사라를 "방문하셨다"(파카드), 그리고 야웨께서 사라에게 선언하셨던 대로 "행하셨다"(아사). 그랬더니 사라가 임신하여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로 그때에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아주었다(v.2). 본문의 임신, 출산 보도에서 관심을 끄는 것은 사라의 임신과 출산이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하신 일(방문과 행하심)이라는 것이다. 본문의 시작(v.1)을 히브리어로 읽어보면 본문은 히브리어에서 보통 읽게 되는 형식(예를 들어 '접속사 + 동사 + 주어'라는) 어순(語順)으로 되어 있지 않다. 어순이 뒤집혀 있다. 도치(倒置)문장이다(접속사 + 주어 + 동사 순으로 되어 있다). 주어가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본문의 주어는 바로 야웨이시다. 야웨가, 다른 자가 아닌 야웨께서 전에 말씀하셨던 대로(창 17:19; 18:10) 사라를 방문하셨다/ 찾으셨다(파카드). 사라의 임신 보도가 야웨의 방문으로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야웨의 방문이 본문의 전면에 부각되고 있는 반면, 사라의 임신은 야웨의 방문의 결과로서만 서술되고 있음에 우리의 주의를 모으자.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의 방문(파카드)은 섭리(예:시 8:5; 65:10), 심판(출 20:5; 32:34; 레 18:25 ; 민14:18; 신5:9; 욥31:14), 구속(창 50:24f; 출3:16; 4:31; 13:19; 렘 29:10; 습 2:7; 룻 1:6) 사건의 맥락에서 흔히 쓰인다. 오⧚의 본문 창 21장에서 야웨께서 사라를 방문하신 것은 결코 어떤 심판을 위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야웨의 구속 역사 전개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방문이다. 자⧚이 말씀하셨고 선언하셨던 약속을 지키시는 방문이다. 이 방문으로 아기를 배지 못했던 여인 사라의 아픔이 해소되고 여족장(matriarch)으로서의 체면이 살아난다. 이것은 이삭의 탄생 설화에 감추어져 있는 기적의 요소를 드러낸다. 하지만 이삭이 하나님의 방문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삼상 2:21 과 비교해보라) 그가 어떤 영웅적인 본성(heroic nature)을 타고난 사람이라고는 묘사되지 않음에 주목해야 한다. 이삭의 기적적인 탄생 보도는 이삭의 탄생이 하나님의 은총의 한 징표이며 이스라엘을 위한 구속 역사의 일환임을 드러내는 데에 종사하고 있다. 야⧚께서 말씀하셨던 대로 방문하셨다. 그러자 사라가 임신하고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아주었다. 즉 본문의 첫번째 단원은 사라의 임신과 출산 보도로 끝을 맺고 있다.
본문의 둘째 단원(vv.3-7)은 사라의 임신, 출산에 이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반응을 보도한다. 아브라함의 행동(vv.3-5)은 의식적(ritual), 부성적(paternal) 행위이다. 태어난 아이의 이름을 이삭(이츠큺)이라고 부르고(v.3), 난지 8일만에 아이에게 할례를 행한다(v.4). 두 행위 모두 이전에 야웨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신 조건을 상기시킨다(창 17:10,19). 아브라함은 야웨와 맺었던 언약의 조건을 지금 지키고 있는 것이다. 야웨와의 언약을 의식적(ritual)으로 실현시키고 있는 이 아브라함의 행동은 아들의 출산에 본능적(natural), 모성적(materal)인 반응을 보이는 사라의 짓거리(vv.6-7)와 구분된다. 문헌비평적인 시각에서 본문을 대하는 자들이 아브라함의 행동(vv.3-5)을 족보 서술 형식으로 창 17장을 결론을 짓고자 한 사제 문서(P)의 자료를 보고, 사라의 반응(vv.6-7)을 야웨 문서(J)의 자료로 보고자 제안하고 있는 것도 우⧚가 지금 논의하고 있는 본문 구조 분석의 타당성을 뒷받침한다. 흥미로운 것은 백세에 아들을 얻은 아브라함의 부성적 감정이 본문 저자의 필치에 의해서 강하게 생략된 반면(또는 억눌려져 있는 반면), 사라의 모성적 반응은 강하게 부각되어 있다는 점이다. 아들의 이름을 이삭이라 부르고, 생후 8일만에 할례를 행하는 아브라함의 속 마음은 일체 표현되고 있지 않다. 본문은 단지 "그의 아들 이삭이 태어난 때는 아브라함은 백세의 노인이었음"을 정중하게 지적하고 있을 뿐이다(v. 5). 하지만 사라의 반응은 대단히 솔직하다.
"사라가 말했다. 하나님께서 내게 웃음(처톺)을 주셨다.
(이것을) 듣는 자는 누구나 나와 함께 웃으리라(이츠큺).
또 그녀가 말했다. 누가 아브라함에게 '사라가 자식에게
젖을 물리겠느냐'고 말하였는가? 하지만 내가 아브라함의
노령에 아들을 낳았다 (키-야라드티 벤)" (창 21:6-7)
사라의 반응은 그녀가 무엇에 대해서 반응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둘로 나뉘어 질 수 있다. 왜 아들의 이름이 이삭이어야만 하는지를 풀이해주는 듯한 사라의 웃음(v.6)과, 지금까지의 조롱과 수모에 대한 수사학적인 논박인 사라의 자랑(v 7)이 그것이다. 이때 사라의 웃음은 "하나님께서 내게 웃음을 주셨다"는 고백이다. 이 사라의 웃음은 아기를 못 배었던 여인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감사의 웃음, 기쁨의 웃음일 수 있다. 잉⧚하지 못하였던 여자로 하여금 아들의 어머니가 될 수 있게 한(시 113:9) 감사의 고백일 수 있다. 여기에서 처음 이삭의 수태 고지를 들었을 때 아브라함과 사라가 모두 웃었다는 반응(창 17:17; 18:12) - 아브라함이 속으로 웃었다(창 17:17), 사라가 속으로 웃었다(창 18:12) - 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사라의 몸에서 아들이 태어나리라는 고지(告知)를 들었을 때 그들은 (아브라함과 사라) 모두 웃었다. 이때의 웃음은 비웃음이다. 그러나 실제로 사라가 아이를 출산하고 나서 웃는 지금의 웃음은 더이상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한 인간의 비웃음이 아니다. 그것은 폰 라드가 풀이했듯이 감사의 웃음, 기쁨의 웃음이다. 본⧚ (창 21:6)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 대한 인간의 비웃음이라는 차원의 웃음이 말끔히 사라지고 있음을 본다. "하나님이 내게 웃음을 주셨다"는 이 고백에서 우리는 비로소 아이 못 낳는 여인의 한(恨)을 들어주시는 하나님께 대한 진솔한 반응을 읽을 수 있다.
사라의 웃음은 이웃에 대한 관심으로 확대된다. "이 소식을 듣는 자는 누구나 나와 함께 웃을 것이다" (콜 핫쇼메아 이츠큺-리; v.6b). 이 본문은 적어도 다음 두가지 점에서 주석 상의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첫⧚, 본문이 개진하는 웃음의 뉘앙스(nuance)가 비웃음이냐(궁켈), 아니면 환희의 탄성이냐(델리취 [F. Delitzsch], 딜만 [A. Dillmann], 베스터만, 스킨너)는 문제; 둘째, v.6a와 v.7과의 관계에서 이웃의 웃음을 전하는 v.6b가 본문의 전개상 자연스러운 것이냐는 문제. 전자의 물음이 본문(v.6b)의 번역과 관련된 문제라면 후자의 물음은 그것의 해석과 관련된 문제이리라. 베스터만의 경우 v.6b를 "환희의 탄성"으로 읽고자 할때 (그에 의하면 본문은 이렇게 번역된다: "그것을 듣는 자는 누구나 내게 동의하리라") 본문의 재배열은 필수적이다. 그⧚기에 사라의 반응이 v.6a - v.7 - v.6b로 연결되면서 본문의 전개를 수정하고 있다. 이때 vv.6a, 7은 아브라함의 노년에 얻은 아들의 이름이 왜 이삭으로 불리워져야만 하는지를 설명하는 역할을 하며, v.6b는 이삭의 출생에 대한 모든 사람의 동조를 전하는 것으로 본문 전체를 끝맺는 결어 구실을 한다는 것이다. 즉 베스터만이 읽는 본문(창 21:1-7)은 사라의 임신, 출산에 관한 보도로 시작하여 거기에 대한 모든 사람들(사라의 출산 소식을 듣는 자 모두)의 축하의 웃음으로 끝을 맺고 있다.
하지만 베스터만의 본문 전개의 수정은 맛소라 본문 그 자체가 개진하고 있는 구조상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는 오류를 낳는다. 본문의 절의 위치를 수정하지 않고 맛소라 본문을 그대로 읽을 경우, 본문의 구조는 이삭의 이름의 기원을 밝히는 사라의 웃음(vv.6a + 6b)과 거기에 따른 사라의 자랑(vv.7a + 7b)으로 재구성될 수 있다. 이삭이란 이름은 하나님께서 사라에게 웃음(처톺)을 주셨기 때문이다(v. 6a). 이삭이란 이름은 동시에 그것을 듣는 모두를 웃게 할(이츠큺) 책임이 있다(v.6b). 이삭의 탄생으로 사라도 젖을 물릴 수 있겠느냐고 비아냥 대던(밀렐) 모든 자에게 사라가 반박할 수 있게 되었다(v. 7b). 그래서 그녀는 외친다. " 내가 아브라함의 노령에 아들을 낳았다"(v.7b). 즉 본문(창 21:1-7)은 사라의 임신, 출산 보도(vv.1-2)로 시작하여 사라의 출산 고백(v.7b)으로 마감하는 "고리 구조"(ring construction; inclusio)를 띠고 있다. 본문의 서두와 말미에 있는 차이란 본문의 시작은 "사라가 아들을 낳았다"는 보도이지만(v.2) 본문의 대단원에는 "내가 아들을 낳았다"는 자랑이 있다는 것이다(v.7). 서두에 실린 "사라가 아들을 낳았다"는 본문의 보도체 서술은 어디까지나 사라의 임신, 출산이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음을 드러내는 데에 촛점이 있었다. 그러나 "내가 아들을 낳았다"고 털어 놓는 본문 말미에 나오는 사라의 자랑은 이삭의 탄생을 하나님이 하신 일이 아닌, 나(사라)의 일로 돌리려는 인간의 방종을 드러내는 데에 촛점이 있다. "내가 아들을 낳았다"(v.7b)는 말로써 사라는 어느새 비참했던 여인에서 기고만장한 여인이 되고 만다. 바로 이 사라의 기고만장한 모습이 하갈의 눈물을 자아내게 하는 비극(창 21:8-21)의 씨앗이 되고 있다.
지금까지 살핀 본문(창 21:1-7)의 주석 작업에서 우리는 다음 세 가지 사실에 관심을 모으려고 한다. 이삭의 탄생 보도를 전하는 본문이 다음 세 가지를 부각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 야웨께서 사라를 방문하셨다. 그러자 사라가 아들을 낳았다. 둘째, 이 아들의 이름은 이삭으로 불리워진다. 그리고 이 아들의 탄생으로 사라는 웃게 된다. 세째, 사라는 하나님이 하신 일을 "내가 아들을 낳았다"고 소리지르는 여인으로 돌변한다. (이 자랑 섞인 독백이 하갈의 울음을 듣게 하는 에피소드[창 21:8-21]를 낳는다.)
야웨께서 사라를 방문하셨다
창 21:1-7 본문의 주석 작업에서 가장 크게 부각되는 증언은 이삭의 탄생이 야웨의 사라 방문으로 이루어진 결과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부인 사라는 "아이를 못 낳는"(barren)여인이었다. 아브라함도 늙은 노인이었다. 하지만 야웨께서 아브라함과 사라를 방문하심으로 이들은 어버이가 되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구약성서 창세기의 문헌층(source)과 전승(tradition)을 추적할 때 아브라함에게 아이가 없었음을 전하는 보도는 최소한 여섯 번 소개된다(창 11:30; 15:2; 16:1; 17:15-22; 18:9-15; 21:1-2). 그중에서도 이스마엘 탄생 후, 아직 이삭이 태어나기 전, 이삭의 탄생을, 사라의 수태를 고지(告知)하시는 창 17장, 18장의 야웨 하나님의 방문은 오늘의 본문 이해에 소중하다. 즉 창 21:1("야웨께서 사라를 그가 말씀하신대로 방문하셨다. 그리고 선언하신대로 사라에게 행하셨다")는 창 17장, 18장의 배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나타나셨다(창 17:1). 그리고 아브람과 언약을 세워 아브람을 모든 민족의 아버지 - 아브라함 - 로 불리워지게 한다. 할례를 언약의 징표로 삼을 것이 이때 요구되어진다(창 17:9-14; 비교 창 21:4). 동시에 하나님은 사래를 열국의 어머니(사라)가 되게 하신다. 민족의 뭇 왕들이 그녀의 자궁에서 나올 것을 언약하신다. 사라가 아이를 낳게 되리라는 하나님의 언약(창 17:15- 16)에 아브람은 이때 이렇게 반응한다.
"아브라함은 그의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다. 그리고 웃었
다(이츠학). 그리고 속으로 말하였다. '백세된 자에게 자
식이 생길 수 있겠는가? 그리고 사라도 구십 세의 여인이
니 어찌 그녀가 자식을 낳을까? (할러벤 메아-샤나 입바레
드 버임 사라 하바트-티쉬임 샤나 텔레드) 그러면서 아브
라함은 하나님께 말했다.'이 이스마엘로 당신 앞에서 살게
하소서'"(창 17:17-18)
백세된 자에게 자식이 생길 수 있겠는가(Can a child be born to a man who is a hundred years old?)(창 17:17b). 본문은 수동태(니팔형)이다. 백세된 자 - 아브라함 - 이 무엇을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백세된 자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를 되물어 보는 질문이다. 아브라함은 결코 아이를 낳게 되는 일의 주체(performer)가 아니다. 아브라함은 아이가 생기는 일의 수동적 관여자(participator)일 뿐이다. 우리말 번역의 "백세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개역)나 "나이 백살에 아들을 보나니!"(공동번역)라는 표현은 히브리 문장이 지닌 수동태의 의미를 충분히 살리지 못하고 있다. 아이 탄생의 주체가 아브라함이 아니라는 히브리어 문장의 의미 파악에 촛점을 두어야 한다. 사라에게서 민족들을 다스릴 후손이 태어나리라는 약속의 고지 앞에 아브라함은 또 사라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염려하고 있다. "사라도 구십세의 여인이니 어찌 그녀가 자식을 낳을까 ?"(창 17:17b). 이 말은 아브라함이 속으로 중얼거리며 내뱉는 말이다. 이미 그의 생각 속에는 자신의 능력으로 얻은 아들, 이스마엘로 꽉 차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말한다. 그로 당신 앞에(직역하면 당신의 면전에서) 살게 하소서! (창 17:18b) 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아브라함과 다르다. " 아니다. 사라, 네 아내가 네게 아들을 낳아주리라(사라 이쉬터카 옐레데트 러카 벤). 그리고 그의 이름을 이삭이라고 부르리라"(창 17:19a) 아브라함은 그에게, 그리고 그의 처 사라에게 무슨 자식이 생기겠는가고 반문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구체적으로 사라가 아들을 낳아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사라가 아들을 낳게 되는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덕이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어떤 생물학적인 임신, 출산의 과정이 아니다. 사라가 어머니가 될 것이라는 약속의 고지 앞에 그냥 웃고 만 아브라함의 웃음 -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인간의 부정적인 판정을 드러낸다. 하나님이 하실 일을 인간이 웃음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이삭의 탄생을 전하고 있는 또 다른 설화인 창 18:1-15(J)은 이 점을 더욱 구체적으로 전하고 있다.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야웨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을 때의 일이다. 더운 대낮 천막 어귀에 앉아 있던 아브라함은 세 사람이 자기 앞에 서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아브라함은 그들에게 잠시 쉬어갈 것을 요청하며 떡과 고기 요리를 만들어서 대접한다. 그들이 음식을 먹는다. 그러면서 그들이 말한다. "네 아내 사라는 어디 있느냐"(창 18:9a) 사라가 어디 있느냐고 묻고 있는 자들은 세 천사들이다. 아브라함은 그녀가 천막에 있다고 대답한다 (18:9a). 아브라함의 대꾸에 천사들은 이렇게 선언한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내가 정녕 내년 이맘 때에 너를 찾
아 오리라. 그때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사라
가 천막 입구에서 이 말을 듣고 있었다. 천막입구는 그의
뒤에 있었다".(창 18:10)
아브라함 가정의 방문자는 분명 세 천사들이었다. 그러나 사라에게 수태 고지를 하는 사람은 "그"라고 불리우는 단수 형태로 되어있다. 세 천사 중의 한 사람이 한 말일까? 아니면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표현하고 있는 것일까? (공동번역은 18:10의 번역은 '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라고 옮기고 있다). 본문은 여기에 대하여 침묵한다. 본문이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그가 아브라함에게 하는 말이다. "내가 정녕 내년 이맘 때에 너를 찾아오리라. 그때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나님의 방문하심으로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을 예고하시는 수태 고지이다. 여기 하나님의 말씀에는 아브라함이 늙었다는 것도 사라가 할머니라는 것도 크게 문제시되지 않는다. 내년에 내가 다시 올 때 사라에게 태기가 있으리라. 곧 하나님의 방문과 그 방문으로 인해 구체화될 당신의 언약의 성취(창 12:4, 21:5)가 본문의 관심사 이다. 그러나 이 말을 듣는 인간, 특히 사라의 관심사는 이와는 퍽이나 상이하다. 하나님의 수태 고지를 듣는 순간 이스라엘의 여인 사라는 남편과의 성관계를 떠올린다. 본문은 그것을 이렇게 증언한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미 나이많은 늙은이였다. 사라에게는
다른 여인들과 같은 달거리가 끊겼다."(창 18: 11)
많은 번역들이 "여인들의 달거리"로 읽으라는 "슈투트가르텐시아(Stuttgartensia)판(版) 히브리어 성서"(BHS)의 비평적 각주의 제안을 따른다. 우리말 번역의 경우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 많아 늙었고 사라의 경수는 끊어졌는지라"(개역),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미 나이많은 늙은이였고 사라는 달거리가 끊긴지도 오래였다."(공동번역)라는 옮김도 BHS 성서의 비평적 각주의 제안을 따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히브리어 맛소라 본문 자체는 "여인들의 달거리"(커오락흐 나쉼)가 아니라 "다른 여인들과 같은 달거리"(오락흐 칸나쉼)임에 주목하자. 여기 히브리 "오락흐"는 여인들의 월경을 표시하는 말이다. 브리스만(Leslie Brisman)이 지적한 대로 이 히브리어 "오락흐"는 "오렉하"(방문객)으로도 읽혀질 수 있는 히브리 자음의 말장난일 수 있다. 사⧚에게는 방문객이 없었다는 것이다! (성관계가 없었다는 것이다!) 사라는 다른 여인들과 같은 성생활의 즐거움에서는 철저히 배제되어 있었던 여인이라는 말이다. 창 18:11에 이어서 표현되는 사라의 반응이 이같은 우리의 해석을 타당한 것으로 여기게 한다.
"그리고 사라가 속으로 웃으며 말했다.'내가 이렇게 말라빠
졌는데 무슨 희열을 맛볼 수 있으랴, 내 남편도 노인인
데'"(창 18: 12)
"내가 이렇게 말라빠졌는데 무슨 희열(에덴)을 맛볼 수 있으랴"! 우리말 번역 성서에서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개역), "이제 무슨 낙을 다시 보랴"(공동번역)의 "낙"이란 말은 히브리 본문에서는 "에덴"으로 되어 있다. "내게 무슨 '에덴의 기쁨'이 있으리요"! 그것이 사라가 내뱉는 반응이다. 더구나 창 18:12 본문이 노인됨을 묘사하는데 있어서 아브라함과 사라의 경우를 서로 다른 용어로 표현하고 있음이 흥미롭다. 본문은 단순히 "내가 이렇게 늙었고 내 남편도 다 늙었는데..."(공동번역)가 아니다. 차라리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개역)라고 옮겨야 할, '노쇠함으로 말라빠진 여인'(발라)과 '나이듦으로 노인이 된 남자'(자켄)로 대조될 수 있는 본문이다. 아브라함은 늙었지만(자켄) 성관계를 가질 수 있다. 실지로 그가 하갈의 몸에서 이스마엘이라는 소생을 얻지 않았던가. 그러나 사라의 경우는 형편이 다르다. 사라는 단순한 노인이 아니다. 그녀는 이제 노쇠함으로 허약해진, 그런 의미에서 늙어 버린 여인이다. 그녀에게는 아이를 잉태할 능력이 없다. 아니 남편 아브라함과의 부부 관계에서 어떤 "낙"(에덴)을 맛볼 수도 없다. 그러므로 여기 본문(창 18: 12)에서 자신의 수태 고지를 엿듣다가 그만 웃고 말았다는 사라의 웃음은 노쇠한 늙은이 사라 자신에 대한, 그리고 노인 남편 아브라함에 대한 비웃음이다.
이제 오늘의 본문으로 되돌아 가보자. 창 21:1-2 이 소개하는 사라의 임신은 구약성서에서 흔히 읽게 되는 정상적인 부부 관계(남녀의 성관계)를 의미하는 어떤 동작이 일체 생략되고 있다는 특징을 보인다. 이를테면 우리가 지난 논의에서 살펴 보았던 하갈의 임신 기사를 주목해 보자 "(사래가 하갈을 아브람에게 주었다) 그리고 그(아브람)가 하갈에게 들어갔다(와야보 엘 하갈) 그러자 그녀가 임신하였다"(창 16:3b-4a). 아브람이 하갈과 성관계를 가졌다.(본문에 "하갈에게 들어갔다"는 직역은 남녀의 성관계를 의미하는 히브리어식 완곡 어법이다). 그래서 하갈은 아이를 배게 되었다. 적어도 이 본문(창 16장)에서는 아이를 배게 할 수 있는 아브람의 능력(정력?)이나 아이를 잉태할 수 있는 하갈의 능력(자궁의 힘?)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창 21:1-2의 것은 그게 아니다. 사라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다. 아브라함이 사라의 자궁에 씨를 뿌린 것도 아니다. 하나님이 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역사(役事)하신 이삭의 탄생! 그것은 말라버린 여인의 태의 문을 여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상징한다. 이 역사에서 사라는 여인으로서의, 어머니로서의 기쁨을 소유하게 된다. 아기를 갖지 못했던 여인 사라의 한맺힘이 하나님에 의해 풀어지고 있는 것이다. 창 21:1-2을 여인의 출산에 관한 법(法)인 레 12장과 비교할 때 이삭의 탄생을 하나님이 하신 이적으로 돌리려는 성서 기자의 숨은 노력은 더욱 쉽게 발견 된다. 레 12장은 여인이 출산 후에 겪게 될 산후 산혈로 인해서 일정 기간동안 격리되어 있을 것을 법으로 규정하는 자료이다. 레 12장은 여인에 관한 규례, 여인의 출산에 관한 규례이다. 그런데 그 법조문의 시작은 이렇다. "여인이 잉태하여 사내 아이를 낳으면 ..."(레 12:2a). 여기 본문의 "여인이 잉태하여"(타츠리아)는 직역하면 "남자가 여인에게 씨(차라)를 뿌리면" 이다. 즉 남,녀간의 성 관계를 암시한다. 그런데 정작 창 21장의 시작에 남 녀의 성 관계를 드러내는 동작(야보)이나 암시(타츠리아)가 없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아브라함이 사라를 임신시킨 것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고자 하는 성서 기자의 의도를 드러낸다. 하나님이 사라의 곤경을 돌아보신 것이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이 여인 사라의 아픔을 해소시킨 것이다. 하나님이 사라가 아이를 밸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셨다. 이에 사라는 또 한번 웃는다, 크게 웃는다.
이삭의 탄생 : 하나님이 사라에게 "웃음"(이삭)을 주셨다
창 21:1-7의 본문 주석이 우리에게 드러내는 두번째 주제는 이삭의 탄생이 사라를 웃게 했다(v.6)는 증언에 있다. 창 17:17; 18:12에 이은 또 하나의 웃음! 그것이 무엇을 시사하는가?
"하나님께서 내게 웃음(처톺)을 주셨다.(이것을)듣는 자는
누구나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이츠큺)"(창 21:6)
하나님이 사라를 웃게 하셨다! 하나님이 사라에게 웃음을 주셨다! 이⧚의 탄생은 "하나님의 사라 방문하심"(창 21:1-2)의 구체적인 결과이다. 그것은 또 거듭 약속되었던 수태 고지에 대한 하나님 편에서의 약속이행이다. 약속이 성취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체 되었는가가 본문이 드러내고자 하는 관심사가 아니다. 본문의 관심은 야웨의 수태고지에 시종 비웃음으로 일관했던 아브라함과 사라에게(창 17:7a; 18:12), 하나님께서 진정한 웃음을 안겨 주셨다는, 인간의 비웃음에 대한 하나님의 부정(no)에 있다. 이삭의 탄생과 관련된 지금까지의 기사에서 "인간의 웃음"을 부각시키고 있는 성서 기자의 증언은 하나님의 계획에 인간이 - 아브라함이, 그리고 사라가 - "속으로 웃었다"는 사실을 부각시킨다. 사라의 자궁에 아이가 생길 것이라는 하나님의 고지에 아브라함은 속으로 웃었다(창 17:17). 사라의 태가 열릴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에 사라도 속으로 웃었다(창 18:12). "속으로 웃었다"는 것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간의 회의를 드러낸다. 하나님의 계획을 인간이 비웃었다는 고발이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은 그들을 겉으로 크게 웃게 하신다. "웃음"(이삭)이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삭의 탄생은, 그러기에 비웃었던 자들에게 진정한 웃음을 주시는 웃음의 탄생이다.
문자적으로 보아도 이삭(이츠큺)이란 단어는 "그가 웃다", "그로 웃게 하라"란 뜻으로 풀이되는 웃음(처톺)의 탄생이다. 이것은 이삭의 탄생 약속에 대해서 지금까지 비웃어왔던 아브라함과 사라의 웃음을 하나님이 다시 되받아 웃으셨다는 사건에 대한 증언이기도 하다. 성서학자들 중에는 이삭이라는 이름의 원래적 표현이 "이스마엘"과 짝을 이루는 형식인 "이츠큺엘"(하나님이 웃으시다)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다. 하⧚만 "이츠큺엘"이란 형태의 이름이 구약성서의 본문 중에 서술되고 있지 않는 이상, 그것은 학자들의 상상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의 본문은 아브라함의 아들이 "이삭"으로만 불리웠다고만 적고 있다(창 21:3). 전승사적으로 추적할 때 구약성서의 증언 중에는 "하나님이 웃으셨다"는 표현이 있다. 그러나 성서가 증언하는 "하나님의 웃으심"은 하나님의 뜻에 저항하는, 또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려 하는 인간들의 우스꽝스러운 시도를 비웃으시는 조롱조의 웃음이다(시2:4; 37:13; 59:9). 이삭의 본래 이름을 "이츠큺엘"로 읽게 될 경우 이삭의 탄생은 인간들의 짓거리를 비웃으시는 하나님의 웃음일 수 있다. 그러나 성서 본문이 그의 이름을 그냥 이삭이라고만 부르고 있다는 사실에서, 하나님의 계획에 비웃었던 자들을 진정으로 크게 웃게 하신다는, 비웃었던 입으로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신다는, 그런 차원의 웃음으로 이삭이라는 이름의 의미를 읽어야 하리라.
여기에서 우리는 "웃음"(이삭)의 탄생 예고가 수차에 걸쳐서 반복되었건만, 정작 그 "웃음"의 탄생 보도 자체는 단 두 줄(창 21:1 -2)로만 짤막하게 처리되고 있는 성서 기자의 숨은 의도를 논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왜 이삭의 탄생 보도 자체는 그렇게 장황하지 못했을까? 궁켈은 아이를 갖지 못했던 여인이 급기야 자식을 낳게 되는 창세기의 설화들을 영웅이나 신의 아들의 탄생 같은 인물들의 탄생 설화에서 흔히 애용되는 주제(beliebtes Sagen motif)를 지닌 설화로 본다. 구⧚성서에서 아기를 갖지 못하는 여인들 이야기가 (이를테면 사라, 리브가, 라헬, 마노아의 부인, 한나) 자식의 탄생과 관련된 어떤 극적인 모티브와 흔히 연결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모든 탄생 이야기는 - 오늘의 본문의 주제인 이삭의 경우를 포함해서 - 결코 어떤 영웅형(型)의 인물이 태어났음을 증언하려는데에 관심이 없다. 특히 오늘의 성서 본문인 이삭의 탄생 보도는 영웅 탄생 설화 따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삭이 하나님의 방문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이야기의 강조가 이삭에게 있지 않다. 이야기의 강조는 아이의 탄생과 관련된 부모의 태도, 자식의 출산을 목도하기까지 부모가 지녀야 했던 고뇌와 경건에 대한 보상에 있다. 사⧚의 웃음(창 21:6)은 이런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희극적인 언어로 묘사하는 것이다. 그녀가 웃었다. 다른 사람도 그녀를 보고 웃을 것이다. 그녀의 아들의 이름은 그러기에 웃음(이삭)으로 불리워지리라.
본문의 저자는 약속의 아들 이삭의 탄생을 왜 "웃음"의 사건과 연관시키고 있는 것일까? 문헌 비평학적인 시각을 빌면 천막 뒤에서 수태 고지를 엿듣다가 달거리가 끊긴 여인이 무슨 아이를 밸 수 있겠느냐고 조소하던 사라의 웃음(창 18:1-16)이나,"야웨께서 내게 웃음을 주셨다"(창21:6)고 털어놓고 있는 사라의 웃음 모두 야웨 문서 기자(Jahwist)에게서 기인한다. 물⧚ 이 두 텍스트는 양식상 나그네를 친절히 대접하는 설화와(창 18장) 아이의 탄생 보도(창21:1 - 6)를 전하는 설화로 구분된다. 주제별로 구분해 보아도 전자는 야웨께서 사라의 태를 여시겠다는 데에 반신반의하고 있는, 그래서 기대를 걸지 않은 채 냉소적인 웃음을 띄고 있는 여인 사라의 자세를 부각시키고 있는 반면, 후자는 정말로 사라의 태를 열어 놓으신, 그래서 한 아이 이삭에게 젖을 물릴 수 있게 하신(창21:7a) 하나님의 행하심에 기쁨의 웃음을 띄고 있는 어머니 사라의 몸놀림을 부각시킨다. 웃음이 인간의 감정을 해학적으로 표출하는 통로라면, 그래서 어떤 일에 대한 내적인 억눌림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희극적인 발산이라면, 전자의 웃음은 다분히 부정적인 감정의 표출이요, 후자의 웃음은 단연 긍정적인 색채를 띤 감정의 발산이다. 전자는 아이 출산의 약속이, 비록 하나님이 선언하신 것이라고 해도 실현되지 않을 것이라는, 기다림에 대한 패배주의적 자세이다. 그러나 후자는 인간의 상식의 영역을 초월해서 약속을 성취시키시는 하나님께 대한 환희와 놀람의 각성을 드러낸다. 창 18장과 21장에서 읽는 두 종류의 사라의 웃음에서 모두, 인간은 객석에 앉아있는 관중이요 무대에서 연출하고 있는 배우는 하나님이시다.
인간이 하나님의 역사(役事) - 말씀, 약속, 행하심 - 를 보고서 웃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라가 더이상 관중으로 머물러 있지 않게 되었을 때, 즉 이삭이 그녀의 몸에서 태어나게 되었을 때, 사라는 이제 하나님에 대해서 웃지 않는다. 하나님과 함께 웃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때 우리가 만약 야웨 문서 기자의 시대를 이스라엘 통일왕국시대(주전 10세기경)로 간주한다면, 그래서 본문의 최초의 독자/청중이 "정착된 땅에서의 삶"을 관심삼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이었을 것이라고 간주한다면, "노쇠한 여인의 태가 아이를 낳았다"는 오늘 본문의 주제(웃음)는 단순한 희극거리에 머물지 않는다. 거기에는 사라의 웃음을 통해서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 놓으려는 성서기자(J)의 메시지가 있다. 사라의 태를 닫아 놓으신 분도 야웨시요(창16:2),사라의 태를 여시는 분도 야웨시라(창21:1 - 2, 6 - 7)는 성서본문의 필치에서, 야웨의 뜻에 여인의 태가 닫혀있기도 하고, 아무리 노쇠한 여인의 태라도 잉태하게 된다는 성서본문의 주장에서, 가나안 땅의 풍요함(fertility)의 주인이 누구이신지를 결판내려는 야웨 문서 기자의 당돌함을 읽어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즉⧚성서 기자는 아이를 낳고 웃는 사라의 큰 소리(laughter)에서 야웨는 출애굽의 하나님만이 아닌, 출산, 풍요, 땅의 하나님도 되심을 확인시키고 있는 것이다. 창조 사건의 지평에서 하나님의 활동하심을 읽고 있는 것이다. 샌더스(James Sanders)의 표현대로라면 이것은 영락없는 야웨 문서 기자의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웨께 대한 순종"(monotheizing theology of the Jawist)의 태도이다. 하⧚님의 구속 사건이란 결국 아이를 낳는 사건에서 완성되고 있다는 베스터만의 시각은 이 점에서 옳다. 아이의 탄생이 없었더라면 메시야도 이 땅에 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웃음이란 말로써 설명될 수 없는 어떤 "새로운 것"을 받아 들이는 통로이다. "자식없음"(barrenness)을 "자식있음"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행위에서 이스라엘은 웃었다. 그리고 이 웃음에서 이스라엘의 운명이 바뀌게 된다. 새로운 하나님의 모습을 본다. 그래서 이제부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창조사건에 대한 목격자요 증인이다.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 웃는 자다. 아니 모든 자와 더불어 하나님이 하시는 "새 일"을 웃음으로 나누는 자여야 한다.
"야웨께서 시온의 포로들을 풀어 주시던 날,
꿈이든가 생시든가!
그 날 우리의 입에서는 함박같은 웃음 터지고
흥겨운 노랫가락 입술에 흘렀도다.
그 날 이교 백성 가운데서 들려오는 말소리,
'놀라와라, 야웨께서 저 사람들에게 하신 일들!'
야웨께서 우리에게 놀라운 일 하셨으니
우리는 얼마나 기뻤던가." (공동번역 시 126: 1 - 2)
내가 아들을 낳았다!
창 21:1-7 본문의 주석 작업은 이삭의 탄생 보도를 전하는 본문의 이야기가 "고리구조"(ring construction)로 이루어져 있음을 밝혔다. 오늘의 본문은 '사라가 아들을 낳았다'는 보도체의 서술로 시작하여(vv.1 - 2) '내가 아들을 낳았다'는 고백조의 탄성으로 마감하는(v. 7b) 구조를 지닌다. 아들의 탄생이, 그 탄생의 신비와 기쁨을 전하는 서술이, 본문의 시작과 마지막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본문의 "고리 구조" 속에 성서 기자가 전하려고 하는 본문의 처음과 끝에 있는 어떤 대조가 드러나고 있다. '사라가 아들을 낳았다' - 보다 정확히는 사라에게 아들을 주셨다 - 로 시작하여 '내가 아들을 낳았다' - 이 말은 '나도 아들을 낳았다'는 큰 소리로 들린다 - 로 끝을 맺고 있는 것이다. 아이 못낳는 여인 사라의 응어리가 야웨의 일하심으로 풀어지는가 했더니, 그래서 그녀의 입에서 기쁨과 환희의 웃음이 터져 나오는가 했더니, 어느새 사라가 기고만장한 여인으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사라의 이 고백은 어머니가 된 자기 자신에 대한 강한 자부심일 수 있다. 그러나 사라의 이 고백이 "사라도 젖을 물릴 수 있겠느냐"고 비아냥대던 모든 자에게(v.7a) 사라가 들으라고 하는 공박인 것을 감안한다면, "내가 아들을 낳았다"고 소리치는 사라의 목소리는 자신의 임신과 출산을 하나님이 하신 일이 아닌, 자신의 일로 돌려 보려는 어떤 "뽐냄"을 풍기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오늘의 본문은 '하나님의 도움으로 태어난 이삭'에 관한 보도로 시작하여 '사라가 난 이삭'이라는 고백으로 마감되는 변화를 보인다. 무엇이 이같은 변화/대조를 일으키고 있는가? 무엇이 이삭의 탄생을 하나님의 방문과 행하심의 결과로 말하지 않고 사라가 한 일이라고 돌려놓게 되었는가? 도대체 아기 못낳는 여인 사라가 아기를 배고 낳는 여인으로 전이됨에 있어서 무슨 일이 생기고 있는가?
여기에서 우리는 이삭의 탄생을 사라의 관점에서 처음부터 다시 읽을 필요가 있다. 이스라엘의 족장 아브라함 설화는 애초부터 사라가 아기 못낳는 여인이었음을 전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아브람과 나홀이 그들을 위한 아내를 맞아 들였다. 아브람
의 아내의 이름은 사래이고 나홀의 아내 이름은 밀가, 즉
아스가와 밀가의 아버지인 하란의 딸이었다. 사래는 잉태
하지 못하는 여자였다. 그녀에게는 자식이 없었다"(창 11:
29-30)
"사래는 잉태하지 못하는 여자였다"(봐터히 사래 아카라!) 이 본문은 아브라함 설화의 서두에 나오는 족보 속에 첨가되어 있는 문장이다. 아브라함 이야기는 처음부터 아이 못낳는 여인(아카라)여인이었던 사래와 함께 출발한다. 우리는 아브라함 이야기가 "큰 민족을 이룰 것을" 약속하시는 야웨 하나님의 언약과 함께 시작하는 것을 안다(창 12:1-2). 그런데 역설적인 것은 이 언약의 선포 바로 앞에서 사래는 이미 아기 못낳는 여인으로 낙인(?) 찍히고 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큰 민족의 조상이 된다는 약속은 아예 처음부터 불가능한 약속이 아니고 무엇이었던가? 여⧚ 사라의 처지를 표현하는 말 - 아기 못낳는 (아카라) 여인 - 의 히브리어는 문자 그대로 '불모의', '메마른', '열매맺지 못하는'이란 뜻이다. 사라는 다름아닌 석녀(石女)였다는 의미이다. 여인이 석녀라는 것은, 더구나 여족장(matriarch)이 석녀라는 것은 고대 중동지방의 관습에서 볼 때 저주받은 여인의 상징이다.
'자식 못낳을 여인'이란 표현이야말로 여인에게 퍼부을 수 있는 가장 가혹한 저주요, 욕설이었다. 오죽하면 이스라엘의 관습에 수혼(嫂婚)제도(levirate law) 라⧚ 것이 있어서 자식없는 과부 형수에게 시동생이 아이를 낳게 해주는 풍속이 있었겠는가? 사라는 처음부터 석녀였다.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적어도 오늘의 본문 창 21장에 이르기까지, 사라는 25년간 '나는 석녀다'(아카라)는 호칭이 붙은 여인으로 살았다. 석녀로 살아왔던 여인 사라! 창세기의 독자는 이 점을 놓쳐서는 안된다. 이 말은 사라도 고통받는 여인으로 살아왔음을 시사한다. 하갈마냥, 성과 처지와 제도에 의해서 고통받은 것은 아니다. 사⧚의 고통은 박해나 억압의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아기를 배지 못하는 여인으로서의 비극(the tragedy of barreness)이다. 하갈이 겪었던/겪을 박해나 억압이 자신의 성(sex)을 제 것이라 주장하지 못하는 제도 (patrirachcy)에서 야기된 문제라면, 또는 여주인의 밑에 종속되어 있어야 하는 계층간의 갈등에서 야기된 것이라면, 사라의 비극은 여성으로서 겪는 수모에 해당된다. 곧 여인으로서 '나의 나됨'에 대한 고통이다. 여인으로서의 구실을 못하는 것에 대한 여인 자신이 느끼는 수모와 갈등! 이것보다 그 어떠한 고통이 더 클 수 있겠는가? 이런 점에서 오늘의 창세기 본문을 들여다보면 이야기의 주인공은 아브라함이나 이삭이 아니다. 하갈이나 이스마엘도 아니다. 우리의 이야기의 주인공은 사라, 바로 그 석녀이다. 오늘의 본문(창 21:1-7)은 이 석녀 사라에게 아기가 생겼다는 것을 전한다. 야웨께서 사라의 고통을 돌아보신 것이다. 사라도 고통받는 자였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석녀로 지낼 때 사라가 보인 태도이다.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구약성서에는 아기를 못낳는 여인들의 아픔이 여러군데에서 반복되고 있다. 리⧚가(창25:21), 라헬(창 29:31-30:24), 삼손의 어머니 마노아(삿 13:2-20), 한나(삼상 1:1-2:21), 수넴여인(왕하 4:8-17)의 경우가 바로 거기에 해당한다. 이때 리브가는 잉태하지 못하므로 이삭이 야웨께 기도한다. 라헬은 자식이 없음을 인하여 레아에게 질투를 느낀다. 그러면서 남편 야곱에게 "나도 자식을 낳게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죽겠노라"고 탄식한다(창30:1). 한나는 자식이 없으므로 울며 먹지 못하는 여인이다(삼상1:8). 마노아와 수넴 여인의 경우에는 아기 못배는 여인으로서의 어떤 감정이 본문에 전혀 스며들고 있지 않다. 리브가의 경우도 이점은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리브가, 마노아, 수넴여인의 경우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다.이들 세 여인 모두 경쟁 관계(?)에 있지 않다. 사라가 하갈에게, 라헬이 레아에게, 한나가 브닌나에게 아이 못배는 여인으로서의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에 비할 때, 리브가, 마노아, 수넴 여인의 이야기는 그 격이 다르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될 것 - 그것은 라헬이 그랬던 것 마냥, 한나가 그랬던 것 마냥 사라가 투기하거나 탄식하는 여인으로 묘사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녀는 단지 자신의 불임을 "야웨께서 허락지 않으신 것"으로 돌린다. 이스마엘의 탄생이 사라가 자신의 처지에 대한 원망이나 탄식에서 비롯되지 않았음을 기억해야 한다. 사라는 자신의 불임을 인정하며, 다른 사람들도 그러는 것 마냥, 당시의 관습을 따라서 아이를 품어보고자 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몸종 하갈로 아브라함의 아들을 갖게 하여 여족장으로서의 체면을 세우려 한다(창 16:2).
우리는 지난 논의 "하갈의 엑소도스(창 16:1-7)"에서 사라의 이같은 결정이 낳은 어떤 문제에 대해서 주의를 환기시킨 바 있다. 창⧚16장 본문의 맥락에서, 사라와 하갈이 벌이고 있는 긴장 관계에서, 박해를 받게 되는 자는 하갈이다. 사라는 아이를 못낳는 여인이지만, 결코 희생자가 아니다. 아기를 밴 여인 경쟁자 하갈이 박해를 받고 있는 희생자이다. 그러나 사라 편에서 이 이야기를 다시 들여다 보면 하갈의 임신이 사라 자신의 불임을 문득 깨닫게 해주는 어떤 계기가 될 수 있었음을 느끼게 한다. 다시 말해 하갈의 임신으로 자신의 불임을 대하는 사라의 태도에 어떤 변화가 생긴 것을 느낄 수 있다. 하갈의 임신 전에는 적어도 자신의 불임을 야웨께서 하신 일이라고 못박을 수 있었다. 그러나 자기 눈 앞에 자기 남편의 아이를 배고 서있는 여인을 보았을 때, 사라는 이미 자신이 석녀인 것을 야웨의 탓으로 돌릴수 있는 경건한 여인이 아니다. 하갈을 박해하는 표독한 주인으로 변해버린 것이다(창 16:6b). 창세기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사라 편에서 재구성함에 있어서 필자는 사라의 하갈 학대가 정당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창세기 본문을 읽어감에 있어서 아이 못낳는 여인 사라의 아픔을 최소한 놓치지 말자는 것이다. 그럴 경우 창세기의 읽기에서 만나는 하나님은 하갈의 박해받음도 돌보시고 사라의 석녀의 고통도 돌아보시는 하나님일 수 있다. 사라가 살던 그 당시의 사회상에서 사라가, 족장의 합법적인 부인인 사라가, 자식을 생산하지 못할 경우, 여가장(matriarch)으로서의 지위마저 빼앗길 수 있었던 위험에 처해 있었음을 상기시키는 폰 라드와 궁켈의 지적은 이점에서 여전히 옳다. 사⧚도 고통받고 있었던 여인이었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창세기를 읽을 경우 창 21:1-2는 창 11:30과 극적인 대조를 이룬다.
"사래는 잉태하지 못하는 여자였다. 그녀에게는 자식이 없
었다"(창 11:30)
"야웨께서 사라를 전에 말씀하신대로 방문하셨다. 그리고
전에 선언하셨던 대로 행하셨다. 그러자 그녀가 임신하였
다. 사라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바로 그 때에 늙은 아브라
함에게 그의 노령에 아들을 낳았다."(창 21:1-2)
아브라함 설화의 맨 서두에 나오는 석녀 사라에 대한 표기가 아브라함 설화의 절정(약속의 아들 이삭의 탄생)에서 아기를 낳는 사라에 대한 서술로 바뀌고 있음을 보라. 석녀가 임신하였다! 석녀가 아들을 낳았다! 창세기의 본문을 사라 편에서 추적할 때 석녀가 출산의 경험을 하게 됨을 기쁨이라 말하지 않고 무엇으로 정의할 수 있으랴. 창세기 본문이 기록된 이래 사라의 이야기를 내 이야기 마냥 읽고 있던 아기 못낳는 (그러나 낳아야 하는, 아니 낳고 싶은) 여인에게 석녀가 아기를 낳았다는 본문의 증언을 어찌 환희와 탄성의 박수침이 없이 읽을 수 있으랴. 그리고 석녀가 어머니가 되는 이야기의 극적 전개에 속에 야웨 하나님의 방문과 행하심이 있었음을 보고, 어찌 그 야웨께 대한 기대와 믿음을 걸지 않을 수 있으랴. 사라의 이삭 탄생은 석녀의 고통을 돌아 보시는 야웨의 사랑을 증언한다. 거기에 인간의 불가능을 하나님의 가능으로 이끄시는, 불가능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의미에서 하나님 약속의 성취가 갖는 신학적 의미가 있다. 그러나 여기 우리에게 남는 문제, 그것은 본문(창 21:1-7)의 마지막에 또 하나의 반전이 있다는 것이다. 곧 사라가
"내가 그의(내 남편)노령에 아들을 낳았다"(창21: 7b)
고 소리치고 있기 때문이다. "사라가 아들을 낳았다"는 본문이 풍겼던 뉘앙스(야웨의 방문과 약속대로 행하심)는 어디로 가고 "내가 아들을 낳았다"(얄라드티 벤)는 소리만이 들리는가! 이 본문을 "내게 아들을 주셨다"라고 고쳐놓고 싶은 심정이 있음은 필자만의 감정인가! 여하튼 "하나님이 내게 아들을 주셨읍니다"가 아닌, "내가 아들을 낳았다"는 사라의 자랑에 우리의 창세기 읽기는 창 21:1-7에서 그치지 못한다. 사라의 자랑이 그 다음 본문(창 21:8-21)을 읽어보도록 우리를 초대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사라의 웃음이 하갈의 울음으로 바뀌는 전개가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