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7] 제목 : [출서울기] 다시쓰는 '새벽을 깨우리로다'

나는 30세가 되던 해인 1971년에 청계천 빈민촌에 들어갔습니

다. 가난한 사람들과 친구가 되겠다는 소박한 마음으로 들어갔

습니다. 처음에는 주민들의 실상을 몰랐기에 그냥 더불어 살면

되겠거니 하는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나

는 점점 심각해졌습니다. 빈민촌 주민들이 살아가는 정황이 내

가 짐작하던 것보다는 훨씬 비참했기 때문이었습니다.

70년대 초반의 한국 경제는 아직 바닥을 헤매던 때였습니다.

빈민촌에는 하루 세끼를 해결하지 못하는 가정들이 허다했고,

병들어도 치료받지 못하는 환자들이 즐비했습니다. 주민들은

좌절감에 빠진 채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삶

에 희망이 없었기에 자신을 괴롭혔고 아내나 자녀들을 학대하

며 살고 있었습니다.

주민들의 아픔을 몸으로 느끼게 되면서 나는 고민하고 아파했

습니다. 나는 그 아픔을 풀어나가기 위해 글을 썼습니다. 처음

에는 일기(日記)로 썼습니다. 하루의 생활 중에서 진한 경험들

을 생각나는 대로 틈나는 대로 적어나갔습니다. 그렇게 적은

글들이 몇 권의 노트가 되었을 때 나는 그 노트들을 주위 가까

운 사람들에게 읽게 했습니다. 노트를 읽는 분들 중에서는 책

으로 내기를 권하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인 1973년 연말이 가까웠던 어느 날, 몸과 마음이 지

쳐 나 자신을 지탱하기가 벅찬 처지에 이르렀습니다. 나는 그

간에 쓴 일기장들을 들고 어느 여인숙으로 갔습니다. 여인숙에

서 일주일여를 자며 쉬며 뒹굴며 그 일기문들을 하나로 연결된

글로 엮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글에 『새벽을 깨우리로다』라

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내 나이 32세 되던 해의 연말경이었습니다. 원래 『새벽을 깨

우리로다』라는 말은 구약성서의 시편에 나오는 말입니다. 다

윗이 왕이 되기 전 젊은 시절에 고난의 골짜기를 헤매던 때에

쓴 신앙시(信仰詩)의 한 구절입니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내 영광이 깰지어다! 비파

와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시편 57장 7~8

절)

이 시를 쓸 무렵 다윗은 「아둘람 굴」에 숨어 살고 있었습니

다. 정적인 사울왕이 그를 제거하려고 온갖 수단을 동원하던

때였습니다. 사울왕에게 쫓긴 다윗은 후미진 아둘람 굴에 숨

어 숨죽인 채 살아갔습니다. 그가 아둘람 굴에 있다는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마을에서 마을로 퍼져나갔습니다. 소문을 들은

백성들 중에 그에게로 모여드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꿈은 있

되 펼칠 마당이 없었던 젊은이들이었습니다. 뜻은 있되 이루어

나갈 길을 찾지 못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그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 형제

와 아비의 온집이 듣고는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로 이르렀고

환난당한 모든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

로 모였고 그는 그 장관이 되었는데 그와 함께한 자가 4백명

가량이었더라』(사무엘상 22장 1~2절).

「아둘람 굴」의 절망적인 자리에 머무르던 다윗과 그의 무리

가 자신들의 불운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지닌 비전

때문이었습니다. 암흑에 처한 민족의 새벽을 깨우겠다는 비전

이었습니다. 어두운 역사를 살아가는 백성에게 새벽을 깨워 희

망 찬 새 역사를 창출해 내겠다는 비전이었습니다.

그런 비전을 품기 전 그들은 한낱 불평분자들이었고 시대의 흐

름에서 낙오된 자들일 따름이었습니다. 그들은 기껏해야 산적

이 될 수밖에 없는 무리였습니다. 그러나 비전이 생기고 자신

들이 이루어나가야 할 사명을 깨닫자 그들은 바뀌었습니다. 그

들은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사람들로 변했습니다. 민족의 어두

운 역사에 새벽을 가져오겠다는 사명자로 바뀐 것입니다.

빈민촌 주민들의 절망적인 처지에 직면하여 좌절을 느끼고 있

던 나에게 다윗의 이 비전은 큰 도전이 되었습니다. 나도 청계

천 빈민굴을 오늘의 아둘람 굴이라 생각하고 다시 한 번 도전

해 보자는 결의를 굳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인숙에서 쓴

원고뭉치에 『새벽을 깨우리로다』라는 제목을 붙여두고 나의

빈민촌 생활은 다시 시작됐습니다.

그런던 중 기독교방송국에서 신앙수기를 현상모집한다는 광고

를 들었습니다. 당선작에 대한 상금이 상당한 액수였습니다. 빈

민촌 선교에 극도의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던 때인지라 그

상금을 타면 요긴히 쓸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새벽을 깨우리

로다』 원고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방송국 심사에서 낙선했습

니다. 나는 방송국까지 찾아가 원고를 되돌려받고 판자촌 교회

당의 기도실 선반에 두었습니다.

김으로 위장해 일본으로 빼돌린 원고 뭉치

그런 지 일주일 후인 1974년 1월8일에 대통령 긴급조치가 발표

되었습니다.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구속하고 중형을

내리겠다는 악법이었습니다. 나는 그런 내용의 긴급조치에 대

해 저항감이 들었습니다. 민주주의의 기본은 반대할 자유가 있

는 것인데 이를 공권력으로 억압하는 것은 국민의 기본권 유린

이며, 이런 억압은 정치문제가 아니라 신이 부여한 인권의 기

본을 짓밟는 종교문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동료 성직자들과 모여 성명서를 발표하고 시위를 벌였

습니다. 1974년 1월17일이었습니다. 나와 동료 성직자들은 당일

시위현장에서 체포되어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군사재판에서 15

년형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일본인 친구 노무라(野村基之) 목사가 제 소식을

듣고는 청계천 판자촌의 활빈교회를 찾아왔습니다. 그가 활빈

교회 교인들에게 『김진홍 선생이 감옥 가기 전에 무언가 남겨

놓은 것이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교인 중에 누군가가 『얼마

전에 무슨 서류 같은 것을 기도실 선반 위에 올려두었다』고

일러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새벽을 깨우리로다』 원고는 노무

라 목사 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한글을 모르는 노무라 목사는 그 내용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일본으로 가져가려고 했습니다. 노무라 목사는 정치범으로 있

는 나는 찾아온 외국인인지라 철저히 감시받고 있던 처지여서

원고뭉치를 그대로는 들고 나갈 수 없었습니다. 그는 궁리하던

끝에 중앙시장에 가서 김을 많이 샀습니다. 그리고는 기도실에

서 김 사이사이에 원고지는 한 장씩 끼웠습니다. 8백장이나 되

는 원고지를 그렇게 감춰 그는 김포공항을 통과했습니다.

일본 동경에 있는 그의 집에서 원고지들을 다시 끄집어내어 일

본어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 『새벽을 깨우리로

다』는 일본어로 먼저 출간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일본에서 한

때 베스트셀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북한이 내 책 출간, 또 구속

1975년 2월에 교도소에서 출감한 나는 청계천 빈민촌으로 되돌

아갔습니다. 그 후 두 달이 지나 서울시는 청계천 판자촌을 철

거하겠다고 통보해왔습니다. 청계천 판자촌 주민들은 활빈교회

에 모여 대책회의를 가졌습니다. 우리는 여러 번의 회의에서

토론에 토론을 거듭한 결과 농촌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습니

다.

그래서 「활빈귀농개척단」을 조직하고 집단으로 귀농하는 사

업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에 우리가 들어가겠다고 정부에 요청

했던 땅은 휴전선 지대의 땅이었습니다. 옛날에는 농지였으나

지금은 비무장지대가 되어 놀고 있는 땅으로 우리를 보내달라,

거기서 농사짓고 세금내고 살겠다고 정부에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절대 안 된다고 통보해 왔습니다. 가난한 사람

들이 그곳에 모여 있다가 집단 월북하려는 것 아니냐는 것이었

습니다. 그렇다면 제주도든 거제도든 북한 땅에서 먼 곳으로

보내달라, 어느 곳이든 보내주는 곳에서 농사짓고 세금내고 인

간답게 살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간 곳이 지금의 남양만(南陽灣)입니다. 남양만은 경기도

화성군에 위치한 9백60만평의 간척지 소금땅입니다. 남양만으

로 옮긴 후부터 나는 빈민선교에서 농민선교로 바뀌었습니다.

아무튼 밤낮 가리지 않고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나 경험도 전문가도 없는 처지에 의욕만 앞세우고 일을 크

게 펼쳤다가 실패를 맛보게 되었습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빚을

지고 어려움에 빠졌습니다. 그런 와중에 일본에서 『새벽을 깨

우리로다』가 출간되고 일본 독자들의 도움이 있어 재정적인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나는 이 책에 대하여 큰 고마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처음 일본

에서 출간되었을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나의 선교운동에

큰 도움을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새벽을 깨우리로다』가 일본에서 출간된 일로 나는

뜻밖의 곤경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초판이 나오자 북한에서 1

천 권을 구입하여 북한 군당 인민위원장급들에게까지 한 권씩

돌린 일 때문이었습니다. 책 내용이 빈민들의 고달픈 삶을 워

낙 현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다 빈민촌 현장사진들이 북한

쪽에서는 남한의 실상을 알리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고 생각했

던 것 같습니다.

그 일로 나는 국가에 이적행위를 했다는 죄목으로 구속되었습

니다. 그러나 일본 『마이니치』신문 등에서 앞장서서 애를 써

주어 구속은 면하게 되었습니다.

국내에서는 1982년 홍성사에서 첫 출간된 이후 지금까지 90여

판에 이르도록 꾸준히 읽히고 있습니다. 그간에 영문판이 나오

고 노어판이 나왔습니다. 지금은 중국어판이 출간 단계에 있습

니다. 그리고 텔레비전 드라마 소재가 되기도 하고 영화화되기

도 했습니다. 나로서 특히 보람을 느끼는 것은 이 책이 방황하

는 청소년들에게 많이 읽히고 그들에게 큰 도움을 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한국판 『새벽을 깨우리로다』는 그 내용이 나의 대학

시절에서 시작하여 청계천 빈민촌 생활 초기인 1973년 말까지

만 다루고 있습니다. 빈민촌 선교의 후반부 내용과 정치범 생

활 그리고 농민선교 시절 이야기들이 빠져 있습니다. 이 책이

나오던 1982년은 군사정권 시절이었던지라 시대적인 제약을 받

았기 때문입니다.

많은 독자들이 후편은 언제 나오느냐고 물어봤고 나 자신도 후

편 또는 증보판의 필요성을 느껴왔습니다. 그러나 마음만 있었

을 뿐 세월따라 미뤄오다가 이제 『신동아』 지면을 통해서 쓰

게 되어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출애급기」와 「출서울기」

이제 나도 56세에 이르렀습니다. 32세에 쓴 『새벽을 깨우리로

다』는 너무 짧은 기간의 이야기였고 그 후로도 많은 경험과

고뇌를 겪어왔습니다. 그래서 『새벽을 깨우리로다』의 후편으

로서가 아니라 아예 다시 쓰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

다.

경북 청송 땅에서의 어린 시절, 대구에서의 학창시절, 젊은날의

고뇌와 방황의 날들, 예수를 만나 안심입명(安心立命)케 되었던

이야기, 청계천 빈민촌에 전도자로 들어간 일, 정치범으로 살았

던 경험 그 후 청계천 판자촌 철거와 남양만의 개척생활 그리

고 공동체 마을인 두레마을을 세운 이후의 이야기들을 담아 내

는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고 있습니다.

나는 성경도 하나의 이야기책으로 인식합니다. 이야기책이되

여느 이야기책과 다르게 인간구원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

다. 그래서 내가 살아온 세월도 한 편의 이야기로 써보고 싶습

니다. 만일 이 이야기로 누군가가 감동을 얻고 삶의 좌절과 방

황, 고뇌와 갈등을 극복하는 일에 도움이 된다면 저로서는 큰

보람이라 여겨집니다. 특히나 이 시대, 이 땅에 살아가는 젊은

이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더 큰 보람일 것입니다.

이 글을 쓰면서 몇 가지 다짐하는 바가 있습니다. 첫째는 「정

직하게 쓰겠다」는 다짐입니다. 내가 살아온 날들 중에서 경험

했던 일들 중에 부끄러웠던 일, 감추고 싶은 일들까지 그대로

쓰고 싶습니다.

둘째는 가능한 한 「쉽게, 재미있게 쓰겠다」는 생각입니다. 모

름지기 어떤 이야기이든 이야기는 재미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

이 글 쓰는 사람에게 부여된 의무라 여겨집니다. 그래서 저는

설교할 때나 성경을 가르칠 때 어떻게 하면 쉽고 재미있게 전

할까를 늘 생각합니다. 이 책도 어떻게 하면 쉽고 재미있는 이

야기책으로 쓸 것인가를 늘 염두에 두겠습니다.

셋째는 『깊이 있게 쓰겠다』는 다짐입니다. 모든 글이 그러하

지만 재미만 있고 깊이가 부족하다면 책을 내는 보람이 있겠습

니까. 쉽고 재미가 있되 깊이가 있어 읽는 이들로 하여금 정신

세계를 한층 깊게 하는 글을 쓰기를 다짐합니다.

그리고 네번째는 이 이야기를 읽는 이들로 하여금 삶의 자세와

방향에 변화를 일으키게 하는 글을 쓰겠다고 다짐합니다. 저는

어떤 글이든 글이 지니는 사명은 크게 세 가지라고 생각합니

다. 하나는 지식의 전달입니다. 또 하나는 치유의 역할입니다.

그 글을 읽음으로써 세상살이에서 쌓인 아픔과 상처를 치유하

는 역할이 글이 지니는 힘입니다. 마지막 하나는 변화입니다.

독자들의 삶을 보다 나은 생각과 삶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글이

지니는 사명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이 읽는 이들로 하여금 그들의 생각과 삶에

무언가가 변화되어지는 역할을 할 수 있는 글이 되게 하자고

마음먹고 있습니다.

제목은 우선 『출서울기』라 하였습니다. 구약성서의 둘째 책

인 「출애급기」에서 따온 이름입니다. 애급땅에서 종살이 하

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자유인으로 만들어준 출애급 사건은 한

번으로 끝나는 사건이 아닙니다. 오늘에도 되풀이되어야 할 사

건입니다.

우리는 좌절된 자신의 상태에서 출애급하고 방황하는 삶에서

출애급해야 합니다. 가난에서, 억압에서 출애급해야 합니다. 거

기에다 분열과 부패에서 역시 출애급해야 합니다. 그래서 개인

도 겨레도 있는 처지에서 출애급하자고 「출서울기」란 제목을

잡았습니다.

이 글로 인하여 나 자신이 보다 성숙하며 읽는 이들에게도 재

미와 깊이 그리고 변화를 주기를 거듭 기대하며 이제 쓰기를

시작하겠습니다.

내가 태어난 곳은 경상북도 청송(靑松)땅이다. 청송이라면 이름

에도 나타나듯이 산 높고 골 깊기로 유명한 곳이다. 그 중에서

도 안덕면 사부실 마을은 산골 중의 산골로 내가 나서 자란 마

을이다. 1941년 초여름 온 마을이 보리베기 모내기에 한창이던

유월 열여드렛날 나는 태어났다.

당시 아버지는 일본 동경에서 택시 운전사로 일하셨다. 요즘으

로 말하자면 모범운전사쯤 되셨던 것 같다. 나는 네살 위인 형,

두살 위인 누나에 이어 셋째로 태어났다. 일본에 살던 어머니

는 나를 해산하시려고 고향에 오셨다가 산후조리가 끝난 후 일

본으로 가셨다. 우리 가정이 귀국선을 탄 것은 1945년 가을이

었다. 그때 아버지는 일본에 남으시고 어머니가 우리 4남매─

형, 누나, 나, 세살 아래 남동생─를 데리고 귀국하셨다.

그때 헤어진 아버지는 다시 뵐 수 없었다. 몇 년 후 일본 땅에

서 병사하여 한 줌의 재로 돌아오셨다. 어느 비 내리던 날에

우리 가족은 아버지의 유골을 산에 묻었다. 마침 내리던 비가

그치고 무덤 아래 골짜기에서부터 무지개가 일어 하늘로 뻗치

는 광경을 보시고 어머니는 『아버지는 저 무지개를 타고 천국

으로 가셨다』 하시며 눈물 지으셨다.

나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전연 없다. 다섯 살 때 헤어졌으니

몇 장면이라도 기억에 남아 있으련만 전혀 그렇지 못하다. 어

머니 말씀에 의하면 아버지는 비록 학력은 없으셨지만 독서를

즐겨 식견이 넓으셨다고 한다.

우리가 어렸을 때에 어머님은 가끔 톨스토이, 레고, 가가요 도

요히코(賀川豊彦), 우치무라 간죠(內村鑑三) 등 여러 위인이야

기를 들려주시곤 했다.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어머니는 언제

배우셨냐고 물을라치면 어머니는 『너희 아버지께 배운 것들이

야. 아버지는 수시로 내게 책을 사다 주며 읽으라고 권하고 읽

은 후에는 독후감을 서로 나누었다』고 하셨다.

그런 아버지의 영향인지 어머니는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책 읽

는 습관을 강조하셨다. 우리 형제들이 잡담으로 시간을 보낼라

치면 심하게 꾸중하시는 어머니였다.

『사람이 그렇게 시간을 헛되게 보내면 장래성이 없다. 한국이

일본에 뒤지는 것도 국민이 책을 읽지 않기 때문이야. 책 읽기

를 게을리하지 말아라』그래서 나는 어린 시절부터 책읽기가

습관이 되었다. 습관을 넘어 아예 체질이 된 것이다. 지금도 손

에 책이 들려 있지 않으면 무언가 몸에 균형이 맞지 않는 것

같아 거북함을 느낀다. 그런 점에서 나는 어머니께 감사드린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깡패기질

내친 김에 우리 집안 내력도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할아버지는 삼형제였다. 처음에는 경주에 사셨으나 부모를 잃

고 경주천 강가에 살다가 그만 홍수에 움막집이 떠내려가버렸

다. 집도 절도 없어진 삼형제는 걸어서 걸어서 청송 땅까지 와

서는 삼형제가 한 마을에서 머슴살이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삼형제가 모두 나이는 들어가는데 결혼하여 가정을 이

룰 수 없었다. 의지할 데 없는 형제들에게 딸을 줄 사람이 없

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형제들은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가정을

이룰 수밖에 없었다.

맨 위의 큰할아버지는 소위 「과부약탈결혼」을 하셨다. 평소

에 눈여겨 봐두었던 마을 과부가 있어 한밤중에 들이닥쳐서는

잠든 과부를 이부자리째로 큰 자루에 담아왔다. 그리고는 우격

다짐으로 첫날밤을 지내고는 다음날 아침에 무릎을 꿇고 정중

히 사과를 했다.

『죽을 죄를 지었소이다. 그러나 방법은 나빴지만 내 진심은

간절하외다. 그러니 이제 댁이 결정하시오. 어제 저녁 일은 없

었던 것으로 하고 이 길로 가시겠다면 고이 보내드리겠고 아니

면 이 몸의 아내가 되어주시오. 재물은 없어도 마음은 넉넉하

니 평생을 함께 누려봅시다』

머슴살이에 이골이 난 사람이 무슨 말인들 순서대로 했을까.

떠듬거리며 말하자과부댁은 생각외로 순순히 답하였다.

『이왕지사 이렇게 되었으니 아내가 되겠습니다. 모자라지만

아껴만 주십시오』

그렇게 되어 그 과부는 우리 집안의 큰할머니가 되셨다. 시작

은 그러하였지만 두 분은 평생을 금실 좋게 잘 사셨다. 둘째

할아버지의 경우는 좀더 거칠었다. 이웃 마을에 외딸만 데리고

사는 노인 부부가 있었다. 둘째 할아버지는 날이면 날마다 그

집에 가서 말했다.

『딸을 나에게 주시면 평생 두 어른을 편히 모시겠고 아니면

이 집에 불지르고 나도 같이 죽겠소』

이같이 협박조로 사정을 하니 처음에는 두 노인이 『이런 날강

도 같은 놈이 있나. 어찌 너 같은 놈에게 귀한 딸을 줄 수 있

겠느냐. 우리 집에 발도 들여놓지 말라』고 말했다. 그러나 애

초부터 그렇게 쉽게 물러설 사람이 아니었다. 날만 새면 그집

에 가서 딸을 주시오, 아니면 불을 지르겠다고 하기를 여섯 달

을 계속하니 두 노인은 수심이 짙어져 한숨만 쉬는 처지가 되

었다. 그때 딸이 부모님께 말했다.

『아버지 어머니, 제가 그 머슴에게 시집가겠습니다. 저 하나만

마음을 고쳐먹으면 두 분을 편히 모시는 길이 되리라 생각합니

다』

물론 노인 부부는 어림없는 소리라고 길길이 뛰었으나 딸이 차

분히 설득하여 혼인이 이루어졌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맺어진

인연이었으나 복되게 잘 사셨다.

그런데 우리 가정의 직계인 할아버지의 경우는 달랐다. 역시

어느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고 있던 어느 날 할아버지는 논매기

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낮에 순회 전도중이던 한 미국 선교

사가 논둑에서 논매기하고 있는 일꾼을 불러냈다.

『여보시오, 젊은 양반. 그렇게 일만 하지 말고 잠시 논둑으로

나와 보시오. 내 긴하게 드릴 말이 있소이다』젊은 머슴은 눈

이 파란 선교사의 요청에 따라 논둑으로 나왔고 거기서 복음

(福音)을 듣게 되었다. 그는 예수를 믿기로 작정했다. 그러나

머슴살이하는 처지에 신앙생활을 하기는 쉽지 않았다. 주인댁

의 농사일을 맡은 머슴 주제에 주일은 노동하지 말고 안식(安

息)하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지키기가 어려웠다.

그는 토요일 밤에는 밤을 새워 나무 두 짐을 해놓고 다음날 교

회에 갔다. 모내기철에는 달빛에 밤새 모를 심고 다음날 주일

을 지켰다. 그렇게 머슴살이와 신앙생활을 성실하게 잘 감당하

였더니 주인집에서 그 성실함에 감명을 받아 데릴사위를 삼았

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부르주아 유산계급(有産階級)과 프롤

레타리아 무산계급(無産階級)이 합한 셈이다.

그렇게 맺어진 내외분에게서 삼 형제가 태어났고 삼 형제 중

막내 아들이 나의 아버지다. 나는 그래서 조상들의 내력을 떠

올릴 때면 내 속에 양반기질 깡패기질이 공존한다고 느낀다.

모범생 기질과 문제아 기질이 내 속에 공존해 이 사이를 왔다

갔다 하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이 할아버지 때로부터 물려받은

집안 내력과 관계 있는 일이거니 생각된다.

그런데 아버지는 모범생 기질만 타고난 분이었던 것 같다. 어

려서부터 착실하여 칭찬을 들으며 자랐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

형제들이 자랄 때 어긋난 짓을 할라치면 어머니께서 아버지의

어린 시절에 견주어 꾸중하곤 하셨다.

『얘들아, 너희 아버지는 자랄 때 그렇게 착하셨다는데 너희는

왜 아버지를 닮지 않고 빗나가는 거냐』

그럴 때면 나는 『아버지가 아무리 착하셨어도 일찍 죽었으니

착한 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우리는 덜 착하고 오래 살렵

니다』 하며 어머니 속을 썩이곤 했다.

아버지가 결혼하실 때는 그 착한 성품이 한몫을 했던 것 같다.

우리 집안은 경주 김씨이긴 하지만 워낙 근본이 없는 삼형제

머슴 집안이었던지라 안동 권씨인 외가에서 딸을 쉽게 주려 하

지 않았다.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혼사 말이 나왔을 때 그런

근본 없는 집에 딸을 시집 보낼 수 없다고 외할머니께서 반대

하셨다. 그러나 시집갈 당사자인 어머니가 직접 나서서 말했다.

『나는 그 사람이면 시집가겠습니다. 집안 좋고 나쁘고가 무슨

상관 있어요. 본인이 신실하면 되지요』

당시의 시골 풍속으로는 처녀가 그렇게 당차게 나서기 어려운

시대였다. 어머니 말씀인즉, 초등학교 시절 같은 학교를 다니면

서 워낙 신실하고 자상해서 그때부터 속으로만 좋아하다가 청

혼이 들어와 기뻤는데, 부모들이 반대하기에 혹시나 일을 그르

칠까 하는 조바심에 본인이 나섰다고 하셨다.


『어머니 술 깨요. 이 판에 웬 목삽니까?』

우리 집안에 어머니 같은 분이 들어오신 것은 큰 축복이었다.

아버지 본인은 성실하였다지만 4남매를 남기고 일본땅에서 돌

아가셨다. 어머니는 삯바느질로 연명하면서 4남매를 모두 대학

까지 나오도록 뒷바라지하셨다. 말하자면 어머니의 교육열이

우리들은 사람 구실하게 한 셈이다.

아버지는 일본땅에서 숨을 거두면서 친구에게 『아내에게 아이

들 교육을 부탁한다고 전해주시오』 하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아버지가 남긴 유일한 재산은 재봉틀 한 대였다. 그것이 우리

가정의 호구지책이 되었다. 어머니는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재봉틀을 밟으며 옷을 지었다. 어린 우리들은 재봉틀 돌아가는

소리를 잠결에 들으며 자랐다. 명절을 앞둔 때에는 바느질감이

밀렸다. 어머니는 밤새워 재봉틀을 밟으시다가 가끔은 한밤에

나를 깨웠다.

『홍아, 너 찬송 한 곡 불러주려무나』

『어머니, 왜 만날 나만 깨워요? 누나나 동생도 골고루 깨우시

지요』

『그렇잖다. 네 목소리가 제일 은혜가 된다. 그리고 넌 앞으로

목사가 될 사람 아이가. 목사 될 사람이 찬송을 불러야제』

어머니는 내가 어려서부터 장래에 목사가 되기를 바라셨다. 하

루도 빠짐없이 어머니는 자식들의 장래를 위해 기도하셨다. 우

리 형제들은 새벽마다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어머니의 기도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어머니의 기도에서 내 차례가 되면 으

레 나오는 내용이 『셋째 홍이는 장차 하나님의 종이 되어 나

라에 쓰임 받게 해주시옵소서』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그런 기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시골 교회에서 고생하

시는 목사님을 보고 『목사 되면 가난하고 가족들 고생만 시킨

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어느 하루는 어머님 심부름으로

목사님 사택에 심부름 갔다가 사모님이 부엌에서 앞치마로 눈

물을 닦으며 울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때부터 목사란 자리

는 마누라 눈에 눈물나게 하는 자리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

다. 그래서 나를 목사 되게 해달라는 어머니의 기도에 이의를

제기했다.

『어머니, 어머니는 왜 만날 나를 목사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

십니까?』

『얘야, 목사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자리인지 아느냐?』

『아녜요. 그렇게 영광스러우면 형이나 동생한테 목사 돼라 하

세요. 나는 장군이나 변호사가 되렵니다』

『나는 네가 목사가 될 자질이 있다고 본다. 이 에미는 네가

목사 되는 걸 보는 것이 소원이다. 네가 지금은 목사 되는 걸

싫어하지만 넌 꼭 목사가 될 거다. 이 에미의 기도가 꼭 응답

받을 거다』

나는 대학 시절 한때 신앙을 잃고 무절제한 생활에 빠졌던 때

가 있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밤 늦게 집으로 돌아

와 화장실에서 웩웩 토하고 있을라치면 어머니가 등을 치면서

말했다.

『이 목사야 정신 차려라!』

『어머니 술 깹니다. 이 판에 웬 목삽니까?』

『아니다. 네가 무슨 짓을 하고 다녀도 넌 결국은 목사가 될

게다』

대학을 졸업하고서도 2년여의 방황을 거치다가 드디어 예수를

만나고 나서 나는 목사가 되려고 신학교에 입학했다. 내가 어

머니께 신학교에 들어가겠다고 말씀드리자 어머니는 기뻐서 춤

을 추기까지 하셨다. 그리고 내가 신학교 2학년 때 빈민선교하

겠다고 빈민촌으로 들어간다니까 주위 다른 사람들은 그런 무

모한 짓은 말라고 한결같이 만류했다. 그러나 어머니만은 달랐

다.

『잘하는 일이다. 이왕 목사 되려면 편한 목사 되지 말고 그렇

게 해야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으니

네가 빈민촌에 가는 것은 크게 잘하는 거다. 네 아버지도 그런

정신을 가졌었다. 네가 아버지의 뒤를 잇는구나』

글을 돌이켜 밤새워 재봉틀을 밟으시던 어머니가 나를 깨워 찬

송 한 곡 부르라고 이르실 때면 나는 어머니께 『무슨 찬송 부

를까요?』 하고 묻곤 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늘 부르던

찬송 「내 주를 가까이」 있잖냐. 시원하게 한 번 불러라』고

하셨다. 내가 잠결에나마 목청을 가다듬고 찬송가 364장을 부

를라치면 어머니는 눈을 지그시 감고 들으시고는 『시원하다.

넌 참 은혜스럽게 부르는구나』 하시며 만족해 하셨다.

그런 덕분에 나는 364장 찬송만은 어려서부터 4절까지 다 외울

수 있었다. 그것이 훗날 나 자신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될 줄은

그때는 짐작조차 못했다. 나이 가 들어가면서 나 자신이 세상

풍파에 시달리며 어려운 처지에 이를 때마다 나는 무심결에

「내 주를 가까이 하려 함은…」 찬송을 부르곤 했다. 이 찬송

을 마지막까지 부르는 동안에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고 여유가

생겨나는 것이었다.


감옥에서 마주친 목사와 목사아들

1974년 정치범으로 옥중에 있던 때가 기억난다. 그때 나는 박

정희 대통령의 긴급조치 위반으로 15년형을 살고 있었다. 매섭

게 추운 겨울 날씨에 나는 독방을 서성거리며 찬송을 불렀다.

어머니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익숙하게 부르던 「내 주를 가까

이 하려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를 흥얼거리고 있었

다. 그런데 옆 방에서 벽을 쾅쾅 치는 소리가 들렸다.

『옆방에 찬송 부르는 선생님, 찬송 부르는 선생님』

『예? 저를 부르십니까? 누구신지요?』

『예, 선생님 저는 옆방에 있는 미결수입니다. 폭행으로 들어왔

습니다』

『아 그러세요. 그런데 저를 왜 부르십니까?』

『선생님, 죄송스럽습니다만 지금 부르시던 찬송을 좀 소리높

여 불러주십시오. 가사를 적고 싶은데 잘 들리지 않습니다』

20대 초나 되었음직한 젊은이의 음성이었다. 나는 의아해 하며

되물었다.

『소리를 높여 부르기는 하겠습니다만 어쩐 일로 그러시는지

요?』

나의 물음에 젊은이는 자기의 사연을 말해주었다. 자기는 시골

목사의 아들로서 목사인 아버지가 가족을 너무 고생만 시키는

일이 큰 불만이었다. 그렇게 한다고 교인들이 알아주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더라는 것이었다. 때로는 아버지가 교회 장로나 교

인들에게 구박받는 것을 볼 때는 미칠 것만 같았고, 그렇게 살

아가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 아버지에 대한 반발로 자기는 깡패가 되었노라 했

다. 나가서 싸움질을 일삼고 때로는 교인 자녀들을 때려주는

등 말썽을 일으켰다. 그런 자기를 어머니가 울면서 달래고, 붙

들고 기도하고, 때로는 손잡고 찬송을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그때에 어머니가 즐겨 부르시던 찬송이 바로 내가 부르고 있는

찬송이라고 했다. 이번에도 폭행으로 들어와 재판을 기다리고

있는데 옆방에서 내가 부르는 찬송 소리를 들으니 눈물이 쏟아

지고 어머니에 대한 죄스러움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고 그

렇게도 밉기만 하던 아버지가 그리워 견딜 수 없다는 것이었

다. 그래서 나를 따라 찬송을 함께 부르며 가사를 적으려고 애

쓰는데 목소리가 너무 낮아 잘 들리지 않으니 좀더 높은 목소

리로 불러달라는 부탁이었다.

나는 그의 그런 사연을 듣고는 가슴이 찡하여 한 구절 한 구절

을 일러주며 함께 불렀다. 서로 얼굴도 모르는 사이에 벽을 가

운데 두고 소리로만 통하는 처지였지만 나도 그도 울며 찬송을

불렀다.

『내 주를 가까이 하려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내 고생하는 것 옛 야곱이 돌베개 베고 잠 같습니다. 꿈에도

소원이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그는 끝내 통곡하였고 우리 둘의 대화는 그것으로 끝났다.

그 일이 있은 지 두어 달이 지난 어느 날 낯 모르는 한 부인이

면회를 왔다. 50대 초의 부인을 면회장에서 만난 나는 의아스

러워 물었다.

『처음 뵙는 분인 것 같은데요? 저를 찾아오신 것 맞습니

까?』

『예, 선생님, 저를 모르시겠지요. 선생님께서 두 달 전에 옆방

에 있는 청년에게 찬송가를 가르쳐주신 일 기억나세요?』

『예, 기억납니다. 목사 아들이라던 청년 말이지요』

『예, 맞습니다. 제가 그 에미 됩니다』

『아! 그럼 목사 사모님 되십니까?』

『예, 제가 목사 사모이고 그 애의 에미 됩니다. 선생님이 찬송

을 가르쳐주신 그 애가 제 맏아들입니다』

『사모님 반갑습니다. 그런데 웬일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자세히 말씀드리지요. 아들이 얼마 전 집행유예를 받고 출감

했습니다. 그런데 감옥에서 나온 후로 새사람으로 변했습니다.

속 썩이던 옛날 모습은 씻은 듯이 사라지고 착실한 사람으로

변했기에 제가 물었습니다.

「얘야, 너 감옥에서 무슨 일이 있었니. 감옥 갔다 오더니 그렇

게 변할 수가 없구나」 그랬더니 감옥에 있을 때 옆방에 계시

던 선생님 만난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선생님이 가르쳐주신

찬송을 따라 부르면서 통곡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

러고 나서는 이제 출감하면 목숨 걸고 사람답게 살아야겠다고

맹세했다고 합니다. 아들이 변하게 된 내력을 들은 남편이 그

렇게 고마운 분을 얼른 가서 뵙고 인사라도 드리라고 나를 보

냈습니다. 선생님은 우리 아들의 은인이시고 저희 가정의 은인

입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그 사모님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가면서 차근차근 말해주었

다. 나도 가슴이 찡하고 감동이 전해왔다. 그래서 나도 내 어머

니의 이야기를 들려드렸다.

『저도 지금 이 찬송을 부를 때마다 어머니 생각을 합니다. 제

가 자라며 고달플 때마다 이 찬송을 불러달라고 하시던 어머니

를 생각하며 감옥생활을 이겨나가고 있습니다』

그 사모님께서는 어려운 처지임에도 나를 위해 영치금까지 넣

고 가신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그렇게나마 고마움을 표

시하고 싶었나 보다.


만화 보며 상상력 키우다

다시 어머니 이야기로 돌아가야겠다. 아버지의 유언이 자녀교

육이었음은 이미 말한 대로다. 그래서 그런지 어머니는 우리들

의 교육에 관한 한 거의 광적이었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우리 교육에는 양보가 없었다.

그런 어머니는 나의 초등학교 때부터 읽을거리들을 구해다 주

셨다. 시골에서 책 구하기가 어려웠던 시절이었던지라 어머니

는 먼데서 사는 친척집까지 찾아다니며 읽을 만한 책들을 빌려

다 주셨다. 그렇게 빌려온 책 중에 만화책이 있었다. 만화책이

거의 없던 그 시절에 어떤 경로를 거쳤는지 몇 권의 만화책이

내 손에까지 오게 되었다.

그때 그 만화책이 내게 준 영향은 가위 절대적이었다. 『밀림

의 왕자』란 제목의 만화였다. 인쇄도 조잡하고 내용도 엉성했

다. 그러나 나에게는 신기하기만 한 내용이었다. 나는 그 만화

책을 읽고 또 읽었다. 나중에는 몇 페이지에 어떤 그림이 있는

지 훤히 알 만큼 읽었다. 기억을 더듬어 그 내용을 적어 보겠

다.

「한 한국인 가족이 아프리카 하늘을 비행기로 날아가다가 그

만 비행기가 고장을 일으켜 아프리카 밀림 한가운데에 떨어졌

다. 비행기에 탑승했던 사람들은 모두 죽고 한 아이만 살아남

았다. 철민이란 이름의 한국 아이였다. 졸지에 부모를 잃고 밀

림에서 혼자 살아남은 철민이를 밀림의 동물들이 돌봐주었다.

여러 동물들의 도움을 받으며 자란 철민이는 어느새 밀림의 왕

자로 성장해 갔다. 그는 밀림에 정의를 세워 나가는 왕자가 되

었고 친구들인 동물들을 보호하는 지도자의 위치에 이르렀다.

때로는 원주민들을 괴롭히는 침략자들을 물리치기도 했다」

나는 그런 내용을 읽으며 나 자신이 아프리카 밀림 속을 주름

잡고 다니는 철민이가 되었다. 밀림 속 맹수들이 울부짖는 소

리, 토인들의 북소리, 코끼리들의 지축을 흔드는 발소리, 그런

한가운데를 질주하는 철민이. 이런저런 모습과 소리를 연상하

며 나의 상상력은 자라갔다. 나는 잠을 자도 아프리카 밀림 꿈

을 꾸었고 나 자신이 철민이가 되어 밀림을 주름잡는 꿈을 꾸

었다.

우리 어린 시절에 농촌에서는 아이들에게 소 먹이는 일을 맡겼

다. 집집마다 소 한 마리씩은 있던 때인지라 학교가 파한 후,

마을 아이들은 집에 가서 식은 보리밥을 먹고는 소를 몰고 마

을 뒷산으로 갔다. 산골짜기에 소들을 풀어놓고 나면 우리만의

시간이었다. 골짜기 개울물에 미역 감기, 땅 뺏기, 닭 싸움, 술

래 잡기 등으로 놀이가 이어졌다. 그러다가 놀이에도 싫증나면

둘러앉아 이야기판이 벌어진다. 그렇게 되면 이야깃거리가 많

은 아이가 스타로 등장하게 마련이었다.

나는 어느새 마을 동무들 사이에 이야기꾼으로 등장하였다. 만

화책 『밀림의 왕자』 덕분이었다. 나는 산 기슭 확 트인 공지

에서 읽은 내용에다 상상력을 동원하여 신명나게 이야기를 풀

어 나갔다. 이야기에 분위기가 잡히고 열이 오르면 나 자신이

철민이가 되어 온갖 동작을 실연해 보이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밀림 속에서 토인들이 북소리를 울리는 장면이 나올 때는 입술

로 침을 튀기며 북소리를 냈고, 적이 공격해 오는 장면에서는

입에 거품을 물고 전투를 지휘하는 장면을 설명했다. 그렇게

이야기에 열중하노라면 듣는 아이들도 감정이 하나가 되어 함

께 탄식하기도 하고 신음하기도 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야기 소재는 한정돼 있는데 소 먹이기는 날마

다 계속되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이야기를 계속하라고 재촉하

기만 하니 나는 어쩔 수 없이 상상력을 동원하여 창작하는 수

밖에 없었다. 어떻게 하면 이야기 줄거리를 바꿔 가면서 동무

들을 즐겁게 하느냐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그렇게 한 덕분에

나의 상상력은 날로 발전하였다.

내 이야기에 중독이 되다시피 한 마을 동무들은 소먹이기가 끝

나고 집에 돌아온 저녁에는 우리집으로 모였다. 그리고는 도시

이야기를 하라고 졸랐다. 나는 그냥 이야기만 할 것이 아니라

실리(實利)를 챙겨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궁리 끝에 『이야기

를 들으려면 집에서 굵은 감자 한 알씩을 가지고 와. 그게 입

장료다. 감자를 가져온 사람만 회원이 되어 이야기판을 벌이

자』고 말했다.

나의 첫사랑 「옥수」

우리 집은 가난했다. 농촌에서 논도 밭도 없는 터에 어머니 삯

바느질로만 살아가려니 궁하기만 했다. 양식도 채소도 늘 부족

했다. 집안의 부족한 반찬조달을 위해 감자를 가져오라고 했더

니 마을 아이들은 두말 없이 내 제안을 따랐다. 저녁마다 한

바가지씩의 감자가 모였다. 말하자면 상상력을 동원한 이야기

덕분에 집안에 보탬이 되었던 셈이다.

나는 지금도 그 또래의 아이들에게는 만화를 많이 읽혀야 한다

고 강조한다. 만화책 읽고 동화 듣고 서로가 이야기를 나누며

아이들의 상상력은 발전한다. 그리고 그런 상상력의 바탕에서

창조력이 자란다. 그 상상력과 창조력은 일생을 살아가는 데

중요한 활력소이고 재산이다. 그러니 국력을 기울여 좋은 만화

책을 발간해 어린이들로 하여금 읽게 하여야 한다.

초등학교 시절 나에게 첫사랑이 있었다. 첫사랑이라고 하니까

그럴 듯하지만 내용은 보잘것없는 이야기다. 혼자서 가슴앓이

하다 끝나버렸으니 사랑이랄 것도 없는 내용이긴 하다.

우리 가족과 비슷한 시기에 일본에서 귀국선을 타고 온 이웃

중에 옥수라는 이름의 소녀가 있었다. 예쁘장한 얼굴에 총명했

다. 부모들끼리 친분이 있는데다 교회를 함께 다녀 우리는 가

까이 지냈다. 내가 옥수와 나란히 걷노라면 동무들이 놀려댔다.

『얼레덜레요 홍이하고 옥수하고 붙었다네』

『얼레덜레요 둘이 붙었다네』

옥수는 그렇게 놀림을 받을 때마다 얼굴을 붉히며 싫어했지만

나는 싫지만은 않았다. 학예회 때 연극에서 나는 옥수와 함께

주인공으로 뽑혔다. 옥수는 낙랑공주가 되고 나는 호동왕자가

되었다. 우리는 만장한 청중들로부터 박수를 받았다. 나는 그녀

옆에 있으면 즐거웠고 그녀 몸에서 향내가 나는 듯했다. 그 나

이에 그녀와 입맞춤 하는 꿈을 꾸곤 했다.

그런데 갑자기 옥수가 일본으로 가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가

가족들을 일본으로 다시 데려가게 된 것이다. 그 소식을 듣는

순간 하늘이 깜깜해졌다. 낙심하여 학교에 조차 가기 싫어졌다.

풀이 죽어 하루하루를 보냈다. 드디어 옥수가 떠나는 날이었다.

그녀는 교실에서 작별인사를 하고는 떠났다. 나는 그대로 헤어

질 수 없다는 생각에 지름길로 달려가 옥수가 지나가는 길목을

지켰다. 길가 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나는 드디어 그녀의

모습이 보이자 앞에 나타나 인사를 했다.

『옥수야, 너 정말 가니?』

그러나 나의 안타까운 물음에 대한 그녀의 반응은 너무나 시큰

둥했다.

『그럼. 가는 거지』

옥수가 별다른 관심없이 내 앞을 지나쳐 버리자 나는 더욱 슬

프고 비참해졌다. 그녀가 내 곁을 떠난다는 슬픔에다 내 속마

음을 너무나도 몰라준다는 섭섭함에 나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

한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보리밭에 들어가 밭이랑 사이에 엎

드려 하염없이 울었다. 그리고는 다짐했다. 『훌륭한 사람이 되

어 옥수 앞에 나타나야지. 그래서는 청혼을 해야지. 그렇다. 옥

수를 각시로 삼으려면 성공해야 한다. 절대로 성공해야 한다』

고 다짐했다.

그 후로 나이가 들어갔어도 옥수에 대한 그리움은 지워지지 않

았다. 후에 30이 넘어 일본을 방문했을 때도 나는 옥수의 행방

을 찾았다. 간신히 그녀를 찾았으나 그녀는 이미 결혼한 후였

다. 나는 어린 시절의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며 한번 만나보고

라도 싶었으나 그녀의 어머니의 말을 듣고는 포기하고 귀국해

버렸다. 그녀 어머니의 말인즉 간단했다.

『이 사람아, 지금 그 나이에 결혼하여 잘 사는 사람을 만나서

는 무엇하려는가?』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여름에 갑자기 폭풍이 불어닥쳤다. 6·

25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인민군이 우리 마을에 처음 들어오던

날에는 마을 강아지들조차 겁을 먹은 듯했다. 6·25는 먼저 순

경들의 허둥대는 모습에서 시작되었다. 겁먹은 얼굴의 순경들

이 남쪽 길로 사라지자 마을에는 쥐 죽은 듯한 고요가 있었다.

그리고 얼마가 지난 뒤 군가를 부르며 인민군이 밀어닥쳤다.

그때로부터 전쟁이 끝날 때까지 자그마한 시골 마을에도 날마

다 사건들이 이어졌다. 울음소리, 총소리, 비행기 폭격소리, 그

리고 사람들과 짐승들의 죽음이 계속되었다. 인민군이 마을로

들어오고 나서 얼마 지난 후부터 마을 머슴들의 눈동자가 달라

지기 시작했다. 해방의 시대가 왔다며 눈에 빛을 내면서 밤낮

으로 움직이는 것이었다.

어느 날 밤 나는 외갓집 머슴과 어머니가 두런두런 나누는 이

야기를 잠결에 듣게 되었다. 어머니를 설득하려는 머슴의 입에

서는 「평등세상」 「새 세상」 「머슴과 주인이 없어지는 세

상」 등의 말이 계속 나왔고 어머니는 차분한 음성으로 대답하

고 있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공산당과는 맞지 않아요. 하늘나라

에서는 주인도 머슴도 없어지겠지만 아직 세상에는 주인이 있

고 머슴이 있지요』

나는 두 분의 대화를 들으며 예수님께 기도했다.

『예수님 우리 어머니가 공산당 꾐에 넘어가지 않게 지켜주세

요』

공산주의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나는 그렇게 기도드렸다. 인

민군들이 마을에 머물고 있는 동안 미군 비행기들의 폭격이 그

칠 사이 없었다. 폭격을 피해 마을 사람들은 산골짜기로 피난

을 갔다. 골짜기 깊숙이 들어가 굴이나 바위 밑에 몸을 의지하

고 비행기의 폭격을 피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미군 비행기의 폭격이 피난민들이 모이는

곳으로만 쫓아왔다. 정작 인민군들이 있는 곳은 폭격하지 않고

애꿎게 피란민들이 있는 곳만 찾아 내 폭탄을 떨어뜨리고 기관

총을 드륵드륵 퍼부었다. 그로 인해 숱한 피해가 생겼다. 한번

은 폭격이 유난히 심하더니 하늘에서 불덩어리가 연방 떨어지

면서 땅이 갈라질 듯한 소리가 골짜기에 울려퍼졌다. 마을 사

람들은 골짜기 땅바닥에 엎드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채 떨고

있었다. 나도 어른들 사이에 끼여 비행기 소리, 폭탄 터지는 소

리를 듣고 있었다. 그러다가 슬그머니 짜증이 나기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 보면서 말했다.

『젠장, 맞아 죽는 게 아니라 놀라서 죽겠네』

나의 이 말이 떨어지자 마을 사람들이 일제히 와아하고 웃었

다. 그렇게 웃고 나서는 모두 긴장이 풀렸는지 분위기가 바뀌

었다. 마을 어른들은 나를 보면서 『그래 너 말이 맞다. 폭탄에

맞아 죽는 기 아니라 소리에 놀래 죽겠다』 하고는 서로 여유

를 가지고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늘을 쳐다보며 비행기

가 내리 꽂히는 모양을 구경하며 여유있게 잡담을 나누게끔 분

위기가 바뀌었다. 유머가 가지는 힘을 실감케 한 경우였다.

전쟁이 계속되면서 마을의 젊은이들은 군인으로 뽑혀나갔다.

어느 집이든 그 집 아들에게 징집영장이 나오면 그 집은 울음

바다가 되었다. 전쟁터에 나간다는 것은 바로 죽음을 뜻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전쟁터에 갔던 사람

들의 「잿봉지」가 배달되는 숫자도 늘어났고, 그런 잿봉지가

마을 어느 가정에 도착할 때마다 마을에는 한 차례씩 울음판이

벌어졌다. 그리고 마을 공동묘지에는 새 무덤이 늘어만갔다.

거칠어만 가는 어린 영혼들

그러나 어른들의 전쟁판이 계속되는 중에서도 아이들의 놀이판

은 멈추지 않았다. 다만 우리들의 놀이판도 그 내용이 어른들

의 전쟁판은 닮은 것이 다를 따름이었다. 우리는 전쟁판에서

보고 배운 대로 전쟁놀이를 벌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아이들의

놀이 세계는 단지 어른들의 세계에서 배운 대로를 되풀이할 따

름이다.

전쟁이 깊어지면서 아이들의 행동도 욕설도 변했다. 전쟁 전에

는 우리 아이들에게 서로 기분이 상하면 기껏 한다는 욕이

『너 그러면 좋지 못해. 그러지 마』 정도였다. 전쟁이 시작된

후에는 『너 그러면 죽어』로 변했다. 그러나 전쟁이 계속돼

여기 저기에 시체들이나 뒹굴자 아이들의 욕도 변했다. 『이

새끼야, 당장 죽여버린다』 하더니 얼마 뒤에는 『이 새끼 찢

어 죽인다』 『각을 떠버린다』로 거칠어졌다.

본래 착하기만 하던 우리 백성들이 동족간에 전쟁을 치르면서

거칠어지고 살벌해지면서 불신사회로 변질되어 갔다. 그래서

전쟁피해 중에 인명피해 못지 않은 것이 착했던 국민성이 난폭

해진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그런 피해는 눈에 보이지 않기에

모두가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따름이다.

전쟁은 계속되고 마을엔 아직 인민군들이 머물고 있던 어느

날, 마루에 계시던 외할아버지께서 느닷없이 고함을 지르셨다.

『야들아, 다 나와서 저기 하늘을 봐라』

식구 모두가 놀라 할아버지가 가리키는 쪽 하늘을 보았다. 하

늘 저 멀리에 유엔군 비행기들이 편대를 지어 북쪽으로 날아가

는 모습이 보였다. 비행기 꽁무니에서 하늘을 가로질러 흰 줄

들이 그려졌다. 할아버지는 그날 이후로 얼굴이 밝아지시며 유

엔군이 참전했으니 전쟁은 이기게 되었다. 참고 견디기만 하면

인민군은 물러가게 돼 있다고 가족들을 격려하셨다.

독실한 크리스천이셨던 할아버지는 공산주의가 정말 싫었던 것

이다. 빈농들과 머슴들이 인민군들과 어울려 마을을 휘젓고 다

니는 동안에도 할아버지는 입을 굳게 다문 채 인민군이 퇴각할

때만 기다리고 계셨다.

얼마 후 비행기에서 전단이 뿌려졌다.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하

여 전세(戰勢)가 승리로 바뀌게 되었으니 적 치하 애국 시민들

은 참고 기다리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밤중에 어머니가 우리를 깨우셨다. 어머니는

쉬 하시면서 마당을 가리켰다. 달은 대낮같이 밝고 사방은 조

용한데 어머니는 마당 한가운데만 지켜보고 계셨다. 우리 형제

들은 영문을 몰라 숨을 죽이고 어머니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

았다. 그런데 마당 한가운데 놓인 풀더미가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산 짐승처럼 풀더미가 서서히 이동하고 있었다. 하나 둘

셋 움직이는 풀더미는 열 개가 넘었다. 풀더미들은 넓은 마당

을 가로질러 인민군 지휘부가 있는 곳으로 움직여 갔다. 어머

니께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얘들아 국군이다. 국군 아저씨들이 들어오고 있다. 조용히 해

라. 인민군들이 눈치채면 안 된다』

풀더미들은 나뭇가지와 풀로 위장한 국군들이었다. 국군 선발

대가 인민군이 점령하고 있는 마을에 한밤에 침투하는 중이었

다. 얼마 시간이 지난 후 고함소리, 총소리가 고막이 찢어질 듯

이 들리고는 조용해졌다. 그리고는 총 맞은 부상병들의 신음소

리만 남았다.

총 맞은 인민군 대부분은 어린 나이였다. 10대 소년들이 배에

총을 맞고 창자를 마당에 흘리며 『어머니―, 어머니―』를 연

달아 부르고 있었다.

다음날부터 세상이 달라졌다. 진입해 들어온 국군들은 외가에

본부를 정해 온 집안에 국군들이 가득하고 왁자지껄했다.

피란 갔던 마을 사람들이 돌아오자 마을 분위기는 되살아났다.

죽은 인민군들의 시체를 감나무 아래 묻고 마을 사람들은 농사

를 다시 시작했다.

그렇게 마을 분위기가 안정되자 마을 아이들은 중단되었던 놀

이판을 다시 시작했다. 우리는 어른들의 전쟁판에서 배운 대로

놀이판을 벌였다. 처음에는 옥수숫대에 새끼줄을 묶어 총이랍

시고 어깨에 메고는 우리끼리 편가름하여 싸우는 정도였다. 그

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의 전쟁놀이판은 켜졌다. 옥수숫대

총은 목총으로 바뀌고 목총은 다시 진짜 총들로 바뀌었다. 전

쟁터에서 주워 모은 여러 가지 총들로 무장한 것이다. 다만 총

알이 없을 따름이지 진짜 총이었다.

그리고 한 마을 안에서 골목 싸움으로 시작되었던 놀이가 점차

이웃 마을과 벌이는 전투로 발전했다. 마을 아이들은 편대를

포병대, 돌격대, 특공대 등으로 부대 이름을 붙여 군사훈련도

하고 작전회의도 열었다.

포병대 아이들의 주력 무기는 박격포였다. 내용인즉 박격포 탄

피에 총알을 분해하여 뽑아낸 화약가루를 넣는다. 거기에 불붙

은 숯덩이를 넣는다. 그리고는 기관총 탄피를 뒤집어 박격포

탄피 속에 꽂은 다음 막대기로 위에서 탁 쳐서 안으로 박아넣

었다. 그러면 안에 들어간 숯불로 화약이 폭발하면서 기관총

탄피가 슝 하고 날아간다. 이것이 포병대의 주력무기였다.

이웃 마을 아이들과 전투가 벌어지면 먼저 포병대가 수십 발의

포탄을 상대방 진지 쪽으로 날린다. 뒤이어 특공대가 앞장서서

진격해 들어간다. 그 뒤를 이어 돌격대가 ‘와’ 함성을 지르

며 뒤따랐다. 기세가 눌리는 마을이 후퇴하게 마련이었고 후퇴

시에 미처 못 따라가고 뒤처진 아이들은 포로로 잡혔다.

그렇게 잡혀온 아이들은 비행기 폭격으로 불타버린 창고 건물

에 갇힌다. 마을 어른들이 뒤늦게 알고는 와서 데려가거나 잠

시 고생을 시키다가 돌려보내기도 했다.

나는 마을 형들이 용감하다고 부추기는 통에 우쭐하여 특공대

중대장이 되었다. 우리 또래 마을 아이들 중에 제일 용감하고

영리하다고 맡겨진 것이다.

『도망대 중대장 김진홍』

그러나 얼마 후에 전혀 용감하지 못하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말

았다. 그때 그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화끈 달아오를 만

큼 부끄러워진다.

자초지종은 이렇다. 어느 가을 날 오후에 우리 마을 군사들은

보무도 당당하게 이웃 마을로 진격해 들어갔다. 우리 부대 선

두에는 당연히 특공대가 섰고, 특공대 앞장에는 당연히 중대장

인 내가 섰다. 윗마을 입구는 내리막길이었다. 나는 앞장서서

좌우를 살피며 내리막길을 가는데 속마음은 몹시 두렵고 떨렸

다. 그러나 물러설 처지도 못되는지라 두려움을 고함소리로 감

추며 들어갔다. 그런데 전방 감나무 숲에서 난데없이 돌멩이들

이 날아왔다. 내가 주춤하는 순간 내 옆에 있는 대원이 『아

야!』 하며 이마를 감싸고 고꾸라지는데 손가락 사이로 피가

뿜어 나왔다.

나는 공포심에 휩싸여 앞뒤를 돌아볼 자제심을 잃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무조건 도망쳤다. 도망치는 나의 앞뒤로 돌멩이

들이 날아와 슛슛 하고 박혔다. 불행히도 되돌아오는 길은 오

르막이었다. 그 길이 얼마나 길고 길게 느껴졌는지…. 나는 죽

을 힘을 다해 도망쳐 집으로 왔다. 집에 오니 바느질하시던 어

머니가 나를 물끄러미 보시며 말했다.

『어디서 무얼하다 왔기에 그렇게 숨차 하느냐?』

『아니에요. 놀다 왔습니다』

『놀다 오는데 그렇게 요란스럽냐?』

『아무것도 아니라니까요』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란 듯이 방으로 들어가 이틀간을 문

밖 출입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이틀 후에 골목에 나갔더

니 세상이 바뀌어 있었다. 마을 아이들은 나를 보자 입을 삐쭉

대며 놀려댔다.

『특공대 중대장 김진홍,도망대 중대장 김진홍,특공대 중대장

김진홍,도망대 중대장 김진홍』

나는 괴로운 심사를 풀 길 없어 집으로 돌아와 누워버렸다. 돌

멩이에 이마가 터졌던 옆집 아이는 다친 자리에 된장을 발라

헝겊으로 칭칭 감은 채 몇 달을 지냈다. 나는 골목에서 그의

모습이 비치기만 해도 얼른 피해버리곤 했다. 지금은 그도 오

십줄의 사나이가 되어 처자식을 거느리고 있을 것이다. 어느

마을에서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돌 맞은 자리에 흉터는 남지 않았는지….


신동이라 불리게 된 사연

그 즈음 어머니는 밤낮 재봉틀에 앉아 계시고 형은 삼촌댁에

가 있었던지라 밥짓기는 누나 몫이었고 땔감 구하기는 내 몫이

었다. 나는 초등학교에 들어가자 산으로 땔감 구하러 다녔다.

나보다 더 큰 지게를 지고는 이 산 저 산 다니며 땔감을 구해

왔다. 외가 행랑채의 한 칸 방에 살고 있었던 우리는 여러 가

지로 외가 신세를 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나무하러 갈 때마다 낫이며 톱 같은 연장을 외가에서 빌

려 사용했다. 그러면서 가끔은 망가뜨리기도 하고 잃어버리기

도 했다. 그런 일이 잦으니 외할머니께서 나를 볼 때면 연장을

가져다 버린다고 핀잔이셨다.

나는 외할머니의 그런 핀잔이 못마땅했다. 어느 날 오후에도

산에 가려고 지게를 지고 집을 나서려는데 마루에 앉아 계시던

할머니가 소리를 지르셨다.

『홍아 이눔아 연장이란 연장은 다 가져다 버리고는 또 연장

가져가느냐. 지금껏 갖다 버린 연장 다 내놓아라』

나는 화가 나서 외할머니 쪽으로 돌아서며 바지를 내렸다. 바

지춤에서 고추를 끄집어내어 한 손으로 잡고는 할머니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할메요. 연장 여기 있심더. 이 연장이면 다른 연장 다 갚고도

남겠지요』

그러자 할머니는 맨발로 마당으로 내려오시더니 내 쪽으로 달

려오시면서 소리질렀다.

『그래 이눔아 그 연장 이리 내놔라』

나는 질겁을 하고 얼른 고추를 바지춤 안에 넣어 간직하고는

바지춤을 움켜쥔 채 골목 밖으로 냅다 뛰었다. 그 뒤로 할머

니는 나를 장래성 있는 외손자라 인정하시고는 연장 때문에 닦

달하기를 멈추셨다. 하루는 어머니께 말씀하셨다.

『너 그놈 진홍이 잘 길러라. 그 녀석 장래성 있는 녀석이야.

녀석이 연장 내놓으라는데 바지를 내리고 물건을 썩 내놓는 녀

석이야. 아무나 그렇게 못하는 거다. 그 녀석 한번 크게 될 거

다』

그런가 하면 학교에서 내가 졸지에 신동(神童)이란 소문이 나

는 사건도 있었다. 하루는 국어시간에 선생님이 나를 지명하여

교과서를 읽으라고 했다. 그날 따라 국어 책을 가져오지 않았

던 날이었다. 그러나 전날 저녁에 그날 배울 내용을 읽었던 터

여서 옆자리 아이의 책을 빌릴 것도 없이 그냥 서서 외워나갔

다. 선생님이 그런 나를 가만히 지켜보시더니 물으셨다.

『진홍아 너 지금 책도 안 보고 읽고 있는 거냐?』

『예, 오늘 마침 국어책을 집에 두고 왔습니다. 그래도 어제 저

녁에 미리 읽었던 내용이어서 그냥 읽습니다』

『너 신동이구나, 우리 학교에 신동이 나왔구나!』

그래서 나는 졸지에 신동이 되었다. 그 후로 사람들이 나를 보

고 신동이라는 말을 자주 하게 되니 나 자신도 내가 신동인가

하는 착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좁은 산골에서나 통할 수 있는 신동이었다. 중학교 때

대구로 나와 보니 나 정도 되는 신동은 골목마다 있는 것 같았

다. 그리고 대구에서 대학까지 마치고 서울로 와서는 내가 신

동도, 수재도 아니고 보통 사람밖에 되지 않음을 절감했다.

이제는 세계여행을 많이 하면서 세계에는 정말로 특출한 인재

들이 많음을 알게 되었다. 나 같은 사람은 오히려 둔재에다 게

으르기까지 하여 그냥 하루하루를 지내다간 아무 쓸모없는 사

람이 되기 십상임을 느끼게 됐다. 그러니 유일한 길은 자신을

갈고 닦아 스스로 자기 발전을 꾀하는 길 외에는 방법이 없음

을 절감하고 있다.

「마음의 고향」 복동교회

나의 어린 시절 이야기에서 빠뜨릴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교회

이야기다. 우리 가족이 다닌 교회는 복동교회(福洞敎會)였다.

두메산골의 교회였지만 일찍이 기독교를 받아들여 전통이 깊고

많은 인재를 배출한 교회이다. 오래된 당나무가 서 있는 마당

에 한옥(韓屋)으로 지어진 건물이었다.

복동교회는 나이 들어가면서 더욱 그리워지는 마음의 고향 같

은 교회이다. 나이 들어 고향을 떠난 후로 삶에 지칠 때면 나

는 곧잘 고향 교회를 꿈꾸곤 했다. 고달픈 감옥살이 때에, 세상

살이가 벅차기만 하여 좌절감을 느꼈을 때에, 병으로 누웠을

때, 그런 때에 나는 복동교회 꿈을 꾸곤 했다.

성탄절이나 추수감사절, 부활절 같은 교회 명절이 왔을 때는

유년주일학교 학생들의 발표회가 있었다. 나는 그럴 때마다 개

회 인사말 순서를 맡았고 독창을 하거나 연극을 했다. 해마다

5월이 되어 어린이 주일이 되면 교인들이 푸짐한 음식을 장만

하여 야외예배를 가곤 했다. 밤나무 숲이나 사과 밭에 터를 잡

고 온종일을 즐겁게 보냈다.

그런 날이면 으레 뽑혀 독창을 했다.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노

래가 있다.

『보리밭에 종달새 노래 부르고 나물 캐는 처녀가 하늘을 보면

어디서 오라는지 보이지 않고 호랑나비 한 마리 날아갑니다』

오월 하늘의 아지랑이를 뒤로 하고 들녘에 앉아 있는 온 교인

앞에서 이 노래를 부르면 교인들은 박수를 보내며 『아이고 그

집 아들 창가 잘하네』 하며 칭찬해 주었다. 이런 세월들이 내

영혼에 쌓여 훗날 방황 길에서 좌절하지 않고 다시 교회로 돌

아오게 하는 밑거름이 되었으리라.

어느 해였다. 추수감사절을 맞아 나는 교회 다니지 않던 마을

친구 셋을 인도하여 교회로 갔다. 그날은 각 가정에서 감이니

사과니 떡이니 온갖 음식들을 장만하여 감사절 예배 후에 잔치

가 벌어진다. 그때는 너 나 할 것 없이 생활이 어려웠던 시절

이라 그날 주는 음식이 아이들에게는 큰 선물이었다. 그래서

추수감사절이 되면 교회가 차고 넘칠 만큼 아이들이 모여들었

다. 하필이면 그날 음식이 모자랐던지 여전도사님이 앞장서서

소리 높여 말했다.

『교인 집 아이 아닌 아이들은 떡 주지 마라. 떡만 얻어먹으러

왔지 교회 온 아이들이 아니다』

그리고는 그날 처음 온 아이들은 떡 타는 줄에서 골라내는 것

이었다. 나는 내가 데려 간 아이들에게 너무나 미안했다. 교회

가 이렇게 하는 것은 잘못된 처사라 생각되었다. 설령 음식이

모자란다면 교인집 아이들보다 처음 온 아이들에게 먼저 나누

어주는 것이 옳은 처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교인

집 아이들이 서 있는 줄에서 빠져나와 친구들과 같이 떡을 받

아 먹지 않았다. 그날 저녁에 누구에게 들었는지 어머니가 물

었다.

『홍아, 너 오늘 추수감사절에 주는 떡을 타 먹지 않았다던

데!』

『그래요, 오늘 아무것도 먹지 않았어요』

『왜 속이라도 좋지 않았니?』

『아녜요. 속도 말짱했어요』

『그럼 왜 그랬니? 무슨 속상한 일이라도 있었니?』

『딴기 아니라요, 오늘 교회 갈 때 춘이하고 영일이하고 태식

이 셋을 전도해서 갔걸랑요』

『그것 참 잘했구나 근데?』

『예배 후 음식 줄 때요. 예배당 안 다니던 애들은 주지 말라

고 해서요. 걔들이 줄에서 밀려났어요. 그래서 나도 안 받았지

요』

『아이고 그런 일에 있었구나. 근데 걔들이 못 타먹어도 너까

지 먹지 않고 하루종일 생으로 굶었더냐?』

『아니지요. 그럼 안되지요. 내가 전도해간 친구들이 못 먹는데

나 혼자 먹을 수는 없지요. 그리고요 예배당서그러카몬 안되지

요. 그렇게 할 수 없지요. 예수님은 주라 하셨는데 예배당은 예

수 믿는 사람들만 주고 예배당 안 다니는 애들은 주지 않으면

예수님 생각하고는 다르잖아요?』

『그래 네 말이 백번 옳다. 오늘은 예배당서 잘못했다. 내 다음

제직회 때 따지꾸마 근데 너 배고프겠다. 감자라도 삶아주

련?』

다음 달 교회 제직회 때 어머니는 추수감사절에 있었던 이야기

를 하시며 교회가 그날 취한 처사가 잘못되지 않았느냐고 이의

를 제기했다. 제직회는 그 일로 한참 논란을 거듭한 후에 그

일은 교회가 확실히 잘못했으니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

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나의 한 끼 단식이 효과를 본 셈이었다

고 할까….

『예수님, 저를 중학교에 꼭 들어가게 해주세요』

세월은 흘러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가 되었다. 자연히 나의 중

학교 진학 문제가 가정의 근심거리로 대두되었다. 집안이 워낙

가난하여 중학교에 갈 처지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외할아버

지는 우리 가정의 그런 형편을 살피시고는 어느 대장간에 심부

름꾼으로 나를 들여보내기로 부탁해 두고는 어머니께 권했다.

『혼자 몸에 아이들 교육시킨다고 골빠지게 고생만 하지 말고

진홍이는 대장간에 보내라. 내가 이야기 잘 해두었다. 풀무질

잘 배워두면 앞으로 자기 앞은 추스려 나갈 거다』

『아버지. 그 애는 그렇게 썩을 애가 아니에요. 그런 길로 나가

기에는 재주가 너무 아까운 애예요. 그러고 그 애 아버지 유언

이 무언데요? 다른 애들은 몰라도 셋째는 꼭 공부시키라고 당

부하고 숨을 거두었다 합니다. 제가 굶더라도 홍이는 학교 보

내렵니다』

『그 왜 죽은 사람은 자꾸 들먹거리는 거야, 그렇게 자식교육

에 열성이거든 죽질 말고 감당했어야지. 죽은 사람 말에 매여

살지 말고 산 사람은 살아갈 도리를 찾는 게야』

할아버지는 그렇게 말하시고는 역정을 내며 가버렸다. 나는 두

분의 대화를 곁에서 들으며 어머니께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참 좋은 어머니다. 장래 훌륭한 사람이 되어 어머니를 기쁘

게 해드려야지. 저런 어머니께 효자노릇하려면 공부 열심히 하

는거다」 하고 생각했다.

그 후로 나는 새벽마다 교회로 가서 예수님께 기도드리기 시작

했다. 기도제목은 중학교에 들어갈 길을 열어달라는 것이었다.

중학교에 들어가지 못하면 장래에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것 같

은 위기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우리 마을 사부실에서 교회가

있는 마을까지는 4km가 넘는 거리였다. 새벽에 그 길을 혼자

걸어 교회로 가는 일은 쉽지 않았지만 나는 열심히 다니며 기

도했다.

『예수님, 저를 중학교에 꼭 들어가게 허락해 주시옵소서. 그래

야 큰 일꾼이 되어 나라 일도 하고 가문도 빛내고 어머니도 모

실 것 아닙니까? 제가 대장간에 머슴으로 들어가버리면 아무것

도 이룰 수 없습니다. 예수님 중학교만큼은 꼭 들어가야겠습니

다』

새벽길을 혼자 걸어 교회로 가노라면 때로는 머리카락이 쭈뼛

설 만큼 무서움을 느낄 때도 있었다. 그 길에서 호랑이가 나타

난 것을 보았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쉽지 않은 길이었다. 나

는 무서움을 이기느라 『믿는 사람들은 군병 같으니…』 찬송

가를 높이 부르며 달리기와 걷기를 되풀이하곤 했다.

그런 어느날 새벽에 진짜 호랑이가 나타났다. 중개만한 크기의

호랑이가 마을이 끝나는 자리쯤에서부터 나를 따라오고 있었

다. 나는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하고 공포심에 몸이 오그라들

지경이었다. 나는 안 되겠다 싶어 하늘을 우러러 소리 높여 도

움을 청했다.

『예수님, 도와주세요. 지금 제가 재난에 빠져 있습니다』

그러나 호랑이는 사라지지 않고 줄곧 따라오더니 급기야 나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내 혼을 빼려는 작전으로 나왔다. 나는

젖먹던 힘까지 다하여 소리 질렀다.

『사탄아 물러가라. 여호와의 백성을 해치려 말라!』

그러나 사탄은 물러갈 기미는 전연 없이 오히려 나에게로 다가

왔다. 그제서야 호랑이치고는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꼬리를 살랑이며 깡충깡충 뛰는 모습이 나를 해치려는 마음은

아닌 것 같았다. 의아한 생각이 들어 자세히 살폈더니 호랑이

가 아니라 우리 집에서 기르는 개 바둑이였다. 바둑이가 새벽

에 교회 가는 나를 따라온 것이었다. 나는 반가운 생각으로 바

둑이를 끌어안고 등을 토닥거리며 말했다.

『오라 바둑이구나. 네가 나를 그렇게나 놀라게 할 수 있니?

아무튼 반갑다 너 나하고 교회까지 같이 가련?』

드디어 나는 중학교에 들어갔다. 친척들의 만류와 빈정거림에

도 아랑곳않으신 어머니의 열성이 나를 안덕중학교에 입학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입학은 하였으나 학교생활은 순탄치 못

했다. 입학금을 못내고 학교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입학 후 한 달 가량은 아무 소리 없더니 두 달째부터는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담임선생님이 교실에서 나는 불러세우시고는

집에 가서 입학금 가져다가 서무실에 내고 교실로 들어오라는

것이 었다. 하는 수 없이 책가방을 싸들고는 교실 밖으로 나갔

다. 그러나 갈 곳이 없었다.

마침 나와 같은 처지의 동료가 셋이 있었다.

우리들은 냇가로 갔다 냇가 아카시아 나무 그늘에 앉아 놀다가

학교가 파할 즈음에 집으로 갔다. 그런 생활이 일과처럼 되었

다.

그 즈음 어머니는 대구로 나가신 후였다. 시골에 있어서는 우

리를 가르칠 길이 없음을 짐작하시고는 누나와 함께 대구로 가

신 후로 소식조차 없던 때였다. 나는 아침에는 여느 아이들처

럼 가방 들고 학교 가서 교실에 앉기는 했지만 으레 선생님이

불러세워 공납금 가져오라고 보내셨다. 그러면 우리는 다시 냇

가로 가서 노닥거리며 놀다가는 집으로 가곤 했다.

그런 생활이 반복되는 중에도 개교 기념일에는 뽑혀서 독창을

했다. 부른 곡이 개교 기념식 분위기에는 전연 맞지 않는 『황

성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푸르러…』였다. 기억나기로는 교

장실에 불려갔더니 무슨 곡을 부를 수 있겠느냐, 아는 노래를

한 곡 불러보라기에 「황성 옛터」를 불렀다. 교장선생님이 마

음에 드셨던지 개교기념식장에서 그 곡을 그대로 부르라고 하

셨던 것 같다.

어린 시절에 나는 노래를 곧잘 불렀다. 초등학교 5학년 때 하

루는 음악시간이 끝난 후 선생님이 나를 교무실로 불러 정색을

하며 이르셨다.

『진홍이 너는 음악에 소질이 있으니 앞으로 베토벤 같은 음악

가가 되어라. 잘 갈고 닦으면 훌륭한 성악가가 될 소질이 있다

고 본다』

느닷없는 선생님의 권면에 엉겁결에 『예, 열심히 해보겠습니

다』 하고 씩씩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선생님도 나도 어떻게

해야 베토벤 같은 음악가가 될 수 있는지 알지 못했다. 초등학

교를 졸업하기까지 악보를 읽을 수 있는 선생님이 한 번도 부

임한 적이 없었다. 그러니 음악교육이 제대로 될 턱이 없었다.

그냥 목소리가 좋은 편이어서 중학교 1학년 때에 「황성 옛

터」를 부르기는 했으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대구로 나와 어린 나이에 유리공장에 취직하여 하루 종일 뜨거

운 불가마 앞에서 일하는 동안에 목소리가 달라지고 말았다.

지금은 음악적 재능은 쇠퇴할 대로 쇠퇴하여 고작해야 「두만

강 푸른 물에」나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같은 대중가요

를 흥얼거릴 정도가 되고 말았다.

신문 빼돌려 호빵 사먹다가

안덕중학교에서 첫 학기를 그렇게 보내다가 여름방학을 맞았

다. 방학이 되면서 나는 대구에 계시는 어머니께 호소문을 보

냈다. 「그리운 어머님 보시옵소서」로 시작되는 편지는 셋째

아들이 처한 곤궁한 처지를 그림으로 그려가며 호소하는 내용

이었다. 엄지 발가락이 삐져나오는 운동화, 무릎이 드러나는 바

지, 너덜거리는 소맷자락 등이 서신에 그려져 있었다.

대구 어머니 곁에 불러만 주시면 신문팔이든 담배팔이든 해서

나 먹을 만큼은 해결할 터이니 불러만 달라고 호소했다.

어머니는 편지를 보시고 감동하셨는지 9월 초순에 나를 데리러

오셨다. 그때까지도 못낸 입학금과 밀린 공납금을 치르고는 전

학증을 떼어 대구로 갔다.

대구에서 우리 가정은 신암동 산 위 빈민촌에서 살게 되었다.

어머니는 방직공장에 나가시고 형은 인쇄소 직공으로 나갔으며

누나는 식모살이였다. 나도 신문팔이로 대구생활을 시작했다.

학교는 영신중학 야간부에 적을 올리게 되었다.

처음에는 신문팔이를 하다가 얼마 후에 한국일보 신문배달로

바꾸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신문지국으로 가서 1백여부 되는

신문을 받아서는 맡은 구역을 도는 것이었다. 신암동 신천동을

돌아 산격동의 경북대학 뒤편까지 도는 구역이었다. 배달구역

이 그렇게 넓다 보니 배달이 끝날 무렵에는 지치고 배고프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어느 때는 해장국집 앞에 서서 구수한

음식 냄새를 한참이나 맡다가 발걸음을 옮기던 때도 있었다.

그런데 아침 나절에 신문을 팔에 안고 골목길을 다니다 보면

지나던 사람들 중에 나를 불러세워 『너 신문 팔 것 있니?』하

고 묻는 경우가 있었다. 당연히 팔 것이 없다는 대답이 나와야

하는데 내 입에서는 차마 「없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내

가 쭈뼛거리는 동안에 손님은 신문값 20원을 내놓고는 신문 한

장을 뽑아가버렸다.

나는 20원을 들고 가게로 가서 호빵 하나를 사서 먹는다. 빵맛

을 음미하여 천천히 먹는다. 그 순간에는 뱃속이 심히 행복함

을 느낀다. 그러나 행복은 잠깐으로 끝나고 고민에 빠지게 된

다. 한 부 모자라는 신문으로 인하여 어느 집을 빠뜨려야 할지

를 고민하게 된다. 가장 뒤탈이 적을 듯한 집을 건너뛰고는 배

달을 끝낸다.

그러나 아침신문을 기다리던 그 집에서는 신문지국 사무실에

전화를 건다. 그런 일이 잦아지니 지국장이 내게 주의를 주었

다. 배달 사고가 너무 잦으니 확실히 하라, 계속 그렇게 하면

그만두게 하겠다. 나는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노라고

다짐한다.

그러나 다음날에도 배달이 끝날 즈음에 가서 『어이 신문배달

신문 한 장 사자』 하며 20원을 내밀면 그렇게 하면 안 되지

하면서도 손은 이미 20원을 받아쥐고 있다. 그리고는 다시 가

게로 가서 호빵 하나를 집어든다.

그러기를 얼만가 계속했더니 한국일보 지국장이 하루는 나를

불러서는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그 동안 많이 봐주었는데 이젠 안 되겠어. 배달 사고가 너무

잦으니 후임자에게 구역을 물려줘라. 마음 같아선 패주고 싶지

만 참는다』

호빵의 유혹을 이기지 못한 나는 결국 해고당하고 말았다.

고아원에 갈 뻔한 사연

그 즈음에 어느 날 어머니는 우리 4남매를 모으시고는 가족회

의를 열었다.

『얘들아, 너희들과 의논할 것이 있다. 다름아니라 식구는 불어

났는데 수입은 늘지 않아 어려움이 많다. 무슨 해결책이 있어

야겠다. 내가 아는 분이 고아원 총무로 있는데 진홍이와 철웅

이를 고아원으로 보내면 거기서 공부를 시켜준다는구나. 내 생

각으로는 둘이 그리로 가면 집에서 제대로 못 먹고 고생만 하

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은데 너희 생각은 어떠냐?』

어머니의 제안에 대한 우리 반응은 반반이었다. 형과 나는 그

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으나 누나와 동생은 막무가내로 흩

어지면 안 된다는 주장이었다.

특히 당사자인 동생은 완강히 반대했다.

못 먹어도 고생해도 좋으니 어머니와 같이 있겠노라고 버텼다.

결국은 누나의 의견이 가장 설득력이 있어 그냥 함께 고생키로

결론이 내려졌다.

누나의 의견이란 『지금 우리 가족들이 고생스러워도 착하게는

살고 있는데 만약 두 동생이 고아원으로 가게 되면 고아원에는

나쁜 아이들도 많다. 거기서 동생들이 나쁜 아이들에게 물들면

어떻게 하겠느냐. 동생들 버릇이 나빠진 뒤에는 돈이 있어도

못 고친다』 그런 내용이었다.

누나의 말이 끝나자 어머니는 『그래 네 말이 옳다. 고생스러

워도 함께 지내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했

다. 설마 우리가 굶어 죽기야 하겠니』 하시며 가족회의를 끝

냈다.

가정 사정이 이런 처지였던지라 나도 가정 살림에 도움이 되고

자 공장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가장 힘든 유리

공장이었다. 유리공장에 들어간 첫날 내게 맡겨진 일은 물 길

어 나르는 일이었다. 신천 냇가로 내려가 5m가 넘는 둑 위의

공장으로 물을 길어 나르는 일이었다.

「독서 시대」

애초부터 나의 체력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힘에 부치

는 일이니 자연히 느려질 수밖에 없었고 조금만 느려져도 공장

안에서는 물, 물 하며 고함을 질러댔다.

나는 조바심이 일어 부지런히 다니느라 애썼지만 역부족이었

다. 그런대로 3개월 가량을 버텨나갔다. 나중에는 목이 잠겨 말

이 잘 나오지도 않고 작업이 마칠 시간쯤에는 어지럼증이 나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렇게 일을 마치고 저녁에 야간학교에 가서 자리에 앉으면 잠

만 자게 되었다. 선생님은 사정도 모르고 『너는 학교에 잠 자

러 왔냐』 하며 머리를 쥐어박았다. 그러나 쏟아지는 졸음을

막을 길이 없었다.

그래도 집안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는 견뎌야 한다고 다짐하며

버텨나가려 애썼다. 『여기서 못 이기면 고아원으로 가는 거다.

고아원 신세지지 않으려면 여기서 이겨내야 해』속으로 다짐하

며 하루하루를 지냈다.

그러나 그런 다짐도 보람없이 유리공장을 그만두게 될 일이 일

어났다. 3개월이 지난 어느날 물 공급이 자꾸 늦어져 작업에

지장을 준다고 화가 난 조장이 나를 무지막지하게 때렸다. 차

고 때리고 넘어뜨리고…. 나는 끽 소리도 못하고 맞기만 했다.

주위의 다른 일꾼들이 만류하여 겨우 구타는 끝났다.

입술이 터지고 코피를 쏟으며 집으로 돌아온 나를 본 누나는

『이게 웬일이냐?』고 놀라며 물수건으로 닦아주었다. 나의 설

명을 들은 누나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홍아 그렇게 힘든 공장은 그만두려무나. 너는 공부해서 성공

해야 할 사람이지. 그런데서 일하고 살 사람이 아니잖니. 일하

면서 공부할 수 있는 다른 일자리를 찾아보자꾸나』

『누나 그런 일자리가 어디 있겠어? 유리공장은 나에게는 너무

벅차. 그만두었으면 좋겠는데 어머니가 힘드실 것 같아서…』

울먹이던 우리 남매는 흐느껴 울고 말았다. 결국 유리공장은

그동안 일한 품삯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힘에

부쳐 더 다니지 못하겠으니 그동안 일한 삯이나마 달라고 했더

니 견습 기간도 제대로 채우지 못한 주제에 무슨 돈 받을 생각

을 하느냐고 핀잔을 주었다.

나는 몇 차례나 찾아가 간청한 결과 쥐꼬리만큼 받게 되어 어

머니께 드렸다. 유리공장에서 3개월여를 고생한 후로는 좋았던

목소리가 잠겨 그 후로는 노래를 제대로 부를 수 없게 되어버

렸다.

집에서 쉬는 동안에 하루는 문화서점에 일하는 형 친구를 찾아

갔다. 그에게 서점 서가에 꽂혀 있는 소설들을 하루씩만 빌려

주면 흠집 내지 않고 본 다음에 돌려주겠다, 책 사서 읽을 돈

이 없어 그렇게라도 책을 읽고 싶으니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나의 열성에 마음이 움직였던지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

다만 책에 손때를 묻히거나 책장을 접거나 하지 말고 깨끗이

보라는 조건으로 책을 빌려주기 시작했다. 나는 굶주린 사람이

푸짐한 식탁을 만난 듯이 읽어나갔다.

그렇게 해서 나에게 「독서 시대」가 시작되었다. 나는 읽고

또 읽었다. 어떤 날은 두 권을 읽었고 또 어떤 날은 세 권도

읽었다. 레미제라블에서 시작하여 죄와 벌, 삼국지, 여자의 일

생, 한국문학전집들에 이르기까지 계속 읽어나갔다.

방에 들어박혀 소설만 읽고 있으니 친척들 사이에 말썽이 생기

고 흉이 되었다.

『진홍이 그 애는 소견머리 없는 녀석이야. 어머니가 그렇게

고생하고 있는데도 도울 생각은 않고 허구한날 소설 나부랭이

만 읽고 있으니 원…』

친척들이 나를 흉보는 그런 말들을 들으시면 어머니는 말씀하

셨다.

『무엇이든 읽어두면 남겠지. 예부터 책 읽는 자식 그릇되는

법 없는기여. 밖에 나가서 못된 짓 하는 아이들에 비하면 얼마

나 고마운 일인가』이런저런 말들을 들으면서도 막상 당사자인

나에게는 실로 행복한 날들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책을

들면 그속에 푹 빠져 버린다. 책 읽는 동안은 나 자신이 그 책

속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삼국지를 읽을 때는 내가 제갈공

명이 되었고, 이광수의 흙을 읽을 때는 내가 그 주인공이 되는

것이었다. 책을 읽다 잠이 들면 꿈에서 읽던 책의 주인공 노릇

하는 것이었다. 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무게 있는 글들이 좋았

고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 좋았다.

학교에 가서도 소설만 읽었다. 수업시간에도 아랑곳없이 소설

만 읽었다. 선생님들의 주의를 여러 번 들었으나 보던 책에서

관심을 딴 곳으로 돌릴 수가 없었다. 나는 책을 한 번 들면 그

책 읽기가 끝난 후에야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는 성격

이었다.

얼마 전까지 수업시간에 잠만 자던 녀석이 이제는 소설만 읽고

있으니 선생님들 사이에서 말이 돌았다. 어느 날은 읽고 있던

책을 선생님께 압수당한 일이 있었다. 나는 교무실까지 따라가

서 빌린 책이니 제발 돌려달라고 애걸했다. 다음부터 주의하겠

노라고 빌고 빌어서 겨우 책을 되돌려 받은 적도 있었다.

그렇게 열중했던 책읽기도 그 형이 다른 곳으로 이사가자 끝이

났다. 그동안 누나는 식모살이하면서도 열심히 공부하여 대구

사범학교에 입학하였다. 어머니는 기뻐서 춤을 추셨다.

책 도둑질하다 꼬리잡혀

나는 누나의 합격에 기뻐하시는 어머니를 보고 생각했다.

『나도 어머니를 춤추게 할 만한 무슨 일이 없을까?』

그때 나보다 세 살 아래인 동생은 신암초등학교 학생이었다.

하루는 학교에서 돌아온 동생이 몹시 풀이 죽어 있었다. 나는

걱정스러워 물었다.

『너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니? 왜 그렇게 풀이 죽어 있는거

냐?』

그러자 동생은 교과서가 없어 숙제를 못했는데 선생님께 벌쓰

고 공부할 기분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동

생이 필요한 교과서를 어떻게 하면 구해줄 수 있을까를 골똘히

생각했다.

며칠 생각하고 나서 헌 책방에 가서 동생이 필요한 책을 슬쩍

가져오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책방 주인이 한 눈

파는 사이에 재치있게 하면 쉽게 될 것만 같았다.

대구시청 부근에 헌책방들이 많았다. 나는 책방 골목을 걸으며

사람이 붐비는 책방을 살폈다. 사람들이 들락날락하는 한 책방

을 골라 들어가서는 동생이 원하던 책 세 권을 골랐다. 주인의

시선이 다른 곳에 머문다고 여겨질 때 책들을 옷자락에 감춘

채 슬며시 나왔다. 안해 보던 짓을 하려니 가슴은 방망이질을

하듯이 쿵닥거리고 등줄기를 누군가가 곧 낚아채는 것 같이 뒤

가 땅겼다.

나는 뒤는 돌아보지도 못한 채로 앞으로만 걸어나갔다. 책방에

서 한참이나 걸어나가 이제는 안심해도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억센 손이 내 목덜미를 잡아채며 말했다.

『이 책 도둑놈아. 어디 오늘 내 손에 맞아봐라』

그는 뺨부터 후려쳤다. 눈앞에 불꽃이 이는 듯이 아팠다. 나는

가져나온 세권의 책을 주인에게 돌려주고 『아저씨 잘못했어

요, 잘못했어요. 제발 한번만 용서해주세요』 하고 두 손바닥을

부비며 싹싹 빌었다. 그때의 참담하고 슬픈 심정을 어찌 세월

이 흐른다고 잊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그런지 나는 지금도 세상살이는 슬픈 거라는 인식이 마

음바탕에 깔렸다. 다만 슬픈 세월에 어떻게 의미를 부여하고

사느냐에 따라 각자의 값어치가 달라질 뿐이라 생각한다. 그런

일을 겪고 나서 참담한 심정으로 집으로 돌아오니 사정을 모르

는 동생이 내게 물었다.

『형 얼굴이 왜 그래. 누구하고 쌈 했어? 얼굴이 붓고 벌에게

쏘인 것 같잖아?』

『아냐. 어디 조금 부딪혔을 뿐이야』

『어디에 그렇게나 부딪혔는데 부딪힌 자리 같지 않는데?』

나는 자꾸만 눈물이 흐르려 해서 자리를 피하는 수밖에 없었

다.

나에게 읽을거리를 공급해 주던 형 친구가 이사간 후로 나는

읽을거리를 찾아 시립도서관으로 갔다. 종일 도서실에서 책을

읽다가 배가 고파지면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때에 비하면

내 처지도 한결 좋아졌다. 지금은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얼마

든지 사서 읽을 처지가 되었으니 좋아져도 얼마나 좋아졌는가.

<다음호에 계속>

「독서 시대」

애초부터 나의 체력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힘에 부치

는 일이니 자연히 느려질 수밖에 없었고 조금만 느려져도 공장

안에서는 물, 물 하며 고함을 질러댔다.

나는 조바심이 일어 부지런히 다니느라 애썼지만 역부족이었

다. 그런대로 3개월 가량을 버텨나갔다. 나중에는 목이 잠겨 말

이 잘 나오지도 않고 작업이 마칠 시간쯤에는 어지럼증이 나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렇게 일을 마치고 저녁에 야간학교에 가서 자리에 앉으면 잠

만 자게 되었다. 선생님은 사정도 모르고 『너는 학교에 잠 자

러 왔냐』 하며 머리를 쥐어박았다. 그러나 쏟아지는 졸음을

막을 길이 없었다.

그래도 집안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는 견뎌야 한다고 다짐하며


그런 와중에도 전공과목인 철학만큼은 열심히 공부했다. 워

낙에 철학이 나의 체질에 맞는 과목이었다. 철학에 관계되는

책만 들면 시간 가는 줄을 모를 만큼 그 속에 빠져들곤 했다.

그래서 그 시절에 내게 붙은 별명이 「미스터 소크라테스」였

다. 2학년 때부터 해마다 열리는 전국철학학술대회에 참가했

다. 2학년 때는 「플라톤의 이데아연구」란 제목으로, 3학년

때는 「칼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 연구」로, 4학년 때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대한 철학적 배경」이란 제목으

로 발표했다.

그러자 주위에서는 나를 장래 철학교수가 될 인물로 인정했

다.

나 스스로도 장차 한국 철학계를 짊어지고 나갈 기둥이 되

겠다는 자부심을 품고 공부했다. 그래서 「도서관 지킴이」가

되었다.

도서관에 가장 일찍 들어가 가장 나중에 나온다 하여 붙은

별명이었다.

하루는 여전히 도서관에 앉아 형이상학(形而上學) 읽기에

몰두하고 있는데 철학과 선배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어이 미스터 소크라테스. 형이상학 연구에 소출이 있

냐?』『별로 없심더. 아직은 형이상학까진 못가고 하학(下學)

에서 중학(中學)정도까지 오르고 있심더』

『딴기 아니고 자네에게 급하고 중요한 일로 대화를 나누고

싶으니 지금 도서관 앞 잔디밭으로 좀 나오소』

홍응표란 이름의 선배는 그렇게 자기 할 말만 하고는 성큼

성큼 나가버렸다. 나는 도리없이 읽던 책을 덮고는 따라나갔

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홍선배는 내가 미처 자리도 잡기 전에

물어왔다.

『김진홍. 자네 거듭났는가?』

『예? 선배님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깁니까!』

『거듭났느냐고. 예수 믿고 거듭났느냐를 묻는 것이네』

『아니, 선배님 먼 질문이 그렇습니까? 급하고 중요한 일이란

기 바로 그깁니까? 세상에 그런 황당한 걸 물어보려고 공부하

고 있는 사람을 불러낸 것입니까?』

『아문, 급하고 말고. 이보다 더 급한 일이 있을 수 있겠는

가? 자네가 임마누엘 칸트를 아무리 읽어보았자 그 속에서 생

명을 얻을 순 없네, 자네에게 고민만 더하여 줄 따름이네. 자

네도 그만큼 열심히 읽었으면 이제쯤은 질릴 때도 됐을 텐데.

칸트의 전공은 질문일세. 그에게는 해답이 없어. 해답은 나사

렛 예수에게만 있는 거야. 자네도 칸트처럼 평생을 해답없는

질문만 계속할 텐가? 형이상학(形而上學)을 한다는 것은 출구

없는 숲속을 헤메는 것과 같아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길을 잃

고 마는 것이네. 자네는 영특하니 잘 판단하게나. 내가 자네에

게 급하다고 한 것은 자네 영혼이 죽고 사는 문제니까 그렇게

말한 것이네. 지금의 자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나사렛 예

수를 평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거듭나는 일일세』

홍선배는 나를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그의 설득이 내게 통

할 리 없었다. 나는 그런 선배가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소위

형이상학을 다룬다는 철학도가 저런 형이하학적인 수준의 사고

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그의 지능이 낮은 탓이라 생각했다. 아

예 나와는 토론 상대가 되지 못한다고 판단하고는 한마디 일러

주고 자리를 떴다.

『홍선배님 혼자 거듭나시라요. 거듭나서 천당을 가든지 만

당을 가든지 가서 잘 먹고 잘 사시라요. 나는 선배 같은 수준

의 사람들이 가는 곳이라면 동행할 마음이 없습니다. 나는 거

듭나지 못해서 지옥에 간다면 인간답게 가겠습니다. 변증법을

공부하고 형이상학을 논하는 사람이 어떻게 거듭났냐, 구원 받

았냐, 그런 질문을 질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나는 그런 사

람들이 가는 천당에 가서 머리없는 도야지로 사느니 차라리 지

옥가서 생각하는 소크라테스로 살랍니다』

『글쎄 자네가 지금은 그렇게 고상한 말을 하고 있지만 시

간문제일세. 언젠가 나의 말에 고개 숙일 때가 올 것일세. 그

날이 오도록 내가 기도하지. 자네는 자네가 원하는 변증법, 형

이상학 하러 가게나. 나는 들을 귀 있는 자들에게로 가서 거듭

나는 길을 전하러 가겠네. 자네가 지금보다 훨씬 더 가난해진

후에 만나세나.

형이상학 먹다가 영양실조 걸려 기진맥진해질 때쯤에 내가

영양분이 넘치는 생명의 떡을 다시 전해 주겠네』

계명대학에는 해마다 5월이 오면 개교기념 행사가 있고 행

사기간에 메이 퀸(May Queen)과 메이 킹(May King)을 뽑는 행

사가 있었다. 메이 킹으로 뽑힌 남학생이 메이 퀸으로 뽑힌 여

학생에게 「오월의 여왕」관을 씌워주는 행사였다.

과별로 메이 킹 후보 한 사람씩을 뽑아 전교생이 모인 자리

에서 한 명의 킹이 뽑혔는데 각 후보에게 10분의 시간을 주면

후보자들이 장기자랑을 한 후 인기투표로 결정했다. 나는 2학

년 때부터 졸업 때까지 거듭 메이 킹으로 뽑혔다. 비결은 장기

자랑에 나갔을 때 전교생을 웃기는 솜씨였다. 내가 마이크를

잡고 온갖 잡설로 웃기고 나면 너무 웃어 다음날 뱃가죽이 아

프다는 여학생들도 있었다.

이래저래 대학시절은 멋있는 시절이었다. 열심히 공부했고

화끈하게 놀았다. 철저히 방황했고 뜨겁게 사랑했다. 비록 그

사랑이 짝사랑이긴 했지만 순수하고 뜨거웠다. 나는 지금도 대

학시절을 꿈꿀 때가 있다. 그 시절의 강의실, 캠퍼스, 친구들

과 여인들이 지금도 내 꿈자리의 단골메뉴다.

4학년이 되었을 때 한일 국교정상화 반대시위로 온 나라가

시끄러워졌다. 대학마다 데모열풍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계명

대학이라고 예외일 순 없었다. 어느날 전교생이 강당에 모인

자리에서 가두시위를 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잡아달라는 부탁

을 받게 되었다. 말하자면 내가 선동에는 소질이 있으니 솜씨

를 발휘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나는 동료들의 부탁을 받아들여

전교생 앞에서 일장 연설을 했고, 전교생이 스크럼을 짜고 거

리로 나섰다. 경찰이 제지하고 우리는 돌을 던졌다. 우리가 던

진 돌에 경찰서장의 코가 부러졌다. 화가 난 경찰들이 거칠어

졌고 학생들의 흥분도 고조되었다. 밀고 밀리는 소란을 겪은

후에 나와 몇몇이 주동자로 잡혔다. 대구경찰서에서 3일밤을

자고 훈방되었다. 이것이 나의 첫번째 유치장 경험이었다. 우

리들의 돌질로 부러진 콧대에 붕대를 싸맨 경찰서장께서 우리

를 훈방하며 말했다.

『학생들이 나라사랑으로 시위를 하는 뜻은 갸륵하나 학생

때는 공부하는 땐기라. 그것이 자신에게도 나라에도 유익한기

여. 내보내줄 테니 나가서 공부들 열심히 해라』

데모하는 학생들도 막는 경찰도 한결같이 순진했던 시절이

다. 요즈음은 데모가 너무 살벌해지고 낭만적인 분위기가 사라

졌다. 민주주의하자면 데모가 없을 순 없겠는데 그때처럼 순수

하고 낭만있는 데모가 되었으면 좋겠다.

형의 정신병으로 아수라장 된 집안

그때쯤 우리 가정에 큰 시련이 닥쳤다. 형 때문이었다. 나

보다 4살 위인 형은 인물좋고 마음씨 좋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대학을 다니다 군대를 갔다오더니 행동이 이상하게 변했다. 밥

상을 받으면 밥그릇을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는 눈

알을 부라리며 따졌다.

『밥에 독약 넣었지?』

『예? 형님,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밥에 독약을 왜 넣어

요?』『좋아, 네가 먼저 먹어봐』

형은 내게 먼저 한숟갈 먹어보라는 것이었다. 내가 한숟갈

먹고서 아무런 탈이 없음을 확인하고 나서야 자신도 밥을 먹기

시작했다. 어느 때는 한밤중에 부엌칼을 들고 들어와서는 내게

주며 어머니를 찌르라고 했다.

『저 여자를 이 칼로 찔러. 우리 집에 들어온 마귀야』『형

님, 이기 먼 짓입니까?』

『저 여자를 찔러 죽여버리라니까. 안 그라믄 집이 망하는

거여』

집안이 아수라장이 되었다. 정신병자를 처음 본 식구들은

영문을 모른채 서로 원망하고 싸우기만 했다. 어머니는 비관에

빠져 끼니 거르기를 일삼았고, 우리 동생들은 집안에 들어가기

가 지긋지긋해졌다. 원래 한 가정에 정신병자가 한 명 생기면

다른 식구들도 절반은 정신병자가 된다. 정신병자에게 시달려

떼병자가 되는 것이다. 우리 가정도 그렇게 되어갔다.

얼만가 지난 뒤 형의 그런 증세가 정신병인 줄을 알고부터

는 형을 뒷바라지 하느라 온 식구들이 탈진하도록 매달렸다.

견디지 못한 동생들이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아 형을 정신병원

에 입원시켰다. 입원 후 한달 정도 지나면서 병세가 호전되었

다. 병원에서는 5, 6개월 입원시켜야 한다고 했지만 달포가량

지내다 얼마간 좋아지면 퇴원시켰다. 돈이 떨어져서다. 그러면

3, 4개월 후에 병세가 다시 도졌고 우리는 견딜만큼 견디다 도

저히 감당하기 어려울 때쯤에 다시 입원시켰다. 그러기를 세

차례 거듭하게 되니 나중에는 형이라면 진절머리가 났다. 속으

로 별생각이 다 들었다.

『형님에게는 교통사고도 안 나나, 저렇게 가족을 괴롭히며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본인에게도 가족들에게도 좋을텐

데…』그러던 어느날 동생이 사라졌다. 집을 나가버린 것이다.

계성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중이던 때다. 남들 같으면 한참 대

학입학시험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을때다. 얼마 후에, 행방을

몰라 염려하는 가족들에게 해병대 신병 훈련소에서 보낸 동생

의 편지가 날아왔다.

『해병대에 입대한 것은 월남에 전투병으로 지원하여 전투

수당을 받아 형님 병 을 고치고 싶어섭니다. 병들어 있는 형님

을 원망만 하고 있을 수가 없어 학교를 중단하고서라도 집안에

보탬이 되고싶은 마음에 해병대에 입대했습니다』

얼마 후 동생은 청룡부대 전투원으로 월남에 파병되었다.

월남에서 다시 편지가 왔다. 자신은 지금 최전선에서 베트콩들

과 전투중인데 혹시 전사라도 하게 된다면 전사자 수당이 지급

될 터이니 그 돈을 정신병 치료에 써달라는 내용이었다.

편지를 읽으신 어머니는 한숨을 쉬시더니 밤낮으로 동생을

위해 기도하셨다. 나도 동생에게 편지를 보냈다. 우리 집안에

형님 한 분 잘못된 것으로 충분하니 너는 꼭 살아서 돌아와야

한다고 썼다. 다행히 동생은 약간의 부상만 입고 귀국했으나

형님의 정신병을 회복시키지는 못했다. 동생이 목숨을 담보로

벌어 보내온 전투수당 거의 전부를 병원비로 썼는데도 형의 정

신을 맑아지기커녕 오히려 황달증세까지 보이기 시작하더니 눈

이 샛노래지고 몸이 부어올랐다.

우리는 형을 대구동산병원에 입원시켰다. 얼마 후 담당의사

가 김철호 환자의 보호자를 찾는다기에 갔더니 이렇게 일러주

었다.

『솔직히 말하지요. 우리는 의술로 할 수 있는 조치는 다했

습니다. 입원이 늦어져 지금 상태로는 치료가 불가능합니다.

보아하니 가정형편이 넉넉지도 못하신 것 같은데 퇴원하시지

요. 병원에 더 있어보았자 더 좋아질 길은 없다고 봐야 합니

다. 아마 앞으로 일주일을 넘기기 어려울 겁니다. 퇴원시켜서

장례준비나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나는 그날로 형을 퇴원시켜 집으로 데려갔다. 볕바른 방에

형을 모신 뒤 누나 동생 나 셋이 한방에 모여 단합대회를 열었

다.

『우리 형님 참 안됐다. 그렇게 좋은 성품, 좋은 인물이었

는데 정신병을 얻어 동생들에게까지 미움 받다가 결국은 황달

로 죽게 되는구나. 그러나 그나마 다행이다. 이제 며칠 안으로

형님 장례 끝내고 우리 새출발하자. 남은 3남매가 합심해서 어

머니 위로하고 가문을 일으키자. 형님 장례 끝나는 시간부터

집안 분위기를 바꾸어 새로 시작하자. 형님이 못한 몫까지 우

리 셋이 감당하자』

어머니의 보퉁이

3남매가 그렇게 다짐한 후에 장례준비에 들어갔다. 우리들

에게는 새로운 의욕이 생겨났다. 그런데 뜻밖에도 어머니가 여

행 채비를 하시더니 집을 나서는 것이었다.

『얘들아, 나 고향 좀 다녀올게』

『아니, 형님이 오늘 내일하고 있는데 어딜 가신다는 겁니

까. 가시더래도 형님 일 끝나고 가야지요』

『아니다. 너희 형 일로 갈 일이 있다』

그렇게 가신 어머니는 이틀 후에 큰 보퉁이를 머리에 이고

돌아오셨다. 나는 그 보퉁이를 받아내리면서 물었다.

『어머니, 이게 뭔가요?』

『고향 가서 너희 형에게 좋다는 약을 캐왔다』

『아니, 그러면 어머니께서 이 약 캐러 고향에까지 가셨던

거예요?』

『그래 죽어가는 사람 꼴을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순 없더

라』보퉁이를 펼쳤더니 온갖 풀뿌리 나무뿌리들이 섞여 있었

다. 쑥뿌리가 제일 많았고 익모초, 도라지, 더덕, 엉겅퀴 등등

의 뿌리들이 있었다.

어머니는 그 뿌리들을 씻어 솥에 넣고는 한 솥 가득 물을

부어 연탄불에 올려놓았다. 이틀이 지난 후에 뿌리들을 건져내

고 나니 새까만 물이 남았다. 그 물을 식혀 형이 마시게 했다.

딱 세 사발을 마시더니 형은 감쪽같이 나아버리는 것이었다.

노랗던 눈도 제 색을 되찾고 부었던 몸도 부기가 내려 정상적

인 몸으로 바뀌었다. 그러더니 금세 기력을 되찾는 것 아닌가.

형님에게 일어난 그런 변화를 보고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이거 큰일났네. 정신병은 그냥 두고 황달만 고치면 어떡

하나…』

그때 우리들의 낙담은 말로는 표현키 어려울 정도였다. 나

는 어머니께 항의했다.

『어머니는 참말로 너무 하십니다. 큰아들만 눈에 보이고

우리 동생들은 보이지 않습니까? 정신병은 그냥 두고 황달만

고쳐놓으면 이제부터 정신병 뒷바라지는 누가 합니까? 우린 이

제 지쳐서 집 나갈 테니 어머니가 형님과 둘이 사세요』

나의 거센 항의에 어머니를 한숨을 쉬시며 말했다.

『그래, 니 말 나도 알겠다. 그러나 너도 나중 자식 낳아

길러 봐라. 이 에미 맘 알끼다. 부모로서 자식 앞세우기가 어

떤긴지 너희가 아직은 모를끼다』

어쨌든 어머니의 노력으로 형의 황달병은 나았으나 정신병

증세는 여전했기에 견디다 못한 우리는 형을 기도원에 들여보

냈다. 성령의 불 같은 능력으로 정신병을 고친다는 「구원선」

이란 이름의 기도원이었다. 비용 때문이었다. 기도원은 정신병

원보다는 비용이 5분의 1 정도로 싸게 먹히는 까닭에 형을 그

리로 보냈다.

기도원으로 들어간 지 두 달쯤 지나 어머니와 내가 기도원

으로 면회를 갔다. 약간의 옷가지들과 음식을 사들고 간 우리

를 만난 형은 아무런 말없이 그냥 울기만 했다. 어떻게 된 거

냐? 어디가 아프냐? 대우가 나쁘냐? 여러가지로 물었으나 묻는

말에 대답은 없이 그냥 울기만 했다. 무언가 두려워하는 눈길

을 사방에 보내며 울기만 할 뿐이었다. 나는 이상히 여겨 웃옷

을 벗겨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온 몸에 매맞은 자국으로

마치 구렁이를 감아놓은 듯했다.

알고보니 그 기도원이란 곳이 귀신을 쫓아낸답시고 환자들

을 매질하는 곳이었다. 참나무 몽둥이로 환자들을 때리며 『귀

신아 물러가라』며 고함을 지른다. 환자가 비명을 지르면 『이

놈의 귀신이 어디서 엄살 떠는 거냐』하며 매질을 계속했다.

그러다가 환자가 거품을 뿜으며 까무러치면 『할렐루야! 귀신

물러갔다』고 환성을 지르는 식이었다.

형의 그런 모습을 보시고 어머니는 얼굴이 백지장처럼 새하

얘지시며 신음하듯 한마디 하셨다.

『아이고 불쌍한 내 아들아…』

나는 어머니와 형의 모습을 번갈아 보다가는 힘없이 말했

다.

『형님 내가 잘못했습니다. 이런 곳일 줄이야 생각이나 했

겠습니까. 집으로 갑시다. 죽어도 집으로 가서 죽읍시다. 이런

곳에서 맞아 죽어서야 되겠습니까』

그 길로 형님을 퇴원시켜 집으로 데려왔더니 동생이 얼굴을

찌푸리며 항의했다.

『형, 왜 그래? 혹 떼러 갔다 혹 붙여 온 거잖아. 죽든 살

든 왜 집으로 데려왔어』

『오죽 딱했으면 집으로 데려왔겠냐』

나는 누나와 동생 앞에서 형의 상의를 벗기고 매맞은 자국

을 보여주며 기도원 사정을 설명했다. 뜨거운 것이 가난한 집

안의 형제우애라 했듯이 나의 말을 들은 누나와 동생은 숙연해

져 말했다.

『오빠 잘 데려왔어. 그런 곳인 줄 모르고 보낸 우리가 잘

못한 거야. 병든 것만도 서러운데 그렇게 매질을 하다니. 거기

그냥 두었으면 맞아 죽었겠네』

그날로 누나와 동생과 나 3남매는 마음을 새롭게 하여 형을

돌보는 일에 정성을 쏟기로 했다. 누나가 말했다.

『불쌍한 우리 오빠. 남들에게 맡기지 말자. 남에게 짐을

떠넘기려 한다고 넘겨질 일이 아닌 것 같애. 힘들어도 우리가

돌보자.

어머니 생각해서라도 우리가 돌보자』

동생도 누나의 말에 공감을 표했다. 형님 병 고치겠다고 월

남까지 갔던 동생이다. 동생은 월남에서 돌아온 후 해병대에서

제대하고 공부하며 검정고시를 치렀다. 검정고시에서 자격을

얻은 후로 그때는 경북대학교 사범대학에 재학중일 때였다.

『그래, 누나, 형 우리들 셋이 일주일씩 당번을 정해 큰형

님 돌보자. 일주일간 자기 당번일 때는 다른 일은 미루고 형님

돌보는 일에 주력하는 거야. 그렇게 하는 것이 어머니 한도 풀

어드리고 우리도 나중에 후회가 없는 거야』

우리는 형을 돌보는 일에 열심을 내게 되었다. 함께 목욕탕

에 다녀오는 일에서 시작하여 손톱 발톱 깎아주는 일, 과일을

함께 먹으며 대화를 나누고 시집을 함께 읽기도 했다. 성경을

함께 읽고 손을 마주잡고 기도를 드리기도 했다. 세상 돌아가

는 사정을 자상히 일러주기도 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난 후

에는 동생이 맡아 성심껏 돌보았고, 그 다음은 누나가 담당하

는 순서로 최선을 다했다. 4개월여를 계속했더니 변화가 일어

났다. 형이 점점 좋아지더니 4개월이 지난 즈음에 완연하게 좋

아졌다.

우리 가정에 다시 웃음이 돌아왔다. 특히 어머니의 기쁨은

말할 수 없었다. 하루는 눈시울을 적시며 말씀하셨다.

『야들아. 이제 내가 한을 풀었다. 너그 형 좋아지니 이제

여한이 없다. 하늘나라 너그 아버지 있는 데로 가도 되겠다』

『어머니 말씀 잘못하십니다. 모처럼 형님이 좋아졌으니 이제

좀 편안한 생활 누리다가 천국 가셔야지요. 천국이 좋다지만

서둘러 가실 건 없습니다.』

형님의 「행복한 죽음」

근년에 들어 정신병 환자는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 나는 우

리 가정의 경험을 통해 정신병 환자가 있는 가정의 고통을 알

고 있다.

그래서 지금도 정신질환자들을 만나면 본인의 고통도 고통

이려니와 먼저 저 환자의 가족들이 얼마나 고통을 겪고 있을까

하는 염려를 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오랫동안 형을 기념하는

정신병원 설립을 꿈꾸어 왔다. 어떤 특효약이 있어서가 아니라

환자 가족의 입장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정신병원을 운영해 보

고 싶은 생각에서였다. 다행히 꿈이 이루어져 금번 부산에

「사회복지 법인 두레마을 청십자 정신병원」을 설립할 수 있

게 되어 기쁘기 그지없다. 오랜 세월의 기도가 이루어졌기에

더 큰 보람을 느낀다.

아무튼 형님은 그 후 오래 살지 못했다. 그렇게 어렵사리

병에서 회복돼 온 식구들에게 기쁨을 주었으나 간을 다쳐 간경

화증에 걸렸다. 병원에 갔더니 회복하기에는 늦었다며 환자가

하고 싶다는 대로 해주라고 의사가 권했다.

얼마 후 형님이 세상을 하직하는 날이 왔다. 아침 세수하다

가 피를 토하더니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숨을 거두기 10분 전

부터 이변이 일어났다. 온 얼굴에 신비스런 미소가 떠오르더니

기쁨과 감격이 넘치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행복에 넘치

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 오늘 예수님 나라로 간다. 동생들 나 때문에 그간 고

생들 했지. 가서 예수님께 부탁드릴게. 동생들 뒤를 좀 돌봐달

라고 말씀드릴게. 여기서는 갚지 못하고 예수님 나라 가서 갚

도록 할게』

나는 형의 그런 임종 모습을 대하고는 가슴이 떨리는 충격

을 받았다. 그리고 기쁨이 넘치는 형의 얼굴을 보고는 이런 생

각이 들었다.

『야! 우리 형님은 성공하였구나!』

어차피 나그네 길을 살다가 떠나는 세월인데 10년을 정신병

으로 고통 당했어도, 평생을 밑바닥을 헤맸어도 죽을 때 저렇

게 죽을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성공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지난 10년 세월동안 형을 원망하고 미워하던 생각은 한순간에

사라지고 함께 감격을 누리는 마음이 되었다. 대학에서 철학을

배우던 시절에 어느 교수님이 강의하던 말이 생각났다.

『철학은 무엇이냐? 철학의 목표는 무엇이냐? 죽을 때 웃으

며 죽을 수 있는 연습이다』

그렇다. 철학도 종교도 결론은 무엇이냐? 임종하는 순간에

저렇게 행복에 넘쳐 죽을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라 생각되었

다.

형의 임종 모습이 내게 준 감동은 나 자신의 가치관과 삶의

방향을 바꿀 만큼 큰 것이었다. 그 뒤로 나는 죽는다는 것은

참 좋은 것이라는 신념을 지니게 되었다. 판잣집 같은 이 세상

을 살다가 호텔 같은 하늘 나라로 옮겨가는 것이 죽음이다. 그

리고 옮겨가서 예수님 모시고 안식을 누리며 사는 것이라는 확

신을 품고 있다. 그래서 지금도 나는 삶과 죽음에 대하여는 하

나의 일관된 생각을 품고 있다.

『살아 있을 동안에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백성들을 섬기

는 일을 열심히 하다가 죽음을 맞으면 하늘나라 예수님 곁에

가서 편안히 쉬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래서 죽음이란 참

좋은 것이라고 일관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형님이 임종하는 자리에서 『동생들 나 때문에 고생

했는데 하늘나라 가서 예수님께 동생들 뒤를 봐달라고 부탁드

리겠다』고 하였는데 그 뒤로 일어난 일들은 그때 그 말을 실

감케 하는 것이었다. 나에게 큰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그 어려

움을 극복해 나가는 일에 죽은 형이 도움을 주었다.

예를 들어 지금 내가 일하고 있는 남양만에서 개척 초기에

있었던 일이다. 농민을 돕는다고 큰 프로젝트를 시작했다가 실

패하게 되었다. 빚쟁이들에게 시달리고 주민들에게도 불신을

받아 진퇴양난에 빠졌던 때다. 도저히 견뎌 나갈 길이 없어 봇

짐을 싸놓고 날이 새면 떠나려는 결심을 한채 새우잠을 자던

중 꿈에 형님이 나타났다. 평소처럼 생생한 모습으로 형님이

이르기를 『힘들지, 그래도 견뎌야지. 예수님이 다 알고 계시

는데…』

『형님 그래요? 지금 내가 고생하고 있는 걸 예수님이 알고

계셔요?』

『그럼 알다마다 예수님이 다 지켜보고 너를 기특히 여기시

니까 어렵더라도 딴 맘 먹지 말고 이겨나가라구. 세월이 지나

면 좋은 날이 올 테니』

형님과 이런 대화를 나누고는 잠을 깼다. 꿈에서 깨어난 후

에도 마음속에 넘쳤던 기쁨이 그냥 남아 있었다. 그 자리에서

일어나 교회당으로 가서 새벽기도를 드리고는 묶었던 짐을 풀

었다. 그리고 다시 시작하였다.

키에르케고르냐, 그룬드비그냐

대학생활이 졸업기로 다가오면서 나의 마음에 한 가지 갈등

이 일기 시작했다. 조금은 색다른 갈등이었는데 한마디로 키에

르케고르냐, 그룬드비그냐 하는 고민이었다. 그들 둘은 같은

시대를 살다 간 덴마크의 선각자들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사색

하는 철학자로 살아 실존철학의 창시자가 되었으며, 그룬드비

그는 행동하는 목사로서 덴마크 국민들의 혼을 깨우치고 민족

정기를 일으키는 일에 평생을 바친 사람이다.

나는 이들 둘의 대조적인 삶에서 나 자신은 어느 길을 갈

것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사색하는 철학도의 길이냐, 행동

하는 선각자의 길이냐를 두고 고심에 고심을 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같은 시기에 코펜하겐 대학을 다녔다. 키에르케

고르는 철학을 공부하느라 연인 레기나와 맺은 약혼도 파기했

다. 그는 스스로를 일컬어 『나는 높은 산 위에 홀로 서 있는

노송(老松)과 같은 사람이다. 고독하고 고독하여 새들도 와서

깃들이지 않는다. 나는 고독 속에서 신 앞에 단독자(單獨者)로

서기를 나의 철학의 주제로 삼는다』고 했다. 그는 철저하게

자기 자신의 내면을 파고들며 자신의 혼을 실은 글들을 남겼고

그 글들로 후대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그룬드비그의 길은 달랐다. 그는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졸업하던 해에 목사고시를 치렀다. 그 고시에서 그는 낙방했

다. 고시과목 중에 설교시험이 있었는데 그는 「덴마크 교회

지도자들이여 회개하라」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고시위원들

이 그를 낙방시켰다. 요즘 말로 하자면 「괘씸죄」에 걸린 것

이었다. 목사고시에 떨어진 후 외딴 섬으로 전출된 그는 신경

쇠약에 걸렸다. 젊은 날의 투지도 기백도 사라지고 자신의 한

몸도 감당하지 못하는 지경에까지 몰렸다.

이런 위기에 직면하였을 때 그는 신 앞에 무릎을 꿇었다.

『신이여 나에게 은총을 베푸시옵소서. 이 어두움에서 나를

건져 주시옵소서』

그는 간절히 간절히 부르짖었다. 생사를 걸고 하늘에 호소

했다.

드디어 어느 날 하늘이 열리는 체험과 함께 신의 손길이 그

에게 닿았다. 이어서 뜨거운 성령 체험에 사로잡혀 감격과 감

사의 눈물을 흘리게 되었다. 이런 영적 체험 후 그는 치유되었

고 그의 설교는 불을 뿜었다. 확신과 비전이 넘치는 설교자로

변신한 것이다. 그는 뜨거운 열기를 지니고 덴마크 국민들에게

「하나님 사랑」 「땅 사랑」 「사람 사랑」의 3애(三愛)정신

을 불어넣었다.

그의 설교를 들은 젊은이들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크리스티

안 콜이란 젊은이는 그의 설교에 감명받아 농촌으로 내려가 농

민학교를 세웠다. 그 유명한 덴마크 국민고등학교 운동의 시작

이다. 달가스란 이름의 퇴역장교는 황폐해진 덴마크 땅에 나무

심기를 시작했다. 어떤 이는 체조운동을 일으켰고, 어떤 이는

생활개선 운동을 벌였다. 이들 운동을 통하여 덴마크 역사가

다시 일어서게 되었다. 덴마크 민족이 좌절의 역사를 딛고 일

어나 복지국가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나는 대학시절의 막바지에 키에르케고르의 길을 가느냐, 그

룬드비그의 길을 가느냐, 철학자의 길이냐, 개혁자의 길이냐를

두고 갈등과 고민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 고민에 젖어 있던 졸업학기인 11월에 나는 모교의 해

외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전액장학금을 지원 받아 미국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을 때까지 공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때

만 해도 미국유학이 어려웠다. 나는 모교의 재정지원을 받아

미국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모교에 돌아와 철학교수로 종

신하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철학에 대한 끊임 없는 의문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졸업이 다가오면서 전공과목인 철학

서적을 읽노라면 끊임없는 의문이 일어나는 것이었다. 다름아

니라 『철학이란 해답없는 질문의 연속인 학문이 아니냐』는

의문이었다. 「정답이 없는 질문」 그것이 철학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었다. 서양으로 말하자면 소크라테스로부터 하이데거에

이르기까지, 동양으로 말하자면 공자 맹자로부터 오늘에 이르

기까지 철학은 끊임없이 질문하고 질문했다. 그러나 어느 시대

에도 어느 철학자에게서도 해답은 나오지 못했다. 각자가 해답

이라고 말들은 하였으나 그 어느 것도 정답이 되지 못했다. 뒤

를 이은 후배가 그 해답을 부정했고, 다음 세대는 그 이론을

무너뜨리곤 했다.

철학자 중의 철학자로 인정받는 독일의 임마누엘 칸트는 모

든 철학적 질문을 3가지로 모았다. 그리고 하나 하나의 질문에

한권의 책을 썼다. 첫째 질문은 도대체 인간은 무엇을 인식할

수 있느냐의 질문이었다. 그의 주저 『순수이성비판』에 담긴

내용이다.

둘째 질문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의 질문이다.

『실천이성비판』이란 책에 담긴 내용이다. 세번째 질문은 인

간은 무엇을 바랄 수 있느냐의 질문이다. 『판단력 비판』이란

책으로 나타났다.

첫번째 질문인 무엇을 인식할 수 있느냐는 인식론의 문제

요, 두번째의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는 윤리학의 문제다. 그리

고 세번째 무엇을 소망할 수 있느냐는 종교의 문제다. 칸트는

이런 질문을 내걸고 평생을 사유하였으되 그 역시 해답을 얻지

못했다.

어느 날 밤이 깊은 시간에 나는 책상 위에 20여권의 철학서

적들을 쌓아두고 생각했다.

『이 책들 속에 담긴 내용에 나의 인생을 걸 수 있을까!』

나는 무언가 흡족지 못함을 느꼈고 내 영혼 깊은 곳에 채워지

지 못하는 갈증을 느꼈다. 『이래서는 안되는데…. 무언가가

잘못 되었어…』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런 중에도 졸업식은 다가 왔다. 1966년 2월이었다. 수석

입학에 수석 졸업을 한 덕분에 조교로 남게 되고 미국 유학 수

속을 밟으며 나는 철학자가 되는 길을 걷고 되었다. 내가 모시

던 철학과 교수님들은 사정이 생기면 햇병아리 조교인 나에게

대강(代講)을 맡기곤 했다.

1966년 5월 어느날 영문학과와 철학과 1학년이 수강하는 교

실에서 나는 철학개론을 강의하고 있었다. 인생관에 대한 주제

를 걸고 열강을 하고 있는데 한 학생이 손을 들며 물었다. 영

문과 학생이었다.

『교수님, 진리가 무엇입니까?』

돌이켜보면 그때 그 학생의 한마디 질문이 내 인생 여정에

한 전기가 되었다.

애초에 내게는 벅찬 질문이었다. 대답할 만한 적합한 말이

떠오르지 않은 나는 망설임 끝에 임마누엘 칸트의 진리 개념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칸트는 그의 주저 「순수이성비판」의 앞

부분에서 진리에 대하여 논했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어떤

사물이나 사건에 대하여 나의 머리 속에 있는 개념과 그 사물

혹은 사건 자체가 일치할 때 그것이 진리』라고 설명하고 있

다. 예를 들어 내 손에 쥐여 있는 만년필로 말하자면 나의 머

리 속에 담겨있는 이 만년필에 대한 생각과 이 만년필 자체가

일치될 때 그것이 진리란 것이다. 일컬어 인식론상(認識論上)

의 진리이다. 나는 이런 내용을 열심히 설명하고는 알아들었느

냐는 몸짓으로 그 학생의 얼굴을 보았다. 그랬더니 그는 픽 웃

으면서 되물어왔다.

『교수님, 그런 진리말고요. 내가 그것을 위해 살다가 그것

을 위해 죽을 수 있는 그런 진리를 묻고 있습니다. 칸트가 말

했다는 그런 진리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유학 포기하고 세상 속으로

나는 몹시 당황했다. 내 정신세계의 가장 큰 약점을 그가

지적한 셈이었다. 그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솔직하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런 진리는 나도 모르고 있습니다. 나도 지금 그런 진리

를 찾는 중입니다』

나의 어색한 대답에 그는 다시 따지듯 물어왔다.

『교수님 오늘 강의를 시작하면서 철학은 진리를 찾는 학문

이라고 전제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교수님은 진리가 무엇인

지 아직도 모르고 계신다니 그렇다면 수업을 더 계속할 필요가

없는 거 아닙니까? 모르시는 것을 모르는 우리들에게 가르치시

는 것은 서로가 시간낭비 아니겠습니까? 그만 수업을 마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의 말에 온 교실의 학생들이 『와 …』 하고 웃음을 터뜨

렸다.

나는 난처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남은 시간을 어물어물 넘

기고는 끝나는 벨소리가 나자마자 연구실로 갔다. 의자에 앉자

심호흡을 몇번 하고는 생각했다. 그 학생이 제기한 질문은 타

당하였다. 자신이 모르는 것을 가르친다는 것은 마치 장님이

장님을 안내하는 만큼이나 난센스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

가? 내가 그것을 위해 살다가 그것을 위해 죽을 수 있는 그런

진리가 체득(體得)되기 전까지는 가르치기를 중단해야 할 것인

가? 지금은 풋내기 조교니까 강단에 서지 않으면 되겠지만 장

래에는 어떻게 되는가? 그런 확고한 진리를 깨달아 소유한 후

에 철학교수가 되어야 하는가? 맹자 석가모니는 생로병사에 대

한 의문이 깊어지자 왕궁을 떠났다. 눈 덮인 산에서 7년의 고

행을 쌓은 후에 도를 깨쳤다. 그리고 가르치기 시작했다. 나사

렛 예수도 그랬다. 그는 유대땅 후미진 마을 갈릴리에서 목수

로 일하다가 서른이 넘어서야 하늘의 뜻을 터득했다. 그리고서

가르치기 시작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예수가 가르치기 시작한 첫 마디였다. 때가 찼다는 말은 무

슨 뜻일까? 자신이 가르칠 때가 찼다는 말일까? 아니면 백성들

이 들어야 할 때가 찼다는 것일까? 그도 아니라면 하늘의 뜻이

백성들의 삶의 한 가운데로 임하는 때가 찼다는 말일까? 나도

석가모니나 예수처럼 깨달음에 이르고 때가 찼음을 확신하게

된 후에 가르쳐야 할 것인가? 다른 선배 철학교수님들은 어떤

가? 무언가 깨달음의 자리에 오른 후에 가르치고 있을까? 모르

긴 해도 나와 오십보 백보의 차이일 것이다. 물론 그 지식의

넓이나 인간이해의 폭을 나와는 비할 바 아니겠으되 「모르고

가르치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느 대학 할 것 없이 철학과 교수님들은 자신이 체득한 삶

의 의미를 강의하는 것이 아니라 서양철학자들의 저서를 읽고

번역 소개하는 수준이 아닐까. 그래서 모 대학의 모 박사는 칸

트전공이다, 모 대학의 누구는 하이데거 전공이다 하여 자기가

전공한 철학자의 책을 읽고 번역하고 논문을 낸다. 학위를 받

고 세월이 흐르면 권위가 붙는다. 자기 삶으로 익힌 진리를 말

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 이해한 칸트나 하이데거를 말한다.

그걸 들은 학생들은 그러잖아도 모르던 데서 더 모르게 되고

혼란에 빠져들게 된다. 나도 선배 철학교수들과 같은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교비장학생으로 선발되었으니 미국에서 학

위받고 귀국하여 강단에 서게 되었을 때 무엇을 가르칠 수 있

을까? 그때에도 어느 학생이 『진리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어

온다면 무슨 대답을 하게 될 것인가? 자신 없는 일이었다. 한

번 사는 인생인데 그렇게 살아갈 수는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

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 시간 이후로 나는 장고(長考)에 장고를 거듭해 한 결론

에 이르렀다.

『세월이 흐른 후에 나 자신에게나 후학들에게 이렇게 사는

삶이 진리로 사는 삶이요, 참된 가치를 창출(創出)하는 삶이

다』그렇게 확실하게 말해줄 수 있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결론

이다.

비록 생활수단으로서의 직업은 이발사건 농부건 간에 자신

이 확신하고 그렇게 사는 것을 말하고 자신의 삶의 현장속에서

터득한 가치를 구체화하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결론에 도달했

다. 그렇다.

고민하는 대학교수보다 건강한 농부가 바람직하다. 신경쇠

약 걸린 박사보다 단잠자는 노동자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철학다운 철학을 하려면 미국 유학을 하고, 박사 학위를 받

고 책 속에 갇혀 사는 삶이 아니라 나의 마음을 갈고 닦아야

하지 않을까?

우리 조상님네들의 혼과 얼이 밴 이 땅 어딘가에서 내 삶의

뜻을 깨우쳐 나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나는 그때까지 계획하고 진행시켜 오

던 일체를 중단하고 백지상태에서 인생수업을 나서기로 작심했

다. 스님이 되려는 사람들이 출가(出家)하여 머리를 깎는 마음

가짐으로 나는 세상 한복판에 자신을 던져 구도의 길을 걸어보

기로 다짐했다.

아이스케키 장사로 나서

여름방학이 시작되기가 바쁘게 나는 약간의 돈을 마련하여

서울로 갔다. 서울역 뒤 만리동 고개에서 아이스케키 장사 했다.

아이스케키 하나에 2원70전에 받아 5원에 팔았다. 하루 3백

개 정도를 팔아 끼니는 해결할 수 있었다. 마포언덕의 만리동

고갯마루에 소의초등학교가 있었다. 교문 옆에 아이스케키통을

놓고 그 위에 걸터앉아 『아이스케키 두 개 십원』하고 소리를

질렀다.

밀짚모자를 깊숙이 눌러 쓰고 눈께에 두 구멍을 뚫고는 그

리로 세상을 내다보며 지냈다.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젊은 날 한때 바늘

장사를 하며 바늘 구멍으로 세상을 내다 보았다는 말을 기억하

고는 나는 밀짚 모자 구멍으로 세상을 살피겠노라는 생각을 하

고 있었다.

가끔은 케키통을 울러메고는 만리동 고개를 내려와 서울역

광장을 돌아 남대문을 거쳐 명동까지 갔다가 다시 발길을 돌려

시청을 돌아 만리동 고개로 되돌아오곤 했다.

보통 때는 세 끼 밥과 잠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으나 날씨가

흐리면 끼니조차 간데 없었다. 당시의 초등학교에는 급식(給

食)빵이란 것이 있었다. 옥수수가루와 밀가루를 섞어 만든 빵

으로 매일 하나씩 아이들에게 배급되었다. 아이들은 그 빵이

맛이 없다며 나에게로 가져와 아이스케키와 바꾸어 먹자고 제

안했다. 나는 하루 세 끼 해결하기가 쉽지 않았던 터라 이 제

의에 응했다. 급식빵 하나에 아이스케키 2개씩으로 물물교환이

이루어졌다. 저녁 때가 가까워지면 나의 케키통은 급식빵으로

채워졌다. 나는 그 빵을 잠자리인 남대문 합숙소로 가져가 잠

자리 동료들과 나누어 먹곤 했다. 그러기를 거듭하니 자연히

인기가 높아졌다. 대구 김씨, 대구 김씨라고 부르며 저녁마다

나를 찾는 이웃들이 늘었다.

무능하고 게으른 사람들이었지만 소박하고 인정미 있는 사

람들이었다. 내가 장사 터전으로 삼고 있던 소의초등학교 정문

곁에서도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학교 담벽 그늘을 의지한

채로 앉아 있노라면 온갖 행상(行商)들이 지나갔다. 남루한 옷

차림에 지쳐 있는 잡상인들의 모습에서 민생고(民生苦)가 무엇

인지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만리동 고개의 가파른 길을 오르내

리며 생명을 부지하려 애쓰는 그들에게서 정(情)을 느껴 그들

을 불러세웠다.

『아주마니 여기 그늘에 잠시 쉬어 가시라요. 내 아이스케

키 하나 드리리다』

그런 나의 호의에 처음에는 서먹서먹해하고 미심쩍어 하다

가는 이내 허물없는 사이로 발전되어 갔다. 많은 행상인들이

그 앞을 지날 때는 으레 아이스케키 하나 받아들고 쉬어 가는

곳으로 여기게끔 되었다. 나는 그들이 쉬는 동안 이런저런 이

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낙을 삼았고 그것이 세상공부가 되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그 날도 소의 초등학교 담벽에 기대

앉아 『아이스케키 두-개 십-원-』하고 있으려니 한 젊은이가

손수레를 힘겹게 끌며 고갯길을 올라오고 있었다. 목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연방 문지르며 그가 끌고 있는 손수레 위에는 튀

긴 옥수수 자루, 빨랫비누, 세숫비누 등이 실려 있었고 손수레

안에는 빈병이며 헌시계, 고무신 등등이 쌓여 있었다. 가을부

터 봄까지는 엿을 싣고 다니지만 초여름에는 더위에 엿이 녹아

내리기에 튀밥이나 비누 등 일용품을 싣고 골목골목을 다니며

고물과 바꾸는 엿장수였다. 나는 고갯길을 오르는 그에게서 여

느 엿장수와는 다른 분위기를 느끼고 늘 하던 대로 그를 불러

세웠다.

『여보 젊은 양반, 여기 좀 쉬어 가소 내 케키 하나 선사하

겠수다』

그는 담그늘로 들어 와서 목수건으로 얼굴의 땀을 훔치며

말했다.

『야 이거 더워 못해먹겠는데요. 고맙소. 그러나 케키값은

내가 내겠수다』

『원 별말씀을 그냥 하나 드리는 거니 신경 쓰지 마세요.

어떠세요. 요즘 같은 더위에 고물장사가 힘들텐데요』

『그냥 밥이나 먹지요』

그는 아이스케키를 먹으며 목에 걸었던 수건을 손수레 위에

던졌다. 손수레 위에 떨어지는 수건을 보던 나는 수건 옆에 제

본이 잘 된 외국 책 한 권이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독일 철

학자 하이데거의 저서인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이었다.

생각지도 않은 자리에서 내 전공인 철학서를 보게 되니 반가운

마음에 책을 집어들며 물었다.

『노형 이 하이데거 책 어디서 구했소?』

내 짐작으로는 엿장수가 하이데거의 책을 읽을 리는 없을

테고 아마 강냉이와 헌 책을 바꾸는 중에 따라온 것으로만 생

각했다.

젊은이는 아이스케키를 먹던 손동작을 딱 멈추고는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살폈다. 그리고는 되물었다.

『아니 당신, 이 책이 하이데거 책인 줄 어찌 아시오?』그

때 나의 케키통 위에도 철학 책이 한 권 놓여 있었다. 영국 철

학자 버트런드 러셀이 쓴 『철학이란 무엇인가?』였다. 나를

의아스럽게 훑어보던 그의 눈길이 러셀의 책에 닿자 그는 책을

집으며 물었다.

『당신이 이 책을 읽는 거요?』

놀란 우리는 통성명했다. 그는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했고

서울의 어느 여자고등학교 독일어 교사였노라고 했다. 그런데

여고생들이 독일어 학습에 별반 성의가 없이 수업시간에 떠들

고 졸기만 하기에 사직하고 이렇게 세상구경이나 하며 다니는

중이라 했다.

그의 표현대로 옮기자면 독일이 가르치기에 하품이 나서 데

어 데스 뎀 덴(Der, Des, Dem, Den) 될대로 돼버려라, 팽개쳐

버리고는 엿장수가 되어 철학실습하는 중이라고 말하며 너털웃

음을 웃는 것이었다.

자신은 그렇다치고 당신은 무슨 일로 아이스케키 장사를 하

느냐고 묻기에 나는 칸트니 듀이니 서양철학자들의 책에서 뭔

가가 나올 것 같지 않아서 손 떼고 서민들의 살아가는 숨결을

느끼며 무언가를 찾아보려고 헤매는 중이라고 대꾸했다. 우리

는 의기가 투합되고 배짱이 맞아 대폿집으로 직행했다.

대폿집 나무의자에 걸터앉은 우리는 뿌연 막걸리 사발을 서

로 권하며 인생을 논하고 세상을 논했다. 그는 술기운이 거나

하게 오르자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부리며 말했다.

『옛날 공자 형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조문도(朝聞道)면 석사

(夕死)라도 가(可)하니라….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 나절에

죽어도 좋겠다고 하셨다는데, 김형 그거 옳은 말이외다. 시방

에 내가 그 마음이요. 공자 형님 말이 바로 내 말이다는 것이

요. 지금 나에게 누군가가 살아갈 이유, 즉 존재이유를 말해준

다면 그를 평생 섬기겠수다. 그리고 누군가가 내게 어떻게 살

아가야 할 것인지를, 즉 존재방식(存在方式)을 일러준다면 그

를 나의 주인으로 모시고 평생 그의 머슴이 되겠수다. 허나 찾

고 찾아다녀도 그럴 만한 주인을 못만나겠구려. 김형, 결론으

로 말하자면 머슴은 있으되 주인이 없다, 이 말이외다. 나는

섬길 주인은 찾아 손수레에 엿을 싣고 골목골목 누비기를 해를

넘겼수다. 헌데, 주인은 나타나지 않고 헛된 세월만 가고 있구

려』

말을 듣고 있던 나도 심각해졌다. 그의 말이 바로 나 자신

의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에게서 나 자신의 분신(分身)

을 보는 것만 같았다. 그와 헤어진 후 나는 아이스케키통을 어

깨에 메고는 서울역 광장을 걸으며 그가 했던 말을 되뇌었다.

『종은 여기 있는데 섬길 주인이 없다』

『평생을 바쳐 섬기고 싶은데 그럴 만한 주인을 찾지 못하

겠다』『주인 찾아 서울 거리를 헤맸으나 헛되이 세월만 가버

렸다』때 맞춰 교회당에서 종소리가 들려왔다. 서울역 가까이

에 있는 교회였다. 교회당 입구에 「심령부흥성회」라 쓴 현수

막이 걸려 있었다. 교회당 안은 이미 찬송소리 박수소리 기도

소리에 열기로 가득했다. 나는 뒷자리에 앉아 기도드리기 시작

했다.

온 정신을 다하여 기도드렸다. 어린 시절부터 섬겨왔던

「하나님」을 잃어버린 나는 무턱대고 어딘가에 있을 것 같은

신을 향해 기도드렸다. 마치 길 잃은 어린이가 부모를 찾듯이

나는 간절함으로 찾았다. 목마른 노루가 시냇물을 구하듯이 구

하였다. 그리고는 목사님의 설교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날 저녁 목사님의 설교는 길을 잃은 내 영혼이 길

을 찾기에는 너무나 거리가 먼 내용이었다. 석조건물인 그 교

회는 교회당을 증축하는 중이었고, 건축에 소요되는 건축비를

모금하는 중이었다. 강사의 설교는 헌금을 많이 하는 성도가

복을 많이 받는다는 내용이었다.

신의 계시는 낌새도 없었고 하품만 나왔다. 도대체 예수를

만나게 해주어야 헌금을 하든 몸을 바치든 하겠는데 예수는 그

림자도 비치지 않고 헌금부터 하라니 하품이 나오지 않을 수

없는 터였다. 나는 설교가 끝나기도 전에 일어나 교회당을 나

왔다.

서종삼에서 걸린 요도염

교회에서 실망은 품고 나온 나는 그 길로 서종삼으로 갔다

서울 종로3가 뒷골목에는 이름난 창녀촌이 있었고 서울의 종로

3가에 있다 해서 「서종삼」이라 불렀다. 피카디리 극장 뒷골

목으로 접어드니 요란스레 화장한 색시들이 길손들을 끌고 있

었다. 나에게도 한 아가씨가 착 달라 붙으며 팔장을 끼더니

『놀다 가세요』했다. 나는 그녀가 이끄는 대로 따라 들어갔

다. 나를 골방으로 데려간 그녀는 제멋대로 생긴 얼굴에 애교

를 떤답시고 눈을 흘기며 물었다.

『아저씨 긴 밤 하겠어요. 쇼트타임으로 하겠어요』

『긴 밤은 뭐이고 쇼트타임은 뭐예요?』

『아저씨 괜히 초자처럼 시침 떼지 마세요. 이런 데 많이

다녀보신 분 같은데…』

원 세상에 나를 보고 서종삼에 많이 다녀본 사람 같단다.

칭찬도 아닐 테고 그렇다고 흉도 아닐 테고, 착잡한 기분이 들

게 하는 말이었다. 내가 멍청히 서있기만 하자 그녀가 일러주

었다.

『아저씨 정말 모르시나 봐. 쇼트타임은 잠시 놀다 가는 거

구요.

긴 밤은 주무시고 가는 거예요. 아저씨 긴 밤으로 하세요.

서비스 잘 해 드릴게요』

『긴 밤으로 하면 비용이 얼마나 드는데요』

『아직 초저녁이니 삼천원은 주셔야 돼요』

나는 아이스케키 장사 밑천과 비상금까지 몽땅 털어 2천 몇

백원을 주었다. 그녀는 옷을 벗었다. 마치 신발 벗듯이 쉽게

벗었다.

나는 처음 해보는 작업이라 두서없이 허둥지둥 끝나버렸다.

엉겹결에 끝나자 후회부터 앞섰다.

『이런 게 아닐 텐데, 도저히 이런 게 아닌데…』

그녀는 남의 속도 모르고 팬티를 끌어 올리며 말했다.

『이 아저씨 순 맹물 아냐?』

조롱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거울 앞에서 머리를 매만지고

있었다. 불결감이 치밀어 가슴이 울렁이며 토할 것만 같았다.

나는 아가씨의 눈길을 피하며 벽에 걸린 달력을 보다가 아가씨

에게 말했다.

『아가씨 미안하지만 다른 방에 가서 잘 수 없겠어요?』

『왜요, 내가 싫으세요?』

『아니, 책이나 좀 읽다가 잘까 해서….』

『그럼 새벽에 다시 올께요』

『아뇨, 안 와도 돼요, 이걸로 족해요』

그녀는 얼굴이 밝아지며 나갔다. 아마 상대를 골라 수입을

더 올릴 수 있게 되어 좋아하는 것 같았다. 나는 잠들려 애썼

으나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눅눅한 이부자리, 습기찬 방바닥,

칸막이 한장 사이로 들리는 옆방의 숨소리. 신경은 날카로워지

고 속은 불편해지면서 후회가 막급했다. 인간이란 동물에 대

해, 자신에 대해 혐오감이 일어났다. 남자와 여자가 잔다는 것

이 이래서는 안되는데…. 그 갈망에 비하여 결과는 너무나 허

무하지 않은가….

나는 일어나 가방 밑바닥에 넣어두었던 성경을 끄집어냈다.

무릎을 단정히 끓고 두 손바닥 사이에 성경을 낀 채 중얼거렸

다. 마치 주문이라도 외우듯이 중얼거렸다.

『하늘에 계시는 임이시여! 이 책이 정녕 당신의 책이라면

지금 내가 펴서 눈이 닿는 말에서 내게 깨달음을 주시옵소서!

아멘!』나는 눈을 감은 채로 성경을 펼쳤다. 숨을 멈춘 채 펼

쳐진 곳을 보았더니 구약과 신약 사이에 끼워진 백지였다. 백

지를 보고 도(道)를 깨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실망하고는

성경을 접어 가방에 넣어버렸다. 새우잠을 자다가 새벽녘에 그

골목을 빠져 나왔다.

아침도 거른 채로 아이스케키 집으로 갔다 아침마다 아이스

케키통을 메고 나올 때는 보증금을 맡겨야 했다. 통을 멘 채로

그냥 사라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제 저녁 서종삼

에서 보증금을 써버린 뒤라 주민등록증과 세면도구들이 들어있

는 가방을 맡기고 아이스케키통을 받았다. 다시 만리동 고갯마

루의 소의 초등학교 담벽으로 가서 담을 의지하고 앉았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지 않아 문제가 생겼다. 평생에 겪어보

지 못한 큰일이었다. 국부에 따끔따끔 통증이 일기 시작한 것

이다. 처음에는 오줌나오는 길이 바늘로 찌르는 듯 아프더니

얼마 안가 소변에 피가 섞여 나왔다. 그리고 며칠 후에는 피고

름이 나왔다.

나는 눈 앞이 캄캄해지고 온 몸에서 기운이 빠져나갔다.

얼른 병원에 가야 한다는 생각은 간절했으나 무일푼이었다.

괜스레 원효대사 흉내내다 폐인이 되는구나 싶어 후회스럽

기 그지없었다.

열길 백길 낭떠러지로 떨어져 내려가는 자신의 모습을 한탄

하며 고민하던 나는 용기를 내 서울역 뒷골목에 있는 한 약방

으로 들어갔다. 나로부터 증상을 들은 약사는 별일 아니란 투

로 가볍게 말했다.

『요도염 같은데요』

『요도염이 어떤 병입니까? 무서운 병이지요?』

『임질이라고 부르는데 크게 걱정할 병은 아닙니다. 약을

제대로 쓰면 염려할 것 없습니다. 1주일 정도 약을 쓰면 완치

됩니다. 하루 약값은 7백원이구요. 지금 지어 드릴까요?』

아이들에게 장난감을 팔며

약사의 말에 다소 안심은 되었으나 문제는 1주일분의 약값

이었다. 7백원씩에 1주일이면 칠칠은 사십구 4천9백원이 있어

야 하는데 그만한 돈을 구할 길이 없었다. 아이스케키를 팔아

하루에 7백원을 번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약을

제때에 쓰지 못하니 요도염은 날로 심해져 갔다. 마치 잉크가

새는 만년필처럼 피고름이 흘러 나왔다.

그 사이에 대학들은 개학을 했다. 등교하는 학생들을 바라

보며 나는 생각했다.

「대학으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구도자의 길을 계속 할

것인가?」

새는 만년필을 몸에 달고 만리동 고개를 오르내리며 생각하

고 또 생각했다. 9월이 중순에 접어들자 결론이 내려졌다. 이

런 상태로는 대학에 돌아가보았자 갈등만 계속될 뿐이다. 내친

걸음이니 아예 끝장을 보자는 것이었다. 불교에서 쓰는 말 중

에 백척간두(百尺干頭)에 진일보(進一步)하라는 말이 있다. 무

언가 도를 깨치려면 백자 되는 막대기 위에 서서 한발짝 앞으

로 내디뎌라. 그래야 깨달음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 백척간두에 진일보다. 이 자리에서 떨어져 박살 나

느냐, 아니면 새 길이 열리느냐 둘 중에 하나다」라는 다짐을

하며 그냥 버텨 나가기로 마음 먹었다. 무언가 삶의 의미에 대

한 실마리를 잡을 때까지 버티자. 이제 맨바닥에 내려온 터에

여기서 무언가 흔들리지 않는 진실이 잡힐는지 모른다.

우선 급한 것은 생계수단이었다. 8월이 지나며 시원한 바람

이 일기 시작하니 아이스케키장사는 끝이 났다. 새로운 일을

찾아야 했다. 좀더 수입이 좋은 일감을 잡아 임질 치료비도 마

련해야겠다 생각하고 남대문시장을 이리저리 기웃거리고 다니

다가 어린이들의 장난감 도매상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도매

상에서 갖가지 장남감들은 구입해 긴 장대에 꽂았다. 팔랑개

비, 나팔, 피리, 호루라기, 제기, 팽이, 줄넘기 등등이었다.

나는 장대를 어깨에 멘 채 주택가로 찾아들었다. 골목 골목을

누비고 다니며 나팔을 띠-띠-뚜-뚜-불어 아이들을 불러모았다.

널찍한 공터에 터를 잡고 아이들을 둥글게 앉힌 후에 신나는

동화를 들려 주었다. 장발장 이야기. 15소년 표류기, 죄와 벌.

삼국지…. 이야깃거리야 끝이 있겠는가. 아이들은 이야기라면

정신없이들 좋아했다. 이야기 내용 중에 스릴이 극치에 올랐을

때 쯤에서 이야기를 중단한다. 기침을 두어번 하고 나서 아이

들에게 장난감 세일즈를 한다.

『여러분 이 아저씨도 밥을 먹어야 합니다. 밥을 먹어야 힘

을 얻어 이야기를 계속할 수 있어요. 그러니 여러분들이 지금

집에 가서 엄마께 맡겨둔 돈을 받아다가 이 장난감 중에서 하

나씩만 사세요. 그런 뒤에 이야기를 다시 계속합시다』

그렇게 말하면 순진한 아이들인지라 내게 당부까지 하며 집

으로 간다.

『아저씨 딴 데로 가면 안 돼요. 돈 가져 올 때까지 여기에

계셔요. 나머지 이야기 들어야 해요』

어떤 아이들은 엄마나 누나까지 데려와 장난감을 사고 동화

를 함께 듣기도 했다. 아이들에게 건전한 동화를 들려주는 일

은 옥토에 씨를 뿌리는 것과 같다. 동화 구술(口述)을 통하여

어린이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상상력을 길러줌은 우리 사회의

미래를 열어나가는 창조활동 아닌가…. 나는 그런 구실을 떠올

리고 골목골목을 누비고 다녔다.

하여튼 장난감 장사로 수입이 한결 좋아졌다. 덕분에 약도

사먹을 수 있게 되고 노동자 합숙소에서는 일당을 벌지 못하는

동료들에게 국수도 사줄 정도가 됐다. 그러나 세상살이란 것은

항상 좋은 날이 계속될 수 없음이 이치다. 가을이 지나 겨울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니 골목에 아이들이 나올 수 없었다. 추

위를 무릅쓰고 몇몇이 나왔어도 추운 날씨에 바깥에서 동화를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화장품 외판원에서 보험 세일즈로

도리없이 업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새로 얻은 일자리는 화

장품 외판원이었다. 가정방문 판매인지라 겨울철에도 할 만했

다. 아침 10시경부터 화장품 가방을 들고 대문을 두드리면 대

체로 가정부들이 문간에 나타났다.

『아저씨 뭐예요』

『쥬리아 화장품에서 나왔습니다』

『됐어요. 화장품 있어요』

『아가씨 화장품을 팔러 온 사람이 아닙니다. 새로 나온 약

용 화장품이 있어 본사에서 선전차 나왔습니다. 안 사셔도 됩

니다. 소개만 들으시면 됩니다』

『필요 없어요. 소개 안 들어도 돼요』

『아가씨를 위해서 하는 말입니다. 이뻐지려면 꼭 들어야

됩니다. 아가씨 한창 나이에 웬 기미가 그렇게 끼었나요. 그냥

두면 얼굴 버리겠는데요』

『어머머, 이 아저씨 좀 봐. 내 얼굴에 기미는 무슨 기미가

끼었다는 거예요. 참 별꼴 다 보겠네. 모두들 고운 살결이라는

데…』『아녜요. 아가씨 제가 괜스레 없는 말을 지어내겠어요!

아가씨 얼굴에 기미기가 깔렸는데요 뭘, 그냥두면 한달내로 기

미가 드러나겠는데요. 지금부터 예방하셔야 돼요. 이 화장품이

바로 그 예방약으로 쓰이는 약용크림이에요. 제가 소개만 하고

가겠습니다』

이쯤되면 가정부 아가씨들은 대문을 열고 앞장 서서 안방으

로 안내한다. 나는 화장품들을 줄줄이 늘어놓고 설명을 시작한

다. 이웃에 친구가 있으면 불러와서 새로 나온 화장법을 같이

들으라고 권한다. 그러면 대개는 이웃집 가정부들에게 전화하

여 불러 모은다. 나는 판을 벌이고 기초화장에서부터 파운데이

션 사용하는 요령을 거쳐 색조화장까지 설명을 하고 얼굴형과

피부 그리고 그 날 입는 옷에 맞는 립스틱 색깔 고르는 것까지

설명한다. 거기에다 모인 아가씨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형

과 피부결에 따른 화장품을 추천하고 화장할 때 주의할 점들을

지적해 준다. 예를 들면 아가씨는 광대뼈가 약간 나왔으니 그

면은 화장으로 죽이고 입술을 강조해라, 아가씨는 건성 피부니

어떤 크림을 쓰라는 등 일일이 지적해 준다. 그러면 화장품 안

사겠다던 아가씨들이 줄줄이 산다. 그래서 화장품 잘 팔고 점

심까지 대접받고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화장품 판매 잘 한다고 그 길로 출세할 사람도 아닌

지라 봄날이 돌아와 가로수에 물이 오르면서 내 마음도 심란해

졌다.

계속해서 기초화장품이니, 립스틱이니 그런 말만 하고 다니

기에는 아까운 세월이었다. 그래서 화장품 외판원을 그만두고

다른 경험을 쌓기로 했다. 이번에는 책외판원이었다. 남산 밑

퇴계로변에 생산성본부란 기관이 있었는데 거기서 나오는 월간

경제지가 있었다. 나는 그 월간지의 판촉원이 되었다.

「기업과 경영」이던가 「경영과 정보」던가, 지금은 그 이

름조차 흐릿하다. 그 잡지를 몇십권씩 가방에 넣고는 왼종일

가게들과 회사들을 돌면서 정기구독자를 늘려나가는 일이었다.

출근하던 첫날 청계천에서부터 시작하였다. 청계천 상가를 모

조리 방문하며 판촉을 했다. 철물상, 가구상, 공구상… 청계천

에는 가게도 많고 많았다. 나는 줄줄이 늘어선 가게 한 집 한

집에 들어가 책 소개를 했다.

『경쟁에서 이기려면 공부하셔야 합니다. 현대의 경영은 정

보와 기동력입니다. 우선 매달 나오는 경영 정보를 이 잡지에

서 얻으십시오. 그래서 남보다 한 걸음만 앞서세요. 이 잡지는

기업정보의 창고입니다』

열성껏 이야기하고 그달 기사 중에 중요한 기사의 요점을

풀어 설명했다. 그렇지 열심히 설명하노라면 더러는 이렇게 말

하며 정기구독자로 가입을 했다.

『그 책 보기보다 중요한 책이로구먼 안 읽으면 손해 보겠

는데…』

그렇게 하니 한 주에 30~40명의 구독자들을 확보해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잡지 판촉이 잘 된다 해서 역시 그 길로 성공하겠다

는 생각이 없는 바에야 오래 머물수록 손해라는 생각이 들었

다. 불과 석달만에 끝을 내고 다음으로 찾은 곳이 보험회사였

다. 제일생명보험회사 영락지국에 소속되어 보험세일즈를 다니

게 되었다.

인간을 따르는 영원한 그림자

보험세일즈에 익숙해질 즈음에 문제가 생겼다. 노동자 합숙

소에서 자고나니 가방이 없어진 것이었다. 잠자리에 들 때 입

었던 옷 외에는 몽땅 없어져 버렸다. 합숙소 동료들에게 국수

도 사주고 담뱃값도 빌려주고 하니까 내게 돈이 많은 줄 알았

던지 밤 사이에 들고가버린 것이다. 아무튼 나는 졸지에 몸밖

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무언가를 찾겠다고 가출한 지 1년여만

에 나는 입은 옷과 신은 신 한켤레만 남은 신세가 되었다. 이

미 몸도 마음도 지쳐 있던 때인지라 남산에 올라 서울시를 내

려다보며 파스칼을 생각했다. 파스칼도 젊은 날에는 영혼의 방

황이 심했던 모양이었다.

그는 『팡세』에 이렇게 썼다.

『참된 선을 추구하다가 괴로움에 지쳐버림은 좋은 일이다

결국은 구주에게 구원을 바라게 될 터이므로』

그러나 나는 파스칼이 만났다는 그 하나님을 만날 수 없었

다. 만나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였으되 만날 길을 알지 못했다.

파스칼의 말로는 그가 철학자로서 신을 탐구하였을 때에는 신

이 숨어버리더니 어린아이 같이 신 앞에 엎드릴 때에 신은 그

에게 구원의 손길을 베푸셨다고 했다. 그렇다면 나도 신 앞에

엎드리기를 원한다. 그래서 이 고단한 방황을 끝내고 싶다. 나

자신을 똥같이 무시해 버리고 신 앞에 무릎을 꿇고 싶다. 그러

나 어떻게 하면 되는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신 앞에

엎드리는 것일까?이런 식의 구도는 끝내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한 채 헛된 낭비로 끝나버릴 것만 같았다. 문득 어머니를 생

각하고 어머니가 섬기시는 하나님을 생각했다. 나는 철들기 전

부터 어머니의 기도를 들으며 자랐다. 새벽마다 어머니는 우리

4남매의 이름을 차례로 부르며 하나님께 기도드리셨다. 형님

누나에 이어 셋째인 나에 이르면 어머니는 날이면 날마다 한결

같이 기도했다.

『여호와 아바지 홍이는 자라 하나님의 종 목사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나는 어머니의 그런 기도가 싫었다. 어머니는 왜 나를 목사

로 만들어달라고 기도하실까? 판사가 장군이나 사장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지 하필이면 고생만 하는 목사가 되게 해달라

고 허구한날 기도하실까? 나는 가끔 어머니께 그렇게 기도 드

리지 말라고 부탁드리곤 했다. 이제 방황에 지친 아들은 어머

니의 기도를 생각했고, 어린 날 열심히 섬겼던 그 하나님을 생

각했다. 그리고 나는 어린 시절에 믿었던 그 하나님께로 돌아

갈 수 있기를 희구하였다. 그러나 돌아갈 수 있는 길이 보이지

않았다.

실존철학에서 쓰는 용어 중에 한계상황(限界狀況)이란 용어

가 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을 일컫는다. 예

를 들어 생로병사는 절대로 인간의 힘으로는 넘을 수 없기에

한계상황이다. 실존철학자들은 생로병사 외에 몇몇가지를 상계

상황으로 추가하였다. 죄, 고독, 방황, 투쟁 등이다. 죄가 왜

한계상황인가?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하는 한 절대로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갈 수 없다. 인간은 숨을 쉬듯이 죄를 지으며 산다.

그래서 한계상황이다. 고독 역시 한계상황이다. 왜냐? 인간이

살아있는 동안은 고독이 운명이기 때문이다. 실존철학자인 니

체는 말했다.

『고독은 어차피 인간의 운명이다. 운명일 바에야 사랑해

라. 고독을 피하려 들지 말고 사랑해라. 그러면 고독이 그대의

친구가 될 것이다』

그래서 그는 고독하게 마련인 인간의 운명을 사랑하라고 운

명애(運命愛)를 말했고 그 자신 고독을 사랑해서 『고?

실존철라 했다.

『인생은 투쟁이다』란 말이 있듯이 인간이 숨쉬고 살아가

는 곳에는 투쟁이 따르게 마련이다. 그래서 투쟁은 인간의 한

계상황이다. 거기에다 방황과 고뇌도 한계상황이라 했다. 인간

이 인간으로 머무는 한에는 방황과 고뇌의 날들을 벗어날 수

없다. 방황과 고뇌는 영원히 인간을 따르는 그림자라 했다. <

다음호에 계속>

「신약성서」 요한복음은 이렇게 시작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

이 없느리라』

어느 실존철학자는 이 부분을 빌려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태초에 방황이 계시니라. 이 방황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방황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이 방황으로 말미암아 지

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방황없이 존재치 않느니라. 이 방황

안에 고뇌가 있었으니 이 고뇌는 인간 삶의 본질이다. 방황 중에 고뇌

하시던 하나님은 그 고뇌를 견디시기 위해 인간을 창조하셨기에 인간

은 고뇌의 산물이라. 고로 고뇌는 인간의 반려자니라』

요컨대 인간은 죄와 고독과 방황과 고뇌를 애초에 지니고 이 세상

에 태어난 존재란 것이었다. 우리 중에 어느 누구도 자신이 선택하여

이 땅에 태어난 것이 아니다.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이 땅에 던져졌을

따름이다. 이렇게 던져진 존재를 실존철학자들은 「피투성」(被投性;G

eworfenheit)의 존재라 했다. 피투성의 존재로 태어난 인간은 「세계

내 존재」(In der Welt Sein)이다. 인간은 이 세계 내에서만 존재하도

록 운명지어진 것이어서 절대로 이 세계를 초월하여 존재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실존철학자들은 말한다. 인간은 한계상황 아래 세계 내로

던져진 피투성의 존재로되 단 한 번의 기회가 주어져 있다. 자기를 다

시 한번 던질 수 있는 기회이다. 처음 이 세상에 던져졌을 때는 자기

의사와는 무관하게 던져졌기에 피투성이지만, 이제는 자기 의사로 던

질 수 있다는 점에서 「기투성(企投性 Antworfenheit)라 불렀다. 그렇

다면 자신을 어디로 던질 것인가? 단 한 번 주어진 기회를 아무 곳으

로나 던짐으로써 자신을 허비할 수는 없다. 어딘가 값지고 확실한 삶

이 보장되는 곳으로 던져야 한다.

이 점에 대하여 여러 철학자들은 제각기 처방을 내린다. 칼 야스퍼

스는 초월자(超越者) 즉 신(神)에게로 던지라 했고, 사르트르는 자유

에로 던지라 하고 카뮈는 행동으로 던지라 했다. 카뮈는 말한다.

『인간은 행동을 통해 구원받는다. 인간의 행동에 도덕을 덧붙이지

말라. 행동한다는 것 자체가 아름답다. 설교하는 성직자든 열차를 터

는 강도이든 침대 위의 남녀이든 행동하는 그 자체에 의미가 있다』

나는 생각했다. 나를 전적으로 기투(企投)하고 싶다. 나를 어느 곳

으로 던져야 할까? 나를 통째로 불태울 수 있는 행동은 무엇일까?

나는 던지고 싶은 한 신(神)을 알고 있었다. 어머니가 열심히 섬기

고 있는 신이었다. 나의 어린 시절에 한 점의 의심없이 섬기던 신이었

다. 그러나 방황의 길에 지친 나에게 그 신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

었다. 그에게로 갈 길을 찾을 수 없었다. 그 신은 오로지 하나의 갈망

으로만, 안타까운 바람으로만 존재했다.

도통(道通)의 길

드디어 나는 집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속절없는 가출을 끝내

고 어머니가 믿는 하나님 곁으로 가서 무릎을 꿇어보기로 다짐하고는

대구행 야간열차를 탔다. 가방까지 잃고 빈털터리가 된 나는 용산역에

서 밤고양이처럼 숨어들어 기차에 올랐다. 그러나 대전역에 못 미쳐

무임승차가 발각돼 대전역에서 하차당했다. 철도원에게 고막이 멍할

정도로 따귀를 맞음으로써 열차요금을 때우고는 대전역 대합실에서 하

룻밤을 지새웠다. 새벽녘에 다시 열차를 타고 대구역까지 도착하여 무

사히 빠져나왔다.

집에 도착하였을 때는 영낙없는 거지였다. 어머니는 그때까지도

『진홍이는 목사되게 해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고 계셨다. 거지꼴로

돌아온 아들에게 어머니는 교회 나가자고 권하셨다.

『어머니, 신앙도 없는데 어떻게 교회를 나가겠습니까?』

『아니다. 교회를 다니다 보면 신앙이 드는 기다. 우째 첨부터 신

앙이 있어 교회를 나가겠냐? 니가 할 일은 교회 나가는 기고, 하나님

이 하시는 일은 너에게 신앙을 넣어주는 기다. 너는 하나님이 할 일까

지 걱정하지 말고 교회에 다니기만 하면 된다』

『어머니, 좋은 말씀인데 며칠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래 생각해 봐라. 너가 그라고 댕기는 것이 재주 아깝다. 하나

님 앞으로만 돌아오면 너 크게 쓰임 받을끼다』

계명대학에서는 학교로 나오라고 나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장고

(長考) 끝에 대학에는 미련을 두지 않기로 결정했다. 한번 사는 인생

길에서 해답 없이 질문만 계속하는 철학에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무언가 어렴풋이 느꼈다. 나에게 본질을 깨닫게 되는 날

이 임할 것이라는 느낌이었다. 그것이 하늘로부터 임하든, 나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솟아나든, 아니면 세상으로부터 얻어지든, 무언가 내 삶

을 뜨겁게 불태울 수 있는 것이 체득(體得)될 날이 있을 것이라는 느

낌이었다.

원효선사는 송장물을 마시고는 대오(大悟)했고, 데카르트는 병영

(兵營)에서 보초 서다가 진리를 인식했으며, 간디는 인도 민중의 신음

소리를 듣고 자기가 죽을 자리를 찾았다. 마틴 루터는 친구가 벼락에

맞아 죽는 장면을 보고는 신에게 귀의하였다. 나에게도 언젠가는 하늘

이 열리는 때가 오겠지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때를 기다리되 도서관

속에서가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백성들의 숨결 속에서 살아가기로 다

짐했다. 북적대는 시장터에서, 씨뿌리는 농부에게서, 노동자들의 몸짓

에서 삶의 뜻을 터득할 날이 있어지기를 바랐다.

초보 전도사로 나서다

가출에서 돌아와 집에 머물고 있던 어느 날 대학시절에 나를 아껴

주었던 미국인 구의령 선교사가 찾아와 시골교회 전도사로 가달라는

제안을 했다.

『미스터 김. 대구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달성군 구지면 목단이라

는 마을에 목단교회가 있어요. 조그마한 시골교회지요. 그 교회에 가

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섬기는 일은 해주세요』

『선교사님, 고맙기는 합니다만 저 자신이 하나님을 확실히 믿는

신앙관이 서 있지를 못한데 어떻게 교회 일을 하겠습니까?』

『아니에요. 선생이 가르치면서 배우듯이 전도자도 전하면서 깨우

침을 받는거에요. 미스터 김이 구원의 확신은 아직 없어도 어린시절부

터 신앙생활을 하였던 바탕은 있으니 능히 그 일을 감당할 것입니다』

구선교사의 제안에 어머니가 뛸 듯이 기뻐하셨다. 이제 평생 소원

하시던 대로 내가 하나님의 종이 되는 길이 열리는가 보다 하시며 기

뻐하셨다. 나는 선교사의 말처럼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하나님을 찾아

야지 하는 마음으로 그 제안에 따르기로 하였다.

67년 여름 어느날 구의령 선교사의 지프에 세간살이를 싣고 목단교

회로 갔다. 목단교회는 야트막한 언덕에 붙여 세워진 자그마한 교회당

이었다. 교회당 문은 열린 채로 있었다. 짐을 내리기 전에 교회당 안

으로 들어가 무릎을 꿇었다.

『당신께서 이 제단에서 나를 깨닫게만 하여 주신다면 평생에 충실

한 종이 되겠습니다』

그 날로 나는 월급 3천원에 쌀 한말 받는 전도사가 되었다. 나는

열심히 일했다. 글자 그대로 발이 부르트고 입이 부르트도록 일했다.

교회 일보다는 주로 마을 일을 했다. 일 손이 모자라는 농가마다 찾아

다니며 일을 도와 주었다. 마을 사람들은 처음에는 이상한 전도사가

왔다고 수근수근하더니 점차 신뢰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나 교인들

중에는 불만을 지닌 사람들이 있었다.

『새로 온 전도사님은 교회 일은 안하시고 안 믿는 사람들 농삿일

만 해주고 있어. 이상한 사람이야』

『그래. 일해주려면 교인들 집 일이나 해줄 것이지, 예배당에도 안

나오는 사람들 일만 해 주고 있어』

그러나 나는 그런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마을 사람들과 접

촉했다. 특히 마을 젊은이들과 호흡을 맞추어 나갔다. 적은 봉급을 쪼

개 배구공을 사다가 운동을 하고, 청년 남녀들로 꾸며진 연극반을 만

들었다. 「구약성서」의 에스더를 극본으로 각색하여 연출 감독 모두

혼자서 맡아 지도했다.

미완성의 연극 공연

마을 사랑방에서 밤 늦게까지 연극 연습을 하게 되니 주민들의 관

심이 쏠려 별별 구설수가 다 돌게 되었다. 특히 교인들의 염려가 심했

다. 다 큰 처녀 총각들이 밤늦게까지 살을 맞대고 놀다가 아이라도 배

게 되면 어떡하느냐? 그리 되면 교회 문 닫게 된다, 전도사가 영적인

일에나 열심히 할 것이지 세상적으로만 나간다, 저렇게 하다가는 예배

당이 연애당이나 「애 배는 당」이라 욕먹게 되어 문 닫게 된다고 걱

정들을 했다.

그런 중에서도 연극 연습을 마치고 드디어 공연하는 날이 왔다. 그

런데 공연 첫날에 관객이 밀려들어 좁은 교회당이 터질 지경이 되었

다. 나는 엉성하게 지어진 교회당 건물인지라 혹시 집이 무너지는 사

고라도 나지 않을까 안절부절 못했다.

그렇게 마음을 졸이던 터에 급기야 사고가 터졌다. 연극이 중반에

접어들어 이제 배우들과 관객의 호흡이 통하여 가고 있을 즈음에 교회

당의 한쪽 벽이 우지끈 하고 무너지고 말았다. 이어서 『아야』 『오

메』하는 신음소리와 먼지가 뒤범벅이 되었다. 나는 숨이 탁 막혀 외

마디 기도를 드렸다.

『아이고 예수님. 사람만 안 다치게 부탁드립니다. 집은 무너져도

좋습니다만 사람만은 지켜 주시옵소서』

얼마쯤 시간이 지난 후에 살펴보니 상한 사람은 없었다. 교회당 기

둥들도 말짱하고 오른쪽 벽만 무너졌다. 연극을 무기한 연기한다고 광

고하고 관객들을 돌려 보낸 후에, 연극단은 무너진 벽을 수리하는 작

업반으로 바뀌었다.

그후로 연극은 다시 열리지 못했다. 그렇잖아도 못마땅히 여기고

있던 교인들이 공연 절대불가를 주장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다는 주장이었다. 굳이 연극을 하려면 교회를 사임하고 떠나라고

까지 강경하게 말했다. 그래서 에스더 연극은 다시 빛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마을 청년들은 무척 아쉽고 섭섭해 했다.

그후로 내가 정성을 기울인 것은 아동 지도였다. 교회 부근 마을들

을 여섯 구역으로 나누고 월요일에서 토요일 사이에 하루 한 구역씩

찾아갔다. 농부들이 하루 일을 마치고 저녁 식사가 끝난 때 쯤, 밤이

으슥한 시간에 넓은 마당에 화톳불을 지피고 마을 아이들을 모아 동화

를 들려주고 노래를 가르쳤다. 노래마당이 끝나고 동화시간으로 들어

가면 아이들만 듣는 것이 아니라 어른들도 들었다.

마을 쳐녀들과 부녀자들이 가까이 오지는 못하고 담밑에서 멀찌감

치 서서들 듣다가는 아이들을 시켜 쪽지를 보내왔다. 목소리가 잘 들

리지 않으니 소리를 좀 높여 달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학생시절에 읽

었던 소설들을 총동원하여 동화의 재료로 삼았다. 『장발장』 『죄와

벌』 『부활』 『15소년 표류기』 『철가면』 『보물섬』 등등의 이야

기들을 밤마다 연속상연으로 들려주었다.

이야기 대목에서 신나는 장면이 나오면 아이들은 박수를 치기도 하

고 환호성을 올렸다. 슬픈 장면에서는 탄식하여 애태우기도 했다. 주

인공의 슬픈 사연에 눈물짓기도 했다. 이런 활동 덕분으로 교회학교가

대부흥을 이루었다.

하루는 이웃 마을에 있는 교회의 청년 한 명이 나를 찾아왔다. 청

년회 회장이라고 자기 소개를 하고서는 내게 물었다.

『전도사님, 예수 믿는 사람이 자살하는 거 죄지요?』

『그럼요. 두말할 것 없이 큰 죄지요. 사람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

인데 자기 생명이라도 자기가 끊으면 죄지요. 하나님 앞에서 살인죄

짓는 거지요』

『그렇다면 자살한 사람을 장례지내는 것도 죄입니까?』

『아니 그거야 다르겠지요. 사람이 죽었으면 누군가가 장례를 해야

되는 것 아니겠어요? 그건 죄다 아니다 할 성질이 아니잖아요? 근데

그걸 왜 물으세요?』

『다름 아니라 우리 교회에서 19세 된 여선생이 며칠전에 농약을

마시고 자살을 했심더. 그런데 목사님이 자살한 건 교리를 어기고 죄

지은 것이니 장례를 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 교인들에게

도 교리 어기고 자살하여 죽은 시체에 손 대지 마라, 같이 죄 짓는 거

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죽은 지 사흘이나 지났는데 장례를 못 치

르고 있습니다. 전도사님을 찾으면 혹시 다른 방도가 있지 않을까 해

서 찾아왔습니다』

『그것 참 이해가 잘 안가네요. 목사님은 그렇다 치고 마을 사람들

은 왜 장례를 치러주지 않습니까? 시골 인심이 그렇잖을 터인데. 그리

고 가족들은 없는가요?』

『지금이 모내기 철이 아닙니까. 보통 때 같으면 마을 사람들이 으

레 장례치러 주겠지만 지금은 워낙에 바쁜 철인지라 장례 치를 짬을

못내는 거지요. 그라고 그 처녀네는 뜨네기로 동네에 들어와 사는 집

이라서 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못 받고 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

처녀 안 좋을 때 죽었구먼. 평소에 교회 그래 잘 다녔으니 교회에서

장례하겠지」하고 교회로 미루고 있습니다』

『그것 참 딱하네요. 그 아가씨는 평소에 교회는 제대로 다니던 아

가씨였나요? 아까 선생이라 했었는데 무슨 선생인데요?』

『유년주일학교 선생이었습니다. 성가대 대원이었구요. 새벽기도까

지 빠지지 않았던 모범 교인이었습니다』

『그랬다면 참 이상하네요. 그렇게 모범교인이었던 터에 어떻게 자

살을 했을까요? 교인이 자살하면 안되는 줄을 모르지는 않았을 텐

테…』

『예, 사정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술주정꾼이구요. 어머니는 10

년 넘게 정신병을 앓고 있습니다. 그리고 밑으로 어린 동생들 여럿이

있습니다. 술주정꾼 아버지에 정신병자 어머니, 그리고 어린 동생들

사이에서 맏딸로 고생하다 지쳐 자살한 것 같습니다』

『그것 참 듣고보니 사정이 딱하구먼요. 그렇다면 내가 가서 장례

를 치르지요. 그런데 나 혼자서야 됩니까? 교회 청년 몇이서 나를 도

와주었으면 좋겠는데요』

『전도사님, 우리가 돕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만 교리 어기고 죽었

는데 장례 거들면 안 된다고 해서…』

『아니 그런 건 프로가 따지는 거지, 젊은 사람이 신경 쓸 일은 아

니지요. 나중에 내가 천국 가서 예수님이 「김진홍, 넌 왜 교리 어기

고 자살한 시체를 장례했냐?」고 꾸지람하시면 내가 대답하지 뭐.

「예수님 난 교리 몰라서 했습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 했잖습니까,

예수님」하고 대답하지 뭐』

시체를 염하며…

나는 청년회 회장의 안내를 받아 그 처녀의 집으로 갔다. 집 안방

에는 눈에 초점을 잃은 여인이 멍하니 앉아 있었다. 죽은 처녀의 어머

니일 것이라 짐작했다. 건넌방에는 마을 할머니 한 분이 시체 곁에 앉

아 있었다. 처녀의 몸에는 낡은 요 한 장이 머리에서 발치까지 덮여

있었다. 할머니께 교회에서 왔다고 여쭈었더니 반색을 하며 말했다.

『그렇잖아도 오늘 짬에 예배당서 연락이 없으면 다른 방도를 찾아

볼라든 참이네요. 어이구 불쌍한 것이 죽은 뒤에 제대로 묻히지도 못

허구… 쯧쯧』

나는 할머니의 도움을 받으며 염을 했다. 농약 먹고 죽으면서 피를

토하였던지라 피가 턱을 타고 목으로 내려와 가슴께로 흘러들어 있었

다. 말라붙은 피 위에 파리떼가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었다. 파리떼를

쫓고 물수건으로 피를 닦아내고 손발도 닦고 머리를 빗질했다. 본인의

옷장을 뒤져 그중에 고운 옷을 골라 갈아입혔다.

옷을 갈아입힐 때에 가슴께에서 성경이 방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성경을 주워 펼쳤더니 갈피에 낡아 바래지고 손때 묻은 예수님 사진

한 장이 꽂혀 있었다. 나는 그녀가 농약 마시고 죽으면서도 성경을 가

슴에 품고 있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내려다보며 누이 동생이라 생각했다. 가슴이

뻐근하여지고 눈시울이 젖어왔다. 나는 입술을 깨물어 울음을 속으로

삼키며 옷을 갈아입히고는 가슴팍에 성경책을 다시 꽂아주었다. 빛 바

랜 예수님의 사진을 고이 끼운 채….

가마니를 뜯어 들것을 만들고는 아가씨의 시체를 그 위에 눕혔다.

교회 청년 셋의 도움을 받아 뒷산으로 올라갔다. 청년 둘을 앞에 세우

고 나와 다른 한 명은 뒤에서 들었다. 손에는 괭이와 삽을 들었다. 시

체는 생각보다 무거웠다. 사람이 죽으면 평소보다 무거워지는가 생각

하며 산비탈을 올라갔다. 앞에 선 청년들은 산길이 익숙하고 힘이 좋

아 거뜬하게 올라가는데 나는 힘에 부쳤다.

『이 사람들아, 좀 천천히들 가세나』

나는 숨찬 목소리로 말하며 뒤를 따르다 그만 비탈길에 미끄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미끌어질 때에 손에 잡았던 들것을 놓치고 말았다. 그

겨를에 시체가 들것에서 떨어져 비탈길로 대굴대굴 굴러내려갔다.

나는 낭패하여 굴러내려가는 시체를 보며 『어─ 어─』하며 할 말

을 잃었다. 어지간히 복도 없는 아가씨라 생각했다. 살아 생전에 그렇

게 고생만 하다가 죽어 장례도 치러지지 못하고 겨우 가마니에 얹혀

산으로 가는데, 그나마 이 시원찮은 사람을 만나 산비탈을 구르게 되

었으니 미안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구르던 시체는 소

나무 등걸에 걸려 멈췄다. 나는 내려가 시체를 품에 안은 후 아가씨의

영혼이 들으라는 듯이 말했다.

『아가씨 미안해. 시체나마 제대로 편하게 못해주어 정말 미안해.

땅에서는 고생만 하다 죽었어도 하늘에서는 편히 지내세요. 시체를 뒹

굴게 해서 정말 미안해요』

나는 아가씨의 이마에 쏟아져 내린 머리칼을 손으로 쓸어 올려주며

산 사람에게 말하듯이 일러주었다. 시체를 품으로 안은 채 산을 올라

따뜻한 양지에 구덩이를 파고 묻어주었다. 어린이나 미혼자(未婚者)의

무덤은 평토장(平土葬)을 한다는 말이 생각나 조그마한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 소나무를 베어 십자가를 만들고는 무덤 앞에 세워주었다.

산 자와 죽은 자

산자락에 이르러 마을이 시작되는 길목에 처녀가 다니던 교회당이

있었다. 교회당 울타리를 끼고 마을로 내러오는데 마침 토요일인지라

청년들이 모여 성가연습을 하고 있었다. 오르간 소리, 웃음 소리들이

담 너머로 들려왔다. 지난 주까지만 해도 함께 성가대석에 앉았던 친

구는 농약 먹고 자살을 하였어도 살아있는 자들은 즐거운 인생인 것

같았다. 그냥 웃고 떠드는 소리가 요란하였다.

나는 교리를 중요시하고 인간의 아픔을 외면하는 교회는 그릇된 교

회라 생각했다. 예수는 상한 마음들을 고치러 왔다고 말씀하셨으나,

예수가 세운 교회는 건강한 자들과 나무랄 데 없는 사람들의 교회가

되고 말았다. 예수는 상한 마음들이 살아가고 있는 예배당 울타리 밖

에만 머물러 있고, 예배당에는 아쉬울 것 없는 잘난 사람들만 모여 있

는 처지가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마을 한가운데 있는 처녀의 집을 지나치다 발길을 돌려 그녀

의 집에 들렸다. 어디에 묻었다고 알려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였다.

마당에 들어서니 그녀의 아버지인 듯한 사람이 멍석 위에 누워 노랫가

락을 흥얼거리고 있었다. 큰 대자로 누워서는 「노들강변 뱃사공」을

부르고 있는 모습을 보니 열이 받치고 미운 생각이 밀려 들었다.

「아이고 저런 인생은 귀신도 안물어가나. 생때같은 딸은 죽어 묻

혔는데 애비가 돼서 저렇게 술독에 빠져만 있으니…」

그런 그에게 딸을 어디에 묻었다고 일러주어야 알아듣지도 못할 것

같았다. 집안을 살펴보니 그녀의 어머니가 안방 문을 열어둔 채 먼산

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정신병이 걸린 어머니일지라도 딸을 어디에

묻었다고 일러는 주는 것이 도리인 듯했다.

『아주머니, 따님을 ○○산 골짜기 양지바른 곳에 묻었습니다. 정

신 들면 찾아가 보시라요. 소나무로 십자가를 만들어 세워 두었으니

찾기가 쉬울 거예요』

그렇게 일러주고 돌아서려는데 그녀가 손으로 나를 가까이 오라는

듯 불렀다. 나는 앞으로 다가가면서 물었다.

『아주머니 내게 하실 말이 있으신가요?』

그러는 나에게 그녀는 아무말없이 돗자리 한쪽 귀퉁이를 들치고 무

언가를 끄집어내더니 내게 주며 말했다.

『선상님 고맙심더. 내 딸 묻어줘서 고맙심더. 이걸로 가시다가 사

이다라도 한 병 사 잡수시라요』

받아보니 꼬깃꼬깃 접힌 채 색깔까지 변해버린 낡은 1백원짜리 지

폐 한 장이었다. 나는 그 돈을 받으며 그녀의 두 눈동자를 살폈다. 고

달픈 인생살이에 쌓인 슬픔이 가득 고여 있는 듯하였다. 너무나 서럽

고 슬픈 눈동자였다. 나는 가슴이 찡하여 할 말을 잊은 채 실룩거려지

는 입술을 이빨로 깨물며 뒤로 돌아섰다.

그녀는 다만 아무 것도 모른척하고 있었을 뿐이었지, 실상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딸이 견디다 못해 죽은 것, 시체가 썩어가

는데 아무도 장례 치러 주지 않는 것, 이웃 교회 전도사가 와서 장례

치러 주는 것 등 모두를 알고도 모르는 척하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그

녀의 그런 마음을 헤아리게 되자 슬픔이 북받쳤다. 서재에 들어가 그

녀에게서 받은 돈을 성경 위에 올려놓고 울었다. 그녀가 겪고 있은 아

픔의 깊이를 느끼며 혼자서 울었다.

처녀신도의 유혹

농촌에 농한기가 되자 마을 청년들은 할 일이 없어졌다. 초당방에

모여 도박을 하고 도박 끝에 싸움질을 하곤 해서 마을 분위기가 흐려

지곤 했다. 나는 그들을 그런 분위기에서 벗어나 건전하고도 생산적인

방향으로 이끌 수 없을까를 고심했다.

밤 이슥한 시간에 건빵 몇 봉지를 사들고는 초당방으로 찾아갔다.

이미 벌어지고 있는 화투판에 내가 끼어들면 청년들은 판돈을 담배 밑

에 숨기고는 담배치기로 판을 바꾼다. 나는 청년들에게 건빵 한 봉지

씩을 돌리고는 담배치기에서 건빵 따먹기로 놀이를 바꾸었다. 그러는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는 이웃 마을 청년들과 배구시합을

하거나 노래자랑 대회나 윷놀이 대회를 열자는 제안을 했다. 젊은 나

이에 허구헌 날 화투장을 뒤척이는 것이 꼴 사나운 일이 아니냐, 마을

청년들이 나서서 마을 분위기를 바꾸어 보자고 설득했다.

청년들은 처음에는 우리 주제에 그런 일을 할 수 있겠느냐며 엄두

를 내지 못하다가 거듭된 설득에 점차 관심을 기울이더니 얼마 지나

화투놀이를 중단하고는 실천으로 들어갔다. 설왕설래하다가 추진위원

회를 구성하여 일을 맡게 했다. 처음 하는 행사가 성공적으로 치러지

면 청년들은 자신감을 갖게 되고 그 다음부터는 한결 쉬워진다. 그렇

게 해서 두세번 행사가 성공하여 마을 어른들로부터 칭찬을 듣게 되

자, 그 다음부터는 내가 무엇을 제안하기 전에 스스로들 좋은 일거리

를 찾는 것이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마을 분위기가 조금씩 좋아져

가기 시작하였을 즈음에 문제가 생겼다.

문제는 교인들에게서 일어났다. 교인들 중에서 전도사가 마을 청년

들과 어울려 화투놀이를 한다고 시비를 걸었던 것이다. 어떻게 성직자

가 마을 사람들과 화투장을 들고 담배치기 노름판을 벌일 수 있느냐는

항의가 거세게 일어났다. 보수주의 신앙의 고정관념에 젖어 있는 교인

들에게 나와 같은 식의 선교방식은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잠자리에서 인기척을 느끼고 일어났더니 머리맡에

마을 처녀가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집에서 반대를 하는데도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던 아가씨였다. 내가 일어나 앉으니 찹쌀떡 한 쟁반을

가져왔으니 잡수시라고 떠듬거리며 말했다. 창 밖에는 달빛이 밝았다.

『밤 늦은 시간에 혼자 내방에 들어오시면 안됩니다. 떡은 잘 먹겠

으니 거기 두시고 돌아가 주세요. 남들이 알면 큰 오해를 하게 됩니

다.』

『오는 길에 아무도 본 사람이 없으니 안심하세요. 나는 전도사님

만 믿으니 나를 전도사님 처분대로 하세요. 저를 전도사님 뜻에 맡기

겠습니다』

그녀의 음성은 떨리고 있었다. 나는 이래저래 교회를 떠날 때가 되

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대구 청산교회에서 교육전도사로 오라는

전갈이 와 있었던 때였다. 나는 목단교회를 사임하고 대구로 옮겨갔

다.

목단마을을 떠나던 날은 교인들뿐 아니라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

환송하여 주었다. 모인 사람들 중에 절반은 울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나의 목회 아닌 목회는 끝이 났다. 일생 동안 잊을 수 없는 값진 경험

이었다.

대구 청산교회로 옮겨 간 나는 학생지도를 맡았다. 청산교회는 지

식인들이 모이는 수준높은 교회였다.

그 즈음 어느 날 나는 길거리에서 대학 철학과 선배인 홍응표형을

만났다. 대학시절 도서관에 있는 나를 불러내어 『거듭 났느냐?』고

묻던 선배다. 홍 선배는 반색을 하며 다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는 말을 시작했다.

『그렇잖아도 자네를 만나고 싶어 계명대학에 들렀더니 행방을 모

르겠다더군. 교수님들께서 자네 염려를 많이 하시던데. 학교쪽에서는

자네를 무척 아끼고 기대를 걸었는데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는 게야.

그건 그렇고 자네 요즘은 무슨 문제와 씨름하는가?』

『대학에 남아 있다가는 뭔가가 될 것 같지 않아서 속세를 한동안

헤매다가 지금은 교회 전도사로 있습니다』

『자네 몇년전에 나와 토론했던 일 기억나나?』

『기억나구 말구요. 거듭나는 이야기말이지요? 지금도 그 얘기 하

고 다니십니까?』

『아무렴 나야 다른 재주 있냐. 늘상 그 얘기지. 오늘도 복음 얘기

다시 할테니 들어주겠는가?』

『듣구 말구요. 지금 내가 교회 전도사로 있기는 하지만 실상은 봉

사 밤길 더듬듯이 무언가를 더듬어 찾고 있는 중이니까 내가 확신할

수 있는 믿음을 찾도록만 이끌어 주십시오』

『잘 됐네. 우리 시간을 정해 매주 한번씩 만나 책을 함께 읽는 것

이 어떻겠나?』

『갑자기 웬 책을 찾습니까? 난 도통(道通)하기 전에는 책은 안 읽

기로 했는데요』

『자네 「로마서」 알지? 일본의 성서학자 중에 우치무라 간죠(內

村鑑三)란 분이 있는데, 그가 쓴 「로마서 강해」란 책이 있네. 서양

학자들이 쓴 책과는 다르게 깊이가 있고 통찰력이 있는 책이네. 매주

한번씩 만나 그 책을 같이 읽자구. 내가 자네에게 투자를 하고 싶으니

까 자네 거절 않겠지?』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명색이 전도사로 시무하고 있으면서도 마음

속의 갈등은 늘 계속되고 있었던 터라 순순히 응했다. 이리하여 나의

성경연구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으나 점차

진지한 자세가 더해갔다. 우리는 우치무라 간죠 선생의 『로마서 강

해』를 함께 읽으며 토론을 거듭했다. 나는 「로마서」에서 나타나는

사도 바울의 확신이 부러웠다. 그 진위(眞僞)를 떠나 그렇게 확신에

찬 신앙을 지닌다는 것 자체가 축복이라 여겨졌다.

「실존철학의 시조」 바울과 나

나는 바울과 같은 확신에 찬 믿음을 주시라고 기도했다. 그런 확신

이 내 영혼 속에 깃든다면 비록 가시밭 길을 걸어갈지라도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성경 본문을 조목조목 풀어 살피며 생각했

다. 그러나 논리적으로는 납득이 가다가도 가슴으로 받아들여지지를

않았다. 머리로는 수긍이 가나 가슴에 와 닿지를 않는 것이었다. 읽을

수록 의문이 일어나고 의문은 또다른 의문을 낳았다.

의문들 중의 첫째는 「인간이 죄를 지었다」할 때의 죄가 무엇인가

하는, 죄의 개념이 파악되지 않는 점이었다. 둘째로 예수가 피흘려 죽

은 것과 인간의 죄가 용서받는 것 사이에 연결이 되지 않았다. 셋째는

인간이 자기를 대신하여 피흘린 예수를 「믿는다」할 때 그 믿는다는

말이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일컫는 지 이해되지 않았다. 넷째는 신

이 이 우주에서 왜 정의를 나타내야 하는지? 자신이 창조한 우주에 왜

자신의 정의를 나타내야 하는지? 누구를 위하여 정의를 나타내어야 하

는지? 자기 스스로에게 그렇게 하여야 하는지? 아니면 타자를 위해서

인지? 누가 신에게 정의를 요구하였는지? 이런 의문들이 풀리지를 않

았다. 다섯째는 인간이 죄를 용서받음으로써 신과의 관계가 회복되었

다고 할 때 그렇게 회복된 관계란 어떤 상태인지? 본래의 인간과 타락

한 인간과의 관계는 어떻게 다르며, 구원받기 이전의 인간과 구원 받

은 후의 인간은 어떻게 달라지는지가 의문이었다. 생각할수록 의문만

쌓였다.

그런 의문속에서 「로마서」 연구는 계속되었다. 「로마서」 연구

가 계속되어가면서 나는 바울이란 인간에게 깊은 매력을 느꼈다. 바울

에게서 느낀 인간적인 매력중에서도 「로마서」 7장에 나타나는 그의

탄식은 나 자신의 탄식과 같은 동질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

져내랴』

나는 바울의 탄식을 읽으며 실존철학자들의 삶에 대한 절규를 생각

했다. 바울의 탄식을 실존철학자들의 언어로 표현해보자.

『오호라, 나는 비극적 실존이로다. 이 죽음의 한계상황에서 누가

나를 초극(超克)시켜 주겠는가!』

흔히 실존철학의 시조로 니체나 키에르케고르를 들지만, 「로마

서」 7장 24절의 말을 미루어 보건데 실존철학의 시조는 바울이라 할

수 있겠다. 「신앙의 용장」 바울도 그의 뜨거웠던 신앙역정의 뒷그늘

에는 이렇게 처절한 자기갈등이 있었던 것이다. 「로마서」가 시작되

는 1장에서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했던 바울이 7장에 와서

는 『이 죽음의 자리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탄식하고 있는 것이

다.

우치무라 간죠의 묘비명

나는 바울이 지녔던 영혼의 갈등이 내가 지닌 문제와 상통한다는

사실에 깊은 공감을 느꼈다. 그리고 이러한 바울이 인생을 통째로 걸

어 충성할 수 있었던 예수라면 나도 그에게 삶을 바칠만한 무언가가

있을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세월은 흘러갔다. 여름에 시작되었던 「로마서」

연구는 가을을 지나 겨울에 접어들게 되었다. 그간에 매주 한번씩 열

렸던 성서연구는 수시로 열리게 될 만큼 불이 붙었다.

우치무라 간죠 선생의 책이 크게 도움을 주었다. 그의 글을 읽으면

서양 성서학자들이 쓴 글과는 다른 느낌을 받았다. 서양학자들의 글은

논리적 전개에는 능하나 직관적 통찰력이 부족했다. 독자들의 혼에 호

소하는 통합적 능력이 부족했던 것이다. 우치무라 간죠의 글은 바로

이 점에서 탁월했다.

그의 저서 중에 『구안록』(求安錄)이란 책이 있다. 자신의 자서전

적인 책이다. 그가 예수 안에서 안심입명(安心立命)을 누리기까지 거

쳤던 방황과 고뇌 그리고 예수 안에서 평강을 얻게 되는 과정을 기록

한 책이었다. 그는 1841년에 일본의 한 하급 사무라이 가정에서 태어

났다. 10대에 클라크 선교사를 통하여 그리스도교 신앙에 입신케 되었

다. 그는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돌아오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

과 일본 민족을 사랑하는 일, 이 두 가지 사랑에 인생을 걸기로 다짐

하였다.

그는 일본 제국주의 시대에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반대하

고, 일본이 복받는 길은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주의를 본받지 말고 평

화로서 세계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설교하였다. 그는 이로 인해 군부의

미움을 받아 일터에서 쫓겨났다. 그는 동경의 6평짜리 다다미 방에서

젊은이들을 모아 성서를 가르쳤다. 성서의 진리로 신일본을 세우기를

삶의 목표로 삼았다.

그렇게 길러진 인재들이 전후 일본을 이끌어가는 기둥들이 되었다.

그래서 일본사회는 명치유신 이후 1백년간 오늘의 일본을 일으킨 20명

의 선각자를 뽑을 때 우치무라 간죠를 포함시켰다. 그는 죽음에 임하

여 유언을 남기기를 『내가 죽으면 나의 묘비에 이 글을 새겨달라』고

했다.

「나는 일본을 위한 나다/일본은 세계를 위한 일본이다/세계는 그

리스도를 위한 세계다/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다」

나는 우치무라 간죠의 신앙이 예수에 대한 충성과 자기 조국에 대

한 충성이 하나로 어우러져 균형을 이루고 있음에 감명을 받았다.

우리나라에서 우치무라 간죠의 영향을 받았던 인물로는 김교신과

함석헌을 들 수 있겠다. 나는 우치무라 간죠를 좋아하게 되면서 김교

신선생의 글과 함석헌선생의 글도 탐독하였다. 나는 이런 글들을 읽으

며 예수를 믿고 따르는 삶이 교회당 안에서만 머무는 생활에서 벗어나

백성들의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느껴가게 되었다.

그러던 터에 드디어 역사적인 날이 나에게로 다가왔다. 나의 삶을

근본으로부터 변화시킨, 나의 삶에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을 일으킨

사건의 날이 다가온 것이다.

드디어 도통하다

1968년 12월 4일이었다. 그 날 홍응표선배는 성경공부하는 시간에

최광수란 이름의 다른 선배 한 분과 함께 왔다. 모교의 교육과 출신

선배였다. 우리 셋은 함께 「신약성서」 중의 에베소서를 읽게 되었

다.

『하나님의 뜻으로… 예수의 사도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

들에게 편지하노니…』로 시작된 바울의 서신을 읽어내려가던 중에 1

장 7절에 이르자 무언가 번쩍하는 느낌이 본문에서 느껴졌다. 순간적

으로나마 내 영혼에 헤드라이트 불빛 같은 빛이 비쳤다. 나는 숨을 멈

추고 7절을 다시 읽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두번째 읽었을 때에 나의 머리 속에서 천둥이 울리는 듯 하였다.

아니, 내 영혼에 지진이 일어났다고 하는 편이 좋겠다.

「그·리·스·도·안·에·서」

일곱 글자가 나를 압도했다. 문제의 열쇠는 거기에 있었다. 「그리

스도 안에서」란 말에 해답이 있었다. 그리스도 안이란 어떤 곳인가?

인간을 향한 신의 사랑이 결집된 곳이다.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

닫고 그 사랑에 나를 기투(企投)할 때 나는 하나님과 합일된다. 일컬

어 구원받는다고 표현한다. 그간에 나는 구원의 길을 어디에서 찾았던

가? 내가 방황하고 다녔던 공간은 어디였던가? 분명히 그리스도 안이

아닌 그리스도 밖이었다. 나는 진리를 찾되 「철학 안」에서 찾으려

했고 「인간 안」에서 찾으려 했다. 나는 「철학 안」에는 길이 없으

리란 것까지는 짐작하였으나 「인간 안」에도 길이 없음을 인식하지

못했었다.

나는 그날 밤 그리스도 밖에서 방황하였던 나를 볼 수 있었고, 스

스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는 죄인인 나를 볼 수 있었다. 내 안에 있었

던 것은 고뇌와 방황이었다. 그리고 그 고뇌와 방황의 뿌리에 죄가 있

었다. 고뇌와 방황은 죄가 낳은 자식이었다. 내 영혼을 병들게 하고

있는 고뇌와 방황을 끝내게 하려면 내 영혼을 점령하고 있는 죄를 해

결하여야 함을 알게 되었다. 죄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누리게 된 뒤에

라야 고뇌와 방황에서 해방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놀랍게도 그날 밤 한순간에 그리스도께서 나의 어깨에서 죄의 짐을

내려주었던 것이다. 내 영혼을 점령하고 있었던 죄의 세력을 추방하고

나로 하여금 죄로부터 해방된 자유인의 기쁨을 누리게 해주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분을 평생의 주

인으로 모시기를 다짐했다. 내가 무릎을 꿇었을 때에 예수는 나를 품

어주었고 나는 예수 안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나는 나의 한계상황(Bou

ndary Situation)을 넘어섰고 새로운 존재(New Being)로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 땅의 아들에서 하늘의 아들로 신분이 변하게 된 것이

었다. 기쁨의 강이 내 심장을 흘렀고 세포 세포마다 나의 새로운 출생

을 감사드리는 듯했다.

1968년 12월 4일 밤 11시에서 5일 새벽 1시 사이에 일어난 사건이

었다. 다음날 아침에 떠오른 태양은 이전의 태양과는 다른 태양이었

다. 부는 바람도 이전의 바람이 아니었다. 새로운 태양과 새로운 바람

이 새롭게 태어난 나를 환영해 주었다. 길거리에서 스쳐가는 모든 사

람들이 선한 사람들로만 보였고 길가의 돌 하나, 풀 한 포기에도 하나

님의 사랑이 깃들어 있는 듯했다.

그해 12월4일 밤에 일어났던 이 사건은 나로 하여금 일생에 가야

할 길을 분명히 결정하여 주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 교회

와 백성을 섬기는 일」에 평생을 바치겠다는 결심이었다. 그 길을 걸

으려면 신학교로 가서 목사가 되는 과정을 밟아야 했다. 누구보다 기

뻐하신 분은 어머니였다.

『진홍이를 하나님의 종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렇게 수십년간 새벽마다 드려오던 기도가 이제 응답되었으니 어

머니의 기쁨이 어떠하였을 것인지는 짐작할 만하였다. 그런데 내가 신

학교로 진학하게 되면 어머니를 누가 모시느냐가 문제였다. 어머니 홀

로 어떻게 지내셔야 될까 하는 염려로 어머니께 의논드렸더니 거침없

이 말씀하셨다.

『야야 염려말아라. 이미 다 계획이 되어 있니라. 너는 가서 공부

나 열심히 해라. 나는 그저 너가 목사되는 거이 감사하고 감사할 따름

이다. 내 걱정은 조금도 하지 말아라』

나는 어머니의 말만 믿고 이듬해인 1969년 3월에 서울에 있는 장로

회신학대학에 입학했다. 그런데 몇달 간 공부하다가 대구로 어머니를

뵈려 갔더니 어머니는 어느 집에서 가정부로 일하고 계셨다. 나는 깜

짝 놀라 어머니께 말씀드렸다.

『어머니 이게 무슨 일입니까? 대책이 다 되어 있다시기에 그대로

만 믿었더니 이렇게 식모살이를 하십니까? 안되겠습니다. 신학교는 휴

학하고 취직하여 어머니를 모셔야겠습니다. 아무리 목사되는 일이 중

해도 어머니를 이렇게 두고 신학교에 다닐 수는 없습니다』

어머니는 펄쩍 뛸 듯이 놀라며 말씀하셨다.

『야가 뭐라카노? 내가 지금 어때서. 이래 있어도 기쁨이 넘친다.

그라고 직업에는 귀천이 없는기여. 식모가 어때서 그러냐? 내 염려는

본래 말아라. 내가 이 자리에 있어도 프라이드가 있다. 이 집 주인 아

들이 셋이다만 내가 보기에는 셋 다 합하여도 너 하나만 못하겠더라.

그러니 넌 아무 걱정말고 얼른 가서 공부를 계속 해라. 야가 큰일 날

소리를 하네』

어머니는 가정부로 계시면서도 자부심이 대단하셨다. 진홍이는 장

차 큰 인물(?)이 된다는 확신이 그 바탕이었다. 그래서 내가 대수롭지

않은 일에도 신통한 일을 할라치면 어머니는 말씀하시곤 했다.

『잘 했다. 장차 큰 일 할 녀석이라 다르구먼』

그런 내가 신학교로 갔으니 장차 큰 목사가 되리라는 것이 어머니

의 믿음이었고 꿈이었다. 그런 꿈이 있으셨기에 비록 가정부로 계셨어

도 기쁠 수밖에 없으셨다.

공동묘지에서 일어난 사건

장로회신학대학은 대학 졸업자가 입학하여 3년 과정을 이수하는 엘

리트 코스였다. 전국 각 대학에서 졸업한 40명의 동기생들은 앞으로

한국교회를 이끌어 나가겠다는 사명감에 불타 있었다. 저녁마다 워커

힐 뒷산인 아차산에 올라가 광나루를 내려다보며 장차 한국교회의 기

둥이 되고 겨레의 정신적 지도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함께 나누곤 했

다.

그리고는 무덤과 무덤 사이사이에서 무릎꿇고 기도했다. 기도 드리

는 급우들 중에는 유별난 친구들이 있었다. 기도 중에 몸을 심히 떨거

나 요란스레 「방언 기도」를 드리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체험이 없

었던 터라 약간의 거부감이 느껴졌다. 기도를 왜 저렇게 요란을 떨며

할까? 성경에는 하나님께 은밀한 중에 기도드리라고 하셨는데 저렇게

야단스럽게 기도드리는 것은 성경적이 아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

었다.

『전도사님은 중풍기가 있는거요? 기도하면서 왠 몸을 그리 떠는거

에요? 그리고 영어도 아니고 독어도 아니고 「다다다… 따따따…」는

어느 나라 말이요? 한글을 애용함이 어떻겠어요?』

그런 나의 물음에 방언 전도사가 답했다.

『김형, 그렇게 생각할 일이 아니에요. 말세(末世)에 목회하려면

영권(靈權)이 있어야 합니다. 영권을 받으려면 방언기도가 제일입니

다. 김형도 그렇게 비판적으로만 보지 말고 방언 은사를 구하세요. 김

형은 보아하니 성격도 기질도 적극적이라 은사체험이 깊어지면 한국교

회를 흔들어 놓을거요』

『아뇨. 난 한국 말이나 제대로 할라요. 한글로도 하나님과 의사소

통이 충분히 되는데 뭘 할려고 그런 다따다따… 외마디 소리를 냅니

까?』

그러던 어느 날 방언기도를 깊이하는 한 급우와 함께 한 가정에 초

청받아 갔다. 그 집에서 저녁식사 대접을 잘 받고 나서려는데 첫 돌

무렵인 그 집 아이가 자지러질 듯이 울었다. 고열이 나고 까무라칠 듯

이 울자 젊은 어머니는 어쩔줄을 모르고 허둥댔다. 나는 혹시나 소아

마비열이 아닐까 염려스러워 아기 엄마께 물었다.

『아주머니 제가 가서 택시를 불러올까요? 병원에 가야 될 것 같은

데요. 혹시 소아마비열인지도 모르니 서둘러 병원에 가보는 것이 좋겠

습니다』

내가 그렇게 말하며 택시를 부르러 나가려는 참에 친구 전도사는

침착스레 말했다.

『아기를 저에게 주십시오』

아기를 받아 품에 안은 그는 아기 머리에 손을 얹고는 방언기도를

「두루루…」 드렸다. 얼마간 그렇게 기도를 드리더니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병마야 물러나라』하고는 기도를 마쳤다. 그러자 아기는 울

음을 뚝 그치고 열이 내리는 것이었다. 나는 기가 팍 죽었다.

『야, 방언기도를 해야겠구나!』

앞으로 목회하려면 저 정도는 돼야지, 나처럼 『택시 불러 올까

요?』 하는 수준으로는 곤란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저녁

나는 그 친구의 방을 찾아갔다.

『나도 방언 좀 가르쳐주소』

『형, 나도 방언기도 할 수 있게 지도 좀 해주시오. 오늘 형이 방

언기도해서 아이 병 고치는 것을 보고 나도 방언은사를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수다. 앞으로 목회하려면 그 정도는 되어야지, 나처럼 당

황해서 택시 불러 올 생각만 하여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수다』

『이제 김형이 방언은사를 인정했구먼요.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김형, 거 방언받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니 막상 방언 받으려니 또 왜 그렇게 말하는 거요? 어려워도

형이 지도해 주는 대로 따를 터이니 지도해 주시구려』

『김형, 내 말은 안된다는 것이 아니라 쉽게만 생각지 말라는 거지

요. 김형, 방언은사 받으려면 소나무 한 그루는 뽑아야 합니다』

『아니 방언은사 받는 것하고 소나무하고 무슨 관계가 있지요?』

『다름 아니라 김형이 방언은사를 받기에 합당한 마음가짐을 가지

라는 것이지요. 내가 아는 시골교회 목사님 한 분이 있어요. 교인들은

부흥회다, 산기도다 다녀와서는 방언기도를 드리는데 목사인 자신은

방언기도를 못하니 교인들을 지도하는데 지장이 있음을 느꼈지요. 그

래서 「나도 방언기도를 드려야 방언하는 교인들을 지도할 수 있겠습

니다. 하나님 내게 방언은사를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기도드렸답니

다. 그러나 열심이 기도했어도 방언은사가 임하지 않으니까 마음에 조

바심이 일어나 달밤에 담요 한 장 들고 산으로 갔습니다. 산비탈에 엎

드려 소나무 한 그루를 붙잡고 방언은사 주시라고 기도드렸습니다.

그런데도 방언기도가 터져나오지 않으니까 소나무를 어떻게나 심히

흔들며 기도를 드렸던지 새벽녘에 가서 소나무가 뿌리채 뽑혀버렸습니

다. 그러자 소나무가 뽑히는 때의 반동으로 목사님은 산비탈에서 서너

바퀴 굴러 떨어져 골짜기에 콱 쳐박혔습니다. 그런데 골짜기에 쳐 박

히는 순간에 방언이 탁 터졌습니다. 그러니 김형도 방언은사를 받으시

려면 그만큼 간절히 구하라는 것입니다』

나는 그 말이 이해가 갔다. 그래서 나도 소나무 한 그루 뽑기로 마

음 먹었다. 마음은 그렇게 먹었으나 주중에는 공부하고 주말에는 교회

를 섬겼기에 소나무 뽑을 만한 시간이 나지를 않았다. 고심하던 끝에

공휴일을 이용하기로 하고 5월 5일 어린이 날을 D-day로 잡았다. 그리

고는 준비기도를 먼저 드렸다.

『하나님 아버지 간절히 기도 드립니다. 저도 은사를 받아 능력있

는 목회자가 될 바탕을 닦아나가야겠습니다. 방언은사, 병 고치는 은

사를 함께 받아 능력있는 종이 되어야겠습니다. 5월 5일에 산기도를

가겠습니다. 산에 가서 소나무가 뽑히도록 간절히 기도드리겠사오니

그날 방언주시옵소서. 주실 줄을 믿고 기도드립니다』

삼각산 산기도

5월5일 아침 일찍 서둘러 산으로 갔다. 청와대 뒤편을 돌아 삼각산

의 특별기도원으로 갔다. 아침 10시경 기도원에 도착하여 기도원 뒷산

으로 올라가니 한적한 곳에 판판한 바위가 있고 바위 곁에 소나무 한

그루가 다소곳이 자라고 있었다. 나는 바위 위를 덮고 있는 낙엽을 의

지해 바위에 무릎을 꿇고 소나무를 두 손으로 잡은 채 기도하기 시작

했다.

『여호와 아버지. 오늘 이 자리에서 방언 주실 줄로 믿습니다. 방

언 주시지 않으면 이 자리에 움직이지 않겠습니다. 방언을 주셔야 이

자리에서 일어나겠습니다』

그렇게 확고한 다짐으로 기도를 시작하였으나 불과 3~4분도 지나지

않아 「아차, 자리를 잘못 잡았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위에 닿

은 무릎이 빠개질 듯이 아파오는 것이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 했듯이

바위에 방석이나 담요를 말고 앉았어야 했는데, 낙엽 쌓인 것만 의지

하고 그냥 앉았으니 그 통증을 배겨내기 힘들게 되었다. 그러나 방언

주시지 않으면 이 자리를 움직이지 않겠다고 다짐의 기도를 드린 터여

서 취소할 수도 없었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아파도 그냥 참자, 그냥

참고 기도드리면 하나님께서 기특하게 보시고 방언 주시겠지. 무릎 아

픈 것으로 설마 죽기야 하겠나….

이런 생각에 억지로 참기를 계속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무

릎에는 감각이 없어지고 허리가 아파왔다. 그래도 참으며 『방언 주시

옵소서』를 되풀이 기도했다. 오후 3시경이 되었을 즈음에는 기진맥진

하여 기도할 기력조차 없어졌다. 입 안은 마르고 허리는 몽둥이로 맞

은 듯 뻣뻣하기만 했다. 그러나 방언은 소식도 없었다. 나는 기진하여

고개를 떨구며 기도했다.

『아이고 하나님 방언 안주는 겁니까?』

그때 「신약성서」중의 로마서 한 구절이 떠올랐다. 8장 32절이었

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

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

하시겠느뇨』

이 말씀을 되씹으며 생각하는 동안에 방언을 구하는 나의 마음이

합당치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직 방언은사는 못받았어도 이

미 받은 것이 있는데, 이미 받은 것에 대하여는 감사하고 실천할 줄을

모르고 아직 못받은 것만 자꾸 구하는 마음자세가 합당치 못하다는 생

각이었다.

내가 이미 받은 것이란 예수를 믿음으로써 얻은 구원의 확신이었고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확신이었다. 그리고 지금 죽어도 천국

에 들어가게 된다는 흔들림없는 믿음이었다. 이런 귀중한 것을 받았으

면서도 제대로 감사 드리지도 않고, 친구가 병 고치고 방언하는 것을

보고는 후끈 달아올라 그것부터 구하려고 했던 것이다. 나의 생각은

결론에 이르렀다.

「그렇다. 내가 다른 것은 못받았어도 예수를 믿음으로써 생명을

얻었고 천국 소망을 이미 지녔는데 이것을 밖에 나가 전하고 실천하

자. 그런 다음에 방언이 필요하면 방언을 구하고 병 고치는 능력이 필

요하면 그때 가서 구하자」

거리의 선교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시내로 들어갔다. 다리를 절룩거리며 동

대문 로터리에 있던 고속버스터미널로 갔다. 터미널 휴게실에는 부산

가는 손님들이 차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빈의자에 신발 벗고

올라서서 웅변조로 전도 설교를 시작했다.

『여러분, 장거리 여행을 앞두시고 잠시 귀를 빌려주시기 바랍니

다. 여러분, 고속도로는 사망길이요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길입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음으로써 생명을 누리십시오. 바로 지금입니다. 지

금이 여러분께서 생명을 선택할 때입니다』

내가 열을 올려 침을 튀기며 말하고 있는 중에 터미널 경비원이 오

더니 무조건 나의 멱살부터 잡았다. 그리고는 나를 치려는 자세로 한

쪽 손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이 자슥이 뭐이 어째고 어째? 고속도로가 사망길이라고? 야 임

마, 너 누구 회사 망하라고 악쓰는 거냐?』

『아이고 선생님, 내가 말을 잘못했습니다. 지가 예수가 생명인 것

을 강조하다 보니 말에 실수가 있었습니다』

『뭐이라고 선생이라고! 난 너 같은 제자 가르친 적이 없어. 예수

쟁이들은 입만 살아가지고서…』

『아니 잘못했다는데 왜 이러세요. 이 손 좀 풀어주세요. 목 졸려

죽겠습니다』

『그래 임마 목은 풀어줄 테니 당장 내 눈 앞에서 사라져. 한번만

더 내 눈 앞에 보였다가는 다리를 분질러 놓을테니. 야 임마! 그래 생

각을 해봐라. 고속버스회사에 와서 고속도로는 사망 길이라고 나팔 부

는 거이 제정신 있는 짓거리야?』

그는 내 엉덩이를 차서 내쫓았다. 나로서는 자존심이 상하고 창피

스럽기도 할 노릇이었다. 그러나 그런 기분은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

려 기분이 가쁜하고 몸이 날아갈 듯이 상쾌했다. 그래서 나는 혼잣말

로 중얼거렸다.

『그래 바로 이거다. 아직 못 받은 은사를 달라고 구하기 전에 이

미 받은 은혜를 전하고 실천하면 때를 따라 기쁨 주시고 힘 주시는 거

다. 자기 아들 예수를 주시기까지 하신 하나님이 어떤 은사인들 왜 아

까워 주시지 않겠느냐? 이미 받은 생명의 신앙부터 전하고 실천하고

살면 되는 거다』

그후로 나는 방언은사를 달라거나 병고치는 능력 주시라는 기도는

그만두고, 이미 받은 은혜를 전하고 실천하는 삶에 집중하게 되었다.


신학대 시절

내가 다닌 장로회 신학대학은 엘리트 코스였다. 대학 졸업자들이 입

학하여 3년간 공부하는 과정이었다. 전국 각 대학 출신의 동급생 40

여 명은 엘리트 의식을 품고 성직자가 되는 훈련을 받았다.

우리는 대학시절의 전공과목을 서로 이야기하면서 장래 한국 교회와

백성의 정신세계를 이끌어 나가자고 다짐하곤 했다. 그러나 신학교

생활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새로운 고민을 낳게 했다. 제도화된 신앙

생활에서 파생하는 부작용이 그것이었다. 나는 신학교에서 이 문제를

피부로 느꼈다.

예수 그리스도의 도(道)를 이어받은 교회가 처음에는 진실에서 출발

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진실이 제도화 하고 교리라는 껍질을

쓰게 되면서 점차 굳어진다. 드디어는 그 껍질이 인간 영혼을 구속하

게 된다. 인간을 해방시키려던 복음이 인간을 구속하는 종교로 변질

하는 것이다. 그런 증상이 가장 실감나게 느껴지는 곳이 신학교인 듯

했다.

신학교에 들어간 후 첫 시험을 치르면서부터 갈등은 시작되었다. 동

급생들 중에 커닝하는 학생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커닝에 몰두

하고 있는 동급생들의 모습을 보고는 아연실색했다.

「앞으로 목사가 돼 백성들의 정신세계를 이끌어갈 사람들이 어떻게

커닝을 할 수 있을까? 이런 수준의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굳이 3년이

란 세월을 보낼 필요가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며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곤 했다. 내가 몸담은 신학대

학은 아차산에 터잡고 있었다. 옛날 백제의 의자왕이 이곳에 호화궁

궐을 짓고 호사를 부리다가 나라를 잃고 만 자리다. 우리 신학도들은

저녁이 되면 아차산에 올라가 무덤들 사이에 터를 잡고 기도를 드리

곤 했다. 그런데 낮에 커닝을 하던 동급생 한 명이 방언으로 기도하

면서 몸을 사시나무 떨 듯했다.

「역시 신학도라 다르구나. 낮에 커닝한 것이 신앙 양심에 걸려 저렇

게 회개의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게로구나」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다음날도 그는 여전히 커닝을 하는 것

아닌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신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커닝을

했다. 그런 그를 3년 전 서울에서 우연히 만났다. 서울 중심가에서 3

천~4천 명이 모이는 교회의 담임목사로 있었다. 졸업 후 20년 세월이

흐른 뒤에 만난 것이라 반가워 인사를 나누었다. 그런데 그는 인사할

때 허리를 앞으로 숙이는 것이 아니라 뒤로 젖히며 말했다.

『허허, 김진홍 목사 오랜만이야. 알렐루야!』

그는 「할렐루야」를 말할 때 목에서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알렐

루야」로 발음했다. 그런 음성을 들으니 20년 전 커닝하던 그의 모습

이 떠올랐다. 나는 「20년 전에 커닝하던 사람이 그간에 목사노릇 하

느라 목소리가 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말을 건넸다.

『이목사, 목에 부스럼 났나? 왜 목에서 개구리 우는 소리가 나는 기

여?』

『어허 김목사는 여전하구먼, 알렐루야』

종교인과 위선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개구리 목사」와 헤어졌다. 종교인에게 가장

큰 적은 위선이다. 자기 기만이다. 종교에 위선이 터를 잡을 때 인간

정신이 녹슬고 좀벌레가 생기게 마련이다. 그런 연후에는 종교의 이

름으로 자기를 속이고 하늘을 속인다. 나아가 서로가 속인다. 기독교

역시 그 점에서 예외일 수 없었다.

신학교 안의 위선적인 분위기에 나의 갈등은 깊어갔다. 여기까지 오

는데 얼마나 큰 값을 치렀던가! 지난날 초상집 개처럼 방황하던 세월

을 벗어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에 귀의한 이후 신학교에 오기까지

치렀던 고난의 세월들을 생각했다. 나는 신학교에 입학하는 것으로

모든 방황과 고뇌가 끝나고 평정과 환희의 세계가 펼쳐질 것이라 생

각했다. 그러나 막상 여기에 도달해 보니 역시 인간이 모이는 곳이었

다.

그렇게 몇 달간을 고민하다가 마침내 결심했다. 목사라는 직업인이

아니라 순수한 인간으로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겠다는 결심이었

다.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가 말했던가? 자신이 목숨 걸고 추구하

는 철학의 최종목표는 「어떻게 신 앞에 단독자(單獨者)로 설 수 있

을까, 어떻게 맨몸으로 신 앞에 설 것인가」의 문제라고 했다. 나도

그렇게 한번 살아보자. 목사니 교파니 하는 부질없는 껍질을 벗고 순

수하게 벗은 몸으로, 예수가 살았던 모습 그대로 한번 살아보자.

그렇게 다짐하고 난 후 나는 신학교를 떠나기로 했다. 2학기 기말시

험이 시작되는 날, 짐을 싸서 대구로 내려갔다. 동급생들이 진심으로

만류했으나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자네들은 머물러라. 나는 떠난다. 머무르는 자네들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나는 나 자신에게 진실해지고 싶을 따름이다. 나는 직업

적인 성직자로 살기를 포기한다. 나는 길가의 잡초처럼 민중들 속에

서 살아가고 싶다. 그들과 함께 울고 웃고 고민하며 살고 싶다. 그렇

게 사는 삶을 나의 주인 예수께서도 기뻐하실 것이란 확신이 서기에

내 인생을 걸고자 한다. 입으로 설교하는 목사가 아니라 온몸으로 증

거하는 예수의 제자가 되고 싶을 따름이다』

그 시절 나는 이미 결혼한 몸이었다. 신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나는

결혼식을 올렸다. 비극으로 끝난 결혼이었지만 나 자신이 걸어온 삶

의 자취니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자.

아내 된 여성을 만났던 것은 내가 계명대 철학과에 다닐 때였다. 이

화여대 사회사업과 졸업반의 이성덕이란 여성이었다. 가정부를 셋이

나 둔 부잣집 딸이었다. 몇 번 만나는 사이에 사랑하게 된 우리는 신

학교에 함께 입학하게 되었다.

처가에서는 나와 사귀는 것을 극단적으로 반대했다. 『귀한 딸을 그

런 백수 건달에게 시집 보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다른 도

리가 없어 나를 따라 신학교에 입학했고 당연히 친정과 관계가 끊어

졌다.

우리는 여름방학 때 결혼식을 올렸다. 가나안 농군학교에서 김용기

장로님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린 우리는 신혼여행 갈 비용조차 없었

다. 기차를 타고 인천으로 가서 한 여인숙에 묵으면서 첫날밤을 보냈

다.

지난날들을 차분한 마음으로 되돌아보면 처가에서 그렇게 반대했을

때 부모의 뜻을 거스르지 말았어야 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결혼을

앞둔 후학들에게 내 경험을 바탕으로 해 권한다.

『그래도 자식을 가장 사랑하는 것은 부모님이다. 웬만하면 부모님의

뜻을 거스르며 결혼할 것 없다. 최소한 부모님을 설득할 때까지 기다

리는 것이 좋다. 그리고 그 기간에 서로간의 사랑과 마음가짐을 재삼

되새겨보는 기회로 삼는 것이 좋다』

철공소의 노동자 생활

이야기를 바꾸어 신학교를 중퇴하고 대구로 내려갔던 때로 되돌아가

자. 나는 대구에 내려가서 노동자들의 친구가 되기를 원했다. 그렇게

하려면 나 자신이 노동자가 돼야 했다. 나는 최종학력을 초등학교 졸

업이라 쓴 이력서를 들고 일자리를 찾다가 대구 칠성동에 있는 한 철

공소에 입사했다.

나는 원래 체격이 빈약하고 볼품없는 생김새라 무학(無學)이라 해도

모두가 수긍할 만한 인상이다. 초등학교 졸업이라 쓴 이력서를 들고

그 철공소를 찾아갔더니 나의 외모를 보고는 그런 줄로만 알고 입사

를 시켜주었다. 출생 후 처음으로 외모 덕을 본 셈이다.

X철공소 사장은 보수교단 소속 장로로 여러 곳에 교회를 세우고 큰

액수의 헌금을 내 전도사업을 하고 있는 모범 신앙인이요, 모범 기업

인으로 알려진 사람이었다.

나는 일당 2백70원의 화부(火夫)로 채용되었다. 용광로를 관리하는 일

로 1주일마다 낮 근무와 밤 근무를 교대하는 자리였다. 그런데 회사

에 출근한 후로 회사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일

하는 틈틈이 동료들에게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하노라면 동료들은

대개 불쾌한 반응을 나타냈다. 개중에는 반감에 젖은 말을 내뱉는 경

우도 있었다.

『예수쟁이라면 말도 마…』

『예수라면 신물난다』

나는 처음에 의아했으나 회사 사정에 익숙해지면서 그들의 심정을 이

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철공소는 사장이 교회의 장로다 보니 간부

들 전부가 장로 아니면 집사로 교회에서 중책을 맡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받는 일당은 같은 업종의 다른 회사들에 비해

10% 정도 낮은 임금이었다. 게다가 작업시간은 타회사에 비해 1시간

가량 더 길었다. 더욱 나쁜 것은 매일 아침 전체 종업원이 예배를 드

렸는데 이 시간은 노동시간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아침예배

때문에 노동자들은 30분을 더 일찍 출근해야 했다. 노동자들에게는

아침에 30분 더 일찍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 큰 부담이다. 그러나 아

침예배 드릴 때마다 출석을 부르고 출석률이 월급 봉투에 반영되고

있어 노동자들은 마지못해 따르고 있었다.

상황이 이러니 노동자들의 입에서 예수나 교회에 대해 거침없는 악담

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예수는 그들의 새벽잠을 빼앗아가는 악당이

었다. 그들이 아침예배를 드리고 나서 작업장으로 흩어지며 내뱉는

말이 있었다.

『개새끼들, 자식새끼 낳아 예배당 보내면 같은 개새끼다』

나는 동료 노동자들에게 예수 믿자고 전도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

이 있음을 느꼈다. 노동자들의 마음에 불만을 일으키고 있는 이런 상

황을 고치는 일부터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초보노동운동가

나는 서서히 일에 착수했다. 작업시간중에는 같은 부서의 동료들과

대화했고, 점심시간이나 출퇴근 시간에는 다른 부서의 노동자들을 접

촉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가 이 공장에서 일을 더 열심히 하되 회사측에서도 합당치 못

한 노동조건을 고치게 하자. 그렇게 하려면 개인이 나서는 것은 별효

과가 없으니 노동조합을 만들어야 한다. 노동조합 만들기가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고 또 나쁜 짓 하는 것도 아니다. 회사에도 좋고 우

리 노동자들에게도 좋은 노동조합을 만들자. 지금처럼 불만에만 가득

차 있으면 회사도 우리도 손해다』

동료들의 처음 반응은 『해봐야 헛 일』이란 것이었다. 그동안 왜 안

해보았겠느냐, 몇 번이나 시도해봤지만 번번이 몇사람만 희생되고 흐

지부지 끝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꾸준히 설득했다. 그랬

더니 차츰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동참하겠다는 동료들이 생겨나

고 짬짬이 모여 의논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그런 상태로 얼마가 지나니 회사측에서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

어나고 있다고 생각하고 진상을 파악하려고 했다. 작업시간중에 몇

명이 사무실로 호출돼 가고 오고 하더니 화살이 드디어 나에게로 집

중되었다. 나는 사무실에 불려가 취조 아닌 취조를 받게 되었다.

『김씨가 요즘 가만히 있는 사람들을 선동해서 일을 꾸미고 있는 모

양인데 왜 그런 짓을 하요? 정신나간 사람 아이요! 그런 짓을 하면

빨갱이로 몰린다는 걸 모르요? 당장 그만두고 그간에 호응한 녀석들

이름을 대봐요. 그렇게 하면 선처할 수도 있어요』

『내가 한 일을 그런 식으로 생각지 마십시오. 더군다나 빨갱이 운운

하는 말은 듣기에 안 좋네요. 이 회사가 부당한 노동조건 아래에서

강제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은 한마디로 웃기는 일입니다. 예배 드리

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다른 회사와 같은 수준의

급료를 지급하고 작업시간도 같은 수준으로 맞춘 후에 예배를 드리십

시오. 급료는 낮고 작업시간은 더 긴데 아침마다 예배를 드린다는 건

정신없는 짓입니다. 나는 노동운동 하자는 사람도 아니고 말썽 일으

키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회사가 두 가지만 고쳐주십시

오. 그러면 저도 가만 있겠습니다. 임금 정상화와 작업시간 단축 두

가지입니다. 만일에 사정상 작업시간이 늘어나야 된다면 거기에 알맞

은 수당을 지급해 주십시오. 그렇게 두 가지를 갖춘 후에 예배를 드

려주십시오』

『못하겠다면?』

『하는 수 없이 나도 하던 일을 계속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리고 나 개인으로는 대답할 입장이 못되니 여럿이 의논해서 대답하겠

습니다』

『이거 어디서 순빨갱이가 한 마리 들어왔어. 어디 두고 보자. 얼마나

길게 가나. 너 임마, 잘난 척하는데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설치다가 나

중에 살려달라고 사정하질랑 말아!』

『그래요. 저 잘났어요. 잘난 회사에서 잘난 사람 일 좀 해봅시다』

나는 큰 소리를 쳤다. 이왕지사 일이 이렇게 돼버렸으니 한번 세게

나가보자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러나 큰소리는 쳤지만 막연하기만

했다. 이런 일에 경험도 없는 터에 일은 커지게 되었으니….

회사측의 회유공작

다음날 회사 경영진 한 사람이 작업장으로 나를 찾아왔다. 퇴근시간

에 만나 저녁이라도 같이 하자고 했다. 나는 식사를 대접받을 일 한

것도 없고, 꼭 식사를 하겠다면 몇몇이 같이 나가겠노라고 했다. 그는

싱긋이 웃으며 말했다.

『퇴근 시간에 회사차로 모시겠으니 그리 아십시오. 아니, 대화해서

순리로 풀어나가자는 것인데 그렇게 딱딱하게만 나올 건 없잖소. 일

단 만나서 김씨의 의도가 뭔지나 들어 봅시다』

그가 사라지자 같은 부서의 동료들이 비꼬는 말투로 이죽거렸다.

『김씨 잘 허믄 출세하겠시다. 높은 자리 가거든 우리 잘 봐주소』

나는 퍽이나 거북스러웠다. 회사가 갑자기 부드럽게 나오니까 대처하

기가 더 어려웠다. 그리고 동료들이 빈정거리며 거리감을 보이는 것

도 부담스러웠다. 작업종료 벨이 울리고 퇴근 채비를 해서 정문을 나

서니 회사 승용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어느 한식 요릿집에서 푸짐한

식사를 했다. 낮에 만났던 간부가 말했다.

『선생님, 저희는 선생님이 누구신 줄 미처 몰랐습니다. 이력을 감추

고 입사하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그간에 우리가 너무 예의에 벗어나

게 대접한 것 같아 죄송스럽습니다. 용서하십시오. 그러나 김선생님께

서도 신원을 숨기고 계셨기에 책임의 절반은 있습니다. 뭐 지금 그걸

따지자는 건 아니구요. 결론을 먼저 말해서 우리 같은 작은 회사로서

는 선생님 같은 실력자를 모실 만한 수준이 못됩니다. 그러니 좀더

좋은 일터에 가서 그 정신과 실력을 발휘해 보시는 것이 피차에 좋을

듯합니다. 이건 얼마 안 되는 액수입니다만 그간에 수고하신 노력에

대해 저희 회사의 인사 표시니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는 두툼한 봉투 하나를 내 호주머니에 찔러넣으려 했다. 짐작건대

그간에 나에 대한 신원조사를 해보았던 것 같았다. 말하자면 너의 뒷

조사를 해보니 우리 회사에 두었다간 재미없는 인물인 것 같으니 돈

먹고 사라져달라는 이야기였다. 그 봉투를 돌려주며 말했다.

『호의는 감사합니다. 그러나 나도 이 회사에 들어올 때는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던 것이고 또 그간에 시작해 놓은 일도 있으니 지금 회사

를 그만두는 것은 어렵겠습니다. 내가 그만둘 때가 되었다고 생각되

면 그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지 마십시오. 선생이 우리 회사에서 하겠다는 일이 무슨 일인

지 대충은 짐작이 갑니다. 그런 일을 해서 서로간에 뭐가 유익하겠습

니까? 또 이런 말은 할 건 아닙니다만, 선생님은 우리 회사에 임시고

용인으로 들어온 처지입니다. 임시고용인은 아무런 법적 보장이 없는

자리입니다. 회사로서는 언제든지 그만두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 신앙인으로 서로가 원만하게, 덕스럽게 해결하자는 뜻에서

오늘 저녁 이런 시간을 만들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우리 호의를 받아

들이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갑니다. 제 의사는 확실합니다. 저 스스로가 이

회사를 그만둘 생각은 절대로 없습니다. 회사가 당장에라도 날 해고

하면 그만두어야겠지요. 별도리 있겠습니까? 저는 법을 어겨가면서

일할 생각은 없습니다. 나는 단지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일하겠습니다』

『거 듣자하니 듣기에 거북한 말만 하네요. 방금 착취란 말을 하는데

누가 누구를 착취한다는 게지요? 그런 말은 평양 방송에서 쓰는 말

아닙니까? 선생께서 평양 다녀오신 분도 아닐 텐데 말을 좀 삼갑시

다. 그게 신상에 좋지 않겠어요? 아무튼 우리 회사로서는 선생께 섭

섭잖게 해드리자는 뜻으로 성의를 표했으니 알아서 처신하시기 바랍

니다.

만약 선생께서 다른 일을 하시는데 저희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힘이 돼드릴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김선생께서 신학 공부를 계속하

실 뜻이 있으시다면 사장님께 건의해 장학금을 지원하게 할 수 있겠

고, 아니면 개척교회를 하실 의향이 있으시다면 지원하도록 건의할

의사도 있습니다』

『사장님은 개척교회 좋아하시는 모양인데, 예수 뼉다구 울궈먹지 말

고 근로자들 대우나 잘 해주라카소!』

『보자 허니 별소릴 다 듣겠구먼. 사람이 존 말 할 때 알아들어야제.

당신 뭘 믿고 그리 떵떵거리는 거요. 우리가 이 판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인데 당신 같은 사람 밟아삐리기야 식은 죽 먹기요』

그는 화를 삭이느라 씨근거렸다. 아들뻘 되는 내게 화를 참느라 애쓰

는 그가 딱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서 나는 음성을 낮춰 말했다.

『내 말이 지나쳤으면 사과드립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생각을 해보

십시오. 예수 믿는 사람들이 경영하는 공장이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경영하는 공장보다 월급을 더 주지는 못할망정 10%나 더 적게 주는

데다 작업시간도 길어 실제 월급이 20%는 낮은 셈이지요. 그렇게 돈

모아서 개척교회를 여럿 세워 하나님께 바쳤다니 하나님께서 기뻐하

시겠습니까? 내 말은 개척교회를 세우기 전에 노동자들 급료부터 제

대로 주자는 겁니다. 노동자들의 급료를 아껴서 교회당을 짓는다면

사리에 안 맞잖습니까? 그래 놓고 억지로 예배드린다고 그 예배가 하

나님께 통하겠습니까? 사람에게 통하겠습니까? 이만합시다. 좌우지간

오늘 대접 잘 받아 고맙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일어서려니 그가 나를 붙들어 앉히며 말했다.

『내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 합시다. 내가 나잇살이나 더 먹었으니

자식 같고 동생 같아 하는 말인데, 거 몸 아끼시오. 세상살이 그렇게

쉽지 않아요. 그렇게 고집부리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디 가서 하소

연할 데 없습니다. 김선생은 아직 세상 물정을 몰라 그러는 거요. 신

앙과 기업을 혼동해선 안돼요. 지금의 한국 기업 풍토에서 기업경영

을 교회운영처럼 하다간 석 달도 못 가 회사 거덜나고 맙니다. 아, 옛

말에 개같이 벌어 정승같이 쓰라고 했는데 회사경영에는 다소 무리가

있더라도 그렇게 자금을 모아 하나님 사업에 쓰는 것도 좋은 일 아니

겠어요. 내가 사장은 아니지만 사장의 입장이란 것도 있는 거외다. 그

러니 회사가 표시하는 이 성의나 받고, 그간에 우리 회사에서 인생공

부한 셈치고 우리 헤어집시다. 우리는 이 좁은 대구 바닥에서 늘 만

나며 살 사람들 아니오?』

이상한 폭발사고와 부상

그렇게 헤어진 다음날부터 나는 노동조합 결성을 시작했다. 부서별로

대표를 뽑아 용광로실에서 대표자회의를 열었다. 부서 책임자들에게

노동조합 가입 지원자들의 서명날인을 받게 하고 매일 작업이 끝난

후 모여 상황보고와 토론 그리고 앞으로의 대책을 세워나가기로 했

다. 그렇게 되니 사내 분위기가 살벌해지고 회사는 우리를 중심한 일

꾼들이 다른 노동자들과 접촉하지 못하도록 하면서 개개인을 불러 설

득도 하고 엄포를 주기도 했다.

그러던 중에 일주일이 지나고 밤근무하는 주간이 되었다. 밤근무 때

는 정말 피곤했다. 몸이 약한데다 긴장이 쌓이니 피로는 배로 늘어났

다. 저녁 7시에서 다음날 새벽 6시까지 11시간을 용광로 앞에 섰다가

아침 나절에 퇴근할 때가 되면 다리가 붓고 눈이 핑 돌았다. 어떤 날

은 길을 걷다가도 현기증이 일어 담벽에 기대 섰다가 가곤 했다.

정식으로 노동조합 결성을 시작한 뒤로 처음 밤근무하는 날이었다.

밤 2시경이 졸음이 가장 쏟아지는 시간이다. 나는 졸음을 주체할 수

없어 바깥 바람을 쐬다 들어가곤 했다. 내가 일하는 부서에는 두 대

의 용광로가 있었다. 말이 용광로지 쇠를 녹이는 용광로가 아니라 쇠

에 열을 가하는 불가마 같은 모양이었다. 말하자면 숯 굽는 가마와

비슷했다.

내가 맡은 것은 큰 가마였고 옆에 조금 작은 가마를 다른 사람이 맡

고 있었다. 내가 하는 일은 공기와 기름이 나오는 두 파이프의 도수

를 조절하는 일과 가마 속에 반제품을 넣고 일정한 열이 가해지면 끄

집어내 식히는 일이었다. 작업은 고되고 위험했다. 만일 바람과 기름

이 나오는 도수를 잘못 조절하면 가마가 폭발할 수도 있어서 화부(火

夫)들은 각별히 주의했다.

그런데 그날 밤 3시경 잠시 밖에 나가 바람을 쐬고 돌아왔더니 함께

일하던 조원이 자리에 없었다. 용광로실에는 항상 2인조가 일하게 돼

있었고, 한 사람이 자리를 비울 경우에는 다른 한 사람이 자리를 지

키는 것이 원칙 중의 원칙이었다. 나는 내 짝이 자리를 비운 것을 이

상히 여기며 양쪽 가마에 이상이 없는지를 살폈다. 그랬더니 작은 가

마 쪽에 뭔가 이상이 있는 것 같았다. 무엇이 잘못됐는지 확인하려고

조절기에 손을 대는 순간 『꽝』 하는 소리와 함께 불길이 얼굴을 확

덮쳤다. 나는 순간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얼마큼 시간이 지난 후 내 귀에 『김씨』 『김씨』 부르는 소리가 모

기 소리만큼이나 작게 들렸다. 눈을 뜨니 7~8명의 일꾼들이 나를 내

려다보고 있었다. 의식을 회복한 후 살펴보니 상한 곳은 별로 없었다.

앞 머리털과 눈썹이 타버렸고 얼굴에 가벼운 화상을 입었다. 사무실

쪽에 연락이 된 것 같았으나 아무도 얼씬거리지 않았다. 그쪽은 조용

하기만 했다. 나는 밤중에 집으로 돌아와 며칠을 앓아 누웠다. 화상

입은 얼굴이 화끈거리고 온몸이 몽둥이로 맞은 듯이 아팠다. 화상 연

고를 사다 바르고 집에 머물면서 타버린 머리칼과 눈썹이 자라기를

기다렸다.

며칠 후 회사에서 보낸 등기우편이 왔다. 그동안 일한 날짜에 따른

임금과 해고통지서가 들어 있었다. 해고 이유는 무단 장기결근이었다.

나는 속절없이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노동운동에 대한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것도 아니었고 주위에 자문받을 만한 전문가도 없었다.

구겨진 자존심과 체면도 말이 아니었다. 몸도 마음도 거지발싸개처럼

됐으나 대책이 있을 리 없었다. 나 혼자 힘을 써보았자 어디에서도

반응이나 호응이 없었다.

그리하여 기업주의 횡포에 저항하여 노동자의 권익을 지켜 현대판 예

수가 돼보겠다던 기백은 사라지고 패잔병처럼 돼 방에만 박혀 있었

다.

얼마 지난 후 대구 근교인 경산에 있는 메노나이트 고등학교에 성경

교사로 들어갔다. 거기서 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며 몇 달을 지낸

후 71년 3월 다시 신학교로 되돌아갔다.

제도화된 종교는 생명력이 없고 직업화된 성직자는 위선에 빠지게 된

다며 신학교를 떠난 지 불과 1년 만에 다시 신학교로 돌아간 것이다.

신학교로 되돌아 가려니 나의 자존심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그럴 만한

명분을 찾아야 했다. 나는 어떻게 다시 돌아오게 되었느냐고 묻는 동

급생들에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일을 하려면 혼자서는 안되겠더라. 제도와 조직을 활용해서 효과적

으로 대처해야지 혼자의 의욕만으로는 바보가 되기가 꼭 알맞다. 교

회라는 조직이 생명을 잃었다면 그 속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선한 일

에 쓰이도록 해야겠더라. 교회란 조직이 성령이 쓰시는 그릇이 될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을 품고 신학교로 되돌아왔다』

신학교에 복학하면서 나는 다소 철이 들고 안정을 찾게 되었다. 말로

만 듣던 칼뱅의 책도 읽고 기도생활과 신학수업에 열성을 기울이며

알맹이 있는 날들을 보내게 되었다.

그러던 그 해 여름방학 때 나는 평생의 사역을 결정짓게 될 체험을

하게 되었다. 활빈선교(活貧宣敎)와 두레공동체 운동의 계기가 되는

첫 경험이었다.

여름방학 때 나는 연세대학교 부설 도시문제연구소가 주관한 도시선

교 실무자 훈련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 연구소는 도시 빈민들에 대한

연구와 선교를 전담으로 하는 기관으로 도시선교 실무자 훈련 프로그

램을 실시하고 있었다. 나를 포함한 7명의 훈련생들이 신상길 목사의

지도 아래 방학 기간에 실시되는 훈련 과정에 참가하여 연희동 빈민

지구에 투입되었다.


아이의 시체를 장례치르며

연희동 산비탈에 밀집해 있는 판자촌에 2백여 세대가 모여 살고 있었

다. 그들은 주로 농촌에서 올라온 이농인들이었다. 우리가 판자촌으로

들어간 날부터 폭우가 쏟아지더니 급기야 산사태가 일어나면서 판잣

집 다섯 동이 깔려 몇 사람이 죽고 다쳤다.

죽은 사람 중에 초등학교 3학년 아이가 있었다. 아이의 부모는 큰 부

상을 입어 병원으로 실려갔고 죽은 아이의 시체는 여름 뙤약볕 아래

가마니 한 장에 덮인 채 방치돼 있었다. 파리떼가 모여들었고 아이의

시체 곁에는 「100점」이라고 표시된 산수공책이 펼쳐져 있었다. 마

을 사람들 이야기로는 장례를 치러야겠는데, 아이의 부모는 아직 병

원에 입원중이고 동사무소에서는 바빠서 손이 미치지 않는다는 것이

었다.

신상길 목사는 우리 훈련생들에게 그 아이의 장례를 과제로 맡겼다.

장례를 치르되 우리가 가진 돈으로 치러서는 안 되고 맨손으로 알아

서 해결하라면서 우리들의 주머니돈을 다 거두어 가버렸다. 이웃집들

을 방문하여 알아본 결과 죽은 아이의 가정이 산비탈 아래 부자마을

에 있는 교회에 다니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즉시

교회로 달려갔다. 목사님을 찾아뵙고 사정을 설명한 뒤 도움을 요청

했다.

『저 위 산비탈 마을에 산사태가 나서 여러 사람이 죽고 다쳤습니다.

피해를 입은 가정 중에 목사님의 교회에 다니고 있는 한 가정이 있습

니다. 부모는 다쳐 입원중이고 어린 아들이 죽어 방치돼 있습니다. 우

리가 아이의 장례를 치르려 하니 교회에서 장례비를 도와주시면 고맙

겠습니다』

나는 목사님이 당연히 도와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의외로 목사님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이번 주일에 당회를 열어서 의논한 뒤 결과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아니, 목사님 오늘이 목요일입니다. 이미 시체가 부패해가고 있는데

주일 당회로 미루면 어떡합니까? 목사님께서는 그 가정을 잘 모르시

는 것 같으나 마을 사람들의 말로는 이 교회의 교인이라기에 이리로

찾아왔습니다. 설사 그 가정이 이 교회 교인이 아니더라도 도와주시

는 것이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주일까지 결정을 미루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이 문제는 장례비 전체를 교회에서 부담해야 할 것 같은데 나 혼자

서 결정할 수 없고 아무래도 당회의 의결을 거쳐야겠습니다』

『목사님, 물론 교회에도 사정이 있고 절차가 있겠습니다만 사정이

급하니 장례비를 먼저 지출하시고 결정은 후에 하시는 방법이 어떻겠

습니까?』

『난 이제 들어가 봐야겠습니다. 여러분 생각대로 즉각 도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나는 자기 집으로 들어가 버리는 목사의 등을 향해 안 좋은 소리를

하고 싶었으나, 신학생이 목사 욕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없어 그냥

물러났다.


빈민촌 파고드는 일본종교

우리는 마을로 돌아와 아이의 시체 옆에서 다시 구수회의(鳩首會議)

를 열었다. 의논을 했으나 돈이 들어가야 하는 일이어서 무일푼인 우

리에게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었다. 그때 한 신사가 다가오더니 우

리에게 말을 걸었다.

『선생님들이 죽은 아이의 장례를 치르려는 분들입니까?』

『예, 사정이 딱해서 어떻게 도울까 의논중입니다.』

『아―, 그러세요. 고마운 일입니다. 듣자 하니 아이의 부모들은 병원

에 있다는데 제가 장례를 좀 도울까요? 무엇이든 도움이 될 만한 일

을 맡고 싶습니다』

나는 속으로 훌륭한 분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주위의 아낙네들에

게 물었다.

『저 어른이 누군지 아세요?』

『호랭이교 선생입니다』

『호랭이교가 뭡니까?』

『왜 거 있잖수? 아침마다 냉수 한 그릇 떠놓고 일본 쪽을 향해 절하

며 「남무 호랭이새끼」 하며 경을 외는 교(敎) 말예요. 경을 외울 때

마다 호랭이새끼를 찾는다고 호랭이교라고들 한답니다. 교를 여섯 달

만 믿으면 병이 낫고 3년 믿으면 부자가 된다더구먼요』

그제서야 그가 일본 종교인 일련정종 창가학회(日蓮正宗 創價學會)의

포교사임을 알아차렸다. 그런 그가 장례를 돕겠다고 나선 것이다. 나

는 동기 훈련생들이 그 포교사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틈에 끼여들며

말했다.

『이 아이의 장례는 우리가 이미 준비하고 있습니다. 다음 기회에 도

움을 청할 일이 있으면 그때 부탁드리겠습니다. 선생께서 이렇게 관

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그가 이 일에 끼여들지 못하게 막았다. 물론 그가 왜색 종교의

포교사란 점이 꺼림칙했기 때문이다. 그는 의아한 듯이 나를 보더니

말했다.

『그러세요? 그러시다면 장례비용에 보탬이 되게 기부라도 좀 하지

요. 설마 그런 호의마저 막으시지는 않으시겠지요?』

그는 5천원을 선뜻 내주고는 사라졌다. 자초지종을 곁에서 지켜보던

주민들이 말했다.

『거 일본 것이거나 말거나 사람들은 된 사람들이랑게. 저래야 쓰는

기여. 그놈의 예배당 예수쟁이들은 몇 번씩이나 연락해도 와보지도

않았잖은가』

나는 얼굴이 화끈 달아 올랐다. 우리는 시계 하나를 전당포에 잡힌

돈과 그 포교사의 돈을 합하여 아이의 장례를 치렀다. 몇 번씩 연락

해도 와보지도 않는 교회와 일부러 찾아와서 장례비까지 주고 가는

창가학회. 둘을 두고 주민들의 관심이 어느 쪽으로 쏠릴 것인지는 자

명하다. 백성들은 언제나 자신들의 처지와 아픔에 관심을 가진 종교,

성의를 품은 지도자 쪽으로 쏠릴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들을 그냥

방치한 채 왜색 종교 운운하고만 있다가는 영세민 지역에선 교회가

창가학회에 밀려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돈 있는 자만을 위한 교회

나는 그날 이후로 서울 시내 판자촌 주민들의 실태에 대해 깊은 관심

을 가지고 살펴보기 시작했다. 현장을 찾아가 주민들과 대화를 나누

고 자료를 읽고 연구했다. 판자촌 지역의 실상을 알아갈수록 그들을

위해 무언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자라기 시작했다.

70년대 초 서울에는 18만5천 동의 무허가 판잣집이 있었다. 판잣집

한 동에 세들어 살고 있는 사람들은 평균 2.2세대였다. 따라서 서울시

전체의 판자촌 인구는 18만5천×2.2세대=40만7천 세대가 되는 셈이었

다. 세대당 평균 식구를 5명으로 잡을 때 2백만이 넘는 인구가 판자

촌에 살고 있었다. 요즈음 서울시 변두리를 그린벨트가 둘러싸고 있

듯이 70년대 서울시는 판자촌 벨트에 둘러싸여 있었다.

서울시 중심에도 청계천부터 중랑천을 거쳐 뚝섬에 이르기까지 판자

촌이 집단으로 형성돼 있었다. 서울시 인구 6백만 중에 3분의 1이 판

자촌에 거주하고 있는 처지였다. 이렇게 방대한 판자촌 인구에 대한

교회의 영향력은 어떠했는가? 한마디로 거의 전무한 상태였다. 반면

창가학회는 판자촌에 뿌리를 내리고 영향력을 계속 넓혀 나가고 있었

다.

그러나 실제로 판자촌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존재는 무당들이었다.

판자촌 주민들 의식의 심층에는 샤머니즘이 뿌리 깊었기에 골목마다

무당의 깃발이 꽂혀 있어 그들이 성업중임을 나타내고 있었다. 나는

판자촌을 골고루 답사하고 다니면서 주민들의 교회에 대한 인식이 어

떤지를 살폈다. 다음은 한 주민과 나누었던 대화다. 그는 이전에 교회

에 다녔으나 지금은 다니지 않는다고 했다.

『왜 교회에 나가시다가 그만 두셨습니까?』

『교회요? 좋지요. 나가야지요. 그렇지만 돈을 벌어야 나가지요』

『교회 나가는데 왜 돈이 필요합니까? 성경에는 누구든지 와서 값없

이 구원을 받으라 했고 예수 그리스도는 가난한 자, 힘 없는 자들을

위해 왔다고 하셨는데요. 교회 나가시는 것을 왜 돈과 결부시키십니

까?』

『이 양반이 뭘 몰라도 한참 모르시네. 예수 그리스도가 가난한 자를

위해 왔다는 건 성경책에나 있는 얘기이고 예배당이야 가난한 사람들

이 다닐 곳인가? 돈쟁이들이 나가는 곳이지. 우리 같은 노가다가 교

회에 가봤자 어디 끼여들 자리가 있겠슈?』

나는 그의 말이 단순히 흘려들을 말이 아니라 한국 교회 전체가 듣고

깊이 반성해야 할 말이라 생각했다. 그의 말은 한국 교회의 현실에

대한 하나의 고발이라 여겨졌다.

청계천 빈민가로 진출

나는 가난한 사람들이 속 편하게 다닐 수 있는 교회가 세워져야겠구

나 하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한여름의 무더위를 무릅쓰고 판

자촌 순회를 계속했다. 어깨에 메는 가방에 전도지를 잔뜩 넣은 채

판자촌으로 들어가 한 장씩 전하며 집집마다 방문했다. 전도지는

「박군의 심정」이란 제목의 글이었다. 방문하는 집마다 그 전도지를

드리고 『예수 믿고 구원 받읍시다』 『예수 믿으세요』 『이 작은

책에 인간답게 사는 길이 적혀 있습니다. 찬찬히 읽어보시고 가까운

교회로 나가시기 바랍니다』 하며 골목골목을 다녔다. 그야말로 가장

원시적이고 초보적인 전도방법이었다. 어떻게 보면 안일한 전도방법

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당시로서는 그 이상의 전도방법을 알지 못했

다. 그 전도지를 통하여 무슨 큰 역사가 일어날 것처럼 생각하고 열

심히 다녔다.

그렇게 다니던 발길이 청계천을 찾아들었다. 청계천은 서울의 번화가

를 가로질러 뚝섬을 돌아 한강으로 흘러들어간다. 옛날엔 물이 맑아

청계천(淸溪川)이라 불렀으나 지금은 온갖 오물과 폐수가 흘러들어

악취를 풍기는 물로 바뀌었다. 이 청계천이 6가를 지나 3·1고가도로

가 끝나는 지점부터 판자촌이 밀집돼 있었다. 양편 둑을 끼고 1만2천

여 세대, 6만 명에 이르는 주민들이 게딱지같이 다닥다닥 붙은 판잣

집에 살고 있었다. 글자 그대로 인간 이하의 조건에서 살고 있었다.

나는 고가도로가 끝나는 곳에서 시작해 하류로 내려갔다. 청계천 하

류를 지나 한양대학교 뒤편에 이르니 그곳은 판자촌 중에서도 최악의

수준이었다. 행정구역을 물으니 성동구 송정동 74번지라 했고, 이 번

지 내에만 무려 1천6백여 세대가 살고 있었다.

나는 그곳이 마음에 끌렸다. 마을에서 김종길(金終吉)이란 이름의 젊

은이를 만났다. 아내와 아들 세 식구의 가장이었다. 그는 판자촌에서

일하고 싶다는 내 말을 듣고는 쌍수를 들어 환영하며 송정동 판자촌

에서 일하자고 제의했다. 우리는 만난 첫날부터 의기투합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는 전남 장흥 출신으로 헌신적이고 의협심이 강하며 종교

심도 깊은 사람이었다. 그날부터 나는 송정동 74번지 내의 한 집 한

집을 방문하여 전도지를 주고 어떻게들 살고 있는지를 살피며 다녔

다.


병든 채 죽어가는 소년

그날은 1971년 8월6일이었다. 오후 2시경에 한 가정에 들어가 『여보

세요』 하고 몇 번을 불렀으나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문이 열려 있

고 문 앞에 신발이 놓여 있는데도 아무런 대답이 없기에 나는 방문

앞으로 다가가 방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러고 나서 그 자리에 선 채로 굳어 버렸다. 어둠침침한 방 한편에

병든 소년이 누워 있었다. 열두세 살쯤 됨직한 소년이었다. 내가 놀라

숨을 죽인 것은 그 소년의 모습이 너무나 끔찍했기 때문이었다. 몸은

젓가락같이 여위었는데 배는 올챙이처럼 불러 있었다. 배꼽 아래 한

치가 됨직한 곳에 구멍이 뚫려 그곳에서 고름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고름은 등줄기를 타고 내려 방바닥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런데 방바

닥에 고름이 흐르는 자리에 구더기가 열댓 마리나 굼실굼실 기고 있

었다. 구더기들은 고름을 좋아하는지 고름이 흘러내리는 등 밑으로

자꾸만 파고들었다.

충격을 받았지만 그런 모습을 보고 그냥 되돌아 나올 수 없었다. 방

안으로 들어서면서 소년에게 물었다.

『얘야, 너 왜 이러니?』

소년은 반응이 없었다. 눈동자가 움직이는 것으로 보아 살아 있음이

분명한데 아무런 반응을 나타내지 않았다. 나는 그를 찬찬히 살피는

동안에 창자가 뒤틀리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도대체 인간이 이렇게

비참해질 수 있을까? 움푹 팬 눈동자는 이미 죽음의 그림자가 깃들여

있는 듯 거뭇거뭇한 색을 띠고 있었다. 나는 빗자루와 걸레를 찾아

구더기들을 쓸어내고 방바닥을 걸레로 훔쳤다.

『지옥이 있다면 바로 이런 모습일 것이다』

나는 누군가에 대한 분노가 치밀었다. 왜 한 생명이 이토록 방치돼

있어야 할까? 누구의 죄로 이 어린 생명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

까? 나는 이 소년이 이렇게까지 된 것은 우리 모두의 죄 때문이란 생

각이 들었다. 어른들의 탐욕과 이기심으로 인하여 어린 생명이 지옥

에 떨어져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우리 모두가 제 자신만을 생각하고

이웃을 돌아보기를 게을리 했기에 이 어린이가 이런 처지에 이른 것

이라 여겨졌다. 나는 이 아이를 회복시키는 일에 전심전력을 다해야

겠다고 다짐했다. 결코 이 소년을 이대로 죽게 해서는 안된다고 다짐

했다.

누군가 오기를 기다렸다. 두 시간 정도 지난 후 40대 중반의 한 부인

이 들어왔다. 그녀는 나를 보더니 머뭇거리며 물었다.

『누구신지요?』

『저는 이 마을에 전도하러 왔던 길에 이 소년의 모습을 보고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누군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주머니

께서 이 아이의 어머니 되십니까?』

『예, 그렇습니다』

『아주머니, 얘가 왜 이렇게 되었지요?』

『아이고, 저 녀석이 이 에미를 못 잡아먹어서…. 자식이 아니라 웬수

요. 웬수! 저렇게 누워 죽지도 않고 살지도 않고 이 에미 속을 뒤집

어놓으니…』

『병원에 가서 진찰은 해보셨나요?』

『진찰이 다 뭡니까?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데…. 약국에 가서 옥도

정기하고 소독수 사다가 발라주고 있구먼요. 그라고 자식 병 고친다

고 남무호랭개교를 다니는데, 여섯 달 댕기면 병 낫는다더니 벌써 댕

긴지 일 년이 다 돼가는데 자식 병도 안 낫고 이젠 고만 다녀야 될랑

가 봐요』

『아주머니, 우리 힘을 합해 얘를 살립시다』


모금 운동

소년의 이름은 김학형이었고 나이는 12살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약해 자주 아팠으나 약국에서 약 사다먹고 침 맞으러 다녔지 병원에

는 못 가보았다고 했다. 지금은 아버지가 약국에서 옥도정기와 알코

올을 사다가 자주 소독해 주는 정도라고 했다. 고름을 하루에 한 종

지 정도씩 받아낸다고 했다. 그날 저녁에 나는 신학교 기숙사에서 동

급생들의 방문마다 두드리고 들어가 모금을 했다.

『전도사님들 주머니를 털어주세요. 죽을 사람 살리는 일에 써야 합

니다』

역시 신학생들이 달랐다. 모두들 기꺼이 모금에 응해주었다. 나는 다

음날 아침 수업에 들어가지 않고 택시를 하루 대절하여 송정동 74번

지로 갔다. 학형이의 손을 잡고 기도를 마치고 병원으로 데려갔다. 소

년의 아버지도 함께 갔다.

을지로 6가에 있는 중앙의료원으로 갔다. 무료진료의 혜택을 받고 싶

다고 했더니 사직공원 옆에 있는 시립아동병원으로 가서 절차를 밟아

이곳으로 오라고 했다. 시립아동병원으로 가서는 중앙의료원에서 보

내서 왔는데 무료치료의 절차를 밟게 해 달라고 하니 『생보자 증명

서를 해오세요』라고 말했다. 처음 듣는 말이라 다시 물었다.

『생보자 증명서란 게 뭡니까?』

『동사무소에 가면 해줍니다』

『동사무소 가면 누구든 해줍니까? 안해 주면 어쩝니까?』

의사는 인상을 팍 쓰면서 내뱉듯이 말했다.

『그러면 약국에 가서 약이나 사먹이시오』

나는 그렇게 도도하게 나오는 의사의 태도가 비위에 거슬려 한마디

하지 않으면 급성 심장병으로 쓰러질 것 같았다.

『젠장, 거 존 자리에 있을 때 좀 봐주소. 와 그리 딱딱거리요? 딱따

구리 삶아 묵었소?』

의사는 뱀눈을 하며 나를 째려보았다. 나는 돌아서서 나오며 의과대

학을 가지 않은 것을 처음으로 후회했다. 고등학생 시절 2년 가까이

무전여행을 다니다가 소록도에 가서 나병환자들의 모습을 보고 의사

가 돼 섬기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고는 머리를 빡빡 밀고 방

에 들어앉아 수험준비에 열중하였던 것은 전편에서 이미 말한 바 있

다. 그러나 병원 복도에서 맡은 약냄새에 질려 『어떻게 평생 이런

냄새를 맡으며 살 수 있겠는가』 생각하고 법과대학을 가서 판사가

되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그 길이 적성에도 맞고 출세도 빠를 것 같

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막상 대학에 입학 원서를 낼 때는 철학과로

결정했던 것이었다.

그날 나는 숨결조차 고르지 못한 학형이를 택시에 태우고는 이 병원

저 병원으로 서울시를 쏘다녔다. 끝내는 아무 소득도 없이 집으로 되

돌아오게 되었다. 나는 학형이와 그의 아버지에게 온종일 고생만 시

킨 것이 퍽이나 미안해서 진심으로 사과했다.

『오늘 제가 고생만 시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제 자식인데요. 우리보다 김선생님께서 고생하시고 비용

만 쓰셔서…』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저는 괜찮습니다만 소득 없이 집으로 오게

돼 죄송스럽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런데 생보자 증명서가 뭘 말하는

것일까요?』

『글쎄요. 동사무소에 가끔 가서 구호용 밀가루를 타서 먹는데 그걸

증명하는게 아닐까요?』

『아,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부로부터 구호받는 가정이라는 증명

서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학형이 아버님이 동사무소에 가셔서 한번

알아봐 주시겠습니까?』

이렇게 의논을 마치고 학형이를 방에 누인 뒤 신학교 기숙사로 돌아

왔다. 그날 저녁 나는 아차산으로 올라가 무덤 사이에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했다. 예수님께서 학형이 치료받을 길을 열어달라고 밤늦

도록 기도했다. 기도를 끝내고 일어서니 마음이 편안함이 느껴지고

모든 것이 잘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학형이 엄마의 이상한 기도법

다음날 아침 일찍 다시 학형이네 집으로 갔다. 학형이 아버지가 「생

활보호자 증명서」란 것을 떼어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셋

은 다시 시립아동병원으로 갔다. 병원으로 들어서며 「이렇게 다시

올 줄 알았으면 어제 그 의사에게 나쁜 말은 하지 말 것을…」 하는

후회가 생겼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얼굴 두껍게 시치미를 떼고 부딪쳐보는 수밖에 없다고 마음먹고 의사

에게로 갔다. 말없이 생보자 증명서를 들이밀었더니 그도 말없이 사

무직원을 불러 절차를 밟게 해주었다. 의사는 다시 욕을 먹을까 봐

신경이 쓰였던지 일처리를 서둘러주었다.

학형이는 척추 사진을 거듭 찍었다. 3일 후에 환자는 집에 두고 보호

자만 오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3일 후 학형이를 데리고 병원으로 갔

다. 의사의 진단은 척추결핵이라 했다. X-레이에 나타난 바로는 척추

셋은 아예 사라졌고, 척추 둘은 절반씩이나 망가져 있었다. 의사는 결

핵균이 그렇게 만든 것이라고 설명을 해주며 어떻게 이렇게 나빠질

때까지 그냥 있었느냐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진찰대에 누워 있

는 학형이의 손을 잡으며 의사에게 물었다.

『선생님 어떻게 하면 치료할 수 있겠습니까?』

『너무 심해서 손을 대기가 어렵겠는데요. 치료를 하려면 수술을 해

야 하는데 워낙 큰 수술이라서 피값만 해도 수만 원은 되겠어요. 척

추에서 상한 부분 다섯 마디를 들어내고 인조 뼈를 대신 넣어야 하는

데, 여간 어려운 수술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수술하지 않고는 치료가 어렵습니까?』

『증세가 워낙 좋지 않아서 수술 외에는 생각도 할 수 없는 형편입니

다. 잘 되면 더 이상 나빠지지 않는 선에서 한번 시도해볼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요』

『더 이상 나빠지지 않는다는 건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이지요?』

『심한 꼽추가 되는 상태라 할 수 있겠지요. 그것도 잘 될 경우고 지

금으로서는 생명을 건지기도 쉽지 않을 듯합니다』

의사는 그렇게 말했어도 나는 학형이가 꼽추도 되지 않고 죽지도 않

을 것이라는 믿음이 들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정성을 기

울이면 하나님의 돌보심이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나는 의사에게

부탁해 2~3개월분의 약을 받아왔다. 학형이를 데리고 집으로 온 나는

그를 방에 누이고는 차근차근 일러주었다.

『학형아, 너도 의사선생님이 하시는 말을 들었지? 너의 병은 척추에

폐병균이 들어가서 생긴 병이래. 척추 다섯 마디가 상해 있다는구나.

그래서 오늘부터 약을 먹어야 한다. 그런데 의사선생님의 말로는 약

만으로는 나아질 상태가 아니란 거야. 그러니 기도를 드려야 한다. 기

도를 드리면 하나님이 너를 도와주실 거다. 약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

니까 약을 먹으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기를 기도드리는 거야. 그

런데 너 기도드릴 줄을 아니?』

『전 기도는 해본 적이 없는 걸요』

『그래? 그렇다면 한글은 읽을 줄 아니?』

『예, 한글은 읽을 수 있어요』

나는 그의 공책에 기도문을 적어주었다.학형이는 착했다. 그 후로 한

끼도 거르지 않고 식사하고는 약을 먹었고, 약을 먹고는 기도문을 큰

소리로 읽었다. 그렇게 열흘 정도를 계속하니 눈에 생기가 도는 것

같았고 고름이 멈추었다. 그리고 식성이 좋아져 갔다.

우리는 희망을 품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20여 일 지나니 그의 얼굴에

불그레한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그쯤 되니 부모들도 목소리가 밝아

지고 아들을 돌보는 일에 열심을 내기 시작했다.

하루는 내가 신학교 수업을 마치고 송정동 그의 집을 찾아갔더니 학

형이 어머니가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기도란 것이 우스웠

다. 방 윗목에 상을 차려놓고 상 위에 냉수 한 그릇을 떠놓고는 양손

바닥을 비벼대고 있었다. 기도 내용 역시 가관이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늘님 비나이다 우리 학형이 병 고쳐주시어 건

강 부귀 장수토록 복 내려주시기를 비나이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지성

으로 비나이다』

이렇게 반복하여 기도드리고 있었다. 나는 놀랍기도 하고 우습기도

해 물었다.

『학형이 엄마, 지금 뭐하는 거예요?』

『예, 기도하지라요』

『그렇다면 그 물은 왜 떠놓았습니까?』

『아무것도 없응게 허전해서 물이라도 떠놓았구먼요』

『그러세요? 정 허전하시다면 제가 성경을 드릴 테니 앞으로는 물그

릇 대신에 상 위에 성경을 놓고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비나이다 비

나이다」 그렇게 하시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하는 건 산신령님에게

나 그렇게 하지 하나님께 기도드릴 땐 그렇게 비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학형이 어머니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학형이 어머니

는 그날부터 상 위에 성경을 놓고 격식에 맞게 기도를 드렸다. 나는

신학교 동급생들에게도 학형이를 위한 기도팀을 부탁했다.

또 결핵약이 위장 장애를 일으키기 쉽다는 말을 듣고는 「에비노제」

란 건위제(健胃劑)를 사다 먹이고 종합비타민과 철분을 구해 먹였다.

나는 신명이 나서 송정동 판자촌을 열심히 드나들며 학형이의 치료와

건강 회복을 위해 정성을 쏟았다.<다음호에 계속>

出서울記

학형이는 나의 청계천 빈민촌 선교사업에 있어 다리가 되어준 아이다.

학형이 얘기를 더 해보자. 집에서 약을 먹으면서 요양하고 있던 학형

이는 건강상태가 날로 좋아졌다. 하루는 그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선생님, 이제 약 그만 먹으면 안 될까요? 몸이 좋아졌으니까요』

『아냐. 예수님은 약을 열심히 먹으며 기도하는 사람을 도와주신단다.

약 먹지 않고 기도만 하면 게으르고 공짜만 바라는 사람이라고 해서

예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단다』

약의 양이 너무 많아 먹기에 힘들었던 모양이다. 나는 그가 회복돼 가

는 모습을 보며 큰 보람을 느꼈다. 얼마 후 그는 일어나 앉을 수 있게

까지 되었다.

그러나 의사는 수술하지 않으면 그 이상 나아지기 어렵다고 말했다.

수술 비용이 최소한 3백만원이고 수술 받은 후에는 1년 가까이 깁스를

한 채 침대에 누워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런 말을 들은 학형이 아버

지는 3백만원은커녕 30만원도 없다며 한숨만 쉴 따름이었다. 나는 희

망을 버리지 않았다. 틀림없이 길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백방으로

학형이가 수술받을 수 있는 길을 찾아다녔다.

그러던 중 미국 침례교 선교사인 민목사를 만나게 됐다. 학형이 이야

기를 했더니 부산침례병원에서 수술받을 수 있도록 주선해 보겠노라고

약속했다. 얼마 후 민선교사로부터 반가운 소식이 왔다. 부산침례병원

으로 아이를 데려가면 무료로 수술받을 수 있도록 조치가 되었으니 부

산으로 가라는 전갈이었다. 우리는 기쁨에 차 부산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부산침례병원에서 검진받은 결과 체력이 너무 떨어져 수술을

감당키 어려우니 체력을 길러 오라는 것이었다. 집으로 되돌아온 우리

는 체력을 높이는 일에 힘썼다. 그러나 이미 기적은 일어나고 있었다.

다만 우리가 모르고 있었을 뿐이었다.

부산에서 돌아온 후로 학형이의 건강은 하루가 다르게 좋아지더니 얼

마 후에는 골목길을 뛰어다닐 정도가 되었다. 나는 그가 뜀박질하는

것을 보면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그의 척추가 몹시 상해 있는 것을 사

진으로 보았던지라 뛰어다니다가 혹시 척추뼈가 내려앉기라도 하면 어

쩔까 하는 염려에서였다. 나는 그에게 걸을 때도 조심조심 걷는 것이

좋겠다고 당부했다. 그러나 당사자인 학형은 태연하게 말했다.

『이제 괜찮아요!』


# 기적은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 수업을 마치고 송정동 판자촌으로 학형이를 찾아

가던 길에 골목에서 그를 만났다. 자기 또래 아이와 씨름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나는 질겁하며 그를 불렀다.

『학형아. 너 정신 있니 없니? 어쩌려고 그렇게 허리에 힘을 쓰니? 너

조심없이 그렇게 하다간 허리가 결딴나―』

『선생님, 나 이제 괜찮아요. 정말 다 나았어요』

나는 학형이의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다음날 나는 그의 어머니와 함

께 시립아동병원으로 갔다. 그를 진찰하고 난 의사는 확실하게 말했다.

『이 아이는 이제 완치되었습니다. 그동안 고생 많았습니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 의사에게 물었다.

『아니 선생님, 얼마 전에는 수술하지 않으면 회복할 수 없다고 하셨

는데요? 갑자기 완치되었다고 하시니 잘 믿어지지가 않는군요?』

『그랬었지요. 그러나 그때는 그때의 판단이고 지금은 지금입니다. 의

학은 과학이라 현재의 과학적인 증거로 판단합니다』

『선생님, 혹시 오진이랄까, 잘못 판단하실 경우도 있지 않을까요? 다

른 사람의 X-ray사진을 잘못 보았다든가 하는 실수도 있지 않을까

요?』

『아니에요. 오늘 첫번째 온 환자라 사진이 바뀔 리 없습니다. 진단이

의심스러우면 다른 병원으로 가 보세요!』

그는 뚝 잘라 말하고는 다음 환자를 부르는 것이었다. 나는 무안을 당

했어도 조금도 섭섭하지 않았다. 학형이가 나았다는데 내 기분 상하는

것쯤이야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그때 학형이의 어머니와 내가 느낀 행복감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학형이 어머니는 얼굴이 상기된 채 내 손을 만지며 연방

『고맙습니다. 이 신세를 어떻게 갚지요』 하고 되풀이 말했다.

병원을 나온 나는 수중의 돈을 몽땅 털어 과자와 과일을 샀다. 마을로

돌아오자마자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얘들아, 예수님이 우리 학형이를 고쳐 주셨단다. 축하잔치를 할 테니

다들 모여라. 실컷 먹고 놀자!』

빈민촌 아이들을 몽땅 모아 잔치판을 벌였다. 그뒤로 내가 그 마을에

가면 마을 노인들이 나를 보며 말하곤 했다.

『저 어른이 김 아무개네 아들 꼽추병 고친 선생이야. 저 어른께 이

동네에 예배당 세워달래세. 이 사람들아 동리에 예배당이 세워지면 손

주 녀석들 교육에 좀 좋겠는가』

노인들만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젊은 아낙네들도 말했다.

『선생님예, 이 동네에 예배당 언제 서는기라예? 예배당 서면 애기 아

빠하고 예배당 댕기기로 했심더』

이런 말을 자주 듣게 되자 나는 생각하게 되었다.

「혹시 이 빈민촌에 교회를 세우고 마을 주민들을 돌보라는 예수님의

명령이 아닐까?」

이런 생각들은 확신으로 바뀌었고 확신은 실천으로 옮겨졌다. 그렇게

해서 빈민선교가 시작되었고 활빈교회(活貧敎會)가 탄생하게 되었다.

학형이가 빈민선교에 다리를 놓은 셈이었다.

그가 나로 하여금 평생을 투자할 길을 가르쳐 주었기에 나에게는 그

누구보다 소중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말하자면 사명감을 깨닫게 하

여 준 은인(恩人)이 되었다.


# 예수가 서울에 온다면? #

서울시 성동구 송정동 74번지 내에 살고 있던 1천6백여 세대는 거의가

피폐해진 농촌을 떠나 무작정 상경한 이농민(離農民)들이었다. 그들은

농촌을 등지고 서울에 올라올 때 지게꾼 노릇이라도 하겠다는 마음이

었으나, 지게꾼 일을 용달차에다 빼앗기고 일자리를 얻지 못한 채 극

심한 가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일터를 찾지 못한 그들은 대낮에도 모여 화툿장을 뒤적이거나 값싼 술

에 취하여 해롱거리고 있었다. 부인과 아이들이 품팔이를 나가거나 구

멍가게 같은 공장에서 몇푼씩 벌어오는 돈으로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터였다. 나는 청계천 둑 위를 걸으며 상상했다.

「지금 예수님께서 서울에 오신다면 어느 곳부터 방문하실까? 분명히

예수님은 세종로나 명동 같은 곳은 찾지 않으실 것이다. 이 악취나는

청계천을 찾으실 것이다. 예수님은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이 둑길을 걸

으실 것이다」

이런 생각에 미치자 나는 확신이 들었다.

「이 마을에 교회를 세우고 마을 사람들과 함께 살자. 그것이 예수님

이 기뻐하시는 일이다. 빈민선교에 내 인생을 걸어보자. 하나님의 뜻이

다」

이렇게 마음이 정해지자 가까이 지내는 신학교 동급생들에게 말했다.

청계천 빈민촌에 들어가 교회를 세우고 빈민들과 함께 살겠다는 나의

포부에 그들의 반응은 가지각색이었다.

어떤 친구는 신학생 시절은 공부를 열심히 하고 졸업 후에 일을 하는

것이 좋을 거라는 충고를 했고, 어떤 친구는 빈민선교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선교도 효율성을 생각해야 하는 것이니 대학생 선교나

지식인들에게 선교하는 것이 민족복음화에 더 효과적이지 않겠느냐는

의견을 말했다. 또 어떤 친구는 『김형 같은 사람은 신학을 학문적으

로 깊이 파고들어 학자로서 한국교회에 기여해야 한다』고 권하기도

했다. 그런 중에도 『김형, 훌륭한 결단이오. 빈민선교는 한국교회가

가장 소홀히 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김형이 고양이목에 방울을 다는

심정으로 헌신하기 바랍니다』하고 격려해주는 동급생도 있었다.


# 주인과 머슴론 #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묵상 시간에 「이사야서」 61장을 읽다가 큰 감

명을 받았다. 그리고 이 말씀이야말로 빈민선교에 헌신하라는 예수님

의 명령이라 여겨졌다.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

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

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

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

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이사야서 61장 1,2절)

여호와의 신, 즉 성령이 내게 임하신 것은 가난한 자들에게 아름다운

소식, 즉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이다. 빈민선교에서 사명이다. 나의 사

명은 빈민촌에 들어가 마음 상한 자의 상한 마음을 고치는 일이요, 가

난에 포로된 자들을 가난에서 해방시키는 일이요, 질병에 갇힌 자들을

질병에서 놓임 받게 하는 일이다. 희망의 소식을 전하고 그들의 한(恨)

을 풀어주는 일이다. 그래서 빈민촌에서 가난한 이웃들과 함께 살면서

가난하기에 슬픈 삶을 위로하며 함께 울고 함께 웃는 삶, 그것이 빈민

선교다. 그 일에 내 삶을 통째로 걸라고 명령하심을 느꼈다. 한 동급생

이 내게 물었다.

『김형, 빈민촌에 들어가 빈민선교를 시작하는 일에 재정적인 뒷받침

을 받을 대책은 마련되었나요?』

『난 아직 그런 일은 생각도 안 해봤는데요』

『의욕만 가지고 맨주먹으로 시작할 일이 아닙니다. 큰 교회로부터 재

정지원을 약속받거나 재력 있는 독지가의 지원 약속을 확보하고 난 뒤

시작해야지 빈손으로 시작했다가 중도에 지치게 되면 시작하지 않음만

못하게 되는 게 아닐까요?』

타당한 말이었다. 그 문제에 대해 나는 3일 기간을 정하여 기도하면서

곰곰이 생각했다. 그리고는 결론을 내렸다. 결론이래야 단순했지만 중

요한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 내가 30년 가

까이 지켜오고 있는 내용이 되었다. 말하자면 철두철미 예수님의 머슴

이 되자는 것이었다.

머슴은 신명을 바쳐 주인의 일만 하고, 그렇게 일하는 머슴이 필요한

모든 것은 주인이 뒷감당하는 것이다. 그와 같이 나는 주인 되신 예수

님의 일만 열심히 하면 나에게 필요한 재정적인 면은 예수님이 알아서

뒷바라지해 주실 것이라는 결론이었다.

나는 어린 시절을 경북 청송의 두메산골에서 자랐다. 내가 살던 외가

에는 큰 농장이 있었고 머슴이 셋이나 있었다. 나는 외할머니께서 머

슴들에게 일 시키던 방법을 생각했다. 머슴들은 아침에 일 나갈 때면

외할머니께 와서 어느 일터로 나간다고 일러만 주고 가면 됐다. 그러

면 외할머니는 알았다는 뜻으로 고개만 끄덕이시고는 시간에 맞추어

참 때는 참, 점심 때는 점심을 정확하게 보내주셨다. 나도 가끔 일터에

나가 있는 머슴에게 식사를 나르는 심부름을 하곤 했다. 머슴은 자신

이 할 일만 열심히 하였지 의식주 문제는 주인에게 완전히 맡기고 살

았다. 어린 시절에 익히 보았던 주인과 머슴의 관계를 생각하고는 나

도 예수님의 일을 시작함에 그런 관계로 임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빈민촌에서 예수님의 머슴으로 일을 시작하는 데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은 재정적인 뒷받침이나 후원자를 염려할 것이 아니라 일 자체였다.

나는 아무런 거리낌없이 맨몸으로 부딪쳐 나가기로 작정했다.

나는 틈나는 대로 청계천 판자촌을 찾아가 골목골목을 누비며 생각했

다. 이곳에서 교회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교

회를 시작한다면 어떤 원칙으로 어떤 교회를 세워야 할까를 찬찬히 생

각했다. 그 결과 먼저 주민들과 친해지는 일부터 시작해 교회가 세워

지더라도 마을 주민들의 요청에 의한 방식으로 접근해야겠다고 마음먹

었다.

그래서 먼저 60세 이상 노인들을 초청하여 노인잔치를 열었다. 마을

앞 널찍한 공터에 잔치판을 벌려놓고 노인들에게 국밥과 담배 한갑씩

을 돌리고 나서는 막걸리 몇 말을 받아 분위기를 흥겹게 돋우었다. 분

위기가 한참 좋아질 때 노인들에게 나를 소개하면서 『이 마을에서 여

러 어른들을 모시고 예배당을 세우고 싶으니 어르신네들의 도움을 바

란다』고 말했다. 이어 학형이 아버지 김인옥씨의 찬조연설이 있었다.

『이 선생으로 말할 것 같으면 우리 아들 꼽추병을 고친 선생이신데,

말하자면 하늘이 낸 사람이외다. 이 어른이 믿자는 것이면 무엇이든

따라 믿어도 손해볼 것은 없을 터잉게 우리 마을에서 받들어 모십시

다. 여러분들이 내 말에 찬성하신다면 박수로 호응해 주시라요』

그의 말이 끝나자 마을 노인들은 박수로 호응했다. 그때쯤 되니 장내

분위기는 무르익고 모두들 즐거운지 노랫가락이 나오고 노인들은 덩실

덩실 춤을 추며 놀았다. 그 뒤로 마을 분위기가 좋은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잔치에 왔던 노인들이 나를 지지하고 선전하는 대변인이 된

덕분이었다. 노인들은 골목골목에서 열을 올려 말했다.

『김아무개네 아들 병 고친 사람이 예배당 선생이라는구먼. 그 사람

된사람이야. 인사성 밝고 어른 모실 줄 아는 사람이드랑게. 이 마을에

예배당 세우자고 권해야 쓰겄어. 이 사람들아, 마을에 예배당이 들어서

면 손주녀석들 교육에 을매나 도움이 크겄는가. 옛날 서당서 가르쳤던

공자님 도리나 요즘 예배당서 가르치는 예수님 도리나 근본은 다 좋은

기여. 사람다운 사람 되라는 도리닝게 우리가 밀어줘야 되는 기여』

마을 노인들의 분위기가 이렇게 흘러가자 다음으로 어린이들에게 공작

(?)을 펴기 시작했다. 주머니마다 알사탕을 가득히 채우고는 골목골목

을 다니며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만나는 아이들마다 사탕을 나눠주며

친구들을 불러오너라, 재미있는 동화를 들려주겠노라고 일렀다.

그러면 잠깐 사이에 2백여 명의 아이들이 모였다. 나는 아이들에게

『장발장』 동화를 들려주고는 헤어질 때 일러주곤 했다. 내 이름은

김진홍이고 이 마을에 예배당을 세우려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런 뒤

로 마을에 가면 골목이 비좁게 아이들이 따르며 물어왔다.

『김진홍 선생님, 예배당 언제 열어요?』

아이들과 친해지면 그들의 부모들과도 자연히 친해지게 마련이다. 아

이들의 부모들이 골목길에서 내게 물었다.

『선생님이 마을에 예배당 세운다는 분이신가요? 우리 애들이 예배당

서면 재미있는 동화 듣게 된다고 기다리고 있던데…』


# 아내와 함께 청계천으로 #

나는 이어 마을 젊은이들에게로 방향을 돌렸다. 마을에서 말깨나 하고

힘깨나 쓴다는 젊은이들을 찾아다니며 인사를 나누었다. 내가 이 마을

에 들어와 하고 싶은 일의 내용들을 솔직히 이야기하고 협력을 부탁했

다. 거친 사람들일수록 내면은 순진한 데가 있는지라 일 대 일로 찾아

가 도움을 요청하니 힘은 없지만 돕겠다고들 했다. 물론 개중에는 빈

정거리는 젊은이들도 있었다.

『예수 선생, 잘 해보쇼. 술이나 자주 받아주시라요. 난 매사에 술이라

면 OK요』

나는 그런 반응에도 개의치 않고 시원시원하게 말했다.

『고맙습니다. 예수만 믿으시겠다면 술 사드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쥐약이라도 사드리겠습니다』

마지막 남은 문제는 아내를 설득하는 일이었다. 이미 아들 동혁이가

태어난 뒤라 아들을 데리고 빈민촌으로 들어가 살자고 권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내는 출신부터가 빈민촌에 적합지 않았다. 가정부가 셋이나 있는 부

잣집에서 자라 이화여대를 졸업한 여자다. 그런 그녀가 빈민촌에 들어

가 적응할 수 있을지 큰 고민거리였다. 더욱이 아들 동혁이가 빈민촌

에서 건강을 해치지나 않을지 염려도 되었다. 이런 갈등을 겪으며 아

내에게 빈민촌에 들어가 일할 계획을 말했더니 아내는 말했다.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고 당신의 뜻이 그렇다면 같이 들어가 살

겠어요』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소. 그러나 당신과 아들에게 지나친 희생을 강

요하는 것만 같아 심히 부담스럽구려』

『그렇다고 우리는 밖에 살고 당신만 빈민촌에 들어가 사는 식으로 일

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고민하는 것이오. 내가 결혼하기 전에 빈민선교를 하겠다고

생각했더라면 혼자 몸으로 빈민촌에 들어갈 수 있었을 터인데…』

『아니지요. 나도 동혁이도 예수님의 일에 함께 동참하게 되는 일이니

까 너무 부담 가지지 마세요』

이런 대화를 거쳐 빈민촌으로 함께 들어가기로 합의한 우리 부부는 푼

푼이 모아두었던 30만원 전부를 빈민촌에 투자하기로 했다. 언젠가 때

가 되면 대한민국에서 제일 좋은 일에 쓰자고 모아두었던 돈이다.

그 돈으로 방이 세 개 있는 판잣집 한 채를 14만5천원에 구입해 내부

를 수리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방 두 칸은 교회로 쓰기로 하고 한 칸

은 살림방으로 쓰기로 했다. 집을 구입하는 일은 학형이 아버지 김인

옥 씨가 맡아주었고 집 수리하는 일은 김종길씨가 앞장서 주었다.


# 평생 일꾼들을 만나다 #

그렇게 일이 진행돼가는 중에 좋은 일꾼 한 명이 오게 되었다. 내가

대구 근교의 경산 메노나이트 학교에서 성경교사로 있을 때 가르쳤던

김영준 군이 소문을 듣고 찾아와 빈민선교에 합류하겠노라고 했다. 키

는 자그마하나 신중하고 진실하고 다부진데다 유능한 젊은이였다. 그

래서 나와 김종길 김인옥 김영준 합하여 4김씨가 팀을 이뤄 교회창립

을 서두르게 되었다.

김인옥 씨는 온 마을을 주름잡고 다니며 김진홍 선생이 세울 교회 이

야기를 열심히 퍼뜨렸다. 워낙 열심히 하니 어떤 주민은 『저 양반 하

루 일당 얼마를 받기에 저렇게도 선전하고 다니는 게야』 하고 빈정거

릴 정도였다.

학형이 아버지 김인옥 씨는 일제시대 만주에서 마적단에 있다가 후에

독립군에 가담했던 분이다. 해방 이후 조병옥 박사 밑에서 정치활동에

도 가담했었지만, 그 후로 몰락해 빈민촌으로 흘러들어오게 된 것이다.

몸이 날쌔고 정의감이 깊은 어른이었다. 그는 자기가 젊은 날 교회생

활에서 겪은 경험담을 일러주면서 앞으로 조심하라고 일러주었다.

그가 겪은 사연은 이렇다. 6·25전쟁 이후 그는 어느 성결교회에서 신

앙생활을 충실히 하고 있었다. 전쟁 후였던지라 미국에서 보내오는 구

호물자가 교회로 많이 들어왔다. 구호물자가 들어올 때마다 목사는 좋

은 것을 골라 사택에 갖다 주라고 자기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사택으

로 가져가면 목사의 부인과 자녀들이 골라서 입고 신고 하였다. 그러

기를 거듭하니 옳지 않게 여겨져 목사에게 그러지 말라고 충고했는데

목사는 오히려 제사장에게 대적한다고 나무라기에 목사의 인격에 환멸

을 느껴 교회를 떠나버렸다고 했다.

그렇게 교회를 떠난 후로 이래저래 신앙생활에서 멀어졌다. 화툿장도

만지고 술잔을 들이키며 세상 물결에 휩쓸려 떠돌다가 오늘에까지 이

르렀다고 했다. 김인옥 씨의 말로는 자기가 이 지경이 된 데는 그 목

사의 책임도 있다는 결론이었다. 그러니 김선생도 앞으로 전도 일을

하려면 사심(私心)을 버려야 한다고 거듭 충고했다. 사심을 품은 지도

자들은 본인이 잘못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추종자들까지 병들게 한다

는 사실을 몇 번씩이나 강조했다.

나는 그의 말을 듣고 앞으로 물질만큼은 깨끗하고 담백히 해야겠다고

다짐하고 청빈(淸貧)을 인생신조로 삼기로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빈민

선교에 대한 사명의식이 깊어지는 만큼 보람도 커져갔다. 이런 일에

부름을 받아 몸을 바치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감격스러웠다.

교회는 지난 2천년 세월 동안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해 숱한 피를

흘리며 자라왔다. 그러한 역사가 이 땅 한반도에 시작된 지 1백년 만

에 한국교회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성장했다. 그러나 한국교회 내

부에 문제가 생겼다. 선교 초기에는 바닥 사람들인 민초(民草)들 속에

서 자라기 시작했던 교회가 시간이 흐르는 사이에 중상층 이상의 교회

소위 「부르주아 교회」로 탈바꿈했다. 그리하여 우리 사회의 다수를

이루고 있는 기층민(基層民)들인 빈민 노동자 농민들은 교회에서 소외

당하는 처지에 이르렀다.

빈민촌 주민들 중에서 이전에 교회를 다니다가 그만둔 분들이 꽤 있었

다. 그들에 의하면 자기들같이 가난한 사람들은 교회에 나가면 그 분

위기에 적응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일주일 내내 노동판에서 일하다가

주일을 맞아 교회에 가면 교회 분위기가 너무 깨끗하고 고상하여 앉아

있기가 불편하고 마치 못 올 곳에 온 사람만 같아 그만 나와버렸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듣는 중에 마음속에서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그들 속으로 들어가야 되는 것이 아니

라 교회 자체의 존립을 위해 가난한 사람들에게로 들어가야 한다」

도대체가 교회당 건물 짓기에 엄청난 예산을 투자하고 있는 교회 지도

자들의 의식구조가 한심하다. 그 예산을 백성들 돌보는 일에 쓴다면

겨레 사정이 얼마나 달라질 것인가!

본래 건물을 요란스레 짓고 장식을 화려하게 꾸미는 것은 바알종교였

다. 야웨 하나님의 종교는 건물이 아니라 민중의 삶에 관심을 기울여

왔다.

서울 시내 교회들이 건축과 관리에 들이는 정성과 예산의 절반이라도

빈민과 노동자를 위한 사업에 투자한다면 한국 사회는 큰 발전을 이룰

수 있을 것이고, 아울러 한국교회도 획기적인 성장을 이룩하게 될 것

이다.

우리는 청계천 빈민촌에 교회를 세우는 데에 필요한 것들을 하나씩 갖

추어 나갔다. 이제는 세워질 교회의 이름을 무엇으로 정할 것인지에까

지 이르렀다. 우리들의 신학적, 사상적 발상에 적합하면서도 빈민촌 현

장에 걸맞은 교회 이름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고심하던 끝에 현상 모집하기로 했다. 당선작에는 22kg 밀가루 한 포

를 상품으로 걸었다. 이런 내용을 적어 마을 곳곳에 방을 붙였다. 교회

이름 짓는 일부터 주민들의 관심과 참여를 끌어내려는 아이디어였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여러 가지 이름이 주민들로부터 제안되었다. 이

름을 제안한 당사자는 회중 앞에서 그 뜻을 설명키로 했다. 설명회가

열리던 날 많은 주민들이 모여 제안자의 설명을 듣고 난 후 투표를 했

다. 이 과정에서 일등으로 뽑힌 이름이 「활빈교회(活貧敎會)」였다.

제안자는 열을 내 그 뜻을 설명했다.

『여러분, 「홍길동전」 소설에 나오는 활빈당(活貧黨)을 아시지요. 우

리가 그 활빈당의 전통을 이어나가는 교회가 되자 이겁니다. 물론 활

빈당 당수 홍길동은 도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보통 도적이 아니라 의적

(義賊)이었습니다. 부잣집 곳간에서 썩어가는 양식을 털어다가 굶주리

는 백성들에게 나누어준 의적이었습니다. 우리가 홍길동처럼 도적이

되자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희

망을 주고 가난한 사람들의 한(恨)을 풀어주는 교회를 이루자는 뜻입

니다. 즉 활빈당 홍길동 장군의 정신과 방법을 따라 세워지는 활빈교

회가 아니라 예수님의 정신과 방법으로 세워지는 활빈교회!, 이것이

저의 제안입니다』

제안자가 여기까지 이야기하자 회중들 속에서 『옳소!』 『계속하시

오!』 하고 좋은 반응이 나왔다. 그는 그날 모였던 회중들로부터 가장

많은 박수를 받았고 투표 결과 절대다수의 지지를 받았다. 그래서 그

가 밀가루 한 포를 상품으로 차지하였고 교회 이름은 활빈교회로 정해

졌다.

일단 이름이 그렇게 정해지자 그 이름에 성서적이고도 신학적인 의미

를 더하는 작업을 했다. 그리하여 온 회중이 활빈교회란 이름에 담긴

신앙적인 뜻을 확실히 터득하게끔 힘썼다.

『홍길동전』에 나오는 활빈당이란 이름은 수난의 우리 역사 속에서

백성들의 핏속에, 뼛속에 흐르던 이름이었다. 일제시대에도 일본 제국

주의자들의 수탈에 대한 농민들의 저항운동이 있었다. 그 단체의 이름

도 활빈당이었다. 호남지방을 중심으로 일어난 이 농민저항운동은 양

반들이나 지식인들이 끼이지 않았던 순수한 농민들만의 운동이었다.

활빈교회는 조상들의 이러한 얼을 이어받아 성서적인 방법으로, 그리

고 그리스도의 사랑운동으로 교회를 일으키자는 뜻을 굳혔다.

물론 기독교 신앙은 예수를 믿음으로써 영혼이 구원받고 죽어서는 천

국 가는 신앙이다. 그런 신앙고백을 빼버린다면 기독교가 설 자리가

없어진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러서도 안 된다. 죽어서 천국 가기 전에

이 땅에서부터 사람답게 사는 신앙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 땅에

서는 빈곤 속에서 인간다움을 누리지도 못한 채 살다가 죽은 영혼이

천국에 간다고 할 때 그 천국이 제대로 된 천국일 수 없는 것이다. 그

래서 이 땅에서부터 가난을 극복하고 인간다움을 누리며 천국생활을

누리기 시작하자고 강조했다. 이것이 활빈신앙이라고 설명했다.

가난에 찌들어 기를 펴지 못하고 살고 있던 빈민촌 주민들에게 이런

설명은 쉽게 그들의 가슴에 닿았고 공감대를 이루었다. 그런 공감대는

어렵지 않게 교회가 마을의 중심에 뿌리박는 계기가 됐다.

우리는 먼저 기도모임부터 시작했다. 활빈교회가 이 사회의 경제적 불

균형, 사회적 불평등, 정치적 부자유 등을 진리의 힘으로 바로잡아 나

가는 일에 쓰이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우리 개개인들에게 구원의 삶을

주신 예수께서 사회도 구원해 주시고 민족도 새롭게 해주시기를 기도

했다.

# 우여곡절 끝에 세워진 교회 #

교회 이름이 정해지고 교회당으로 쓰일 판잣집 수리도 마무리되자 10

월 첫 주일에 창립예배를 드리기로 일정을 정했다. 마침 71년 10월3일

개천절이 주일이어서 안성맞춤이었다. 글자 그대로 하늘이 열려 겨레

의 역사가 시작된 개천절(開天節)에 활빈교회가 시작된다는 것이 더욱

뜻깊었다.

그러나 호사다마일까, 뜻하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9월29일에 서울시청

철거반이 들이닥쳐 교회당이 될 집을 헐어버린 것이다. 철거반은 무허

가 판잣집의 경우 우선 살게는 해주지만 비가 새거나 문짝이 떨어져도

수리하지 못하도록 단속하고 있었다. 그런데 판잣집을 교회당으로 개

조한다고 보름이 넘도록 뜯고 고치고 소란을 떨었으니 철거반이 오지

않을 리 없었다. 나는 아찔했다. 허물어지는 벽을 바라보며 예수님께

기도했다.

『예수님 다시 시작할 용기를 주십시오. 앞으로 교회가 자리잡아 나가

려면 온갖 어려움이 닥칠 것으로 생각됩니다. 첫판부터 낙심하여 물러

서지 않도록 힘을 주십시오』

교회당 건물은 무너졌지만 전화위복으로 좋은 일도 일어났다. 그간에

주민들에게 뿌려놓았던 씨앗들이 열매를 맺어, 주민들이 너도 나도 교

회당 복구에 나섰다. 밤낮으로 복구작업을 서둘렀더니 창립예배에는

지장이 없을 만큼 되었다.

겨우 한시름 놓고 이제 마무리 작업을 하려는데 이 또 무슨 날벼락인

가? 쌓아놓은 벽 한쪽이 제풀에 무너져 내렸다. 공사를 서두르느라 시

멘트가 굳기 전에 높이 쌓아올린 까닭이었다. 우리는 다시 시멘트 모

래 블록을 날라다 쌓아올렸다. 나도 질통을 메고 모래를 져 나르고 삽

질을 하느라 손바닥에 피가 나고 어깨가 부어오르고 잠이 밀려와 어디

에나 앉으면 졸곤 했다.

10월2일 밤 늦게까지 일하여 지붕과 벽의 뼈대만 세운 후 우리는 잠에

골아 떨어졌다. 그만하면 창립예배를 드리기에는 지장이 없을 것 같아

서였다.

1971년 10월3일 3시에 활빈교회는 드디어 창립예배를 드렸다. 비록 창

문도 달지 못했고 바닥이래야 흙바닥에 가마니를 깐 것이었지만 우리

는 흥겹기만 했다. 사과 궤짝 둘을 구해다 강대상으로 삼고 흰종이로

덮었다. 창립예배에서 나는 활빈교회를 창립하는 목적으로 다섯 가지

를 설명했다. 그것은 부귀한 자들만을 위한 교회가 아니라 가지지 못

한 자들(Have-not class)의 교회, 지역사회 문제를 온몸으로 치유하는

교회,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 한국인의 심성과 체질에 응하는 민족복음

화의 교회, 마지막으로 사회정의를 실천하는 교회였다. 그때 내 나이

30세였다. 27년이 지난 지금 읽어도 이 다섯 가지 내용은 가슴에 와닿

는다.

청계천 판자촌에 세워진 활빈교회가 그 설립 목적을 달성해 나가려면

먼저 선교지역 안의 문제들을 자세히 파악하고 그 해결책을 찾아나가

야 했다. 작게는 주민 개개인의 문제에서부터 시작해 각 가정의 문제

들 그리고 지역사회 전체의 문제들까지 샅샅이 뒤지며 찾아내는 일로

우리들의 선교 사역은 시작되었다.

나는 판자촌 안의 한집 한집을 차례로 방문하여 인사를 나누면서 그들

과 대화의 문을 열어 나가기 시작했다. 대화를 통하여 그들과 인간관

계를 다지고 그 가정이 지닌 문제들을 찾아나갔다. 그리고 그렇게 해

서 찾은 문제들을 해결하는 일에 전심전력함으로써 주민들의 신뢰를

쌓았다. 마지막에는 그 신뢰를 바탕으로 선교활동을 펼쳐나갔다.

이런 과정을 나는 「DDT작전」이라고 이름붙였다. DDT란 Door to

Door Tackle Operation의 머리글자를 딴 말이다. 나는 빈민촌 주민들

의 품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해 나갈 때 축구경기를 염두에 두고 있었

다.

축구장에서 상대편 공격진이 몰고 들어오는 볼을 과감한 태클로 물리

치듯이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임한다는 생각이었

다. 그래서 「태클 작전(Tackle Operation)」이다. 또 빈민촌 각 가정

에 차례로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 태클작전으로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

기에 「문에서 문으로(Door to Door)」라는 의미를 붙였다.

원래 DDT란 채소밭에서 해충을 몰아낼 때에 쓰는 약의 이름이다. 농

부가 DDT로 해충을 몰아내듯 활빈교회는 DDT작전으로 빈민촌 각

가정을 괴롭히는 문제들을 추방하자는 것이다.

이 DDT작전이란 말과 함께 내가 발전시킨 또 하나의 말이 「TLC 요

법」이다. TLC란 Tender Loving Care Therapy의 머리글자다. 빈민촌

에서 한 사람 한 사람, 한 가정 한 가정을 대할 때에 그들이 지닌 아

픔과 상처들을 부드러운 사랑의 보살핌으로 치료한다는 뜻에서 만든

말이다.

빈민촌 주민 중에는 성장과정이나 사회생활에서 사랑과 인정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지내온 사람들이 많았다. 말하자면 「사랑 결핍증」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사람들은 비타민이 부족할 때 생기는 비타민 결핍증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으면서도 사랑이 결핍될 때 생기는 병인 사랑결핍에 대해서는

무지하다. 빈민촌 주민들은 어린 시절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지나친

사랑 결핍으로 인해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 사랑 결핍증

환자들은 누군가 넉넉한 사랑을 베풀고 극진한 관심을 기울여줄 때에

치유된다. TLC요법은 바로 예수께서 시범을 보이셨던, 사랑 결핍증에

대한 치료법이다.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건강한 사람들을 위하여 온 것이 아니라 상한 마음을 고치러

왔다』

예수는 로마제국의 식민지배에서 억눌려 살아가는 유대 백성들의 상한

마음, 깨진 마음들을 싸매주고 치료해 주는 일에 온 정성을 쏟으셨다.

그러한 예수의 발자취를 따라 교회는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상한

심령들을 돌보는 일에 헌신해야 한다. 그래서 TLC Therapy이다.

TLC요법이 어찌 빈민촌 주민들에게만 필요하겠는가? 현대인은 모두

사랑 결핍증에 시달리고 있는 환자들이다. 그래서 TLC요법은 인간이

살아가는 모든 곳에 꼭 있어야 하는 치료법이다.

나는 예수가 인간 영혼의 상처를 치료함에 TLC요법을 사용하셨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빈민촌에서 한 가정 한 가정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

TLC요법을 실천키로 한 것이다.

빈민촌 판잣집 구조는 담장도 대문도 없이 간단하다. 문을 열고 들어

가면 부엌이 있고 부엌에 들어서면 바로 방문이 있다. 방문을 열고 들

어가면 3~4평 좁은 방에 6~7명의 식구들이 살고 있다. 비가 새거나 연

탄가스가 스며들거나 습기가 차거나 통풍이 안 되는 등 문제가 쌓인

방들이다.

나는 그 문들을 두드리고 다니면서 각 가정에 접근했다. 주민들과 만

나는 횟수가 늘어나면서 각 가정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을 찾아냈다.

그 문제들을 세 가지로 분류했다.

첫째는 그 가정 자체만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 둘째는 그

가정만의 힘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워 교회와 힘을 합하여 해결해 나가

야 할 문제들, 셋째는 그 가정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고 교

회나 외부의 도움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었다.

이렇게 문제들을 분류한 후, 먼저 그 가정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첫번째 부류의 문제들부터 풀 수 있도록 격려했다. 첫번째 문제들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해결돼 나가면, 그 가정과 교회가 공동의 노력으로

해결해 나갈 두번째 문제들에 도전했다. 끝으로 그 가정으로서는 해결

할 엄두를 낼 수 없는 세번째 문제들은 활빈교회 선교팀이 발벗고 나

섰다.

# 『큰형님은 예수, 둘째 형님은 김진홍!』#

활빈교회가 창립된 지 세번째 맞는 주일이었다. 예배가 중반쯤 진행되

었을 때 느닷없이 소주병이 날아들어와 교회 벽에 부딪히더니 유리조

각이 사방으로 튀었다. 술 냄새가 코를 찌르면서 문이 열리더니 마을

불량배 여섯 명이 교회당 안으로 들어섰다.

『왜 동네 시끄럽게 노랠 부르고 야단이야. 내 동네 와서 예배당 영업

을 하려면 이 몸에게 신고를 먼저 해야 되는 것이제』

그들 중에 리더격인 자가 험상궂은 기세로 말했다. 그 분위기에 눌려

슬슬 나가버리는 교인들도 있었다. 나는 할 수 있는 한 정중히 대했다.

왕년에 주먹깨나 썼던 김종길 씨는 『이 새끼들, 여기가 어디라고 이

러는 거야』 하고 주먹으로 해결하려고 나섰다. 나는 그를 만류하며

그들을 조용히 대했다. 얼만가를 실랑이를 벌이다가 리더격인 자가

『야, 이쯤 했으니 가자. 앞으로는 알아서들 기겄제』 하면서 앞장서서

나가자 나머지가 뒤따라 나갔다.

나는 그날 저녁 이슥한 시간에 소주 한 병과 오징어 한 마리를 사들고

는 『이쯤 했으니 가자』고 말하던 젊은이의 집을 찾아갔다. 그는 자

고 있었다. 가족들에게 그를 깨워달래서 마주 앉았다. 그런 사람들일수

록 일대 일로 마주 앉으면 약하고 순한 데가 있는 법이다. 나는 오징

어를 구워달래서 소주잔을 마주 들고 그와 진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예수를 「왕초」로 모시기 전에 어떻게 방황하며 고민하였는지,

지금 믿고 따르는 예수가 어떤 멋쟁이인지, 그 예수가 당신을 어떻게

돕고 싶어하는지, 내가 이 마을에 무슨 생각을 품고 들어왔는지 등을

차근차근 이야기했다. 내 이야기가 끝나자 그는 의외로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성님, 오늘부터 성님으로 모시겠심더. 나를 동생으로 받아주시겄지

요? 성님, 나도 그런 예수라면 믿고 따를깁니더』

『고맙네, 동생. 그 말 들으니 내가 이렇게나 기쁜데 예수 형님은 얼마

나 더 기뻐하시겠는가』

이런 대화가 오고 간 후에 그는 엉뚱하게도 면도날을 찾았다. 예수를

큰형님으로, 김진홍을 작은형님으로 모시고 인생을 새출발하는 뜻으로

혈서(血書)를 쓰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피 흘리는 문제라면 예수가 십

자가에서 이미 다 흘려놓았으니 더 흘릴 것 없다고 설명하고는 마음으

로만 굳게 다짐하라고 타일렀다.

그는 그렇다면 혈서는 안 쓰더라도 각서(覺書)를 쓰겠다고 했다. 나는

무슨 내용을 쓰겠다는 것인지 궁금하기도 해서 그렇게 하라고 했더니,

그는 담뱃갑 안에 든 은박지 종이를 펴서 각서란 걸 썼다.

각서

나는 이 시간부터 예수 믿고 예수를 나의 평생 왕초로 모실 것을 맹세

함.

1971년 10월 ○일 ○○○

나는 각서를 받아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 주일이 되었다. 11시 예

배시간이 되었으나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기다

렸던 나는 실망스러웠다. 그런데 기도 드리는 중에 문이 활짝 열리더

니 교회당으로 들어오는 거친 발걸음 소리들이 들렸다. 기도가 끝난

후 보니 「미스터 각서」가 그의 패거리들을 데리고 와서는 뒷자리에

앉아 있었다.

교인들은 그들이 또 소란피우러 온 줄로만 알고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들 옆에 앉았던 교인들 중에는 일어나 자리를 옮기려는 이도 있었

다. 나는 교인들에게 괜찮으니 앉으라고 이르고는, 그들을 불러 앞자리

에 앉으라고 권했다. 그들은 앞자리로 나와 일렬로 앉아 예배가 끝날

때까지 순한 양같이 예배드렸다. 예배 후 나는 미스터 각서에게 교우

들에게 인사하고 친구들 소개도 하라고 일렀다. 그는 수줍어하며 몇마

디했다.

『길 잃었던 양들이 돌아왔심다. 잘 부탁드립니다. 험한 일은 저희들에

게 시켜 주십쇼』

우리는 박수치며 그들을 기쁨으로 환영했다.

다음날인 월요일에 나는 청계천 빈민촌 중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인 9

반으로 가서 「DDT작전」을 폈다.

그 첫 집이 남씨(南氏)라고만 불리는 분이 호주로 있는 가정이었다. 남

씨는 옥천에서 이농해 왔노라고 했다. 56세의 남씨는 일제 때 중학까

지 나온 사람이었고 부인 이씨(李氏)는 과거에 백조(白鳥) 악극단 단

원이었다. 슬하에 열 살, 여섯 살, 세 살난 딸들이 있었다.

남씨가 노동품을 팔아 살아오던 중 과로와 영양실조로 쓰러져 좌반신

불수로 눕게 되자 부인 이씨가 껌팔이를 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부인

은 세살배기 딸을 업고 극장 앞이나 다방 등으로 껌을 팔고 다녔다.

하루에 고작 1백~2백원의 수입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눈이나 비라도

오는 날이면 그나마 수입이 줄어들어 30~40원을 버는 날도 있다고 했

다.

남씨네는 날마다 연탄 한 장씩을 사다가 방을 덥히고 봉지쌀이나 국수

를 사서 끓여먹고 지냈다. 수입이 적은 날은 밀가루 20원어치를 사서

수제비를 끓이면 한끼는 해결된다고 했다.

그래서 연탄 한 장 값인 20원, 세 끼니 밀가루 값인 60원을 합하여 총

80원이면 최저생활이 된다고 했다.

방은 어둡고 먼지투성이인데 환기구가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세 아이

모두 기침감기에 걸려 콜록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들 부부와 마주앉아

그 가정의 문제들을 정리했다.


1. 호주 남씨의 치료.

2. 부인이 껌팔이보다 좀 더 수입이 높고 안정된 일감을 구하는 일.

3. 셋째딸의 눈병 치료.

4. 환기창과 채광창을 내는 일.

5. 열 살 된 첫딸을 학교에 넣는 일.

6. 말소된 주민등록증을 살리는 일.

다음날부터 문제들을 하나씩 하나씩 해결하는 일에 몰두했다. 그러는

중에 그들은 교회에 나오게 되었다. 생활에 질서가 잡히면서 남씨의

건강도 눈에 띄게 좋아졌다. 이윽고 남씨는 쓰레기통을 뒤져 쓸 만한

물건들을 모아 팔아서는 푼돈을 벌 수 있을 만큼 좋아졌다. 하루는 부

부를 불러 물었다.

『두 분이 자립해서 살아갈 수 있도록 밀어드리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두 분이 의논하셔서 내가 도울 수 있는 방법을 말씀해 주

시면 힘 닿는 데까지 도와드리겠습니다』

『아이고 황송한 말씀입니다. 미물 같은 우리를 그만큼 생각해주시는

것만도 감지덕지한 일입니다. 안 그래도 우리 부부는 이를 악물고 악

착같이 벌어서 한번 사람답게 살아보자고 다짐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 각오로 살아가신다면 두 분 가정은 꼭 성공하실 것입니다. 그

각오를 이루어 나가시는 데에 제가 돕고 싶습니다. 부담 갖지 마시고

말씀해 주십시오』

『정 그러시다면 말씀드리지요. 중고 리어카 한 대만 있으면 둘이서

참새구이 장사와 오뎅 장사를 해서 자립할 수 있겠습니다』

당시 중고 리어카 한 대가 7천원 정도였다. 나는 남씨 부부에게 7천원

을 빌려줄 테니 이자는 그만두고 원금을 갚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아이고 하늘 같은 말씀이네요. 갚고 말고요. 그 돈 안 갚으면 마른

하늘에 벼락 맞을 일이지요. 이자를 내더라도 갚을 것인데 원금만 갚

는다면야 더 이를 말이 있겠습니까?』


# 남씨 부부의 배신 #

나는 그 길로 시내로 들어가 대학 동창을 찾았다. 이자는 못 주지만

원금은 갚을 테니 1만원을 빌려달라고 간청했더니, 친구는 회사에서

가불하여 1만원을 빌려주었다. 나는 남씨에게 그 돈을 주며 말했다.

『남씨, 내 친구한테 1만원을 빌려왔습니다. 손수레 값이 7천원이라 했

습니다만 오뎅 장사 하려면 재료도 있어야 하고 밤에 켤 등도 준비해

야 할 테니 1만원을 빌려드리겠습니다. 이 돈을 언제 갚을 수 있겠습

니까?』

『두 달이면 넉넉하겠습니다』

『그러면 석 달 기간을 드릴 테니 약속을 지켜주십시오』

그렇게 해서 남씨에게 1만원을 건네주었으나 웬일인지 며칠이 지나도

손수레를 사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염려스러워 물었더니 남씨는 리

어카는 아무때나 사도 되는 것이고 다른 재료들부터 준비중이라 시간

이 걸린다고 했다. 나는 그러려니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늦게 시내에서 마을로 들어오는데 마을 어귀에 어

느 부인이 아기를 업은 채로 쓰러져 있었다. 아직 초겨울이긴 하나 살

얼음이 얼 정도로 싸늘한 날씨였다. 등에 업힌 아기가 울고 있었다.

곁에 가보니 남씨의 부인이었다. 왕년의 백조악극 단원께서는 술에 곤

죽이 돼 얼어붙기 시작하는 길에서 주무시고 계셨다. 내가 일으켜 세

우니 그녀는 몸을 가누지 못한 채 흐느적거리며 말했다.

『놔라 놔 이 잡눔아. 니가 내 몸을 탐내는 거냐』

나는 진땀을 빼며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집에 가서 남씨를 찾

았더니 부부는 일심동체(一心同體)라던가. 남편도 술에 곤죽이 돼 혀가

돌아가지 않는 상태였다. 남씨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예수 선상, 미안하구만이라요. 이 몸은 또 죄를 지었소이다. 유다 노

릇을 했다. 이 말이오. 억─』

그는 억─억─ 하며 음식물을 토해내고 있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집

으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었다. 그냥 슬픈 생각이 들었다.

이틀 후에 남씨 옆집에 사는 교인이 찾아와 남씨네가 이사간 걸 아느

냐고 물었다. 남씨네가 어제 움막집을 1만7천원에 팔아 오늘 새벽 어

디론가 떠났다고 했다. 나는 가슴이 아팠다. 돈은 둘째고, 그들이 다른

곳으로 간들 살길이 열리는 것은 아닐 텐데 하는 걱정이 앞섰다.

그들은 왜 도망치듯이 이사를 갔어야만 했을까? 내가 뭔가를 잘못하여

그들이 그릇돼버린 것만 같았다. 그들 다섯 식구가 지금쯤 어디서 고

단한 인생을 살고 있는지─. 그들이 보고 싶어진다. 어느 하늘 아래서

든 부디 사람답게 살아만 주었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 엄마를 기다리는 3남매 #

남씨가 살던 집을 지나면 최씨네 집이 있다. 최씨는 33세로 경상도 안

동에서 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고향에서 농사를 짓다가 더 잘 살아

보겠다고 서울로 올라온 가정이다. 내가 처음 방문하던 날은 맏아들

병규가 혼자 집을 지키고 있었다. 그가 집안 사정을 알려주었다.

아버지는 직업이 없고, 어머니는 아버지가 너무 때리기 때문에 지난

봄에 집을 나가버렸다. 지금은 3남매와 68세의 할머니가 있다. 집을 나

간 어머니는 몇 년 전에도 한번 집을 나갔는데, 식모살이를 해서 돈을

모아 들어오니 아버지가 좋아하여 다시 살았다. 그러나 돈이 떨어질

때쯤 되니 아버지가 또 술을 먹고 때리기만 해서 어머니는 견딜 수 없

어 나가셨다. 이번에 나간 후에는 아직 소식이 없으시다. 늙은 할머니

가 집안 일을 돌보시는데 병들고 쇠약하여 지금은 늘 자리에 누워계신

다. 우리 3남매는 굶는 것이 제일 싫다. 겨울 내내 밀가루 수제비만 먹

어서 이제 수제비라면 냄새가 나서 먹기 싫다. 오늘 아침에는 배춧국

만 끓여서 식구들이 한 사발씩 마셨다. 생활비는 삼촌이 가끔 와서 돈

을 주고 가고, 마을 아줌마들이 할머니와 우리들이 불쌍하다고 가끔

먹을 것을 가져다 준다.

이상이 병규가 내게 들려준 집안 사정이었다. 그들이 사는 집은 너무

낮아 허리를 굽히고 들어가 방바닥에 앉으면 천장에 머리가 닿았다.

며칠 후에 병규 아버지 최씨를 만나 대화를 나누어 보니 착하고 온순

한 성격이었다. 그러나 술이 「웬수」였다. 술만 들어가면 난폭한 사람

으로 변했다. 살길은 술 끊는 길이라고 수차 권했다. 매일 그의 집을

방문하여 술 끊고 새로운 삶을 살자고 권면했다. 그렇게 열흘쯤 계속

했더니 하루는 최씨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김선생 나 같은 버린 사람에게 관심을 가져주시니 고맙습니다. 참말

로 양반이시네요. 목숨걸고 술 끊기에 한번 도전해볼랍니다』

그 후로 그의 술의 싸움은 처절한 전쟁이었다. 술을 먹고 싶을 때는

자기 손으로 두 발을 묶고 아들 병규에게 손을 묶어 달래서 먹고 싶은

술을 참고 견디는 정도였다. 이런 싸움 끝에 술끊기에 성공하고 나서

다시 직업을 얻게 되었다. 이제 매질에 못이겨 집을 나간 병규 엄마만

돌아오면 최씨 가정은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었다.

나는 병규 엄마가 있을 만한 곳을 찾아다녔다. 내가 직접 만나서 남편

이 변화된 것, 할머니 몸이 편찮으신 것, 3남매가 눈물로 기다리고 있

는 사정을 설명하고 귀가하도록 설득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병규 엄마

의 종적은 끝내 찾을 수 없었다. 병규네 집에 가서 3남매와 손잡고 할

머니 병상 곁에 앉아 기도했다.

『예수님, 우리 엄마 집으로 돌아오게 해주세요. 예수님, 우리 엄마께

아버지 술 안 먹는다고 알려주세요. 할머니가 아파서 돌아가시게 된

것도 알려주세요. 예수님, 우리들이 너무너무 보고 싶어하는 것도 엄마

께 알려주세요』

3남매는 그렇게 기도하며 홀짝홀짝 울곤 했다. 나도 따라서 눈물이 났

다. 그래도 병규네는 아버지가 술을 끊을 수 있게 돼 여간 다행한 일

이 아니었다. 한 인간이 좌절과 파탄에서 벗어나 용기와 희망을 갖는

것을 보면서 표현할 수 없는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 병원 한번 가보기가 소원인 환자 #

최씨 댁을 지나면 이씨 가정이다. 막대기를 삼각으로 세워 인디언 움

막처럼 지은 움집에 일곱 식구가 살고 있었다. 68세인 호주 이씨의 생

업은 마을 입구에 돗자리를 깔고 「사주·관상·택일·궁합」 등을 적

은 종이들을 펼쳐놓고 앉아 있는 일이었다.

그의 부인 김씨는 전에는 성당에 다녔으나 지금은 창가학회에 나가고

있었다. 천주교 신자였던 그녀가 창가학회로 발걸음을 돌리게 된 것은

병든 아들 때문이었다.

26세인 아들 원섭이는 노동판에 다녔었는데, 원인 모를 병을 얻어 일

년 반이 넘도록 자리에 누워 있었다. 피골이 상접한 아들에게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았느냐고 물었더니, 원섭이는 처음 아플 때 보건소에

가서 엑스레이 검사를 받았더니 결핵이 아니라는 것만 알려주었다고

했다. 보건소는 결핵 환자만 돌보기 때문에 자신의 치료에 도움을 받

지 못했다고 했다. 그 후에는 병원에 가보지 못했노라고 했다. 뼈만 남

은 앙상한 몸으로 목에서 쌕쌕하는 소리를 내며 기침을 했다. 기침할

때마다 고통스런 표정을 짓곤 했다. 이미 기운이 쇠할 대로 쇠해서 일

어나 앉을 수조차 없이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형국이었다.

곧 병원에 가서 진찰이나마 한번 받아볼 수 있도록 내가 주선해 보겠

다고 했더니 환자가 기쁜 표정을 지으며 베갯머리를 뒤지더니 3백원을

끄집어냈다. 진찰비용에 보태달라는 거였다. 오죽이나 병원에 가고 싶

었으면 이렇게 푼푼이 돈을 모았을까를 생각하니 측은하기 그지없었

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환자의 상태를 보아서는 회복될 가망이 별로 보이

지 않았다. 빠른 시간 안에 병원에 갈 준비를 해서 다시 오겠노라고

말하고 나서 이씨댁을 나왔다. 활빈교회로 와서 가마니만 깔아놓은 흙

바닥에 무릎꿇고 원섭이를 치료할 수 있는 길을 열어달라고 예수님께

기도했다. 기도 후 점심식사를 하는 중에 갑자기 골목 어귀에서 귀청

이 찢어지는 듯한 외마디 소리가 들렸다.

『철거반 왔다…』

이 한마디의 위력은 엄청났다. 온 마을에 갑작스런 긴장감이 돌더니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가 요란스러웠다. 단걸음에 밖으로

나가보니 청계천 둑 위에 철거반 차가 와 있었고 철거반원 10여 명이

한 집으로 우르르 몰려가고 있었다.

판자촌 주민들은 철거반을 원수같이 여겼다. 그들이 타고 다니는 포장

을 친 스리 쿼터차를 「염라대왕차」라 불렀고, 철거반원들을 염라대

왕의 졸개인 저승사자이라고 불렀다. <다음호에 계속>

철거반 차가 나타나면 온 마을이 긴장하여 숨을 죽였다.

5~6세 되는 아이들까지도 『철거반 왔다』 하면 얼굴이 새

하얗게 돼 숨을 죽이고 있었다. 이번에는 누구네가 당하려

나 하고 온 마을 사람들은 철거반원들의 움직임을 살폈다.

그 날은 일곱집이 당했다. 철거반원들이 해머와 지렛대로

집을 부수기 시작하자 집을 지키고 있던 할머니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이 사람 저 사람을 번갈아 붙잡으며 소리질렀

다.

『이 눔들아, 이 눔들아. 이 늙은 나를 죽여놓고 부셔라』

그러나 할머니가 그런다고 철거를 멈출 사람들이 아니었다.

철거는 신속하게 진행되고 있을 따름이었다. 할머니는 도저

히 안 되겠으니까 부엌칼을 갖고 나와서 철거반장의 등을

찌르려 했다. 그러나 금세 칼을 빼앗기고, 그 대가로 지붕

덮는 천막까지 갈갈이 찢겼을 따름이다.

철거반원들은 철거하는 동안에 집주인이 조용히 있으면 건

물 재료들을 다시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뜯었고, 반항하거

나 욕을 하면 나무토막 하나까지 분질러 못쓰게 해놓았다.

칼을 빼앗긴 할머니는 길바닥에 퍼질러 앉아 두 다리를 뻗

고 울며 사설을 늘어 놓았다.

『이 우라질 놈덜아, 똥물에 튀길 놈덜아. 자손 대대로 철거

나 해묵거라』

그 사이 철거반원들은 두 번째 집으로 달려들었다. 그 집은

상이군인이 사는 집이었다. 갑자기 철거반원들이 달려들어

집을 부수니, 상이군인 아저씨는 자기 집에서 뽑은 기둥을

바람개비처럼 휘두르며 소리 질렀다.

『이 새끼들아, 계고장도 없이 집을 뜯는 법이 어디 있냐?

이 새끼들아 내가 ○○고지(高地)에서 죽지 못한 것이 한이

다』

그가 기둥 막대기를 휘두를 때는 전선의 고지에서 적군을

무찌를 때만큼이나 결사적이었다. 그러나 그 역시 중과부적

이었다. 철거반원들에게 기둥을 빼앗기고 발길에 차이고 말

았다.

관례로는 어느 집이든 철거할 때는 며칠 전에 계고장을 발

부한다. 계고장이 발부된 지 4~5일 후에 철거가 집행되기

때문에 집 주인들은 어느 정도 대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가끔은 그런 절차 없이 철거하는 경우도 있었다. 상이군인

의 집이 그런 경우인 모양이었다.

세번째로 철거된 집은 아주머니가 아기를 안고 방 가운데

앉아 울고만 있었다. 아기를 안은 채 웅크린 어깨와 머리

위로 온갖 부스러기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아주머니는 아기

만은 감싸면서도 끝내 일어서지 않았다.

이렇게 하고 견디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방 구들을 지키려

는 것이었다. 철거반은 다시는 그 집에 살지 못하게 하느라

방바닥을 곡괭이로 파헤쳐 버린다. 그래서 철거당하는 집들

은 방구들만큼은 지키려고 필사적이 된다. 집 껍데기는 헐

린다 해도 방바닥만 성하면, 그 위에 움집을 짓고 다시 살

아갈 수 있다.

나는 민초(民草)들이 살아가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면서 연

민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들을 도울 수 없는 안타까움으로

온 몸이 젖어들었다. 다행히 아기 엄마가 그렇게 애쓴 덕에

철거반원들이 방구들 몇 군데만 곡괭이로 푹푹 찌르고는 지

나갔다. 방을 지킨 셈이었다.

임신부 누워 있는데 철거는 진행되고…

그날 철거당한 집들 중에 맨 나중에 당한 집이 가장 비참했

다. 아기를 낳으려고 진통중에 있는 산부의 집이었다. 아기

가 곧 태어날 기미가 있으니 몸을 풀 며칠 동안만 철거를

미뤄달라고 사정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철거반 반장은 오늘은 특별한 사정이 있어 자기로서도 어쩔

수 없다는 말로 자르고는 철거를 진행시켰다. 임산부는 무

표정하게 방 한가운데 앉아 있다가 가끔 진통이 있는지 몸

을 움찔움찔하였다.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져 돌아서서 눈물을 훔쳤다. 더 참을

수 없어 철거반 반장에게 가서 그의 소맷자락을 붙들고 따

졌다.

『반장님, 당신들도 공무를 집행 중이니 개인 감정으로 이

러는 건 아닌 줄로 아오. 그러나 이건 해도 너무 하잖소?

아기 낳으려는 산부를 그렇게 대하다니 어디 사람이 할 짓

이요? 그렇게 하는 것이 산모나 태어날 아이에게 얼마나 나

쁜 영향을 미치리라는 것은 반장님도 짐작은 할 것 아니

요?』

내가 열을 내서 항의를 하였더니 반장은 담배를 한 대 피워

물더니 말했다.

『오늘은 우리도 무리인 줄 압니다. 그래서 아침에 철거 안

나오겠다고 했는데 억지로 떠밀려 나온 거요. 듣기로는 내

일 높은 사람이 워커힐로 가는 모양인데, 워커힐 가는 큰

길에서 보이는 집들은 오늘 중으로 완전히 철거하라는 명령

이오. 오늘 철거된 집들은 죄다 큰 길에서 지붕이 보이는

집들이에요. 우리도 달리 어찌할 재간이 없습니다.

이렇게 뜯고 사진을 찍어가야 우리 맡은 직책을 완수하는

것입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보아하니 배운 사람 같은

데, 우리가 지나가거든 큰 길에서 보이지만 않게 움막이라

도 꾸려서 밤을 지내도록 하시구려. 우리가 도와드릴 일은

그나마 모른 척하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나는 괴로운 심사를 풀고 교회로 와서 혼자 울었다. 아내

가 말했다.

『여보, 그 산모를 그냥 두지말고 우리 방으로 데려옵시다.

태어날 아기가 무슨 죄가 있어 그런 자리에서 태어나게 한

단 말이예요. 우리가 예배당 바닥에 이불깔고 자더라도 그

산모는 집으로 데려옵시다』

나도 옳은 말이라 여겨, 손수레에 산모를 태워 방으로 데려

왔다. 산모는 고맙다는 말을 거듭하면서도 불안한 마음을

감추려 들지 않았다. 방은 산모에게 비워주고, 교회당 바닥

에 베니어판을 깔아놓고 담요를 겹으로 깐 자리에서 밤을

지내며 우리 부부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보 오늘 철거 장면을 보고는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어

안이 벙벙할 따름입니다. 사람 사는 사정이 이렇게도 다를

수 있을까 믿어지지 않을 지경입니다. 다리 저편에는 고층

건물들에 호화로운 주택들이 즐비한데, 다리 이편은 인간

이하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아요.

우리가 여기서 이렇게 하는 것도 밑빠진 항아리에 물 붓기

아닐까요? 나로서는 이곳에 적응하기가 힘들어 하루라도 속

히 밖으로 나가 정상적인 사람들의 정상적인 삶을 살고 싶

지만, 당신이 사명으로 알아 헌신하고 있으니 어쩔 수가 없

군요. 그래도 그동안 이 지역에 있어보니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것도 같습니다』

나는 차분한 소리로 아내에게 말했다.

『서울시는 하나의 시가 아니고 3개의 시가 모여서 이루어

진 도시예요. 첫째는 재벌들과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들, 그

리고 외국인들이 사는 서울 특별시, 글자 그대로 특별한 사

람들이 사는 특별시지요. 둘째는 교수, 교사, 공무원 장사꾼

등이 살고 있는 서울보통시, 말하자면 보통 사람들이 보통

으로 살고 있는 보통시(普通市)지요.

셋째는 우리가 살고 있는 판자촌인데 일컬어 서울 하등시

(下等市)라는 곳이에요. 서울특별시 시장은 양택식이란 사람

이고 서울보통시는 보통 사람들이니 시장이 필요없고, 서울

하등시는 아직 시장이 뽑히지 않아 공석이니 우리가 시장으

로 출마합시다. 내가 시장으로 당선되면 당신은 시장부인,

사모님이 되는 거고, 우리 아들 동혁이는 시장의 장남으로

귀하신 몸이 되는 거요』

「예배당 선생」 기다리며 죽은 병자

우리 부부는 이런 이야기를 나누며 웃었다. 저녁 식사로 수

제비 한그릇씩을 먹고 난 후에 낮에 철거당한 집들을 한바

퀴 돌았다. 양식이 없는 가정에는 우리가 가진 것을 보내고

이불이 부족한 집들에는 담요를 보냈다.

그나마 움집도 꾸리기 어려운 집들에는 추울 테니 차라리

교회당으로 가서 밤을 지내자고 권하였으나 허물어진 자리

나마 내 집이니 그 자리에서 견디겠노라고 했다. 길가의 잡

초처럼 끈질긴 사람들이었다.

다음 날은 이원섭을 치료할 수 있는 길을 뚫기 위해 동분서

주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더니 기독교 의료선교협회에서

길을 찾았다. 기독교 의료선교협회는 종로통 화신백화점 뒤

편의 감리교 태화관 안에 있었다. 그곳을 방문하여 사정을

설명하였더니 환자를 데려오면 치료해주겠다고 약속했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판자촌으로 돌아왔다. 오는 길에 가만

히 생각해보니 일어설 수도 없는 환자를 종로까지 어떻게

데려갈 것인가가 염려되었다. 버스는 아예 못 탈 것이고 택

시를 이용한다 하더라도 비좁아 불편한 것인데다, 왕복과

대기요금까지 엄청난 요금이 나올 것이다. 염려하던 중에

언뜻 선교사들이 타고 다니는 랜드로바 같은 차가 있으면

안성맞춤일 것 같았다.

나는 호주선교회의 브라운 선교사를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선교사님, 우리 판자촌에 이원섭이란 불쌍한 환자가 있는

데 내일 그를 병원으로 데려가야겠습니다. 선교사님의 차를

좀 이용토록 배려해 주십시오』

『미스터 김. 차만 있으면 됩니까? 운전수까지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내일이라면 차는 빌려줄 수 있겠으나 내가 회

의가 있어 운전을 해줄 수가 없소. 내일 비용을 내가 부담

할 테니 택시를 이용하시지요』

나는 이원섭의 일이 잘 진행되어 가기에 기운이 솟았다.

내일 병원에 간다는 소식을 전하려고 그의 집에 들렀다. 그

런데 아뿔싸! 그의 집에 도착하고보니 그가 조금 전에 숨을

거두었다는 게 아닌가! 그는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예배당

선생 불러 달래더니 고개를 떨구며 숨을 거두었다고 했다.

나는 기운이 쑥 빠졌다. 그의 어머니가 흐느끼며 말했다.

『이 녀석아 하룻밤만 더 넘겨 병원에 가보고나 죽제…』

그의 아버지는 자기가 죄가 많아 자식을 앞세웠다고 한탄했

다.

빈자는 죽어서 땅에 묻히기도 어렵다

이원섭군은 뼈만 남다시피한 얼굴이 푸른 빛을 띠고 있었

다. 그의 두 눈을 감겨주며 나는 기도를 드렸다. 내가 기도

를 드리는 동안에 가족들이 꿇어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었

다. 관상 사주 보는 아버지도, 창가학회 다니던 어머니도,

활빈교회 다니는 여동생도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예수님, 이 젊은이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땅에서

는 슬프게 살았지만 하늘에서는 안식을 누리게 허락하여 주

시옵소서. 그리고 이 가정의 비극도 이것으로 끝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가정도 이제 웃으며 행복을 누리고 살도록

은총을 베푸시옵소서』

가족들과 장례식에 대해 의논했다. 도우려는 환자가 죽어버

렸으니 이제는 장례식이나 돕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장례식을 어떻게 치르겠느냐고 가족에게 물었더

니 모두가 묵묵 무답이었다. 한참 후에 아버지가 말끝을 흐

리며 말했다.

『내일이라도 실어 나갔으면 좋겠는데…』

보아하니 장례비용 때문에 말들을 못하고 있는 듯하였다.

나는 마을 사람들을 모아 장례 치를 일을 의논했다. 장례를

치르려니 3가지가 문제였다.

첫째는 의사가 발행한 사망진단서가 있어야 했다. 동사무소

에서 발행하는 매장허가서를 얻으려면 사망진단서가 있어야

되기 때문이다. 둘째는 시체를 염하고 관을 사다가 입관하

는 일이다. 셋째는 영구차를 불러 화장터로 가서 화장하는

일이었다.

주민들과 의논하는 자리에서 일처리를 분담했다. 가장 문제

가 되는 사망진단서 떼오는 문제는 활빈교회가 맡는다. 두

번째의 염하고 관을 사오는 문제는 마을 사람들이 십시일반

(十匙一飯)으로 해결한다. 세번째 영구차 부르는 일은 상가

(喪家)에서 부담한다.

이렇게 일을 나누어 맡은 뒤 나는 사망진단서 떼는 일을 서

둘렀다. 죽기 전에 병원에 다녔으면 그 병원에 가서 사망진

단서를 발급받을 수 있겠으나 이원섭은 그렇지를 못했다.

보건소에서 결핵이 아니라고 판정받은 것 외에는 아무런 근

거가 없으니 퍽 난감한 일이었다.

결국은 의사를 오게 하여 시체나마 검진하고 사망진단서를

받을 도리밖에 없었다. 의사가 와서 사망진단서를 발급받는

경우의 비용을 알아보니 5만원이나 있어야 했다.

나는 난처해졌다. 마을사람들은 사망진단서는 교회가 맡았

으니 믿고 있을 터인데, 실상은 의사를 불러올 돈도 없으니

난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어차피 사망진단서가 있

어야 시체를 움직인다 하니 어쩔수 없이 다시 한번 뛰어보

기로 했다. 먼저 교회당으로 들어가 가마니 바닥에 꿇어앉

아 기도했다. 그리고는 부딪쳐 볼 만한 곳들을 손꼽아 보았

다.

먼저 기독교 의료선교협회로 갔다. 김 사무장을 만나 통사

정을 했다. 그는 사망진단서는 의사라야 발부할 수 있으니

이화여대 부속병원의 이모 의사를 찾아가 보라고 메모를 적

어 주었다. 이대부속병원을 찾아가 그 의사를 만났다. 그는

한마디로 거절했다. 너무 쉽게 거절하니 나도 생각이 달라

졌다. 거절하는 것은 그쪽 사정이고 내 사정은 달랐다. 그냥

물러설 수만은 없지 않은가.

나는 사정사정하며 4시간이나 따라다녔다. 그가 화장실에

가면 화장실 입구에 섰고 수술실로 들어가면 입구에서 수술

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가 점심식사 할 때는 식탁 옆에

부동자세를 취하고 식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진단

서를 발급해 줄테니 제발 사라져 달라는 말이 그의 입에서

떨어졌다.

개인적으로는 퍽 미안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조바심이 나서 체면이나 교양 따위를

챙길 여유가 없었다. 사망진단서를 받아든 나는 90도 각도

로 절을 올리고 높으신 분의 곁을 물러났다. 마을에서는 다

른 준비는 모두 끝내고는 내가 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사망진단서를 내놓으니 식구들의 얼굴에서 염려스러움이 사

라졌다. 동사무소로 매장허가서를 떼러 보내는 한편 관 짜

는 일에 착수했다. 마을 사람들 의견으로는 짜 놓은 관을

사면 가장 싼 게 3천5백원인데, 우리가 만들면 1천5백원이

면 된다고 했다.

헌 나무를 사다가 자기들이 짜면 된다는 의견들이었다. 설

왕설래 논의를 거쳐 그렇게 하기로 했다. 마을 주민들이 모

아온 성금이 4천원이었다. 관을 짜고 남는 비용은 다른 데

보태기로 했다. 얼마후 동사무소에서 매장허가서가 발급되

고 관도 만들어졌다.


27번 철거당하고도 버틴 「끈기있는」 삶들

이제 영구차를 불러 화장터로 가는 일만 남았다. 그런데 문

제는 영구차 불러오는 비용이었다. 최소한 1만3천원은 있어

야 하는데 6천원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민선교사를 찾

아갔다. 얼마전에 그가 타는 차를 보았는데 뒤가 길어 짐을

싣기에 적당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를 만나 다짜고짜 말

했다.

『선교사님 자동차를 내일 좀 씁시다』

『어디에 쓸 것입니까?』

『시체 싣고 화장터로 가야 합니다』

『죽은 사람을 승용차에 실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타는 차인데 죽은 사람도 사람이니 괜찮지 않겠습

니까? 화장터가 가까우면 마을 사람들이 메고 가도 되는데

벽제란 먼 곳에 있어 어쩔 수 없습니다. 영구차를 부를 돈

은 없고 선교사님 신세 좀 집시다』

그는 나를 보며 한참이나 생각하더니 내일 1시까지 차를 마

을로 보내겠노라고 약속했다. 나는 발걸음도 가볍게 마을로

돌아왔다.

다음날 1시에 붉은 색 승용차가 도착했다. 시체를 싣기에는

너무나 날씬한 차였다. 가난한 장례예배를 드린 후 화장터

로 갔다.

화장하는 비용은 의외로 쌌다. 50원으로 일체의 수속이 끝

났다. 서울시가 잘하는 일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오니 아내가 최씨댁에서 굶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가

보았더니 어른 아이 할것없이 모두들 일렬로 누워 있기에

쌀 밀가루 라면을 가져다 주었노라고 했다. 나는 한 집에

너무 많이 주지 않았느냐고 나무랐다. 푹푹 떠다 주면 좋겠

지만 한 집에 그렇게 많이 주어버리면 곤란하지 않으냐고

나무랐더니 아내는 의외란 듯이 말했다.

『당신이 주는 것을 말릴 때도 있군요. 내일 해가 서쪽에서

뜨겠네요. 이왕 주는 김에 많이 주어야지, 조금씩 주면 감질

만 나지 효과가 없지 않겠어요?』

그 집에 들어서니 공장에서 갓 돌아온 열일곱 살 난 딸이

시래기죽을 냄비채로 먹고 있다가 나를 보고는 얼른 냄비를

감췄다. 추운데 왜 온돌을 깔지 않고 냉구들에 사느냐고 물

었더니 철거반 등쌀에 온돌을 놓을 여유가 없노라고 그 어

머니가 말했다.

지금껏 27번이나 철거당했다고 한다. 뜯는 편이나 뜯기는

편이나 서로 필사적이었다. 우리 민족의 국민성이 은근과

끈기라더니 그 말이 옳은가 보다. 끈기 있게 철거하고 끈기

있게 다시 짓곤 했다.

그 가정에서 일자리를 의논해 왔다. 지금 나가고 있는 일터

는 너무 늦게 끝나는 데다 급여는 보잘 것 없어 조건이 좀

더 좋은 곳으로 옮길 수 있었으면 했다. 일당이 고작 1백80

원이라 했다. 하루 1백80원을 주고 지금까지 일을 시켰으니

참으로 낯 두꺼운 사람들이라 여겨졌다. 대우가 좀 더 좋은

일자리를 함께 찾아보자고 하고는 집으로 왔다.

잠자리에 누우니 심신이 상쾌했다. 남을 위해 산다는 것이

이렇게 행복한 것인가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영혼의

충족감이랄까. 만족감이랄까 여하튼 내 영혼 깊은 곳으로부

터 솟아오르는 희열을 느끼며 잠을 청했다.

깨끗한 피와 더러운 피

다음날 이른 아침 한 젊은이가 상담을 하겠노라고 찾아왔

다. 그는 차분히 자신의 내력을 이야기했다.

『제 이름은 박○○입니다. 호적은 박씨지만 실상은 최씨입

니다. 경상남도 삼랑진 부근 시골 마을에서 자랐습니다. 박

씨 성을 가진 아버지에게 어느날 최씨 성을 가진 친구가 놀

러 왔었습니다. 그때 집에 아버지는 없고 어머니만 있으니

까 둘이서 정을 통했습니다. 그런 일이 있고 10달만에 제가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최씨는 아들이 없고 딸만 있었습니다. 그래서 최씨

는 잠자리를 같이 한 지 열달만에 태어난 아기가 자신의 핏

줄이라고 생각하고는 찾아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며칠

후 아버지에게 찾아와서 자초지종을 말하고는 지금 낳은 아

이는 내 핏줄이니 달라고 했습니다. 그게 통할 리 있겠습니

까? 아버지는 무슨 거지발싸개 같은 소리를 하느냐고 윽박

지르고는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소리가 높아지고 주

먹다짐이 오고가고 하다가 끝내는 양쪽 집안다툼으로까지

번졌습니다. 온동네에 소문이 나고 둘 다 마을에서 웃음거

리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나를 최씨에게 보내지는 않고 기르면서도 수시로

구박을 했습니다. 방에 들며 날며 「이 새끼는 내 씨가 아

냐」하며 머리를 쥐어박곤 했습니다. 제가 더욱 불행하였던

것은 자라면서 최씨 성을 가진 그쪽 아버지와 닮은 것이 나

타났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로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불화가 잦고 말다툼이 그

치지 않았습니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눈칫밥을 먹고 자랐

습니다. 이제는 나이들어 집을 나와 독립된 생활을 하고 있

습니다. 그런데 늘 마음에 께름칙한 생각이 드는 것은 「나

는 피가 더러운 몸이다」라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는 피가 더

러운 사람이니 고상하고 깨끗하게 살 것 없다. 그렇게 살려

해도 소용없다. 더러운 피를 지닌 사람이 어떻게 깨끗하게

살겠는가? 그러니 되는 대로 더럽게 살자」 그런 생각이 들

곤 하여 무질서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한 후에 그 젊은이는 내게 심각한 얼굴을 하

고 물었다.

『선생님 저같이 더러운 피를 타고 난 사람도 사람 구실 할

길이 있을까요? 선생님같이 깨끗한 피를 가진 사람을 보면

부러운 생각이 듭니다』

『자신의 피가 더러운 피라고 생각하는 사정은 이해가 갑니

다. 내 생각으로는 피는 피지 더러운 피, 깨끗한 피가 따로

있지 않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본인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문제가 되지요. 한 가지 해결책이 있습니다.

『예? 해결책이 있다구요? 무슨 해결책입니까?』

『피를 바꾸는 것이지요』

『피를 바꾼다구요. 저도 그 생각을 안 해본 것 아닙니다.

그러나 의사의 말로는 사람의 피는 한꺼번에 3분의1 이상을

바꾸면 살아나지 못한댔습니다. 피 바꾸고 나서 죽게 되면

바꾸나 마나지요』

『그런 식으로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의 피로 바꾸는

것이지요. 「예수 믿는 사람」이란 새로운 피를 받은 사람

을 말합니다. 부모로부터 받은 피는 죽음으로 가는 피지만

예수의 피로 바꾸게 되면 생명으로 가는 피가 됩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피를 바꾸는 것이란 말이지요? 그런 말

은 처음 들어보네요. 예수를 믿으면 아버지께 받은 피는 없

어지고 예수의 피가 온 몸에 흐르게 된다…. 가슴에 닿는

말입니다. 앞으로 자주 와서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그렇게 인사하고 간 후로 교회에 나오기 시작하더니 한 번

도 거르지 않고 예배시간에 참석했다. 드디어 그가 세례받

는 날이 되었다. 세례식을 마친 후에 그는 내게 말했다.

『전도사님, 이제 저는 예수님의 피로 완전히 피갈음을 했

습니다. 전도사님의 지도에 감사드립니다』

그가 변화해 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영적 세계의 신비를

느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께서 친히 그를 변화시

켜주시는 것이 아니라면 어느 의사, 어느 상담자가 그를 그

렇게 변화시켜줄 수 있었겠는가?

이때쯤 우리 가정은 큰 어려움에 부딪혔다. 빈민촌에 들어

갈 때에 준비했던 약간의 예산이 완전히 바닥이 난 것이다.

외부 지원은 없는 채로 집을 사서 예배처로 고치고 환자들

과 끼니 없는 가정들을 돌보느라 예상보다 빨리 경제공황이

온 것이다.

가난은 나라도 못 구한다는 말이 있듯이 빈민촌에서 가난과

싸우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른 무엇보다 주

민들이 돈 빌리러 올 때가 가장 난처했다. 알지도 못하는

처지에 아주 친한 사이라도 되는 듯이 다정한 웃음을 띠고

는 돈 좀 꿔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난감해져서 물었다.

『아니, 내게 무슨 돈이 있을 것 같아서 꿔달라는 것입니

까?』

그러면 그는 의외란 듯 말하는 것이었다.

『아니 김 선상, 이거 보시라요. 이제 보니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 분이시구려. 밤중에 우리 집에 찾아와설랑 무얼 도와

드릴까요 하고 자기 입으로 그래 놓구시렁 우리 집에 없는

기 현찰인디 잠시 좀 달랬더니 그래 그렇게 오리발 내미시

기요?』

그런 식으로 몰아세우는 것이었다. 나는 그이 체면이라도

세워줄 속셈으로 요청하는 금액을 다 꾸어줄 수는 없지만

얼마씩을 꿔주었다. 그러나 그렇게 꿔준 돈 치고 돌려받은

돈은 한번도 없었다.

세상에는 어려운 일들도 많지만 그중 하나가 가난한 사람들

도와주는 일인가 싶다. 예수께서 이르신 말씀에 뱀같이 지

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는 말이 있지만 가난한 사람들

을 돕는 일에는 그 말이 100% 합당한 말이다.

잘못 되면 실컷 도와주고 오히려 욕 먹게 되는 일이 이 분

야의 현실이다.

가정 방문을 하는 중에나 집에 찾아오는 사람들 중에 끼니

가 없어 굶는 사람들에게 밀가루 한 포를 가져다 준다. 그

것도 낮에 가져다 주면 자존심이 상할 우려도 있고 또 모두

가난한데 그 집만 도와주게 되면 말썽도 생기기 쉬울 터이

므로 밤 12시가 거의 되어갈 무렵 가져다 준다.

그렇게 하면 자식들과 함께 굶고 있다가 마치 하늘에서 천

사라도 온 듯이 반가워 한다. 부인들 중에는 눈물을 글썽이

기도 하고 아이들은 기뻐서 깡충깡충 뛰기도 한다. 그런 모

습들을 보고 나는 보람을 느끼며 집으로 돌아와 잠자리에

든다.

그런데 그렇게 가져다 준 지 열흘 정도가 지나면 그 가정의

주부가 교회로 나를 찾아온다. 왜냐하면 22kg짜리 밀가루

한 포로 수제비를 끓여 먹는데 다섯 식구면 열흘 내지 보름

이 걸린다. 그래서 열흘 정도 지나 밀가루가 떨어질 때 쯤

에 나를 찾아오는 것이다. 와서 내게 말한다.

『선생님, 떨어졌심더』

나는 부인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한다. 무엇이 떨

어졌다는 건지 짐작이 가지를 않는 거다. 연탄이 떨어졌다

는 것인지 아니면 약이 떨어졌다는지 분별이 가지 않아 내

가 묻는다.

『예! 무엇이 떨어지셨는데요』

『아이고 잊어버리셨는가 봐! 열흘 전에 밀가루 가져다 주

신 것 떨어진기라예. 밤중에 가져다 주시서 잊으셨나봐!』

나는 그제서야 열흘 전에 밀가루 가져다 준 집의 주부인 줄

알고는 묻는다.

『그래서요?』

『죄송스럽습니다만 한 포만 더 해 주셔예. 신세는 살아가

며 갚겠습니다』

그런 말을 들은 나는 수양이 덜 된 사람이라 속으로 짜증이

난다. 세상에 밀가루 한 포를 받았으면 그간에 비닐을 줍든

지 다니며 헌 병이나 종이를 주워 팔더라도 스스로 살아갈

궁리를 세워야지 앉은 채로 다 까먹고 떨어지니 또 교회당

에 와서 달라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 지겨운 생각이 들게 된

다. 그런 중에도 속마음을 비치지 않고 밀가루를 구해준다.

그런데 그렇게 교회의 도움을 계속 받은 사람들에게서 일어

나는 정신적 후유증이 문제가 된다. 교회의 도움을 한두번

받은 사람은 그런 대로 고마움을 아는데 네번 다섯번 계속

해서 도움을 받은 사람들은 고마움은 사라지고 이상한 의식

이 싹트게 된다.

교회가 자신들을 돕는 것은 당연하고 또 자신들에게 도움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생각을 지니게 된다. 도움을 계속 받으

면서 그의 의식이 바뀌는 것이다. 도움을 받던 사람에게서

그런 반응을 보게 되면 도움을 주던 쪽에서는 섭섭함을 느

끼게 되고 어떤 배반감 같은 느낌을 지니게 되면서 그에게

서 인간적인 관심을 잃어가게 된다.

그런 과정을 겪으며 도움 받는 쪽에서는 기대하던 바가 충

족되지 않으니까 나중에는 반발하게 되고 몇번 언짢은 대화

가 오고간 다음에는 적대감을 품게 된다.

『느그덜이 천당가면 내는 만당 갈끼다』

이런 심리적 과정을 사회사업학이나 복지학에서는 다루지

않는 것 같다. 현장에서 느낌으로 알 따름이다. 그런 느낌에

서 이론이 세워지고 그런 이론에서 정책이 세워져 그런 정

책이 국가의 복지정책 수행에 적용되어야 할 것이라 생각된

다. 나는 그런 경험이 쌓여가며 고민에 젖어들게 되었다.

가난한 이웃들을 돕긴 도와야겠는데 어떻게 도와야 제대로

돕는 길일까에 대한 고민이었다. 어느 주일 예배 시간에 교

회당 문 앞에서 교회 안을 향해 누군가가 소리를 지르며 욕

을 해대기 시작했다.

『활빈교횐지 골빈교횐지 고만 해 처먹어라. 이것들이 빈민

팔아 돈 모아서는 없는 사람들에게는 쥐꼬리만큼 주는 흉내

만 내고 저그끼리 다 갈라먹는 녀석들이다. 이것들아 예수

를 믿지 말고 봇장(마음)을 고쳐라 느그덜이 천당을 가믄

내는 만당 갈끼다』

하던 설교를 멈추고 창밖을 내다보니 밀가루 배달을 여러번

해준 집의 아주머니였다. 계속 요구하기에 역정이 나서

『아줌마 이제 그만 합시다. 그래도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

지 어찌 교회에서 먹여 살리기를 바라시는 거예요. 다른 집

들도 좀 도와야지 이 집만 계속 도울 수는 없는거 아닙니

까』하고 잘랐던 집이다.

그 집 아주머니가 주일예배 시간을 이용하여 온 동리가 들

으라고 욕을 퍼붓는 것이었다. 나는 그대로 무시하고 넘어

가려 하였으나 젊은이들은 그러지 못했다.

『하이고 저것도 인간이라고 저걸 그냥 한강물에 던져버려

야 돼야』

그러더니 우르르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들을 말리려고 애

를 썼으나 막무가내였다.

『전도사님, 저런 인생은 그냥 두면 안됩니다. 그냥 두면 더

기 올라서 안됩니다. 손 좀 봐 줘야 됩니다. 미친개 한테는

몽둥이가 젤입니다』

젊은이들이 나가 차마 때리지는 못하고 뒤로 밀어버렸다.

뒤로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은 그녀는 일어서면서 엉뚱하게

옆구리에 손을 대며 말했다.

『아이구 옆구리야, 야, 이눔들아, 내 옆구리 갈빗대가 나갔

다. 아이구야, 아이구 옆구리야, 병원으로 가자 이눔들아』

『아주머니 몸이 불편하시면 병원으로 갑시다. 가서 X-ray

사진도 찍어보고 어디 잘못된 데가 있는가 진찰해봅시다』

『쓸데없는 짓거리야. 현찰로 주라』

이런 경험들을 쌓으면서 빈민선교에 대하여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빈민선교를 구제(harity)형식으로 하는 것

에 문제가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좀 더 성숙된 방법으로

바꾸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밥 굶는 집에 양식을 가져다 주거나 병든 사람들에게 약 사

다 주는 방식이 아니라 스스로 노력하여 자립할 수 있는 기

틀을 닦아주는 방식으로 바꾸어 나가기로 했다. 그래서 빈

민촌에 소문을 냈다.

『이제부터 활빈교회는 일하는 방법이 바뀐다. 장사하려는

사람들에게 장사밑천을 빌려주거나 기술이 없어 취직 못하

고 있는 사람들이 기술을 배워 자격증을 딸 때까지 교육비

를 빌려주는 일을 하겠다』

배반의 현장

이런 소문이 지역에 퍼지자 어떤 주민은 찾아와 말했다.

『저를 좀 밀어주시라요. 저에게 니야까(손수레) 한 대에 사

과 열 접 값만 있으면 사과장사해서 일어서 보겠습니다요』

나는 그와 대화하면서 사과 열접과 손수레 한 대에 얼마나

들겠느냐고 물은 후 그 돈을 교회에서 마련해 드릴 테니 이

자는 안 붙이더라도 원금은 갚겠느냐고 확인했다. 그는 당

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물론입죠. 그 돈이 어떤 돈이라고 떼어먹겠습니까요. 이자

를 왜 안 붙여요! 이자도 물어야지요. 그 돈을 안 물다가는

마른 하늘에 벼락 맞을 일이지요』

나는 그의 다짐을 들은 뒤 대학 친구를 찾아갔다.

『너도 크리스천이니 무언가 하나님의 일에 참여해야 되잖

겠느냐? 직장인이어서 다른 일은 못할 테니 물질로 해라.

그렇다고 월급쟁이에게 그냥 헌금하라고 하지는 않는다. 몇

달 간 빌려주라. 이자는 못 내지만 원금만큼은 꼭 갚을게.

그 돈으로 없는 사람 장사시켜서 자립하게 하려는 거다』

나의 말을 들은 Ä

『네었다. 너를 일컬어 친

구들이 한국교회의 양심이라고 말하더구나. 주민들에게 사

업을 시키기 위해 필요한 자금을 빌려달라고 했는데…. 글

쎄, 그 일이 잘 될까? 내 생각에는 실패로 끝날 것 같은

데…』

『글쎄, 실패하더라도 해 봐야 할 일인 것 같아서 일단은

주민들을 믿고 맡기는 수 외에 다른 도리가 없지 않겠냐』

『그래 어쨌든 돈은 내가 빌려 줄 테니 네 생각대로, 믿음

대로 되기를 바란다』

이렇게 친구, 친지들로부터 기금을 마련한 나는 일해서 자

립해보겠다는 주민들을 불러 말했다.

『원하시는 자립기금을 오늘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말씀 드

린대로 이자는 받지 않을 테니 원금은 꼭 갚아주십시오. 제

돈도 아니고 교회 돈도 아니고 아는 분들로부터 갚아드리겠

다고 하고 빌린 돈입니다』

『아이구, 그럼요. 암 갚구말구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목숨

걸고 갚겠습니다』

『목숨까지 걸 건 없구요. 신용만 지켜 주시면 됩니다』

『신용에 대해서는 염려 놓으십쇼. 이래도 동리에서 알아주

는 신용가입니다』

나는 약속을 지키겠다는 표시로 「서약서」를 쓰게 했다.

<서약서>

나 ○○○는 활빈교회로부터 자립기금 ○○원을 빌려 사과

장사를 하여 지금으로부터 여섯달이 되는 ○월○일까지 갚

겠음을 약속함.

1972년 월 일

○ ○ ○

그는 중고 손수레를 한 대 사고 사과 10접을 사서 노점을

차리고 장사를 시작했다. 그런 소식을 듣고 어떤 분은 자전

거 한 대와 밑천 얼마만 있으면 고물장사를 하겠노라 했고,

어떤 이는 용접기술을 배워 중동에 가겠노라고 신청했다.

우리는 한분 한분 신중히 살펴서 가능한 범위에서 지원해

주었다. 나는 그렇게 장사를 시작한 가게들을 수시로 방문

하여 고생스럽겠지만 열심히 살자고 격려하였다. 그런데 막

상 갚을 때가 되자 문제가 생겼다. 어느 날 주민 한 분이

찾아와 말했다.

『선생님, 예배당 돈 대 줘서 사과장사하게 한 사람 이사

간 걸 아십니까요?』

『아뇨, 어제도 길에서 장사하고 있는 걸 보았는데요』

『아이고 선상님, 순진도 하셔라. 어제 저녁에 집 권리금 받

아서 이사갔구만이라요』

돈을 갚을 때는 되었는데 모은 돈은 없자 다른 곳으로 떠나

버린 것 같았다. 찾아와서 그런 사정을 말해주고 다시 시작

했으면 되련만 애석하기 그지없었다. 이런 비슷한 경험들이

여러건 반복되자 나의 고민은 깊어갔다. 이런 식으로는 경

제자립도 선교도 아무것도 되지 않겠다.

선동하라, 조직하라, 데모하라

그런 때에 교회협의회(NCC)측의 소개로 한 미국인이 빈민

촌을 찾아왔다. 알린스키(Saul Alinsky)란 이름의 대중운동

가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미국 시카고에서 CO운동

(Community Organigation Movement)을 하고 있는 사람으

로 그 방면에서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대가라 했다.

그가 와서 청계천 빈민촌을 두루 살펴보더니 나에게 실무자

들을 모아달라고 했다. 함께 일하는 핵심 일꾼들이 모였더

니 우리 앞에서 그가 말했다.

『This is Hell(이것은 지옥이다). 세상에 이런 Slum(빈민

촌)이 있는 줄 아느냐. 당신들 무얼하고 있느냐? Pleace

Agitate(선동하라) Organige(조직하라) 그리고

Demonstrate(데모하라). 서울 시청에 몰려가서 시장실을 점

령해라. 그러면 아파트 나온다. 부잣집에 쳐들어 가라. 방도

많고 시설도 좋다. 그렇게 해서 문제를 일으켜라. 그렇게 해

서 서민주택 프로젝트를 따내라. Power is in People(힘은

백성들 속에 있는 거다)』

나는 그의 말을 듣고 속이 시원했다. 현대의 복음은 그래야

한다. 구제품 가져다 주고 돈 빌려 주고 이런 식으로 할 것

이 아니다. 그런 방식은 지난 시대의 낡은 방법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전하신 복음도 시대의 변천에 따라 그 적용하는

방법이 바뀌어 나가야 한다.

지금까지 하던 선교방식을 지양하고 알린스키가 지적하는

바대로 행동하는 방식으로 주민들의 필요를 채워주고 문제

들을 해결해 나가는 방식으로 빈민선교를 하자는 생각을 하

게 되었다. 그날로부터 나는 알린스키의 제자가 되어 그의

이론을 배우고 배운대로 실천했다.

즉시 주민조직을 시작하였다. 청계천 판자촌 주민회를 조직

하여 회장, 부회장, 사무장 등을 민주적 선거로 선출하고 주

민회 산하에 다섯 분과위원회를 설치해 지역 내 문제들을

주민 스스로의 노력으로 해결하여나가도록 힘썼다.

다섯 분과는 주민교육 위원회, 건강관리 위원회, 소득증대

위원회, 조합 위원회, 개발종사단이란 이름의 협동 위원회였

다.

이렇게 주민 자치활동을 펼쳐나가니 교회와 지역 사회는 활

기를 띠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주민들이 교회당에

들락거리게 되고 교회당이 지역사회의 중심이 되었다.

나는 그런 결과에 만족하여 진작에 이런 방식으로 선교를

하였어야 되는데 밀가루 날라다 주고 돈 빌려다 꿔주고 하

느라고 힘만 들었지 열매는 없었던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데 그렇게 하기를 4~5개월이 지나자 문제가 일어나기 시작

했다.

주민회 지도자들 안에 다툼이 생기고 주류니, 비주류니 하

는 파벌이 생겨나더니 끝내는 주먹다짐까지 일어나고 서로

가 입에 거품을 물고 비방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니 마을

분위기가 뒤숭숭하고 교회도 은혜스럽지 못하기가 그지없었

다. 그렇게 되자 이웃 사람들이 원망하는 소리가 내 귀에까

지 들려왔다.

『안 그래도 시끄러운 동네가 교회 땜에 더 시끄럽구먼. 저

쌈패들 데리고 교회가 딴 곳으로 가버렸으면 좋겠다』

이렇게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흐르자 하루는 주민회에

소속된 핵심 일꾼들을 몽땅 교회로 소집했다. 30여명이 모

인 자리에서 내가 말했다.

『여러분 도대체 어떻게 된 것입니까? 먹었다, 안 먹었다

싸움들을 해서 동리는 소란하고 인심만 사나워지고 여간 난

처한 일이 아닙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탁 터놓고 이바구들

해 봅시다. 모두 좀 사나이다워집시다. 깨놓고 속시원하게

이야기들 해보시라구요』

내가 이렇게 판을 펴기 시작하자 먼저 비주류측에서 일어서

더니 말했다.

『우리 입은 빼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하랬다고 바른대로 말

합시다요. 저 친구들 순 사기꾼들이라구요. 예배당에서 대주

는 돈 갖고 술이나 먹고 손금이나 보고(화투놀이를 말한다)

순 엉터리들이라구요. 저 친구들이 사라져야 이 마을이 사

람 살 만한 마을이 됩니다요』

이 말에 소위 주류측에서 가만 있을 리 없다. 주류측의 대

표인 주민회 회장이 일어나더니 혈기를 높여 말했다.

『뭐이라고 내가 돈 먹었다? 니가 내 돈 먹는 거 봤냐?』

『그래 봤다. 만날 술 먹고 댕기던데 뭔 돈으로 먹노』

『그래 내가 술 먹으면 내 돈으로 먹지 공금으로 먹겠냐?』

『아따 니가 뭔 돈이 있어 그렇게 헤롱대고 다닐끼고』

『그─으래 내가 술 먹는 것 봤다 이거지. 분명히 봤것다.

이누무 새끼들이 사람 잡을라고 작정들 했것다』

칼부림 불러온 주류와 비주류 싸움

그는 벌떡 일어나더니 교회당 출입문을 열고는 휑하니 밖으

로 나갔다. 나는 그가 분을 삭이느라 밖으로 나간 줄로만

알고 이런 자리에서는 상대방의 인격에 손상을 주는 너무

자극적인 말을 삼가고 대화로 풀어나가야 한다는 말을 하고

있는데 밖으로 나갔던 그가 큼직한 식칼을 들고 들어 왔다.

그는 그 칼로 다른 사람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상의를

걷어올리더니 눈에 살기를 띠고 말했다.

『그래 너그들 내가 돈 먹는거 봤다고 했것다. 내 배때기

안에서 돈 나오는가 보자. 내가 돈을 먹었으면 분명히 내

창새기 속에 돈이 들었겄제』

그러면서 식칼로 자기 배를 그었다. 마치 일본 사무라이들

처럼 배의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북 그으니 피가 사방으로

튀고 난리판이 벌어졌다. 그는 고통으로 이를 악물며 악을

썼다.

『봐라, 이 새끼들아 내 창새기에 돈이 들었냐─』

나는 질겁을 해서 쓰러지는 그를 부축하며 말했다.

『누가 빨리 가서 택시 불러 오세요』

몇사람이 후닥닥 택시 부르러 밖으로 나갔다. 방에 뛰어들

어가 흰 천을 가져다가 배에 동이며 몇사람이 부축해 청계

천 둑 위로 올라가는 동안에 택시가 도착하였다. 얼른 태워

가까운 한양대부속병원으로 갔다.

그야말로 하늘이 도우셔서 생명을 건지게 되었는데 그뒤가

문제였다. 치료될때까지 병원에서 조용히 있다가 완치되면

퇴원해야 하는 것인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마을일 하다가

누명을 쓰고 오죽이나 억울했으면 자기 배를 갈랐겠느냐는

동정이 일어 주민들이 병실을 방문하고는 머리맡에 5백원도

두고 오고 1천원도 두고 온 게 화근이었다.

그렇게 모인 돈이 제법 되자 밤 늦게 간호원들이 한눈 파는

사이에 병실을 나가 포장마차에 가서 소주를 홀짝홀짝 마셨

다. 그렇게 해서 술기운이 돌아 기분이 거나하게 되자 그는

소독도 안 된 손으로 상처를 북북 긁으며 『아─신라의 바

야암 이이이여…』하고 노래를 불러대며 병실로 되돌아왔

다. 간호원이 그런 모습을 보고 질겁을 했다.

『그러시면 안됩니다. 수술한 자리에 그렇게 상채기를 내면

죽습니다』

『시끄러 이 가시내야, 죽으면 내 죽지 니 죽냐?』

아니나 다를까. 감염되어 상처가 악화되더니 죽고 말았다.

그가 시체로 변하자 마을 분위기는 심각해졌다. 나는 그를

염하여 벽제 화장터에 가서 화장하고는 조그만 재봉지를 하

나 만들어 교회당으로 왔다. 강대상 아래 그 재봉지를 놓고

는 꿇어 앉았다. 앉은 채로 이틀밤을 지새며 기도했다.

『하나님 제가 빈민촌에 잘못 들어온 것입니까? 그만두고

나가야 할까요? 저는 빈민선교 할 자격이 없지요? 사람 살

리려고 들어왔다가 살리지는 못하고 죽게 하였으니 어떻게

선교를 계속하겠습니까? 지금까지 하던 모든 일을 중단하고

이 마을을 떠날까요?』

나는 너무나 상심되고 막막하여 드린 기도를 자꾸만 되풀이

하며 앉아 있었다. 그런데 3일째 되는 날 아침 나절에 예수

께서 40일 금식기도를 마치신 후 광야에서 시험 받으시던

때의 말씀이 떠올랐다. 「마태복음」 4장의 말씀이다.

갈림길에 서 있는 지금의 내 모습이 마치 광야에서 홀로 시

험을 받으시던 예수님의 모습과 흡사하겠거니 하는 생각이

들어 본문 성경을 펼쳐 들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시험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마태복음 4장:1~4

절)

이 부분을 조용히 성찰하는 중에 깨달음이 왔다. 그리고 그

깨달음에 이어 다짐이 왔다. 그 깨달음이란 내가 빈민선교

를 그릇된 바탕에서 해왔다는 깨달음이었다. 예수의 말씀에

비추어 말한다면 빈민촌에 살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내

가 전해 주어야 할 바의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하는데, 나는 말씀은 빠뜨리고 떡만, 경제만 주려 하다가 말

씀도 떡도 아무것도 주지 못하고 있다는 깨침이었다.

예수가 말하신 내용은 떡이, 경제가 필요없다는 말이 아니

었다. 떡이 꼭 있어야 하지만 먼저 있어야 할 것이 있다. 바

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인간에게는 경제만 있어서는 인간구

실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하늘에서 임하는 말씀이 있고 그

위에 경제가 있어야 한다는 내용이다. 그날 아침 나는 깊이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빈민촌에서 행했던 선교활동을 찬찬

히 반성했다.

「내가 빈민들을 돕겠다는 동기 만큼은 순수했지만 그 내용

에 있어서는 과오를 범했구나. 빈민이든 부자든 무식한 사

람이든 유식한 사람이든 그가 인간인 이상에는 인간에게 먼

저 필요한 것이 있는 것인데 그것이 제대로 채워진 다음에

떡이, 물질이 의미가 있는 것인데 내가 그 문제에 대해 스

스로 바른 인식을 가지지 못했었구나. 그래서 이런 비극이

일어나게 된 것이로구나」

이런 생각은 다짐으로 이어졌다. 내가 빈민선교를 그만둘

것이 아니라 본질에 접근하는 방식으로 제대로 해야겠다는

다짐이었다. 그 제대로 한다는 것은 다름 아니라 「말씀의

기초 위에 세워지는 자립경제」란 방식이다.

그래서 나는 각오를 새롭게 하고는 다시 출발할 수 있었다.

이제 청계천에 들어간 후로 나 자신이 먹을 것이 떨어졌었

던 때의 이야기로 되돌아가겠다.

청계천에 들어갈 때 큰돈은 아니었지만 우리 가정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예산을 몽땅 들고 들어갔었다. 그 예산을 이

리저리 다 소비하고 나 자신과 가족이 굶어야 할 처지에 이

르게 되었다. 그때의 일기장을 보면 이렇게 적혀 있다.

「71년 11월26일 맑음.

이곳에 활빈교회 간판을 달고 창립예배를 본 지도 50여일이

지났다. 어제 저녁을 굶어서 그런지, 새벽기도회에 일어날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이불 속에서 『여호와 선하신 목자

되시고 나는 그 기르시는 어린 양…』을 부르다가 생각했

다.

제2라운드의 고비를 어떻게 넘길까? 예상보다 훨씬 빨리 경

제공황에 부딪히게 됐는데, 해결의 실마리가 잡히지 않는다.

며칠째 수제비로 살아온 터에 이제 동전 한 푼 없게 됐으니

움치고 뛸 수가 없다.

웃목에 누웠던 영준이가 배가 너무 고파 뱃가죽이 당긴다고

해서 아내와 셋이 웃었다. 그래도 아내는 용하게 참는다. 애

기 젖 물리고 며칠씩 굶어온 터에 불평없이 웃을 수 있으니

대견한 마음이 든다. 하지만 퍽 미안하다. 평생 처음 겪는

시련일 텐데….

아침 8시경이 되니 골치가 띵하고 속이 메슥메슥한 것이 빈

혈증이 나는 것 같다. 배고픈 것이 가장 큰 설움이라고들

하더니, 이래서 하는 말인가 보다. 교회 재정을 위한 장기적

인 대책이 있어야겠다. 애초에 자립자활을 목표로 외부의

보조를 거절한 것이 지나친 행동이었던가? 누군가가 나를

「돈키호테다. 얼마 못가 넘어질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새로운 의미의 교회니 비록 배고프고 고달플지라도

한발짝씩 다지며 스스로 쌓아야 한다. 하나님이 이 교회를

기뻐하신다면 틀림없이 길이 열릴 것이다. 그러나 배고픈

건 고픈 것이다. 참기 힘들다. 우선 무얼 좀 먹어야겠는

데….

아내가 부엌에서 분유를 끓여 왔다. 한 사발 들이켜니 한결

살 것 같았다. 문제는 우리가 굶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배

부르게 먹고 있던 지난날부터 이 동리의 여러 가장은 굶어

왔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어떻게 이렇게나 고통스러운 굶주림을 견뎌내고 있

을까?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일까? 기아의 신에 순종하고

있다고나 할까. 아무런 요구도, 아무런 항의도, 아무런 몸짓

도 없이 찬 방에 누워 있는 얼굴들을 보아왔다. 이제 내가

직접 당해보니 상상 이상으로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왜 이런 고통스러운 기아에서 뛰쳐나오지 못하고 있

는가?

습관이 됐기 때문일까? 사회제도 때문일까? 잘못된 정책

때문일까? 사회구조의 희생자들일까? 아니면 개인의 무

능·나태·부패 때문일까? 한번 빈민촌에 떨어지면 일생을

벗어나지 못하는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 더러는 그들의 의

식구조 탓이다. 그들은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는 정신구조

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애초에 빈민이 될 수밖에 없는 인

간 됨됨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절

대로 잘못된 생각이다.

지금 나 자신도 굶어 기운이 쇠진하게 되니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게 되고 현실을 타개해 나갈 기력이 없지 않는가?

그러니 무기력과 무능은 빈곤에서 오는 결과지 그 원인은

될 수 없다. 어쨌든 나는 오늘부터 남을 돕기 이전에 나 자

신, 내 가족의 굶주림부터 해결해야 한다.

우선 나 자신부터 빈곤에서 해방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

다. 그래야 빈곤에서의 해방을 설교할 수 있을 것 아닌가?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결해 나갈 것인가? 취직? 장

사? 모금? 여러 가지로 생각해도 묘수가 떠오르지 않는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곳 주민들도 할 수 있는 수준에서

해결의 길을 찾아내는 것이다.

내가 교사가 되든지, 큰 교회의 보조를 받든지, 여타 외부의

보조를 받는 식으로 해결하는 것은 이곳 주민들은 따라 할

수 없는 방법이다. 주민들도 누구든지, 언제든지, 마음만 먹

으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이 고비를 넘겨야 한다.

그래야 주민들이 나에게 『당신은 우리들과는 다른 특별한

사람이니 그렇게 할 수 있지, 우리같이 못 배우고 가난에

찌들어 살아온 처지에서야 그렇게 할 수 있나요?』라고 변

명할 수 없을 것이다.

이곳 주민 대개는 농촌에서 무작정 상경한 이농민들인지라

기술도 없고 재능도 없이 몸 하나만 가진 사람들인데, 이

삭막한 서울 땅에서 무얼 해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이

들이 할 수 있는 것으로 내가 할 수 있을 것이 무엇일까?

그렇다! 넝마주이다! 넝마주이가 되어 지금의 처지에서 한

번 일어서보아야겠다」

『나도 처자식 먹여 살려야 하지 않는가!』

이상이 71년 11월26일에 쓴 일기문이다. 그 주간 주일 예배

때에는 허기가 들어 설교를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며칠

굶고 물만 한 사발 벌컥벌컥 들이켜고는 예배를 인도하려고

강대상 앞에 서 있었는데 기력은 없고 웬일인지 구토증이

자꾸 일어나며 어질어질했다.

그런 중에도 성경본문을 읽어놓고 설교를 시작하려고 교인

들을 내려다 보노라니 교인들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

다. 교인들 얼굴이 마치 밥그릇처럼 보였고 아이들 얼굴은

반찬그릇으로 보였다. 내가 먹지 않고는 설교도 못하겠구나

하고 생각하는 터에 나를 쳐다보고 있는 교인들 중에 넝마

주이로 있는 최군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얼굴은 보자 내가 썼던 일기문이 생각이 나서 예배 후

에 대화를 나눠야겠다고 생각했다. 경황없는 중에 그런대로

예배를 끝낸 후에 나는 최군을 불러 말했다.

『자네 따라 넝마주이 나갈 수 있겠는가?』

『누가 나갈 것입니까?』

『누구긴 누구야, 내가 나가는 거지』

『에이 전도사님, 농담 마십쇼』

『내가 농담을 하겠는가. 자네도 알다시피 활빈교회는 자립

정신으로 세워진 교회 아닌가? 교인들과 이 마을의 주민들

에게 우리 교회의 자립정신을 가르쳐 주려면 교회가 먼저

외부 보조없이 자립하는 교회, 자립하는 신앙을 보여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상은 그런데 교인들이 내는 헌금이래야 한 주일에

2백~3백원에 지나지 못하네. 나도 먹고 살아야 할 것 아닌

가? 그래서 며칠 도대체 무얼 해야 살아갈 수 있을까를 생

각하다가 자네와 같이 넝마주이를 하고픈 생각이 들었던 거

라네. 자네 혹시 나를 거절하지는 않겠지?』

『아니 전도사님. 말씀을 이해는 하겠는데요, 그래도 어떻게

전도사님이 넝마주이 같은 천한 일을 하겠습니까요?』

『자네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 건가? 자네 설교시간에 설교

를 제대로 듣지 않는게로구먼? 먹고 사는 일에는 귀하고 천

하고가 따로 없는 법이야. 내가 이 마을에서 몇 달 살아보

니까 제일 천한 것은 처자식 굶기는 일이고, 그다음 천한

것은 남의 도움 받고 사는 것이더라고…. 자기 힘으로 살겠

다는 건 다 귀한 것이야. 그래서 나도 넝마주이 해서 내 힘

으로 살겠다는 거야. 내 말 알아듣겠나?』

『전도사님, 잘 알아들었습니다. 참 멋진 생각인데요, 전도

사님 말 듣는 중에 내 기분이 좋아집니다. 좋습니다! 한 번

해봅시다. 같이 한 번 뛰어 봅시다요』

이리하여 나는 넝마주이로 입문(入門)하게 되었다. 내 처지

에 넝마주이가 좋았던 것 중 하나는 다른 무엇보다 개업하

기가 쉬웠다는 점이었다. 망태 하나에 9백원, 집게가 40원,

합하여 9백40원을 투자하니까 업자가 될 수 있었다. 필수품

인 손수레는 최군이 쓰는 것을 당분간 같이 쓰기로 했다.

다음 날 나는 신학교에 가서 동급생들에게 4천원을 빌려왔

다. 밀가루 한 포를 사고 3천원은 깊숙이 넣어두었다. 넝마

주이에 투자할 몫이었다. <다음호에 계속>

다음날 새벽 나는 최군을 따라 나섰다. 부지런해야 일도 할 수 있

었다. 아침ぜ┐é 청소차가 골목골목 다니며 휴지들을 다 싣

고 가버리기 때문에 청소차가 오기 전 이른 시간에 골목들을 누비

며 쓰레기통을 뒤져야 했다. 나는 새벽기도회를 마치고는 곧바로

일터로 나갔다. 인적 없는 새벽길을 걸으며 최군에게 물었다.

『넝마 일을 열심히 하면 하루 얼마씩이나 벌게 되는가?』

『그야 하기 나름이죠. 주인 없는 물건만 줍고 다니면 하루에 1

천~2천원 벌이가 될 거고 주인 있는 물건들도 적당히 주워 담으면

5천~6천원 벌이는 됩니다요』

『아니 이 사람아, 주인 있는 물건과 주인 없는 물건이라니 도대체

무슨 말인가?』

『허 전도사님도 그런 걸 꼭 물어야 하나요? 눈치껏 감을 잡으셔야

지. 주인 있는 물건이란 집에 들어가서 아직 쓰고 있는 세숫대야나

알루미늄 밥솥 같은 것들을 들고 나오는 것이고, 주인 없는 물건이

란 말 그대로 쓰레기통이나 길가에 버려진 물건들이지요』

『아니? 그럼 넝마주이는 쓰레기통만 뒤지는 것이 아니라 남의 집

세간살이도 주워오는 겐가?』

『옳은 말씀입니다요. 전도사님도 지금은 초보니까 그럴 수 있느냐

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일당도 제대로

건지지 못합니다. 전도사님, 성인도 시속을 따르라는 말 아시지요?

좌우지간 전도사님도 이 판에 한 달만 뒹굴고 나면 생각이 달라질

겁니다』

『그래? 그럼 그 문제는 한 달 뒤에 생각하기로 하고 당장은 열심

히 주워담는 일부터 하세』

『좋습니다, 전도사님. 넝마주이에도 노하우(know-how)란 게 있으

니까 내 뒤를 바짝 따라붙으며 요령을 배우십쇼. 우선 종이에도 3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누렁이」라고 해서 밀가루포대나 시멘

트포대, 박스 종이 같은 노란 종이들입니다. 종이들 중에서는 가장

값이 나갑니다. 둘째는 신문지입니다. 셋째는 「오색지」라 합니다.

누렁이가 가장 값나가고 신문지가 다음이고 오색지는 싸구려입니

다』

첫날 나는 최군을 따라다니며 쓰레기 종류들을 익히고 취급하는 요

령도 익혔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할 만한 일이었다.

월급 뺏고 겁탈까지 하는 불량배들

그날 밤 11시경에 마을 불량배들이 밤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소년

직공을 때리고 월급을 몽땅 빼앗은 일이 발생했다. 얻어맞고 돈까

지 빼앗긴 소년은 코피를 흘리며 울고 있었다. 나는 소년을 교회당

으로 데려와 피를 닦아주며 사정을 물었다.

소년의 집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 어머니와 두 동생 모두 네 식

구가 살고 있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 심장병이 생

겨 물도 못 길으신다고 했다. 『네가 받아오던 월급이 얼마였느

냐』고 물으니 5천3백원이라고 했다. 나는 주머니 속 깊이 넣어두

었던 3천원을 주었다.

매월 말일께 월급 받는 날이 되면 불량배들이 길목을 지키고 있다

가 지나가는 공원들의 월급봉투를 빼앗는 일이 종종 발생했다. 더

구나 여자 공원들의 경우에는 몸에도 손을 대곤 했다. 늦은 밤에

『사람 살려주세요』 『도와주세요』 하는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리

곤 했다. 그런 비명소리가 들려도 마을 사람들은 못 들은 척 하고

만 있었다.

하루는 비명소리가 유달리 크게 들리기에 손전등을 비추며 소리나

는 쪽으로 뛰어갔다. 일부러 높은 소리로 『여기 사람들이 가요!』

하며 뛰어갔더니 둑 아래쪽에서 젊은이 셋이 내 쪽을 향해 험한 눈

길을 주며 말했다.

『어떤 새끼야? 뒈지고 싶어 환장했냐? 칼로 그어버릴까 보다』

나는 손전등을 요란스레 흔들며 말했다.

『조금만 기다려요. 지금 도와주러 가고 있어요』

그들 셋 중 하나가 『야, 김샜다. 가자』 하며 돌아서 걸으니 다른

두 명도 못마땅한 듯 따라갔다. 한 명은 바지춤을 끌어올리며 뒤따

르고 있었다.

그들이 있던 곳으로 가보았더니 20세 안팎의 처녀가 울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을 보기가 민망하여 발치만 비추어주며 『다친 데는 없

어요?』 하고 물었으나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울며 가버렸다.

나는 마을 사람들과 의논하여 방범대를 조직하여 주민들을 보호해

야겠다고 생각했다. 경찰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힘없는 주

민들이 당하고만 있으니 교회라도 이런 일에 관심을 기울여야겠다

는 생각이 간절했다.

다음날 넝마주이를 나가려니 추렁값 9백40원이 없었다. 걱정을 하

고 있으니 아내가 1천원을 주었다. 나는 의아해서 물었다.

『아니 어디서 거금 1천원이 나왔어요?』

『이럴 때 쓰려고 비상금으로 두었던 돈이에요』

『그럼 지난번 굶을 때 어떻게 안 쓰고 있었어요?』

『굶을 때라도 양식 사먹는 것은 소비니까 안 썼고 추렁 사는 것은

생산에 투자하는 것이니까 내놓는 거예요』

일터를 향해 집을 나서는데 아기를 업은 한 부인이 우리 방을 넘겨

다보고 있었다. 이른 시간에 그런 모습으로 서 있는 부인에게 무슨

사연이 있을 것 같아 다가서며 물었다.

『부인, 교회에 무슨 볼 일이 있으신가요? 저는 이 교회 전도사입

니다』

그러나 부인은 고개를 숙인 채 대답이 없었다. 아내를 불러내 아내

에게 사정을 말하게 했더니 그녀는 들릴락말락 기어드는 소리로 말

했다. 아기 아빠는 술을 먹고 사람을 때려 감옥으로 갔고 자신은

산월(産月)이 가까워 친정으로 가서 몸을 풀려고 한다고 이야기하

고는 다시 침묵을 지켰다.

아내가 눈치채고 『여비가 없느냐』고 물으니 그녀는 고개만 끄덕

였다. 아내는 나를 보더니 『여보, 아까 그 돈 1천원 줍시다』며 힘

없이 말했다. 나는 추렁 사려던 돈 1천원을 그녀에게 주었다. 그녀

는 아무 말 없이 갔다. 숙였던 고개를 들어올릴 때 그녀의 눈에 눈

물이 비칠 따름이었다.

쥐약 먹고 죽은 개는 「훌륭한」 보신탕

나는 추렁을 마련하지 못한 채 최군을 따라다니며 넝마주이 요령을

익혔다. 넝마라고 아무것이나 주워담는 것이 아니었다. 돈이 되는

물건들을 골라 담아야 하는 것이다.

쓰레기에도 종류가 있고 그 종류에 따라 이름이 있었다. 나는 최군

의 조수가 되어 쓰레기 종류와 이름을 익혀나갔다.

어느 호화주택 앞에 있는 쓰레기통에서 최군은 비닐에 싸여 버려진

밥을 주워 추렁에 담았다. 그리고 다음 집 쓰레기통에서는 닭다리

몇 개를 주워담았다. 나는 최군에게 물었다.

『이 사람아, 버린 밥이나 닭다리는 왜 주워 담는 겐가?』

『끓여서 점심할 겁니다』

『아니 이 사람아. 그 더러운 음식을 우리가 먹겠다는 겐가?』

『전도사님, 넝마주이는 더럽다는 생각을 버리는 날부터 할 수 있

습니다. 그냥 먹는 게 아니고 끓여서 먹으니깐 일 없습니다. 전도사

님도 아직은 초짜니까 더럽다는 생각이 들지만 며칠만 지나면 생각

이 싹 바뀔 겁니다』

손수레 있는 곳에 이른 최군은 나무토막들을 주워 모아 불을 지피

고는 주워온 비럭통을 들고 가까운 주택으로 달려가 물과 김치, 된

장 등을 얻어왔다. 비닐에 싸인 밥을 비럭통에 넣고 된장, 김치 등

에 버무려서는 불 위에 얹었고 닭다리는 툭툭 털더니 불에 구워서

는 내게 먹으라고 권했다. 나는 먹을 마음이 들지 않아 사양했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닭다리 대여섯 개를 단숨에 먹어치우고는 비

럭통으로 다가앉았다. 나는 속이 메슥거리는 것을 꾹 참으며 잡탕

밥을 함께 먹었다. 어차피 넝마주이로 들어선 이상, 이 밥 저 밥 가

릴 처지가 아니란 생각이 들어 억지로나마 먹었다.

최군은 식사하면서 넝마주이 생활의 편리함을 자랑했다. 넝마주이

는 무엇이든 다 쓰레기통에서 조달하여 쓸 수 있다. 쓰레기통이 우

리들의 보급창이다. 재떨이 비닐장판 냄비 이불 석유곤로 등으로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이 쓰레기장으로 나온다. 그는 식사하는 중

에 시종일관 「넝마주이 예찬론」에 열을 올렸다. 실제로 그의 방

은 쓰레기장 출신 가구들로 장식돼 있었다.

오후에는 수도여자사범대학 뒤편을 돌다가 어느 쓰레기 집합장에서

죽은 개 한 마리를 보았다. 아마 쥐약 먹고 죽은 쥐를 먹다가 죽은

개 같았다. 그런데 최군은 죽은 개를 보더니 반색을 하며 다가가

추렁을 내리고는 시멘트 포대지로 개를 둘둘 말아 추렁 속에 넣었

다. 그는 이빨이 드러나게 싱긋 웃으며 『오늘 전도사님과 함께 다

니니 재수가 좋은데요!』 했다. 나는 그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최군, 쥐약 먹은 개 같은데 왜 추렁에 담는 거지?』

『쥐약 먹고 죽었더라도 창자를 훑어내고 요리하면 아무 일 없습니

다요. 오늘 저녁에 제가 기똥차게 요리할 테니 우리집에서 쇠주 파

티 한판 벌입시다』

『이 사람아, 사람 기절하게 하지 말게. 그 개 버리세. 자네 누굴

죽이려고 그러나?』

『아녜요, 전도사님. 이 개를 보신탕 집에 가져가면 당장 5백원은

받습니다요. 우리가 보신탕 집에서 먹는 개고기가 어디 성한 개 잡

은 고긴 줄 아세요? 우리 넝마주이들이 죽은 개를 주워다 팔면 그

걸로 보신탕 끓이는 겁니다. 그러나 오늘은 5백원에 팔기 아까우니

집에 가서 요리해 먹읍시다』

나는 더이상 말하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날 저녁 최군 집에서

소주 파티가 열리고 있었다. 큼직한 양동이에 개대가리가 얹혀 있

고 소주 대여섯 병이 준비돼 있었다. 마을 청년 대여섯 명이 최군

을 중심으로 둘러앉아 주빈인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차려진 개고깃상을 앞에 두고 나에게 먼저 한 점 들라고 권

했다. 귀한 음식이니 내가 먼저 시식을 하여야 자기들이 먹겠다는

것이다. 나는 심히 난처했다. 그 고기의 내력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도저히 먼저 먹을 수가 없었다. 그 고기를 먹으면 개의 몸에 퍼져

있던 쥐약이 내 몸에도 금방 퍼질 것만 같았다. 나는 나의 불안감

을 겉으로 드러낼 수 없어 시치미를 떼고 말했다.

『아―니 이런 자리에 상하가 있는가? 각자들 드세나. 자, 체면 차

리지들 말고 어서들 들라니까』

내가 손을 저으며 뒤로 빠졌더니 성질 급한 최군이 『그래, 오래

기다렸으니 어서 시작하자구』 하며 고기를 뜯어 소금에 꾹꾹 찍어

먹기 시작했다. 모두들 신나게 달려들어 먹으며 소줏잔을 연방 비

워댔다.

나는 내심 불안한 마음으로 젊은이들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개다

리 한쪽은 이미 뼈만 남고 갈비짝으로 손들이 옮겨져 있었어도 아

무도 배가 아프다거나 어지럽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괜찮은

모양이로구나 판단하고 조금씩 먹기 시작했다.

이렇게 배운 후로는 넝마를 줍다가 죽은 개를 보면 주워다 최군에

게 주었고 최군은 정성껏 요리해 밤에 파티를 열곤 했다. 어느덧

익숙해진 나는 누구에게 질세라 기세좋게 고기를 먹어대게끔 되었

다.

교회에 침입한 웃기는 강도

처음 넝마주이를 나갔던 날 집에 돌아오니 친구가 보낸 3천원이 와

있었다. 「좋은 일에 고생하고 있다니 끝까지 견뎌 좋은 열매를 거

두기 바란다. 적은 돈이지만 격려의 뜻으로 보낸다」는 편지가 동

봉돼 있었다.

우리 부부는 아침에 그 부인에게 1천원 주기를 잘했다고 이야기했

다. 1천원을 주었더니 세 배로 받은 것이라 생각되었다.

나는 밤늦게 돌아와 피곤에 지쳐 잠에 곯아 떨어졌다. 잠결에 누군

가가 깨우는지라 눈을 뜨니 손전등 불빛이 나를 비추고 있었다. 빛

이 약해져 희미한 손전등이었다. 일어나 앉으며 살펴보니 주민 중

한 사람이 잭나이프를 내 코 밑에 대고 있었다. 칼은 칼인데 아이

들 장난감처럼 작은 데다 녹슬고 날이 무뎌진 것이었다. 나는 웬일

인지 웃음이 나서 씩 웃으며 물었다.

『어르신네, 왜 그러세요. 웬 칼이에요? 병신도 가지가지라더니 칼

도 가지가지구먼요. 들 것 같지도 않은 칼을 들고는 왜 이러십니

까?』

『목사! 목사는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대준다지? 나 노름하다 판

돈 떨어져 왔는데 돈 좀 꿔줘. 내 꼭 갚을게』

『돈 빌리러 오시면서 칼 들고 오셨어요? 누가 보면 강도 든 걸로

오해하겠습니다』

그는 무안한 듯 칼을 주머니에 넣고는 우거지상을 하고는 사정조로

말했다.

『이 미친 애비가 자식새끼 월급 타다 논 걸로 노름을 했는데 몽땅

날렸소이다. 그 돈을 메워 놔야 집구석에 들어가지, 빈손으로는 도

저히 들어갈 수 없수다. 죽은 사람 살리는 셈치고 돈 좀 꿔주시라

요』

나는 그를 도와주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으나 하여튼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친구가

보낸 3천원을 주며 말했다.

『이 돈은 어르신네의 노름돈으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아드님의 월

급을 날리셨다니 그 금액을 보충하는 데 다소나마 보태시라고 드리

는 겁니다. 좋게 쓰십시오』

그는 액수가 적어 다소 불만인 듯했으나 『어쨌든 고맙소이다』 하

고는 나갔다.

노름해서 딴 돈, 헌금으로 들어오다

다음날 꼭두새벽에 누가 찾아왔다며 아내가 잠을 깨우기에 눈을 비

비며 나갔더니 지난 밤에 밤손님으로 오셨던 그 어른이었다. 나는

다시 찾아온 것이 마땅치 않아 문간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돌려보내

려 했더니 그는 굳이 방으로 들어오겠다고 했다. 주인인 나보다 앞

서서 방 안으로 들어오려 했다. 나는 그를 교회당으로 데려갔다. 교

회당이래야 흙바닥에 가마니를 깔았고 창에는 창틀만 있었지 유리

도 미처 끼우지 못한 터였다.

지붕은 비가 새 밖에서 가랑비가 올 때 교회당 안에는 소나기가 올

정도였다. 그는 내가 앉기도 전에 나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김목사! 어젯밤엔 실례가 많았소이다』

나는 손이 잡힌 채로 앉으며 엉겁결에 대답했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그 돈이 도움이 되셨는지요』

그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로 안주머니에서 돈을 한 뭉치 끄집어냈

다. 그가 3천원을 가지고 가서 끗발을 올린 것이로구나 하는 생각

이 들어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돈뭉치 중에서 3천원을 세

내게 주면서 『내가 빌린 돈은 일단 갚겠습니다』 하고서는 심각하

게 말했다.

『김목사, 내가 이 교회에 헌금을 좀 하면 좋겠는데 이런 돈도 받

아주시겠소?』

나는 답하기가 퍽이나 궁했다. 노름해서 딴 돈을 헌금하겠다니 받

기도 어색하고 그렇다고 거절하기도 어려워서 참으로 난처했다. 나

는 먼저 그에게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입니까? 하룻밤 사이에 신수가 확 피었습

니다?』

『뭐 물으나마나지요. 내가 노름판에 끼여든 지 10년이 넘는 세월

인데 별기술은 없었어도 큰 봉변은 당하지 않았소이다. 그런데 어

제 저녁에는 초판부터 판이 꼬이더니 밤중에 가서 몽땅 털리지 않

았겠소. 앞이 캄캄해 여기까지 왔던 거인데 거참 예배당 돈이 세긴

셉디다. 예배당 돈 갖고 가서 판을 펴자마자 나한테로 다 오더구먼

허허…. 다아 예수 선생 덕분이지요. 나도 이 돈으로 헌금 좀 하고

나머지는 마누라 줄랍니다. 그라고 이 길에서 손씻을랍니다. 나도

이제부턴 예수사람 되볼낀게 잘 지도해 주시라요』

그렇게 말하는 그의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나는 그의 말을 받

아 말해 주었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헌금은 안 하셔도 됩니다. 몽땅 집으로 가져

가셔서 부인께 드리십시오』

그는 손을 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나 진심입니다. 받아주십시오』

그러더니 그는 자리에 놓인 헌금함으로 가서 헌금을 하고는 발걸음

도 당당하게 돌아갔다.

다음 주일 예배 후 헌금함을 열어보니 7천원이 들어 있었다. 그가

그날 밤에 딴 돈의 십일조가 7천원이었다면 그가 상당한 수입을 올

렸을 것으로 짐작되었다.

나는 새벽기도회가 끝나는 대로 나가 두세 시까지만 넝마주이를 하

고 그 후에는 마을로 들어와 다른 일을 했다. 환자방문, 직업소개,

개인상담, 좌담회, 싸움말리기 등등이 나의 일과였다. 항상 바빴다.

이제는 마을에 영향력이 생겨 싸움이 일어나면 나를 데리러 왔다.

막바지 인생을 살고 있는 판자촌 주민들은 싸움이 잦았다. 그리고

싸움을 하면 무지막지하게 싸웠다. 걸핏하면 칼부림이었다. 희생자

가 있으면 교회로 연락이 오곤 했다. 판자촌 젊은이들은 칼로 찌르

고 감옥으로 가는 것을 겁내지 않았다. 감옥 가는 것을 「국비 장

학생」으로 간다고 하며 마치 사나이답게 사는 길인 양 으스대기까

지 했다.

판자촌에서는 겨울나기가 문제였다. 봄에서 가을까지는 노동판을

찾아다니고 여자들은 행상이라도 하여 살아가지만 겨울에는 마땅한

일거리가 없었다. 노동일은 겨울에는 시멘트가 얼어붙기 때문에 공

사가 중단되었고 행상은 추운 날씨 때문에 집집이 문을 닫아 걸고

있어 들어갈 수가 없었다. 길가에서 파는 노점들도 행인들이 종종

걸음으로 집으로 들어가니 팔리지 않았다.

그래서 판자촌의 겨울은 잔인한 계절이다. 겨울이 들면 일부러 절

도나 폭력을 저질러 「국비 장학생」으로 감옥에서 의식주를 해결

하고 나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느날 넝마주이 작업을 마치고 판자촌으로 돌아오니 주민들이 반

색을 하며 맞았다. 나는 무슨 일이 있었으리라 짐작하고 물었다.

『왜 또 무슨 건수가 터졌나요?』

『말도 마십쇼. 지금 대판 쌈이 벌어져 선생님을 몇 차례나 데리러

왔었습니다』

나는 안내를 받아 큰 싸움판이 벌어졌다는 집으로 갔더니 온 이웃

이 모여들어 둘러싸고 있어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내가 나타나자 주민들이 안으로 들어갈 길을 터 주었다. 그 길을

비집고 안으로 들어서려는데 교인 한 분이 나의 소맷자락을 잡아당

기며 말했다.

『전도사님 위험합니다. 들어가지 마세요. 지금 칼로 찔러놓고설랑

누구든 들어오기만 하면 또 찌르겠다고 벼르고 있는 판이에요. 지

금 들어가지 마시고 기다렸다가 제풀에 기가 꺾이걸랑 들어가세

요』

『그럼 칼에 찔린 사람은 어떻게 되었나요? 병원으로 갔나요?』

『아이고 병원엘 가다니요. 녀석이 시퍼런 칼을 들고 문간에 서서

아무도 들어가지도 나가지도 못하게 하는 판인데요. 죽었는지 살았

는지 확인도 못하고 있는 판이에요』

그때 마침 방 안에서 우당탕 소리가 나더니 비명소리가 들렸다.

『아이고…. 동네 사람들. 나 좀 살리시라요. 이놈이 사람을 죽이려

고 작정을 한 놈이네…』

그러고 나서 다시 잠잠해졌다. 나는 제풀에 기가 죽을 때까지 기다

릴 처지가 못 된다고 판단했다. 칼을 휘두르고 있는 녀석은 이 마

을에서도 최고 악질로 이름난 녀석이었다. 악한 일에는 타의 추종

을 불허하는 그야말로 악한 중의 악한이었다. 그의 손에 걸렸으니

생명을 잃거나 살아나더라도 불구자가 될 염려가 있었다. 빨리 구

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무도 못 말리는 「미스터 악질」

그는 얼마 전에 자기 아내를 때릴 때 아내를 발가벗겨 밖에 끌어내

놓고 마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사정없이 때리던 사람이다. 매질

에 견디다 못한 그의 아내는 어린 딸을 남겨둔 채 약을 먹고 자살

했다. 그의 아내가 약기운에 비명을 지르다가 피를 토하는데도 그

는 곁에서 눈썹 하나 까딱 않고 『뒈져라, 이년아』 하며 지켜보고

있었다. 악해도 정도를 벗어난 병적인 사람이었다.

곁에서 보기에도 자기 인격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악한 영에

사로잡혀 움직이는 사람 같았다. 나는 방으로 들어가 그를 진정시

키고 칼에 찔린 사람을 병원으로 호송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문 앞

으로 가서 안을 들여다보니 미스터 악질은 부엌칼을 손에 쥔 채 입

구에 서 있었고 뒤쪽에 피해자가 쓰러져 있었다.

피해자는 배를 움켜쥐고 거칠게 숨을 쉬고 있었는데 피가 옷 밖으

로 배어 나오고 있었다. 나는 한 청년에게 큰길로 나가 택시를 잡

아오라고 이르고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두려움에 가슴이 약간 떨

렸지만 겉으로는 태연하게 문지방을 넘었다. 누군가가 뒤에서 소리

질렀다.

『예배당 선생님 들어간다. 이때 남자들 몇이 우 들어가 덮쳐야 한

다』

나는 뒤따라 오지 말라는 표시로 손을 흔들었다. 그는 나를 보자

칼 쥔 손을 움직여 찌르려는 자세를 취했다.

조용히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독기가 서린 눈이었다. 마귀가 사람

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면 이런 눈을 하고 있겠거니 생각되었다. 나

는 떨려 기도했다.

『주님, 주님께서 그의 악함을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나는 예수께서 간음한 여인을 보셨을 때의 눈을 연상했다. 그리고

예수의 눈과 같이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당신의 마음을 넉

넉히 이해하고 있다는 마음이 표정에 나타나기를 바라며 말했다.

『화가 많이 나셨군요. 그래도 화 때문에 자신을 괴롭히고 남을 괴

롭히는 일은 그만두시지요』

그렇게 말하고서는 눈을 돌려 찔린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도

나의 눈을 따라 찔린 사람을 보았다. 그 틈에 나는 방 안으로 들어

가서 그의 곁에 섰다. 한순간이 지났으나 그는 아무런 동작도 취하

지 않았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으나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로 다가서서 손을 내밀었다. 그의 칼 끝

이 아래로 내려갔다. 내가 손을 다시 내밀자 그는 칼을 내게 주었

다. 그리고는 휭하니 나가버렸다.

나는 밖을 향하여 『두 분 안으로 들어오세요』 소리지르며 찔린

사람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거칠게 숨을 헐떡이며 『배가, 배가』하

며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장정 둘에게 그를 언덕 위로 택시가

들어올 수 있는 곳으로 데려가게 했다.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

을 듯했다.

그러나 미스터 악질은 며칠 지나지 않아 다시 살인을 저질렀다. 그

래서 20년 국비 장학생이 되고 말았다. 감옥 안에는 찌를 식칼도

없을 텐데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지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인간은 자기 속에 스스로 지옥을

만들고 스스로 지옥살이를 하고 있다. 세상 법률이 하는 일은 흩어

진 지옥들을 한곳에 모아 큰 지옥을 만드는 일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게 만들어진 지옥을 우리는 교도소라 부르고 있다.

판자촌에 살면서 주민들이 같은 처지에 살고 있는 이웃을 이해하는

마음이 얕고, 작은 일에 서로 싸움질하며 지내는 것이 딱했다. 가난

한 사람들이 서로 이해하고 의논하고 뭉치면 좋은 일이 생길 것도

같은데 그러지를 못하고 사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나는 넝마주이로 생계를 해결하며 D.D.T 작전과 T.L.C요법을 실시

하여 나가는 중에 활빈교회는 번창하여 갔다. 예배 드릴 때는 앉을

자리가 없어 뒤에 서서 예배를 드리거나 되돌아가는 사람들도 있게

끔 되었다. 우리 가정의 살림방으로 쓰던 방까지 헐어 집회장소를

넓혔다.

어느덧 성탄절이 왔다. 빈민촌에서 맞는 첫 성탄절에 온 마을잔치

를 벌였다. 교회학교 어린이들은 찬송과 율동으로 마을 주민들을

기쁘게 하였고 청년들은 연극을 공연하였다.

연극은 마을 주민들이 힘을 합하여 철거반을 물리치는 내용이었다.

시나리오를 쓰는 일에서 감독·연출까지 내가 맡았다. 이 연극은

대성황을 이루었다. 공연되고 있는 연극의 한 장면 중에 마을 주민

들이 철거반을 물리칠 때는 관람하던 주민들이 열이 올라 『그놈들

죽여라』 『다리를 분질러라』 『작살내라』는 고함을 지르고 손뼉

치고 발을 구르며 열광했다.

빈민들의 대중문화

나는 주민들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現場)에서 연극의 소재를 찾는

다는 취지에서 철거반 이야기를 선택하여 시나리오를 썼던 것인데,

연극에 대한 주민들의 반응을 보고는 크게 깨우쳤다.

「이렇게 해서 대중문화가 형성되는 것이로구나」

민중의 문화는 이론과 형태를 갖춘 데서 탄생하고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삶 속에서 그들의 가장 절실한 문제들이 언어화되

고 행동화되어 표현될 때 이루어진다. 민중의 공감대가 이루어지고

그러한 공감대를 통하여 그들의 내면에 타고 있던 생명 에너지가

밖으로 나와 하나의 흐름을 이룬다. 그 흐름이 땅 속으로 스며들어

문화라는 씨앗을 싹 틔우고 자라게 하여 끝내는 열매를 거두는 것

임을 알게 되었다.

빈민촌에는 빈민들이 만들어내는 문화가 있었다. 그러한 빈민문화

의 내용에 대하여 좋고 나쁘고를 말하는 것 자체가 의미없는 노릇

이었다. 그냥 있는 그대로를 인정해야 했다. 교회는 빈민들에게 너

희는 왜 이런 저질문화를 이루고 살고 있느냐고 꾸짖을 아무런 권

리도 없다. 다만 교회는 그들 속으로 들어가 그들을 사랑하고 함께

숨쉬어야 할 의무만 가진다.

교회는 배고픈 설움, 아픈 설움, 낙오자가 된 설움 속에서 한(恨)을

먹고 살아가는 빈민촌 주민들을 사랑하고 함께 살아야 한다. 이들

과 함께 나누는 삶 속에서 그들과 한(恨)을 공유하는 데서부터 선

교는 시작된다. 그리하여 첫 성탄절 행사는 마을 전체의 잔치도 바

뀌었다. 신명이 나자 마을 구멍가게는 건빵을 공짜로 돌렸고 대폿

집은 막걸리를 독째 골목에 내놓고는 누구든 공술을 마시라고 했

다.

나는 내가 시작한 빈민선교가 그냥 교회 없는 마을에 교회당 하나

를 세우는 식의 단순한 선교활동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활빈선교

가 제대로 발전해나가면 가난에 젖어 살아가고 있는 주민들의 생각

을 바꾸게 하고 주민들의 의식을 바꾸어 나갈 수 있는 잠재된 에너

지가 있음을 느꼈다.

성탄절 이후 빈민 마을에 변화가 눈에 띄게 나타났다. 『여자가 더

좋아…』식의 노랫가락을 부르던 마을 코흘리개들이 『새 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일어납니다』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등

으로 교회에서 배운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 마을에 싸움이 줄어들

고 어머니들이 자식에게 악담을 퍼붓는 일들도 줄어들었다. 그리고

『남묘호랑겡교…』를 외던 창가학회 신도들이 이제는 거의 활빈교

회를 다니게 되었다.

모름지기 종교는 인간 삶에 가치를 부여하고 더 성숙한 인간성을

실현토록 하여야 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어느 종교나 존중하고 싶

다.

그러나 일본에서 들어왔다는 창가학회(創價學會)는 싫었다. 그들은

대중을 속인다. 치병기복(治病祈福)을 내세워 가난한 사람들을 기만

한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약점과 무지를 이용했다. 칼 마르크

스가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창가학회는 가

난한 사람들 속에서 아편이 됐다.

1971년의 마지막 날이 왔다. 온 교인이 밤 11시에 교회로 모였다.

1971년 12월31일 23시 30분에서 1971년 1월1일 0시30분 사이에 활

빈가족은 단합대회를 열었다. 비록 쌀이 없어 밀가루 반죽을 떡가

래처럼 만들어 빚은 밀떡국이긴 했지만 행복한 잔치였다.

예배가 끝난 후에 우리는 밀떡국을 먹고 합창을 했다. 연이어 노래

자랑이 나오고 장기대회가 뒤따랐다. 모두들 행복했다. 일년간 쌓인

피로가 일순에 풀어지는 듯했다. 우리는 밝아오는 새해 1972년에도

예수께서 섬기라고 명하신 청계천 빈민촌에서 최선을 다할 것을 다

짐하여 헤어졌다.

『활빈교회를 철거하시오』

그러나 1972년 새해는 시련으로 시작되었다. 새해가 시작되자마자

교회 건물은 불법건물이니 철거하라는 서울특별시 시장 이름으로

보낸 계고장이 날아든 것이다.

교회당은 무허가 건물이긴 하였지만 인가된 것이었다. 교회당은 서

울시청에서 발급한 「24-24622」호란 무허가 건물 인정번호판이

붙어 있었다.

자유당 말기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서울시내의 판자촌은 그 숫자가

점차 늘어나면서 큰 사회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4·19가 지나고 5·16을 거치며 판자촌은 급속도로 늘어났다. 그간

에 실패를 거듭한 농업정책의 여파로 농촌인구나 대거 서울로 몰려

들면서 이농민들은 어느 곳이든 빈 공간만 있으면 판잣집을 지었

다.

이에 대처하여 서울시는 70년 이전에 세워진 건물은 인정해주고 그

후에 세워진 건물과 앞으로 세워지는 건물에 대하여는 강력히 단속

할 방침을 세웠다. 활빈교회가 교회당으로 쓰고 있는 건물은 8년

전에 세워졌기에 인정번호가 나와 있었다.

그런데도 서울시는 철거 계고장을 발부했다. 나는 활빈교회 건물을

철거하려는 시청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여러 면으로 살폈다.

성동구청 쪽에 연줄이 닿는 주민을 통하여 철거 계고장이 발부된

경로를 탐색했다. 얻은 결론은 2가지였다.

첫째, 활빈교회는 이름도 수상하고 하는 일도 수상하다. 교묘한 방

법으로 판자촌 주민들의 민심을 모아가는 것을 볼 때 방치했다가는

장차 큰 화근이 될 것이니 더 크기 전에 꺾어야겠다.

둘째는 지난 성탄절 잔치 때에 주민들이 철거반을 쫓아내는 내용을

연극으로 공연하였다는 보고가 구청에까지 들어갔다.

교회에서 신앙에 관계되는 연극이나 할 것이지 관·민을 이간시키

는 연극을 공연하는 것은 불순한 세력이니 그냥 두었다가는 장래

판자촌 행정에 암적 존재가 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대책을 세울 것인가를 고심하다가 나는 주민들

을 모아 공론에 붙이기로 했다. 그날 저녁 교회당에 주민들이 모이

자 철거 계고장을 보여주었다. 주민들은 펄쩍 뛰면서 그럴 수 없다

고 했다.

모두들 흥분하여 떠드는 중에 한 연장자가 침착하게 말했다.

『여러분, 우리가 처음부터 강경하게 부딪칠 일이 아닌 것 같습니

다. 처음에는 진정서를 내고 마을 대표를 뽑아 구청과 시청으로 보

내 실정을 이야기하는 식으로 순리대로 나갑시다. 그런 뒤에도 굳

이 교회당을 철거하겠다면 그때는 우리들이 뭉쳐 한번 맞서보는 방

법으로 나갑시다』

그 발언에 모두들 찬성이었다.

무허가 판잣집은 실제로는 지어진 상태에서 조금도 손대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지붕에서 비가 새거나 방바닥에서 연탄가스가 스며들

어도 손을 대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만일 수리를 할 경우에는 즉

각으로 철거반이 들이닥쳐 집 전체를 헐어버렸다.

서울시청의 주장은 무허가로 지어진 건물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인정은 해 준다. 그러나 있는 상태에서 그대로 주저앉을 것이지 수

리하여 오래 살 생각은 말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속에 살고 있

는 주민들의 입장으로는 그런 방침은 도저히 따를 수 없었다.

플라스틱으로 덮은 지붕은 이내 비가 새게 마련이다. 또 급히 꾸민

방들인지라 연탄가스가 스며들고 습기가 심하다. 마을에는 매년

7~8명이 연탄가스 중독으로 죽어나가고 있다. 습기로 인하여 아이

들이 기관지염, 폐렴, 피부병 등이 그칠 날이 없었다. 그러니 지붕

을 고치거나 온돌을 만들고 환기통을 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어느새 철거반이 들이닥친다. 한밤중에 이웃도

모르게 구들장을 고쳤어도 철거반은 귀신같이 알고 온다. 듣기로는

마을 구석구석에 정보원을 확보하여 두고 수리하는 집을 보고케 한

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판자촌 주민들의 당국에 대한 반발과 원성

은 대단했다.

어떤 계기가 있어 불만 지르면 폭발할 상태였다.

망신당한 서울시 고위 공무원

얼마 후에 서울시의 한 고관이 승용차를 타고 와서 마을 주민들에

게 연설을 했다.

『왜 당신들은 허가없이 불법으로 집을 짓고 살고 있습니까? 민주

시민들은 법을 지켜야 합니다』

서울시청에서 높은 사람이 왔다기에 무얼 좀 도와주겠다는 말을 하

려나 하는 기대를 걸고 모였던 마을 아낙네들은 그 말을 듣자 화가

치밀어올랐다. 두서너명이 이마를 맞대고 수군대더니 야무지게 달

려들었다.

『야 이 새끼야, 너 법 좋아하는구만. 넌 날 때부터 허가 내서 낳았

냐? 동민 여러분, 저 새낀 허가 내고 난 개비요, 허가 내서 난 놈들

은 연장에 금테 두르고 나왔는가 한 번 확인해 봅시다요』

『옳은 말이여, 바지 한번 벗겨봅시다』

마을 아낙들이 우― 달려들어 그의 허리띠를 끄르고 바지 단추를

따려 드니까 그 고관님은 혼비백산하여 몸을 빼려 했다. 아낙네들

은 팔다리를 잡고 놓아주지를 않고…. 그가 당황해 하는 모습은 실

로 구경거리였다. 비서와 운전기사, 마을 이장들의 도움을 받아 그

야말로 구사일생으로 도망칠 수 있었다.

그런 소란통에 구두 한 짝이 벗겨졌으나 챙기지도 못하고 갔다. 마

을 아낙네들은 그 구두 한 짝을 교회로 들고 와서는 내게 말했다.

『전도사님, 이 구두는 허가 내고 사는 사람 것인디요, 혹시 찾으러

오거들랑 연장에 금테 둘렀는가 구경허고 내주시라요. 이 구두는

전도사님이 야무지게 챙기시라요』

그 구두는 아직도 교회당 한켠에 모셔져 있다. 이런 판에 교회당

건물에 철거 계고장이 나왔으니 주민들이 흥분할 것은 당연하다.

모두가 한두 번씩은 철거반에게 당했던 사람들인지라 자기가 당했

던 때의 울분과 무력감을 이 판에 한번 풀어보려 했다.

그런 중에도 신중론을 펴는 분이 있었기에 분위기는 가라앉았다.

그날 회의에서 주민들은 대표 5명을 뽑아 일을 맡겼다. 뽑힌 대표

들은 진정서를 작성하여 주민 수백 세대의 서명날인을 받아 서울시

장과 성동구청장 앞으로 보냈다. 진정서 요지는 다음 같았다.

『활빈교회는 우리 송정동 판자촌에서 주민교육과 건강관리 및 청

소년 선도에 지대한 공적을 끼치고 있는 교회이다.

그래서 활빈교회의 교회당 건물은 저희 판자촌 지역의 주민회관이

요 1천6백 세대의 희망의 상징이다. 그런즉 서울시에서 발부한 철

거 계고장을 철회하여 주시기 바란다』

진정서를 보낸 후 며칠이 지나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나는 오전

에 넝마주이 나갔다가 들어올 때마다 교회당 건물이 온전한가부터

살폈다. 그동안에 혹시 헐렸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서였다. 서울

시청으로부터 아무런 회신이 없자 우리는 진정서가 효력을 본 모양

이라고 안심하였다.

새해 들어 철거 관계로 첫 사망자가 생겼다. 그야말로 비극 중의

비극이었다. 이 땅에서 일어나서는 안 될 사건이었다. 죽은 여인은

세 아이가 딸린 29세의 여자였다. 해묵은 결핵으로 고생하고 있었

다.

지난해 가을, 각 가정에 대한 D.D.T 방문에서 그녀를 알게 된 이후

로 나는 그녀를 살리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다. 그렇게 애쓴 보람이

있어 그녀의 건강이 조금씩 좋아져가는 기미가 보였다. 그녀의 남

편인 박씨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버스운전사로 있었는데 운전중 부

주의로 운전면허증을 빼앗겼다고 했다. 면허증을 다시 찾으려면 돈

을 들여야 하는데 당장 먹고 살기에 급급해서 못 찾고 있다는 것이

다. 앞뒤가 잘 안 맞는 말이었지만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

그는 언제나 술에 취해 있었다. 하도 딱하여 『어떻게 그렇게 술만

마시고 사느냐? 그렇게 술 마시는 돈으로 약을 사서 부인을 치료하

고 돈을 모아 면허증을 찾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일렀더니 술은

자기 돈으로 먹는 것이 아니고 친구들이 받아주어 마신다는 대답이

었다.

남편인 박씨가 하고 있는 꼬락서니를 보면 돌아볼 여지조차 없는

터였지만 병든 부인과 어린 세 아이를 보아서는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가정이었다. 나는 거의 매일 들러 스트렙토마이신 주사를 놓

고 결핵약과 소화제에 비타민류들을 먹게 했다. 덕분에 많은 차도

가 있어 겨울을 잘 나고 봄이 되면 회복될 것이라고 안심하던 참이

었다.

그런데 겨울 냉기가 환자에게 해롭다고 방구들을 고친 것으로 인하

여 철거당하게 되었다. 호되게 추운 날씨에 집이 철거당하게 되었

고 철거 후에 서울시장 이름으로 고발장이 나왔다.

불법 건축물의 경우 철거 후에는 고발장이 나오고 약식재판을 거쳐

벌금을 무는 것이 상례였다. 호주인 박씨는 고발장에 출두하라는

날 사라져버렸다. 경찰에서는 피고소인이 출두하지 않으니까 경찰

에게 연행해 오게 했다. 경찰이 박씨 집에 가보니 박씨는 없고 부

인만 있으니까 남편 대신 부인을 연행하여 갔다. 부인을 데려가면

서 아이들에게 엄한 얼굴로 말했다.

『너희 아빠 찾아서 경찰서로 오시라고 해라. 너희 아빠가 와야 엄

마를 보내준다』

다음날 새벽녘에 그녀는 파김치가 되어 돌아왔다. 기어오다시피 와

서는 문지방을 잡고 쓰러졌다. 동부경찰서 유치장의 차가운 마룻바

닥에서 밤새 떨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그 길로 누워 다시 일어나지를 못했다. 고열에 헛소리를 지

르던 며칠 후에 숨졌다. 어린아이들 셋이 마음에 걸렸던지 눈도 감

지 못한 채 숨이 멎었다. 나는 그녀의 장례를 치르며 극도의 무력

감을 느꼈다. 이런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아무 도움도 줄 수 없음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벽

제시립화장터에서 한줌 재를 보자기에 싸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제

2한강교로 갔다. 다리 난간에 기대 서서 흐르는 한강물에 그녀의

재를 뿌렸다. 조금씩 조금씩 뿌리며 넋두리처럼 말했다.

『부인, 넓은 곳으로 가세요. 서울은 착한 사람이 살기에는 너무나

비좁습니다. 태평양 넓은 바다 한복판으로 가세요. 거기 따뜻하고

포근한 나라로 가서 쉬세요. 거기에는 철거반도 없고 유치장도 없

습니다. 거기서 그림 같은 집을 짓고 고기들과 이웃하고 사세요. 사

람들에게 상처입은 영혼을 고기들이 감싸줄 겁니다』

나는 쏟아지는 눈물을 훔치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다짐했다. 이런

슬픈 사연이 없는 사회를 이룩해야 한다. 가난하다는 이유 때문에

사람대접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없는 나라를 세워야 한다. 정말 그

런 시대가 오게 해야 한다고 거듭 다짐했다.


사람 취급 못 받는 빈민촌 주민

그날부터 나는 빈민촌에서 결핵퇴치 운동을 시작했다. 빈민촌에서

가장 많은 질병이 결핵이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결핵에 걸려 노

동력을 잃고 고통 속에 있었으므로 개인과 가정은 물론이려니와 국

가적 손실도 막심하였다.

우리는 결핵협회의 협조를 받아 결핵검진차를 불러왔다. 송정동 판

자촌 내의 1천6백여세대를 대상으로 엑스레이 촬영을 하고 판독한

결과 2백63명이 결핵환자임이 판명되었다.

활빈교회는 교회 사무실에 이들의 신상카드를 비치하고 개인별로

치료상황을 점검했다. 결핵환자에 대하여는 구청 보건소에서 무료

로 치료하여 주도록 제도화돼 있었기에 우리는 지역 내 환자들을

만나 설득하여 보건소에서 치료받으라고 독려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보건소에 갔던 환자들은 두서너 번 가고 나

면 계속 다니지 않으려고 했다. 결핵은 치료하다 중단하면 그 약에

내성이 생겨 다시는 그 약으로는 치료할 수 없으므로 투약을 중단

해서는 안 된다. 결핵환자가 먹던 약을 중단하는 것은 죽으려고 작

정한 것과 같다. 나는 보건소 다니기를 중단한 환자들을 일일이 찾

아다니며 보건소에 계속 다닐 것을 권유하고, 또 왜 보건소를 기피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알아보았다.

『앓느니 죽고 만다고 차라리 폐병으로 죽는 것이 낫지. 보건손가

뭔가 하는 곳에는 안 갈끼요』

『왜 그러세요? 돈 없는 환자가 돈 안 받고 치료해 준다는데 왜 안

가세요』

『그 새끼들이 사람을 사람 취급해야지』

『도대체 보건소에서 어쨌는데 그러세요?』

『전도사님이 환자라 생각하고 한번 가보세요 그럼 알게 될 것입니

다』

이분들에게 마지막 남은 재산은 자존심이다. 그 자존심이 보건소에

가서 상하게 된 모양이었다.

그래서 하루는 시간을 내어 환자 몇 분과 함께 보건소에 가보았다.

접수구에 카드를 들여놓고 한 시간이나 복도에서 기다리니 우리 일

행 한 분의 이름을 부른다. 본인이 『예』 하고 다가가니 간호사가

물었다.

『가래 받아왔어요?』

『예? 가래침을 받아와요? 전 모르는 일인데요?』

『아니 지난번에 가래침 받아오랬잖아요?』

『아뇨? 전 그런 말 못 들었어요』

『그럼 받아서 오세요』

그러고는 문을 닫아버렸다. 나는 이분들이 보건소에 잘 오려 하지

않는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나는 생각했다. 앞으로 2백63명의 환자를 다 치료하려면 무슨 특별

한 조치가 있어야지 이 상태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보건소

측과 환자들 간의 관계를 바꾸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나는 노크

를 하고 방으로 들어가 그 간호사에게 물었다.

『방금 그 ○○○ 환자 가래침을 받아오랬는데 언제 어떻게 받아오

면 될는지요. 좀더 구체적으로 알려주세요』

『아저씬 본인이세요?』

『저는 본인이 아니고 친굽니다』

『본인에게 방금 말했는데 그러세요. 여기는 바쁜 곳이니 나가 주

세요』

그러고 나서 나를 본 척도 않고 창 밖을 향하여 『다음 환자 들어

오세요』 하고 소리쳤다. 나는 화가 치밀어 넝마주이 근성이 드러

냈다.

『야, 이 가시나야. 이게 뒈질라고 약 쓰냐 알아듣도록 갈쳐줘야 될

거 아이가』

『어머… 이 아저씨 봐. 어디서 시비를 걸고 욕을 하시네』

『이 ×년 어따 악을 써』

나는 때릴 듯이 손을 번쩍 들었다 놓았더니 간호사는 화가 나서 눈

물을 글썽이며 안으로 들어갔다.

조금 후에 흰 가운을 입은 남자 여럿이 나왔다. 모두가 강도라도

잡을 듯이 기세가 등등했다.

『누가 여기서 행패를 부리는 거야』

몸집 좋은 친구가 나서자 간호사가 나를 지적하며 말했다.

『선생님, 저기 작업복 입은 저 사람이에요』

그는 나에게로 오더니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뭣 땜에 간호사에게 행패를 부리는 거야』

간호사가 옆에서 바람을 넣으며 말했다.

『불친절하대요』

그는 다짜고짜 내 뺨을 후려쳤다. 같이 있던 마을 사람들의 인상이

싹 바뀌더니 그를 에워쌌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흰 가운이 경찰

을 부르라고 소리쳤다. 주민 한 분이 내게로 와서 물었다.

『전도사님, 오늘 여기서 한번 엉겨붙을까요? 좋은 찬슨데요』

『오늘은 그냥 갔다가 내일 단체로 옵시다. 모두들 밖으로 불러내

세요』

보건소 습격작전

내가 먼저 보건소 밖으로 나오자 주민들은 뒤따라 나오며 분을 삭

이지 못해 씨근거렸다. 한 부인은 귀한 전도사님이 우리 때문에 왔

다가 매까지 맞았다고 울먹였다. 왜 따지지도 않고 그냥 나오는 거

냐고 남정네들에게 항의했다. 나는 그녀를 위로하며 말했다.

『아주머니 마음 놓으세요. 오늘 일로 좋은 일이 있을 것입니다』

마을에 도착하는 즉시 2백63명의 결핵환자들에게 연락했다. 통·반

별로 긴급연락을 취했다.

『내일 9시까지 활빈교회로 모이십시오. 10시에 보건소에 단체로

갈 일이 있습니다. 아마 좋은 일이 있을 것입니다. 한 분도 빠짐없

이 모이십시오』

그날 저녁에 결핵환자 중 똘똘한 환자 5명을 뽑아 계획을 짰다. 다

음날 9시가 되니 환자 1백50여명이 모여들었다. 보건소로 함께 가

서 보건소 건물의 모든 방마다 밀고 들어갔다. 놀란 보건소 사람들

이 영문을 몰라 허둥지둥하는데 어제 나를 때렸던 흰 가운이 나서

서 소리쳤다.

『여러분, 이거 무슨 일입니까? 무슨 이유입니까? 대표자 나오세

요』

주민 중에 누군가가 나서며 대답했다.

『야- 이 새끼야, 폐병쟁이들이 먼 대표가 있겠냐. 다 대표제! 야,

너희들 폐병쟁이 위해 쓰라고 나오는 약 중에 비싼 건 다 팔아먹는

담시러. 니 배는 그 약 팔아먹어서 그리 나왔냐?』

그러면서 주먹으로 흰 가운의 배를 쿡쿡 찔렀다. 그러는 사이에 경

찰이 왔다. 그러나 아무도 경찰이 온 것에 신경쓰지 않았다. 경찰이

나서서 말했다.

『조용히 하세요. 무슨 일이에요. 질서를 지키지 않으면 입건하겠습

니다』

그 말에 환자들은 와- 웃으며 박수를 쳤다.

『우릴 입건하겠대. 이거 호강하겠는데』

경찰은 호루라기를 불며 말했다.

『조용히들 하세요. 대표가 나와서 말씀해 보세요』

우리는 모의한 대로 다섯 명이 나갔다. 보건소측 사람들과 다섯 명

의 환자대표와 경찰관들이 소장실로 들어가고 문이 닫혔다. 우리는

밖에서 잡담을 나누며 기다렸다. 모두들 즐거운 표정이었다. 얼마

후 환자대표 중의 한 명이 나와 내게 말했다.

『어제 전도사님을 때린 것은 사과하겠다고 그러구요. 간호사 한

명을 송정동 환자 전담으로 배치하고 일주일에 한 번씩 마을로 나

와서 진료를 해주겠다는데요. 어떻게 할까요?』

『아니 대표들이 뽑혔으면 알아서 결정할 일이지 나에게 물을 거

없지요』

『그래도 어디 그런가요? 다들 전도사님 의견대로 하겠다는데요』

나는 그들이 아직은 자신감이 없어 자기들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것으로 여겨져 시간을 두고 훈련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

다. 그에게 일러주었다.

『나에게 사과하는 건 필요없고 1차 약으로 치료가 안 되는 환자들

에게는 2차약을 먹여야 하는데, 2차 약도 지급해달라고 요구해 보

세요. 그리고 나머지는 알아서 하시면 됩니다』

그가 들어간 이후 얼마 안 지나 문이 열리고 대표들이 나왔다. 기

분 좋은 얼굴로 나와서 주민들에게 설명했다.

『매주 목요일 활빈교회로 의사와 간호사가 나와서 진료를 하기로

했고, 2차 약은 보건소측에서 예산이 확보되는 대로 배려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한 주민이 말했다.

『폐병 걸린 이후 첨으로 기를 펴고 웃어보는구먼』

『쥐 구멍에도 볕들 날 있다더니 우리헌테도 오늘 같은 날이 있구

먼요. 그렁게 세상은 살고 볼 일이여. 이 사람들아, 죽어버리면 이

런 일도 못 보잖는가!』


즉결재판소에 끌려갔더니…

2월27일이었다. 아침에 관할 파출소에서 경찰이 찾아왔다. 무허가

건축 관계로 고발되었으니 파출소로 같이 가자는 것이었다. 지금

급한 일이 있어 일을 마치고 가겠다고 했더니 연행해서 가야 한다

고 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일을 중단하고 그를 따라갔다. 아내가 불안한

표정으로 언제 오느냐고 물었다. 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글

쎄, 곧 보내주겠지』 하고 경찰을 뒤따라가는데, 아내가 혹시 필요

할지 모르니 지니고 가라고 3천원을 주머니에 넣어주었다. 이웃집

박씨와 함께 붙잡혀 갔다. 그도 집을 수리했다는 이유로 고발당했

다고 한다. 파출소에서는 다시 동부경찰서로 이송했고, 경찰서에서

는 뚝섬에 있는 즉결재판소로 데려갔다.

즉결재판소에 도착하니 창경원에 있는 호랑이울 같은 곳으로 들여

보냈다. 이미 2백여명이 들어와 있었다. 그곳에서 오후 2시가 넘도

록 기다렸다. 지루하고 춥고 시장했다. 무허가 판잣집을 짓고 들어

온 사람, 통행금지를 위반한 사람, 파출소 앞에서 오줌 누다 잡혀온

사람, 도박하다 잡혀온 사람 등 가지각색의 사연으로 들어온 사람

들이었다.

2시가 지나니 문이 열리고 재판정으로 데려갔다. 판사석 아래 줄을

지어 앉히고는 고개를 숙이라고 했다. 고개를 들면 안 된다고 간수

가 소리쳤다. 나는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때문에 고개를 들면 안 되나? 죄가 있으면 죄 지은 만큼 벌

을 받으면 되는 것이지 고개를 드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

가? 재판도 받기 전에 고개도 못 들게 한다는 것은 인권유린이다.

이런 건 일본 식민지 시대의 유산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번쩍 들고서 어떤 분들이 들어오는지를

살폈다. 그랬더니 한 간수가 잡아먹을 듯이 소릴 질렀다.

『야 임마! 왜 고개를 들어』

나는 그를 빤히 쳐다보다가 그가 계속 핏대를 올릴 것이 측은히 여

겨져 고개를 숙여주었다. 판사가 들어왔다. 내 또래의 젊은 판사였

다. 맨 먼저 15명 정도를 불러세우더니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나서

는 질문하기 시작했다.

『너희는 ○일 ○시 집단시위를 한 것이 사실인가!』

『예』

『위법인 줄을 알면서 왜 데모를 했는가?』

『우리는 ○○시장에 세들어 있는 소상인들로 시장조합장이 사기를

쳐서 돈을 갈취한 뒤 돈을 돌려주지 않기에 데모를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법을 따라 해야지 법치국가에서 법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여서는 안 되잖는가?』

『우리도 처음에는 법으로 하려고 애를 썼는데 법이 우리 편을 들

어주지 않으니까 할 수 없이 행동으로 한 것입니다』

『법이 너희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법이 법대

로 다스려지는 것이지 어찌 어느 편을 들 수 있겠는가?』

『그런 것이 아니고 조합장이 우리의 정당한 요구를 무시하고 국회

의원 빽만 믿고 우리에게 공갈 협박을 계속하였기 때문에 참다 못

해 단체행동을 한 것입니다』

『국회의원 빽이란 무슨 말인가?』

『그 조합장이 국회의 모의원 빽을 가지고 경찰서까지 움직여 경찰

서에서도 우리가 억울한 줄 알지만 어떻게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조합장은 청와대에도 연줄이 닿는다고 합니다』

『쓸데없는 소리는 하면 안 돼. 국회나 청와대가 다 국가의 신성한

법을 수호하는 기관인데 그런 일에 말려들 턱이 있겠는가? 아무튼

피고들은 법치국가에서 법을 어겼으니 법의 제재를 받을 수밖에 없

게 된 것이야』

『우리가 법을 어겼다는 것은 억울합니다. 왜 죄 있는 사람은 버젓

이 행세하고 억울한 우리들만 잡아 가둡니까?』

그러나 판사는 그들의 항의를 제지하고 서류를 뒤적였다. 판결을

내리려는 모양이었다. 곧이어 판사는 누구는 석방, 누구는 벌금 3천

원, 누구는 구류 15일 등으로 판결을 내렸다.

나는 그 판사가 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등고시에 합격하여 판

사가 되었으니 머리가 나쁘지는 않을 것이고 사건의 진상은 능히

짐작하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 큰 도둑은 잡을 생각은 못하고 불쌍

한 영세상인들에게 『구류 15일』 하고 판결을 내리고 있으니 딱한

지성이라 생각되었다.

몇 년 전 나 자신도 「축 서울법대 합격」이라는 글귀를 써붙여 두

고 입시공부 하던 때가 생각났다. 나도 그때 법대에 갔었다면 지금

쯤 비슷한 일을 하고 있을까? 나는 지금 현명한 인생 길을 택했다

고 생각돼 감사를 드렸다.

판사가 『김진홍』 하고 부르기에 『예』 하고 엉겁결에 일어서니

나를 보지도 않은 채 물었다.

『무허가 집을 지었어?』

『집을 지은 것은 아니고…』

『알았어 알았어. 벌금 2천5백원』

나는 말을 시작하려고 더듬는데 판사는 이미 판결을 내린 후 딴 사

람을 부르고 있었다. 우리는 다시 대기실로 들어왔다. 거기서 벌금

형을 받은 사람들은 벌금을 내고는 풀려나갔다. 벌금 낼 돈이 없는

사람들은 경찰서로 실려가서 벌금 대신에 하루 5백원씩 깎아주는

콩밥을 먹어야 했다.

나는 집을 나올 때 아내가 넣어준 3천원이 있으니 2천5백원을 내고

집으로 가리라 생각했다. 그때 같이 갔던 박씨가 큰일났다고 했다.

그도 5천5백원의 벌금을 받았는데 돈이 모자란다는 것이었다. 오늘

꼭 집에 들어가야 할 일이 있는데 낭패라고 울상을 짓고 있었다.

얼마가 모자라느냐고 물었더니 1천5백원이 모자란다고 했다. 그에

게 1천5백원을 빌려주었다. 그가 『전도사님은 어떻게 하느냐』고

묻기에 나는 『바쁜 일이 없으니 천천히 나가도 된다』고 일러주었

다. 그는 내가 추운 날 고생할 거라고 걱정했다.

『아니 괜찮습니다. 남자가 이런 경험도 한 번쯤은 해봐야지요』

<다음호에 계속>

감옥 생활

박씨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1천원에다 내가 준 1천5백원을 합하여 벌

금을 낼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나가면서 말했다.

『전도사님 고맙습니다. 내가 나가는 즉시 돈을 구해서 전도사님도 나

올 수 있도록 손 쓰겠습니다』

박씨와 작별하고 돌아서는데 한 청년이 우울한 얼굴을 하고 서 있었

다. 그가 서울대학 배지를 달고 있기에 물었다.

『무슨 일로 들어왔는가?』

『어제 저녁에 친구집에서 화투놀이를 하면서 지는 사람이 나가서 담

배를 사오기로 했었지요. 내가 꼴찌를 해서 밤 2시에 담배를 사러 나

왔다가 방범대원에게 들켜서 파출소로 연행됐습니다』

『벌금은 얼마나 받았는가?』

『2천원 받았습니다』

『2천원이 없어서 못 나가고 있는 겐가?』

『예. 담배 사려던 돈과 주머니에 있던 용돈을 다 합해서 8백원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내가 1천2백원을 빌려줄 테니 나가서 우리 집 주소로 송금해

주게』

그는 내가 건네주는 1천2백원을 황공한 듯 받아서는 풀려났다. 그러는

사이에 어디에서 『김진홍 전도사님, 김진홍 전도사님』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기실 창문으로 들려오는 소리였다. 나는 깜짝 놀라

물었다.

『제가 김진홍 전도삽니다. 누구신지요?』

내가 대답하니 길로 난 창문쪽에서 돌멩이에 싼 돈이 던져졌다. 주워

보니 5백원짜리 석장이었다. 먼저 나간 박씨가 재빨리 구해서 보낸 돈

인 듯했다. 어디서 그렇게 재빠르게 돈을 구해 보냈는지 그 성의가 고

마웠다. 그러나 이미 1천2백원을 서울대학생에게 줘버린 후인지라 다

합쳐도 1천8백원밖에 안됐다. 벌금 내고 풀려나기에는 7백원이 모자랐

다.

조금 후 죄수 호송차로 경찰서로 옮겨졌다. 동부경찰서로 실려가서는

지하 유치장으로 들어갔다. 한 가운데에 연탄난로가 있는 방인데 그

둘레를 따라 여섯개의 칸이 있고 칸마다 수감자들이 있었다.

『당신, 가짜목사 아냐?』

우리 「신입생」은 4명이었다. 당직 경관이 4명의 신입생들을 일렬로

세우고는 쭉 훑어보았다. 신상기록카드와 얼굴을 대조해 보더니 내게

말했다.

『목사라구? 목사같지 않은 데? 요즘 목사를 사칭하는 사기꾼들이 있

다는 데 그런 가짜 목사 아냐? 목사 이름을 팔고 누굴 등쳐먹은 게로

구나. 목사가 어디 갈 데가 없어 여길 왔어?』

그의 말에 유치장 선배들이 와― 하고 웃었다. 내 신상기록카드에 목

사라고 적혀 있었던 모양이다. 아마 파출소에서 그렇게 썼을 것이다.

수감자 중 한 명이 『박태선 쯤 되는 모양이다』 하니 모두들 『와』

하고 웃었다. 경관은 소리나는 쪽으로 눈을 흘기며 『시끄러 임마!』

하고 소릴 질렀다.

경관은 우리 4명에게 『앉아』 『서』 『앉아』 『서』를 몇번씩이나

시켰다. 나는 얼떨떨해 다른 사람들이 앉을 때 서고 설 때면 앉고를

되풀이했다. 경관이 슬며시 옆에 오더니 갑자기 촛대뼈를 찼다. 엉겁결

에 맞은 자리가 어찌나 아픈지 챈 데를 잡고 주저앉고 말았다. 선배

수감자들이 키들키들 웃고 있었다. 경관이 고양이나 쥐 다루는 듯한

눈길로 소리 질렀다.

『왜 흐릿하게 구는 게야. 여기가 예배당인 줄로 알아? 누가 너하고

보건체조 하자는 줄 알아?』

나는 화가 치밀어 「이 새끼를 한번 걸고 넘어져야겠구나」 하고 마음

먹고는 차분히 가라앉은 음성으로 그에게 말했다.

『이 씹새끼가 눈에 비는 기 없나. 이 새끼야, 순사 자리에 있응께 눈

까리(눈발)에 비는 기 없냐. 옷 벗고 싶어?』

내가 그를 정면으로 바라 보며 세게 나가자 그가 움찔했다. 내심 「이

거 잘못 건드린 거나 아닐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는 못 들은 척하며 소지품을 다 내놓고 양말을 벗으라고 했다. 나는

주머니의 신분증, 포켓성경 그리고 현금 1천8백원을 내 놓았다. 경관이

이것들을 챙기며 『맡겨 두었다가 나갈 때 가져가는 거야』 하고 말했

다. 주위의 눈길들이 내 현금에 쏠리는 듯했다.

나와 병약해 보이는 30대 남자는 6호실로 들어갔다. 끝자리에 앉으라

고 실장이 지시했다. 유치장에서는 실장의 지시에 절대적으로 따라야

하는 모양이었다. 실장이 신참인 우리 둘에게 물었다.

『어이, 강아지 가진 것 있어?』

『강아지가 뭔데요?』

『이거 순 초자구먼, 담배 있느냐 말씀이야!』

『난 담배 피우지 않습니다』

『응 그래, 쟁이쟁이 예수쟁이지』

그가 예수쟁이에게는 관심이 없다는 듯이 돌아앉자 곧이어 저녁식사가

들어왔다. 낡은 알루미늄 밥그릇에 순꽁보리밥 그리고 밥 위에 몇 개

의 단무지 조각이 얹혀 있었다. 그릇의 절반 정도로 담긴 밥 위에는

젖가락이 꽂혀 있었다. 점심도 설친 날이어서 나는 맛있게 먹었다. 실

장이 대단히 친한 듯한 목소리로 내 귀에 소근거렸다.

『돈 있는 사람은 사식을 시켜 먹을 수 있어요. 2그릇 시켜서 나와 한

그릇씩 먹을까요?』

『이만하면 먹을 만한데요』

『알짜 노랭이로구먼』

그는 내 현금을 생각하고 그런 제안을 한 것 같았으나 내가 응하지 않

으니 퍽이나 실망하는 듯했다.

폐병환자 소동

식사 중에 나와 함께 들어온 사람이 심한 기침을 했다. 밖에서 누가

들어오더니 오늘 수감된 ○○○의 부인이 약을 들여보내겠다는데 받아

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내 촛대뼈를 깠던 경찰이 물었다.

『안 돼. 무슨 약인데 그래?』

『파스와 무어라더라?』

『약 들여보낼 생각말고 벌금이나 구해오라 그래』

『돈을 구할 처지는 안 되고 약이나마 들여보내겠데요』

나는 파스란 말에 기침하는 사람이 결핵환자임을 알았다. 그의 아내가

매일 먹어야 하는 결핵약을 가지고 여기까지 찾아온 모양이었다. 그렇

게 전달하는 사람은 아마 여인이 하도 애걸하니까 불쌍한 생각이 들어

서 좀 봐주자는 뜻으로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동료가 규칙을 내세

우니 어쩔 수 없이 물러서는 것 같았다. 연방 기침을 해대는 것을 보

아 병세가 심한 것 같았다. 경찰이 그에게 물었다.

『넌 대체 어디가 아프길래 여편네가 약을 받으라는 게냐?』

『결핵이에요』

결핵이란 소리에 소동이 일어났다. 우리 방 6호실의 실장이 먼저 소리

를 질렀다.

『이―잉, 폐병쟁이하고 같이 있단 말야? 안돼! 감방살이도 서러운데

왜 폐병쟁이하고 같이 있어. 이 폐병쟁이 딴 방으로 옮겨줘요』

우리 방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폐병환자와 함께 있으면 옮는다고 웅성

거렸다.

경찰이 소리를 질렀다.

『시끄러. 야 임마, 너 그럼 호텔로 가지, 왜 여길 들어왔어? 너 같은

놈은 폐병쟁이하고 살아야 다시 사기치지 않을 거야』

실장은 아마 사기사건으로 들어온 것 같았다. 경찰의 호통에 그는 시

무룩해지더니 환자를 보고 악을 쓰기 시작했다.

『야, 저쪽 구석에 찌그러져 있어. 송장 같은 게 여기까지 왔어. 머저

리 같은 새끼. 저래도 여편네는 끼고 자는 모양이지. 야 임마! 나같이

건장하고 잘생긴 남자도 여편네가 없는데, 넌 임마 송장 같은 것이 어

째서 여편네까지 있는 거야』

환자는 한편 구석에 가 앉더니 심하게 기침을 했다. 옆의 사람이 『고

개를 저리 돌리고 기침을 하라』고 윽박질렀다. 환자는 고개를 벽쪽으

로 돌리고는 계속 기침을 해댔다.

나는 가슴이 아팠다. 환자도 딱했지만 함께 고생하는 죄수들끼리 인정

없이 대하는 것이 퍽 못마땅했다. 나는 모두에게 말했다.

『여러분, 결핵은 본래 약을 먹을 때는 균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전염

이 되지 않습니다. 저 분의 아내가 약을 가져왔다는 걸 보니 약을 먹

고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내 말에 실장이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이 예수쟁이야. 그럼 니가 색시처럼 안고 자라』

나는 이 자가 지나치다고 생각돼 정색을 하고 한마디 했다.

『당신 지나치구먼, 이 감방에 평생 살 거요? 밖에 나가 살려면 좀 조

심하시오』

그는 입 안으로 무어라 중얼거리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나는 환자에게

물었다.

7백원의 기적

『결핵이 심하신 것 같은데 며칠 구류처분을 받으셨는지요?』

『2천5백원 벌금을 받았습니다』

『무슨 죄로 받았는지요?』

『판잣집을 무허가로 지었다고 받았습니다』

『판잣집을 손수 지었습니까?』

『아녜요. 3만원에 사서 들어갔는 데 계고장이 나왔습니다. 집은 헐리

고 나는 경관이 가자고 하기에 따라왔더니 여기까지 오게 됐구먼요』

그는 한숨을 쉬며 몸이 이래서 이겨낼는지 모르겠다고 걱정했다. 그의

병세로 볼 때 이런 추위에 마룻바닥에 자다가는 치명적이 될 것 같았

다. 지난번 마을에서 박씨 부인이 결핵이 호전돼 가다가 경찰서 유치

장에서 하루 저녁을 지내고 온 후에 다시 일어나지 못했던 것을 생각

했다.

이 환자를 집으로 보내줘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예수님께 도움을 구했

다.

『예수님, 이 분은 집으로 가야 할 사람입니다. 내게 1천8백원이 있지

않습니까? 7백원만 더 있으면 이 사람을 내보낼 수 있습니다. 7백원을

구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

나는 정성껏 기도했다. 기도를 마친 후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당직

경찰을 불렀다. 나는 경찰에게 말했다.

『이 사람은 결핵이 심한 환자인데 내가 보기에는 이 추위를 이길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집으로 보내줄 수 없을까요?』

『벌금만 낸다면 언제든지 나갈 수 있는 것이지』

『그렇다면 내가 맡겨둔 돈 1천8백원이 있으니 그 돈으로 어떻게 안

될까요?』

『한푼이라도 모자라면 안 되는 게 규정이야. 사정이 딱하긴 하지만

규정을 어기고 봐줄 순 없지』

이런 대화가 오가는 사이 실장이 내 옆구리를 찌르면서 그럴 필요없다

며 만두나 사서 다 같이 나눠먹자고 했다. 나는 아무 말도 없이 듣고

만 있었다.

폐병환자 소동

식사 중에 나와 함께 들어온 사람이 심한 기침을 했다. 밖에서 누가

들어오더니 오늘 수감된 ○○○의 부인이 약을 들여보내겠다는데 받아

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내 촛대뼈를 깠던 경찰이 물었다.

『안 돼. 무슨 약인데 그래?』

『파스와 무어라더라?』

『약 들여보낼 생각말고 벌금이나 구해오라 그래』

『돈을 구할 처지는 안 되고 약이나마 들여보내겠데요』

나는 파스란 말에 기침하는 사람이 결핵환자임을 알았다. 그의 아내가

매일 먹어야 하는 결핵약을 가지고 여기까지 찾아온 모양이었다. 그렇

게 전달하는 사람은 아마 여인이 하도 애걸하니까 불쌍한 생각이 들어

서 좀 봐주자는 뜻으로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동료가 규칙을 내세

우니 어쩔 수 없이 물러서는 것 같았다. 연방 기침을 해대는 것을 보

아 병세가 심한 것 같았다. 경찰이 그에게 물었다.

『넌 대체 어디가 아프길래 여편네가 약을 받으라는 게냐?』

『결핵이에요』

결핵이란 소리에 소동이 일어났다. 우리 방 6호실의 실장이 먼저 소리

를 질렀다.

『이―잉, 폐병쟁이하고 같이 있단 말야? 안돼! 감방살이도 서러운데

왜 폐병쟁이하고 같이 있어. 이 폐병쟁이 딴 방으로 옮겨줘요』

우리 방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폐병환자와 함께 있으면 옮는다고 웅성

거렸다.

경찰이 소리를 질렀다.

『시끄러. 야 임마, 너 그럼 호텔로 가지, 왜 여길 들어왔어? 너 같은

놈은 폐병쟁이하고 살아야 다시 사기치지 않을 거야』

실장은 아마 사기사건으로 들어온 것 같았다. 경찰의 호통에 그는 시

무룩해지더니 환자를 보고 악을 쓰기 시작했다.

『야, 저쪽 구석에 찌그러져 있어. 송장 같은 게 여기까지 왔어. 머저

리 같은 새끼. 저래도 여편네는 끼고 자는 모양이지. 야 임마! 나같이

건장하고 잘생긴 남자도 여편네가 없는데, 넌 임마 송장 같은 것이 어

째서 여편네까지 있는 거야』

환자는 한편 구석에 가 앉더니 심하게 기침을 했다. 옆의 사람이 『고

개를 저리 돌리고 기침을 하라』고 윽박질렀다. 환자는 고개를 벽쪽으

로 돌리고는 계속 기침을 해댔다.

나는 가슴이 아팠다. 환자도 딱했지만 함께 고생하는 죄수들끼리 인정

없이 대하는 것이 퍽 못마땅했다. 나는 모두에게 말했다.

『여러분, 결핵은 본래 약을 먹을 때는 균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전염

이 되지 않습니다. 저 분의 아내가 약을 가져왔다는 걸 보니 약을 먹

고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내 말에 실장이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이 예수쟁이야. 그럼 니가 색시처럼 안고 자라』

나는 이 자가 지나치다고 생각돼 정색을 하고 한마디 했다.

『당신 지나치구먼, 이 감방에 평생 살 거요? 밖에 나가 살려면 좀 조

심하시오』

그는 입 안으로 무어라 중얼거리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나는 환자에게

물었다.

7백원의 기적

『결핵이 심하신 것 같은데 며칠 구류처분을 받으셨는지요?』

『2천5백원 벌금을 받았습니다』

『무슨 죄로 받았는지요?』

『판잣집을 무허가로 지었다고 받았습니다』

『판잣집을 손수 지었습니까?』

『아녜요. 3만원에 사서 들어갔는 데 계고장이 나왔습니다. 집은 헐리

고 나는 경관이 가자고 하기에 따라왔더니 여기까지 오게 됐구먼요』

그는 한숨을 쉬며 몸이 이래서 이겨낼는지 모르겠다고 걱정했다. 그의

병세로 볼 때 이런 추위에 마룻바닥에 자다가는 치명적이 될 것 같았

다. 지난번 마을에서 박씨 부인이 결핵이 호전돼 가다가 경찰서 유치

장에서 하루 저녁을 지내고 온 후에 다시 일어나지 못했던 것을 생각

했다.

이 환자를 집으로 보내줘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예수님께 도움을 구했

다.

『예수님, 이 분은 집으로 가야 할 사람입니다. 내게 1천8백원이 있지

않습니까? 7백원만 더 있으면 이 사람을 내보낼 수 있습니다. 7백원을

구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

나는 정성껏 기도했다. 기도를 마친 후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당직

경찰을 불렀다. 나는 경찰에게 말했다.

『이 사람은 결핵이 심한 환자인데 내가 보기에는 이 추위를 이길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집으로 보내줄 수 없을까요?』

『벌금만 낸다면 언제든지 나갈 수 있는 것이지』

『그렇다면 내가 맡겨둔 돈 1천8백원이 있으니 그 돈으로 어떻게 안

될까요?』

『한푼이라도 모자라면 안 되는 게 규정이야. 사정이 딱하긴 하지만

규정을 어기고 봐줄 순 없지』

이런 대화가 오가는 사이 실장이 내 옆구리를 찌르면서 그럴 필요없다

며 만두나 사서 다 같이 나눠먹자고 했다. 나는 아무 말도 없이 듣고

만 있었다.

조금 후에 풍채가 좋은 사람이 들어왔다. 당직 경찰이 일어서서 부동

자세로 경례를 붙였다. 과장쯤 되는 사람 같았다. 그의 재량으로 어쩌

면 모자라는 돈을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에게 한번 청해보기로 마음먹고 경관을 불렀다.

『경관님, 이 환자를 집에 보낼 수 있도록 과장님께 부탁해 주십시오.

아무래도 여기 두어선 안 되겠습니다』

경관은 난처한 듯 머뭇거렸다. 분위기를 눈치챈 상관이 물었다.

『무슨 일이냐?』

『오늘 들어온 신참 중에 결핵환자가 있는데, 저 분의 말로는 그냥 두

면 지탱하기가 어려운 처지라며 자기 돈으로 내보내 달라는 겁니다』

『고마운 분이로구먼. 그렇다면 그렇게 해 드리지 그래』

『그런데 돈이 좀 모자랍니다』

상관은 가만히 생각하더니 내게 물었다.

『아시는 분이세요?』

『아뇨. 여기 와서 처음 만났습니다』

『그럼 왜 그 돈을 그 사람을 위해 내놓겠다는 것입니까?』

『나는 건강한 몸이고 이 분은 중증환자니까 이런 환경에 두면 치명적

일 것 같아서 그럽니다』

『당신은 벌금을 얼마 받았는데요?』

『2천5백원을 받았습니다』

『2천5백원 벌금에 1천8백원이 있으면 이틀 후면 당신이 나갈 수 있겠

는데요?』

『나는 건강하니까 여기 있어도 별상관 없는 처지고 이 분은 여기서

하룻밤이라도 지내면 병세에 큰 타격이 될 것 같아서 그럽니다』

『좋소. 그럼 내가 천원을 낼 테니 합해서 내보냅시다』

나는 가슴 속이 확 트이는 것을 느꼈다. 환자는 나가면서 내게 큰절을

하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집 주소를 알면 찾아뵙고 돈을 갚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나도 다른 사람에게서 얻은 돈이니 잊어버리세

요. 부디 건강을 찾아 복되게 살기를 기도 드리겠습니다』

감옥의 분위기가 바뀌다

그는 문간에서 눈물을 훔치며 나갔다. 그가 울며 나가는 모습을 보니

나도 코끝이 찡해왔다.

그가 나간 후로 유치장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쌍소리나 잡음이 끊어지

고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만큼 조용해졌다.

얼마 지난 후 내 옆에 앉아 있던 젊은이가 물었다.

『예배당 목사님이세요?』

『목사되기 전의 직책인 전도사입니다. 왜 그러세요?』

『나도 이제 예배당에 나가고 싶어져서 그럽니다』

젊은이는 중학교 때까지 교회에 다녔는데 교회당에서 목사파니 장로파

니 하고 싸움이 나는 걸 보고 발을 끊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전도사님은 무슨 교회예요?』

『활빈교회입니다』

『그게 아니고 천주교, 장로교, 감리교 그런 것 중에 어느 쪽입니까?』

『아무 쪽도 아니고 예수 쪽입니다』

『예수 쪽이라―. 좋은 표현이시네요. 나도 나가면 예수 쪽인 활빈교회

로 가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나가서 서로 연락하여 가까이 지냅시다. 그건 그렇고 왜

들어오게 되었지요?』

『좀 부끄럽기는 합니다만 사실대로 말씀드리지요. 고향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와서는 뒷골목에서 구르다가 마음 잡고는 가게를 하나

열었습니다. 꽤 기반이 잡혀가는데 도박에 손을 댔다가 그만 잡혀 왔

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당직 경관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어이― 목사, 조용히 해!』

나는 찔끔했다. 절대 침묵이 감방 안의 규칙인 것이다. 그런데 그때 옆

방인 5호실에서 누군가가 경찰관에게 항의를 했다.

『야, 너무하다. 목사가 뭐야, 목사님이지. 여러분 그렇잖아요? 우리 같

은 잡범 대하듯이 목사, 목사 그렇게 불러서 되겠어요?』

이런 말이 들리자 우리 6호실의 실장이 말을 받았다.

『그렇다. 목사님을 막 까고 너무했다, 너무했어』

그렇게 떠들어대니 유치장 안이 웅성거렸다. 경관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는 일어서서 서성거리며 소리를 질렀다.

『조용히들 해요, 조용히』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하고는 담배를 피워 물더니 각 방을 살피

고 다녔다. 우리 방 앞에까지 오자 실장이 말했다.

『거 담배 한 모금만 합시다』

『짜식이 뻔찌는 좋아서. 그래 오늘은 특별히 한번 봐주겠어』

경관이 각 방에 담배 한 개비씩을 돌렸다. 모두들 희색이 돌며 좋아들

했다. 한 사람이 한 모금씩 빨고는 연기까지 삼켰다. 나에게도 한 모금

하겠느냐기에 고개를 저어 사양했다. 각 방에서 담배 피우기가 끝나가

자 경관이 말했다.

『자, 이제 취침들 해요』

뜻밖의 출소

마룻바닥에 담요 한 장을 깔고 누우니 추위가 뼛속 깊이 스며들었다.

마룻바닥에 직접 닿는 허리깨가 송곳으로 쑤시는 듯이 추위가 스며 들

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잠들기를 기다렸다. 그런 경황에서도 이미 잠

들어 코를 고는 사람도 있었다.

막 잠이 들려는 참에 철문 여는 소리가 들리고 뭐라고 주고받는 말소

리가 들리더니 나를 불렀다.

『김진홍 목사님 나오십시오. 집에서 모시러 왔습니다』

당직 경관이 마치 딴 사람이나 된 듯이 공손하게 말했다.

『예? 나가다니요. 갑자기 나가다니요?』

졸지에 나가려니 유치장 안에 남아 있는 56명의 동기생들에게 퍽 미안

스러웠다. 나 혼자 나가는 것이 마치 무슨 죄라도 짓는 듯했다.

동료들이 깨지 않게 하려고 고양이 걸음으로 나오려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 실장이 일어나서는 『목사님, 축하합니다』고 말했다. 그에게

서 1천8백원으로 만두나 사 먹자던 때의 표정은 사라졌고, 진지하고

선하게 보이는 얼굴로 변해 있었다.

『먼저 나가는 것이 죄송스럽구먼요. 인연이 닿으면 밖에서 만납시

다』

그렇게 인사하고 나오는데 그가 등 뒤에 대고 뜻 모를 말을 한 마디

했다.

『목사님은 성공하실 겁니다』

나는 맡겨두었던 소지품을 챙기고는 철문을 나왔다. 당직 경관이 밖에

까지 따라나오며 말했다.

『목사님, 제가 무례했던 걸 용서하십시오. 그래서는 안되는 데, 죄수

들을 대하다 보면 성격이 거칠어집니다』

『이해는 가지만 고치셔야지요. 죄수들이라지만 근본은 다 착하고 불

쌍한 백성들 아니겠습니까? 따뜻이 돌봐주십시오』

『옳은 말입니다. 나도 그렇게 알고 노력은 하나 잘 되지 않습니다. 아

무튼 목사님 안녕히 가시구요, 그리고 다시는 이런 곳에 들어오지 마

십시오. 목사님이 오실 곳이 못 됩니다』

그와 헤어져 동부경찰서 계단을 내려오는데, 그에게 차인 자리가 쓰라

렸다. 경찰서 수위실에서 새문안교회 대학생인 허성삼군이 기다리고

있었다. 모처럼 판자촌에 들렀다가 아내에게서 사정을 듣고 왔노라고

했다. 집에 가니 아내가 반색을 하며 맞았다. 동혁이는 잠들어 있었다.

따뜻한 아랫목에 등을 대고 누우니 이 곳이 천국이거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오전에는 이부자리에 누운 채 피로를 풀고, 오후에 빈민촌을

한바퀴 돌았다. 마을 앞 넓은 공터에 마을 청년 6~7명이 모여 있었다.

하릴없이 빈둥거리고 있는 모습들이 눈에 거슬렸다. 나는 그들에게 다

가가 물었다.

『이 사람들아. 젊은 사람들이 왜 한낮에 이렇게 놀고들 있는 겐가?

일을 해야 건강한 거야』

『지당한 말씀입니다요. 그러나 일자리가 없어 놀고 있는 게지요』

『그래? 그렇다면 내가 일자리를 구해주랴?』

『하이고, 귀가 번쩍하네요. 일자리만 구해주신다면 평생 형님으로 모

시겠습니다』

『난 동생이 있으니까 동생노릇은 안 해도 되고 일만 열심히 하면 되

는 것이지. 내일 아침 6시경에 교회당 앞으로들 오시오. 내가 일터로

데리고 갈 테니』

『정말이지요. 야, 신난다. 그럼 우린 일자리를 구한 것이지요?』

『그렇다니까. 내일부터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는 거여』

다음 날 아침 6시 조금 지나 젊은이 4명이 교회당 앞에 서성거리고 있

었다. 나는 그들을 부르며 『일 하러 가려고들 왔는가?』 하고 물었다.

그들은 『예』 하며 내게로 가까이 왔다.

그런데 그들은 넥타이를 매고 구두를 닦아 신고 머리에는 포마드 기름

들을 발라 파리가 미끄러질 듯한 모양들을 하고 있었다. 나는 의아스

러워 물었다.

『일 나갈 사람들이 웬 넥타이들은 맸는가. 그리고 머리들은 왜 그렇

게 번쩍거리는 겐가?』

『일 나가는데 첫날부터 인상이 좋아야지요. 그래서 좀 때 빼고 광 내

고 했습니다요』

『일 나갈 사람들이 일복을 입고 와야지. 넥타이가 될 법한 일인가?

얼른 가서 일복으로 갈아입고 신발도 농구화 같은 것으로 갈아신고 머

리 기름은 비누로 씻고들 오게. 꼭 기생 오래비 같이들 채리고 일 나

가서야 되겠는가』

그들은 멋쩍은 얼굴들을 하고는 가더니 일꾼 차림들을 하고 다시 왔

다. 나는 그들을 데리고 뚝섬 경마장 뒤켠에 있는 넝마주이 일터로 데

려갔다. 망태와 집게 하나씩을 주며 일렀다.

『이거 9백40원어치여. 일해서들 갚게』

『아니 이거 넝마주이 아닙니까?』

『그래 넝마주이지. 넝마주이가 어때서 그렇게 놀란 얼굴들을 하는 건

가?』

『우린 이런 일 못합니다요. 아무렴 넝마주이야 될 수 있습니까? 진작

그렇게 말해주었으면 따라오지도 않는 긴데 괜히 따라 나섰네요』

『하, 이 사람들이 지금 보니 뭘 잘못 생각하고들 있군 그래』

『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니요?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건 전도사님입

니다요. 애초에 일자리 구해준다고 했지 넝마주이 한다고는 하지 않았

잖아요?』

『넝마주이는 일자리가 아니라는 건가. 그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게야.

자네들이 앞으로 사람구실 하려면 그 생각부터 고쳐야 하네. 넝마주이

가 얼마나 훌륭한 일인지 아는가? 자네들도 한번 생각해보게나. 우리

나라는 땅 좁고 골짝마다 사람들만 득시글거리는 나랄세. 자원이라고

는 산에 송충이 먹은 소나무하고 무연탄 조금 나고 골짜기에 자갈 모

래뿐일세. 이런 나라에서 종이 한 장, 쇠똥가리 하나라도 땅에 묻히게

하지 말고 주워 모아서 공장으로 보내 재활용하게 되면 자원을 생산하

는 건설적인 사업 아니겠는가? 그러니 넝마주이는 바로 애국운동이 되

는 게야.

자네들, 놀고 지내면 병 생겨. 노는 사람은 마음이 병들고 마음 병에

뒤따라 몸에도 병이 오는 것이야. 그러나 넝마주이라도 열심히 하면

자원생산하는 애국자가 되는 것이고 마음도 몸도 건강케 되는 것이야.

그러니 자네들 이왕지사 나를 따라 왔으니 한번 해보게나. 나하고 딱

열흘만 같이 해보세. 열흘 뒤에도 하기 싫으면 그때는 나도 딴 말 않

겠네. 그러니 우선은 죽었다 치고 열흘만 쓰레기통을 뒤져 보세. 나 같

은 사람도 하는데 자네들이 못할 턱이 무언가?』

넝마주이 부대

나는 그들을 타이르고 어르며 망태를 메게 했다. 그들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한참이나 머뭇거리더니 한 명이 말했다.

『그래, 한번 해보자고. 사나이는 지랄병하고 도둑질 외에는 뭐든 해보

라고 했잖은가? 그래도 넝마주이가 도둑질은 아니니까 전도사님 시키

는 대로 한번 해보자고』

그가 그렇게 말하며 망태를 메니 다른 젊은이들도 망태를 메고는 나를

따라 나섰다. 나는 그들에게 넝마주이 하는 요령을 가르쳐 주며 그들

의 생각을 바꾸려고 힘썼다. 말하자면 일종의 의식화 훈련이다.

그날 오전 내내 골목골목을 누빈 결과가 점심식사를 위해 들른 중국집

에서 나타났다. 안 하던 일을 하려면 배 고플 테니 마음껏 들라고 하

면서 푸짐하게 시켰다. 그들 중 한 명이 말했다.

『넝마주이 일, 생각보다는 할 만한데요』

『그래? 다행이야. 생각보다 빨리 익숙해지는구먼. 그럼 다른 사람들은

어떤가? 역시 같은 생각들이지?』

『그래요. 동네에서 노는 것보담은 났습니다. 허구헌날 노는 것도 힘들

어요, 전도사님』

『옳은 말이야. 사나이들에게 일이 있다는 건 좋은 게야. 자네들이 그

렇게 잘 받아들여주니 기쁘구먼. 배 고플 텐데 어서들 들라구』

그렇게 넝마주이 길로 들어선 그들은 재빨리 익숙해지더니 얼마 후에

는 프로가 되어갔다. 그리고는 마을의 또래들 중에 일감이 마땅찮은

친구들을 설득해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 명 두 명이 호응

하더니 시간이 지나면서 십여 명이 팀에 합류하게 되었다.

나는 인원이 늘어남에 따라 체계와 규율이 필요함을 느끼고 그 일에

착수했다. 아침 나절 하루 일과를 시작할 때면 내가 가운데 서고 모두

가 원으로 둘러서서 나를 따라 구호를 복창하게 했다. 우선 오른손 주

먹을 쥔 채로 흔들며 나를 따라 구호를 외치게 했다.

『우리는』 『바닥에서 살고』 『꼭대기를 바라본다』

이렇게 주먹을 허공에 휘두르며 구호를 외치고는 각자 일터로 흩어져

갔다. 일터래야 서울 시내의 뚝섬에서 워커힐까지와 중곡동 지역에 이

르기까지 골목골목을 다니며 쓰레기통을 뒤지는 일이었다. 저녁 나절

하루 일을 마친 후에는 포장마차에라도 둘러 앉아 소주 한 잔에 낙지

볶음을 먹으며 그들에게 정신교육을 실시했다.

우리가 비록 서울 시내 뒷골목 쓰레기통을 뒤지며 살지라도 우리가 쓰

레기 인생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하는 일은 쓰레기 줍는 일이라도 이상

과 꿈은 높아야 한다. 그런 뜻에서 「바닥에 살고 꼭대기를 바라본

다」고 아침마다 외쳤다.

우리는 쓰레기를 정리하는 일꾼들이지, 쓰레기통에 빠지는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가 서울시의 바닥에 살면서도 목표는 높은 데 두고 「사

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 「서로 돕고 사는 세월」 「사람 위에 사

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는 세상」을 세워나가는 일에 쓰임받는 일

꾼들이 되자고 기염을 토하며 가르쳤다.

그들은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신바람 나고 당당한 넝마주이가 될 수

있겠노라고들 했다.

민주주의 교육

나는 그들에게 「활빈개발봉사대」란 모임을 만들게 하고 대원들은 하

루 수입의 10분의 1을 따로 적립하게 했다. 그리고 그렇게 모인 예산

의 쓰임새에 대하여 가르쳤다.

『교회에는 십일조란 명목의 헌금이 있다. 모든 교인은 각자 수입의

10분의 1은 하나님의 일에 바치는 거다. 교회의 십일조같이 우리 개발

봉사대도 십일조를 내기로 한다. 그러나 이 십일조는 교회에 내거나

나에게 내는 것이 아니다. 회계 책임자를 두어 매일매일 수입금의 10

분의 1을 따로 떼서 적립한다.

그러면 그렇게 모은 돈은 어디에 쓰느냐? 마을에서 불쌍한 사람 돕는

일에 쓴다. 병원에 가야 하는데 돈이 없어 가지 못하는 환자들의 치료

비, 머리 좋고 똘똘한데 학비가 없어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의 장

학금, 기술 배워 취직하려는데 기술학교 갈 비용 없는 사람들에게 보

조비 등등으로 좋은 일에 쓴다. 그리고 이 기금은 여러분이 의논하여

자치적으로 운영하는 것이지, 내가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다만 자네들이 의논하는 일에 자문만 할 따름이다. 알겠냐?』

『예, 알겠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모은 돈을 어떤 일에 실제로 사용할 때는 그렇게 쉽지

만은 않았다.

좋은 일에도 연습이 필요했다. 한번은 한 부인이 임신중독증으로 사경

을 헤매고 있었다. 그녀를 돕는 일에 십일조 예산을 쓰자는 의견이 나

왔다. 모두 찬성하였으나 유독 한 명이 반대했다. 이유인즉 기금을 많

이 모아 큰 일에 써야지 들어오는 대로 이런 일, 저런 일에 다 소비하

고 나면 보람이 없어진다는 의견이었다. 그러나 그런대로 그녀를 입원

시키는 일에 예산을 쓰기로 결정한 뒤에 나는 반대하던 대원에게 그

일을 맡겼다.

『이번 일은 수고스럽지만 자네가 좀 맡아줘야겠네. 그 부인이 그런

상태로 며칠만 더 가도 목숨까지 위태로워질 거야. 그러니 자네가 하

루 일을 못하더라도 부인을 병원으로 데려가 입원을 시키고 오게』

『아니 뭐라구요? 나한테 그런 일을 하라구요? 세상에 내 평생에 내

마누라도 병원에 한 번 데려가보지 않았는데 시상에 남의 마누라를 병

원에 데려가라구요? 말도 안됩니다』

『뭣이 말이 안되는가? 세상 살면서 자기 일만 하고 살면 철이 안 드

는 기여. 어려움에 빠진 사람을 도와주면 결국은 자기를 돕는 거여』

『그렇게 좋은 일이면 다른 대원을 보내세요. 하필이면 왜 날 찍습니

까?』

『자네, 요사이 말이 많구먼, 딱 잘라 말하게. 갈 건가, 안 갈 건가?』

『예 가겠습니다』

그는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그럼 진작 그렇게 할 것이지, 내가 자네에게 무리한 일을 억지로 시

킨다고 생각말게. 자네가 병원에 다녀 온 후에는 나한테 고맙다고 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야』

그는 다음 날 망태를 메지 않고 임신중독증에 걸린 부인을 데리고 병

원에 갔다. 진찰에서부터 입원까지 무사히 마치고 나서 저녁에 나를

찾아왔다.

『오늘 병원에 잘 다녀왔습니다』

『그래. 그렇게 하고 나니 억울한 생각이 들었는가?』

『아닙니다. 다음에도 다시 나를 시켜주십쇼』

『그 여자를 도와주는 것을 마땅찮아 하더니 마음이 바뀐 게로군』

『그렇습니다. 사람을 도와준다는 것이 나에게 좋은 일이라는 걸 깨달

았습니다. 괜스레 기분이 좋구요. 사람 사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앞으로 이런 일은 제가 담당하고 싶습니다. 맡겨만 주

십시오』

예상했던 대로 그는 좋아했다. 사람이 사람을 돕고 산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것이 사람답게 사는 지름길이 되며 도움을 받는 쪽보다 돕

는 쪽이 더 큰 혜택을 누리게 된다. 사람들은 자기보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웃들을 도우면서 자신의 왜곡됐던 성품이 치유받게 되고 삶의

보람을 깨닫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자신만을 위해서 살려하고

있다. 대체로 빈민촌 젊은이들은 성격이 거칠고 산만하다. 그런 성품을

고치는 데는 남을 도울 수 있는 기회를 갖게 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

이다.

결핵퇴치 보신탕

그 즈음 개발봉사대는 마을의 결핵환자들을 돕는 일을 시작했다. 결핵

환자들은 대체로 영양상태가 나빴고 독한 약을 계속 먹어 위장이 상해

있었다. 가난해서 결핵에 걸렸고, 결핵에 걸리니 더욱 가난해지는 악순

환이 거듭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봉사대 대원들은 결핵환자들과 그 가정들을 돕는 일을 시작했

다. 마을 앞 빈터 연탄을 쌓아두고 노동력이 없는 결핵환자들 가정에

서 그냥 가져가게 하였고 비타민 영양제 등을 구입하여 환자들에게 공

급하였다. 그리고 마을, 한곳에 큰 가마솥을 걸어두고 영양가 넘치는

곰탕을 끊여 환자들이 언제나 와서 먹을 수 있게 하였다. 곰탕 재료는

넝마주이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들이었다. 소뼈다귀 닭발 생선내장 등

이 주재료였다.

하루는 한 대원이 폐병에는 개고기가 좋다니 개장국을 끓여서 환자들

에게 먹이자고 제안했다. 곁에서 누군가가 개장국이 좋은 줄은 아는데

개를 계속 조달하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그러자 그 대원은 『그건 걱

정할 것 없다. 우리가 날마다 골목골목을 뒤지며 살아가는데 가는 곳

마다 주인 없이 떠돌아다니는 개들이 있잖은가? 그런 개들을 잡으면

될 것』이라 말했다.

의견이 일치된 대원들은 다음 날부터 개를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계속

되는 보신탕 공급에 환자들은 기뻐했다. 마을 한가운데 가마솥을 걸어

놓고 푸짐하게 탕을 끓여 환자들에게 공급하면 환자들만 먹는 것이 아

니라 환자 가족들까지 와서 단백질을 공급받곤 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대원 한 명이 주인 없는 개라고 끌어온 개가

고위층 가정의 엄청나게 비싼 개란 것이었다. 어떻게 알았던지 우리가

자기 집 개를 끌어다 탕을 끓여 먹었음을 알게 된 부잣집 주인마나님

의 분노가 대단했다. 경찰서장에게 전화까지 하여 모조리 잡아넣으라

고 했다. 경찰서장으로부터 단단히 다짐을 받은 경찰이 나를 찾아와

어떻게 된 것이냐고 말했다.

나는 자초지종을 설명하였다. 경찰이 이해를 하고 그 부잣집 마님을

찾아가 사과를 드리라고 귀띔했다. 나는 대원 한 명을 데리고 그 고관

집을 찾아갔다. 사모님을 뵙고 정중히 사과를 드렸다. 그러나 그 사모

님이란 분이 도무지 경우가 없고 말귀가 통하지 않는 여인이었다. 넝

마주이 대원들을 마치 도둑떼라도 된다는 듯 몰아붙였다. 나는 속이

부글거리며 반발심이 생겨 말이 삐딱하게 나갈 수 밖에 없었다.

『사모님 너무 그러지 마시라요. 따지자면 우리도 잘못은 없습니다

요』

『잘못이 없다는 것이 무슨 말이야요. 우리 식구 같은 개를 끌어다 먹

어버리고 나서 잘못이 없다니요. 그런 철면피 같은 말이 어딨어요?』

『우리가 잘못이 없다는 건 다름아니라 우리가 개를 좋아해서 그런지

그 개가 우리를 쫄쫄 따라온 거지요. 그라고 마당에 물을 끓이고 있으

니 목욕탕인 줄 잘못 알았던지 개가 제발로 걸어들어간 거지요. 그런

데 물이 너무 뜨거워서 제때에 나오지를 못하고 그만 익어버린 것이지

요. 고기가 익었으니 먹은 거지요. 너무 우리만 탓하지 마시라요』

『뭐라고요? 누굴 놀리고 있는 거예요? 당장 고소해서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으니 각오들 하세요』

『아 예, 예, 아주머니 고소를 하시려면 하십쇼만은 개 잡아먹은 것으

로 징역사는 법은 아직 한국 땅에는 없습니다.

『그래요? 그럼 두고 봅시다. 징역 살게 되는가 어떤가 두고 봅시다』

『아빠, 우리도 수제비 말고 밥먹어』

다음날 넝마주이 작업장에서 어지러워 쓰러질 뻔했다. 손수레를 잡고

몸을 지탱했다. 온 몸에 식은땀이 쭉 흘렀다. 작업을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집안 골목길에서 아들 동혁이를 보았다. 동혁이는 길가

에 서서 이웃집 방 안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었다. 무엇을 그렇게

보고 있는지 궁금하여 아이 뒤에 서서 보았더니 온 가족이 둘러앉아

밥을 먹고 있었다.

그 가정은 겨울인데도 방문을 열어두고 식사하고 있었다. 아마 연탄불

을 갈아 가스가 스며들기 때문일 것이었다. 나는 『동혁아』 하고 불

렀다. 혁이는 깜짝 놀라며 품에 안기더니 말했다.

『아빠, 우리도 밥 먹어』

겨울 내내 수제비만 먹이니 어린 것이 밥이 먹고 싶었던 모양이다. 아

내와 혁이의 건강에 대해 의논했다. 아내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요즘 애가 기침이 잦고 잠자리에서 땀을 많이 흘리는 것이 걱정이에

요』

『그래? 그것 심상찮은데』

『아이는 아버지가 없는 아이고 나는 남편이 없는 여자지요』

『그건 또 무슨 말이오?』

『당신이 빈민 빈민하며 자기의 이상실현에만 미쳐 있어 아내나 자식

에게는 관심조차 없으니 그렇지요』

『그렇다고 내가 가족에게 관심이 없기야 하겠소?』

『당신은 가족에게 관심이 있다고 말하지만 내가 볼 때에는 관심 이전

에 정상을 벗어난 사람이에요. 나까지는 좋은데 아이에게까지 이런 생

활을 요구한다는 것은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할 수 없는 생각 아니겠어

요?』

『당신 말도 일리는 있소만 다른 아이들은 다들 잘 견디고 살아가는데

우리 아들 동혁이라고 못 견뎌내겠소』

『이 마을의 다른 아이들과 우리 동혁이가 같다고 생각지 마세요』

『동혁이라고 이 마을 아이들과 다를 바가 무엇이겠소?』

『다르지요. 분명히 달라요. 동혁이는 당신이 말하는 대로 부르주아로

길러져서 이런 밑바닥 생활을 감당하기에는 체질적으로 적합하지 않아

요』

나는 처자식을 생각하면 심각해졌다. 아내의 말이 옳았다. 그들에게 이

곳의 극한적인 생활을 견디라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였다. 그렇다고 지

금 와서 어떻게 할 것인가? 참으로 진퇴양난이었다.

무엇보다 아내의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것과 아이가 약해지고 있는 것

이 문제였다. 방이 춥고 습기가 차 있는 데다가 잘 먹이지를 못하니

아이가 자다가 울기도 하고 기침도 했다. 나는 동혁이가 기침을 그치

지 못하고 있으면 속으로 안절부절이었다. 아내는 그냥 침묵으로 항의

할 뿐이었다. 그러던 차에 대구에서 장모가 올라와서 우리가 사는 모

습을 보고는 질겁을 하며 말했다.

『김서방 자네는 예수를 믿어도 별나게 믿는구먼』

『장모님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자네가 좋아하는 이런 일일랑 자네 혼자서 하게. 혁이와 에미는 외

가로 데려가야겠네』

『힘 들어도 가족이 함께 있어야지 따로 떨어져 있어서야 되겠습니

까?』

『아니, 자네 정신이 있는가? 이런 처지에 그래 그런 편한 소리를 하

고 있는건가? 나는 열불이 나서 못 보겠으니 그만 내려가겠네. 자네

집 식구니 자네가 죽이든지 살리든지 알아서 하시게』

아들 동혁이의 입원

장모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돌아가버렸다. 나는 다음날 동혁이를 이

화여대 부속병원으로 데리고 가서 진찰을 했다. 결핵검사를 하겠다는

의사의 말에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판자촌의 공적(公敵) 제1호가 결핵인데 아들이 결핵에 걸렸으면 큰일

이라 생각되었다. 투베르쿨린 검사를 한 후에 48시간 지나면 결과가

나타난다고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즉시로 교회당 안으로 들어가 가마

니를 깐 바닥에 앉아 기도했다.

그러나 결과는 양성으로 나타났다. 나의 기도는 응답을 받지 못한 채

아이는 결핵임이 판명된 것이다. 병원에 가서 3개월치 결핵약을 타 오

는 길로 아내가 말했다.

『현재 상태로는 계속 지탱하기가 힘들겠습니다. 혁이를 데리고 대구

친정에 가서 지내며 건강을 회복시켜야겠습니다. 우리가 대구에 가 있

는 동안에 당신이 잘 생각해보세요. 가정이냐 일이냐 처자식이냐 활빈

교회냐를 생각해서 택일하세요』

『당신, 나한테 겁주는 것 같아』

『그렇게 웃고 넘어 갈 일이 아니에요. 나는 진담이니 진지하게 생각

해주세요』

『당신이 그렇게 말하니 나도 심각해지는구먼』

『그래요. 심각하게 생각해 주세요. 물론 당신은 이 일이 하나님의 일

이니 물러설 수 없다지만 내 생각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일도 가정을

깨면서까지 하게 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는 거 아니겠어

요?』

나는 아내와 아들을 고속버스 편으로 보내고 돌아오는 길에 목욕탕에

갔다. 체중을 재니 49kg이었다. 이곳에 들어올 때 55kg였으니 6kg이

빠진 셈이었다. 1m67인 나의 키에 견주면 정상 이하의 체중이었다. 나

는 마음이 착잡하고 심란했다. 「가정이냐 활빈이냐」를 택일하라던

아내의 말이 생각났다. 마을로 돌아오는 길로 교회당으로 들어가 바닥

에 꿇어 앉았다.

『예수님, 나의 주인되신 예수님! 일도 가정도, 현실도 이상도 살릴 수

있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어느 한쪽만 택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지

않도록 도와주시옵소서』

기도가 채 끝나기도 전에 문두드리는 소리가 나며 황급히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교회 선상님, 교회 선상님』

아기 안은 돌격대 아줌마들

또 좋지 못한 일이 생긴 거로구나 짐작하며 나가 보니 아주머니 셋이

나를 찾고 있었다. 장안들의 채소온상에서 날품을 파는 분들이었다. 그

들은 작업하던 중에 곧장 달려온 듯 일복 차림에 호미까지 들고 있었

다.

『무슨 일로 그러십니까?』

『하이고 선상님, 고맙기도 해라. 집에 계시는구먼요. 훈이 엄마가 큰

일 났어요. 죽게 됐구만요. 살려주셔야겠시유』

『훈이 엄마가 왜 죽게 되었지 차근차근히 말해 주세요』

『글쎄, 그 몸으로 또 일 한다고 나가 쪼그리고 앉았다가는 거품 물며

까무라치기에 집에 데려다 두고 이리로 왔시요. 이 일을 어쩐다지

요?』

나는 그녀들을 따라 훈이네 집으로 갔다. 송정동 74번지는 2km 가량

떨어진 마을이다. 지난 가을부터 철거반과 철거→복구→철거→복구로

실랑이하고 있는 마을이었다. 시울시청에서 그 자리에 청계천 하수처

리장을 세운다고 마을 전체를 철거하려 하였다. 그러나 별다른 대책도

없이 철거를 당하게 된 주민들이 그냥 당하고만 있을 리 없었다.

특히 마을 부녀들의 데모가 거세게 일어났다. 그들이 일으켰던 데모는

희한한 데모였다. 강제 철거중인 철거반원들에게 마을 부녀자 수십 명

이 떼를 지어 돌진했다. 그들 모두가 어린아이들을 업었는데 등에 업

은 것이 아니라 배에다 업고 있었다. 아기를 배에다 업은 채 전속력으

로 달려들어 철거반원들과 부딪치면 아이들이 크게 다칠 판이었다. 그

런 자세로 눈에 불을 켠 채 돌진하며 소리들을 질렀다.

『야, 이 새끼들아, 너그죽고 우리 죽자』

마치 일본의 가미카제 특공대 같았다.

철거반장이 그런 모습을 보고 질겁하여 소리를 질렀다.

『애새끼들 다친다, 피해라』

철거반원들이 줄행랑을 쳤었다. 이런 식으로 겨우내 실랑이를 벌이기

를 무려 47회를 반복했었다. 주민들은도 끈질겼고 철거반도 끈질겼다.

끝내는 강제 철거를 당하고 2백여 세대 되던 주민들이 뿔뿔이 흩어졌

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갈 곳 없는 20여 세대는 그 자리에 움막을 치고 살

고 있는 마을이었다.

이들 남아 있는 세대 중에 「훈이네」로 불리는 가정이 있었다.

호주는 지난해 지하철 공사장에서 일하다가 사고로 죽었다. 땅 밑에서

일하는 동안에는 안전모를 써야 하는데 잠시 쉬는 틈에 더워서 안전모

를 벗었던 모양이었다.

하필이면 그때 천장에서 떨어진 돌이 뒷머리에 맞았다. 뇌진탕으로 죽

었으나 안전규칙을 어겼다는 이유로 보상금도 쥐꼬리만큼 나왔다.

남편을 그렇게 잃은 훈이네는 살아갈 대책이 막막했다. 할머니와 초등

학교 다니는 두 딸, 네살배기 아들 훈이까지 다섯 식구는 겨우겨우 끼

니만 이으며 살아가고 있었다. 할머니는 시장에서 목판장사를 하고 훈

이 엄마는 워커힐로 나가는 방향의 장안들 채소 하우스에서 품을 팔아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훈이 엄마는 몸이 약했다. 병약한 몸에 자식들을 굶기지 않으

려고 무리를 하여 더욱 쇠약해졌다. 얼마 전에 그 마을을 방문하던 중

에 마을 아주머니들이 나에게 훈이 엄마가 심상치 않다며 교회에서 좀

돌봐달라고 부탁했었다. 나는 그들에게 물었다.

『훈이 엄마가 어때서요?』

『하우스에서 밭 매다가도 구역질을 하고 어지럽다고도 하고요. 아랫

배가 부어오르는 것 같기도 하구요. 병이 있어도 심상찮은 병인 것 같

은디요』

『아주머님들 잘 아는 병인 게로구먼요』

『선상님 잘 아는 병이라니 뭔 병인디요. 선상님 생각에 짐작 가는 병

인가요?』

『예, 짐작이 가다마다요 임신한 것 같은데요. 구역질나고 어지럽고 한

것이 입덧하는 것 아니겠어요?』

『하이고 선상님도 우스운 소리도 잘 하시네요. 글씨, 남편도 없는 여

자가 뭔 애를 밴다요?』

『아니, 요즘은 남편 없어도 애기들 잘 배는 세상이지요. 처녀들도 애

기들 잘 배는 세상인데요. 내 생각에는 훈이 엄마가 애기를 배고서 말

못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아니라요. 선상님 훈이 엄마가 뭔 남자 밝힐 처지랑가요. 새끼들 델

꼬 묵고 살기도 숨찬데 남자라니요』

『글쎄요. 아무리 바쁘고 어려워도 남자 가까이 할 시간은 다 따로 있

는 거지요』

『그런 게 아니라니까요. 훈이 엄마가 애기 배서 그런거면 내가 손가

락으로 장지지겠네요』

『좋습니다. 내가 병원에 데리고 가서 진찰을 한번 해 보지요. 길고 짧

은 건 대보면 안다고 진찰해보면 다 알게 되겠지요』

훈이 엄마의 한

이런 대화가 있은 지 며칠 후 겨울비가 내리는 날 나는 훈이 엄마를

데리고 병원 산부인과를 찾았다. 버스에서 나는 훈이 엄마의 부풀어

오른 아랫배를 곁눈으로 보며 말했다.

『훈이 엄마, 병원에 가서 진찰해 보고 임신한 걸로 나오거든 낳아서

키웁시다. 훈이네가 키우기 어려우면 교인들이 맡아서 키우기라도 하

면 되겠지요』

『가서 진찰해보면 알겠지요』

얼굴도 붉히지 않고 한마디로 대답하고는 잠잠히 있는 그녀가 겉보기

와는 달리 속은 당찬 여자로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진찰 결과

는 임신이 아니었다. 자궁 속에 혹이 자라고 있다는 것이었다. 의사는

나를 그녀의 남편인 줄 알고 꾸짖듯이 말했다.

『어떻게 혹이 이렇게 자라도록 두었어요. 그동안에 통증도 심했을 텐

데 진작 진찰을 받으셨어야지요』

『임신이 아니구먼요. 혹이면 수술을 하면 되나요?』

『그렇습니다. 암이 아니어서 다행입니다. 암이면 심각하지만 다행이

혹이어서 수술만 하면 깨끗이 치료될 수 있습니다. 빨리 수술을 받도

록 하세요』

『예, 고맙습니다. 그런데 수술비가 많이 들겠지요?』

이렇게 진찰을 받고 돌아온 뒤로 나는 훈이 엄마를 입원시켜 수술을

받게 할 비용을 구하는 일에 골몰하였다. 다음 주일 낮예배 때에는 온

교인들이 통성기도하며 훈이 엄마가 수술 받을 길을 열어달라고 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게 드린 기도에 응답 받기 전에 일은 터지고 말았다. 훈이

엄마가 그 몸으로 다시 채소밭에 일하러 간 것이 화근이었다. 주위에

서 그렇게 무리하지 말라고 말렸으나 당장 끼니를 마련해야 하는 그녀

에게 다른 방도가 없었던 것 같았다.

밭매기는 쪼그리고 앉아서 작업을 해야 한다. 자궁에 혹이 자라고 있

는 터에 쪼그리고 앉았다가 섰다가를 거듭하다가 끝내는 거품을 물고

쓰러졌던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함께 있던 마을 아주머니들이 재빨리 나를 찾

아온 것이었다. 그 소식을 들은 나는 단걸음으로 훈이네 집으로 갔다.

훈이네 집에 이르러 거적문을 열고 들어가니 그녀가 누워 있는 곁에서

세 아이가 울고 있었다.

온돌조차 없는 방에 천장으로 하늘이 보이는 집이었다. 윗목에 사과상

자 2개가 놓여 있고 그 안에 옷가지들이 담겨 있었다. 아랫목에는 석

유 곤로와 취사도구들이 널려 있었다. 그녀는 부은 얼굴에 절망적인

표정으로 누워 있었다. 나는 그녀의 머리맡에 앉아 물었다.

『고생합니다. 어떻게 아프세요』

『뱃속에 큰 돌멩이가 돌아다니는 것 같은데, 어떤 때는 숨이 탁 막히

고 눈앞의 아찔해집니다』

『제가 택시 불러올 테니 병원에 가서 입원할 준비 하고 계셔요』

택시를 부르러 가다가 생각하기를 수술비도 없이 병원에 가 보았자 쉽

게 입원이 될 것 같지 않았다. 이런 경우에 동사무소에서 발급하는 생

보자증명서를 받아서 병원으로 가면 무료치료의 길이 열릴 것 같았다.

나는 종종걸음으로 동사무소에 갔다. 동장을 만나 사정 이야기를 하였

더니 그 지역주민들은 철거한 후에 무단으로 거주하고 있는 세대들이

라 그런 증명서를 발급하여줄 수 없노라고 했다. 거듭 사정하였으나

막무가내였다. 나는 속절없이 물러나 택시를 불러타고 훈이네 집으로

갔다. 택시에 훈이 엄마를 태우는데 함께 밭매기하던 아주머니들이 3

천원을 모아서 나에게 주며 말했다.

『예배당 선생님, 훈이 엄마는 꼭 살려야 해요. 선생님만 믿겄시요. 이

건 몇푼 안 되지만 우리가 모았시요. 병원비에 보태서 주시라요』

외면하는 병원들

나는 을지로 6가에 있는 중앙의료원으로 갔다. 정부에서 경영하고 있

는 병원이니 이런 위급한 환자를 설마 내쫓지는 않겠지 하는 마음으로

먼저 응급실로 들어갔다. 담당의사가 진찰을 해보더니 24시간 내로 수

술하지 않으면 생명을 건지기 어렵겠다며 빨리 입원수속을 하라고 했

다. 그 길로 원무과에 가서 입원수속을 하려 했다. 그런데 원무과에서

입원보증금을 내라고 했다. 나는 얼마 되지 않는 돈이지만 다 털어내

놓고 사정을 했다.

『지금 내게 있는 돈의 전부입니다. 우리가 사는 마을은 가난한 마을

이라 지금 마을에 가도 돈 구하기가 어렵습니다. 우선 입원시켜 수술

해 주시면 매월 얼마씩 갚아나가겠습니다』

『뭐라구요? 매월 얼마씩을 내겠다구요? 어디 병원이 월부장사 하는

곳인 줄로 아세요. 그건 안 됩니다. 입원보증금 구해 오셔서 입원시키

세요』

『지금 환자가 위독해서 그럽니다. 내 인격을 걸고 갚을 테니 사정을

좀 봐 주십시요』

『안됩니다. 비켜주세요. 다음 분 누구세요?』

나는 성심성의를 다하여 사정하였으나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이내

자기네들끼리 다른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환자를 돌아보니 얼굴이 창백해지고 숨결이 고르지 못했다. 조바심이

난 나는 다시 접수구에서 『어떻게 안되겠느냐』고 사정해 보았으나

그들은 말 상대도 하지 않겠다는 듯이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나는 속에서 조바심과 분노가 치솟아 마음을 통제키 어려워졌다. 저절

로 험한 인상이 되며 거친 말이 나왔다.

『이 새끼야. 좋은 자리에 있을 때 좀 봐 주라. 너그 놈들은 피도 눈물

도 없냐. 사람 죽어가는데 그래 돈만 따지고 있냐? 돈돈 그라다가 돈

다발에 깔려 뒤져라. 이눔의 새끼들, 확 뒤집어버릴까 보다』

그들은 못 들은 척하며 나를 보고만 있었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훈이 엄마를 데리고 나와 다시 택시에 태워 신촌 세브란스 병원으로

갔다. 그러나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하겠다고 세운 병원에서도 퇴짜를

맞았다. 서울대 병원에서도, 이화여대 병원에서도 훈이 엄마를 받아들

이지 않았다.

역시 입원 보증금을 갖고 오라는 것이었다. 급한 것은 환자였지 병원

측은 아니었다. 넓은 서울에 병원도 많았고 의사도 많았지만 훈이 엄

마가 치료받을 병원은 아무 데도 없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그녀를 업고 동대문 로터리로 나와 뚝섬 쪽으로 가

는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그러나 퇴근 시간이어서 버스마다 차고 넘

쳤다. 차비도 떨어진 터에 환자를 업고 만원버스를 타기는 어려운 일

이었다.

나는 동대문에서부터 걷기 시작했다. 한양대학 뒤편에 있는 뚝방촌을

향해 터벅터벅 걸었다. 주머니에는 동전 한 푼도 없고 점심도 거른 뱃

속에는 한기만 가득 찼다. 지친 몸으로 쉬엄쉬엄 걷는 걸음으로 나는

등에 엎드려 있는 훈이 엄마에게 넋두리를 늘어놓으며 걸었다.

『훈이 엄마. 참 힘들지요. 세상이 이래서 어떡허지요. 이 넓은 서울

바닥에 훈이 엄마가 들어갈 병원이 없구먼요. 나라가 세운 병원도, 예

배당이 세운 병원도 그리고 대학이 세운 병원도 훈이 엄마를 받아주지

않는군요. 집으로 들어가 밤에 기도하고 내일 아침부터 나가 또 딴 병

원 찾아가 보십시다』

겨울 해는 짧아 곧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성동소방서 가까이 갔을

때는 기력이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 등에 업힌 훈이 엄마는 웬일인지

점점 무거워지는 것만 같더니 이제는 등에서 잠이 들었는지 뒤로 젖혀

지고 있었다. 그녀의 몸이 뒤로 젖혀지니 내가 앞으로 나가지를 못하

고 오히려 뒤로 당겨가는 듯했다. 나는 짜증이 나서 투덜거렸다.

『훈이 엄마, 없는 사람이 뭘 먹고 이래 무겁소? 그라고 등에 딱 붙으

시라요. 좀 가벼우면 업고 가기도 수월할 텐데』

그렇게 투덜거리다가도 돌이켜 생각하니 그녀의 신세가 너무나도 서러

웠다.

<다음호에 계속>

그녀의 서러운 신세를 생각하면 그녀에게 짜증을 낼 형편이 아니었

다. 오히려 나 자신에 대해 짜증스러웠다. 온종일 병원 문턱을 드나

들었으나 돈이 없어 입원은 시키지 못하고 허탕으로 되돌아가는 나

자신의 무력함에 짜증이 났고 비참한 심정이 되었다. 나는 훈이 엄

마에게 말했다.

『훈이 엄마. 짜증내서 미안하오. 우리끼리는 이해하고 살아야지요.

그런데 훈이 엄마, 제발 뒤로 제껴지질랑 마세요. 내 등에 몸을 붙

이세요. 우리 사이에 내외할 것도 없잖아요』

그러나 훈이 엄마는 협조해주지 않았다. 애써 등에 붙여놓으면 몇

발짝 가지 않아 이번에는 옆으로 넘어졌다. 그러면 그 쪽으로 내

몸도 기울어질 수밖에 없었다. 몇번을 그렇게 되풀이하고 나니 화

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끝내 나는 분통을 터트리며 뒤로 깍지끼

고 있던 손가락을 풀어 그녀를 땅바닥에 떨어뜨려버렸다. 성동소방

서의 콘크리트 바닥에서였다. 그녀가 쿵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

지는 것을 들으며 나는 투덜거렸다.

『세상에 그렇게도 말이 안 통하요. 내가 서방이여, 오래비여. 도대

체 협조를 해줘야지. 도무지 자가용 탄 것도 아니고 당나귀 탄 것

도 아니고…』

투덜거리며 화풀이를 하다가 바닥에 떨어져 누운 그녀를 보는 순간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도무지 꼼짝하지 않는 모습이 이상했다. 다

가가 살펴보았더니 이미 죽은 시체였다. 그 순간 온 몸에 힘이 쑥

빠져나갔다.

앞이 캄캄해져서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리고 나직한

소리로 말했다.

『안돼! 안돼요! 훈이 엄마, 여기서 죽어선 안돼요. 악착같이 살아

남아서 이 한을 풀어야제. 죽어버리면 어떡허요. 억울해서 어떻게

죽어요. 절대로 살아야 돼요』

시체를 끌고 가다

그러나 그녀의 몸은 이미 굳어져 가고 있었다. 내 등에서 뒤로 옆

으로 쓰러지던 때에 이미 굳어져 가고 있었을 터였다. 이상스레 지

나는 행인조차 없는 밤이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오랫동안 앉

아 있었다. 점차 그녀의 손으로부터 한기(寒氣)가 내게로 전해왔다.

춥고 배고프고 슬프고 분했다. 온 서울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질

러 함께 죽어버리고 싶었다. 나는 일어나서 하늘에 대고 삿대질을

했다.

『예수? 필요 없어. 무슨 구주(救主)가 그래? 착하고 힘 없는 이

여인이 하루 종일 헤매다가 죽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는 예수가 무

슨 구세주(救世主)야. 그런 구세주는 필요없어! 그런 주인을 믿고

어떻게 내 인생을 걸겠어. 이제 가서 예배당 간판 떼버리고 이런

놈의 세상 뒤집는 일이나 하겠어』

나는 독기가 올라 사고가 정지되고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졌다. 마

을로 들어가는 대로 활빈교회 예배당 간판을 떼어버리고 바닥에서

부터 세상을 뒤집는 일에 일생을 걸겠노라고 다짐했다.

그녀를 업고 갈 힘은 없고 그렇다고 길 가에 두고 갈 수도 없어 하

는 수 없이 그녀의 옷자락을 끌고 갔다. 끌고 가다가, 옆구리에 끼

고 가다가를 되풀이하며 한양대학을 지나 뚝섬으로 나가는 성동교

에 이르렀다. 다리 중간 쯤에 왔을 때는 너무나 지쳐 무릎이 푹 꺾

였다.

나는 다리 난간에 그녀를 기대놓은 채 앉아 있었다. 이미 어둠이

밀려와 헤드라이트를 켠 차들이 쌩쌩 지나갔다.

얼만가를 그렇게 앉아 있는데 누군가 내 곁에 다가서는 듯한 느낌

을 받았다. 고개를 들어 좌우를 살폈으나 아무도 없었다. 그 시간에

다리 한 가운데에 누가 있을 턱이 없었다. 다시 고개를 떨어뜨리는

순간 소리가 들렸다. 바로 곁에 선 사람이 들려주는 부드러운 음성

이었다.

『진홍아, 네 등에서 죽은 그 여자가 누군지 아느냐? 십자가에 죽

은 나 예수다』

숨이 멈출 만큼 놀란 나는 주위를 살폈다. 물론 아무도 없었다. 그

냥 적막만 감돌았다. 나는 가슴이 뜨거워지고 눈물이 쏟아졌다. 일

어나 시체 앞에 무릎을 꿇고 그 손등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예수님,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주님이 오늘 내 등에서 숨을

거두었다는 말씀의 뜻을 알겠습니다』

나는 일어나 성경을 꺼내들고는 가로등 밑으로 갔다. 「시편」 57

편을 찾아 7절과 8절을 읽었다. 세번을 연거푸 읽고는 깊이 생각했

다. 그리고 기도했다.

『주인되신 예수님. 내가 해야 할 일, 가야 할 길을 알았습니다. 내

가 맡은 사명을 알았습니다. 이렇게 어둠이 깊어진 세상에 새벽을

깨우는 일을 하겠습니다. 오늘 내 등에서 숨을 거두신 예수님의 뜻

을 헤아려 이 땅에 새벽을 깨우는 일에 인생을 걸겠습니다』

『내가 새벽을 깨우겠습니다』

나는 시체를 안고 마을로 들어갔다. 밤 사이에 마을 할머니들께 이

불 호청 하나를 맡겨 수의를 지어 입히고 다음날 벽제 화장터로 갔

다. 화장터로 가기 전에 동사무소를 찾아가 매장허가서를 받아왔

다.

지난번에 「살리는」 증명서를 받으러 갔을 땐 절대 안 된다고 거

절하더니 「죽은」 증명서를 해달랄 때에는 두말없이 끊어 주었다.

산 사람에게는 무정해도 죽은 사람에게는 너그러운 것이 세상 인심

이었다. 화장터에서 잿봉지를 만들어 한강교로 갔다. 한강 물에 재

를 뿌리며 중얼거렸다.

『훈이 엄마, 이 길로 예수님 나라로 가세요. 거기는 판잣집도 없고

철거반도 없는 곳이에요. 그곳에 먼저 가서 안식을 누리고 계시라

요. 예수님 만나걸랑 예수님 옷자락 붙들고 실컷 우시라요. 남은 애

들일랑 걱정 마세요. 활빈교회가 잘 길러서 일꾼으로 만들 테니 염

려 마시라요. 나중에 예수님 나라에서 반갑게 만납시다』

마침내 재를 쌌던 보자기까지 한강 물에 떨어뜨리고서 발길을 돌렸

다.

마을로 돌아오는 길에 따끈따끈한 호빵을 사다가 세 아이를 먹였

다. 엄마가 죽었어도 훈이는 호빵을 받아 쥐고는 행복한 얼굴로 먹

었다. 할머니는 손주들 곁에서 울음을 삼킨 채 눈물만 훔쳤다. 그

마을 20여 세대에서 누구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가 벙어

리가 되어 있었다. 내가 들은 단 한마디는 어느 할머니의 말이었다.

할머니는 나를 외면한 채 하늘을 쳐다보며 말했었다.

『이눔의 시상 망해야되아. 폭싹 잿더미가 돼야 된당게』

나는 지친 몸을 끌다시피 방으로 들어가 쓰러졌다. 이대로 깨지 말

고 영원히 잠들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요한계시록」 21장

을 암송하다가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다음날 이른 새벽 나는 신발 끈을 졸라매고는 넝마주이를 나섰다.

새벽의 맑은 공기를 깊이 들이마시며 뜀박질을 했다. 호흡에 맞추

어 구호처럼 외치며 일터로 달음질했다.

『내 마음이 확정되었습니다』

『내가 새벽을 깨우겠습니다』

저녁에 임씨 부인이 찾아왔다. 보름 전에 밀가루 한 포를 가져다준

집이다. 그 가정에 양식이 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는 넝마주이 수

입에서 한 포를 사서는 밤중에 가져다 주었던 집이다. 낮에 가져다

주면 이웃사람들 보기에 자존심이 상할 것 같아 아무도 보는 사람

이 없는 밤 시간을 이용해 가져다 주었던 것이다. 그 부인이 찾아

와서는 말했다.

『전도사님, 죄송합니다. 한번만 더 은혜를 입었으면 해서 염치불고

하고 찾아왔습니다』

평균적으로 5~6명의 식구가 밀가루 한 포로 수제비를 끓여 먹으면

열흘 가량 먹을 수 있다. 보름 전에 한 포를 가져다 주었으니까 이

미 수일 전에 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한 포 더 도와달라는 부인

을 보고 속으로 화가 치밀었다.

「이 사람들이 내가 약한 체력에 죽자사자 넝마주이를 해서 그 돈

으로 도와준 것을 알기나 할까? 나는 자기네들 도와주고 나서 식

은땀을 흘리며 쓰레기통을 뒤지는 동안에 자기네 부부는 그냥 어영

부영 시간만 보내고 있었을 것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니 싫은 마음이 들었다. 나는 싫어지면 얼굴에 표시

가 나는 성격이어서 화를 속으로 삭이며 잠시 기다리라 이르고는

부엌으로 갔다. 냉수 한 컵을 들이켜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생각했다.

화를 낼 일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빈민선교의 핵심이 아닌가. 빈민

심리의 두드러진 특성이 게으름 의타심(依他心), 그리고 낭비 아닌

가. 이 사람들은 그런 심리적·정신적 구조 때문에 이런 생활에 빠

져 있는데, 내가 화를 낸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지금처럼 개개인에

게 구제만 하는 방식으로는 서로 좋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마음이 가라앉고 생각에 실마리가 잡혀 부인에

게로 가서 말했다.

『댁의 사정은 알겠습니다. 저에게 한 가지 생각이 있으니 가셔서

바깥어른을 저에게로 좀 보내주십시오』

『아이 아버지를 보내달라구요?』

『예, 임선생을 만나 의논할 일이 있습니다』

임씨와의 솔직한 대화

부인은 알겠노라며 돌아갔다. 두어시간이나 기다렸으나 임씨는 오

지 않았다. 이대로 끝나면 좋지 않을 것 같아 내가 찾아갔다.

임씨는 방에 있었다. 그는 나를 보자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허리를

굽실굽실했다. 지나치게 굽실거리는 모습이 퍽 못마땅하고 비위에

상한 나는 머리가 천장에 닿는 임씨네 방에 들어가 앉아 기도하며

생각했다.

「내가 밀가루 한 포로 이분들에게 해를 끼쳤구나. 이분들은 밀가

루 한 포 얻어먹은 것이 빌미가 돼 쥐약 먹은 것처럼 자신들의 인

격에 손상을 받았구나. 이분이 내 앞에서 이렇게 비굴해진 것이 나

에게 얻어먹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이 분이 나와 대등한 인격적

관계를 지니지 못하고 굽실대는 것이로구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이들의 마지막 재산인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는 것이로구나. 이점에

대한 바른 대처가 빈민선교의 핵심일 것이다. 이 가정에서부터 본

보기로 다시 시작해야겠다」

이런 생각 끝에 나는 그 부부에게 진지하고도 정직하게 대해야겠다

고 마음 먹었다. 문제를 임시 방편으로 쉽게 해결해버리거나 감상

주의에 빠져선 안 되고 그 뿌리를 찾아 근본적으로 해결해야겠다고

다짐한 나는임씨에게 말했다.

『임선생, 조금 전에 부인께서 저를 찾아오셔서 양식이 떨어졌다고

말하고 한번만 더 도와달라고 했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기분이 퍽 나빴습니다. 왜냐하면 지난번에 가져다 드린 밀가루도

제가 넝마를 주워 번 돈에서 사다드린 것이고 또 밥이 먹고 싶다고

우는 제 아들을 모른 체하고 이 집을 도와드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렇게 터놓고 말씀드리는 것은 임선생 가정으로부터 크게 배

운 게 있어 임선생께 열린 마음으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제가 이

마을에 와서 살게된 지 이미 반년이 지났습니다. 그간에 살피건대

이 마을 주민들은 게으릅니다. 게으르니 내일이 없습니다. 이집저집

할 것 없이 하루 먹을 양식만 있어도 일하지 않고 놉니다. 이래서

는 아무런 해결책이 나오지 않습니다. 가난을 벗어날 길이 열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외부 도움을 받는 것은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일 뿐

이지 근본 해결은 되지 못합니다. 해결책은 자기 속에서만 나올 수

있습니다.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 내 가난, 내 팔자, 내 운명을

고쳐보겠다고 나서야만 가난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열심히 말했다. 임씨는 가만히 듣고 있었

다. 내 말이 끝나고 한참이나 침묵이 있은 후 임씨가 입을 열었다.

『전도사님 말씀이 옳습니다. 우리는 게으릅니다. 사지가 멀쩡한 장

정들이 사시사철 방안에 들어앉아 새끼들이 벌어오는 푼돈을 뜯어

먹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몰라서가 아닙니다. 우리도 「야마리(염치

의 경상도 사투리)가 빤하니까 다 알고 있지요. 그러나 「뭘 좀 해

야겠다」 「이대로는 안되겠다」 생각을 하면서도 어쩔 수 없어 세

월만 보내고 있는 게지요. 말하자면 앉은뱅이 용쓰기라 할까요. 마

음 속에 궁리만 있지 실천으로 나서지를 못하고 있는 겁니다. 전도

사님이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까 내심으로 부끄러운 생각이 드는구

만요. 나도 이렇지 않은 때가 있었는데…』

동업자가 되다

나는 그가 반발하지 않고 내 말을 받아 들여주는 것이 기뻤다. 그

리고 가능성이 있음을 느껴 그에게 진솔하게 협조를 구했다.

『제가 임선생께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임선생께서 용기를 내셔서

일터로 나가 보시지 않겠습니까? 수입이 있고 없고, 많고 적고 간

에 일단 나서서 일을 하시면 그 자체로 이 마을에서 본보기가 될

것입니다』

『그야 내일 당장이라도 나설 마음이 있습니다만, 어디 마땅한 일

감이 있을까요? 전도사님께서 좋은 생각이 있으시면 일러 주십시

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몸을 아끼지 않고 나서 보겠습니

다』

『좋습니다. 임선생 자신이 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일이 무엇입니

까? 예를 들면 무슨 기술이든 장사든 노동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

되는 일이 있으시면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순서 아니겠습니

까?』

『뚜렷한 기술은 없고 시골에서 올라와서 처음에 고물장사꾼을 따

라 다녔었는데 그 일이라면 지금도 할 것 같습니다』

『그러시다면 그 일을 하는데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요?』

『고물장사가 좋은 건 별다른 준비가 필요없는 것이라 하겠지요.

신발이나 질긴 것으로 신고 주머니에 기천원 넣고 다니다가 헌 물

건들을 싼 값으로 사서 다시 얼마간 이익을 붙여 팔면 되는 게지

요. 예를 들면 중고 시계, 다리미, 전기제품 등등으로 각 가정에서

필요없는 것을 사서는 필요한 가정에 팔거나 고물상에 넘기면 됩니

다』

나는 그 일이 임씨에게 적당한 일감이라 여겨졌다. 그가 그 일을

시작하면 나도 경험삼아 그를 따라다니며 고물장사의 요령을 배우

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동업자가 되기로 했다. 내

편에서 필요한 자본금을 마련하고 임씨 편에서는 노하우를 대는 동

업자이다.


빈민선교의 전환점

그날 이후로부터 나는 빈민촌 선교활동을 전면적으로 변경했다. 개

개인을 도와주던 구제에서 주민들의 조직된 힘으로 문제들을 스스

로 풀어나가는 방향으로 이끌기를 힘썼다. 나는 마을에서 발언깨나

하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설득하기 시작했다.

『힘을 모아 서로 돕고 삽시다』

『혼자서는 실패했지만 뭉치면 성공할 수 있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설득했다. 대폿집에도 찾아가고 화투판에도 끼어

들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마을 사람들이 모인 곳이면 어느 자리든

찾아가서 이야기했다. 대개 소극적이고 부정적이었다. 우리 주제에

나서 봐야 별 볼일 있겠느냐면서 자리를 피해 버리는 것이었다. 그

러나 그중에도 호응하는 분들이 있었다. 그렇게 열심을 내니 처음

에는 마을 소문이 나쁘게 돌았다.

『활빈교회 전도사는 술 받아주며 예수 믿으라 한다』

『평양서 온 사람처럼 수상하다』

이런 소문들이 돌았으나 나는 개의치 않았다. 모든 일에는 시간이

약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소문은 줄어들어가고 호응하는 여

론은 늘어갔다.

드디어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을 때 교회당에 주민들을 모으고 회의

를 열었다. 긴 토론을 거쳐 마침내 마을 조직이 만들어졌다. 「송

정동 판자촌 주민회」라는 이름을 붙이고 회장 1명, 부회장 2명, 총

무 1명, 그리고 5개 분과위원장을 선출했다.

5개 분과란 그간의 경험에서 파악된 판자촌 안의 문제점들을 분류

하여 정해진 위원회였다. 첫째 주민교육부, 둘째 건강관리부, 셋째

협동조합부, 넷째 생활안정부, 다섯째 개발봉사대였다. 이렇게 다섯

부로 나누고 각 부에 7~9명의 분과 위원을 선임한 후 그들 중에서

분과위원장과 간사를 뽑게 했다.

다음날부터 교회당 건물에 「송정동 판자촌 주민회」란 간판을 걸

고 전 주민을 회원으로 가입시키는 조직확대 작업을 시작했다. 주

민회 임원들은 매일 교회당에 모여 해결해 야 할 지역 문제들을 논

의했다. 그렇게 논의된 결과에 따라 분과별로 사업 계획을 세웠다.

활빈교회는 주민회가 지역사회 내의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는 일에

보조를 맞추었다. 중요한 것은 각 분과위원회의 활동이었다. 5개 분

과위원장은 지역에서 성실한 분들로 선임하고 각 분과의 간사는 교

회 청년들 중에서 섬기는 정신이 있는 청년들을 배치했다. 기본조

직이 정비되자 분과별로 사업을 추진해 나갔다.

주민교육부에서는 ▲어린이 학교 ▲지역사회학교(청소년을 위한 야

학) ▲청년 강좌 ▲엄마교실 ▲사랑방 모임 ▲새마을 강연 등 프로

그램을 만들었다. 건강관리부는 ▲영·유아 건강관리 ▲임산부 건

강관리 ▲결핵퇴치 사업 ▲가족계획 ▲보건교육 ▲일반진료 ▲치과

진료를 월요일에서 토요일 사이에 실시키로 했다.

생활안정부에서는 직업보도와 직업훈련 그리고 마을에 가내공업(家

內工業)을 유치하는 사업을 추진했다. 후에 실업자조합과 자활회가

창설되면서 생활안정부는 가장 중요하고 활발한 분과가 되었다.

협동조합부에서는 신용조합과 소비조합을 설립하고 다음 단계로 생

산조합까지 만들어 나가자고 꿈에 부풀었다. 빈민촌에서 중요한 것

은 신용조합 사업이다. 빈민촌 주민들의 심리적 병폐 중의 하나는

생활에 규모나 계획성이 없고 내일을 위한 투자가 없는 점이다. 있

을 때는 낭비하고 없을 때는 굶주린다.

온 마을을 진동한 불고기 냄새

한번은 교인 중에 한 가정이 갑자기 무슨 돈이 생겼는지 소고기를

20여근이나 사다가 불고기를 했다. 그렇게 많은 고기를 구우니 온

마을에 고기 냄새가 진동했다. 이웃 사람들이 고기 굽는 냄새에 후

각이 자극돼 모두들 한마디씩 했다.

『제길헐, 언 눔 고기 안 먹어 본 눔이 있나. 왜 이래 냄새를 피워

쌌노. 뱃속에 회충이 요동을 쳐싸 이거 원 견딜수가 있나…』

그렇게 냄새를 피우며 고기를 구운 그 가정의 주부는 구운 고기를

접시에 담아 온 이웃에 한 접시씩 돌렸다. 모두들 목에 기름칠을

하게 되니 마을잔치처럼 되었다. 물론 나에게도 푸짐한 고기접시가

왔다. 그 집 아들이 얼굴에 홍조를 띠며 고기 접시를 가져 와서 말

했다.

『전도사님, 울 엄마가 전도사님 갖다 드리래요. 잡숫고 적으면 더

드시래요』

나는 『웬일이냐! 너의 집 무슨 잔치가 있는 날이냐』 하며 받아서

잘 먹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있은 지 불과 3일 만에 그 주부가 우

리 집으로 와서 아내에게 말했다.

『사모님 죄송스럽습니다만 쌀 한 사발만 좀 꿔 주세요』

나는 지나다가 그 말을 듣고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저 가정이 3일

전에 온 마을에 고기잔치를 했었는데 오늘 어떻게 쌀을 꾸러 왔을

까 하는 의문이 생겨 그녀에게 물었다.

『아니, 자매님 쌀자루를 누가 들고 가 버렸나요? 사흘 전에 온 마

을에 불고기 잔치하시더니 오늘 웬 일로 쌀 꾸러 오셨어요?』

『아이고 이 일을 어쩌나. 전도사님이 계셨구나. 사모님께 살짝 말

씀드리려 했는데 전도사님까지 알게 돼버렸네요』

『그건 그렇고 쌀자루는 어떻게 된 거예요』

『그때는 모처럼 돈이 생겼기에 죽기 아니면 살기로 먹어버린 거지

요』

이런 식이다. 빈민들은 생활에 규모가 없어 어쩌다가 돈이 생기면

내일을 위해 저축하거나 장래를 위해 대비하지 않고 그냥 써버린

다. 이런 습성이 빈민들이 지닌 심리적 구조다. 그러니 빈민선교가

제대로 되려면 단순히 예수 믿고 예배당 다니게 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런 신앙 생활에 더해 생활에 규모를 찾게 하고 저축심

을 기르며 서로 돕는 공동체 정신을 높여 나가는 훈련이 더해져야

빈민선교가 제대로 되는 것이다.

월 30%가 넘는 「달러 빚」

신용조합 운동은 그런 점에서 효과적인 방법이다. 특히 빈민촌에서

성행하고 있는 「달러 빚」이란 것이 있다. 월 30%를 넘는 고리채

다. 이런 달러 빚을 추방하는 데는 신용조합 운동이 제격이다. 민주

주의도 인권도 자유도 경제가 뒷받침돼야 한다. 기본 경제가 뒷받

침되지 않는 절대빈곤 상태에서는 민주주의도 인권도 헛된 구호에

머물게 된다.

끝으로 개발봉사대는 마을 청년들로 조직돼 도로관리, 청소, 소독,

장례, 방범, 방화 등의 일을 맡는 특별 조직이다. 이렇게 주민 조직

이 완비되고 조직의 각 부서가 기능을 발휘하게 되면서 마을 분위

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싸움으로 날이 새고 지던 마을에서 싸움이 줄어들고 술타령과 화투

놀이로 소일하던 분들이 주민회에 직업소개를 의뢰해 왔다. 마을

주민들로 진저리를 내게 했던 불량배들이 개발봉사대 대원이 되더

니 방범을 맡아 사고가 잦은 길목을 밤늦게까지 지키기도 했다.

그들 중에는 전과 3,4범은 보통이었고 전과 13범까지 있었다. 그러

나 그런 그들도 마주앉아 이야기하노라면 선량한 젊은이들이었다.

얼마든지 개조돼 값어치 있는 일에 쓰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

는 젊은이들이었다.

그들 중에 밤늦게 지나가는 처녀들을 덮쳐서 돈도 뺏고 몸도 뺏는

일에 베테랑인 녀석이 있었다. 많은 처녀들이 그에게 당한 것을 알

고 그에게 물었다.


『자네는 왜 그렇게 죄없는 처녀애들을 욕을 보이는가? 위험한 일

일 텐데? 꼭 여자 생각이 나서 그러는 것이면 종삼이나 양동 같은

데 가서 몸 풀고 오면 되지 않겠는가!』

『하이고 성님, 여자 생각이 나서 여자를 덮치는 거 아닙니다』

『그럼 왜 그렇게 하는가? 그런 일로 일당 나오는 것도 아닐텐

데?』

『심심해서 그럽니다요. 사는 기 하도 갑갑증이 나서 한두 번 그러

다가 그만 인이 백인 거지요. 팔다리에 피가 뛰는 젊은 놈이 할 일

은 없고 눈에 보이는 건 많으니까 좀이 쑤셔서 그러지요』

『할 일 없어 그런다면 나하고 넝마주이나 나가세나』

『가만 계십쇼. 그 동안엔 뚝방을 지나다니는 불쌍한 공순이들을

건드렸는데 요사이 생각하니 그기 맘에 걸린다 이겁니다. 그런 불

쌍한 애들 건드릴끼 아니라 잘 먹고 잘 살고 잘 빠진 「범털가시나

(잘 사는 여자)」들 한탕만 하고서 손 씻을 랍니다』

그러나 얼마 후 그는 감방으로 끌려갔다는 소식이 들렸다. 아마

「범털가시나」들에게 한탕하려다 실수가 있었던 모양이다. 좀 더

일찍 잡아주었으면 좋은 일꾼이 될 수 있었을 사람인데 버린 것이

애석했다.

앉은뱅이가 걷게 되다

한국교회는 너무 고상하고 깨끗해서 이런 거친 영혼들이 적응하기

에는 어려운 분위기다. 이들이 새롭게 살아보고 싶은 마음으로 교

회로 찾아갈 때가 있다. 그러나 깨끗한 교회는 깨끗지 못한 것 같

은 그들의 분위기에 지레 겁을 먹고 마음 문을 닫아 버린다. 이들

은 그런 반응을 느끼고는 자격지심으로 더욱 거친 행동을 나타낸

다. 그래서 교회에는 항상 모범생 기질이 있는 사람들만 적응하고

문제아들은 교회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된다.

어느 날 빈민촌에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재학생인 김상현군이 찾아

왔다. 가난한 이웃들에 대한 봉사정신으로 가득찬 젊은이였다. 그는

예수께서 빈민선교회를 위해 특별히 뽑아놓은 것 같은 일꾼이었다.

나는 그와 팀이 되어 빈민촌 주민들을 한집 한집 방문해가며 환자

들을 치료하고 대화를 나누고 위로하는 일에 열중했다.

그는 아직 의과대학 재학생인데도 그가 처방하는 약들은 신통하게

잘 나았다. 그래서 그는 마을에서 명의(名醫)로 인정받게 되었다.

하루는 가정방문에서 한 앉은뱅이 부인을 만났다. 남편은 전직 경

찰관이었고 4살, 2살 두 아이의 어머니였다. 지난해 아기 낳을 때

출혈이 심하더니 그후로 일어서지를 못하고 앉은뱅이가 되었노라고

했다. 두 손으로 짚고 엉덩이로 다니며 아기를 키우고 가사를 돌보

고 있는 것이 딱해서 김상현군과 나는 치료해보기로 결심했다.

우선 중앙의료원으로 데리고 가서 진찰부터 했다. 병원에서는 엑스

레이를 여러장 찍고 검사를 하더니 치료불능이라 했다. 우리는 의

사에게 그래도 치료할 수 있는 어떤 방도가 없겠느냐고 물었다.

『글쎄요. 이병철 딸이 된다면 돈으로라도 한번 시도는 해볼 수 있

겠지만 현상태로는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나는 의사의 말을 듣고서 그녀를 택시에 태워 돌아오면서 포기하지

않고 그녀를 치료하는데 도전해 보기로 다짐했다.

『상현군, 치료불능이라 하지만 우리 한 번 도전해 보세. 의사가 하

나님은 아니잖은가?』

『그래도 의학은 과학인데 과학적으로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지

요』

『그렇다고 그냥 물러설 수만은 없는 것 아닌가. 내가 기도할테니

자네는 적합한 약을 지어보게나』

그래서 김상현군은 소화제 비타민 등을 섞어 큼직한 약봉지를 만들

고는 하루 세번씩 드시라며 주었다. 나는 앉은뱅이 부인께 말했다.

『애기 엄마. 이 병은 약으로 고친다고 생각해선 안됩니다. 의사선

생이 주시는 이 약을 들면서 기도 드립시다. 병은 의사나 약이 고

쳐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고쳐주십니다. 약 드실 때마다 기

도 드리세요』

그리고는 상현군과 나는 부인의 손을 잡고 기도드렸다. 그후로 나

는 새벽기도 때마다 부인을 위해 간절히 기도드렸고 자주 가서 위

로와 격려를 했다.

그러던 얼마 후 드디어 부인이 일어서는 날이 왔다. 처음엔 무릎을

손으로 잡고 빠듯이 일어서더니 다음은 한발 한발 걸음을 떼다가

나중에는 제대로 걷게 되었다. 이 일로 상현군과 활빈교회는 대단

한 권위가 붙게 되었다. 앉은뱅이를 고치는 신통력이 있는 것으로

소문이 나게 된 것이다.

그렇게 소문이 나니 좋을 것으로만 여겼는데 얼마만에 대단히 난처

한 처지에 이르게 되었다. 앉은뱅이들이 소문을 듣고 치료받으려들

찾아오는 것이었다. 심지어 불광동에서 택시까지 타고 왔다. 나는

질겁을 해서 설득하여 돌아보내느라 곤혹을 치렀다.

의대생들의 활약

상혈 군의 활약으로 의사 약사 의대생 약대생 치대생 간호대생들이

모여 진료팀을 이루었다.

송정 의료봉사회라 이름한 진료팀은 토요일마다 일반진료와 치과진

료를 실시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진료반의 치료로 병들이 잘 나

았다. 종합병원에서 못 고치던 병들이 학생들이 처방한 약으로 낫

곤 했다.

월요일에는 기독교 의료선교협회의 도움으로 영·유아 건강관리와

임산부 건강관리 사업을 실시했다. 화요일마다는 영·유아들에게

각종 예방 주사를 놓았고 수요일에는 산부인과 의사가 와서 임산부

들에 대한 건강지도를 했다. 목요일에는 보건소 주도로 결핵환자

치료를 실시했다.

건강관리 사업이 궤도에 오르자 다음으로 마을사업에 있어 가장 중

요한 사업은 주민교육사업이었다. 빈민촌에서 빈곤의 문제는 물질

적인 문제이기 이전에 정신적인 문제였다. 물론 경제·사회적인 원

인도 중요한 것이긴 하였으나, 더욱 중요한 것이 정신적인 원인이

었다. 빈곤 문제가 정신적인 마음가짐의 문제였기에 주민들의 마음

가짐을 고치는 의식개조 차원에서 그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 빈민

촌 주민들이 빈민촌으로 들어온 지 10년이 지났어도 빈곤을 벗어나

지 못하고 오히려 사정이 날로 나빠지는 것은, 경제·사회적인 원

인과 함께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정신적·심리적 원인이 있기 때

문이었다.

그러므로 빈곤의 해결은 경제·사회적인 조건의 개선 이전에 정신

적인 깨우침, 다시말해 의식을 바꾸는 교육을 통하여 이뤄지는 것

이기에 마을 사업에 있어 주민교육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여기서 주민교육이라 함은 넓은 의미의 의식화작업(意識化作業)을

뜻한다. 주민 스스로가 주체적인 결단을 통하여 빈곤을 극복하고

바람직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것이 의식화의 과제

이다.

이러한 의식화를 위한 주민교육은 건강한 마음과 민주사회 건설의

기초단계로 시민정신의 고취가 요청된다. 이를 위하여 주민들의 자

치능력을 높이고 훈련시켜야 한다.

이런 점을 감안하여 우리는 주민교육 프로그램을 세우고 단계에 따

라 교육을 실시해 나갔다.

72년 4월6일에 주민교육 사업의 일환으로 지역사회학교인 배달학당

(倍達學堂)을 열고 마을 청소년 56명을 모집하여 중학교 과정을 야

학으로 시작했다. 4월15일에는 20대의 청년지도자 20명을 뽑아 1주

6시간씩 6개월 과정의 청년지도자 훈련과정을 시작했다.

매주 3회로 주부교실을 열고 마을 주부들에게 육아, 요리, 위생, 교

양 그리고 부업을 위한 기술교육을 시켰다. 어린이들을 위해서는

주 3회로 어린이학교를 열어 동화, 노래공부, 놀이지도, 자치활동

등의 교육을 실시했다. 이러한 프로그램들이 하나씩 시작되면서 마

을은 활기를 더해갔다.

활빈교희의 철거

그런데 시련이 닥쳤다. 교회당 건물이 구청 철거반에 의해 산산조

각이 난 것이다. 예상도 못하였던 기습이었다. 72년 4월24일이었다.

아침 9시 반경에 나는 마을의 각 가정을 방문하고 있었다. 한 아이

가 숨이 턱에 닿도록 달려와서는 내게 말했다.

『전도사님, 교회집 뜯고 있어예』

무슨 말인지 물으니 철거반들이 와서 교회당 건물을 뜯고 있다는

것이었다. 깜짝 놀라 달려가 보니 철거작업은 이미 진행되고 있었

다. 진료반의 의료기구들이 건물 밖으로 팽개쳐져 와장창 와장창

깨지고 있었다. 25명이나 되는 철거반원들은 스리쿼터 2대를 청계

천 둑 위에 세워 둔 채로 신속하게 철거작업을 진행시키고 있었다.

주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마을 청년들이 흥분했고 부녀자들은

욕을 퍼부었다. 넝마주이 동료인 최군이 내 곁으로 와서 말했다.

『전도사님, 이거 너무 하잖습니까? 한판 붙읍시다』

『글쎄, 좀 생각을 해봐야겠는데…』

그러나 최군은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이미 젊은 패들을 볼러모으

기 시작했다. 철거반을 상대로 일전을 벌이자는 것이었다.

나는 망설였다. 성동구청에서도 교회당 철거에 주민들과 교인들의

반발이 클것을 예상했는지 평소보다 3배에 가까운 인원을 동원하여

이른 시간에 기습을 한 것이다. 9시가 공무원들의 출근 시간인데 9

시반에 철거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이 사정을 증명해주었다. 상이

니 각목이니 쇠파이프 등을 들고 나오는 주민들이 눈에 뜨이기 시

작했다. 그들 중에 한 분이 고함을 질렀다.

『야 이 ×새끼들아. 너희들 오늘 잘 만났다. 오늘이 늬들 초상치는

날인 줄 알아라』

뒷골목 출신의 철거반

철거반에서도 대비하기 시작했다. 시내 뒷골목에서 주먹깨나 쓰는

자들을 일당을 주고 모집해 꾸린 철거반인지라 그들도 싸움이라면

이력이 난 자들이었다.

이미 철거반들을 향해 돌멩이 몇 개가 날아가고 있었다. 그들도 열

을 받았는지 사정없이 건물을 부숴대고 있었다.

나는 골똘히 생각했다. 어떻게 할 것이냐? 주민들의 흥분된 상태를

그냥 둘 것이냐? 아니면 만류할 것이냐? 철거반에 조직적으로 대

항할 것이냐? 아니면 그냥 당할 것이냐? 어느 편이 더 유리할까?

머릿속으로 저울질하다가 드디어 결정을 내렸다. 주민들의 행동을

제지하고 그냥 철거당하는 쪽으로. 일단 철거를 당한 뒤에 다시 세

우는 과정에서 좋은 열매를 거둘 수 있을 것이란 판단이 들었기 때

문이다.

철거된 뒤의 복구작업에서 그간에 주인들에게 펼쳤던 봉사활동과

조직사업의 성과를 측정할 수 있었고 또 주민 의식화 훈련에도 절

호의 기회가 될 것이란 판단이 들었던 것이다. 나는 몇몇의 지도급

주민들을 불러 부탁했다.

『나에게 계획이 있으니 주민들의 반항을 제지시켜 주세요』

『아니 전도사님, 뭔 생각이신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냥 내버려 둡시

다요. 이런 분위기가 되기도 어려운데요?』

『아니에요. 지금 여기서 폭력으로 반발하면 일이 틀어져 버립니다.

그냥 당하는 편이 유리합니다. 부탁합니다. 내 생각대로 움직여 주

세요』

『 국비장학생 지원서 』

얼굴에는 불만스러운 표정이 뚜렷한 대로 그들을 내 의견에 따라주

었다. 주민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전도사님이 가만 있으라 하

시니 자중 하세요, 자중들 하세요』 하며 소리쳤다. 손에 쥐었던 돌

들을 놓으며 한발짝씩 물러서는 주민들이 보였다. 그러나 욕설은

더 거칠어졌다.

드디어 교회지붕이 기우뚱 내려앉았다. 땀 흘려 세운 집이 내려앉

는 것을 보려니 몸에 경련이 일어나는듯 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기분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속으로 삼키며 몇걸음 뒤로 물러섰

다. 이웃집 처마밑에 서서 전체 상황을 살폈다. 쓰러진 건물 지붕

위에 개발봉사대 대장인 김종길 집사가 올라가 삽을 높이 들어 흔

들며 소리쳤다.

『활빈교회의 교회당 건물은 쓰러졌으나 교회가 쓰러진 것은 아닙

니다. 승리는 우리에게 있습니다.』

나는 멀리 서서 그에게 내려오라고 손짓을 보였다. 한 청년이 내게

로 오더니 말했다.

『전도사님, 껀수가 생겼심더. 철거반 한놈이 의료기구실에서 뭔가

를 주머니에 집어 넣는 것을 보고 최씨가 항의하다가 철거반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했습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 새끼들

이 차에 탈 때 조져삐리야겠심더』

『그러면 안 돼요. 절대 안 돼요. 그냥 보내세요』

『전도사님께 책임이 돌아가지 않도록 할테니 안심하세요』

그러고서 그는 뛰어다니며 청년들에게 스리쿼터가 있는 둑 위로 모

이라고들 소리 지르고 다녔다. 철거반원들이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욕설이 다시 퍼부어지기 시작하고 청년들은 둑 위로 움직이기 시작

했다. 다급해진 나는 확고하게 청년들에게 말했다.

『자네들 가만히들 있어! 다 된 밥에 코 빠트리기야. 제발 가만 있

어줘!』

그들은 나의 서슬에 머뭇거렸다. 철거반을 실은 차가 떠나가는 것

을 보며 나는 자리를 떠나 한 교인 가정으로 갔다. 빈 방에 들어가

담요를 뒤집어 쓰고는 잠을 청했다. 깊은 잠을 자고 난 후 교회당

쪽으로 오니 박살이 난 교회당 옆에 주민 수십명이 모여 회의를 하

고 있었다. 한 분이 일어서서 말했다.

『활빈교회는 우리 마을의 은인이요 보금자리입니다. 이번에 교회

당이 이렇게 된 것이 바로 우리 자신의 일입니다. 우리 집이 철거

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온 동민이 힘을 합하여 다시 세

웁시다.』

주민들은 논의를 거듭하더니 그 자리에서 「활빈교회 재건 대책위

원회」를 조직하고는 재건업무를 담당할 모금위원 건축위원 섭외위

원 동원위원들을 선임했다. 마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공고문을 쓰고

서울시장 앞으로 보낼 진정서도 만들었다. 모든 과정이 나와는 상

관없이 주민자치로 진행되고 있었다. 곧 이어 진정서에 서명받는

작업이 시작되고 건축비의 모금이 시작되었다.

건축위원들은 새로 지을 예배당 설계를 논의하고 자재 조달 방법과

공기를 결정했다. 대책위원회가 그렇게 앞장서 마을주민 모두가 호

흡을 같이 하게 되었다. 나는 흐뭇하고 고마워 교회당을 철거해 준

서울시장이 고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5백60명의 서명이 첨부된

진정서가 서울시장과 성동구청장 앞으로 발송되었다.

대책위원회의 임원들은 집집마다 방문하여 서명을 받으면서 그 서

류를 「국비장학생 지원서」라고 표현했다. 교회당 재건을 위한 이

진정이 당국으로부터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감옥가는 것도 불사하겠

다는 각오로 그런 말을 했다.

활빈교회 재건운동

진정서에는 5월2일까지 만족할 만한 회답이 없을 시는 온 동민이

단체로 시청을 방문하겠다는 단서가 붙어 있었다. 완곡하게 말했지

만 데모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날 저녁에는 활빈교회 교인들이 모였다. 장시간 열띤 토론이 붙

었다. 대체로 세 그룹이 있었다. 강경파는 내일이라도 성동구청으로

가서 구청 건물을 파괴하겠다는 의견이었다. 저희들이 이유없이 우

리 교회를 부쉈으니 우리도 가서 그렇게 하자는 것이었다.

중도파는 시한을 정하여 통보하고 그 시한 내에 건축해 주지 않으

면 실력행사를 하자는 안이었다. 온건파는 이번에 주민들이 교회당

재건에 적극적으로 나오게 된 것이 큰 수확이니 주민들의 활동을

뒷받침만 하자는 의견이었다. 교인들이 긴 시간 토론을 한 후에 나

의 의견을 물었다.

나는 주민들이 서울시장 앞으로 진정서를 보냈으니 활빈교회 신도

들이 좀 더 강경한 내용의 진정서를 한 통 더 보내고, 주민들이 지

금 시작하고 있는 교회당 재건운동을 교인들이 뒷받침하는 것이 좋

겠고 교인들도 교인으로서가 아니라 주민의 일원으로 교회당 재건

에 참여하는 게 좋겠다고 말햇다.

이번에 교인들의 손으로 교회당을 짓게 된 것은 참으로 뜻깊은 일

인즉 교인들은 주민들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곳을 찾아 보이지 않

게 일하자고 했다.

활빈교회 교회당 건물이 철거된 소식이 알려지자 여러곳에서 지원

이 왔다. 시청과 구청으로 끊임없이 항의 전화가 가고, 기자들이 구

청을 드나들었다.

며칠 사이에 새 교회당을 건축할 만한 비용이 모아졌다. 지역 주민

1천6백 세대가 한 세대가 1백원 이상의 건축비 헌금과 하루 이상의

노력봉사를 정하고 합심하여 재건사업을 진행해 나갔다. 주민회에

서 서울시장 앞으로 통보한 5월2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날까지

교회당 재건축에 대한 건축허가 통보가 오지 않을 경우에 대비한

행동계획이 세워졌다.

대책위원회의 동원위원들은 만일의 경우 데모에 참여할 지원자들의

명단을 작성했다. 그들이 데모 끝에 감옥까지 갈 것을 예상하여 지

원자들을 「국비장학생 신청자 명단」이라 부르고 있었다. 이런 움

직임에 발맞추어 활빈교회 교인들이 보내는 진정서가 서울시장 앞

으로 발송되었다.

진정서

(서울시장귀하)

국가발전과 새마을 사업을 위해 분투하시는 시장님께 문안 드립니

다. 저희들 활빈교회 신도 일동이 시장런 진정서를 올릴 수

밖에 없게 된 사실을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다름이 아니

옵고 지난 4월 24일 오전 10시경 성동구청 철거반이 저희 활빈교회

당을 납득할 만한 이유없이 깡그리 부숴버린 데 대해 이 사건이 단

순한 행정사무의 착오인지 아니면 고의적인 선교활동 박해인지 알

고 싶습니다.

이에 이미 저희 활빈교회 신도 일동은 상부기관인 한국 기독교 교

회협의 회 및 각 언론기관에 지원 요청을 한 바 있거니와, 이번 사

건의 집행기관이라 생각되는 성동구청 청장님께 정식 항의를 제출

하오며 아울러 이에 대응할 만한 보상을 청구하는 바입니다.

본 활빈교회당은 7년 전부터 내려온 건물로서 무허가 건물 맩

24-24622호맪의 인정번호가 있는 건물입니다. 그럼에도 지난 71년

9월2일에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성동구청 철거반에 의해 부당하게

철거당하였고 72년 1월에는 철거계고장이 발부되었을 때 주민들이

활빈교회당이 기존 건물이요 24-24622호 라는 인정번호까지 있는

건물일 뿐 아니라 활빈교회가 빈민촌인 이 지역사회에서 지대한 영

향을 끼치고 있은즉 계고장 발부 사실을 시정하여 달라는 진정서를

제출한 바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진정서에 대한 일언반구의 회답

도 없었고 지난 2월에는 이 건물로 인하여 저희들의 지도자이신 김

진홍 전도사님이 고발을 당하여 동부경찰서 유치장에서 고생하시기

까지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지난 24일 철반이 아무도 없는 빈 교회당에 입회인도 없

이 교회간판을 뜯고 교회를 박살내자고 소리를 지르며 부수었습니

다. 더욱이나 철거반원 중의 한 명이 귀중한 의료기구들이 보관돼

있는 비품실에서 호주머니에 무엇인가를 집어 넣는 것을 보고 신도

최일진(52세)씨가 항의하였다가 철거반원 5~6명에게 집단 구타당한

사실에 대하여 저희 신도 일동은 물론 전 주민이 분노하고 있습니

다.

현하 대통령 각하의 지대한 관심 아래 전국적으로 추진되고 있는

새마을사업에 발맞추어 저희 활빈교회는 빈민촌인 지역사회에서 청

소년 선도와 주민교육 및 주민들의 건강증진 등을 내용으로 하는

지역개발사업에 전력을 기울여왔습니다.

한데 정부당국에서 협조는커녕 수차례 건물을 부수고 저희 교역자

님을 투옥까지 했음에 대하여 이 이상 신도 일동은 앉아서 당하고

만 있을 수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에 저희 교회의 상부기

관인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 에서도 이는 분명한 기독교에의

도전 행위요 새마을 사업에의 역행 현상이니 강경한 대책을 세우겠

다고 언급했거니와 저희 신도 일동도 일치단결하여 이 문제를 해결

하고자 합니다.

조속한 시일 내에 그간의 교회핍박 행위에 대한 납득할 만한 해명

과 파괴된 건물에 대한 복구대책이 없으시다면 저희 신도 일행 5백

여명은 시장님을 방문하겠습니다.

(1972년 4월 27일 활빈교회 신도 일동)

성숙된 주민들의 모습

그런데 5월1일 오후에 성동구청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구청장이 김

진홍 전도사를 만나자는 내용이었다. 나는 말했다.

『나를 만날 필요는 없습니다. 주민이 주인이니 주인들인 주민 대

표들을 만나세요. 청장님이나 나나 둘 다 주민들을 섬기는 심부름

꾼 아니겠습니까. 주인은 주민들입니다. 이야기가 있으시면 주민들

과 이야기 하십시오. 그리고 구청에 앉아서 보자고 하지 말고 여기

현장으로 와서 실정을 보고 주민들과 대책을 의논 하십시오』

다음날 구청에서 지프 한 대가 와서 주민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

었다. 곁으로 가서 들으니 주민대표 중의 한 사람이 말했다.

『힘 없는 무지랭이들이라고 우리를 아무렇게나 대하려 하시면 안

됩니다. 우리가 청장님을 그 자리에서 끌어내릴 수도 있고 또 시장

으로 영전시켜드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성동구청 청장님은 훌륭

한 분이라고 청와대에 감사장도 올리고 소문내고 하면 청장님이 영

전돼 서울 시장까지 될 수도 있을 것이요, 또 우리가 무능 공무원

이라 규탄하면 그 자리에서 떨어질 수도 있는 것 아니겠어요?』

나는 그런 논리정연한 말에 놀랐다. 평소에는 순한 사람들이지만

분위기가 한번 조성되면 사람들이 달라짐을 보게 되었다. 나는 주

민들의 그런 변화가 민주국가 실현에의 가능성임을 확신하게 되었

다.

오후에 대책위원회 위원들이 나에게로 와서 구청에서 수차례나 들

어와달라는 연락이 오고 있다고 했다.

『그쪽 태도를 보니 성의가 있는 것 같으니 들어가 보시는 것이 좋

겠네요. 그런데 내가 갈 필요야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가서 관계되

는 분들을 만나 일처리를 하면 될 것입니다』

『전도사님, 그럴 수야 있겠습니까? 구청에서 김 전도사님과 같이

와야 이야기가 된다고 거듭 같이 들어오라고 재촉하고 있습니다』

『글쎄요. 그건 그쪽 이야기고 대책위원회가 주민자치 활동인데 자

치활동답게 여러분이 나서서 해결하는 것이 모양새가 좋을 것 같은

데요』

『구청 이야기로는 주민자치 활동이라 하지만 전도사님이 주민들

뒤에서 다 조종하고 있으니 주민들과 이야기해야 헛 일이다, 전도

사가 틀어버리면 일은 그만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런 말이 나는 못마땅합니다. 관청사람들이 주민들은 늘 조종이

나 받고 사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되지요』

『전도사님의 생각은 알겠습니다만 지금쯤은 같이 들어가서 일을

풀어 나가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요』

『여러분 생각이 그렇다면 같이 구청으로 가서 한번 부딪쳐 봅시

다』

성동구청과의 담판

나는 주민 대표들과 같이 성동구청으로갔다. 송정동 동장이 우리를

안내했다. 구청에서는 구청장이 출타 중이니 민원 담당인 부청장을

만나 달라고 했다. 부청장실에서 차를 들며 주민들과 부청장 사이

에 얘기가 오가는 동안 나는 잠잠히 기다렸다.

주민들은 철거의 부당성을 주장하고 서울시가 교회 땅이자 주민회

관인 건물의 재건축을 인정해야 하면 그 보상으로 건축자재를 공급

할 것을 요청했다. 부청장은 행정절차상의 고충을 얘기하며 교회당

철거는 고의가 아니라 건축법과 무허가 건물 단속법이라는 실정법

에 근거한 것이라 했다. 그러나 주민대표들은 대화가 잘 풀려나가

지 않자 언성을 높이며 일어섰다.

『그렇게 안된다는 소리만 하려면 그만 두세요. 우리도 생각이 있

습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는 말 못 들었어요?』

부청장쯤 되니 역시 노련했다. 그렇게 일어서는 주민들을 달래서

앉히며 타협안을 내놓았다.

『여러분의 생각이 그러시다면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이란 말이

있듯이 우리 해결 실마리를 풀어봅시다. 여러분이 그렇게 좋은 마

음으로 다시 짓겠다는 교회당 건물을 다시 짓되 정식 건물은 세우

지 말고 천막을 치시지요 천막은 구청에서 사드리겠습니다』

『천막을 칠 수 있다면 집도 지을 수 있을 것 아닙니까? 천막은 안

주셔도 됩니다. 우리 힘으로도 그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모금하여 루핑으로라도 덮겠습니다』

『그러시지들 말고 우리의 고충도 이해하시면서 일을 하셔야 됩니

다. 개도 도망갈 구멍을 보고 쫓으라 하지 않았습니까? 서로가 명

분을 세워주면서 일을 풀어 나가야 됩니다』

부청장은 가만히 듣고만 있는 나를 향해 말했다.

『아무래도 전도사님이 나서서 풀어주어야 될 것 같은데 그런 선에

서 마무리를 지어주시지요』

『글쎄요. 제가 나설 일이 아닐 것 같은데요. 주민대표 자격으로들

왔으니 자신들이 해결할 문제입니다』

그때 동석하고 있던 동장이 좋은 안을 제시했다.

『그렇다면 주민들이 집을 짓되 지붕은 구청에서 주는 천막으로 덮

으면 될 것 같은데요』

그 말에 부청장은 대답을 안 했다. 대답을 안하는 것이 바로 묵인

하겠다는 의사로 느껴졌다. 주민대표들의 시선이 나에게로 쏠렸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것이 서로의 체면을 세워주는 좋은 생각이신데요. 주민들로서

는 집을 지은 거고 시청으로서는 천막 치는 정도로 허락한 것이고

쌍방간에 좋을 것 같습니다』

이어서 대책위원회 위원장의 마지막 한 마디로 사태는 마무리되었

다.

『구청의 사정이 그러하시다면 우리도 그 선에서 양보했으면 합니

다…』

부청장은 3일 안으로 천막을 보내주겠노라고 했다. 주민 대표들은

집을 짓고 그 위에 천막을 덮겠노라고 다시 말했다. 부청장은 여전

히 그 말은 못 들은 척하고는 나를 향해 말했다.

『전도사님, 앞으로 무슨 일이든지 사전에 의논해서 풀어나갑시

다』

구청에서 마을로 돌아오는 길로 즉시 주민회의가 열리고 구청에 갔

던 대표들의 경과 보고가 있었다. 모였던 주민들로부터 수고하였다

는 박수를 받고 나서는 건축에 대한 논의가 시작 되었다.

다음날부터 건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노력 봉사자들이 조를

짜서 날마다 열심히 일해 공사가 빠르게 진척되었다. 주민들 중에

는 건축에 필요한 모든 기술자들이 있었다. 목수, 미장이, 벽돌공,

페인트공 모두가 하루 씩 봉사했다. 일할 수 없는 가정에서는 현금

을 냈다. 드디어 공사는 끝이 나고 5월22일에 입당식이 열렸다.

입당 축하예배에는 김상현군이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깽깽이 부

대 (현악단)」를 동원해서 축제 분위기를 돋웠다. 그래서 교회 잔치

가 온 마을 잔치가 돼버렸다. 나는 주민들의 성의에 감격했다. 이런

주민들을 위해서라면 뼈를 깎는 아픔과 수고도 견디겠다고 다짐하

였다.

그렇게 교회당 건물이 재건되자 그간에 중단됐던 모든 프로그램들

이 다시 시작 되었다.

송정동 판자촌 주민 자활회

나는 교회당 철거와 재건 과정을 통하여 보여주었던 주민들의 참여

와 도움에 답하는 마음으로 더 열심히 일에 임했다. 지역 내 젊은

이들 1백10명을 모아 자활회(自活會)를 조직하였다.

대원들은 주로 불량배들과 전과자들이었다. 그들에게 동기를 부여

하여 넝마주이, 폐품 재생, 식품가공 등의 사업으로 자활의 길을 열

어 나가려는 것이었다. 다음이 자활회의 설립 취지문이다.

송정동 판자촌 주민 자활회

-자활하려는 뜻-

청계천 하류 송정동 74번지 판자촌에 살고 있는 우리 1천6백여 세

대는 대다수 이농민들로 극심한 가난과 질병, 무지와 좌절 속에 허

덕여왔다. 잔혹한 현실 속에서 아무런 기반이 없었던 우리들은 주

민 중 70% 이상이 실직자란 상황에 좌절해 도박과 음주에 묻혀 살

아왔다. 억압된 감정을 발산시킬 길이 없어 폭력을 휘두르다가 전

과자란 오명이 붙게된 사람들도 있다.

이에 우리는 이 이상 인간 실격의 상태에 머무를 수 없음을 깨닫고

우리의 살 길은 우리들 스스로가 찾는 길밖에 없음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일어서서 굳게 자활에의 길을 찾고자 한다 이 길은 순탄한

길이 아닐 것이다. 땀과 피와 고통의 길일 것이다. 그러나 허리를

굽히고 사느니 서서 죽기를 택하는 결단으로 우리는 일어서서 뭉쳐

우리의 운명을 우리 스스로가 결정하고자 한다.

지난날에 우리는 혼자서 졌지만 이제 뭉쳐서 이기려 한다. 이러한

결단을 하는 우리 앞에 새로운 삶이 열린 것을 확신한다. 신은 스

스로 돕는자를 돕는다는 성서의 말을 우리는 믿는다.

1972년 6월 9일

송정동 판자촌 주민 일동

지난날 주먹을 휘두르다가 감옥을 드나들었던 자활회 대원들은 새

로운 결심으로 넝마주이, 고물수집, 폐품 재생, 식품가공 등의 여러

분과에서 일을 했다. 자기의 걱정과 취미에 따라 배치된 부서에서

열심히들 일했다.

자활회에 이어 「실업자 조합(失業者組合)」를 결성했다. 세대주들

의 높은 실업률과 이들 실업자의 자포자기한 생활이 빈민촌의 현실

이었다. 그들은 화투놀이, 폭군, 싸움 등으로 자기 파멸을 재촉하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나는 이 실업자들을 모아 협동활동을 통하여 새로운 생활을 유도해

보기로 계획을 세웠다. 30~40대의 세대주로서 실업생활을 하는 사

람들을 일대 일로 만나 설득하여 조직을 만들고 그 조직된 힘으로

취업활동을 전개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조합을 통하여 일자리를 얻게 된 조합들은 수입의 5%를 조합에 납

부하고, 이렇게 모아진 예산은 가족들의 건강관리와 실직시 생활보

조금으로 쓰기로 했다. <다음호에 계속>

청계천 빈민촌에 들어온 지 어언 1년이 지나갔다. 나는 그간에 이

루어낸 일들을 살피며 만족스럽게 생각했다. 처음 들어오던 때의

초라한 외톨이 신세에서 벗어나 이제는 활빈교회와 주민회가 양

날개가 돼 나의 선교활동을 뒷받침해주고 있었다. 이대로만 나간

다면 나는 큰일을 이루어낼 것만 같았다.

그러나 밖으로 나타나는 발전과는 달리 안으로는 심각한 문제들

이 자라고 있을 줄은 생각조차 못했다. 문제는 교회 쪽에서 먼저

일어났다. 활빈교회 교인들은 빈민촌에서 처음 신앙생활하게 된

신자들이었기 때문에 교회 일에 경험이 없었다. 교회에서 관리나

행정을 맡길 만한 경험 있는 일꾼들이 없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곤란을 느낀 것이 재정관리를 맡을 마땅한 교인이 없다는 점이었

다.

교회가 처음 시작되던 때는 헌금이래야 고작 4백~5백원에 지나지

않았으나 교인 수가 점차 늘어나고 교인들의 신앙심이 터가 잡혀

나가면서 헌금 액수도 늘어났다.

나는 교인 중에 그런 대로 성실해 보이고 셈이 밝은 사람에게 재

정관리를 맡겼다. 처음 맡았던 사람은 고물수집상을 하는 이씨였

다. 그런데 처음 3~4개월은 곧잘 하는 듯하더니 나중에는 재정보

고를 회피하고 교회에 필요한 물자를 구입하려고 돈을 타러 보내

면 돈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어느날 재정 장부와 현금을 대조했더니 헌금이 들어오는 대로 써

버린 것을 알았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그를 나무랐다. 『어쩌

려고 하나님의 돈을 개인이 그렇게 썼느냐』고 추궁하자 그의 대

답이 걸작이었다.

『전도사도 예배당 돈 쓰는데 나는 쓰면 안 되나요?』

나는 그의 「당당한」 말에 할 말을 잊고 그냥 장부만 회수하고

말았다. 다음 주일부터 그는 교회에 나오지 않았다. 돈도 잃고 사

람도 잃은 셈이었다.

이런 일을 겪은 후인지라 이번에는 민주적으로 한답시고 교인 전

체가 투표하여 헌금 담당자를 선출했다. 당선된 일꾼은 건축업에

종사하는 최씨였다. 실상은 공사판의 십장 정도였지만 마을에서

는 건축업자로 대접받고 있었다. 그러나 최씨가 교회 재정을 맡

은 후에 헌금을 쓰고 다닌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얼마 후에

최씨를 불러 물었다.

『최씨,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는데요…. 재정관리가 정상적으로

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금주 내로 장부를 정리하셔서 주일예배

때 교우들에게 보고해 주시지요. 그리고 그 전에 정리가 되는 대

로 나에게 먼저 보여 주십시오』

토요일에 최씨를 다시 만나 장부 정리가 다 됐으면 먼저 둘이서

검토하자고 했다. 그는 머뭇머뭇하더니 끝수 계산이 덜 돼 저녁

에 우리 집으로 가져와서 보고하겠노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저녁에 오지 않았다.

『김진홍이는 사기꾼이오』

다음날 예배시간에 설교하고 있는데 그가 갑자기 일어나더니 좌

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여러분, 제가 몇 말씀 드리고 싶어 예배시간인데도 일어났습니

다. 여러분! 저 김진홍 전도사는 사기꾼올시다. 여러분! 속지 마

시라요. 설교하는 말과 실제 행실이 전연 다른 위선자올시다. 설

교 때는 사랑 사랑하면서 우리 빈민들을 팔아 재산을 뒤로 빼돌

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제가 근거없이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궁금하신 분은 나에게 오시면 언제든지 그 증거를 대

드리겠수다』

이어서 그는 설교하다 멍하니 서 있는 내게 삿대질을 하며 말했

다.

『김진홍 전도사! 거짓말 그만하고 내려와. 내려오라구』

교인들이 소란해지기 시작했다.

『어. 저 치가 돌았나? 뭐, 저 따위가 있어. 끌어내라』

한쪽에서 그렇게 소리지르니 다른 한쪽에서 고함이 터졌다.

『왜 그래? 한번 들어보자구. 증거가 있대잖아』

갑자기 예배당 안이 시장바닥처럼 시끌짝하게 됐다. 내가 『조용

하세요. 조용들 하시라구요』소리쳤지만 먹혀들 리 없었다. 나는

분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찬송가 부릅시다』 하고서는 『내 주

를 가까이 하려 함은 십자가…』 하고 선창했다. 교인들이 하나

둘씩 따라 부르고 곧 합창이 됐다.

나는 찬송가를 부르며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궁리했다. 나는 흔

히 하는 말에 「하던 지랄도 멍석 깔아주면 안 한다」는 옛말이

생각났다. 그래서 최씨를 제지할 것이 아니라 말을 하라고 부추

기기로 마음먹었다. 찬송이 끝나자 나는 틈을 두지 않고 말했다.

『최씨,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세요. 시간은 넉넉히 드릴 테니

앞으로 나와서 조리있게 말하세요』

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 젊은이가 일어나 말했다.

『전도사님, 미친 개에게는 몽둥이가 젤입니다요. 저런 치는 눈알

이 확 쏟아지도록 매타작을 헙시다』

『옳소. 죽을 때가 돼서 환장기가 있는가봐요』

나는 분위기가 들뜨지 않게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여러분 그런 게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한가족이니까 무슨 문

제든 터놓고 지내야 합니다. 최씨가 하고 싶다는 말을 지금 다같

이 듣고, 또 증거가 있다니까 어떤 증거인지 함께 알아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내가 그렇게 나가니 정작 최씨는 처신하기가 퍽 난처해진 모양이

었다. 자기 딴에는 그런 식으로 나가면 내가 그의 말을 가로막거

나 비난할 것으로 짐작했던 것 같은데, 오히려 말하라고 권하니

난감해하는 것 같았다. 그는 일어서더니 더듬더듬 말했다.

『지금 내가 이 자리에서 다 공개하면 당신은 이 마을에서 쫓겨

날 거요. 내가 오늘은 참소. 여러분 궁금하신 분은 나에게 개인적

으로 오시오』

주류와 비주류의 갈등

그가 휑하니 나가 버리자 나는 중단했던 설교를 계속했다. 예배

후에 회의가 열렸다. 최씨의 발언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자 생각

밖으로 두 패로 갈라졌다. 최씨 쪽으로도 상당 수의 동조자가 있

었다. 최씨를 규탄하는 쪽에서 주장했다.

『최씨 그 녀석 미친 놈이에요. 지가 교회 돈을 쓰고 급해지니까

되려 무는 겁니다. 그냥 둬선 안 됩니다』

그러나 다른 쪽에서는 말했다.

『그렇게 뒤집어씌울 것만은 아닙니다. 아무 근거없이 그런 말을

했겠어요? 진상을 밝혀야 합니다. 교회당 건축 때도 외부 성금이

굉장히 많이 들어왔었다는데 우리는 한 닢 만져본 거 없잖아

요?』

말하자면 주류와 비주류가 형성돼 서로가 불끈불끈 발언하니 정

상적인 토론이 되지 않았다. 길게 끌다가는 패싸움이 일어나기

십상이었다. 교회 분쟁이란 것이 이런 식으로 일어나는구나 싶었

다. 나는 저녁예배 때 최씨를 출석시켜 공개토론하자고 공포하고

는 최씨를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저녁예배에 최씨를 꼭 데리고 오

라고 일렀다.

그러나 저녁예배에 최씨는 오지 않았고, 그를 데리러 간 사람 편

에 금전출납부만 보내왔다. 그가 『그런 사기꾼 밑에서 예수 믿

을 생각 없다』며 장부만 주었다는 것이다. 나는 교인들에게 물

었다.

『여러분, 일단 교회 재정 장부는 왔으니 장부 정리도 하고 사건

진상도 조사할 겸 몇 사람의 위원을 뽑아 일을 맡기는 게 어떻겠

습니까?』

모두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었다. 다섯 명을 뽑아 일

을 맡기고는 회의가 끝났다. 얼마 후 조사위원회의 조사 결과가

발표됐다.

최씨가 교회 공금을 유용한 액수가 발표되고 사건은 일단락되었

다. 그가 유용한 금액은 결손으로 처리되고 후임 재정은 가장 성

실한 일꾼인 김영준군이 맡았다.

주민회의 재정사고

그런데 나쁜 일은 한꺼번에 오는가? 이번에는 주민회 쪽에서 재

정사고가 터졌다. 얼마 전에 지역주민들의 소득증대 사업을 위해

식품가공, 폐품재생, 부녀부업 등의 사업계획을 세우고 주민회 산

하 생활안정부에서 맡아 일을 추진키로 했었다.

식품가공이란 명태를 찢어 안주감을 만들어 맥주집 같은 곳으로

다니며 파는 일이고, 폐품재생 사업은 우리 넝마주이들이 수집해

온 물건들 중에서 활용할 만한 것들을 골라 상품을 만들어 파는

일이었다. 예를 들어 깡통을 모아 기계로 펴서 연탄 아궁이에 쓰

는 연통을 만드는 일이나 헌옷가지를 모아 깨끗이 빨아 걸레를

만들어 파는 일 등이었다. 부녀부업은 청계천 평화시장 안에 있

는 봉제공장들을 찾아가 단추 달기, 버클 달기 등의 일감을 구해

다 마을 부녀자들에게 주는 일 등이었다.

이런 일을 추진하려면 자금이 필요한지라 나는 전남 광주에서 초

등학교 교사로 있는 누나에게서 50만원을 빌려 왔다. 누이는 봉

급생활에 푼푼이 모은 돈이니 그냥 줄 수는 없고 원금을 갚으라

고 당부했다.

나는 이 돈을 각 단위 사업 책임자들에게 배분했다. 그들이 제출

한 사업계획서에 따르면 6개월 내로 원금 회수가 가능케 짜여 있

었다. 나는 길게 잡아 10개월 후면 누님에게 원금은 갚을 수 있

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는 현실을 모르는, 너무나 안일한

생각이었다. 자금을 배정한 지 불과 며칠 뒤부터 말썽이 일어나

기 시작했다. 몇 명이서 들어먹는다는 소문이었다. 나는 그런 소

식을 전하는 사람들에게 면박을 주며 나무랐다.

『그렇게 못 믿고 살아가니 늘 못사는 겁니다. 하나님을 믿듯이

사람도 좀 믿으세요』

『전도사님, 두고 보세요. 다 전도사님 마음 같은 줄 아시면 큰코

다칩니다』

20여일 후에 담당자들을 소집하여 사업진척 상황과 자금 사용 관

계를 물었다. 그런데 한결같이 묵묵부답이었다. 나는 모임을 해산

한 후 한 사람씩 만나 조용히 물었다. 모두 급한 빚을 갚았다거

나 생활비로 쓰는 등 이래저래 없애버린 것을 알게 되었다.

믿었던 도끼에 발등 찍힌 나는 그들이 보기도 지겨워졌다. 그러

나 이미 써버린 돈을 두고 왈가왈부해봐야 소용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들을 한자리에 모아 말했다.

『긴 말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는 신앙으로 뭉쳐 가난을 정

복하는 신화를 창조하려고 모인 활빈동지들입니다. 우리의 신앙

과 인격과 미래는 이번의 기십만원 돈으로 계산될 것이 아닙니

다. 누나에게 진 빚을 내가 갚기로 하고 주민들에게는 내가 여러

분들로부터 돈을 회수하여 빌린 분에게 갚았다고 발표하는 것으

로 이번 일을 마무리합시다. 그리고 협동사업은 당분간 중단하고

각자 능력껏 일해 살 길을 찾기로 합시다. 아직은 공동사업으로

일하기에는 이른 것 같습니다』

그들은 입이 열 개 있어도 할 말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이 사건

은 나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주민들이나 교인들을 신뢰할 수 없

으니 어떤 일도 진행시켜 나갈 자신감이 흔들렸다.

통조림 싣고 온 미군

어느날 만사를 접어두고 넝마주이 작업에 몰두하려고 교회당을

떠나려는데 군용 지프 한 대가 오더니 내 앞에 멈춰섰다. 지프

뒤에는 트레일러가 달려 있었고 고기 통조림이 가득 실려 있었

다.

미군 한 명이 내리더니 어느 선교사의 이야기를 듣고 빈민촌 아

이들의 영양공급을 위해 통조림을 가져왔노라고 말했다. 이미 지

프 주위에는 마을 아이 수십 명이 둘러서서 군침을 흘리고 있었

다. 그런데 나는 외국 군인들로부터 고기 통조림을 얻어 마을 아

이들을 먹이는 일이 도무지 내키지 않았다.

6·25전쟁이 남긴 폐해 중의 하나가 「구호물자 공해」였다. 전

쟁을 치르는 동안 숱한 구호품이 미국에서 들어와 산골 구석 마

을까지 얻어 먹게 되었다. 나는 여기서 우리 민족이 공짜를 좋아

하고 남을 의지하여 살려는 나쁜 습성이 생겨난 것이 아닐까 생

각한다.

특히 기독교 단체들은 구호품 공해가 가장 심한 곳일 게다. 미국

선교사들에게 보조받는 것이 습관이 돼 외국 원조를 많이 받는

것을 마치 큰 재주나 부리는 듯이 여기고 있는 곳이 당시 한국기

독교계였다. 바른 국민정신을 기르기 위해서나 민족의 백년대계

를 위해서나 반드시 시정해야 할 현상이었다.

그런데 이 순진한 미국 군인들은 그런 차원까지는 생각지 못하고

단순하고도 순수한 마음으로 고기 깡통을 저렇게 싣고 왔으니 처

리하기가 참으로 곤란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고기 깡통을 얻어

먹고 자랄 아이들에게 끼칠 폐해를 생각하면 그냥 받을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좁게는 개개인의 자립정신을 심어주는 일로서나

넓게는 민족 주체성을 길러나가는 일로서나 그 고기 깡통들을 받

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마을 아이들에 비해 고기깡통은 너무나 적은 숫자였다.

어차피 먹으나 마나 한 양이었다. 마침내 나는 결론을 내리고는

심호흡을 한번 한 후에 미군에게 말했다.

『No, thank you. I think we must stand for ourselves, so you

may go back with your cans. I am very very sorry and great

thank you(고맙지만 거절한다. 내 생각으로는 우리가 우리 힘으

로 일어서야 하기 때문에 네가 가져온 깡통을 받지 않는 것이 좋

을 것 같다. 그러니 그 깡통을 도로 가져가 달라. 대단히 미안하

고 또 고맙다)』

내가 그렇게 일렀더니 미군은 갑자기 긴장된 표정을 지으며

『What!(뭐라고!)』 하며 내 표정을 살폈다. 나는 부드러운 표정

을 지으며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는 간신히 내 의도를 파악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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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제목 : [김진홍목사 육필수기] 出서울기記 제11회 -3

그리고 마을 아이들에 비해 고기깡통은 너무나 적은 숫자였다.

어차피 먹으나 마나 한 양이었다. 마침내 나는 결론을 내리고는

심호흡을 한번 한 È

may go back with your cans. I am very very sorry and great

thank you(고맙지만 거절한다. 내 생각으로는 우리가 우리 힘으

로 일어서야 하기 때문에 네가 가져온 깡통을 받지 않는 것이 좋

을 것 같다. 그러니 그 깡통을 도로 가져가 달라. 대단히 미안하

고 또 고맙다)』

내가 그렇게 일렀더니 미군은 갑자기 긴장된 표정을 지으며

『What!(뭐라고!)』 하며 내 표정을 살폈다. 나는 부드러운 표정

을 지으며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는 간신히 내 의도를 파악했는

지 고개를 갸우뚱하며 되돌아갔다.

그가 그렇게 돌아가버리자 마을 아이들은 애석하고 아쉬운 마음

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지프가 시야에서 사라진 뒤에도 한참이나

그쪽을 보고 있었다. 나는 아이들의 그런 표정을 보는 것이 민망

스러워 서둘러 넝마주이 일터로 떠나버렸다.

『성님, 늦으면 나 죽소』

그날은 종철이란 이름의 23세 된 대원과 조를 이루어 일을 시작

했다. 둘이서 각자 망태를 메고 손수레 한 대를 뒷골목 어딘가에

세워두고 일을 시작한다. 열심히 망태에 종이나 깡통 등을 가득

채우고 나면 손수레에다 차근차근 쌓는다. 손수레에 넘치게 쌓이

면 센터로 끌고 와서는 쓰레기를 종류별로 분류한다. 그리고 무

게를 확인하면 그날 일이 끝이 난다.

그날도 종철이와 둘이서 열심히 손수레를 채워나가는데, 작업하

던 종철이가 갑자기 아랫배를 움켜잡은 채 주저앉아서는 비지땀

을 흘렸다. 놀란 내가 『너 왜 그러니』 하고 물었더니 『아랫배

가 당기는 듯이 아파요』 하고 말했다. 뱃속에 큰 불덩이가 들어

있는 듯이 화끈거리고 아프다고 했다.

심상찮음을 느끼고는 택시를 불러 태우고 가장 가까운 한양대학

부속병원으로 달려갔다. 응급실로 갔더니 엑스레이실로 가라고

했다. 그리 갔더니 다시 수납에 돈을 내고 오라 했다. 뱃속을 찍

는 사진이라서 의외로 비쌌다. 내가 가진 돈은 가슴 사진 찍는

정도밖에 되지 못했다. 나는 창구에 대고 우선 사진부터 찍게 해

주면 집에 가서 돈을 가져오겠노라고 사정했으나 들어주지 않았

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종철이를 수납창구 앞 긴 의자에 눕히며

말했다.

『마을에 가서 돈 구해올 테니 여기서 꼼짝 말고 기다리고 있

어―』

『성님 빨리 오쇼. 늦으면 나 죽소』

『쓸데없는 소리. 사람이 그렇게 쉽게 죽냐? 죽으려고 약 써봐라

죽나』

나는 통증으로 얼굴을 찌푸리며 숨을 몰아쉬고 있는 종철이를 보

며 마을로 달려갔다. 그러나 낮시간에 마을에서 돈을 구하기는

쉽지 않았다. 돈 있을 만한 사람들은 일터로 나갔고 마을에는 아

이들과 건달 같은 사람들만 남아 있을 따름이었다. 몇 집을 거쳐

얼마의 돈을 마련해 병원으로 달려왔다.

그러느라 3시간 가까이 지났다. 급한 마음에 숨이 턱에 차도록

달려 병원으로 달려갔다. 한양대학 부속병원은 언덕 위 높은 곳

에 있었다. 나는 숨이 턱에까지 차서 병원 계단을 올랐다.

병원을 박살내 버릴까?

그러나 수납창구 앞 긴 의자에 누워 있는 그에게로 왔을 때 그는

숨을 거두는 참이었다. 어깨를 들먹이며 숨을 몰아쉬고 있는 형

세가 숨이 넘어가고 있음이 분명했다. 나는 당황하여 무릎에다

그를 눕히며 사정조로 말했다.

『야, 종철아 정신 차려. 종철아 내가 왔다. 정신 차리라니까』

그는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분간할 수 없는 멍한 표정으로 보고

만 있었다. 그의 표정이 염려스러워 빰을 찰싹찰싹 치며 말했다.

『종철아, 나야 나. 나라니까. 이제 돈 구해 왔으니 돈 내고 사진

찍으러 가는 거야. 정신 차려』

그러는 순간 그가 갑자기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리고 두 눈동자

가 한 곳을 응시하더니 외마디 소리로 토하듯이 말했다.

『돈, 돈, 약값, 약값』

그렇게 말하고는 고개를 옆으로 꺾으며 모로 쓰러졌다. 숨을 거

둔 것이다.

그가 그렇게 죽는 모습을 보자 나는 화롯불을 뒤집어쓴 듯이 열

이 올랐다. 얼마 되지 않는 돈에 한 젊은이를 이렇게 죽게 두는

병원은 그냥 두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넝마주이 대원들을

불러모아 병원을 요절내고 말아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나는 종철이를 그 자리에 둔 채 병원을 빠져 나갔다. 달리며 생

각했다. 평소에 욕구불만에 가득 차 있는 넝마대원들에게 병원을

박살내라고 말하면 대원들은 쌍수를 들고 환영할 터였다. 그러나

뚝섬 길을 달리던 나는 넝마주이 센터가 저만치 보이는 곳에서

걸음을 멈추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생각했다.

「그렇게 하는 것을 예수께서 기뻐하실까? 예수께서 내가 대원들

을 데리고 가서 병원 유리창을 깨부수고 원장 다리 부러뜨리는

것을 좋아하실까?」

생각이 거기 미치니 자신이 없어졌다. 예수님만은 그렇게 행동하

는 것을 꾸짖지 칭찬은 하지 않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갑자기 갈등에 빠졌다. 어떻게 할까? 독한 마음먹은 김에

대원들과 함께 시원하게 한판 해 치울까? 아니면 여기서 멈출

까? 나는 한참이나 머뭇거리다 결론을 내렸다. 발걸음을 돌렸다.

마을로 들어가 교회당으로 찾아갔다. 교회 안 강대상 밑에 앉아

기도했다.

『예수님! 저를 썩은 세상에 대하여 파괴하는 자가 되게 마옵시

고 건설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주님! 저로 하여금 병든 세상

을 욕하는 자가 되게 마옵시고 고치는 일에 헌신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나는 깊은 숨을 쉬고는 종철이의 시신을 수습하려고 병원으로 갔

다. 종철군의 장례를 마친 날 저녁 무당의 딸이 위독하니 좀 봐

달라는 전갈이 왔다.

「소녀 엄마」의 괴이한 병

무당의 딸이라면 얼마 전 열다섯 나이에 아비도 모르는 딸을 낳

은 소녀다. 「소녀 엄마」에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궁금한 마음

으로 가 보았더니 이미 시기를 놓친 것 같았다.

눈두덩에 거무스레한 죽음의 그늘이 깃들여 있었다. 빈민촌은 각

종 병의 UN본부인가? 별스러운 병도 다 있었다. 소녀 엄마의 병

은 피부병인 것 같은데 유별난 증세였다. 살갗이 닿는 자리마다

야구공같이 동그랗게 패어 들어가고 있었다. 팬 자리는 고름도

끼지 않고 염증도 생기지 않은 채 투명한 진물만 흘렀다. 나는

그녀의 어머니에게 화가 난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이렇게나 심하게 내버려뒀습니까?』

『산후에 저런 증세가 나타났는데, 아비 모를 자식 낳은 걸 무슨

자랑이라고 동네방네 병자랑 하겠어요』

『아비 있는 자식을 낳았든 없는 자식을 낳았든 사람은 살리고

봐야지요』

나는 화가 나서 그 어머니를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 소녀를 엎

드리게 하니 끔찍한 광경이 나타나 뒤로 확 물러 앉았다. 그녀의

등 밑에 구더기떼가 바글거리는데 방바닥에 닿은 척추 부분 살이

썩어 척추뼈가 드러나 있었다.

무서워서 몸이 떨렸다. 소녀는 이미 고통의 한계를 넘어서버렸는

지 무표정이었다. 두 눈동자가 확 풀린 그 무표정한 모습에 더욱

연민이 갔다. 나는 소녀와 입이 아닌 가슴으로 대화를 나누고 싶

었다.

『소녀야, 왜 열다섯살 나이에 남자를 알아 이 고통을 당하는가?

남자의 몸이 그리울 나이도 아닌데 어쩐 일로 아기까지 낳게 돼

이런 고통의 극을 지나가고 있는가?』

나는 그녀를 살려달라고 기도드리고 싶지 않았다. 편안히 죽게나

해달라고 기도드리고 싶었다.

『하나님, 이 소녀를 빨리 죽게 해주세요. 이 이상 고통 당하지

말고 잠자는 듯 조용히 죽게 도와주세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렸습니다, 아멘』

그녀의 손을 잡은 채 소리내 기도를 드린 후에 보니 그녀의 눈두

덩에 물기가 있었다. 그 물기를 물끄러미 보고 있으려니 한참 후

엔 방울을 이루어 낮은 곳으로 굴러 내렸다. 눈물이었다.

벌을 받아야 할 사람은 그녀의 어머니인데, 엉뚱하게 죄 없는 딸

이 벌을 받고 있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무당인 그녀의 어머니

는 원래는 간호사였다. 남들처럼 결혼하여 아이들을 낳고 가정을

이루고 살았었다. 그런데 그만 남편이 교통사고로 팔다리를 쓰지

못한 채 누워만 있는 폐인이 되고 말았다. 전직 간호사였던 부인

은 남편의 상태를 알아차리고는 남편을 방 안에 둔 채 아이들만

데리고 종적을 감추었다. 부인과 아이들은 서울 시내에서 이곳

저곳을 거쳐 청계천 빈민촌에까지 이른 것이었다.

버려졌던 남편은 친척들의 도움을 받아 명을 부지하며 오매불망

자기를 버리고 간 아내와 자식들을 찾았다. 친척들의 도움으로

가족이 청계천 빈민촌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먼저 친척들이 와

서 그들이 살고 있는 집만 확인하고는 돌아갔다.

다음날 남편을 택시에 싣고 와서 집 근처까지 데려다 주고는

『저 집이 너의 처자식이 살고 있는 집이다』라고 가르쳐 준 뒤

에 돌아가버렸다. 남편은 배로 기어서 그리운 처자식이 살고 있

다는 방까지 왔다. 팔을 쓰지 못하니까 이마로 방문을 쿵쿵 두드

렸다. 그리고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아빠가 왔다고 울먹였다.

방 안에 있던 부인이 문을 열어보고는 질겁을 했다. 얼른 문을

닫아 안으로 자물쇠를 걸고는 아이들에게도 열어주면 안 된다고

일렀다. 그리고 소리쳤다.

『이 병신아, 왜 여기까지 왔냐. 자식들 맡아 키우는 것만도 고맙

지, 너까지 맡으란 말이냐. 거기서 꾸물대지 말고 돌아가. 얼른

돌아가란 말이야』

아이들이 울며 아빠를 모셔들이자고 애원했으나 그녀는 막무가내

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방 안에는 그녀보다 10살이나 나

이가 아래인 새서방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새서방이 옆에 앉아

있는 판에 병신 중에 상병신인 옛서방이 찾아왔으니 표독스레 거

절할 수밖에 없었다.

이웃 여인들의 말에 따르면 밤이면 년과 놈이 씨름판을 벌여 어

찌나 가쁜 숨을 몰아대는지 밤마다 잠을 설치게 된다는 것이었

다. 판자 한 장을 사이에 두고 있는 처지들이어서 부부생활도 서

로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이웃 아줌마들은 아이들을 염려하여 말

했다.

『세상에. 그 좁은 방에서 자식들 앞에서 그기 뭐이 그래 좋은

기라고―. 애들이 불쌍허지』

저주받은 여인

병신 남편은 이틀간이나 문턱에서 울며 기다렸다. 아이들이 들며

날며 아버지 입에 음식을 물려 주었다. 이틀 후 남편을 여기까지

데려다 주었던 친척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했던지 찾아왔다.

그러나 방 안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문간에 엎드려 있는 그를 보

고는 기가 차서 다시 데려갔다. 데려가면서 그녀에게 악담을 퍼

부었다.

『이 짐승만도 못한 기집년아, 니 년은 사람의 탈을 쓴 마귀 새

끼다. 니 년이 이 벌을 어떻게 받는지 두고 볼끼다』

그런 일이 있은 지 달포나 지나 부인이 중병에 걸려 죽게 됐다는

소문이 마을에 퍼졌다. 마을 사람들 말로는 그 남편의 한에 살을

맞아 든 병이라고들 했다. 교인들도 예배가 끝나면 그 여자 이야

기를 하곤 했다.

『여자가 한(恨)을 품으면 오뉴월에 서리가 온다지만 남자가 한

을 품으면 오뉴월에 동상 걸린다고 했는데 그렇게도 몹쓸 짓을

하고 무사할 리 있겠냐?』

그러던 얼마 후 부인은 병에서 회복되더니 엉뚱하게 무당으로 변

신했다. 병중에 고열에 들떠 무엇이 보인다느니, 신의 계시가 내

렸다느니, 극락에서 자신을 초청했다느니 소리지르더니 그 후에

는 「족집게 귀신」이 자기를 인도한다면서 무당업을 개업했다.

무슨 일이든 족집게같이 알아 맞힌다며 자신을 족집게 무당이라

고 선전을 하면서 굿을 하러 다녔다.

그런데 병에서 회복된 무당은 무슨 병을 어떻게 앓았던지 성하던

발을 절름절름 절게 되었다.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디스코 걸음

이었다. 그리고 그 딸마저 몹쓸 병을 얻게 된 것이다. 들리는 말

로는 아이의 아버지는 바로 그 어머니가 밤마다 안고 뒹굴어 이

웃에 수면을 방해하던 정부라는 소문이었다. 그 환장한 녀석이

무당이 푸닥거리하러 나간 사이에 어린 딸을 집적거려 임신케 했

다는 것이다.

소녀 엄마가 몹쓸 병에 걸린 것도 그 녀석 탓이라고들 수군댔다.

출산한 지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그 환장한 녀석이 다시 건드

려 출산 때 생긴 상처에 균이 들어가 걸린 병이라고들 했다. 확

인할 수 없는 떠도는 이야기들이었다. 나는 그 사내가 어떤 상판

을 하고 있을까 궁금했다.

그런데 그 집에 두 번째 갔을 때 환자 방에 그가 앉아 있었다.

마치 하마같이 미련스레 생긴 녀석이 숨소리는 높아서 그냥 앉아

있을 때도 씩씩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녀석이 미운 생각이 들어 욕을 해주고 싶은 마음을 억지

로 참았다. 그런 터에 그가 담배를 피워 물기에 그걸 핑계로 욕

하고 싶은 마음을 다소나마 풀 수 있게 되었다.

『여보, 환자 앞에서 무슨 짓이오. 담뱃불을 끄시오. 사람이 우째

그리 상식이 없소』

내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그에게 인상을 썼더니 그는 머쓱한 듯

담뱃불을 껐다. 내가 계속 그를 째려 보았더니 그는 눈길을 둘

데가 마땅찮은 듯 두리번거리다가는 천장을 한참이나 쳐다보고

있다가 나가버렸다.

죽음의 기도

나는 그 어머니에게 환자를 병원에 입원시키고 싶으니 준비하라

고 했다. 무당은 고분고분했다. 병원에 가보아야 희망도 없을 텐

데 수고만 하는 게 아니겠느냐고 공손히 말했다.

『좀더 깨끗한 곳에서 죽게 해주고 싶어서 그럽니다』

무당엄마는 내 말에 고개를 돌린 채 끄덕끄덕했다. 나는 소녀를

택시에 싣고 남부시립병원으로 갔다. 택시 안에서 소녀의 손을

잡은 채 기도했다.

『주님, 입원시킬 방을 꼭 하나 마련해 주십시오. 이 불쌍한 영혼

이 어둡고 더러운 방에서 숨을 거두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좁은

방이라도 좋으니 깨끗한 침대에 흰색 시트와 포근한 베개가 있는

입원실 하나 허락해 주십시오』

남부시립병원에서는 입원시킬 방도 없으려니와 입원실이 있다 하

더라도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다. 입원시킬 때가 지났다는 것이

다. 나는 안면이 있는 의사를 붙잡고 통사정을 했다.

『제발 침대 하나만 내주십시오. 너무 불쌍한 아가씨여서 죽을

때는 편하게 죽게 하고 싶어서 그럽니다』

의사도 동정심이 생겼던지 방도를 찾아보겠다고 했다. 복도에서

3시간을 기다린 후에 입원이 허락됐다. 어머니를 옆에 있게 하고

마을로 돌아왔다.

그날은 초저녁부터 소나기가 내렸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나는 지

붕에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 소녀에

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자신에 대하여 허무함을 느끼며 엎치

락 뒤치락했다.

다음날 새벽 기도회를 인도하고 나서 최군과 함께 넝마주이를 나

갔다. 이른 아침 얼른 두어 망태를 줍고 병원에 들러볼 생각이었

다. 일터로 가서 손수레 하나만큼 넝마줍기를 끝내고는 병원으로

갔다.

가는 길에 소녀를 위해 장미 한 송이와 사탕 한 봉지 그리고 오

렌지 주스를 샀다. 그러나 그녀가 누웠던 자리는 이미 다른 환자

가 차지하고 있었다. 간호원에게 물었더니 새벽녘에 죽어서 시체

실로 갔노라고 했다. 시체실로 가서 흰 천이 덮여 있는 그녀의

머리맡에 장미꽃과 알사탕을 놓아주고는 장례 준비를 서둘렀다.

다음날도 비는 그치지 않고 내렸다. 빗속에 벽제 화장터로 가서

화장을 했다. 한 줌 잿봉지를 들고 돌아오는 길은 지치고 허전하

여 온 세상이 뿌옇게 보였다.

내 옆구리에 큰 구멍이 뚫려 맞바람이 바로 통하는 것만 같았다.

그녀의 삶과 죽음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애달팠다. 왜 와서 진

창을 헤매다가 한을 품은 채 저승으로 갔을까? 바람소리는 한을

품은 그녀의 울음소리처럼 들렸고 발에 밟히는 풀잎 하나에도 그

혼의 아픔이 깃들여 있는 듯했다. 잿봉지를 든 나는 늘 가던 제2

한강교로 갔다. 다리 밑으로 흐르는 물에 소녀의 재를 뿌리며 중

얼거렸다.

『소녀야, 넓은 태평양으로 가그라이―. 그곳에 우리 마을 사람

여러 명이 가 있다. 가서 한마을에서 살아라. 이곳에서는 열다섯

해를 살았지만 거기서 오래오래 살려무나』

잿가루가 다 쏟아지고 재를 담았던 봉지마저 강물에 띄워 보낸

후 나는 시내 쪽으로 나왔다. 비가 와서인지 견딜 수 없이 허전

했다. 그냥 죽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평소에 애송하던

미국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눈 내리는 밤 숲가에 서서」

를 읊었다. 천천히 걸으며 읊었다.

청계천 빈민촌에도 세월은 흘렀다. 73년 여름이었다. 그간 배달학

당은 서울대 국문학과 학생인 서종문군이 맡아 이끌었고, 서울대

정치학과 제정구군이 마을에 들어와 함께 살며 청년지도와 생활

안정사업을 도왔다. 그는 몸소 넝마주이가 되어 모범을 보였기에

마을 주민들로부터 칭찬과 존경을 받았다.

이화여대 사회학과생들이 와서 마을에 배꽃유치원을 운영하기도

했다. 그들이 유치원 운영을 워낙 잘하니까 가까이 있는 빈민촌

들에서 원망과 진정이 쇄도했다. 「왜 그쪽에만 유치원을 운영하

고 이쪽은 못본 체하느냐. 여기도 실시해달라」는 진정이었다. 그

래서 이웃 마을에는 숙명여대 유아교육과 학생들이 와서 유치원

을 운영했다.

빈민촌 선교활동은 이렇게 진행돼갔으나 내 몸은 점점 망가졌다.

한 가지 일을 계속할 수가 없었고 정신집중력이 현저히 떨어졌

다. 잠자리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설교를 20분만 해도 지쳐 몸을

벽에 기대고 있어야 했다. 먹어도 배가 고프고 잠을 자도 졸음이

밀려들었다.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으니 만성 피로증이라 했다. 다른 약은 없

고 한 일 년 푹 쉬라고 했다. 이대로 계속 가면 폐인이 될 수도

있노라고 했다. 그때 나의 소원은 간단했다. 어디 가서 고기를 실

컷 먹고 잠을 푹 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소원을 이루기에는

빈민촌 현실이 너무나 각박했다. 나는 합당한 출구를 찾지 못한

채 다람쥐 쳇바퀴 돌듯 일과를 계속했다.

그러던 어느 무던히도 더운 날, 넝마주이 망태를 멘 채 쓰레기통

을 뒤지다가 심한 어지럼증을 느꼈다. 담벽에 기댄 채 겨우 몸을

지탱하려는데 하늘이 노랗게 보이고 한기가 뼛속으로 스며들었

다. 나는 손수레도 망태도 그 자리에 둔 채 마을로 들어와 자리

에 누웠다.

그 길로 나는 열흘이 넘도록 고열에 시달렸다. 한여름 더위에 담

요를 머리 끝까지 뒤집어쓴 채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몸이 약해

지니 마음도 약해졌다.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 계속하지 않

는다면 그만둘 수는 있을까? 빈민촌에 처음 들어오던 때에 주위

사람에게 했던 말이 기억났다.

『내가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명(命)을 따라 빈민촌에 들어가는

데 들어갈 땐 이렇게 살아 들어가지만 나올 때는 죽어 나온다』

그만큼 열심히 하겠다는 각오를 다짐하느라 그렇게 말했었는데

실제 빈민촌을 나가야 할 처지에 이르니 이제는 그 말이 올무가

됐다. 이대로 빈민촌을 떠난다면 친구들이 『김진홍 너 죽어 나

온다더니 왜 죽지 않고 생생하게 나왔느냐』고 물으면 무어라 대

답을 할까? 병들어 어쩔 수 없이 나왔다고 하면 될까?

친구들에게는 그렇다치고 나에게 빈민선교 사명을 맡기셨던 예수

님께는 무어라 말해야 할까?『예수님 죄송합니다. 감당하려 했지

만 체력이 뒤따르지 못해, 하는 수 없이 나왔습니다』 하고 말씀

드리면 인정하실까? 예수님은 아주 못마땅해 하실 것만 같았다.

『나는 네 나이에 너를 위해 죽었는데 너는 아직 멀쩡하면서 뭘

그러느냐?』고 말씀하실 것만 같았다. 그래서 죽이 되든 밥이 되

든 그냥 버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렇게 다짐하는 것도 잠시고 얼마 후에는 온갖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 친정으로 가버린 아내, 아내의 창백하던 얼굴, 결

핵에 걸린 아들, 체중이 50kg 아래로 떨어진 나 자신, 주위의 환

자들, 실업자들, 술주정꾼들, 철거반, 온갖 모습이 떠올라 나를 괴

롭혔다. 이대로 계속 가다간 얼마 안돼 쓰러질 것만 같았다. 하나

님의 일을 한답시고 무리하다가 쓰러지고 나면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되는 거나 아닌가 생각됐다. 지금쯤 그만두는 것

이 지혜로울 것도 같았다.

활빈교회 간판 떼다

10여일을 고열에 시달리며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지내다가 열이

내리니 무엇이든 먹고 싶었다. 그러나 먹을 것이 없었다. 다시 넝

마주이를 나가 몇백원이라도 벌어오기 전에는 배고픔을 면할 길

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넝마주이를 나가려고 신발끈을 묶었으

나 맨몸으로 걷기에도 비틀거렸다.

나는 다시 방으로 들어와 누웠다. 누워 다시 생각했다. 빈민선교

를 계속하려다가는 몸도 가정도 남아나지 못하겠다. 이 정도에서

마무리하는 수밖에 없겠다. 내 몸이 없으면 하나님의 일도 없어

지는 것이요, 빈민선교도 사라지는 것이다. 여기서 마무리짓고 신

학교로 돌아가 공부를 끝내고 힘을 기른 후에 빈민을 돕는 일을

도모해야겠다. 그렇다면 이 일을 어떻게 마무리하느냐?

이대로 두고 그냥 사라지느냐? 그럴 수는 없다. 적당한 후임자를

뽑아 지금까지 하던 일을 맡겨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후임자

가 있을까? 나 같은 바보가 또 있을까? 이도 저도 안 되면 어떻게

하는 거냐? 주민자치로 할 수 있도록 조직을 만들어주고 떠나면

될까? 아직은 이르다. 나는 누운 채 뚜렷한 방법을 찾느라 고심

했다. 그러나 묘수가 나올 리 없었다.

이런 궁리, 저런 궁리 하다가 깜박 잠이 들었다. 꿈을 꾸었다. 내

가 강대상에서 설교를 하고 있는데 출입문에서 불이 났다. 불길

이 온 교회에 가득 번져 나갔다. 나는 도망치려 했으나 모든 문

이 밖에서 잠겨 있어 나갈 수가 없었다. 애타게 이 문 저 문 손

잡이를 틀며 열려고 애쓰는 중에 잠이 깼다. 묘한 시기에 묘한

꿈을 꾸었다고 생각됐다.

평소에 꿈이나 환상 등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온 나였지만 이런

때에 그런 꿈을 꾼지라 심각해질 수밖에 없었다. 교회당에 불이

났는데 내가 도망갈 수 없었다는 것은 내가 활빈교회를 떠날 수

없다는 뜻일까? 개꿈을 두고 내가 너무 신경과민인 것일까? 그

러나 생각할수록 무슨 의미가 담긴 꿈인 것만 같았다. 꿈 풀이를

하다가 허기가 들어 밖으로 나왔다.

교인집을 찾아가 라면이라도 끓여 달래려고 몇 집 돌았으나 그날

따라 다들 집에 없었다. 다시 방으로 들어오며 마침내 결단을 내

렸다. 이렇게 갈등만 하고 있다가는 결국은 신경쇠약에 걸려 사

람 버리겠다는 생각이 들어 빈민촌을 떠나기로 결론을 내린 것이

다.

예수가 보낸 아이들

나는 교회당 현관으로 나가 「활빈교회」 간판을 내렸다. 내 손

으로 달았던 간판을 3년 만에 내 손으로 내리려니 손이 떨릴 지

경으로 마음이 흔들렸다. 그러나 나중에 더 큰일을 하기 위해서

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 다짐하며 간판을 내렸다.

작전상 후퇴란 말도 있지 않던가. 하나님의 일에도 작전과 전략

은 있는 것이다. 스스로 위로하며 내린 간판을 교회당 안으로 들

여가 한켠에 뒤집어 놓고는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병으로 허약해진 데다가 허기진 몸인지라 짐 꾸리는 데도 시간이

걸리게 마련이었다. 짐 꾸리기에 한나절이나 소비하고는 용달차

를 불러 짐을 싣고 떠나려 교회당 문을 열고 나갔다.

그런데 그날따라 마을 어린이들이 교회 마당에 30~40명이나 모여

놀고 있었다. 그들이 나에게로 모여들며 매달렸다.

『전도사님 어디로 가세요. 우리 동화 해주세요』

주일마다 모이는 어린이 시간에서 동화 듣기에 이력이 난 그들인

지라 그날도 만나자마자 동화 들려달라고 매달렸다. 나는 아이들

의 손을 떼며 『얘들아, 내 신경쓰지 말고 놀아라』고 말했다. 그

러면서 오늘따라 웬일로 여기서 놀고들 있나 싶었다.

양심상 아이들이 보는 데서 짐 싸들고 떠날 수는 없으니 두어 시

간 기다렸다가 아이들이 흩어진 후에 떠나야겠다고 생각하고는

방으로 들어왔다. 두 시간남짓 지난 후에 다시 밖으로 나갔더니

그간에 아이들은 흩어진 것이 아니라 더 불어나 있었다. 다시 방

으로 들어와 한 시간 가량이 지난 후에 나갔더니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하기를 세 번이나 반복한 후에 나는 생각했다.

「어쩐 일로 오늘따라 아이들이 교회 마당을 떠나지 않는가? 내

양심으로는 아이들이 보는 데서 짐을 가지고 떠날 수는 없다. 도

리없이 밤에 떠나야겠다」

그렇게 생각을 한 것이 오후 3시경이었다. 여름 해가 길어 해 지

기까지는 아직 여러 시간이 남았는지라 나는 마을을 한 바퀴 돌

아보기로 했다. 이 골목 저 골목을 다니며 지난 3년간 있었던 사

연들과 사건들을 되새겼다.

그렇게 다니는 동안 마음속에 죄의식 같은 느낌이 솟았다. 이 사

람들은 갈 곳이 없어 청계천 썩어가는 물가에 살고 있는데 나는

갈 곳이 있다고 짐을 꾸려 두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잘못하는 것은 아닐까? 병이 들든 바보가 되든 이 마을에서 견뎌

야 되는 것 아닐까?

그러나 이왕지사 마음먹고 짐 싸둔 판에 독한 마음먹고 떠나기로

결심했다. 저녁까지 기다릴 것 없이 당장 떠나기로 하고는 교회

당으로 올라갔다.

예수님의 얼굴

그런데 모퉁이를 돌아 교회당이 보이는 곳에 이르렀을 때다. 모

퉁이에 있는 집 방문이 닫혀 있고 아이들의 신발들이 방문 앞에

흩어져 있었다. 열세살에서 세살까지 다섯 남매가 있는 집이었다.

그들의 아버지는 얼마 전 술김에 사람을 때리고는 감옥에 가 있

었고 엄마가 다섯 남매를 돌보며 어렵사리 살아가고 있는 가정이

었다. 그들이 더운 여름 한낮에 방문을 닫아두고 방 안에 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집 앞으로 다가가서 『여보세요. 문 좀 열어

봐도 될까요? 교회에서 왔습니다』 하며 문을 열었다. 그런데 방

안에는 다섯 남매가 나란히 누워 있었다. 나는 놀라서 방 안으로

들어가며 물었다.

『아니, 너희들 어디가 아프냐? 이 대낮에 왜 방에 누워 있는 거

니?』

나는 그들에게로 다가가 손으로 이마를 짚어보았다. 열은 없는데

도 아이들은 기진맥진하여 마치 중병에 걸린 사람처럼 누워 있는

것이었다. 내가 다시 『너희들 왜 그러니? 감기 걸렸니?』 하고

물었더니 열세살짜리 큰아들이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배고파예. 엄마가 사흘 전에 장사 나가시더니 들어오질 않아

굶었어예』

남편이 감옥에 간 후 부인은 자녀들을 부양할 길을 찾아 손수레

에 연탄불을 피우고는 우동이나 고구마 튀김 같은 음식들을 길가

에서 팔았다. 소위 포장마차 행상이었다. 청계천 6가 뒷골목에 터

를 잡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골목을 지키고 있는 터였다. 그 엄

마가 수일 전에 장사를 나가서는 연락도 없이 오지 않았다는 것

이었다.

하루 벌어 하루 먹는 판에 엄마가 3일간 들어오지 않았으니 다섯

남매가 고스란히 굶은 채 누워 있는 것이었다. 형이 그렇게 말하

고 고개를 떨어뜨리는 사이에 동생들 넷도 부스스 일어나 눈물을

훔쳤다.

나는 그런 모습을 보면 몸이 오그라드는 듯하고 가슴에 통증을

느낀다. 다섯 남매가 배고픔과 기다림에 지쳐 울고 있는 모습을

보며 나는 현기증을 느꼈다. 등을 벽에 기댄 채 그들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그때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계속 엄마를 부르는 세살배기 막내

가 보였다. 3살짜리 얼굴에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가만히

보던 나는 갑자기 큰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평생토록 잊을 수 없는 충격이었다. 내가 물끄러미 보고

있는 어린 아이의 눈물 떨어지는 얼굴에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난

것이다.

불과 2~3초였지만 분명히 예수님의 얼굴이 그 아이의 얼굴에 포

개져 나타나 나를 깊은 눈으로 보시다가 사라지는 것이었다. 예

수님의 눈과 나의 눈이 마주치는 그 짧은 순간에 나는 가슴이 뜨

거워지고 눈물이 쏟아졌다.

「예수님은 내가 이 마을을 떠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는구나.

내가 이 마을을 떠나 힘 있는 목사가 돼 큰일 하는 것을 원하시

는 것이 아니라 이 아이들 곁에서 이 아이들의 눈물을 씻어주는

일을 하기를 원하시는구나」

이런 생각이 든 나는 그 자리에 꿇어 앉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

다.

『예, 주인님 알겠습니다. 가서 교회 간판 다시 걸고 짐 풀어놓고

이 마을에 그냥 남아 있겠습니다』

나는 아이들에게 잠깐만 기다리라고 이르고는 교회당으로 갔다.

가서 먼저 「활빈교회」 간판부터 다시 걸었다. 그리고는 묶어두

었던 짐들을 대충 풀고는 가게로 갔다. 가게에서 물국수 50원어

치를 외상으로 사서 아이들에게로 가 함께 먹었다. 그리고는 말

했다.

『이제 먹었으니 너희 엄마 찾으러 가자. 엄마를 만나 함께 집으

로 돌아올 수 있기를 예수님께 기도드리고 가자』

행방불명인 다섯남매의 어머니

나는 다섯 남매의 엄마가 장사하는 장소를 가 본 적이 있다는 두

아이만 데리고 갔다.

마을 입구를 벗어나는데 우체부 아저씨가 나를 보고는 가까이 왔

다. 교회로 가는 등기편지가 있으니 도장이 있으면 달라고 했다.

지장으로 대신하고 받아 열어보았더니 고맙게도 5천원짜리 송금

환이 「좋은 일에 써 달라」는 편지와 함께 들어 있었다. 발신인

의 주소도 성명도 없는 편지였다.

나는 이 돈 5천원으로 잘 하면 그들의 엄마를 찾아올 수 있을 것

도 같아 힘이 솟았다. 그들의 엄마를 찾는 길이 막연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간의 경험으로 감이 잡히는 곳이 있었다. 3일을

아무 연락없이 돌아오지 않았다면 경찰서 유치장에 있을 가능성

이 높았다.

그 당시는 경찰들이 길가에서 무허가로 장사를 하는 노점상을 심

하게 단속하던 때였다. 경찰은 주기적으로 노점상들을 검거하여

벌금을 물리고 벌금 낼 돈이 없는 경우는 그 벌금만큼 유치장에

서 살게 했다. 나는 그들의 엄마도 그런 사연으로 유치장에 있지

나 않을까 하는 짐작으로 찾아나선 것이다.

을지로 5가와 청계천 사이, 아이들의 엄마가 포장마차를 놓았다

는 장소에 갔더니 사람도 포장마차도 없었다. 나는 부근 담뱃가

게로 가서 물었다.

요? 3일 동안 집에 안 들어와서 아이들이 기다리다 찾아왔습니

다』

『3일째 안 들어왔어라? 그럼 3일 전 후리가리 때 걸려 들었나?

그렇다면 경찰서로 가서 알아봐야 할 것 같으네요』

「후리가리」란 경찰의 일제단속을 일컫는 말이다. 길가 노점상

을 단속할 때 경찰이 출입구를 봉쇄하고는 모두 잡아들여 즉결재

판으로 넘긴다. 이런 단속을 「후리가리」라 부르고, 이때 걸려

유치장 사는 것을 「후리가리 징역」이라 부른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관할 파출소로 갔다. 파출소에서는 이야기를

듣더니 3일 전에 손수레 몇 대를 단속해 즉결로 넘겼으니 경찰서

로 가보라고 했다. 경찰서로 가서 지하 유치장에 수감돼 있는 그

녀를 만날 수 있었다. 즉결재판에서 1만2천원의 벌금형을 받았는

데 6천원이 모자라 몸으로 때우게 되었노라 했다. 돈이 없어 벌

금을 못 내는 경우에 유치장을 하루 살면 5백원씩 갚아 나가던

때다. 6천원이니까 12일을 살아야 하는 셈이었다.

쇠창살에 갇힌 여인

그녀는 들어오던 시간부터 당직 경관들에게 하소연했다. 그야말

로 눈물로 호소했다.

『내가 열이틀 살고 나가면 우리 다섯애들 굶어 죽소이―. 우리

동네에 활빈교회란 교회가 있응게 그리로 연락만 해주면 교회에

서 우리 애들 돌봐 줄 거이요. 교회로 연락만 좀 해주시라요』

『그 교회 전화번호 있으면 연락해주지』

『근데요. 우리 동네엔 전화가 없는 동네구만요』

『전화가 없으면 어떻게 연락을 해. 내가 직접 가란 거야?』

담당 경관이 바뀔 때마다 그녀는 호소했다. 철창에 붙어 서 있다

시피 하며 경찰들에게 호소했다. 그러나 어느 경찰관도 전화조차

없는 청계천 우리 마을까지 연락해주지 않았다. 그렇게 3일이 지

나는 동안에 부인은 굶주릴 아이들을 생각하고는 애간장이 녹고

있던 터에 우리가 찾아갔다. 부인은 나를 보고는 참았던 설움을

터뜨렸다.

『아이고 불쌍한 내 새끼들. 그간에 굶었제. 어미 아비 잘못 만나

굶었제. 그렇게 굶고 사느니 그만 죽어버릴끼제…』

부인은 두 손으로 잡은 쇠창살에 이마를 찧으며 울었다. 나도 흘

러내리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나는 그녀를 위로했다.

『아주머니 빨리 나오게 해드릴 테니 그만 우시고 힘 내세요. 아

이들은 잘 있습니다』

『고맙기도 해라. 선생님, 이 은혜를 어떻게 갚지요』

나는 동대문경찰서 콘크리트 바닥에 무릎을 꿇고 감사기도를 드

렸다.

『예수님 감사합니다. 내가 힘들다고 일터를 떠나려 했을 때 배

곯아 우는 아이들로 내가 있어야 할 곳을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

니다. 내가 살아 남으려고 짐을 묶어 두었을 때에 자식 굶기는

어머니의 한숨을 통해 내가 죽어야 할 곳을 알게 해주셔서 감사

합니다. 예수님, 저는 돈도 없고 능력도 없고 힘도 없습니다. 그

러나 제가 할 수 있는 것 한 가지는 알았습니다. 배곯아 우는 아

이들이 있는 마을에서 그 아이들의 눈물이 변하여 기쁨이 될 때

까지 함께 사는 것입니다. 자식을 먹이지 못하고 가르치지 못하

는 부모의 설움이 찬양으로 바뀔 때까지 함께 사는 일을 하겠습

니다』

나는 그 길로 나가 5천원짜리 송금환을 현금으로 바꾸었다. 다시

경찰서로 와서 벌금 6천원 중에 3일간 유치장에서 산 몫으로 1천

5백원을 제한 4천5백원을 치르고 풀려나게 했다.

73년 9월로 들어가자 정치판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무리하게

강행해오던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체제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

다. 학생들이 저항하기 시작하고, 성직자들이 시국선언문을 발표

했고, 교수들이 연명으로 유신체제에 도전했다.

빈민촌에 들어가던 때에는 내게 정치의식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빈민선교에서 서민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접하고는 정치가 대단히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됐다. 한 사회에서 개인이 아무리

착하고 도덕적이어도 그 사회의 규범이나 시스템이 잘못돼 있거

나 그 사회를 이끌고 있는 정치인들이 그릇된 도덕관이나 통치관

을 가지고 있을 때 전체가 고통당한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끼게

됐다. 말하자면 빈민촌의 현장 경험을 통해 사회의식 내지 정치

의식이 점차 발전하게 된 셈이다.

게다가 빈민촌에서 함께 일하는 제정구군은 서울대 정치학과 학

생인데다 독재에 저항하는 데모를 주동했다가 제적당한 후에 청

계천으로 들어온 이였다. 또 수시로 와서 도움을 주는 서경석군

은 기독교 내에서 반독재 운동을 이끌어 가고 있는 인재였다. 비

록 후배들이었지만 그들을 통해 우리 사회가 돌아가고 있는 판을

다소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다른 어떤 것보다 나 자신이 성경을 읽고 그 성경 본문을

바탕으로 사회현실을 보노라니 정치적 안목이 점차 발전해갔다.

말하자면 선교 초기에 단순했던 복음주의 노선에서 현장경험을

통해 점차 현실참여파로 자라게 된 셈이었다.

그런 과정을 거쳐 73년 11월경에는 한국교회 소장 성직자들의 유

신체제 반대운동에 서명도 하고 모임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한때

기독교 내 반체제운동을 이끌던 박형규 목사가 주도하고 있는 도

시산업선교팀에 소속되기도 했고, 문동환 목사와 조승혁 목사 같

은 분들이 강의하는 브라질의 운동가 파울로 프레이레의 실천이

론이나 미국의 숄 아렌스키 같은 사회운동가의 이론을 강의받기

도 했다. 그런 참여와 강의들을 통해 나의 복음 이해는 점차 폭

이 넓어졌다.

『새벽을 깨우리로다』의 탄생

그런데 그해 10월경에 기독교방송국에서 개국 기념사업의 하나로

신앙체험수기를 모집한다는 공고가 발표되었다. 지금은 잊었지만

당선작 상금이 당시로서는 상당한 금액이었다. 나는 빈민촌에서

재정이 극도로 쪼들리던 터라 그 상금에 관심이 가서 응모하기로

했다.

그간에 써두었던 일기장과 메모 등을 모두 챙겨 한 여관으로 갔

다. 그 여관에서 일주일 동안 8백장 원고지를 써서는 기독교방송

국으로 보냈다. 나는 으레 당선될 줄로만 알고 상금 용도까지 정

해두었다.

그러나 당선자 발표에 내 이름은 없었다. 나는 방송국으로 가서

원고뭉치를 찾아와서는 교회당에 붙어 있는 기도실 선반 위에 올

려놓았다. 세상 일이란 것이 참으로 재미있어서 그 원고는 내가

옥중에 있는 동안 일본으로 가서 일본에서 먼저 출간되었다. 바

로 『새벽을 깨우리로다』라는 제목의 책이다.

국내에서는 내가 정치범이었기에 출간되지 못하고 있다가 1982년

에 이르러서야 겨우 출간될 수 있었다. 홍성사에서 출간한 이 책

은 초판 이래 판을 거듭하여 이제는 거의 1백판에 이르렀다. 그

간 일어판에 이어 영어판, 러시아어판이 출간되었고 지금은 중국

어판이 제작중이다. 기독교방송국의 현상응모에 낙선된 내용이

그렇게 호응을 얻게 된 것을 생각하면 세상만사가 새옹지마란 말

이 실감난다.

이 글이 빛을 보게 된 데는 일본인 노무라(野村基之) 목사의 공

로가 크다. 노무라 목사는 82년인가 83년, 어느 무더웠던 여름에

자기 발로 청계천 활빈교회를 찾아왔던 분이다. 한 번 찾아온 이

후 후원자이자 친구가 돼 무던히도 열심히 도왔다. 그는 빈민들

을 돕는 일에 때로는 나보다 더 열심이었다. 활빈교회 선교사에

잊을 수 없는 은인인 셈이다.

1974년에 들어섰다. 1월8일자 아침 신문을 펼쳐든 나는 깜짝 놀

랐다. 박정희대통령이 긴급조치 제9호를 공포한다는 포고문이 실

려 있었다. 긴급조치 발동은 나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그 공고문

을 읽고 느낀 첫 느낌이 「정부가 역사에 큰 오점을 남기는구

나」 하는 것이었다.

그날로부터 꼭 열흘 후에 나의 감옥생활이 시작되었다. <다음호

에 계속>

74년 1월8일 석간신문을 펼쳐든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대통령 긴

급조치 제1,2호는 헌법개정에 대해 국민들은 말하지도 말고, 전하지

도 말고, 모이지도 말라는 내용이었다.

사실 73년 후반에 들어와서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던 유신정국(維新政

局)은 그해 연말에 이르러 온 나라가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됐다. 학

원가와 종교계를 선두로 사회 각계각층에서 유신체제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고 급기야 유신헌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여론이 강하게 일어났

다.

그러한 움직임이 드디어 국민운동의 수준에까지 이르러 「헌법개정

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이 촉발됐다. 장준하, 백기완 선생 등이 중심

이 된 이 서명운동은 큰 호응을 얻어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이에 박

정희를 수반으로 하는 유신정부는 긴급조치 선포라는 비상수단을 쓰

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나는 그간에 현실정치에는 별반 관여가 없던 터였다. 더구나 빈민선

교를 시작한 후로는 매일의 업무에 부대껴 외부 문제까지 신경쓸 여

유가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 선포된 대통령긴급조치 제1호의 내용을 찬찬히 살펴

본 나는 민주주의가 뒷걸음질하는 심각한 문제라고 판단했다. 내가

특히 관심을 둔 것은 헌법문제나 체제문제가 아니었다. 국민 개개인

이 지니는 의사표시의 자유와 민주주의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집회

에 관한 문제였다. 이런 문제들은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기본권 문

제였다.

나는 생각했다. 국가나 법이 보장하는 국민의 기본권리 이전에 하나

님이 보장하는 인권(人權)이 있다. 어떠한 이유로도 이 기본권인 인

권을 유린해서는 안 된다. 인권을 유린하는 문제는 정치문제가 아니

라 종교문제다. 헌법을 개정하자는 국민들의 의사를 탱크로 막는

일은 마치 하나님께 총질하는 것과 같다. 이런 조치에는 교회와 교

인들이 앞장서서 저항해야 한다.

몸사리는 교회 지도자들

때맞춰 성남 주민교회의 이해학 전도사가 찾아왔다. 이해학 전도사

는 사회정의에 대해서는 골수파였다. 나와 이해학 전도사 사이에는

긴 이야기가 필요없었다.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합의를 이루고 이

조치에 대항하는 시위운동을 추진키로 했다.

나와 이해학 전도사는 이토록 살벌한 정치상황 아래서는 학생들이나

일반시민들을 앞장서게 해서는 안 되고 우리 성직자들이 나서야 한

다고 생각했다. 선교사는 선교라는 큰 뜻에 몸바친 사람들이기 때문

에 선교지역에서 일하는 것이나 감옥 안에서 옥살이하는 것이나 마

찬가지라는 생각이었다.

다음날부터 우리 둘은 한국교계의 여러 선배들과 접촉하면서 참여와

협조를 요청했다. 그러나 긴급조치 제1호가 워낙 엄청난 내용이어서

그런지 대개가 무모하게 나서지 말고 좀더 관망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들이었다. 그런 분들 중에는 우리를 퍽 곤혹스럽게 한 선배도

있었다.

어느 목사를 예로 들어보자. 그 목사는 평소에 한국교회에서 사회정

의와 현실참여를 강력하게 주장하시던 분이었다. 학문으로나 덕망으

로나 현실참여를 주장해온 경력으로나 한국교계에 널리 알려진 사람

이었다.

이해학 전도사와 내가 주최하려는 시위행사에 호응할 선배 목사들을

찾기 위해 여러 곳을 다녔으나 호응을 얻지 못해 고심하던 중이었

다. 특히 시위행사 때 설교를 맡아줄 선배 목사가 없는 게 큰 고민

거리였다. 우리는 부탁드려볼 만한 선배들을 찾아 헤매다가 이분이

라면 꼭 호응해 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찾아갔다.

우리가 그 선배의 서재로 안내받아 들어가 앉자마자 그는 시국에 대

하여 고담준론을 펴며 『이런 때에 우리 크리스천들이 피를 흘려야

한다』고 높은 음성으로 역설했다. 우리 둘은 지옥에서 부처님을 만

난 듯 반가웠다. 그래서 반가운 마음으로 동참을 요청했다.

『교수님 이번 행사에 앞장설 젊은 목회자들은 넉넉한데 문제는 당

일 설교를 해줄 설교자가 없습니다. 교수님께서 설교를 좀 맡아 주

십시오』

그러나 부탁을 받은 교수님의 반응에 나는 너무나 놀랐다. 교수님은

갑자기 음성을 탁 낮추더니 속삭이는 듯 말했다.

『이 사람들아, 이런 때일수록 몸을 아껴야지. 지금 이 시국에 정권

과 맞닥뜨린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가 아니겠는가? 좀더 기다

렸다가 상대방의 예기가 죽거들랑 일을 도모해 보세나』

방금 「이런 때에 크리스천들이 피를 흘려야 한다」고 역설하던 때

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나는 씁쓸한 마음으로 물러났다. 한국

교회 전체의 허점을 본 느낌이었다. 좋은 시절일 때는 용감하고 어

려운 시기에는 약한 허점, 입은 크고 손발은 작은 허점을 보는 느낌

이었다. 나는 목사에다 교수 겸 박사인 그의 집을 물러나며 한 마디

뱉었다.

『씹새끼』

그러나 이해학 전도사는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릴 따름이었다. 그로

서는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 선배가 자신을 가르친 직계 교수였

기 때문이다. 언행이 일치하는 훌륭한 교수라고 누누이 말해오던 터

에 갑자기 그런 모습을 보게 됐으니 할 말이 없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시위에 선배 목사들을 참여시키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우리

또래의 성직자들끼리 행사를 추진키로 했다. 「시국을 위한 기도

회」 형식으로 행사를 치르되 성명서나 시국선언문 등의 발표 대신

조국의 현실에 직면하여 신앙고백 형식으로 발표키로 정리했다. 말

하자면 정치적인 집회가 아니라 선교론적(宣敎論的)인 집회를 열자

는 생각이었다.

최초의 시국선언기도회

내가 소속된 교단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소속 목회자들로는 영등포산

업선교회의 인명진 목사, 신촌 대현교회의 홍길복 목사, 경동중앙교

회의 임신영 목사, 연세대 도시문제연구소의 박창빈 전도사 등이 참

여했다. 이해학 전도사가 소속된 교단인 한국기독교장로회에서는 박

윤수 전도사, 이규상 전도사, 권호경 목사 등이 참여했다. 감리교 교

단에서는 김동완 전도사, 김경락 목사 등이 참여키로 했다. 우리는

겨레의 앞날을 위해 예언자의 사명을 감당하자고 뜻을 굳혔다.

「한국기독교 성직자 시국기도회」란 이름으로 행사를 하되 한국교

회협의회 사무실에서 1월17일 오전 10시에 열기로 정했다. 집회장소

로 쓸 한국교회협의회 측에 사전 양해를 얻다가는 정보가 누설될 염

려가 있어서 당일에 무조건 밀고 들어가 기도회를 열기로 했다.

이렇게 준비하는 과정에서 각자가 책임지는 부서와 역할도 정해졌

다. 총책임자로 김진홍 전도사, 부책임자로는 이해학 전도사가 정해

졌고 감리교의 책임자로 김동완 전도사, 보도에 이규상 전도사, 추후

수습책으로 인명진 목사 등이 정해졌다. 3·1만세운동의 역사적 뜻

을 살려 33인의 성직자로 시국기도회를 열기로 합의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74년 1월17일 오전 10시에 한국교회협의회 사무

실에서 열린 「한국기독교 성직자 시국기도회」는 감리교 소속 김경

락 목사의 사회로 시작됐다. 기도는 한국교회협의회 총무인 김관석

목사가 맡아주었고, 설교는 사회자인 김경락 목사가 맡았다. 기도와

설교의 시간이 지난 후 홍길복 목사와 내가 함께 작성한 선언문을

이해학 전도사가 낭독했다.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선하신 명에 따라 우리 한국기독교 성

직자 일동은 조국이 처한 현실에 대해 순교자적 각오로 다음과 같이

우리의 신앙을 고백한다.

①금번 대통령의 1·8긴급조치는 국민을 우롱하는 처사이므로 이는

즉시 철회되어야 한다.

②개헌논의는 민의에 따라 자유롭게 전개되어야 한다.

③정부는 유신체제를 철폐하고 민주 질서를 회복하라』

그날 기도회에 참가했던 우리에겐 기도가 반드시 응답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고, 불안하거나 두려움을 느끼는 마음이라곤 없었다.

11시경 나와 6명의 동료들이 현장에서 체포됐다. 신문기자들과 인터

뷰를 하며 선언문을 나눠주던 자리에서 체포돼 동대문경찰서를 거쳐

2시경에는 남산기슭에 위치한 중앙정보부로 연행돼 갔다.

유신정권과 중앙정보부

중앙정보부에서 이틀을 지낸 후 1월19일 밤 11시에 서대문구치소에

도착, 독방에 분산 수감됐다. 나는 서대문구치소 9사 하층 6호실에

수감됐다.

수감되는 즉시 부모님이 지어주신 「김진홍」이란 이름은 압수되고

「2012번」이란 죄수번호가 나를 가리켰다. 이리하여 다음해인 1975

년 2월16일에 수원교도소에서 출감하기까지 13개월에 걸친 옥살이가

시작됐다.

그렇게 구속된 직후에는 중앙정보부로 가서 조사를 받는 일과 구치

소로 돌아와 새우잠을 자는 생활이 반복됐다.

밤 9시경이면 새까만 세단차가 와서 나를 불러냈다. 양옆에 정보부

요원들이 앉은 채 뒷자리에 실려 사직터널을 지나고 시청 앞을 지나

남산 기슭에 있는 중앙정보부로 갔다. 지하실 방으로 데려가서는 처

음 묻는 말에서부터 간을 철렁 내려앉게 했다.

『김진홍 너 평양 언제 갔다 왔어?』

느닷없이 그런 질문을 당하고서 당황하지 않을 사람이 없다. 그런

질문에 어안이 벙벙해진 내가 대답했다.

『보소. 대구 사람인 내가 평양 가는 길을 알아야 가지요?』

『이놈의 새끼. 네가 지금까지 일해온 내력을 살펴보면 넌 평양 가

서 밀봉교육 받고 온 녀석이 틀림없어. 너 임마, 평양방송에서 뭐라

그랬는지 알아?』

그러고서는 북한방송을 녹취했다는, 타이프로 친 원고를 내 앞에 내

밀었다. 읽어보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기가 찬 내용이었다.

『조국해방투쟁에 앞장서서 영웅적 투쟁을 벌이고 있는 김진홍 동지

이하 여러 혁명전사들께 열렬한 지지를 보냅니다. 우리는 여러분들

의 혁명투쟁이 꽃피우고 열매를 맺어 조국해방의 그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확신합니다…』

이런 식으로 시작된 평양방송은 나를 혁명영웅으로, 조국해방 투쟁

에 앞장 선 투사로 그려놓고 있었다. 나는 원고를 넘겨주며 말했다.

『잘못하면 혁명영웅 한 명 나오겠구먼요~ 잉』

정말 힘든 기간이었다. 도대체 잠을 재우지 않는 것이 어려웠다. 밤

새 묻는 말에 대답하고 쓰고 손도장 찍고를 거듭하고 나면 새벽녘에

는 잠이 쏟아져 걷잡을 수가 없었다. 남산에서 서대문구치소로 돌아

오는 새벽나절에는 졸면서 걸었다.

그해는 눈도 많이 내렸다. 검정 고무신을 신은 채 졸면서 눈 쌓인

길을 푹푹 밟고 지나갔다. 그러니 신발 속으로 눈이 들어가고 양말

이 젖었다. 방에 들어가서 양말을 벗고 젖은 발을 말리고 잠자리에

들어야 동상이 예방될 수 있으련만 워낙 졸리니 방에 들어가는 대로

쓰러져 잠이 들곤 했다. 잠자는 사이에 젖은 양말이 얼고 그로 인해

동상에 걸렸다.

동상은 추울 때는 견딜 만한데 이부자리에 들어가 발이 녹으면 가렵

기 시작했다. 잠들기 전까지 가려움을 견디다 못해 긁어서 발가락과

발바닥이 부어오르곤 했다.

프로메테우스의 벌

조사는 두 달간 계속됐다. 얼마나 어려웠던지 그 시간이 영원히 끝

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조사장에 들어갈 때와 마치고 나올 때마다

하루에 2번씩 차라리 영원히 잠들어 이 고통을 끝내게 해달라고 기

도드리곤 했다.

중앙정보부의 조사는 철저하고 집요했다. 1월8일 긴급조치가 발표되

던 시간부터 체포되던 때까지를 10분 단위로 쪼개 행동을 낱낱이 추

적하는 것이었다. 나 자신의 기억이 뒤바뀌기도 하고 관련된 사정상

사람들을 숨겨주어야 할 경우도 있어 조사에 임하기가 정말 어려웠

다. 특히 나는 사건의 주범(主犯)이었던지라 더욱 어려웠다.

우리 사건에 직간접으로 관련된 사람들이 53명이었다. 그들 53명에

대한 조사내용이 나의 진술과 일치해야 하는 것이었다. 내가 아무리

머리를 써서 짜맞추어 놓아도 53명 중 누구에게선가 다른 사실이 드

러나면 다시 심문이 시작되곤 했다.

끝없이 반복되는 조사를 받으며 나는 희랍 신화 중의 프로메테우스

가 받았던 형벌을 연상하곤 했다. 영웅 프로메테우스는 불이 없이

사는 인간들을 동정했다. 그는 신들이 사는 하늘나라에서 불을 훔쳐

다가 인간에게 주어 불을 사용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 그는 신들의 노여움을 사서 벌을 받게 됐다. 그런데 그 벌이

너무나 가혹했다. 그는 카프카스산의 바위에 묶여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는 벌을 받았는데, 쪼인 간이 재생할라치면 또다시 독수리에게

쪼이는 일이 영원히 반복됐다. 그것은 인간으로서는 참으로 견디기

힘든 형벌이었다. 의미없이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은 인간의 존재

자체를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중앙정보부의 조사가 이와 흡사했다. 온종일 질문받고 대답하고 쓰

고 지우고를 되풀이한다. 때로는 밤새워 승강이를 계속한다. 드디어

끝마치고는 손에 수갑을 찬 채 졸면서 서대문구치소로 되돌아온다.

지칠 대로 지친 몸인지라 그냥 잠에 골아 떨어진다. 얼마간을 자노

라면 다시 쇠문이 찍─ 소리를 내며 열리고는 『2012번 나와─』 하

는 교도관의 고함소리에 잠을 깬다. 미처 정신이 들기도 전에 손에

수갑이 채워지고 다시 조사장으로 끌려간다. 방에 들어서면 담당조

사관이 소리친다.

『김진홍 왜 사실을 자꾸만 숨겨서 서로 고생하게 하는가? 빨리 끝

내고 쉬어야지. 안 그런가?』

『원 별말씀을. 창자 속까지 다 훑어내시고는 또 뭣이 남았다고 그

러십니까?』

『×월 ×일 ×시 모임에 7명이 모의를 했다는데 너는 6명이 모였다

고 했잖나. 어떻게 된 게야. 왜 순진한 척하면서 거짓말을 해서 사람

을 골탕먹이는 게야? 그리고 김××박사 방문은 본인은 오전 10시경

이었다는데 넌 오후 4시경에 갔다고 했단 말야. 결국은 다 드러날

사실을 숨겨서 복잡하게만 만들었잖나. 사람 좀 살려달라구. 넌 가서

잠이라도 자다 왔지만 난 집구석에도 못 들어간 지가 일주일이 넘었

어. 다된 조서를 다시 꾸며야 하니 이거 미칠 지경이군』

오리발 작전

나는 아차 싶었다. 그날 모임에 함께하였던 친구 목사가 기도회를

열었던 당일에는 고열이 나서 참석지 못했고 기도회 직전에 그의

부인이 나를 찾아와 집안 사정으로 남편을 꼭 빼달라고 간청하기에

그렇게 하겠노라고 약속했던 것이다. 그래서 기도회를 열기 전 동료

들에게 ×××는 사정상 처음부터 관계가 없었던 것으로 하고 앞으

로 검거돼 신문을 받더라도 그를 빼달라고 말했는데 그 약속이 지켜

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내 입으로 아무개 목사가 처음부터 참여했었노

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다른 조사관에게서 정보가

어느 정도 나왔는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나는 구체적인 내용이 드

러날 때까지 계속 오리발을 내미는 수밖에 없었다.

『허, 그거 참. 내가 6명이라면 6명인 겝니다. 아니 왕초가 6명이라

는데 누가 7명이라구 했지요? 그 친구는 자기 그림자까지 헤아린 모

양이구먼요』

내가 그렇게 말하면 담당관은 다른 조사관에게서 넘어온 종범의 진

술서를 뒤적이며 해당 부분을 펴고는 일러준다.

『××× 목사가 그 자리에 있었잖나?』

나는 그제서야 다 드러난 줄로 알고는 이실직고를 한다.

『허 참 죄송스럽습니다요. 그 친구 마누라가 기도회 직전에 찾아와

설랑 남편은 빼달라고 통사정하기에 빼주겠다고 약속한 것인데….

허, 그것 참. 다른 친구들도 그건 덮어주기로들 약속했는데. 정보부

가 도사구먼요. 그걸 다 알아낸 걸 보니』

그렇게 너스레를 늘어놓으면 조사관도 지쳤는지 웃어버리고 만다.

이런 식으로 새로운 사실이 나올 때마다 다시 조사받고 진술서를 고

쳐쓰게 되니 끝이 없을 것 같은 작업이었다.

서대문구치소와 남산의 정보부를 오가며 서울 시내를 활보하고 있는

시민들을 창으로 내다보노라면 나도 저렇게 자유롭게 다니던 때가

있었던가 싶었다. 앞으로 나도 저렇게 자유롭게 거리를 걸어다닐 수

있는 때가 올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움직일 때면 언제나 덩치 좋은 요원 두 명이 양옆에서 함께 다

녔다. 처음에는 그들에게 긴장감을 느끼고 거리감을 두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대화가 오가고 서로의 고충을 배려하면서 친한 사

이가 됐다.

중정요원들의 애국심!

그러는 사이에 나는 중앙정보부 요원들도 인간미가 있고 나름대로

애국심과 국가관이 분명함을 알고는 놀랐다.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는 중앙정보부에 종사하는 그들은 사람을 무지막지하게 때리고 교양

이 없는 난폭자들일 것이란 인식을 가졌었으나 함께 시간을 지내다

보니 그렇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들에게도 휴머니티가

있고, 진지한 인생관과 국가관을 지닌 요원들이 있었다. 나는 우리

사건을 조사하기에 밤낮으로 고생하고 있는 그들을 보며 생각했다.

『저들은 어떤 동기로 저렇게 열심히 일하고 있을까? 박정희란 특정

인의 권력유지를 위한 시녀들일까? 아니면 출세욕이나 권력욕일까?

아니면 나름대로의 애국심일까!』

나는 여러 가지로 생각하며 살피다가 나름대로 결론을 내릴 수 있었

다. 그들도 자기들 나름의 애국심에서 그렇게 수고하고 있다는 결론

이었다.

그들이 강조하는 것은 국가안보와 경제성장이었다. 우리가 강조하는

것은 자유와 인권이었다. 따지자면 국가안보가 먼저냐 시민들의 자

유가 먼저냐의 문제였고, 경제성장이 우선이냐 아니면 개개인의 인

권이 우선이냐의 문제였다.

그들은 국가안보와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까지는 인권과 시

민들의 자유를 유보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국가의 질서유지를 위해 밤을 새워가며 일하고 있다는 데 대

해 자부심과 사명감을 품고 있었다. 내 생각과는 다르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매사에 상대를 좋게 생각해왔고 어떤 상황에도 낙관적으로 생

각하는 습성이 있다. 이런 성격 때문에 극단적인 방법으로 일을 끌

어가지 못한다. 그래서 친구들로부터 『투쟁심이 약하고 의식이 투

철하지 못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여하튼 나는 중앙정보부에

서 조사를 받으면서도 이런 성격이 드러나 조사관들에게 적개심을

드러내지 못했다.

구타사건과 성경

그런데 조사과정에서 내가 심한 부상을 입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날

의 조사는 우리 사건에 여자가 관계됐느냐는 내용이었다. 나는 여자

가 관계된 사실이 없노라고 말했다. 실제로 짧은 기간에 준비하느라

남자들만 관계했지 여자까지 연결할 겨를이 없었다. 내가 사실대로

말했으나 조사관은 굳이 여자가 관계돼 있으니 사실대로 말하라고

윽박질렀다.

같은 말을 몇 시간이고 반복하다 보니 서로가 짜증이 나고 상대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올라 폭발 직전에까지 이르렀다. 나는 악이 나서

말했다.

『관계된 여자가 생각납니다』

『아무렴 진작 그렇게 말할 것이지 왜 숨기려고만 한 거야』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담배를 피워 물고는 나의 답을 기록할

자세를 취했다.

『첫째, 1월9일 아침 청계천 판자촌에서 종로5가에 있는 기독교방송

국으로 가느라 탔던 버스의 안내양이 여자였고 둘째, 종로5가 기독

교회관에서 8층 방송국으로 올라가던 때 탔던 승강기의 엘리베이터

걸이 여자였고 셋째…』

내가 열이 나서 이렇게 읊어대기 시작하니, 그는 놀림받는 줄 느끼

고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나를 구타하기 시작했다.

『뭣이 어째. 이 새끼가 누굴 갖고 노는 거야!』

그의 주먹이 나의 왼쪽 옆구리에 내리꽂혔다. 워낙 화가 났던 터라

그 위력이 대단했다. 첫번째 주먹에서부터 숨이 탁 막히며 호흡 곤

란을 느꼈다. 그후로 숨을 내쉬거나 들이쉴 때마다 옆구리에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그러던 차에 성경이 차입됐다. 처음 성경을 받아들었을 때의 감격을

글로써 어찌 표현할 수 있겠는가! 나는 창세기부터 차근차근 읽기

시작했다. 월요일 아침부터 읽기 시작하여 토요일 오후가 되니 성경

한 권을 읽을 수 있었다. 그렇게 엿새 만에 성경을 일독하고 난 후

에 나는 반성했다.

명색이 설교자가 돼 엿새면 한 번 읽는 성경을 일년에 한번도 읽지

않고 설교를 해왔음을 반성한 것이다. 앞으로 옥중에 있는 동안에

성경읽기에 열중해야겠다고 다짐하고는 열심히 읽었다.

그렇게 여섯번째 읽을 때다. 구약 예레미야서를 읽는 중에 갑자기

성경이 변했다. 종이에 글자가 인쇄된 책은 사라지고 살아서 숨쉬고

말하는 말씀으로 바뀐 것이다. 성경이 살아 있는 말씀이 돼 나와 대

화를 나누는 인격체로 변했다. 나는 감격에 넘쳐 울면서 성경을 읽

어나갔다. 눈물이 흐르고 흘러 책장에 떨어지는지라 성경을 멀찍이

들고는 읽고 또 읽었다. 성경을 읽었다기보다 들이마셨다고 표현함

이 옳을 것 같다. 성경의 한 절 한 절이 내 몸의 세포 하나하나에

파고들어 파도를 일으키는 듯했다. 나는 찬 마룻바닥에 무릎을 꿇고

감사기도를 드렸다.

청계천 주민과 헌병들의 대결

조사가 일단락되면서 비상보통군법회의가 열렸다. 삼각지에 위치한

육군본부 뒤에 군법회의장이 설치되고, 우리 일행은 오랏줄에 묶여

재판받느라 끌려다니게 됐다.

두 번째 재판이 열렸던 날 사건이 일어났다. 재판이 갑자기 중단됐

다. 우리는 영문을 모른 채 육군본부 어느 방에서 몇 시간이고 기다

리게 됐다. 우리는 추위와 지루함을 참으로 기다렸다. 수시간 후에야

재판이 재개됐다.

후에 알고 보니 청계천 빈민촌 주민들과 활빈교회 교인들이 육군본

부 정문 앞에서 데모를 벌인 일로 재판이 중단됐다. 빈민촌 주민들

이 떼를 지어 육군본부 정문으로 몰려들어 소리를 질렀다.

『우리들의 지도자 김진홍 전도사를 석방하라』

이 데모로 인해 육군본부에 비상이 걸렸다. 경비하던 헌병들이 카빈

총에 장탄을 하며 『물러나라, 쏜다』고 해도 빈민촌 데모대는 막무

가내였다. 아기를 등에 업은 것이 아니라 가슴에 안고서도 헌병들이

겨누는 총부리 앞으로 돌진하며 소리를 질렀다.

『쏠 테면 쏴라. 이 새끼들아. 이런 눔의 세상 살 맘도 없다』

이렇게 돌진하니 헌병들이 쩔쩔매며 뒷걸음칠 수밖에 없었다. 후에

누가 건군 이래 헌병들이 육군본부 정문에서 후퇴하기는 처음일 거

라고 말했다.

청계천 주민들의 데모소식은 우리들에게 큰 위로가 됐다. 바깥 세상

과는 단절된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세계에 있는 우리들에게 재판과

때를 맞추어 데모를 했다는 소식은 큰 격려가 됐다. 밖에서 우리들

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는 표시 같아서였다. 동료 정치범들은 빈

민촌 주민들의 데모 소식을 듣고 내게 말했다.

『진홍이가 참으로 부럽구먼. 그간에 큰 일을 해놓았어. 지금이 어떤

때인데 육군본부 앞에서 데모를 벌이겠는가! 주민들이 김전도사를

얼마나 따랐으면 서슬이 퍼런 육군본부 헌병들 앞에서 데모를 했을

까. 김진홍 전도사는 행복한 사람이야!』

그러나 나는 염려가 됐다. 혹시 데모중에 주민들이 다치지나 않았을

까, 생명에 지장은 없었을까 염려스러웠다. 중앙정보부 요원을 만났

을 때 그들이 다치지 않았는지 물었다.

『우리 재판받던 날 빈민촌 주민들이 데모를 했다는데 다치지나 않

았는지요?』

『뭐라고? 다치지 않았느냐고? 말도 말게. 내 평생에 그런 데모는

처음일세. 아기를 앞으로 안고 쏘라고 달려드는데 그 사람들 다쳤다

간 큰일나게? 잘 모셔다가 설렁탕 한 그릇씩 대접하고 일류극장 표

한 장씩 줘서 마을까지 모셔다 드렸어』

가난하게 사는 밑바닥 사람들일수록 정이 있고 의리가 있게 마련이

다. 추운 겨울에 끼니도 제대로 잇기 어려운 터에 주민들이 헌병들

앞에서 그런 데모를 벌였다니 고맙기도 하고 염려도 됐다. 감옥에서

풀려나면 그렇게 의리있는 주민들을 잘 모셔야겠다고 다짐했다.

『나의 배후는 하나님이오』

그런 중에도 군법회의는 계속됐다. 2월7일에 징역 15년 자격정지 15

년의 선고가 내려졌다. 중형을 선고받고서도 우리 일행 6명은 낙심

하거나 비관하는 마음이 없었다. 우리는 한결같이 민주조국 건설에

밑거름이 되고 복음교회 성장에 제물이 된다는 자각에서 명예스러움

을 느낄 따름이었다.

비상보통군법회의에서 형을 선고 받은 즉시 우리는 항소했다. 비상

고등군법회의에서 수사는 다시 시작됐다. 우리 사건의 배후세력을

추궁하는 신문에서 우리는 한번 더 곤경에 처했다. 조사관들은 끈질

기게 물어왔다.

『당신들에게는 반드시 배후세력이 있을 것이오. 어떤 정치세력이나

불온세력이 있을 것이오. 어차피 밝혀질 텐데 실토하시오』

그런 추궁이 며칠간이나 계속됐다. 나는 대답했다.

『배후세력이 있다는 말은 옳은 말이오. 우리 배후세력은 사람이 아

니라 하나님이오』

어느날은 중앙정보부의 한 고위층 인사가 내게 해선 안 될 말을 했

다.

『김진홍 네가 주범(主犯)이라지?』

『그렇습니다』

『왜 교회가 정부에 대해 적대행위를 자꾸 하는 게야? 교회가 이런

식으로 계속 적대행위를 하면 한국 땅에서 아예 교회를 없애버려야

겠어』

나는 그 말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고 생각해 걸고 들었다.

『뭐라고요? 교회를 없애버리겠다고요? 그 말에 책임질 수 있습니

까. 교회가 반대하는 건 정부가 아니라 특정 정권입니다. 교회를 없

애겠다고 말씀하시는 데 그것이 박정희 대통령의 생각이오, 공화당

의 정책이오, 아니면 정보부의 방침이오?』

『이거 왜 진돗개처럼 물고 늘어지는 거야』

『진돗개가 아니라 이상한 말 아니에요. 이 땅에서 공화당이 먼저

없어지는가 예배당이 먼저 없어지는가 한번 겨루어 봅시다』

부평초같이 흥망을 거듭하는 권력집단이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해 감

히 존폐를 거론한다는 건 참으로 가소로운 일 아니겠는가?

감방 생활

74년 2월 중순 어느 날, 나는 방을 옮겼다. 그간에는 0.7평 크기의

독방에 수감돼 있었는데 일반수들이 있는 방으로 옮겨진 것이다. 새

로 들어간 방은 1.4평 크기인데 6명의 일반수들이 있었다. 1.4평 넓

이에 7명의 짐들이 있고 화장실까지 있으니 좁고 불편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낮 동안에 앉아 있으면 한방 가득 찼다.

문제는 밤이었다. 7명이 자기에는 애초에 무리였다. 하는 수 없이 한

쪽 어깨만 마룻바닥에 붙이고 잠들었다. 하루는 오른쪽 어깨로, 다음

날은 왼쪽 어깨로 자는 식이었다. 그렇게 자는 잠을 「칼잠」이라

불렀다. 어깨를 칼날처럼 세우고 잔다고 그렇게 부르는 것이었다.

그렇게 칼잠을 자다가 어깨가 빠지기라도 하면 금세 자리가 없어졌

다. 그렇게 되면 화장실 옆에 앉은 채 자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밤중에 오줌이 마려워도 자리를 잃을 것이 염려돼 그냥 참았다.

내가 들어간 방 죄수들 중에는 접시돌리기(사기꾼) 2명, 아리랑 강도

1명, 물총강도(강간범) 1명, 특수강도 1명, 부러진 칼(절도) 1명이 있

었다.

접시돌리기 한 명은 200원짜리 설탕 한 봉지를 홍콩에서 갓 들여온

아편이라고 속여 500만원에 팔았다가 잡혀온 사람이었다. 어떤 바보

가 그렇게 큰 돈을 주고 설탕 한 봉지를 샀을까 싶지만 그들의 실력

이(?) 워낙 뛰어나 속아 넘어가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물론 속는 사

람 자체가 법을 어겨서라도 떼돈을 벌어보겠다는 욕심이 있을 때 한

해서다.

그는 재물관리에 재간이 있어 교도소 안에서도 암거래를 해 200만원

을 벌어서 나간 사람이었다. 그렇게 뛰어난 재간을 옳지 못한 곳에

쓰니 교도소를 드나드는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다. 사람의 마음가짐

이 어떠냐에 따라 그의 운명이 하늘과 땅만큼이나 달라지는 대표적

인 사례였다. 또 다른 사기꾼은 연탄재를 필름이라고 속여서 팔다가

잡혀온 사람이었다. 연탄재를 기막히게 포장해서 쌓아두고 맨위에는

진짜 필름을 얹어 사기치는 것이었다.

잡범 6인의 신상명세

「아리랑 강도」란 노상에서 지나는 행인의 턱을 후려치고 쓰러지면

금품을 털어가는 강도를 말한다. 턱을 맞고 비틀비틀 쓰러지는 폼이

아리랑고개와 흡사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우리 방에 있던 이는

통산 47회나 아리랑 강도를 해, 5명은 턱이 부서지고 한 명은 즉사

케 한 헤비급이었다.

물총강도는 경기도 이천에서 산에 성묘하러 온 여중생을 덮치고 들

어온 젊은이였다. 그의 공소장에는 14세 여중생을 묘지 앞에서 칼로

위협하고 시계바늘 3시 방향으로 범하여 전치 2주의 상처를 입히

고… 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설탕봉지 사기꾼 아저씨가 우리 방 실장이었는데, 실장이 심심할 때

면 그에게 묻곤 했다.

『어이 시계방향 3시가 어느 쪽이지? 그쪽이 제일 맛이 좋은 쪽인

가?』

특수강도는 범행 때 칼을 사용했다 해서 특수란 말이 붙은 경우다.

그는 담을 넘고 들어가 칼로 부부를 위협하여 묶어두고는 챙길 것을

다 챙기고 나서 통금이 끝나기를 기다리다가 잡혀 들어왔다. 그는

기다리기가 지겨워 찬장에서 나폴레옹 코냑 한 병을 포도주 마시듯

꿀꺽꿀꺽 들이키고는 잠에 곯아 떨어졌는데 깨고 보니 파출소였다는

거다.

방에서 가끔 논쟁이 벌어지곤 했는데 주제가 그가 그날 저녁에 과연

꼬냑만 마셨겠느냐 아니면 주부까지 실례했겠느냐는 것이었다. 자신

은 여자에게는 손을 대지 않는 신사적인 사람이라고 주장했으나 아

무도 그의 말을 믿으려 들지 않았다. 숨 쉬는 것 외에는 다 거짓말

인 사람이라고들 했다.

「부러진 칼」로 불리는 절도범이 가장 불쌍한 젊은이였다. 전라남

도 신안군 어느 섬이 고향인 그는 일자리를 구해보려고 서울로 왔었

다. 그러나 일자리를 얻지도 못하고 배가 고파 어느 집 담을 넘었노

라 했다. 담을 넘은 그는 부엌까지는 들어갔었는데 방으로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는 방으로 들어갈 방도가 없을까 궁리하다가

그릇된 꾀를 쓰게 됐다.

그는 부엌에서 연탄을 새로 갈아넣고는 안방문을 조금 열었다. 찬장

에서 부채를 하나 찾아내서는 새 연탄에서 나오는 연탄가스가 방 안

으로 들어가도록 부채질했다. 방 안에 자고 있는 사람들이 연탄가스

에 중독돼 의식을 잃으면 방 안으로 들어가 마음껏 훔칠 생각이었

다.

그러나 그 생각이 제대로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빈 속에다 얼었던

몸으로 불 곁에 앉아 있으려니 졸음이 왔다. 처음에는 부채를 든 채

꾸벅꾸벅 졸았으나 얼마 후에는 아예 잠이 들어버렸다. 밤중에 그

집의 주부가 연탄불을 갈려고 부엌으로 나왔다가 질겁을 했다. 시커

먼 남자가 부채를 손에 쥔 채 부뚜막에 누워 잠들어 있는 것을 봤으

니 말이다. 남편을 깨우고 파출소에 전화를 걸어 경찰이 왔다. 그 자

리에서 오랏줄에 묶여 경찰서를 거쳐 서대문구치소까지 오게 된 것

이다. 그의 죄명은 엄청나게도 집단살인미수에 절도미수였다. 연탄가

스로 일가족을 몰살하려 했다 하여 그런 죄명이 붙은 것이다.

그는 지능이 평균보다 조금 낮은 사람이었다. 머리가 좋은 사람이

꾀를 써야지 머리가 나쁜 사람이 꾀를 쓰니까 일이 제대로 될 리 없

었다.

이상이 나와 같은 방에 살게 된 죄수들의 프로필이었다.

감옥 안의 빈부 격차

그들과 함께 지내며 놀란 점은 감옥 안에도 빈부격차가 심하다는 사

실이었다. 감옥에서는 돈을 사용할 수 없기에 물물교환이 성행했다.

치약 비누 미원 등이 화폐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좁은 방에서 부자는 치약을 자루에 가득 쌓아두고 있

는 반면 어떤 죄수는 치약이 없어 손가락으로 양치질을 하고 있었

다. 또 한 죄수는 비누를 2박스나 가지고 있는데 다른 한 죄수는 비

누가 없어 맹물에 빨래를 하고 있었다.

코딱지만한 방에서 서로 얼굴을 맞대고 살아가는 처지에 돈 있는 죄

수들은 끼니마다 불고기 사식을 들여다 먹는 반면 시골에서 올라온

가난한 죄수들은 냄새만 맡고 지냈다. 그러니 자연히 불화가 생기고

다툼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말로 시작된 다툼이 곧장

주먹다짐으로 이어지곤 했다. 워낙 좁은 방이라 싸움 말리는 내가

얻어맞기 일쑤였다.

마치 2평이 못 되는 방이 한국사회의 축소판 같았다. 한국사회에도

빈익빈 부익부(貧益貧 富益富) 현상이 날로 심해지고 있는데 이 좁

은 감방에서조차 빈부 갈등을 겪어야 하는 것이 못내 답답했다. 나

는 생각다 못해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여러분, 우리 이 방에서 한 번 멋진 정치를 해봅시다. 청와대에서

도 못 하고 장군들도 못하는 정치를 해봅시다』

『예? 정치를 하자구요. 뭔 정치를 어떻게 하자는 거요?』

『공동체 정치라 부를 수 있겠습니다. 우리나라는 지금 부자들과 가

난한 사람들의 사이가 점점 벌어지고 있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그

걸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라 말하지요. 부자들과 가난뱅이들의

사이가 많이 벌어지면 거기서 불평등사회가 됩니다. 그러니 우리 이

방에서 네 것 내 것이 없이 모두가 우리 것이 되는 공동체를 이루어

보자는 생각입니다. 통장에 돈이고 치약이고 비누고 무엇이든 전부

공동의 소유로 하고 함께 쓰자는 것입니다』

『2012번, 당신 평양에서 온 사람 아니오?』

나의 그런 제안에 모두들 내 얼굴을 보며 조용히 있었다. 돈이 제일

많은 사기꾼 실장 아저씨가 심히 못마땅하다는 투로 말했다.

『2012번, 당신 혹시 평양서 온 사람 아니오? 혹시 반공법(反共法)

관계로 들어온 거 아니슈? 말하는 거이 퍽 수상하외다』

『그런 점은 안심하십시오. 나는 평양서 온 사람도 아니고 물론 반

공법에 걸려 들어온 사람도 아닙니다. 나는 활빈교회라는 교회의 전

도사입니다. 그러니 사상에 대해서는 염려 안하셔도 됩니다』

『전도사든 뭣이든 그 말하는 것이 수상하외다. 언제 빨갱이들이

「나 빨갱이요」 하고 얼굴에 빨간 칠 하고 다니는 거 봤소? 이 방

에서 다시는 그런 말 마시유. 한 번만 더 그런 말 하면 내가 간첩신

고 하갔시다. 간첩신고 하면 보상금이 얼만지 선생께서도 알고 있갔

지요?』

재산을 합하자니까 위협을 느낀 모양이었다. 나는 내 제안이 쉽사리

받아들여질 분위기가 아님을 느끼고는 말했다.

『나의 제안이 얼른 이해가 안 가시는구먼요. 어렵게 복잡하게 생각

할 것 조금도 없습니다. 우리가 한 부모에게서 자란 형제들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여기서 나이가 제일 많은 분이 맏형이고 제일 어

린 분이 막내가 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한 형제, 한 가족이 돼 있으

면 같이 먹고 없으면 같이 굶는 것입니다. 지금은 치약 한 통 가지

고도 서로 다투고 미워하며 지내는데 그렇게 한 살림으로 합하면 다

같이 부자가 되는 겁니다』

『부자 좋아하시네. 당신 예수쟁이 아니랄까 봐 말 하나는 잘 허시

네. 당신이 그런 생각이면 당신 것이나 먼저 내놓으시구려. 예수쟁이

들은 말만 번지르르 하다니까』

『물론 제것을 내놓지요. 내것을 내 놓아서 없는 사람에게 주는 것

은 구제하는 것이고, 이 방의 모두가 있는 것을 다 내놓고 하나로

합하는 것은 공동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구제와 공동체는 완전히 다

릅니다. 구제는 있는 사람들의 자기 만족이 되기 쉬운 것입니다. 그

러나 공동체를 이루어 나가는 것은 있는 편과 없는 편이 다 함께 참

여하는 것이니까 완전히 차원이 다릅니다』

열심히 설득하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이런 제안이 받아들여지려면

먼저 인간적인 신뢰가 쌓이고 마음속을 터놓을 수 있는 대화가 이루

어질 수 있어야 함을 느꼈다.

그런 대화가 있은 지 며칠 후에 좋은 기회가 왔다. 전남 신안에서

올라온 「미스터 연탄」이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는 지능이 조금

낮은 데다 짜임새가 없어 자신의 몸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

싹트는 감방 우정

그런 그가 감옥에 들어왔으니 아무도 그를 도와주지 않았다. 그 해

는 추위가 빨리 왔다. 감옥에서 동복이 지급되기 전에 기온은 영하

로 내려갔다. 다른 죄수들은 가족들이 솜옷이나 내의며, 담요까지 들

여줘 추위에서 자신을 지켜나갔으나 그는 그렇지를 못했다.

홑옷을 입고 내의도 양말도 없이 떨다가 발에 동상이 걸렸다. 동상

에 걸리면 가려움이 심하다. 절제력이 없는 그는 가려운 자리를 긁

고 만지기를 계속하다가 상처가 나고 그 상처에 균이 들어가 덧나게

됐다. 오른쪽 발가락부터 검은 색을 띠기 시작하더니 발등이 부어오

르는 증세가 심상치 않았다. 나는 염려스러워 병실에 가서 진찰을

받아보라고 일렀다. 그가 다녀와서 풀이 죽어 말했다.

『발에 균이 들어가 썩는대요. 잘못하면 잘라야 한대요』

그러고는 머리를 벽에 댄 채 훌쩍훌쩍 울고 있었다. 그러는 그가 불

쌍했다. 두 다리를 가지고도 못 살아 감옥까지 들어왔는데 다리 하

나를 자르고서 어떻게 살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입고 있던 솜옷을 벗어 입히고 내의와 양말 등을 나누

어 주고는 하루 3번씩 상한 다리를 마사지하며 기도했다. 따뜻한 물

을 한 주전자 달라고 해서 수건을 적시고는 상처에 찜질을 하며 기

도했다.

『하나님, 이 젊은이를 도와주십시오. 이 다리를 자르지 않도록 치료

하여 주십시오』

하루 3번씩 그렇게 기도하기를 8일째 되니 상처 부위의 색깔이 변하

고 있었다. 검은색을 띠고 있던 부분에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나는

무언가 내부에서 변화가 있음을 느끼고는 그에게 말했다.

『이 사람아, 지금 피부 색깔이 달라지고 있어. 세포가 살아나고 있

는 것 같아. 병실에 다시 가서 진찰해 보게. 잘하면 다리를 살릴 수

있을 것도 같은데』

그를 떼밀다시피 해 병실로 보냈더니 2시간 가량 지난 후에 돌아왔

다. 방에 들어와서는 아무 소리없이 내 앞에 무릎꿇고 앉더니 두 손

을 바닥에 짚은 채 눈물만 줄줄 흘리고 있었다. 우리는 의아스러워

물었다.

『왜 그래? 왜 말 없이 울고만 있는가? 의사가 뭐라 그랬어? 다리

잘라야 한대?』

그는 한동안 그러고 있더니 더듬거리며 말했다.

『선생님 고마워요. 내 다리 살았대요. 다리 안 잘라도 되겠대요. 선

생님 정말 고마워요』

그가 그렇게 말을 하며 눈물을 훔치니 방의 식구들 모두가 환성을

질렀다.

『야! 굉장하구나 다리가 살았다고! 2012번 센데! 들어올 때 「개

털」인 줄 알았는데 지내보니 완전히 「범털」이잖아』

감옥에서는 약하면 「개털」이라 하고 세면 「범털」이라 불렀다.

개털보다 더 약하면 「쥐털」이라 하고 범털보다 더 세면 「용털」

이라고 했다. 젊은이의 다리를 살리는 것을 보고 방 식구들이 나를

범털로 인정한 것이다. 나는 그에게 진심으로 위로해주었다.

그런 일이 있은 날 오후부터는 방 분위기가 달라졌다. 싸움도 줄어

들고 서로 위로하는 말이 늘어났다.

7형제의 탄생

그날 밤 취침나팔 소리를 들으며 잠자리에 들었다. 역시 모로 눕는

칼잠을 자는 것이다. 잠자리에 누워 막 잠이 들려는 참에 내 곁에

누워 있던 실장 아저씨가 말을 걸어왔다.

『2012번 선생 주무세요?』

『아뇨. 아직 안 잡니다』

『선생님하고 함께 있으니 배우는 게 많습니다』

『그러세요. 저도 배우는 게 많습니다』

『선생님, 처음 들어오셔서 한 말 기억나세요?』

『무슨 말인데요?』

『거 왜 네 것 내 것 따지지 말고 같이 쓰자고 했던 얘기 말입니

다』

『기억나고 말고요. 지금도 그렇게 하고 싶어서 늘 기도하고 있습니

다』

『저도 생각을 해봤는데요, 까짓거 밑져야 본전이니까 한번 해보자

는 생각이 드는데요. 선생님이 좋으시다면 저도 적극 호응하겠습니

다』

나는 그 말에 벌떡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좋―습니다. 쇠뿔은 단김에 빼랬다고 당장 시작합시다』

그 방의 다른 사람들은 이미 다 찬성하는 분위기였다. 제일 부자인

그만 반대하는 입장이었는데, 젊은이의 다리 사건으로 자극을 받은

모양이었다.

나는 그의 마음이 변해 딴소리하기 전에 잠자리에 든 모두를 깨웠

다.

『모두들 일어나세요. 자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모두가 영문을 모르고 일어났다.

『김선생님 왜 그러세요. 뭐 나쁜 일이라도 생겼나요』

『아뇨. 다 합치는 겁니다. 통장에 돈도 치약도 비누도 모두 합하여

이제 한 형제로 한 살림을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고 내 것부터 다 털어 내놓으니 모두가 따라주었다. 그

렇게 되니 다음날부터 방 분위기가 달라졌다.

사람 사는 일에서 소유관계가 바뀌면 인심이 바뀐다. 물질이 하나가

되면 마음이 하나로 모이게 되고 또 마음이 하나가 되면 물질도 하

나로 모이게 된다. 그래서 다툼과 원망도 줄어들게 된다.

우리 7명은 한 부모 밑에 자란 7형제처럼 돼 나이 순서대로 형과 동

생을 정하고 화목한 분위기로 바뀌게 됐다. <다음호에 계속>

방 안에서 식구들 사이에 공동체가 형성된 이후 싸움이 줄어들고 서

로 위로하는 분위기로 바뀌어갔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어느날 절도

범이 내게 요청했다.

『선생님은 밤낮 성경을 보고 계시는데, 혼자서만 보시지 말고 우리

에게도 성경 이야기를 좀 해주시지요』

내게는 더없이 반가운 요청이었다. 나는 좌중을 돌아보며 물었다.

『김씨가 성경이야기를 해달라고 하시는데 어떠세요? 다른 분들도

원하십니까? 다같이 원하신다면 저는 좋습니다』

모두가 좋다고들 해서 나의 옥중 성경강의가 시작됐다. 처음에는 주

로 구약성서에 나오는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들로 시작했다. 삼손의

러브스토리, 소년 다윗이 적장 골리앗을 쓰러뜨린 이야기, 기드온 장

군의 게릴라전 이야기, 다니엘 수상의 사자굴 이야기 등을 들려주었

다. 그런 이야기를 듣는 중에 그들은 흥미가 있었던지 바짝 다가앉

으며 말했다.

『성경 이바구 재미 있수다. 삼국지 뺨치는구만요』

『그러네요. 김선생 성경은 다른 목사들 성경과는 다르네. 옛날에 예

배당 가서 들을 때는 그런 재미가 없었는디. 김선생 성경은 책이 다

른가벼』

그들이 성경 이야기에 흥미를 나타내자 나는 조금씩 수준을 높여 성

경공부로 들어가도록 이끌었다. 십계명을 배울 때였다. 한 계명씩 차

근차근 설명하다가 마지막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열째

계명에 이르자 절도범이 나서서 말했다.

『김선생, 이건 곤란한데요. 이건 빼고 9계명으로만 합시다. 이렇게

되면 우리 직업이 없어집니다』

절도범이 그렇게 말하자 다른 사람들도 맞장구를 쳤다.

『그건 그려. 우리도 어엿한 직업이라고. 요즘 말로 물류업자(物流業

者)라고. 밤에 부잣집에 들어가 남아 쌓인 물건들을 가져다가 낮에

가난한 동네에서 쓰니까 그게 바로 경제의 흐름을 풀어주는 물류업

자 아닌가?』

다시 독방으로 옮겨지다

이런 이야기들이 오고가는 가운데 성경공부를 하다가 일요일이 돼

주일예배를 인도했다. 말하자면 옥중 교회가 이루어진 셈이었다. 서

로 이마를 맞대다시피하고 둘러앉아서는 설교를 시작했다.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것이 재미있었던지 한 동료가 말했다.

『김선생, 우리 이 방을 예배당으로 합시다. 김선생이 목사하고 날

장로 시켜주소』

이 말에 모두들 『와…』 하고 웃고 있는데 교도관이 다가와 의심스

러운 눈으로 방 안을 살피다가 지나갔다. 뱀 같은 눈으로 방을 살피

던 교도관이 사라지자 감방장이 말했다.

『거 눈알 굴리는 모양이 심상찮구먼―. 뭔 일이 있을 것 같은

디―』

그 말을 받아 다른 동료가 말했다.

『아―니, 예배 보고 웃고 하는 것이 뭣이 나빠서요? 일 생길 것 하

나 없어요』

예배 후에 그들은 느낀 바가 많다며 자주 예배를 드리자고 했다. 그

러나 옥중예배는 단 한 번으로 끝나고 말았다.

다음날 내가 독방(獨房)으로 옮겨진 것이다. 내가 일반수(一般囚) 방

으로 옮겨온 후로 죄수들과 머리를 맞대고 자주 토론하는 것을 본

교도관이 이를 수상히 여기고 중앙정보부에 보고서를 올렸고, 정보

부에서는 「그 선동꾼이 일반수들까지 의식화해서 무슨 사고를 낼지

모르니까 다시 독방에 격리 수용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해 서울

구치소로 통보를 보낸 탓이었다.

내가 갑자기 독방으로 옮겨지자 모두들 섭섭해했다. 짧은 기간이었

지만 정이 들어 눈물을 글썽이며 헤어짐을 아쉬워했다. 한 분이 떠

나는 나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김선생님은 꼭 성공하실 겁니다. 목사 하지 마시고 정치를 하세요.

정치해서 우리 같은 백성들의 한(恨)을 풀어주는 일 좀 해주세요』

그가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를 물어볼 기회는 없었지만 워낙

진지하게 말하였기에 오랫동안 잊혀지지를 않는다.

내가 독방으로 옮겨진 날은 74년 2월23일이었다. 유난히 추운 날씨

였다. 한방에서 여럿이 살아갈 때는 서로의 훈기로 추위를 덜 느꼈

으나 독방으로 옮겨오니 추위가 온몸으로 파고들었다. 더욱이 솜옷

과 내의를 「미스터 동상」에게 벗어주었던지라 홑옷을 입은 몸이

떨리기 시작하여 시간이 지날수록 감당할 수 없었다. 추위가 심해지

니 나중에는 뼈가 아팠다. 마치 바늘 한 움큼으로 뼛속을 쑤시는 것

같았다. 나는 견디기 너무 어려워 주님께 기도했다.

『주님, 이 추위를 도저히 견딜 수 없습니다. 도와주시옵소서, 이 추

위를 이기게 해주소서』

불의 기적

그러나 기도하고 기도하여도 추위는 가시지 않고 더욱 심하여질 따

름이었다. 나는 빈민촌 판잣집 지붕 아래서 지낸 한여름 더위를 생

각했다. 빈민촌 지붕들은 루핑으로 덮여 있었다. 기름 먹인 루핑지붕

에 태양이 내려쬐면 지붕 아래 방은 한증막이 된다. 아들 동혁이가

더위에 못 이겨 울던 생각을 했다. 또 철공소에서 화부(火夫)로 있었

던 때를 생각했다. 이렇게 뜨거웠던 기억들만 되새겨도 추위는 가시

지 않았다.

나는 성경을 펴들었다. 성경에 기록된 불에 관한 기록들을 읽으며

추위를 견뎌내려는 생각이었다. 출애굽기 3장에서 모세가 호렙산에

서 만난 불꽃더미에서부터 차근차근 불에 관한 말씀들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구약편에서 신약편으로 넘어와 사도행전 2장 첫부분을 읽을

때였다. 바로 교회가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던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

하는 부분이다.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이렇게 읽기를 시작하여 3절과 4절에 이르렀을 즈음, 나는 내 몸에

변화를 느끼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추위가 사라지고 온몸

에 훈훈한 기운이 돌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의아해서 내 몸을

여기저기 만져보았다. 몸에도 마음에도 아무런 이상이 없는데 온몸

과 방에는 따뜻함이 감돌고 있었다.

나는 손바닥으로 마룻바닥을 더듬어보았다. 마룻바닥이 마치 온돌방

처럼 따뜻하기만 했다. 계속하여 벽의 4면을 손으로 더듬어 보았다.

4면 모두가 마치 스팀이 들어오는 듯 따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어

리둥절해진 나는 도대체 어찌된 영문인지를 생각했다. 혹시 내가

「불」 「불」 하다가 자기최면에 걸린 것은 아닐까 하는 의혹이 솟

았다.

동상이 치유되다

대학 시절 나의 전공은 철학이었지만 유달리 심리학에 관심이 많았

던지라 심리학 책들을 많이 읽었다. 형님이 정신병 환자여서 많은

시달림을 받았던 나는 심리학 중에도 「이상심리학」 분야에 관심이

많았었다. 그 시절에 읽었던 이상심리 현상 중에 자기최면에 관한

이론이 생각났다. 사람이 어느 분야를 골똘히 생각하다 보면 스스로

최면이 걸려 정상상태를 벗어난 이상심리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예를 들어 가임신의 경우가 그것이다. 임신하기를 간절히 원하는 여

인의 경우인데 실제는 임신이 아닌데도 신체적인 증세는 꼭 임신과

같다. 월경이 중단되고 입덧을 하고 달이 차면 배가 불러 온다. 임신

한 여인과 똑같은 증세가 뒤따른다. 이런 현상이 가임신이다.

나는 내 몸이 마냥 훈훈한 것이 혹시 가임신과 같은 자기최면의 상

태가 아닐까 하고 의혹이 떠올랐다. 그러나 나의 상태가 이상심리가

아니라 나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성령의 불이 내게 임한 것임을

알게 된 것은 나의 마음에 기쁨이 넘치면서부터였다.

어느 순간부터인지 넘치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 기쁨이 마치

시냇물처럼, 폭포수처럼 온몸에 흐르고 있었다. 그 흐르는 방향이 아

랫배에서부터 심장을 거쳐 목을 타고 흐르는 듯했다.

그때서야 나는 불을 주시기를 구하였던 나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성령의 불이 내게 임하였음을 깨달았다. 감격에 넘친 나는 일어나

벽을 돌며 엎드려 절했다. 나의 주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방에 임

하셨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눈물을 주르르 흘리며 기도드렸다.

그날 저녁 취침 나팔소리에 맞추어 잠자리에 들었던 나는 다시 한

번 큰 은혜를 체험했다. 처음 구속된 지 한달여 동안 밤마다 눈길을

밟으며 중앙정보부에 불려갔던 나는 결국 심한 동상에 걸리고 말았

다. 두 발 모두 동상에 걸려 밤마다 이부자리에 들면 발가락들이 가

렵기 시작했다. 동상이란 것이 추울 때는 별로 느껴지지 않다가 이

부자리에서 발이 녹으면 가려워지기 시작한다. 나는 밤마다 발을 긁

다가 잠이 들곤 했었다. 그러다 보니 열발가락이 부어오르고 발바닥

까지 부어 걸을 때마다 무척 아파왔다.

그런데 낮 동안에 성령의 불을 체험했던 2월23일 그날의 잠자리에서

는 발이 가렵지 않았다. 밤마다 발을 긁던 일에 익숙했던 나는 이상

히 여겨 일어나 불빛에 발을 비쳐보았다. 그랬더니 동상 증세가 말

끔히 사라진 깨끗한 발이었다. 신기함을 느낀 나는 거듭 양손으로

발가락들을 만지다가 하나님께서 낮 동안에 불로써 나와 함께하였을

때에 동상을 깨끗이 치유해주셨음을 깨달았다.

그렇게 깨닫고 나니 너무나 세밀하신 예수님의 배려에 감격이 넘쳐

왔다. 낮 동안에 느낀 감격보다 더한 감격이 내 마음을 휘감았다.

나는 전공이 철학인데 그 중에서도 논리학에 몰두하였던지라 무슨

일이든 따지기를 좋아했고 또 합리적이고 논리적이지 않으면 잘 승

복하지 않는 기질이 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일에도 믿음에 합리

성이 있고 상식을 존중하는 신앙이어야 한다는 것이 평소의 지론이

다. 그런 나를 잘 아시는 성령께서 나에게 부인할 수 없는 확실한

증거를 보여주시려고 발의 동상까지 말끔히 고쳐준 것이라 생각했

다.

그래서 성령의 깊은 배려에 너무나 감사하고 그 감사가 감격으로 바

뀌어 나 자신을 주체하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끓어오르는 감격에 어

떤 리듬이 있는 것 같았다. 감격의 흐름이 밀물처럼 확 밀려들었다

가 썰물처럼 빠져나가곤 했다. 밀물처럼 밀려들 때는 온몸이 공중에

뜨는 듯하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갈 때는 미끄럼을 타고 내려가는 듯

했다. 그런 감격의 오르내림에 심장이 벅차 나는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찬송가를 소리 높여 불렀다.

나는 목이 터져라 불렀다. 그랬더니 교도관이 득달같이 달려와 방안

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2012번 조용히 해, 알 만한 사람이 왜 그래』

감옥에서는 낮에도 노래할 수 없게 돼 있다. 그런데 모두가 취침하

고 있는 밤중에 찬송가를 불러대니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터였다.

나는 교도관의 호통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한 소절을 부르

고는 그에게 말했다.

『교도관님 죄송합니다. 양해하시라요. 성령님께서 내게 임하셔서 찬

송을 부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찬송을 부르지 않으면 제 심장이 터

지겠구먼요. 도리없이 찬송을 부를 수밖에 없겠습니다』

『2012번이 진짜 돌아버렸구먼』

내가 벅차오르는 감격을 억누르며 그렇게 말하자 교도관이 놀란 눈

으로 나를 보더니 오른쪽 손가락을 펴서 자신의 관자놀이께에 동그

라미를 그리며 말했다. 미친 사람을 나타낼 때의 표현이다.

『어떻게 된 게야? 2012번이 또라이 된 거 아냐?』

또라이, 즉 정신병자가 된 게 아니냐는 교도관의 말에 나는 즉각 답

했다.

『맞습니다, 교도관님. 제가 돌아버렸구먼요. 성령님 때문에 제가 돌

아버렸구먼요. 교도관님도 이 방으로 들어오세요. 우리 같이 돌아봅

시다』

내가 그렇게 말하며 쇠문으로 다가서니 교도관은 어이없다는 듯이

자기 자리로 가버렸다.

『2012번이 진짜 돌아버렸구먼, 아까운 사람 또 하나 버렸네』

그 밤에 나는 울다, 웃다, 손뼉치며, 찬송 부르기를 되풀이했다. 그러

는 사이에 날이 밝아왔다. 한밤을 통째로 새웠으나 피곤은커녕 몸이

날아갈 듯이 가벼웠다. 밤새 엔돌핀이 쏟아진 것이었을까?

배식구(配食口)로 아침밥이 들어오자 나는 금식할 마음으로 밥과 국

을 변기에 쏟아 버리고는 성경을 펴서 히브리서 12장 마지막 절을

읽었다.

점심 때 들어온 밥도 변기에 버리고는 성경을 펴서 고린도후서 5장

17절을 찾아 읽었다.

그날 오후 내내 성경을 묵상하다가 저녁밥이 들어오자 세 번째로 변

기에 쓸어넣고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읽고 기도를 드렸다.

『이제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습니다. 나의 야심도 나의 꿈도

내 장래도 죽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서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삶만 남았습니다. 저를 통째로 받아주시옵

소서』

그렇게 하루 세 끼를 금식하며 기도와 묵상으로 새로운 출발을 다짐

했다. 그후로 나는 지금까지 해마다 2월23일이 되면 금식한다. 74년

2월23일에 그런 은혜를 받은 이후로 지금까지 해마다 거르지 않고

지켜왔다. 매년 2월23일에 금식하며 74년 그날 경험하였던 바를 돌

이키며 그날 읽었던 성경말씀들을 다시 찾아 읽노라면 그날의 은혜

가 다시 임하는 듯한 감격을 느낀다. 지금까지 그러했던 것처럼 앞

으로도 계속할 것이다. 내 평생에 그렇게 감격스러운 날이 있었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큰 축복이었다.

감옥에서 만난 시인 윤동주

3월에 접어들자 수사도 종결되고 추위도 물러가 옥살이가 한결 쉬워

졌다. 다만 옆구리의 통증에 시달리는 것 외에는 불편함이 없어 성

경읽기에 집중할 수 있었다.

3월 어느날 나는 서대문 서울구치소의 9동 건물에서 이웃 동 2층에

있는 방으로 옮겨졌다. 새로 들어간 방은 0.7평의 좁은 방이어서 맨

손체조도 할 수 없었다. 그 방에 들어간 날 벽의 사면을 찬찬히 살

피노라니 한편 벽에 분명히 피로 쓴 것 같은 세 단어가 있었다.

「진리(wahrheit)!」 「자유(Freiheit)!」 「정의(Gerechtigkeit)!」

이 방에 먼저 살다 간 어느 선배 정치범의 필적일 것이다. 누구였는

지는 알 길 없지만 그분의 앞길에 「진리」 「자유」 「정의」가 깃

들이기를 비는 마음이 일어 잠시 묵념했다.

그리고 맞은편 벽에는 한편의 시가 기록돼 있었다. 이미 오랜 세월

에 바래져 알아보기 힘겨운 글씨였다. 나는 잘 보이지 않는 글자들

을 더듬으며 읽어 내려갔다. 윤동주 시인의 서시(序詩)였다. 간도땅

용정에서 태어나 민족의 비극을 한 몸에 안고 살다 일본 땅 후쿠오

카(福岡) 감옥에서 숨을 거두었던 시인 윤동주의 시였다.

한 자 한 자 읽는 중에 29세 나이로 침략자의 땅에서 한을 품은 채

죽어가던 날의 그 마음이 내게로 전해오는 듯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시는 여기서 멈춘 채 마지막 연인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

다」가 빠져 있었다. 아마 이 시를 쓰던 어느 선배 수인(囚人)이 기

억을 더듬어 써나가다가 이 마지막 연을 기억해내지 못했으리라. 나

는 끝연을 채워넣고 싶었으나 쓸 도구가 없었다. 옥중에서는 필기도

구를 소지할 수 없었다. 정치범들에게는 특별히 금지되고 있었다. 그

러나 나는 마지막 연을 꼭 기록해 두고 싶었다.

궁리 끝에 잉크를 제조키로 마음먹고 밥을 담아온 알루미늄 그릇을

벽에 문질렀다. 알루미늄 가루가 바닥에 떨어졌다. 떨어진 가루들을

모아 그릇에 담고는 거기에 오줌을 누어 갰다. 알루미늄 가루는 검

은 빛을 띤 잉크가 되었다. 잉크는 그렇게 하여 마련됐으나 그 잉크

를 찍어 쓸 펜이 문제였다. 생각 끝에 나는 칫솔 손잡이를 벽에 문

질러 뾰족하게 만들었다. 아쉬운 대로 펜이 만들어졌다. 나는 칫솔

펜에 오줌잉크를 묻혀 윤동주 시의 마지막 연을 벽에 써넣었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비둘기 날리기」 작전

다음날 감시 창구로 한 죄수가 들여다보며 『성직자님이십니까?』

하고 묻기에 고개를 끄덕였더니 쪽지 하나를 던져주고는 급히 사라

졌다. 우리 같은 정치범들에게는 일반죄수들의 접근이 금지돼 있었

기에 그로서는 큰 모험을 한 것이다.

정치범들은 일반 죄수들과는 달리 가슴에 특별한 표식을 붙이고 다

녔다. 플라스틱으로 된 노란색 삼각형이었다. 이 노란색 마크는 원래

는 정신병 환자들이 붙이는 패찰이었다. 간첩과 반공법 위반은 붉은

색, 사형수는 푸른색, 정치범과 정신병 환자들은 노란색이었다. 정치

범은 말하자면 정신병자로 구분된 셈이었다.

나는 방 가운데 떨어진 쪽지를 주워 읽었다. 『보시고 찢어 버려주

세요』로 시작되는 글에는 먼저 자신들에 대한 소개가 있었다. 자신

들은 반공법 위반범, 절도범, 과실치사범, 폭력범, 강도범 다섯인데

서로 의형제를 맺어 형제로 지내고 있다. 자기들끼리 성경을 읽다가

은혜를 받고 예수를 믿기로 결의하였다. 그런데 막상 예수를 믿기로

했으나 어떻게 해야 제대로 믿는지를 모르겠으니 지도해 달라는 내

용이었다.

나는 칫솔로 만든 펜에 오줌잉크를 찍어 그들을 격려하는 글을 쓰고

이어서 신앙생활에 기초가 되는 사항들을 썼다. 그러나 그 글은 전

할 기회를 얻지 못해 며칠을 고심하다가 아침 세면시간을 이용키로

했다.

아침마다 방별로 문을 따주면 세면장으로 나가 열을 세는 동안에 세

수를 마친다. 열을 세는 속도가 워낙 빠른지라 손에 물을 담뿍 받아

얼굴에 끼얹고는 돌아서야 한다. 어물거리다가는 불호령이 떨어졌다.

모두가 서두르기에 극히 혼잡했다. 이 틈을 타서 우리는 서신을 주

고받는 데 성공했다. 감옥에서는 비밀서신 주고받는 일을 「비둘기

날린다」고 한다. 나는 수차례 비둘기를 날려 그들의 신앙성장을 도

왔다. 그들의 신앙이 조금씩 자라는 것을 그들의 얼굴에 나타나는

화색(和色)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흔히 교도소생활을 일컬어 「콩밥 먹는다」고 하듯이 감옥에서는 실

제로 콩밥이 급식됐다. 콩과 보리가 섞인 콩보리밥이었다. 그런데 밥

에 섞인 콩이 너무 많아 나는 제대로 다 먹을 수가 없었다. 옆구리

의 통증으로 몸이 거북하고 신체기능이 떨어지면서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끼니마다 채 먹지 못하고 버려지는 콩들이 아까웠다. 그래서

이 남겨지는 콩들, 말하자면 잉여농산물을 활용할 길이 없을까를 생

각했다. 그러던 터에 창 가까이에 있는 나무에서 놀고 있는 비둘기

들을 보게 되었다. 버려지는 콩으로 저 비둘기들을 기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식사 때 나는 콩을 골라두었다가 창 밖

벽돌 위에 가지런히 놓고 비둘기들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처음 이틀은 비둘기들이 관심을 기울이지 않더니 사흘째 들어 비둘

기들이 날아들기 시작하였다. 나는 방 한구석에 몸을 숨기고는 비둘

기들이 경계심을 품지 않게끔 마음을 썼다. 그리고 매일 조금씩 비

둘기들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기를 되풀이하였더니 드디어 내가 창

문가에 서 있어도 비둘기들이 날아가버리거나 두려워하지 않게끔 되

었다.

비둘기들이 나를 나쁜 사람, 우리를 해칠 사람은 아니로구나 신용하

게끔 된 것 같았다. 그런 뒤로는 내가 식사를 마치고 골라낸 콩을

창문 밖에 놓으며 『구― 구―』 하고 부르면 비둘기들이 날아와서

콩을 먹게끔 친해졌다.

민혁(民革)과 민애(民愛)

그렇게 날아드는 비둘기들 중에 한쌍인 듯한 2마리가 특히 나와 친

해졌다. 그들은 내가 곁에 있어도 아무런 두려움 없이 콩을 쪼아 먹

곤 했다. 그들이 콩을 먹는 동안에 나는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비둘기들아. 나 대신에 청계천 빈민촌으로 가서 우리 교회 교인들

가정방문을 좀 해주겠니. 내가 가야 하는데 보다시피 그럴 처지가

못돼서 그런다』

내가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 비둘기들은 꼭 알아듣기라도 했다는 듯

이 『구구…』 하고 반응을 보였다. 다음날 비둘기들에게 물었다.

『비둘기 부부야. 어제 청계천으로 가정방문 다녀왔니? 교인들도 주

민들도 잘 있던?』

그렇게 물으면 비둘기들은 역시 잘 다녀왔다는 듯이 『구구』 했다.

나는 비둘기 부부에게 『비둘기야』 하고 부르는 것이 마땅치 않아

이름을 지어주기로 했다.

남편 비둘기에게 민혁(民革), 부인 비둘기에게 민애(民愛) 그리고 그

들의 성은 나를 따라 경주 김씨로 정했다. 그리하여 우리 셋 김진홍,

김민혁, 김민애는 한 가족이 되었다.

비둘기 부부의 이름을 이렇게 지은 것은 「민혁」과 「민애」가 당

시에 내가 사색하던 주제였기 때문이다. 한국교회가 겨레와 백성들

을 위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일까? 그것은 백성들을 사랑

하는 것, 바로 민애(民愛)였다.

그런데 백성들을 어떻게 사랑하는 것인가? 백성들을 바르게 사랑하

는 길은 무엇일까? 다름 아니라 백성들 스스로가 깨닫고 스스로 일

어설 수 있도록 깨우치는 것이다. 바로 백성들의 생각이 바르게 설

수 있도록 이끄는 일, 곧 민혁(民革)이다. 그래서 이 시대에 한국교

회가 겨레와 백성들을 위하여 해야 할 바의 핵심이 민애와 민혁의

사역이다. 당시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비둘기 부부의 이

름을 그렇게 지었다.

그리고 앞으로 내가 옥에서 풀려나가 자식을 낳는다면 아들은 민혁

(民革)이라 이름 짓고, 딸이면 민애(民愛)라 이름 짓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아들과 딸을 하나씩 낳아 민혁과 민애라 이름짓

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1년 남짓 후에 석방됐고 81년에 아들을 낳았다. 두말할 것

없이 이름을 민혁이라 지었다. 2년 후에 다시 아이를 낳았는데 꼭

딸이기를 바랐다. 왜냐하면 민애란 이름 때문이었다. 그런데 막상 아

기를 출산하고 보니 실망스럽게도 아들이었다. 태어난 아기가 아들

인 것을 보고 실망한 나는 무심결에 아내에게 『젠장 딸을 낳았어야

하는데…, 또 아들이면 곤란한데…. 낳으라는 딸은 안 낳고 왜 아들

만 자꾸 낳는거냐』고 투덜거렸더니 몹시 섭섭해했다. 그러나 낳은

아들을 이름을 지어야겠는데 민애는 남자의 이름으로는 곤란하기에

도리없이 그 순서를 뒤집었다. 애민으로 하면 남자이름으로도 괜찮

을 것 같았던 짓이다. 그래서 그 아이는 이름이 김애민(金愛民)이 되

었다.

지금 민혁이는 고2이고 애민이는 중3이 되었다. 나는 형제가 자라는

모습을 보며 지금도 민혁과 민애의 뜻을 생각하곤 한다. 내가 지금

은 농촌에서 농민들을 위해 일하고 있기에 농민들을 사랑하는 민애

의 길과 농민들을 제대로 사랑하는 방편인 민혁에의 길을 생각하곤

한다.

이런 생각들이 쌓여 그 구체적 실천방안인 농업공동체 「두레마을」

을 세웠다. 농민들 속에서 민혁·민애를 실천하는 현장이라 할 공동

체 마을이었다. 79년에 처음 세웠다가 1년 만에 실패하고 다시 7년

을 준비하여 86년에 2차로 시작하였다. 농업공동체인 두레마을은 12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자립의 발판을 쌓게 되었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안양교도소 생활

비상보통군법회의에서 15년형을 받은 나는 비상고등군법회의에 항소

했다. 그러나 비상고등군법회의의 공소심 재판도 기각되었기에 우리

는 대법원에 상고(上告)했다.

그 후 우리는 안양교도소로 이감되었다. 안양교도소에서는 2012번에

서 73번으로 바뀌었다. 안양교도소에 도착한 다음날, 한 교도관이 방

으로 와서 크리스천이냐고 묻기에 그렇다고 대답하였더니 시편 138

편 7~8절을 읽으라고 권하고는 사라졌다. 나는 도대체 시편 138편

7~8절이 무슨 내용이기에 일부러 찾아왔는가 생각되어 읽어 보았다.

『내가 환난중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를 소성케 하시고 주의 손을

펴사 원수들의 노를 막으시고 주의 오른손이 나를 구원하시리이다.

여호와께서 내게 관계된 것을 완전케 하실지라. 여호와여 주의 인자

하심이 영원하오니 주의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옵소서』

나는 이 말씀을 읽고 큰 격려를 받았다. 당시에 내가 옥중에서 가족

과 교우들에게 보냈던 서신 중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기상나팔 소리에 일어나 청소와 점호를 끝낸 후 성경읽기와 묵

상으로 시작되는 나의 일과는 하루하루가 많은 열매를 얻고 있습니

다. 이번 기간을 주님께서 앞날에 나를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으로

만드시려고 마련하신 기회인 줄로 알고 심신을 갈고 닦기에 정진하

고 있습니다. 동료들 중에는 징역살이의 고달픔을 말하고 석방될 때

를 초조히 점치기도 합니다만 나는 석방시기에 대하여는 초조해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이번을 나를 훈련시키는 기회로 삼

으신다면 석방의 시기도 사람들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정하신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48장 10절을 나의 신앙

고백으로 적습니다.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

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에서 택하였노라」

위에 인용한 서신의 한 구절에 나타나 있는 것과 같이 나는 감옥생

활을 여호와께서 허락하시는 연단의 풀무라 생각하였기에 잘 순응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는 중앙정보부에서의 조사중에 입은 상처인 옆

구리의 통증이 점차 심해지는 것과 이로 인한 소화불량이었다. 체중

이 40kg 아래로 내려가고 건강상태가 위험 수위에 이르게 되었다.

동료들은 내가 혹시나 「뒷문 출소」하게 되지나 않을까 염려하였

다. 뒷문출소란 감옥에서 죽은 사람들이 앞문으로 나가지 않고 뒷문

으로 실려나가는 데서 생긴 말이다.

그때 동료들이 내게 붙인 별명은 「미스터 비아프라」였다. 아프리

카 비아프라 지방은 기근으로 인해 굶어죽는 사람들이 많아져 세계

에 알려졌다. 내가 비아프라의 굶주린 사람들처럼 야위었다고 해서

붙인 별명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의 건강문제에 대하여 이

미 가장 좋은 길을 마련하여 놓으셨다.

요가로 병 고치다

하루는 정치범 몇 명이 안양교도소로 들어왔는데 그중 한 명이 내

방에 배치되었다. 중요한 정치범들은 독방수감이 원칙이었으나 긴급

조치 발동으로 인하여 정치범들 숫자가 늘어나자 각방으로 후배 정

치범들이 배치된 것이다. 내 방에 들어온 그는 20대 후반의 김용상

이란 젊은이였다. 그가 내게 인사하는 자리에서 나의 얼굴을 살펴보

더니 어디가 불편한지 물어왔다.

『조사과정에 조금 무리가 있어서 왼편 옆구리를 다쳤는데 통 풀리

지를 않는군요』

『아, 그래요 염려하지 마십시오. 제가 책임지고 회복시켜드리겠습니

다. 제가 하자는 대로만 따라 해주십시오. 일개월이면 거뜬히 회복될

것입니다』

『직업이 의사입니까?』

『아닙니다. 의사는 아니지만 의사 위에 있는 사람입니다』

『의사 위에 있으면 수의사겠네요?』

『아닙니다. 수의사라고 하니 듣기에 우습네요. 저는 요가 선생입니

다. 이번 사건에 관계된 것도 내가 서울대학교 학생들에게 요가를

지도하고 있었는데 그 학생들 중에서 전문운동권 학생들이 섞여 있

어서 엉겁결에 끼어 들어왔습니다. 제가 선배님이 회복되도록 지도

를 해드릴 테니 제가 하자는 대로 따라주십시오. 이제부터 건강문제

만큼은 제게 맡기시고 안심하십시오』

김용상군은 전주사람으로 전주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대학으로 진학

하지 않고 10년간 요가수행에만 전념한 사람이었다. 요가수행이 상

당한 경지여서 나에게 꼭 필요한 인물이었다. 당시의 나로서는 말하

자면 지옥에서 부처님을 만난 셈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그에게서 요가를 지도받았다. 요가의 효력은 빠르고

정확했다. 그를 따라 요가수행을 시작한 지 20여일이 지나니 옆구리

의 통증이 줄어들고 소화능력이 높아지더니 1개월여가 지난 후에는

교도소에서 주는 규격밥(가다밥이라 부른다)으로는 배가 고플 정도

였다. 요가를 시작하기 전에는 절반도 못 먹고 남겼던 밥이었다. 그

리하여 나의 체력은 급속도로 좋아지고 매일 운동시간에 달리기를

계속하면서 건강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감방 안의 동성연애

우리 정치범들은 가끔씩 일반수들 방으로 들여보내 며칠씩 지내게

하였다. 안양교도소에서도 한번은 일반수와 합방하여 지내게 되었다.

일반수들 방에 들어가 지내던 어느날 잠결에 이상한 소리를 듣고 눈

을 떠보니 옆자리 남자 둘이서 벗은 몸으로 엉겨 흥분된 분위기를

만들며 열을 올리고 있었다. 나는 그 장면이 바로 말로만 듣던 동성

연애인 것을 알고 신기하여 구경하였다. 바로 옆자리였던지라 관람

하기에는 특등석인 셈이었다.

남자들끼리 그러는 광경을 보고 있으려니 징그럽기도 하고 꼴불견이

었는데 막상 본인들은 그렇지 않은 듯했다. 당사자들은 무아지경을

헤매며 즐기고 있었다. 그런 중에 남자역을 맡은 분과 눈이 마주쳤

다. 그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사정조로 말했다.

『에―이, 김선생님 뭘 그리 보고 계세요 저쪽 보세요. 우리 김샙니

다』

『거 세금 안 나오는 구경 좀 합시다』

내가 고개를 돌렸더니 그들도 얼마 후에 마무리하고는 다시 잠자리

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 남자역을 맡은 이가 내게 사과를 했다.

『김선생님, 어제 저녁엔 수면을 방해해서 미안합니다. 이해해 주시

겠지요?』

『글쎄요. 난 그 방면엔 통 경험이 없어서…. 남자들끼리 그렇게 연

애를 하여도 재미가 있는지요?』

『아니, 73번 선생님은 아직 남자끼리의 재미를 모르십니까?』

『글쎄요. 장차 알게 될는지 모르겠지만 아직은 전연 경험이 없어서

요』

그는 내게 그 방면에 대하여 자상히 설명해주었다. 사람의 성적 교

섭에는 3가지가 있다. 첫째는 남녀간에 이루어지는 것, 둘째는 남자

와 남자, 여자와 여자 간에 이루어지는 것, 셋째는 사람과 짐승 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있다. 첫째는 가장 일반적인 경우이고 둘째인 동성

간의 경우는 성교가 이루어질 때의 모습이 마치 닭과 같다 하여 닭

계자를 쓴 「계간(鷄姦)」이라 부른다. 셋째는 사람과 짐승 간에 이

루어지므로 짐승 수자를 써서 「수간(獸姦)」이라 부른다. 이들 3가

지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이 수간이고 둘째로 좋은 것이 계간이고 마

지막이 남녀간의 관계이다. 그래서 교도소 같은 곳에서 계간을 배워

나간 사람들 중에는 부부생활이 시시해서 잘 안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해주었다.

나는 그에게서 그렇다는 말만 들었을 뿐이지 그런 분야에 관심이 있

을 턱이 없었다. 다만 그러려니 하고만 있었는데 옥중에서 일어나는

남자들만의 세계에서 애정관계의 심각함을 보고는 퍽 놀랐다.

한 예로 내가 교도소에 있는 동안에 남자들끼리 빚은 삼각관계로 살

인사건이 일어났다. 사건 경위는 이러하였다. 한 감방 안에서 한 여

자와 두 남자 사이에 삼각관계가 벌어졌다. 물론 다 남자들 사이의

이야기다. 여자가 끼가 있었던지 처음 남자를 버리고 다른 남자에게

로 갔다. 첫 남자가 눈에 쌍심지를 켜고 지켜보고 있으니 둘이서 사

랑을 나눌 수가 없어 둘은 전출운동을 하여 다른 방으로 옮겨가서

부부의 정을 나누었다.

혼자 남은 첫남자는 애인의 배신에 분노하여 보복하기로 마음먹었

다. 낮에 출역나갔던 기회에 길에서 큰 못 하나는 주워왔다. 그는 그

못을 비밀리에 갈고 갈아 송곳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기회를 노리던

중 매일 30분씩 허락되는 운동시간에 운동장에서 변심한 애인의 등

을 찔렀다. 못은 등에서 허파까지 닿아 여덟 번이나 수술했지만 죽

어버렸다.

또 한 번은 감옥 안에서 정사(情事) 사건이 일어났다.

「이 땅에서 이루지 못할 사랑 저승에서 맺고 살자」는 유서를 남기

고 남자역이 목매어 죽었다. 목을 매는 끈으로는 빵을 포장한 비닐

봉지를 사용하였다. 비닐봉지를 펴서 길게 늘이면 끈이 된다. 그 끈

을 여러 번 꼬면 아주 질긴 끈이 된다. 그 끈으로 남자역이 목을 맸

다. 그들이 한 방에서 밤마다 너무 요란스레 부부생활을 하니까 동

료들이 참다 못해 교도관에게 요청했다. 수면방해가 심하니 다른 방

으로 옮겨달라는 요청이었다. 교도소측에서는 둘을 한 방으로 옮겨

주지 않고 각각 다른 방에 수감했다. 그랬더니 남자역이 그리움을

못 이겨 유서를 남기고 자살한 것이다.

모두가 사랑에 굶주려 일어나는 질병이었다. 인간에게 비타민이 부

족하면 비타민 결핍증이 생기듯이 사랑이 부족하면 사랑 결핍증이

생긴다. 그런 사랑 결핍증 환자들은 정상적인 관계를 벗어난 비정상

적인 사랑을 찾게 된다. 그들을 일반적인 잣대로 매도하기 전에 먼

저 그들을 이해하고 치유해주려는 안타까움이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욕하기 시합

교도소에서는 자해행위(自害行爲)가 흔히 일어난다. 한 죄수는 바늘

로 자신의 눈을 꿰맨 일도 있었다. 이따위 세상 보기도 싫으니 아예

눈을 꿰매 보지 않겠다고 아래위 눈꺼풀을 바늘로 꿰매버렸다. 교도

관이 와서 꿰맨 실을 뽑아내느라 고생했다. 내 옆방의 장기수 한 명

은 자신의 발등에 못을 박기도 했다. 『아야― 아야―』 하고 소리

치기에 돌아보니 자기 발등에 못을 쳐서 마룻바닥에 박고 있었다.

꽤 깊이 박힌 못이 마루에서 뽑히지 않자 고통을 호소하게 되었다.

교도관이 와서 발등에 박힌 못을 뽑으려니 쉽지가 않았다. 당사자가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니 교도관은 그의 머리를 쥐어 박으며 『이 새

끼야, 아플 걸 모르고 박았어?』 하고 소리쳤다. 옆에서 보던 죄수가

『햐―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건 저리 가라네』하며 감탄했다.

죄수들은 자신들의 내면에 억압된 감성을 발산시킬 길이 없어 자신

을 해친다. 밖으로 울분을 터트리자니 어마어마한 사법조직이 있어

그 힘에 맞설 수가 없기에 애꿎게 자기 자신을 해쳐 감정을 푸는 것

이다. 죄와 고통으로 인해 본래의 모습을 상실한 인간은 자신 속에

스스로 지옥을 세우고 그 속에 갇혀 고통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

서 교도소란 곳이 다른 곳이 아니었다. 작은 지옥들을 한곳에 모아

큰 지옥을 이룬 곳이었다.

교도소에서 하루 중에 가장 엄숙한 시간은 취침나팔이 울릴 때였다.

이상스럽게도 교도소마다 취침나팔을 불 때는 꼭 찬송가를 불렀다.

찬송가 2장인 「전능왕 오셔서 우리를 다스려 주옵소서」란 곡이 잠

자리에 들 때에 울려퍼지면 듣는 이들을 숙연케 했다.

밤마다 취침나팔의 곡이 끝나면 여기저기에서 『어―머니』 하고 부

르는 죄수들이 있다. 그래서 나팔소리가 끝나고 어머니를 부르는 소

리가 들리는 시간에는 모두 진지한 얼굴이 되곤 했다. 어머니는 모

든 죄수들에게 잃어버린 고향이었고 때묻지 않았던 어린 시절의 상

징이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인간 내면에 깃들인 사랑과 정과 따뜻함

의 표상이었다. 아무리 삐뚤어진 인격도 어머니란 말 앞에서는 진지

하게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래서 나는 이 세상을 어머니들이 다스린다면 달라질 것이라 생각

했다. 어머니들이 다스리는 세계에는 감옥도 고문도 폭탄도 없으려

니 생각했다. 괴테가 『여성적인 것, 그것이 인류를 구원한다』고 하

였다지만 내 생각에는 『어머니적인 것, 그것이 인류를 구원한다』

고 함이 옳을 것 같다.

감옥에서는 시간이 지루하기에 가끔 욕하기 시합이 있다. 서로 마주

보는 방끼리 한 가지씩 욕을 해 욕거리가 떨어지거나 이미 나왔던

욕을 되풀이하는 편이 지는 시합이다. 옆에서 듣노라면 별의별 희한

한 욕들이 다 등장한다. 어떤 욕은 배꼽을 잡고 웃을 정도로 우스운

욕도 있는가 하면 듣기에 섬뜩할 만큼 한 잔인한 욕도 있다.

그런데 가끔은 욕거리가 딸리는 편에서 어머니에 관한 욕이 나올 때

가 있다. 『너 에미 ××다』 하는 식으로 어머니에 대한 욕이 나오

면 시합을 지켜보던 다른 방들에서 즉각 항의가 나온다.

『에―이, 니들 다른 욕은 좋은데 어머니 욕은 취소해― 그 판에 어

머니를 끌어들이진 말아―』

그러면 당사자들이 이를 받아들여 어머니에 대해 나왔던 욕은 취소

하고 다른 욕으로 대치시킨다.

이와 같이 어머니는 죄수들에게 있어서 마지막 남은 거룩한 부분이

었다. 인간의 이런 심리에 착안하여 가톨릭에서는 성모 마리아를 등

장시켰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교회가 할 바 중에 죄 짓고 방황하며 세상살기에 지치고 상처

받은 영혼들에게 어머니 역할을 해 주는 것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

었다. 방황에 지친 아들을 어머니가 품어주듯이 교회는 상처받은 영

혼들을 사랑으로 포용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머니가 가

진 힘은 사랑의 힘이요 사랑의 힘은 인류를 파멸에서 구원하여 낼

힘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바로 어머니들의

사랑과 통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정치범들의 단식투쟁

감옥에서의 겨울 추위가 견디기 어렵더니 여름 더위 역시 사람을 미

칠 지경으로 만들었다. 안양 교도소 2층은 시멘트 슬라브 지붕이어

서 덥기가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오후에 방에 앉아 있노라면 머리

가 띵해 오고 온 방이 빙그르르 도는 증세가 나타날 정도였다.

『롬멜 장군의 아프리카 전차대가 탱크 위에서 계란을 프라이해 먹

었다는데 우리도 더워진 천장에 계란을 던지면 프라이가 되어 떨어

질 것이 아니냐. 바닥에 그릇을 대고 받으면 멋진 요리가 될 것』이

라고들 말하곤 했다.

그런 와중에 안양교도소에 수감된 동료 정치범들에게서 단식투쟁을

하자는 제안이 나왔다. 유신체제 철폐, 언론자유 보장, 민주주의 회

복 등의 요구조건을 걸고 단식을 감행하자는 의견이었다.

이 제안에 대하여 찬·반이 반반으로 갈라졌다. 단식투쟁 찬성파는

민주주의를 위해 일하다가 이왕에 감옥까지 왔으니 끝까지 투쟁해야

한다는 주장이었고 반대파는 감옥에 있다는 것 자체가 투쟁이니까

감옥에 있는 동안에는 건강관리를 잘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투쟁

도 생산적인 방법으로 해야 하는데 이 어려운 조건에서 단식하여 건

강을 해치는 것은 비생산적이라는 생각이었다. 말하자면 단식투쟁

지지파는 강경파인 셈이었고 반대파는 온건파인 셈이었다.

나는 항상 온건파였다. 내게는 매사를 투쟁으로 끝장내겠다는 강경

파적인 기질이 없었다. 나는 모든 가치 있는 일의 성취는 점진적으

로 단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단식문제

에 있어서도 강경파 동료들에게 말했다.

『민주주의의 기초는 체력이다. 우리가 굶다가 병들거나 죽고 나면

민주주의는 누가 하느냐? 열심히 먹고 튼튼해야 민주주의를 일궈낼

수 있는 거다. 민주주의가 1~2년 안에 이뤄질 수 있겠는가? 30년은

잡아야 한다. 민주주의야말로 과일 나무와 같아서 촉성재배(促成栽

培)가 안 되는 거다. 10년, 20년 세월에 끈기있게 나가야 민주주의는

달성된다. 그러니 먹자. 왜 굶느냐』

나는 이렇게 열성껏 동료들을 설득하려 하였으나 잘 먹혀들지 않았

다. 어디서든지 강경파의 의견이 돋보이게 마련이다. 미성숙 사회일

수록 더욱 그렇다. 온건파는 수는 많지만 침묵하기에 입이 큰 강경

파의 주장이 대세를 이끌어가게 된다.

안양교도소 정치범들도 단식투쟁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결정이

된 다음 단식을 하되 얼마간 할 것이냐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강경

파의 입장을 우리들의 요구가 관철이 될 때까지 무기한 단식하자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나는 3일간만 단식하자고 주장했다. 그리고 사흘도 부담되는

사람들은 하루 이상만 단식에 동참하여 자기 체력을 스스로 조절하

여 알아서 하게 하자고 했다. 결사각오(決死覺悟)란 식의 극단론은

피하자고 했다. 그랬더니 한 친구가 내게 핀잔을 주며 말했다.

『진홍이, 넌 왜 늘 그렇게 타협적이냐? 그걸 바로 사쿠라 기질이라

고 하는 거다』

『글쎄 날보고 사쿠라라 하든 오쿠라라 하든 그건 상관 없어. 난 오

직 매사에 합리적으로 순리를 따르자는 거다. 내가 너희들 앞에서

사쿠라 소리 안 들으려고 내 주장을 굽힐 수는 없잖으냐? 그러나 꼭

내 주장대로 하자는 것이 아니고 각자 자기 입장과 주장을 밝힌 후

에 토론을 거쳐 투표로 결정하자는 거다』

이렇게 설왕설래한 후에 우리는 양편의 주장을 절충하여 타협안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3일간을 단식하되 본인이 원하는 자는 자기

사정에 맞추어 단식에 참여키로 했다. <다음호에 계속>

안양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우리 정치범들은 일제히 단식에 들어

갔다. 그러나 처음에 약속했던 3일간의 단식이 끝난 후에도 몇

몇 동료들은 단식윰ごÂ 그만 중단하라고 간곡히 권했으

나 막무가내였다. 나는 열을 내며 그를 힐책했다.

『이형, 도대체 언제까지 단식을 계속하겠다는 거요?」

『언제까지라고 기한이 정해진 것이 아니지. 박정희가 우리의

요구조건을 들어줄 때까지 하는 거지』

『우리의 요구조건이 뭔데?』

『민주주의 하는 거지』

『그렇다면 아까운 사람 죽어 나가겠네? 박정희가 얼마나 독한

사람인데, 몇 사람이 감옥에서 굶다가 죽는다고 민주주의 할

사람이오?』

『김형, 박정희가 어떻게 나오든 우리는 우리 할 일을 하는 것

아니겠소?』

『이형, 난 그렇게 생각지 않수다. 박정희를 이기려면 박정희보

다 더 오래 살아남아야 되는 것 아니겠어요. 그렇게 무리하다

가 건강 잃고 쓰러지면 박정희만 좋아할 거요. 악착같이 먹고

악착같이 살아남아 민주주의 세상 만들어봅시다』

그러나 이전도사는 요지부동이었다. 단식한 지 열흘이 지나자

걱정스럽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건강유지가 힘든 옥중에서

열흘 이상을 금식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그런 터에 교도소내의

의무실에서 그를 데려가더니 얼마 후에 그가 식사를 하고 들어

왔다. 나는 의심스러워 물었다.

『아니 이형 그럴 줄 알았으면 의무실로 진작 갈 것이지. 거기

가서 그렇게 쉽게 먹을 것을 여기선 왜 그리 고집을 부린거

요?』

『김형 말 마소. 난 먹을 생각 눈곱만치도 없는데 강제로 먹게

만듭디다』

『아이들도 아니고 어른을 강제로 먹인다고 먹어요?』

『말 마소. 이발관 의자 같은 데에 앉히더니 소 멍에 같이 생

긴 기계를 머리에 씌웁디다. 그러고는 무슨 단추를 누르니까

윙 하는 소리가 나더니 양쪽 관자놀이를 누르더군요. 그렇게

되니 입이 저절로 벌어져서 주스 몇 모금을 들이키게 하고는

또 입 안으로 밥 숟가락을 들이밀어요. 숨을 들이쉬려니 밥이

목으로 넘어가버리더라구요. 난 우리나라에 그런 기계가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지요』

『그런 기계가 있었어요? 장차 우리나라의 기계공업이 발전할

징조구먼. 그런 기계를 수출해서 외화를 벌어들였으면 좋겠

네』

모르긴 해도 세계에서 강제로 식사시키는 기계를 발명해 사용

하고 있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지 않을까 여겨졌다.

8·15광복절 오후가 되니 외부 소식이 차단된 옥중에도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대통령 신변에 이상이 생겼다는 소문이

었다. 다음날 아침 나절이 되니 소문의 윤곽이 드러났다. 광복

절 기념식장에서 총격사건이 있었는데 대통령은 살고 육영수

여사가 죽었다는 것이었다.

육영수 여사 죽음에 대한 대토론

그런데 정치범들 중에서는 이 소식을 듣고 환호성을 지르며 박

수를 치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그런 태도가 못마땅했다. 대통령 부인이 죽었는데 국민의

한 사람으로 슬퍼할 일이지 어떻게 박수치며 기뻐할 일인가?

우리가 박정희의 통치방식에 저항해 옥살이를 하고 있을지라도

생명존중이라는 원칙은 지켜야 한다고 믿었다. 증오심에 바탕

을 두고 있다면 또 하나의 악순환이 되풀이될 뿐이었다.

육여사의 죽음을 계기로 옥중에서는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초

점은 육 여사의 죽음이 애도할 일이냐 기뻐할 일이냐 하는 것

이었다. 환영파는 육 여사가 자연인 아무개가 아니라 공인이기

에 그녀의 피살은 하늘의 경고이며 따라서 환영할 일이라고 주

장했다.

반면에 애도파는 육여사는 정치가도 독재자도 아닌 한 가정의

주부였을 따름이므로 그녀의 죽음에 대해 기뻐하는 것은 합당

치 못하다고 주장했다. 또 그런 일에 기뻐함은 우리들의 인간

성 상실이요, 우리를 가둔 자들과 동질의 인간으로 타락하게

된다고 말했다.

토론은 육여사를 시해한 사람이 재일교포라는 점에서 한국정세

해결에 대한 외세의 역할 문제로까지 확대되었다. 한편에서는

유신세력이 철저한 자기방어를 굳히고 있기에 국민세력만으로

는 와해시킬 수 없으므로 외세의 지원을 기대하지 않을 수 없

다고 했다. 그래서 미국이나 일본측에서 현 정권에 정치적·경

제적 압력을 가해 민주화를 촉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그런 식의 해결은 민족 자주성 상실과

외세의 개입이란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킨다고 주장했다. 토론은

끝이 없었고 결론이 내려질 수 있는 성질도 아니었다.

육여사의 죽음은 우리 정치범들에게 열띤 토론을 일으키게 했

고, 그 토론은 민주화를 위해 함께 일하는 동료들 사이에도 서

로 다른 견해가 있음을 확인케 했다.

다시 재판 이야기로 되돌아가보자. 비상보통군법회의에서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을 선고받고 항소하였던 나는 3월7일부터

비상고등군법회의에서 항소심 재판을 받게 됐다. 재판장은 이

세호 장군이었다.

우리는 푸른 수의를 입고 수갑을 찬 채 얼기설기 묶여서 재판

정에 섰다. 비공개재판이라 방청객도 없었다. 재판장석을 쳐다

보니 별 다섯을 붙인 장군이 위엄있게 앉아 있었다. 재판관석

에 앉아 있는 장군들의 별을 헤아리니 열 개가 넘었다. 모두들

가슴팍에 훈장들은 여러 개씩 달고 있었다. 이전도사가 비아냥

거렸다.

『젠장, 다 큰 어른들이 애들처럼 뭘 저렇게 달고 다니나?』

『아직 정신연령이 모자라 장난감들을 좋아하는 거야』

옆에서 누군가가 그렇게 대답해 우리 일행은 『와─』 하고 웃

었다. 죄수들이 웃자 위엄을 부리고 있던 재판관측이 당황했다.

권위란 것은 상대방이 인정해줄 때 세워지는 것이다.

상대가 인정하지 않을 때 그 권위는 힘을 잃고 마치 종이호랑

이처럼 별볼일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장군들은 자신들이 얼마

나 높은 사람인지를 모르고 있는 상대들을 만나 퍽 곤혹스러워

했다.

항소심 재판

헌병들이 당황하여 『조용히 해─』 하고 고함을 질렀다. 그러

나 헌병이 고함지른다고 해서 조용해질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

었다. 겁 없는 이전도사가 헌병에게 말했다.

『당신은 별도 없으면서 왜 소리를 빽빽지르는 거요?』

그 말을 받아 곁에서 『소리를 지르면 별을 달아줄지 아나』

하고 거들었다. 우리를 호송해온 교도관이 울상을 지으며 말했

다.

『여러분이 이러시면 우리 입장이 난처해집니다. 좀 봐주십시

오. 우리가 문책당하게 됩니다』

약한 데는 약한 것이 성직자들이다. 그가 사정조로 말하자 우

리는 조용해졌다. 이어서 재판이 시작되자 주범인 나부터 시작

됐다. 재판장인 이세호 장군이 묻고 나는 대답했다.

『김진홍, 직업이 무엇인가?』

『활빈교회 전도사입니다』

『성직자가 왜 본연의 임무를 떠나 정치에 관여하였는가?』

『군인들이 본연의 임무를 떠나 있는 일로 인해 우리 성직자들

도 잠시 동안 본연의 자리를 떠나게 됐습니다』

『군인들이 본연의 임무를 떠나 있다니 무슨 뜻인가?』

『예, 군인들이 국토방위의 임무를 떠나 있기에 우리들도 그것

을 말리느라 우리 자리를 떠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군인들이

휴전선으로 돌아가면 우리도 본연의 자리로 돌아갈 것이니 그

점은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런 식의 질문과 대답이 몇 시간 동안 계속되곤 했다. 그렇게

재판을 치르고 난 날은 우리 모두 녹초가 됐다. 항소심 재판

결과는 우리 전원에게 기각이 선고되고, 우리는 다시 대법원에

상고(上告)했다. 나에게도 상고이유서를 제출하라는 통보가 왔

다. 나는 정성 들여 상고 이유서를 작성해 제출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대통령 긴급조치위반이란 죄목으로 나에게 부과된 15년의 선

고는 부당하다. 그 이유로 첫째, 긴급조치는 언론자유를 너무나

억압하고 있다. 말하는 자유로서의 언론권은 하나님이 주신 인

간의 기본권이다. 이를 억압함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행위

이다. 언론탄압의 죄를 범하였던 역대 정권이나 위정자가 하나

님의 심판을 받았음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이러한 과오에

대하여 각성을 촉구하는 의미에서 시국기도회를 주도하였던 본

인에게 군사재판에서 15년의 형을 가함은 부당하다.

둘째, 긴급조치법은 합법적인 개헌청원운동을 금지하고 있다.

이는 본인이 초등학교에서부터 배워온 민주주의에 어긋난 조치

다. 5·16혁명 이후 대통령께서는 세 번이나 개헌을 했다. 그런

데 이번에 국민들이 개헌하자고 한다 해서 조치법으로 금하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셋째, 긴급조치는 군법회의를 설치하고 나라를 염려하는 애국

시민들에게 과도한 형량을 부과하고 있다. 국내외 정세가 급변

하는 이때에 북한의 위협 앞에서 조국의 운명이 위태로운 데도

군인들이 휴전선에서 적을 지키는 본연의 임무를 떠나 후방에

서 애국시민들을 재판하고 있음에 각성을 촉구한 본인 등이 제

재를 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

현명하신 대법원장님과 대법원 판사님들께서 사건의 시종을 살

펴 바른 재판을 해달라』는 요지의 글이었다.

그러나 1974년 8월20일에 대법원으로 올렸던 상고도 기각돼 15

년형이 확정되고 나는 삭발을 당했다.

단식투쟁으로 얻은 도서관 이용권

9명의 정치범들은 수원교도소로 이감돼 18명의 일반수가 있는

방에 수감됐다. 그 중에는 6명의 살인수가 포함돼 있었다.

수원교도소는 전국 교도소 중에서도 모범교도소로, 외국인 죄

수들이 수감돼 있었다. 또 도서관 시설이 잘 돼 있었으나 우리

정치범들에게는 도서관에 비치돼 있는 책들을 읽을 권리가 없

었다. 책 읽을 권리를 되찾기 위해 우리들은 머리를 짜냈다. 내

가 아이디어 하나를 제안했다.

『단식하겠다고 교도소측에 통보하자. 그러면 교도소측에서 만

류하려 들 것이다. 그때 우리가 단식을 중단하는 대신에 도서

관을 이용하게 해 달라고 요구해 보자. 잘하면 통할지도 모르

잖는가?』

나의 제안에 모두 찬성했다. D-데이를 정하고 우리는 일제히

식사를 거부했다. 교도소측은 당황해 우리를 설득하려고 나섰

다. 소장이 찾아와 다른 요구는 들어줄 테니 단식만은 중지해

달라고 말했다. 교도소측에서는 우리 건강이 나빠지면 관리를

위탁받은 교도소가 문책당하게 된다고 사정했다.

나는 적당한 기회를 잡아 우리가 단식을 중단하면 도서관 이용

을 허가해줄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소장은 그 정도는 자기 재

량으로 즉각 허락하겠다기에 우리는 단식을 중단했다. 우리는

한끼 단식으로 소원하던 도서관 이용권을 되찾은 것이다.

수원교도소에는 미국인, 일본인, 중국인 등이 수감돼 있기에 좋

은 서적들이 비치돼 있었다. 나는 대학시절 이후 모처럼 장서

속에 묻혀 몇 개월을 보낼 수 있었다. 어느 때는 갑자기 석방

돼 이런 기회가 사라져버릴까 염려될 정도였다. 어느날 저녁

같은 방의 일반수들이 나누는 대화를 듣다가 놀랐다. 그들의

대화 내용이 정치문제로 옮겨졌다. 한 죄수가 말했다.

『이 나라의 장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 퍽 암담한 것 같다』

이 말을 받아 다른 죄수가 말했다.

『그건 그래. 도대체 믿을 구석이 있어야지. 재판하는 것만 봐

도 나라 돌아가는 사정을 알 수 있어. 도대체 판사·검사를 믿

을 수가 있나, 그렇다고 변호사를 믿을 수가 있나. 재판이란 것

이 유전무죄(有錢無罪)요 무전유죄(無錢有罪)인 기라. 돈 있고

빽 있는 녀석들은 다 빠져나가버리고 우리같이 돈 없는 송사리

들만 감옥에 남아 국민세금이나 축내고 있으니 나라 장래가 말

이 아닌 기라. 정부도 못 믿겠고 국회도 못 믿겠고 백성들이

믿을 구석이 없는 거여. 그렇다고 미국을 믿겠어, 일본을 믿겠

어. 우리 같은 힘없는 백성들이 믿고 기댈 곳이 없단 말이여』

그가 그런 말 끝에 한숨을 쉬자 곁에 있던 절도범이 말했다.

『우리가 뭐 그런 걱정까지 할 것 있간디? 우린 그냥 담이나

타넘고 다님 되는거여』

『그렇지 않아. 담 넘어 다니는 것도 나라가 잘 돼야 들고 나

올 것들이 있는 거야』

『그래, 우린 도둑놈들이지만서도 좌우지간에 나라는 잘 돼야

해. 그래야 우리같은 것들도 맘 잡고 살아볼 것 아니겠는가?

우리라고 언제까지나 죄만 지으란 법이 있간디. 언젠가는 맘

잡고 사람구실허고 살아야 하는디. 그런 날이 올란가 모르겠구

먼. 바깥 시상이 오죽했으면 이런 김선생 같은 분들까지 잡아

넣어 콩밥을 먹이겠나?』

그의 말에 좌중이 모두 공감을 표시하며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나는 충격을 받았다. 백성들이 사법부와 행정부 그리고 입법부

를 믿지 못하는 데다 우방까지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한 그 나라

의 장래가 어떻게 되겠는가?

범죄를 업으로 삼고 살아온 이들까지 나라의 장래를 염려하고

있을진대 일반 시민들의 마음이야 오죽하겠는가? 한 국가가 존

립하고 번영하려면 상호 신뢰에 바탕을 두고 있어야 하는데 각

계각층에 불신풍조가 넘쳐 있고 옥중의 죄수들까지 믿을 곳이

없음을 탄식하고들 있으니 나라의 기초가 흔들리고 있는 것이

라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다짐하고 기도했다.

「교회가 중요하다. 이 땅에서 다른 기초들은 모두 흔들릴지라

도 교회만은 부동의 터전이 돼 국민들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마지막 보루가 돼야 한다. 나의 남은 삶은 믿을 수 있는 교회

를 건설하는 일에 헌신하자. 목사나 교인들만 믿을 수 있는 교

회가 아니라 백성들이 믿을 수 있는 교회를 세워나가자. 노동

자들도 농민들도 도둑도 경찰도 모두가 믿을 수 있는 교회를

세우자. 그런 교회를 세워나가기 위하여 교회가 먼저 자기정화

를 이루고 복음신앙으로 자기고백을 확고히 한 후 민족변혁의

깃발을 들어야 한다」

이런 다짐을 한 후 나는 한방의 동료 죄수들에게 정을 느끼고

한 사람 한 사람 깊이 사귀려고 힘썼다.

꿈 속에도 살인하는 청부살인범

동료들 중에 21세에 청부살인을 하고 들어와 18년을 산 사람이

있었다. 38세가 된 그와 같은 방에서 살면서 사람이 저렇게 악

한 일만 생각하고 사는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꿈을 꿔도 보통 꿈을 꾸는 것이 아니었다. 잠꼬대도 이를 박박

갈며 『찔러, 찔러─』 하며 응얼거리곤 했다. 그의 곁에 누워

있으면 옆구리가 서늘할 정도였다.

그는 식사만 끝나면 창문 곁에 붙어 서서 두 손가락을 꼬부리

고는 창 밖으로 손을 내뻗었다가 오므렸다를 되풀이했다. 한번

은 그에게 『무슨 운동인데 그렇게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입니

까?』 하고 물었더니 그가 『아─, 이거 손가락에 힘 오르면

교도관 눈깔 뽑는 운동이야』 하고 대답했다. 그는 동작을 멈

추지 않고 눈 뽑는 동작을 거듭했다. 내가 『왜 하필이면 그런

운동을 하세요』 하고 물었더니 인상이 일그러지면서 『초자가

왜 이리 말이 많아』하며 오므렸던 두 손가락을 내 얼굴로 확

뻗었다. 나는 질겁을 해 몸을 뒤로 뺐다. 그는 말했다.

『내 평생에 소원이 무엇이냐? 언젠가 출소하게 되면 수류탄

하나를 구해 서울 한복판 명동으로 가서 잘생긴 「냄비(여

자)」 열댓 명을 모아두고 수류탄을 터트려 장렬한 최후를 마

치는 거야』

『하필이면 왜 그런 최후를 마치려 하십니까?』

『나 같은 놈은 죄가 많아서 천당 가기는 글렀고 염라대왕께로

갈 텐데 염라대왕이 냄비를 좋아한다니끼 열댓 명 갖다 바쳐야

거기서 한 자리 할 것 아니겠나』

그는 수류탄은 어떻게 구할 것이며, 명동 어디에 냄비들이 많

은지 등을 연구하곤 했다. 그는 손가락 운동으로 그 방을 완전

히 제압하고 지냈다. 누구든 그의 비위를 거스르면 단박에 눈

뽑는다고 달려드니 모두 그를 두려워하고 싫어했다. 우리 방에

있는 18명 중에 태권도 7단도 있었다. 태권도 7단이라면 싸움

에는 무적인 셈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꼼짝 못했다. 왜냐하면

그는 기분이 상하면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너, 태권도 7단이라구 까불어? 너 잠잘 때 두 눈을 뽑아버릴

테니깐 알아서 하라구』

그러면서 눈 뽑는 동작을 반복하니 당할 재간이 없을 수밖에.

그래서 태권도 7단은 그에게 싹싹 빌며 화해를 요청했다. 나는

그렇게 살아가는 그가 측은해 보였다.

「저 사람도 어머니 품에 안겨 있던 어린 시절이 있었을 터인

데, 세월을 어떻게 지내다가 저런 성품으로 바뀌었을까?」

이런 생각이 들자 어떤 수를 쓰더라도 그의 성품을 변화시켜

사람답게 살게끔 도와주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나는 그를

위해 특별히 기도하며 그와 친해지려고 힘썼다. 그의 편지도

써주고 물품을 나누어 쓰기도 했다.

그러다가 3일간 금식하며 그의 인격을 변화시킬 수 있도록 성

령께서 도와주시기를 기도했다. 그는 내가 자기를 위해 금식기

도를 하리라고는 전연 생각지 못하고 『김형, 어디 몸이 편찮

수? 감옥에서 식사를 못하는 날이 죽는 날인데─』 하며 염려

해 주었다. 그렇게 정성을 들인 후에 그에게 복음을 전하기로

마음먹었다. 밖에는 가을비가 내리던 어느 날, 나는 그의 앞에

앉아 정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나를 예수 믿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오』

『이형, 오늘 나하고 이바구 좀 합시다』

『예? 뭔 이바구요?』

『결론부터 먼저 말하자면 우리 주인을 바꿉시다』

『뭔 주인을 바꾼다요?』

『나나 이형이나 이 좋은 세월에 왜 징역살이하고 있습니까?

주인을 잘못 정한 때문이에요. 우리가 자기 자신을 주인으로

정하고 살았을 때는 사고뭉치가 돼 징역살이하게 되었는데, 이

주인을 바꾸자는 것입니다. 나 대신에 예수를 새주인으로 모시

면 새 주인께서 우리를 도와서 새 성품, 새 사람으로 바꾸어

줍니다.

성경 요한복음 1장 12절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

가 되는 권세를 주었으니…」 여기서 영접한다는 말은 모신다

는 뜻입니다. 예수를 나의 주인으로 모시는 사람, 곧 예수를 믿

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리를 주었다는 뜻입니다. 이

형도 이제까지는 자신이 주인이 돼 고단한 세월을 살아왔으니

이제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새출발합시다. 그러면 예수님

의 영이신 성령님이 이형의 마음에 주인으로 머무시면서 이형

을 도와주십니다. 그래서 새로운 삶을 살게 이끌어주십니다』

내가 그에게 간곡히 권하니, 정신을 모으고 조용히 듣던 그가

말했다.

『나 같은 잡배도 예수 믿을 수 있갔시요?』

그 말 한마디에 나는 가슴이 떨릴 지경으로 기뻤다. 그에게서

그런 말이 나온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나는 용기를 얻어

확신있게 말했다.

『믿을 수 있고 말구요. 예수는 모범생이나 잘난 사람들을 위

해 온 게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잡배나 문제아들의 친구가 되

려고 왔다고 했습니다. 신앙의 세계는 잡배나 불량배가 예수를

모시면 곧바로 신사로 바뀌게 되는 세계입니다』

『그렇다면 김형이 나를 예수 믿는 사람으로 만들어주시오. 나

는 그저 김형 시키는 대로 할 테니 잘 이끌어주시오』

그렇게 시작된 이후 그는 날로 새롭게 변했다. 눈뽑기 운동도

명동냄비 이야기도 사라지고 진솔한 구도자의 자세로 바뀌었

다. 나는 그에게 찬송가를 가르쳐주고, 기도해주고, 성경 이야

기를 들려주었다. 내가 석방돼 나오던 날 그가 내 앞에 무릎을

꿇은 채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김선생님, 석방을 축하합니다. 선생님은 반드시 성공하실 겁

니다. 나가시기 전에 제 이야기를 몇 마디만 들어주십시오. 선

생님, 저를 인간이 되게 도와주신 일 고맙습니다. 선생님을 만

나기 전에는 내가 지은 죄는 생각지도 않고 나를 감옥 살게 하

는 세상만 원망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을 통해 예수님

을 알게 된 후에는 그런 생각들은 눈 녹듯이 사라지고 이제는

나도 사람답게 살아야지 하는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나도 이

제 언젠가 석방이 되면 공원에 떨어진 휴지를 줍더라도 이 세

상에 무언가 도움 되는 일을 하며 살겠습니다. 김선생님, 고맙

습니다. 출옥하셔서 좋은 일 더 많이 해주십시오』

나는 그의 변화돼가는 삶을 보며 신앙이 가지는 힘에 다시 한

번 놀랐다.

이 사회가 범죄를 저지른 그에게 해준 것은 18년간 감옥에 넣

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가 그에게 해준 것은 감사와 기쁨, 그

리고 새출발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예수께서 이 살인수에게 새

희망이었듯이 우리 겨레 전체에게도 희망이어야 한다고 생각했

다.

1974년의 크리스마스

1974년의 크리스마스가 왔다. 같은 방의 동료 죄수들이 내게

성탄축하예배를 드리자고 했다. 나는 「기쁘다 구주 오셨네」

찬송을 부르고 마태복음 2장 16절에서 18절의 말씀을 읽고는

성탄절 메시지를 전했다.

첫 번째 성탄절에 아기 예수가 태어남으로 인해 수많은 남자

아기들이 살해당했다. 그들은 왜 죽는지도 모르는 채 예수와

같은 시기에 같은 지역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죽게 되었다.

이상하지 않은가? 하나님의 아들이 인류를 구원하러 오셨다는

데, 왜 오자마자 죄 없는 아기들을 죽게 하였을까? 여기에 어

떤 뜻이 있을 것 같다, 인생살이에 모든 귀중한 것은 값을 치

르고 얻어진다는 뜻이다. 우리가 값진 삶을 살려면 그에 합당

한 희생을 치러야 한다. 예수가 오시는 데에 피흘림이 필요했

듯이 우리가 사람답게 살아가는 일에도 피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고통과 대가를 치르고 자기를 지켜나가는 자만이 인간다

운 삶을 누리게 된다. 값을 치르지 않고 편하고 쉽게 살려는

자는 인생에 낙오자가 된다. 그리고 범죄자가 된다. 예수가 나

선 것은 우리들에게 고난과 피흘림을 거쳐 승리를 얻게 하기

위해서다.

이런 요지의 설교를 하고는 동료 18명의 이름을 한 명씩 부르

며 각자에게 합당한 제목으로 기도를 했다. 그렇게 예배를 마

치니 고개를 숙인 채 울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자기를 위해

염려해주는 기도를 평생 처음 들었으며, 기도 말씀을 들으니

웬일인지 눈물이 나온다고 했다.

성탄절 오후에 재소자 전원이 모이는 예배에 갔다. 수원 시내

한 성당에 계시다는 젊은 신부님이 와서 강론을 했다. 신부님

의 강론을 들으며 나는 실소(失笑)를 금치 못했다.

「도둑님」들을 앞에 앉혀두고 신부님은 신학자, 철학자들의

이름을 연이어 소개했다. 아퀴나스에서 시작되더니 마르셀,

캇시러, 마리탱, 벨자예프 등등이 등장하고 하이데거, 키에르케

고르에 이어 사르댕까지 출현했다. 소개되는 대로 헤아렸더니

무려 26명의 신학자와 철학자가 한 시간의 강론에 언급됐다.

죄수들은 그가 강론하는 동안에 발은 시리고 주리가 틀려 갖은

악담을 퍼부었다. 그런 분위기에도 그는 전연 개의치 않고 서

양 학자들의 이름을 들먹이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죄수들은 빈

민촌 주민들과 마찬가지로 참을성이 적다. 정서가 불안정하여

산만하고 조급하다. 그런데 신부님이 50분간을 그렇게 강론을

하였으니 분위기가 어떠하였을지는 쉬 짐작할 만한 일이다. 예

배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내 곁의 조수가 말했다.

『자식새끼 낳아 예배당 보내면 개새끼다』

얼마나 지겨웠으면 그런 말을 했을까만 나는 그에게 항의했

다』

『여보, 오늘 연설한 분은 신부지 목사가 아니오. 그리고 예배

당이 아니라 성당이에요』

『예배당이나 성당이나, 목사나 신부나 다 그놈이 그놈이지 다

를 게 뭐요』

『나참 신부덕에 애꿎은 예배당 목사까지 욕 먹는구먼. 달라도

한참 다르지요. 신부들은 장가를 안 가서 여자한테 시달려 보

지를 않아 철이 덜 든 거지요』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나는 신부나 목사나 비슷하다는 말에는

일리가 있겠다는 생각했다. 강대 아래서 듣고 있는 청중은 온

갖 아픔을 안고 고민하고 있는데 강대 위에서는 그런 아픔과

고민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려운 말이나 사용하고 서양학자들

이름이나 들먹이고 있는 점에서는 신부나 목사나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백성들의 춥고 서러운 사정은 모른 체하고 서양 신학이론을 겉

만 핥다가 와서는 설교단에 서게 되니 백성들의 가슴에 전혀

닿지 않는 설교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출소하게 되면 그

성당을 찾아가 좀 일러주어야겠다고 생각하였으나 아직도 실행

을 못 하고 있다.

40일간의 철야기도와 기적

74년이 저물고 75년 1월1일을 수원교도소에서 맞았다. 정월 초

하루에는 명절이라 하여 쌀밥에 고깃국이 나왔다. 1월6일에 활

빈교회 교인 5명이 특별면회를 와서는 말했다.

『전도사님, 우리 교인들이 내일 저녁부터 전도사님 석방을 위

해 40일 철야기도를 드리기로 했습니다』

나는 깜짝 놀라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밤은 자라고 있는 시간인데 웬 철야에

요? 밤에 푹 자고 새벽에 맑은 정신으로 기도드리면 되는 거지

요』

『전도사님, 사도행전 12장을 보니까 베드로가 감옥에 있었는

데 성도들이 누군가의 집에서 철야기도를 드렸더니 옥문이 열

렸습니다. 지금도 그런 역사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그땐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지요. 그리고 사람이 다르잖아요.

베드로는 배씨고 나는 김씬데 다르지요. 겨울에 잘 못 먹어도

잠이 보약이란 말 못들었나요. 사람이 먹는 것이 시원찮을 때

는 잠이라도 푹 자야 하는 겁니다. 나 때문에 철야기도하고 그

런 일은 하지 마십시오』

『전도사님, 징역 들어오시더니 믿음이 식었네요. 전에는 그렇

게 설교하시지 않았는데요』

『글쎄요. 내 믿음은 식어도 나갈 때 채워나가면 되니까 좌우

간에 철야기도는 그만두세요』

『전도사님, 우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교인들은 그렇게 말하고 가더니 그 다음날부터 40일 철야기도

를 드렸다. 난로도 없는 교회당에서 베니어 판 마루에 앉아 40

일 밤을 기도로 지새운 것이었다. 여성신도 중에 어떤 분은 40

일간 단 하루도 등을 방바닥에 대지 않고 앉아서만 지낸 분도

있었다. 그렇게 철야기도를 시작해 40일이 되는 날이 2월14일

이었다.

40일간의 철야기도가 끝나고 2월15일 낮에 직장에서 졸며 일하

거나 집에 머물러 있던 신도들은 정오 뉴스 시간에 박정희 대

통령이 정치범을 석방한다는 담화문을 듣게 되었다. 석방되는

정치범 명단에 김진홍이란 이름이 첫 번째로 보도되었다. 뉴스

를 들은 활빈교회 신도들과 빈민촌 주민들은 감격에 넘쳐 울고

웃고 손뼉을 치며 서로 알리기에 분주했다. 모두들 교회당에

모여들어 축제분위기를 이루었다.

그러나 막상 당사자인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15일 아

침 나절에 한 교도관이 감방으로 찾아와 오늘 중으로 정치범들

에게 좋은 소식이 있을 것 같다는 말을 했지만 우리는 전연 감

을 잡지 못하고 무슨 일인가 기대하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정

오가 조금 지나 교도관이 와서 석방된다는 소식을 알려주었다.

2월16일 아침 나절에 교도관이 와서 한 시간 내에 출감할 테니

준비하라고 일러주었다. 감옥에 들어온 지 꼭 13개월 만이었고,

교인들이 철야기도회를 시작한 지 꼭 40일 만이었다.

들어올 때는 어려운 절차를 거쳤는데 나갈 때는 쉬웠다. 수원

교도소의 마지막 철문이 열리고 밖으로 나오니 5살배기 동혁이

가 『아빠』 하고 부르며 달려오는 게 보였다. 아들을 보는 순

간 머릿속이 핑 돌며 현기증이 났다. 교도소 입구에 교인들과

마을 사람들이 현수막을 걸고 기다리고 있었다. 흰 천에 붉은

글씨로 「할렐루야! 우리의 목자가 돌아오신다」라고 쓴 플래

카드가 보였다. 갑자기 하늘과 땅이 붙었다 떨어졌다 하고 지

면이 꿀렁꿀렁 움직이는 듯해 제자리에 서 있기가 힘들었다.

나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흙바닥에 입을 맞추며 감사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런 순간을 허락하셔서 감사합니다. 이

귀한 백성들과 평생을 함께 지내다가 함께 하늘나라까지 가겠

습니다. 앞으로 아무리 좋은 길이 열려도 이들을 떠나지 않고

함께 살며 하늘의 일을 이루어 나가겠습니다.』

청계천으로 돌아오다

청계천 빈민촌으로 돌아오니 온 마을이 뜨겁게 환영해 주었다.

활빈교회 신도들의 환영은 열광적이었다. 나는 감격스러웠다.

이들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 한들 무엇이 아까울쏘냐! 남은 삶

은 통째로 바쳐 이들을 위해 살겠노라고 다짐했다.

석방 된 다음날 나는 세브란스병원으로 가서 종합진단을 받았

다. 일본의 친구들이 종합진단 비용을 보내왔다. 진단 결과 모

든 것이 정상이고 심장이 일반인보다 특별히 강하다는 결과가

나왔다. 다른 동료들은 수감생활로 인해 건강이 나빠져 고생하

는 경우가 많았으나 나는 오히려 들어갈 때보다 더 건강한 몸

이 돼 나왔다. 나는 하나님께서 앞으로 더 열심히 일하라고 건

강을 주신 줄로 알고 즉시 일을 시작했다.

빈민촌에는 예전과 다름없이 많은 문제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문제들을 살펴 간추린 후 한 가지씩 풀어나가는 일에 착

수하였다. 첫 번째로 대두된 문제는 내가 없는 동안에 외부에

서 들어온 일꾼들이 이전에 일하고 있던 일꾼들을 밀어내고 모

든 일을 주도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내가 옥중에 있는 동안 활

빈교회를 도우려고 들어온 분이 여럿 있었다. 그분들은 좋은

뜻으로 많은 수고를 하였으나 결과가 좋지 못하였다. 본인들의

의도와는 달리 교회와 마을에 혼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렇게

된 이유는 빈민선교에 대한 기본자세에서 바롯된다. 빈민선교

는 의욕만으로는 하기 어렵다.

빈민촌 내의 문제점들과 빈민들의 심리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바람직한 선교방법을 택해야 한다. 그리하여 그 바탕

과 방법 위에서 주민 자신들이 주체가 돼 문제를 스스로 해결

해 나갈 힘을 길러주어야 한다. 외부에서 들어온 일꾼들이 일

을 해준다거나 도와준다는 사고방식으로 임하면 나쁜 결과를

가져오기 십상이다.

내가 13개월간 옥중에 있는 동안 청계천 빈민촌 선교지역에서

바람직하지 못한 일들이 일어났다. 외부에서 활빈교회를 돕겠

다고 들어온 사람들이 선교활동을 주도하면서 활빈정신이 퇴색

되고 그간에 활빈교회가 혼을 기울여 쌓아올렸던 지역사회와의

일체감이 무너져가고 있었다.

호화변소 소동

대표적인 예가 변소다. 수원교도소에서 출감되는 길로 청계천

빈민촌으로 직행해 교회당을 찾았더니 교회당 건물 한켠에

「호화변소」가 지어져 있는데 문이 자물쇠로 채워져 있었고

「내빈용」이란 딱지가 문에 붙어 있었다.

빈민촌의 변소는 수세식(水洗式)이 아닌 우세식(雨洗式)이다.

청계천 강물 위에 지어진 변소들인지라 변을 보면 한강으로 직

행하게 되는 변소다. 청계천 강물이 줄어들 때는 변이 쌓여 있

어 악취를 풍기고 파리 떼가 들끓다가 비가 오면 냇물에 씻겨

자동으로 청소되는 변소이기에 「우세식」이라 일컫는다. 변소

에는 지붕이 없고 벽판자에 구멍이 많아서 안에 사람이 있고

없음을 노크로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확인하는 방식이

다.

이런 변소에 외부 손님들을 안내하는 것이 창피스러워 교회 마

당 한켠에 손님용 변소를 따로 만든 것이다. 나는 변소가 문

제가 되면 주민들과 의논해 새변소를 짓는 것이 합당한 방법이

지 주민들이 사용하는 변소는 그대로 둔 채 교회가 손님용 변

소를 따로 짓는다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

고 새 변소가 지어졌으면 손님이나 교인이나 주민이 다 함께

사용해야지 자물쇠로 채워두고 외부 손님들만 사용케 한 것은

말도 안 되는 짓이었다. 나는 교인들에게 말했다.

『똥은 다 같은 똥이지 손님 똥 다르고 주민들 똥이 다른 것이

아니다. 손님들의 똥은 따로 모아 수출이라도 하는 똥이냐? 이

변소 문제는 언뜻 보기에는 사소한 문제일 것 같지만 빈민선교

원칙에 비추어보면 중요한 문제다. 이런 사고방식은 교회와 주

민 간에 거리를 만들고 주민들이 교회를 멀리 하게 하는 원인

이 된다』

교인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하고 새 변소를 철거하자고 제안하였

다. 내 말에 교인들이 『전도사님 주장이 이해는 가는데 이미

지어진 변소니 철거하지는 말고 그대로 사용하자』고 만류하였

다. 사용하되 자물쇠를 떼고 내빈용이란 글도 지우고 누구든

자유롭게 사용하는 변소로 하자기에 그 선에서 마무리지었다.

또 다른 예가 피아노 건이다. 어느 분이 활빈교회를 도우려는

마음에서 피아노를 기증하겠다고 했다. 활빈교회는 별생각 없

이 감사히 받겠다고 말하여 며칠 후면 피아노가 도착하게 돼

있었다.

그런데 그 피아노 값이 판자촌 집 값의 4배가 넘는 금액이었

다. 회당 건물은 비가 새 밖에서 가랑비가 올 때면 안에서는

소나기가 떨어지는 형편인데 그 안에 비싼 피아노가 어울릴 턱

이 없었다. 게다가 교회당 건물이 온종일 주민들에게 개방돼

있어 온갖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마을 센터인데, 그곳에 피아노

를 가져다 둔댔자 제대로 남아날 리 없었다.

나는 회의를 열고 토론에 부쳤다. 피아노가 나쁜 것이 아니라

판잣집 건물에 피아노가 안 아울린다. 활빈교회 형편에는 소형

오르간이나 기타로 예배를 드려도 좋지 않은가. 그러니 피아노

헌납을 사양하고 피아노 값을 현찰로 받아 응급환자들을 위한

치료기금으로 삼자고 제의하였다.

판자촌파와 외부파

나의 의견에 주민들은 적극 찬성인데 외부에서 들어온 교인들

이 반기를 들었다. 하나님께 바쳐진 물건인데 어떻게 취소하느

냐, 아무리 판잣집 교회라도 좋은 피아노 두고 좋은 음악 들으

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거라고 했다. 그리고 빈민들도 좋은

음악을 배워야 인격도 향상되고 자녀교육에도 좋을 터이니 피

아노를 그냥 받자고 주장했다.

나는 활빈교회의 분위기가 이전과는 달라진 것을 느꼈다. 무슨

문제건 토론할 때에는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화기애애하게 진행

돼왔었는데 이제는 자못 긴장된 분위기가 느껴졌다. 나는 토론

참가자들의 면면을 살펴보았다. 피아노를 받지 말자는 측은 판

자촌 주민들인 교인들이었고, 피아노를 받자는 측은 외부에서

들어온 교인들이었다.

그들은 일반 교회에서 듣고 자라면서 한국교회의 전반적인 풍

토에 익숙해진 교인들이었다. 나는 이런 차이가 잘못되면 교회

안에 파벌을 조성해 풍파를 일으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

다. 나는 피아노 문제에 대한 논의를 그 선에서 멈추고 회의를

마쳤다.

그리고는 피아노를 헌납하겠다는 뜻을 밝힌 교인을 찾아가 차

근차근 설득했다. 나의 설명을 들은 그는 말했다.

『전도사님, 그렇게 알아듣도록 설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교인들은 그렇게 잘 깨우쳐만 주시면 언제든지 교역자님 뜻을

따르지요. 전도사님처럼 그렇게 사리를 밝혀주시면 다 순종합

니다. 전도사님 의향대로 피아노 대신 현금으로 헌금할 테니

응급환자 치료기금으로 사용하여 주십시오』

한국교회는 예배당 건축이나 비품 구입에는 과소비를 하면서도

구제, 지역사회 개발, 인재육성 등에는 대단히 인색하다. 그 점

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지금도 교회당 건축에는

100억원 이상을 투입하면서도 노동자들의 복지, 농촌돕기, 빈민

구제, 북한돕기 등에는 관심을 쏟지 않는다.

주민들의 항의

내가 출옥 후에 두 번째로 부딪힌 둘째 문제는 신비주의로 인

해 일어난 것이었다. 출옥하고 며칠 후 주민대표들이 나를 찾

아와 인사를 하더니 말했다.

『우리 마을 사람들은 여러 면에서 전도사님 석방을 기다렸습

니다. 이제 나오셨으니 그간에 교회로 인해 마을 주민들이 입

은 불편한 점들을 시정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듣기에 유쾌하지 못한 말이었다. 교회로 인해 마을 사람들이

겪은 불편이라니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나는 할 말이

없어 그들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한 분이 이어서 말했다.

『첫째는 새벽종 치는 문제입니다. 전에는 새벽종을 치되 시간

을 알려주는 정도로 가볍게 몇 번만 치니까 주민들에게도 좋았

습니다. 그런데 전도사님이 안 계시자 몇 번씩이나 계속 쳐대

니 종소리에 온 마을이 깨고 아이들까지 다 깨곤 합니다』

『아니, 그런 문제라면 교회측에 말씀하셨으면 금세 시정될 수

있었을 것 같은데요』

『왜 안 했겠습니까. 교회측에 좀 짧게 쳐달라고 말했더니 우

리가 하나님 은혜를 몰라서 그렇지 회개하면 종소리가 듣기 좋

아진다며 오히려 더 길게 치곤 했었지요. 전도사님이 안 계시

는데 싸울 수도 없고 해서 전도사님이 나오시면 시정되겠거니

하고 기다렸습니다』

나는 사정을 짐작하고 선뜻 말했다.

『알겠습니다. 교회측에서 잘못했구먼요. 내일부터 새벽종 치는

것을 중단토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희들의 뜻을 오해하신 겁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이전처럼 시간 알리는 정도로 짧게 쳐달라는 것이

지 아예 치지 말아달라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다음 문제는 무엇입니까?』

『역시 비슷한 문제입니다만 한밤중에 기도하는 것은 좋은데

기도 소리를 좀 낮게, 교회 안에서만 할 수가 없겠습니까?』

『아니, 기도를 교회당 안에서 드리는 것이지 누가 동리에 다

니면서 기도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전도사님 그런 것이 아니구요. 교회 안에서 하기는 하는데

어찌나 울고불고 시끄러운지 교회당 가까이 사는 이웃 사람들

은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한번은 밤중에 어찌나 소리를 지르

던지 잠결에 「불이야!」 하는 줄로 알고 잠옷 바람으로 뛰쳐

나왔는데 예배당에서 기도하는 소리였습니다. 그러니 조금 소

리를 낮추어 기도했으면 해서요』

나는 곁에 있는 교인에게 물었다. 부흥회를 하면서 온 교인이

은혜를 받는다고 한꺼번에 『주여!』 『주여!』 하고 고함을

쳤더니, 자던 사람들이 『불이야!』 하는 소리로 잘못 듣고 소

동이 일어났었다고 했다. 나는 우습기도 하고 미안키도 해서

주민들에게 말했다.

『제가 사정을 짐작은 하겠습니다. 내가 감옥에 있으니까 교인

들이 나를 위해 기도한다고 하다 보니 정성이 지나쳐 다소 무

리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제는 제가 나왔으니 여러분께 피

해가 없도록 바로잡겠습니다』

『아무렴요. 전도사님만 나오시면 이전처럼 다 잘 될 것이라고

우리도 참아왔습니다』

『방짜는 따로 모이자』

나는 다음 주일 예배 때 이 문제에 대해 교인들에게 말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도 좋고 은혜받는 것도 귀한데 주민들에게

피해를 주어서는 안 된다. 활빈교회는 창립정신이 교회를 위한

주민이 아니라 주민을 위한 교회다.

이 점을 명심하고 새벽종은 낮게 두 번만 쳐서 시간을 알리는

정도로만 하고, 밤기도회 때는 기도 소리가 자기 귀에 겨우 들

릴 정도로 조용히 기도하고, 큰 소리로 기도하고 싶을 때는 산

이나 기도원 같은 곳에 가서 마음 놓고 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런데 예배 후에 낯 모르는 분이 앞으로 나오더니 『방짜는

기도실로 모여 주세요』 하고 광고를 했다. 나는 「방짜」가

무슨 뜻인가 하여 김종길 집사에게 물었다.

『김집사님, 방금 모르는 분이 나와서 방짜는 모이라 했는데

도대체 무슨 말이에요』

『전도사님, 그 방짜란 말은 방언은사 받은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방언하는 교인들은 따로 모이란 말입니다.』

『방언을 하면 하는 것이지 왜 따로 모입니까? 그건 따로 모일

성질이 아닌데요?』

『전도사님께서 낮예배시간에 그들에게 제재를 가했으니 대책

을 세우려고 모이는 것이겠지요』

『아니, 내가 언제 제재를 가했지요. 방언 같은 은사는 교회에

서 장려할 일이지 제재할 일은 아니지요. 그런 일로 따로 모일

턱이 있겠습니까. 집사님이 잘못 알았겠지요』

내가 감옥에 있던 13개월 동안에 교인들의 신앙의 질(質)이 바

뀌엇다. 지도자인 전도사가 석방되게 해달라고 밤낮으로 기도

드리다 보니까 여러 가지 신비한 은사들을 체험하게 됐다. 그

렇게 은사를 체험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런 은사와 체험을

뒷받침할 말씀과 경건의 훈련이 부족한 채 신비체험에만 몰두

하다 보니 신앙생활에 균형이 무너졌다. 그럴 때 교회를 이끌

어가는 지도자들이 말씀을 바탕으로 건전한 방향으로 이끌었어

야 하는데, 오히려 그런 흐름에 편승해 신비주의 일변도로 빠

져버렸다. 그래서 방언은사라도 받은 사람이라야 성령받은 교

인이고 방언 못하는 교인들은 거듭나지도 못한 교인인 것처럼

그릇된 인식이 만연했다.

『사탄아 물러가라』

대체로 빈민촌 주민들은 정서적으로 허점이 많다. 그래서 목회

자가 그들의 신앙을 지도할 때는 균형잡힌 인격으로 성숙하게

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균형잡힌 인격의 성숙 없이

신비체험에 몰두하게 되면, 그 체험이 인격의 균형을 무너뜨리

게 되는 부작용을 낳게 된다. 신비주의에의 몰두는 빈민촌 주

민들에게 아편 구실을 하게 된다.

예를 들어 주민자활회의 폐품수집부에 최씨란 분이 있었다. 강

원도 어느 탄광에서 일하다가 탄가루를 너무 많이 마셔 폐병을

얻은 환자였다. 증상이 심한 편은 아니어서 감옥 가기 전에 반

년 남짓 치료에 힘써 회복기에 들어서고 있었다. 그랬던 그가

기도중에 신비 체험을 하고 부흥회에 참석하여 성령 충만한 은

혜를 받게 되었다. 그 뒤로 그는 약을 일절 먹지 않고 기도에

만 전념하는 치우친 생활을 하게 됐다. 당연히 거의 나아가던

폐병이 악화되고 다시 병석에 눕게 됐다.

그런 사정을 듣고 출옥 후 어느날 그의 집을 방문하였더니 부

부가 나를 방에 들여놓지도 않았다. 이유인즉 방언은사도 못

받고 성령도 충만하지 못한 「육(肉)의 사람」이란 것이었다.

자기 부부는 성령받은 사람만 상대하지, 세상적인 사람들은 상

대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더러 인간적으로는 가깝고 또 감

사한 일도 많은 사이지만 영적으로는 상대할 수 없다고 했다.

나는 문 밖에 서서 닫힌 문에다 병문안만 하고 돌아왔다. 예상

치 못했던 경우여서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그래도 그가 걱정돼 약을 지어 그의 집을 다시 찾았다. 문 밖

에서 인사하고 들어가도 되겠느냐고 하였더니 무슨 일로 왔느

냐고 물었다. 약을 지어 왔노라고 했더니 자기는 은혜와 기도

로 병을 고치지 약 같은 세상적인 수단은 필요없노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나는 간곡히 권했다.

『최집사님, 은혜로 병을 고치는 것은 당연한 말입니다. 그러나

약을 먹으면서 은혜를 구하는 것이지 약을 끊고 은혜만 구하는

것은 바르지 못한 생각입니다. 약도 하나님이 내셨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지난번에 약을 잡수셔서 거의 회복되지 않았습

니까? 그런데 약을 끊은 뒤로 상태가 몹시 나빠진 것 같군요.

지금이라도 다시 약을 먹으면서 은혜로 완치되도록 같이 기도

드립시다』

그러나 최집사는 방문을 닫은 채 말했다.

『체험자는 약으로 병 고치는 것 아닙니다. 조용기 목사님도

약을 끊고 성령의 불체험으로 폐병이 나은 겁니다. 전도사님의

성의는 고맙지만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 만나면 제

병이 도집니다』

그가 엉뚱하게 조용기 목사까지 들먹이는 데는 할 말이 없었

다.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를 돌보는 조용기 목사는 젊은 날

폐병에 걸린 적이 었었다. 그는 자신의 병이 약이나 의술로 치

료되지 않을 줄로 알고 깊은 기도로 은혜의 체험을 하고 완치

된 사람이다. 조목사의 이야기를 들은 그는 자신도 조목사처럼

되기를 원하는 것 같았다. 나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권하기로

마음먹고 간곡히 말했다.

『최집사님, 옛날 우리 정을 생각하고 내 말을 들으세요. 은혜

도 사람따라 다르게 임합니다. 조용기 목사님이 약 없이 은혜

로 폐병이 나은 것은 나도 들어 알고 있습니다만 모두가 조목

사님처럼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마음을 넓게 먹고 우선

이 약을 먹기 시작합시다. 그리고 같이 기도를 합시다. 집사님,

그렇게 고집피우다가는 기회를 놓칩니다. 어린애들과 젊은 부

인도 생각하셔야지요. 그 나이에 회복될 수 있는데, 고집 때문

에 기회를 놓치고 잘못되면 되겠습니까?』

나는 문 틈으로 약봉지를 들여보냈다. 나는 안 봐도 좋으니 약

은 받아 먹으라고 권면했다. 이윽고 방 안에서 기동하는 소리

가 나더니 문이 덜컥 열리고는 내가 들이밀었던 약봉지가 마당

으로 내팽개쳐졌다. 이어서 외마디 소리가 들렸다.

『쉿, 사탄아 물러가라』

나는 어이없어 멍청하니 섰다가 팽개쳐진 약봉지를 주워 들고

는 교회로 돌아왔다. 오는 길에 약봉지를 쓰레기더미에 던지며

방금 들은 대로 되풀이해 보았다.

『사탄아 물러가라, 사탄아 물러가라』

잘못 돼도 엄청나게 잘못돼 있었다. 모두들 제정신을 잃은 세

상인 듯했다. 얼마 후 최씨가 죽었다. 나는 그가 죽은 후에야

그의 방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의 시신을 정성들여 염하고 화

장을 치르고 돌아오며 생각했다. 예수를 안 믿는 것보다 훨씬

더 문제인 것이 그릇 믿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활빈교회의 내분

그러던 어느 날 교회의 대표급들이 모여 나를 부른다기에 의아

스런 마음으로 오라는 곳으로 갔다. 활빈교회의 대표급이라니

도대체 어떤 분들이 모여 있을까? 궁금히 여기며 갔더니 알 만

한 얼굴들이었다.

내가 옥중에 있는 동안에 활빈교회를 돕는다고 들어온 분들과

방짜들이 주로 모여 있었다.

나는 거슬리는 감정을 안으로 삼키며 부드러운 투로 물었다.

『여러분이 나를 불렀습니까?』

그들 중의 대표격인 민목사가 말했다. 그는 고향선배이자 신학

교 선배로 내가 옥중에 있는 동안에 활빈교회 당회장을 맡았던

분이다. 그가 내게 힐난하는 투로 말했다.

『우리들은 김전도사님께서 옥중에 있는 동안에 활빈교회를 지

켜온 사람들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김전도사가 석방된 뒤로 하

는 처사에 우리는 실망이 큽니다. 그래서 오늘 이 자리에 활빈

교회의 대표급들이 모여 의논한 결과 전도사님께서 활빈교회를

사임하시든지 아니면 그 동안에 고생한 우리 의견을 존중하든

지 둘 중 하나를 택해 달라는 뜻에서 이렇게 모였습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웃음이 나왔다. 내가 얼마나 부드러운 사람

으로만 보였으면 이런 말을 할까 하는 생각이 들어 그들에게

물었다.

『그래요. 여러분의 의견이 그러시다면 내가 사임하고 안 하고

는 뒤로 미루고 여러분의 의견이 무엇인지나 들읍시다. 내가

존중해드려야 할 여러분의 의견이란 것이 무엇이지요?』

역시 민목사가 답했다.

『여러 가지가 많지만 그중에서 몇 가지만 꼽겠어요. 첫째로

영적 은사를 거스르는 일을 그만둘 것, 둘째 그동안 수고한 사

람들을 다 자르고 독단적으로 일처리 하는 일을 고칠 것, 셋째

빈민을 정치에 이용하여 개인의 정치적 야심을 꾀하는 일, 넷

째 옛날과는 달리 돈을 낭비하고 다니는 일, 다섯째 N.C.C와

싸움을 중단시킬 일, 이런 일들을 시정하라는 것이 우리 의견

입니다』

나는 그 의견이란 것들이 너무나 요란스러워 할 말이 없었다.

무엇이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노라고 하였더니 민목사가 나를

다그쳤다.

『김전도사께서 할 말이 없다는 것은 우리 의견을 받아들일 의

사가 없다는 말처럼 들리는데요』

그의 기세가 등등하기에 나는 아니꼬운 생각이 들어 그에게 물

었다.

『내가 여러분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무슨 일이 벌어지

는 거지요?』

『그야 활빈교회를 사임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교인들에

게 그렇게 알리는 거지요. 김전도사의 지금 태도로는 활빈교회

사임이 분명하니 다음 예배시에 교인들께 그렇게 발표하겠습니

다』

『그래요. 그렇다면 이 자리에서 결정할 것이 아니라 교인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전체 의견을 들어봅시다. 나는 민주주의를

좋아해서 민주주의 하자고 했다가 징역까지 갔던 사람이니까

이런 경우도 민주주의 식으로 해봅시다』

김진홍 내쫓기

그렇게 말하고는 그 자리를 물러난 후 다음 예배시에 예배가

마친 후 교인들에게 물었다.

『활빈교회의 주인이 되시는 성도 여러분.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듣고 여러분이 결정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여러분께

서 내가 없는 동안에 교회를 잘 지켜주셔서 이제 교회가 이만

큼 자라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 즈

음에 성도님 중에서 이제는 이 교회에 김진홍 전도사가 없어도

되겠다는 의견을 지닌 분들이 많으신 것 같기에 제가 이 자리

에서 한번 확인을 하겠습니다. 제가 떠나도 된다는 것이 여러

분의 공통된 의견이시라면 저는 기쁜 마음으로 떠나겠습니다.

또 다른 판자촌으로 옮겨가 다시 개척선교를 하겠습니다. 여러

분은 터놓고 말씀해주십시오』

내가 그렇게 말하였더니 신속하게 반응이 나타났다. 넝마주이

를 같이 하던 동료들이 불끈불끈 일어서며 말했다.

『그기 먼 소리여. 어떤 놈이 전도사께 그런 소릴 지껄였나. 요

사이 보자보자하니 별 시러배 같은 잡종들이 모여 까부는데 이

제부터는 이 어르신께서 가만 안 둔다는 걸 알아─. 언놈이냐!

뒷전에서 쏙닥거리지들 말고 지금 나서라. 대갈통을 까부셔 삐

릴끼다』

이렇게 서슬이 시퍼렇게 설쳐대니 자칭 대표급들이 슬금슬금

흩어져버렸다. 다음날쯤 되니 이런 소문이 마을 주민들에게까

지 알려지게 되었다. 이번에는 주민들이 열을 받아 교회로 모

여들었다.

『교회에 이상스런 종자들이 있담서? 전도사님을 해꼬지할라는

종자들은 달구지를 분질러 놔야디여』

주민들까지 그렇게 나오니 민목사는 보퉁이를 챙겨 슬며시 마

을에서 사라졌다. 다른 대표자들도 조용해졌다. 그런 일이 있은

지 얼마 후 방언파들이 내게 말했다.

『전도사님, 우리는 따로 예배를 드리기로 하였으니 우리 요구

조건을 들어주세요』

『아니에요. 그럴 것 없습니다. 세월이 약이라고 기다리세요.

얼마간 세월이 지나면 다 이해가 되고 응어리가 풀릴 것입니

다. 여러분 지난 세월들을 돌이켜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어디

헤어져도 될 사이입니까?』

그러나 그들은 막무가내로 따로 나가겠으니 자신들의 요구조건

들을 들어달라고 했다.

『어허 참, 정 그러시다면 그 요구조건이란 것들이 도대체 무

엇입니까?』

『답십리에 있는 건물을 우리들에게 줄 것과 오르간과 메가폰,

그외 우리가 점찍는 교회비품들을 주세요』

나는 그들이 내건 요구조건에 웃음이 났다. 그들의 순진성을

보여주는 것이라 여겨졌다. 나는 흔쾌히 말해주었다.

『예, 좋습니다. 한 가지 이외에는 다 드릴 수 있습니다. 활빈

교회에서 여러분이 살림나는 데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이

있으시면 무엇이든 다 챙겨 가세요. 그리고 절대로 싸우고 나

갈 생각은 마세요. 웃으며 헤어져야 세월이 지난 후에 다시 돌

아올 수 있는 겁니다』

『그렇게 시원스럽게 가져가라니 고맙네요. 근데 전도사님, 한

가지 외에는 다 가져가라 했는데 그 한 가지는 뭡니까요?』

『그건 활빈교회라는 교회 이름입니다. 다른 것은 다 가져가도

좋은데 활빈교회라는 이름은 절대로 가져갈 수 없습니다』

『하이고 우습기도 해라. 활빈!활빈! 말만 들도 진절머리나는

이름인데 그딴 이름을 왜 가져가요. 줘도 안 가져가요』

그렇게 해서 신령파, 방언파들이 분가해 떠나니 소위 대표급들

도 흩어지게 됐다. 활빈교회는 본 모습을 되찾게 됐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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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DONG 연재 코너 #53/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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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김진홍목사 육필수기 14] 出서울기 <5>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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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짜는 따로 모이자』

나는 다음 주일 예배 때 이 문제에 대해 교인들에게 말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도 좋고 은혜받는 것도 귀한데 주민들에게

피해를 주어서는 안 된다. 활빈교회는 창립정신이 교회를 위한

주민이 아니라 주민을 위한 교회다.

이 점을 명심하고 새벽종은 낮게 두 번만 쳐서 시간을 알리는

정도로만 하고, 밤기도회 때는 기도 소리가 자기 귀에 겨우 들

릴 정도로 조용히 기도하고, 큰 소리로 기도하고 싶을 때는 산

이나 기도원 같은 곳에 가서 마음 놓고 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런데 예배 후에 낯 모르는 분이 앞으로 나오더니 『방짜는

기도실로 모여 주세요』 하고 광고를 했다. 나는 「방짜」가

무슨 뜻인가 하여 김종길 집사에게 물었다.

가족과의 이별, 그리고 재회

감옥 후에 부딪힌 문제들 중에 가장 심각했던 것은 가정 문제였다. 출

옥 후 꼭 10일째 되던 날 아내는 할 말이 있노라며 조용한 곳으로

가자고 했다. 나는 앞으로 살아갈 일에 대한 좋은 이야기겠거니 생

각하고 아내가 이끄는 데로 갔다.

그러나 아내가 제기한 문제는 전혀 예상 밖이었다. 그것은 이혼이었

다. 아내는 이미 몇달 전부터 마음으로 이혼을 결심하고 내가 출옥

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노라고 말했다. 자기로서는 내가 가는 길과 내

가 추구하는 이상에 더이상 보조를 맞출 수가 없노라고 했다. 아내

는 부잣집에서 편히 자라나서 빈민운동이니, 민주투쟁이니 하는 일

에 동참할 수가 없기 때문에 나와 헤어져 평범한 여성으로 살기를

원한다고 했다. 나는 처음에는 사태의 심각성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아내를 설득하려고만 애썼다.

『당신이 그렇게까지 말하는 것이 이해가 됩니다. 그간에 오죽이나

고생을 시켰으면 그런 생각까지 했겠어요. 나도 감옥에 있는 동안

당신과 아이들을 너무 고생시킨 일에 대해 반성하였으니 앞으로 잘

해 봅시다』

그러나 아내의 결심은 확고했다.

『이미 그런 시기는 지났습니다. 당신이 아무리 잘해보려고 애쓴다

한들 빈민촌은 빈민촌이지 달라질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당신이

가정을 살리려는 마음이 있다면 가족들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가서

삽시다. 미국으로 가서 당신이 좋아하는 공부를 하고 박사학위를 받

아 한국으로 와서 다시 일해도 되지 않겠어요. 이 상태로 있으면서

잘해보겠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니 당신이 택일하세요.

가정이냐 일이냐 둘 중에 하나를 택하세요』

『여보, 활빈선교는 이제 시작인데 어떻게 미국으로 갈 수 있겠어요.

나처럼 사명감으로 사는 사람은 일 속에 가정이 있어야지 일을 떠나

가정을 살리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당신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일을 살리고 대신 나와 아이들은

놓아달라는 겁니다. 아이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가서 잘 기를 테니까

당신은 그렇게 좋아하는 일을 하세요』

아내의 친정식구들은 미국에서 자리잡아 살고 있었다. 아내는 아이

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가서 살겠다는 결심을 굽히지 않았다.

나는 여러 날을 두고 생각하고 또 생각해보았다. 내가 가정을 살리

려고 청계천 빈민촌을 떠나 미국으로 갈 수 있을까? 도저히 그럴 수

는 없는 일이었다. 내가 감옥에 있는 동안에 주민들이 나에게 베풀

었던 정성은 어떠했던가. 특히 나의 출옥을 위해 40일간 철야하였던

일이며, 온 교우들이 3일씩 돌아가며 금식기도 드렸던 일들을 생각

하면 출옥하자마자 그들을 떠나 미국으로 이민을 간다는 것은 불가

능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가정을 깨뜨릴 수도 없는 바였다. 나는 이러지도 저

러지도 못한 채 아내를 설득하려고 애썼으나 끝내 실패로 돌아갔다.

몇달간의 승강이 끝에 아내는 아들 동혁이와 딸 은송이를 데리고 미

국으로 떠났다.

아내와 아이들과의 이별

아내는 그렇게 떠난 이후로 소식을 완전히 끊었다. 어느 곳에서 무

엇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그런 중에도

세월은 흘러 6년3개월이 지난 어느 날, 미국에서 엽서 한장이 왔다.

내쪽 주소만 씌어 있었고 미국쪽 주소는 기입돼 있지 않았다.

내용인 즉 『나는 미국에 온 후로 그간에 재혼해 잘 지내고 있습니

다. 그리고 아이들도 새아버지에게 잘 적응하고 있습니다. 그리 아시

고 그쪽에서도 알아서 하십시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냥 어리벙

벙해져 『그렇게 되었나―』 중얼거리고는 엽서를 버리고는 산으로

올라갔었다.

그후로 나는 아내에 대해서는 잊고 두 아이에 대해서만 기도했다.

내가 정치범 신분으로 묶여 있어 미국으로 간다 한들 그 넓은 땅에

서 아이들을 찾아내기는 불가능했다. 나는 그냥 아이들이 건강하고

밝게 자랄 수 있기를 기도할 따름이었다.

공동체 마을인 두레마을을 시작한 이후로도 어딘가에 보호자가 없는

아이가 있다는 말을 들으면 달려가서 마을로 데려왔다. 그리고는 기

도실로 아이를 데리고 들어가 손을 잡고 기도드리곤 했다.

『예수님 나는 두레마을에서 이 아이를 잘 돌볼 터이니 예수님은 미

국 땅에 있는 동혁이, 은송이 남매를 잘 돌봐 주시옵소서. 나는 그들

에게 손이 닿지를 않습니다』

내가 그렇게 기도드리는 것을 아무도 알지 못했다. 나는 다만 미국

에 있는 남매가 보고 싶고 염려스러워 예수님께서 친히 돌봐 주시기

를 기도드릴 따름이었다. 예수님께 그런 부탁을 드리려면 그냥 기도

만 드려서는 안될 것 같고 나도 무언가 그에 상응하는 실천을 해야

될 것 같기에 갈 곳 없는 아이들을 돌볼 마음을 먹을 것이었다.

그렇게 지내다가 드디어 사면을 받고 미국으로 갈 수 있는 신분이

되었다. 미국으로 가던 첫번째 여행 때부터 비행기에 타자마자 좌석

에 앉으면 먼저 드리는 기도가 있었다.

『예수님, 이번 미국여행에서 아이들을 꼭 만나게 해주시옵소서』

그러나 막상 미국에 닿으면 그 넓은 땅에서 아이들을 찾기가 어려웠

다. 뉴욕 어느 곳에 있다는 말을 풍문으로 듣고는 뉴욕 지역으로 가

게 되면 여러 방면으로 아이들의 소재를 찾으려 애썼다.

그러나 끝내 만나지 못하고 한국으로 되돌아올 때는 마음이 스산하

기 이를 데 없었다. 공항에서 비행기가 솟아오를 때면 두통이 생기

고 가슴을 예리한 무엇으로 찌르는 듯 아픔을 느끼곤 했다.

14년만의 전보

『아이들이 어디에서 살고 있을까? 흑인촌 같은 곳에 머물러 있지는

않을까? 병들지는 않았을까? 의붓아버지는 어떤 사람일까?』

생각은 염려를 낳았고 염려는 통증을 낳았다. 그렇게 지나기를 14년

이 흘렀을 때에 미국으로부터 긴 전보문이 날아왔다. 성탄절을 사흘

앞둔 날이었다. 전보는 둘째 은송이가 병이 들어 입원해 있는데 아

버지를 찾으니 와달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성탄절 예배를 끝내자마자 김포공항으로 달려갔다. 전보문에

적힌 주소를 찾아 미국 동부의 대서양 바닷가에 있는 플로리다 올랜

도란 도시로 갔다.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갔다. 병실 입구

에서 은송이의 어머니를 만났다. 나를 보고 주춤 놀라더니 말했다.

『와줘서 고맙습니다. 내 이야기를 좀 듣고 만나세요』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어디가 어떻게 아프기에 입원까지 하고

있습니까?』

『다름아니라 아이가 병이 아니라 신경이 날카로운 것으로만 알고

그냥 두었더니 학교에서 졸도를 했습니다. 아이를 입원시켰더니 높

은 열에 시달리며 「서울 대디(Seoul Daddy;서울 아버지)」를 자꾸

만 찾더라구요. 그래서 그동안 내가 잘못했음을 깨달았지요. 평소에

는 서울 아버지를 입에 올리지도 않고 잘 지냈었는데 병중에 헛소리

를 하며 서울 아버지를 찾으니 얼마나 서울에 있는 친아버지가 보고

싶었을까 생각했지요.

내가 중간에 들어 아버지와 아이들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구나, 지금

이라도 만나게 해주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전보를 쳤습니다. 연말에

바쁠 텐데 이렇게 빨리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는데, 그

간 가족을 돌보지 않는 인정없는 아버지라고만 생각하고 아버지와

아이들 사이를 가로막았던 일을 사과드립니다』

『나도 책임이 크지요. 좌우지간 얘기는 나중에 하고 아이부터 만나

봅시다』

병실로 들어갔더니 딸은 잠들어 있었다. 머리맡으로 다가가 불렀다.

『은송아, 서울에서 아버지가 왔다』

부녀의 재회

부르는 소리에 눈을 뜬 은송이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아― 대디. 오셨군요. 저를 보러 오셨지요? 미국에 다른 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저를 보러 오신 것이지요?』

『그럼 이 연말에 바쁜데 다른 일로 미국에 왜 오겠니. 네가 아프다

기에 모든 걸 다 제쳐두고 보러 온 거다』

『대디, I feel happy(행복해요)』

『그래. 네가 해피하다니까 나도 해피하다. 얼른 회복돼 아빠하고 여

행도 다니며 즐거운 시간 보내자꾸나』

『그래요, 대디. 이제 일어날 거에요. 옛날에 오빠와 나를 데리고 서

울 창경원에 갔던 일 기억나세요. 그때 날 목마 태워주고 아이스크

림도 사주었지요. 기억나세요?』

『아냐. 그게 언제적 이야기냐. 난 통 기억이 나지를 않는다. 너희들

과 헤어지던 때에 너희 나이가 두서너살밖에 되지 않았던 것 같은데

너는 어떻게 기억이 나니?』

『제가 기억하는 것이 아니구요. 스텝파더(stepfather;계부)가 우리에

게 hurt(상처)를 주면요, 오빠가 나를 데리고 다른 방으로 갔지요.

다른 방에서 오빠가 내게 말해주었어요. 서울에 있는 대디는 스텝파

더하고 다르다. 부드럽고 자상하시다. 옛날에 우릴 데리고 창경원 동

물원도 가주었고, 너를 목마도 태워주었고, 그리고 아이스크림도 사

주셨다고 말해주었지요. 그래서 내가 마음에 기억하고 있는 것이지

요』

그 말을 들으니 가슴이 아파 할 말을 잃었다. 가슴이 메고 눈물이

나서 딸이 잘 보이지를 않았다.

『그래 너희들 고생했구나. 이제부터 잘 하자꾸나. 회복되거든 창경

원이 문제냐, 디즈니랜드도 가고 그랜드 캐년도 가고, 아이스크림은

얼마든지 사먹자꾸나』

나는 동생 곁에 있는 아들 동혁에게 물었다.

『동혁아. 너희들을 만나니 너무나 행복하구나 너희들은 그동안 아

버지가 보고 싶지 않았니? 난 너희들이 보고 싶어 예수님께 기도했

었다. 「예수님, 미국에 있는 아들 동혁이와 딸 은송이를 만나게 도

와주십시오」하고 기도했었다』

『아버지, 왜 보고 싶지 않았느냐고 물으셔요? 나와 은송이는 한국

의 아버지를 만나 단 며칠만이라도 같이 살아보게 해달라고 태평양

쪽 하늘을 쳐다보며 기도했었습니다』

『그래, 그 말 들으니 가슴이 아프구나. 이제 만나게 되었으니 예수

님이 우리 기도를 들어주신 거야』

『대디, 난 지금 한국인교회에서 학생회 회장인데요』

『그래 훌륭하구나』

『그런데 얼마 전에 한 학생이 내게 물었어요. 너 김진홍 목사라고

아니?(Do you know Revelend Jin Hong Kim?). 그는 훌륭한 사람

이야(He is great man)라고 말했어요』

『그래?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니?』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그냥 고개를 숙이고 못 들은 척하였지

요』

『그래 너희들 고생하였구나. 지금이라도 너희를 만나게 되었으니

너희에게 도움이 되는 아버지가 되고 싶다. 내가 너희를 위해 뭘 도

와주면 되겠니?(What can I do for you?)』

『김진홍목사는 나의 아버지야』

무엇을 도와줄까 하고 묻는 나의 말에 아들은 가만히 생각하더니 고

개를 가볍게 가로저으며 말했다.

『다른 도움은 없어도 됩니다. 다만 친구들에게 김진홍목사는 나의

아버지야(Pastor Jin Hong Kim is my father)라고 말하고 싶어요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채널만 오픈해주세요』

나는 그 말을 듣고 가슴이 저미는 듯 아팠다. 그 자리에서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그래―. 이제부터나마 잘해보자꾸나』

그렇게만 이르고는 호텔로 갔다. 호텔방에 들어가 침대 커버를 벗겨

뒤집어 쓴 채로 나는 훌쩍훌쩍 울었다. 지난 20여년간 디디고 섰던

발판이 무너지는 듯했다.

내가 그간에 무엇을 했을까?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다고 하면서 빈민

촌에 들어가 살고, 빈민촌이 철거되자 농촌으로 들어가 바다를 개간

하고 두레마을을 세우며 보낸 지난 세월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듯

여겨졌다. 내 아들 딸은 미국 땅에서 병들고 기죽어 살아왔는데, 내

가 그간에 펼쳐온 사업들이 공연한 일들처럼 생각됐다.

그래서 나는 마음 속으로 이제 한국에서 하던 일들을 모두 그만두고

미국으로 와서 아들 딸의 아버지 노릇이나 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두레마을도 그만두고, 교회도 후임에게 물려주고 미국으로 와서 세

탁소를 하든지 식품가게를 운영하든지 하면서 그간에 못하였던 아버

지 노릇을 하여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밤을 새우다가 새벽녘에 성경을 펴고 읽었다.

「열왕기 상」 19장에서 로뎀나무 아래 앉아 용기를 잃고 하나님께

죽기를 구하던 엘리야의 이야기를 읽고는 문득 깨닫는 바가 있었다.

내가 이렇게 낙심하고 있어서는 안 되겠다, 어떻게 살아온 세월인데

지금에 와서 주저앉을 수 있겠는가를 생각하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더욱 열심히 일할 것을 다짐했다.

다음날 아른 아침 호텔을 나와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아들 동혁

이가 공항으로 배웅나왔기에 『내가 한국에 가서 일정을 잡아 다시

올 터이니 그때 며칠을 함께 지내자』고 일렀다.

그리고 4개월 후에 시간을 내 미국으로 가서 아들과 딸을 로스앤젤

레스로 불렀다. 사흘간 호텔에서 함께 지내고 난 후에 헤어질 무렵

그들에게 물었다.

『동혁아 은송아 너희들 14년이 지나 아버지와 3일을 함께 지내니

어떠냐』

아들이 한참이나 생각하는 듯하더니 신통한 대답을 했다.

『예 광야의 방황이 끝나고 이제 가나안 땅이 보이는 듯합니다』

나는 아들의 대답이 기막히게 좋은 표현이라 여겨져 그에게 말했다.

『너 참 좋은 표현을 하는구나. 너 꼭 목사아들처럼 말하네』

그리고는 내가 다시 물었다.

『너희들 아버지가 쓴 책 「새벽을 깨우리로다」의 영문번역판인

「I will awake the Dawn」을 읽었니?』

청계천 빈민촌에서의 생활을 쓴 책인 『새벽을 깨우리로다』는 출간

된 이래 판을 거듭하여 100판에 이르렀다. 그간에 일본어, 영어, 러

시아로 번역 출간됐고 금년(1998년)에는 중국어로도 출간되게 된다.

그 책이 영문판으로 출간되기 전에 미국 출판사에서 내게 서문을 써

달라는 요청이 왔었다.

영문판 『새벽을 깨우리로다』에 담긴 사연

그때는 아이들과 연락이 닿지 않았던 때인지라 서문을 쓸 때 말미에

『나는 이 책을 미국 어딘가에서 살고 있는 아들과 딸에게 바친다.

그들이 이 책을 읽고 아버지가 만난 예수가 어떤 예수이며 아버지가

왜 아이들과 함께 살 수 없었던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성령님이여 도와 주시옵소서』하고 글을 맺었었다.

그때 나는 그 서문을 넣은 봉투를 우체국으로 직접 들고가 등기로

부치면서 봉투지에 입을 맞추며 기도했었다.

『예수님, 이 책이 출간될 때에는 아들과 딸을 만날 수 있게 해주시

옵소서』

책이 출간되자 출판사에서 먼저 두 권을 DHL로 보내왔었다. 그런데

그때는 아이들 주소가 내게 왔던 때였다. 나는 「아들에게―」 「딸

에게―」 사인을 하고는 속달로 보냈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그들과

사흘을 지낸 후 책을 읽었느냐고 물었더니 읽었노라고 했다.

『그래 소감이 어떠하냐』

조심스레 묻는 나의 물음에 딸이 답했다.

『I am proud of you!(아버지가 자랑스러워요)』

나는 아버지가 자랑스럽다는 딸의 대답에 감격스럽기 이를 데 없었

다. 마치 14년간 막혔던 하수도가 탁 터지는 듯했고, 머리끝에서 발

끝까지 시원한 바람이 지나가는 듯도 했다. 지난 14년 세월에 아들

과 딸을 생각하며 얼마나 애를 태우며 고민을 쌓았던가. 그들이 어

느곳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마약이라도 피우지나 않을까? 행

여나 훗날 만났을 때 나를 거부하지나 않을까?

그렇게 온갖 생각을 하며 괴롭게 지냈는데 14년이 지난 지금에 만

나, 병들었던 딸이 아버지를 만난 이후 건강해지고 명랑해져서 아버

지가 자랑스럽다는 말을 해주니 그 기쁨을 비길 데가 없었다. 나는

눈물이 나는 것을 억누를 수가 없어 화장실에 들어가 한참이나 울다

나왔다.

그 뒤로 나는 태평양 쪽에 있는 도시 오리건 주의 포틀랜드에 조그

마한 아파트를 하나 얻어 아이들을 그리로 옮겨 살게 하고는 아버지

노릇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미국을 방문할 때는 오며가며 아이들

에게 들러 머물곤 했다.

한번은 서울을 떠난 비행기가 포틀랜드 공항에 도착하였더니, 남매

가 마중을 나와서는 공항에서 내게 종이 한 장을 주었다.

『아버지를 위해 우리가 마련한 선물을 드립니다』

『아― 그래? 무슨 선물이 종이 한장이냐?』

그 종이를 펼쳐보니 둘의 성적표를 한 장에 복사한 것이었다. 나는

놀라워 그들에게 물었다.

『야, 둘 다 스트레이트로 A잖아? 너희들 웬일로 이렇게 좋은 성적

을 받았니?』

『아버지를 만난 것이 고맙고 기뻐서요. 둘이서 결심을 하였지요. 우

리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서 공부를 열심히 하자고 결심했

지요. 그래서 좋은 성적이 나왔기에 아버지께 선물로 드리는 겁니

다』

『그래! 참 고맙다. 너희들이 건강해진 것도 고맙고 더욱이나 공부들

을 잘할 수 있게돼 더욱 고맙다』

한국의 두 아들

각설하고 은송이를 처음 만나고 돌아온 후에 한국의 두 아들에게 미

국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나는 아내가 두 아이를 데리고 미국으로 떠난 뒤 7년 반을 혼자 있

다가 가정을 이루었다. 천주교나 불교에서는 성직자들의 독신생활이

제도화돼 있어 혼자서도 무난히 지낼 수 있었으나 개신교에서는 성

직자가 독신으로 지내기가 거의 불가능하였다. 성도들의 가정을 방

문할 때나 병석에 누울 때가 문제였다.

7년 반을 견디다가 결혼을 한지라 아들들이 어려서 은송이를 만나고

왔을 때는 위의 아이가 초등학교 5학년, 아래 아이가 3학년이었다.

내가 그들에게 미국에 가서 형과 누나를 만나고 온 이야기를 했더니

그들은 놀라는 모습으로 나를 보다가 한 녀석이 말했다.

『아버지, 그럼 우린 첩(妾)의 아들이야?』

나는 의외의 물음에 할 말을 잊고 가만히 있었다. 이것이 도대체 무

슨 말이냐? 어떻게 그런 의문이 마음 속에 떠오를까 싶어 기가 찼

다. 아내에게 나무라는 말을 했다.

『여보, 당신 내가 아이들을 보러 미국에 갔을 때 애들에게 사정을

설명해주었어야지. 내가 애들에게서 이런 말을 듣게 됐어요?』

그러자 아내라고 할 말이 없을 수 없었다. 아내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당신이 저지른 일을 왜 나에게 그러세요. 당신이 애들에게 제대로

설명을 하시구려. 난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당신 정말 그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올 거야?』

나는 아들의 물음에 당혹하여 어떻게 답할 바를 모르고 곤혹스러워

했다. 오래도록 아픔으로만 남아 있던 밖의 두 아이를 만나고 나니

이제 안에 있는 두 아들이 문제가 될 줄은 생각도 못했었다.

그때 남미 브라질에서 장문의 팩스가 왔다. 한 달간 남미 4개국을

순회하며 열기로 계획돼 있던 집회를 취소한다는 내용이었다. 1년여

전부터 남미쪽에서 사람이 오고 그간에 전화 팩스가 연속으로 오곤

해서 어렵사리 결정됐던 집회였다. 그 집회들이 취소된 이유는 나의

가정문제였다. 목사답지 못하게 이혼을 하고 자녀들을 돌아보지도

않는다는 여론이 현지에서 일어나 집회 강사를 바꾼다는 통보였다.

팩스 말미에는 「그런 비인격적인 사람을 강사로 세울 수 없기에 초

청을 취소한다. 앞으로는 나다니지 말고 자신을 반성하며 가만히 있

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충고까지 곁들여 있었다.

나는 『비인격적인 사람이라…. 말이 되네』하고 중얼거리며 팩스를

서랍 속에 넣고 말았다. 그런데 눈치빠른 아내가 곁에서 보고는 물

었다.

『무슨 내용인데 그렇게 말도 없이 서랍에 넣나요?』

『아-니 신경쓸 것 없어』

『신경 좀 씁시다』

아내가 서랍을 열고 팩스는 꺼내 읽고서 말했다.

『내가 비인격적인 사람과 함께 사는구먼요―』

『모처럼 한 달이란 시간을 벌었으니 푹 쉽시다』

『그럽시다. 애들과도 시간을 가지고…』

그런데 며칠 후 유럽 쪽에서 요청이 왔다. 유럽내 몇 도시에서 순회

집회를 인도하여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차제에 아내와 아들들과 함

께 유럽을 여행하며 가족들과 단합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

다는 생각을 하고 주최측에 연락했다.

『마침 한 달간 시간이 있어 그쪽 요청에 응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

데 한 가지 청이 있는데 들어줄 수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목사님 무슨 요청이신데요』

『유럽 여행중에 가족들과 시간을 좀 가지고 싶으니 이왕이면 아내

와 두 아들이 함께 다닐 수 있게 배려를 좀 해주었으면 합니다. 가

능할는지요』

『아이고 목사님 가능하구 말구요. 그렇게 합시다. 저녁에는 집회 인

도하시고 낮에는 가족들과 관광을 하시도록 우리가 주선하겠습니다.

아무 염려 마시고 가족과 함께 오십시오』

베드로성당에서의 기도

이렇게 돼 남미 여행이 바뀌어 유럽 여행을 하게 됐다. 그런데 유럽

의 성베드로 성당을 방문하였을 때다. 성당 한 쪽에 베드로의 동상

이 있고 그 동상의 발가락에 입을 맞추고 소원기도를 드리면 그 소

원이 반드시 성취된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래서 관광객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베드로 동상 앞에 줄을 서고

있었다. 당연히 우리 가족들도 긴 줄에 서 있었다. 초등학교 5학년

이었던 큰 녀석이 앞줄에 서 있었는데, 그의 차례가 오자 베드로 발

가락에 입을 맞추고는 소리내 기도를 드렸다.

『예수님, 나는 아버지처럼 두 번 결혼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그 말을 들었을 때 내 느낌은 언어로는 표현하기가 불가능하다.

내가 철학교수가 되는 길을 버리고 신학교로 갔을 때는 나름대로 야

심이랄까 포부랄까 하는 생각을 지니고 갔었다. 나는 목사가 돼도

시시한 목사가 되지 않고 일급 목사가 되겠다는 야심을 가졌다. 그

런데 세상살이가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어서 목사가 된 후에 이런

저런 문제가 생겨서 일급목사는커녕 꼴찌를 따라가기에도 어려운 목

사가 되었으니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이런 처지에 대해 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단어가 하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30세에 빈민촌에 들어간 이래 잘 해보려 애썼지만 잘 하지를

못했다. 허물이 생기고 흉거리가 생겨 사람들의 질타를 받는 일도

생겼다. 그러나 그렇다고 움츠러들어 일을 중단하거나 머뭇거리고만

있을 것이냐?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다.

내가 잘 해보려 하였지만 잘못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주인 예수

님은 나를 인정하고 나를 격려하여주고 계신다. 그 이상 보람찬 것

이 무엇이겠는가? 어차피 예수의 머슴으로 나선 이상 예수께서 인정

해주시면 그것으로 넉넉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

고(In Spite of-)』를 자주 되뇌고 한다.

새로운 출발

각설하고 출옥 후에 있었던 일로 되돌아가겠다. 출옥 후에 부딪혔던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하나하나 해결해 나가면서 그간에 와해됐던 지

역사회 조직을 복구하기 시작했다. 주민회를 재결성하고 각 분과위

원회 활동을 강화하여 새출발의 기틀을 다져나갔다.

나중에 알게 된 이야기지만 내가 감옥에 들어간 이후 중앙정보부에

서 대공사찰요원 4명이 마을에 들어와 상주하면서 마을 사정과 활빈

교회 활동 등을 정밀조사하였다. 혹시나 기독교로 위장하고 빈민촌

에 침투한 공산주의 프락치가 아닐까 하는 우려에서였다.

몇개월을 빈민촌에 살면서 분석하고 평가한 결론을 듣고 나는 실소

(失笑)를 금할 수 없었다. 다름아니라 김진홍은 「자생 공산주의자

(自生共産主義者)」란 결론이었다. 즉 김진홍은 북한측과 접선된 공

산주의자가 아니라 스스로 자습해서 생겨난 공산주의자란 뜻에서 자

생공산주의자란 이름이 붙게 된 것이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굳이 공산주의자라고 하려면 「성서적 공산주의

자」라고 불러야지 그냥 공산주의자라고만 부르면 여느 공산주의자

와 구별이 되지 않잖느냐고 말했다. 그렇다면 여느 공산주의자와 성

서적 공산주의자의 다른 점은 무엇일까? 굳이 비교해보자면 흔히 말

하는 공산주의자는 역사를 움직이는 주체가 「물질」이라고 생각하

는 반면, 성서적 공산주의자는 하나님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감옥에서 나온 후 지역안의 주민회 조직을 점검하고 강화하여나가고

있는 중에 갑자기 서울시로부터 판자촌을 전면 철거한다는 통고장이

날아왔다. 청계천 전 지역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지하철 차고를 세

운다는 계획이었다.

그리고 정부는 판자촌 철거정책을 안보차원에서 추진한다고 발표했

다. 나는 정부의 한 고위층 인사를 만나 『판자촌 철거가 왜 안보와

관계가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월남의 예를 들어 설명했다.

『월남이 베트콩에 패망할 때에 사이공시가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무너졌다. 그 이유는 사이공 시 한복판에 「초롱가」란 빈민촌이 있

었기 때문이다. 마치 서울시의 청계천 빈민가와 흡사한 형태의 빈민

촌이다. 이 초롱가에 베트콩세력이 대거 잠복해 있으면서 세력을 넓

히고 무기를 비축했다. 사이공이 함락되던 날 초롱가에서 무기를 든

게릴라들이 쏟아져 나와 사이공시는 일순간에 혼란에 빠져들었다.

이것이 사이공시 함락의 실마리가 되었다. 한국정부로서는 서울이

사이공의 재판이 되게 할 수는 없다.

서울시 중심가에 수만 세대의 빈민촌이 형성돼 있는 것은 만약의 사

태에 큰 혼란이 일어날 화근이 될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청계천 빈

민촌은 미리 정리해야 한다. 예를 들어 서울시에 대포 몇 방이 떨어

지게 된다면 그 많은 판자촌 주민들이 어느 편을 들는지 김전도사는

장담할 수 있겠느냐. 확실히 말할 수 없을 게다. 그러니 청계천 빈민

촌 철거문제를 안보차원의 정책이라 말하는 거다』

한 빈민촌 주민의 북한관

이상이 정부의 고위층 인사가 내게 들려준 말이다. 이 말을 들으며

나는 지난번 남북 적십자 회담이 발표됐을 때 지역 주민 한 분이 나

를 찾아와서 한 말이 생각났다.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이 북한을 방문

했다는 보도가 났을 때다.

『김진홍 전도사님 이제 좋은 세상 올 것 같습니다』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좋은 세상이라니요』

『전도사님은 신문도 못 보고 라디오도 못 들었습니까? 이북과 통하

게 된다는 소식 못 들었습니까?』

『물론 나도 들었습니다만. 이북과 통하게 되는 것과 좋은 세상 오

는 것이 어떤 관계가 있는데요?』

『전도사님, 사실이 그렇잖습니까. 이북은요 먹는 밥과 사는 집은 나

라에서 배급으로 준답니다. 그러니 철거 걱정, 양식 걱정은 안 해도

되는 세상 아니겠습니까』

『그건 그렇다지만 자유가 없다지 않습니까?』

나의 말에 그는 나를 이상한 사람이라는 듯 가만히 쳐다보더니 말했

다.

『전도사님, 통 모를 말씀을 하시네요. 배고픈 놈이 자유는 무슨 말

라빠진 자유입니까! 전도사님은 지금 자유를 가지고 있습니까? 내가

가진 자유는 굶는 자유 밖에 없습니다』

나는 깜짝 놀라 그에게 말했다.

『우리에게 지금 배 고픈 자유밖에 없다고 하시지만 한 가지 자유가

있습니다. 북한에서는 강제로 시키는 일만 해야 한다지만 여기 남한

에서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거리를 찾아 스스로 일하고 스스로 잘 살

게 될 자유가 있잖습니까?』

『전도사님 제발 부탁인데요. 그런 일감이 있걸랑 저에게 소개 좀

해주시오. 내 눈에는 그런 일거리가 도무지 보이지 않는구먼요』

그는 10여년의 빈민촌 생활에 지치고 지쳐 자포자기 상태에 이른 사

람이었다. 그는 자기 집이 철거당할 때에 분을 참지 못해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다.

『이눔들아, 이남 땅에 살 집이 없응게 북한으로 보내주라 이눔들

아―』

이로 인해 철거반원들에게 몰매를 맞고 집은 나무 토막 하나까지 모

두 분질러졌다. 다음날 누군가에게 끌려가더니 닷새 후에 되돌아왔

다. 그리고는 말이 없는 사람으로 바뀌었다.

비상 대책회의

서울시가 보낸 전면 철거 통고장을 받은 우리는 활빈교회당에 마을

대표들을 모아 대책을 세우는 토론을 했다. 회의에 회의를 거듭하고,

토론에 토론을 거듭했어도 뾰족한 해결책이 나올 게 없었다. 문제의

핵심은 정부가 강행하는 철거작업에 순응하느냐, 아니면 전 주민의

힘을 결속해 철거작업을 저지하느냐, 둘 중에 하나는 택해야 했다.

서울시가 철거민들에게 보상하는 내용은 세대당 15만원을 지급하거

나 서민아파트 입주권을 주는 것이었다. 아파트 입주권은 숫자도 제

한돼 있었지만 입주권을 얻게 되더라도 입주금 1000여만원을 부담해

야 했기에 철거민들에게는 그림에 떡이었다. 남은 길은 15만원의 현

금을 받아 제 갈 길로 떠나는 것인데, 서울시내에서는 그 돈으로는

사글세 얻기도 힘들었다.

우리는 교회당에 모여 토론에 토론을 거듭했으나 신통한 방안을 찾

지 못했다. 더구나 내가 옥중에 있는 동안 와해된 주민조직이 재조

직된 후로 아직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지 못했던 때여서

더욱 난감했다. 여러 날에 걸친 토론의 결과 서울시의 철거정책에

순응키로 하고 우리들은 그 대안으로 두 가지 사업을 추진키로 했

다.

첫째 사업은 서울시 어느 곳에 주민들이 공동으로 땅을 구입하여 연

립주택을 짓는 계획이었다. 「내 집 갖기 운동」이라고 이름붙인 이

사업은 제정구 군이 지도키로 했다.

둘째 사업은 빈민촌 주민들 중에서 지난날 농촌에서 농사 짓다가 올

라온 이농민은 농촌으로 다시 돌아가는 「활빈귀농 개척단」 사업이

었다. 이 사업은 내가 주도키로 했다.

제정구가 주도한 내집갖기 운동은 240세대가 지원해 잠실 쪽 방이동

에 대지를 구입했다. 참여하는 각 세대가 10평씩 배정받아 연립주택

을 세우는 사업이 추진됐다. 그러나 서울시가 건축허가를 내주지 않

았다. 골머리를 썩이던 빈민촌과 활빈교회가 없어지는 판에 다른 지

역으로 옮겨 앉는다는 것은 또 다른 불씨를 키우는 것이라 여겨 아

예 건축 허가를 내주지 않는 것이었다. 240세대의 주민들은 방이동

대지 위에 천막을 치고 겨울을 지내며 버텼으나 실패로 끝나고 말았

다.

제정구 군은 여기서 실패한 경험을 살려 다른 판자촌 지역인 신림동

지역으로 옮겨가, 거기서 주민조직 활동에 성공해 철거민들이 경기

도 시흥으로 집단이주하는데 성공했다. 시흥에 「복음자리」란 이름

으로 판자촌 철거민 정착촌을 세우는 데 성공한 그는 그 공적으로

막사이사이 상을 받았고, 그 지역에서 국회의원이 돼 국사에 중추적

인 인물로 활약하고 있다.

귀농의 마음들

한편 집단귀농사업 역시 우여곡절을 거치며 추진돼갔다. 서울시의

철거경고장을 받고 그 대책을 논의하려고 모였던 주민회의에서 한

주민이 발언했다.

『나는 전남 신안군 한 섬에서 올라온 사람입니다. 손바닥만한 농토

를 대대로 부쳐먹던 빈농생활이 지겨워 지게꾼 노릇이라도 하겠다고

서울로 왔었습니다. 그런데 지게벌이는 용달차에 다 빼앗기고 이 마

을에 들어와 굶기를 밥 먹듯하며지내왔습니다. 이제 그나마 몸 부치

고 살던 판잣집도 철거하겠다니 이제 서울생활이 진력이 나서 꼭 농

촌으로 되돌아가고 싶습니다. 흙으로 돌아가서 땀 흘려 일해서 세금

도 내고 자식들도 교육시키고 사람 사는 듯이 살아보고 싶습니다.

그런데 떠나온 고향에는 손바닥만하던 땅도 처분하고 타버렸으니 발

디딜 틈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의논해서 어딘가에 농사지을 땅만 구

할 수 있다면 나는 지금 당장이라도 그리로 떠나겠습니다. 여러분들

의견은 어떠신지요?』

그의 발언에 대한 반응이 의외로 좋았다. 좌중 여기저기서 『옳소!』

『그거 좋은 생각이오!』 『공감이오』 하고들 반응을 보였다. 나는

그런 분위기를 접하고 처음으로 「이들이 지난날 떠났던 농촌을 그

리워하고 있구나」 하고 느꼈다.

그의 발언에 이어 또 한 분이 일어서서 말했다.

『방금 발언하신 분의 말에 나도 적극 공감입니다. 나는 경남 합천

에서 왔습니다. 땅마지기나 지키고 남부럽잖게 살았었는데 그놈의

노름판에 끼어드는 통에 노름빚으로 재산 다 날리고 하는 수 없이

처자식 거느리고 서울로 올라왔다가 이 뚝방촌까지 흘러 들어왔시

다. 배운 재주라고는 농사 밖에 없던 사람이 이 서울바닥에 와서 겪

은 고생을 생각하면 치가 떨리오. 내 심정도 제발 몇마지기 땅만 있

으면 그리로 가서 농사짓고 평생 그곳에 살다 묻히고 싶소이다. 그

러나 이 사악한 세상에 어디 가서 그런 농토를 구하겠소이까?』

이야기의 흐름이 이렇게 흘러가자 내가 일어서서 말했다.

『여러분, 잠깐 제 말에 귀를 기울여주십시오. 나는 오늘 이 자리에

서 저로서는 생각도 못했던 발언들을 듣고 놀랐습니다. 의외로 여러

분 중에 많은 분들이 버리고 떠나온 농촌을 그리워하고 농촌으로 되

돌아갈 꿈을 꾸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땅 구하는 일은 그렇

게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란 생각이 듭니다. 우리 나라가 비록 땅은

좁고 인구는 많다 하지만 아직은 놀고 있는 땅들이 전국 곳곳에 있

을 것입니다. 그런 땅들 중에 잘 교섭해서 우리가 집단으로 들어가

농사 짓고 살게 된다면 우리 좋고 나라에 좋고 노는 땅 개간해서 좋

고 식량 증산되어 좋고 다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이제부터

그 땅을 어떻게 구할 것인지에 대한 의논들을 해봅시다. 옛말에 사

나이 셋이 모이면 안 되는 일이 없다 했는데 우리가 이렇게 많이 모

여 머리를 짜내면 땅 구하는 일도 걱정없을 것입니다』

『옳은 생각이오. 그 말이 맞습니다. 땅 구할 길을 찾아 우리 함께

그리로 들어가서 농사짓고 자식 키우며 사람답게 살아봅시다』

활빈귀농개척단의 결성

이런 토론과정을 거쳐 활빈귀농개척단(活貧歸農開拓團)을 조직했다.

귀농사업단 계획이 철거를 앞둔 주민들에게 발표되자 수백 세대가

앞을 다투어 신청했다. 100세대를 1차로 선발하여 제1차 활빈귀농개

척단을 결성했다.

개척단은 단원 중에서 6명을 뽑아 2명씩 3조로 나누어 정착대상지

답사를 보냈다. 1조는 휴전선 부근의 유휴지를 답사하고, 2조는 강원

도 산간지방을 답사하고, 3조는 경기도 화성군의 남양만 간척지를

답사하여 귀농정착이 가능한지 여부를 조사보고케 했다. 조사팀이

현지조사를 마치고 돌아온 후에 교회당에 단원들이 모여 그들의 보

고 내용을 검토했다.

결론은 휴전선 부근의 유휴지가 가장 적합하겠다는 결론에 이르렀

다. 대개가 군대를 다녀온 사람들인지라 군복무 시절 휴전선 부근에

서 노는 땅들을 숱하게 보아온 기억이 되살아나 그리로 가면 원없이

농사를 지을 수 있을 것이란 생각들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정부에 보낼 진정서를 작성했다. 철거를 앞두고 지금

서울시가 제시하는 정책은 우리가 따르기 어렵다. 서민아파트 입주

권이 좋긴 하나 우리들로서는 입주비 1000여만원을 부담할 능력이

없다. 그리고 세대당 지급하겠다는 15만원으로는 사글세 얻기도 부

족하다. 그래서 논의에 논의를 거듭한 결과 떠나온 농촌으로 되돌아

가 농사짓고 세금내고 자식들을 기르며 사람답게 살기를 원한다. 그

러나 우리들이 지난날 살았던 농촌은 이제 돌아가도 발붙일 땅도 집

도 없으니 우리가 가서 개척민으로 살아갈 땅을 할애하여 달라. 우

리가 들어가기 원하는 땅은 휴전선 부근의 임자없는 땅이다. 6·25

전쟁 이전에는 훌륭한 농토였으나 전란통에 주인들은 흩어지고 황무

지로 남아 있는 땅으로 우리를 보내달라. 거기서 스스로 땀 흘려 개

척자들로 살아가겠다. 이런 요지의 글을 써서 서울시장 앞으로 발송

했다.

중앙정보부로 연행되다

그런데 그런 진정서를 보낸 뒤 이틀이 지나고 사흘째 아침이 되자

난데없이 까만 지프가 3대나 빈민촌으로 들이닥치더니 제각기 김진

홍을 찾았다. 분위기가 살벌하고 기세가 등등했다. 또 무슨 일인가

하여 나갔더니 그들 중에 한 명이 나서며 내게 말했다.

『수고스럽지만 좀 가주셔야겠습니다』

『가다니, 어디로 가자는 게요』

『가보면 압니다』

『여보시오. 왜 이러시오. 최소한 어디로 가는지나 알아야 할 거 아

니오』

『남산으로 좀 가십시다』

『그래요. 요즘 정권안보하느라 바쁘실 텐데 우리 같은 조무래기한

테 자꾸 신경을 쓰시오. 일이나 하도록 그냥 두시지 왜 또 찝쩍거리

는 게요』

『우리가 뭘 압니까? 데려오라니 심부름 온 게지요』

나는 무슨 일인가 하여 모여드는 주민들에게 미소를 지으며 『곧 다

녀오겠습니다. 별일은 없을 겝니다』 하고는 지프에 탔다. 차는 남산

산기슭으로 가더니 눈에 익은 골목길로 들어가서는 조사실로 갔다.

그리고는 매눈같이 날카로운 눈을 한 조사관이 묻기 시작했다. 그의

손에는 우리 개척단이 서울시장 앞으로 보낸 진정서가 들려 있었다.

그는 그 진정서를 뒤적이며 내게 묻기 시작했다.

『김진홍, 이런 진정서를 보낸 의도가 뭔가?』

『의도요? 그 안에 의도를 충분히 썼을 터인데요?』

『글쎄 쓰긴 했는데 빈민들을 집단으로 데리고 휴전선 땅으로 들어

가겠다는 숨은 의도가 무엇인지를 묻는 거지』

『숨은 의도라니요. 거기에 무슨 숨은 의도가 있갔시요. 글자 그대로

노는 땅에 가서 농사짓고 살겠다는 거지요』

『말 그대로는 좋은데 다른 의도가 있는 것 같아서…』

『도대체 무슨 생각하고 있는 겁니까? 다른 의도라니요. 예를 들어

무슨 의도인데요?』

『예를 들어 가난한 사람들하고 휴전선 부근에 모여 있다가 적당한

시기에 집단 월북을 한다든지…, 그리고 그쪽에 있으면 북쪽과 접선

하기도 쉬울 테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세상에 어떻게 머리가 그런 쪽으로 돌아가는지

신기했다.

『아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우리가 월북을 한다고요? 내

나라 내 땅 두고 왜 그쪽으로 갑니까?』

『김진홍, 음흉스럽게 숨기지 말고 터놓고 말하자구. 청계천 빈민촌

주민들은 북쪽을 더 좋아한다며… 집 주고 배급 주고 하는 곳이라

고, 그쪽을 더 좋아한다는데…. 여기는 매일 철거만 하고 사람 대접

안하는데 집도 땅도 새끼들 교육도 무상으로 주는 북을 더 좋아한다

는 말이 있어…』

『여보세요. 그런 간 떨어질 소리 마세요. 내가 그들 속에서 몇년을

살아보니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 순수하고 나라 사랑하는 마음도 지

니고 있습디다. 모처럼 농토 찾아 들어가 황무지를 개간하여 사람답

게 살고 싶다는 주민들의 좋은 맘을 그렇게 곡해하지 마시라요』

『여하튼 정부 입장으로는 휴전선은 안 돼. 북쪽이 너무 가까워. 김

진홍 자네 생각은 그렇지 않다쳐도 같이 간 사람들 중에 몇명이라도

북쪽으로 넘어가버리면 자네도 책임을 면할 수 없게 돼』

『꼭 그렇다면 휴전선에서 떨어진 곳으로 보내주시라요. 제주도도

좋고 부산이든 여수든 우리는 땅만 있으면 그리로 들어가서 농사짓

고 살려는 겁니다. 굳이 휴전선 쪽이라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거기

에 노는 땅들이 있다기에 그곳으로 가려는 거지요』

『그건 내 선에서 답할 문제가 아니고 좌우지간 휴전선 쪽은 안

돼…』

남양만으로 대이동

이런 대화를 나눈 후에 나를 집으로 데려다주었다. 나는 개척단 단

원들을 모아 다시 회의를 열었다. 휴전선 쪽이 허락이 안 된다면 두

번째 후보지로 경기도 화성군 간척지를 대상지역으로 계속 추진키로

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남양만 간척지가 선택된 것이

다.

우리는 서울시와 농수산부, 청와대 등에 진정서를 다시 보냈다. 화성

군에 있는 남양만 간척지로 철거민들을 보내달라, 거기서 땅을 가꾸

며 농사짓고 민주시민으로서 당당하게 살아가겠다는 내용을 담은 진

정서였다. 처음에는 역시 거절당했으나 끈질긴 교섭 결과 1차로 50

정보의 논을 확보케 되었다.

75년 말에 선발대가 현지에 도착하여 기초작업을 시작했다. 남양만

간척지에는 불과 8.2km의 바다를 막으면 960만평의 넓고 넓은 뻘밭

이 농지로 바뀔 수 있었다. 선발대가 현지에 도착했을 때에는 넓은

땅에 바다풀만 무성했다. 이런 소금땅을 개간해 농토를 만들고 산기

슭을 밀어 집을 짓고 마을을 세울 것을 생각하니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

넓은 바다 한가운데서 조각배를 탄 기분이었다. 바다를 막는 제방을

쌓고 있는 지역인 이화리에 터를 잡았다. 헛간 하나를 빌려 연락처

겸 사무실로 삼고는 정착사업을 시작했다.

1975년 11월이 지나 초겨울의 쌀쌀함이 느껴지는 때에 우리 활빈귀

농개척단은 서울을 떠나 남양만 갯벌로 향했다. 트럭을 수십대 빌려

판자집 뜯은 자리에서 건진, 쓸 만한 나무토막들과 냄비 담요 등을

싣고는 서울을 떠났다. 비포장도로를 알리느라 흔들리는 트럭 위에

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가족들의 모습을 보며 인솔자인 내

마음은 실로 난감했다.

겁도 없이 괜한 일을 벌인 것이나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농사

경험도 없고, 예산도 없는 터에 수백명을 데리고 갯벌로 들어가는

것이 무모하고 어리석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

도자가 되어 그런 불안한 생각이나 모습을 나타낼 수도 없어 혼자

속으로만 삼키고 태연한 척할 수밖에 없었다. 남양만에 가까이 오니

길이 너무 험하여 트럭 위에 앉아 있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그런 중에서도 남양만 갯벌의 넓은 땅이 보이니 모두들 『히야―.

넓은 땅이구먼―』 하고 탄성을 질렀다. 그 순간에는 모두가 기대에

넘치는 얼굴들로 변했다.

그러나 갯벌로 접어드니 얼마 전 비가 온 뒤라 길바닥이 미끄럽기가

빙판길이나 다름 없었다. 트럭이 미끄러지고 도랑으로 빠져 감당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트럭을 세우고 처자식들은 트럭에 앉아 있고

남정네들이 내려 삽으로 길을 만들면 차가 뒤따라왔다.

황량한 남양만 갯벌에서

그때부터 나는 지도자란 길 없는 곳에 길 닦는 사람이거니 생각한

다. 그래서 나는 지도자란 말은 한문으로 쓸 때는 길 도(道)를 넣어

「指道者」로 쓴다. 그리고 선교란 길이 없는 곳에 길을 만들어 나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하셨음에 따라 길 되신 예수님의 뜻을 따라 길 없는 곳

에 길을 열어나가는 것이 바로 선교라 생각한다.

농촌에서 농민들이 살아갈 길이 없을 때에 농민들의 살 길을 열어나

감이 농민선교요, 산업사회에서 산업에 길이 없을 때에 경영자들과

노동자들이 더불어 힘을 합하여 산업을 일으키는 길을 찾을 때 그것

이 산업선교다. 그리고 지금처럼 민족이 분단된 지 반세기가 지난

지금에도 통일할 길이 보이지 않는 때에 민족통일의 길을 찾아나가

는 것이 바로 통일선교다.

남양만 갯벌에 도착한 우리는 먼저 천막을 쳤다. 그리고는 화장실을

지었다. 천막 몇 가정씩이 모여 공동체 생활을 하며 개척자의 생활

을 시작했다.

남양만 간척지 960만평에는 이런 저런 사연을 따라 1200세대가 모여

15개 마을을 새로 이루게 되었다. 처음에 우리는 15개 마을 중에서

한 마을을 이루어 함께 살기로 계획하고 정부에 그렇게 요청했다.

그러나 그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우리가 구상하는 공동체 생

활이 북한의 집단농장 형태와 비슷해 우리 체제에서는 합당치 않다

는 것이었다. 또 서울에서 워낙에 악명을 「날렸던(?)」 활빈교회와

그 주민들인지라 한 마을에 모여 있으면 다루기가 어려울 것이란 생

각에서 한 곳에 모여 사는 것을 허락지 않았다.

우리 활빈귀농개척단 단원들은 15마을 1200세대 속에 흩어져 살게

됐다. 처음에는 우리가 완강히 반대했으나 다시 생각해보니 그리 나

쁜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우리 활

빈운동의 터전이 남양만 지역 전체로 넓혀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

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행정관청의 계획에 순응하기로 하고 남양만 지역의

15개 마을에 골고루 흩어졌다. 그렇게 되니 생각하던 대로 전지역의

주민들이 우리들의 활동하는 범위에 들게 되었다. <다음호에 계속>

경기도와 충청남도 사이에 아산만(牙山灣)이 있고, 아산만의 경

기도 쪽 입구에 남양만(南陽灣)이 있다. 그 남양만에서 육지와

바다를 잇는 목을 막아 60만평의 농지가 개간됐다. 농지는 행정

구역상 절반은 화성군에 속하고 나머지 절반은 평택군에 속한다.

그런 땅에서 모두 1200세대가 새 농촌을 세우는 일에 도전했다.

1200세대 중에는 460세대가 서울에서 내려간 사람들이었고, 그중

에서도 50세대가 활빈교회 교인들이었다.

처음에 우리 50세대는 한마을을 이루어 이스라엘의 키부츠처럼

협동농장을 세우려 했다. 그러나 행정당국은 공산주의식 집단농

장 같은 느낌이 든다고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활빈교회 교

인 50세대는 15개 마을에 골고루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돼 남양만 지역 1200세대, 15개 마을 전체를

하나로 조직할 수 있게 됐고, 각 지역에 일곱 교회가 동시에 세

워질 수 있었다.

우리는 각 세대가 배정된 마을로 들어가 먼저 화장실을 짓고, 이

어서 갯벌 위에 천막을 쳐 공동생활을 하며 소금땅을 농토로 만

드는 일을 시작했다. 농자금도, 장비도, 경험도 무엇 하나 제대

로 갖추지 못한 우리는 삽과 괭이만을 들고 소금땅에 도전했다.

갯벌 바닥에 수로를 닦은 뒤 남양호 물을 끌어들여 소금기를 없

애는 일에 겨울 한철을 보냈다. 한겨울의 바닷바람은 차고 매서

웠다. 그 바람을 견디며 겨울을 지냈더니 손등이 터져 피가 흘렀

다. 우리는 손등에 흐르는 피를 혓바닥으로 핥으며 삽질을 거듭

했다. 그리고 소금물에 전 손톱들이 일어나 뒤로 젖혀지면, 그것

을 반창고로 싸매면서 일을 했다.

무엇보다도 힘들었던 것은 먹을거리 문제였다. 갯벌 바닥에 천막

을 치고 합숙생활을 하는 터에 제대로 된 주방과 식탁을 마련할

수 없었다. 큼직한 가마솥을 걸어두고 보리쌀 한 말을 부은 다음

바다에서 건진 망둥이, 숭어, 새우 등을 넣고 끓였다. 산과 들에

서 소나 토끼가 먹는 풀이면 사람에게도 해가 되지 않으려니 생

각해 그것들을 채소 대용으로 먹었다. 아카시아 잎이나 질경이,

비름나물, 쑥 등이 우리의 채소가 된 셈이다.

저축 장려 운동

남양만 곳곳에 세워진 일곱 교회가 주민봉사활동과 지역사회 개

발사업의 중심이 됐다. 교회당 건물들은 낮시간에는 탁아소가 됐

다. 600여명의 아이들을 27명의 교사가 돌봤다.

그런 상황에 나는 마을 은행인 「남양만신용협동조합」을 설립해

저축운동을 폈다. 나는 탁아소 교사들을 앞세우고 지역내 가정을

방문하며 저축을 권면했다. 『10원이든 20원이든 주머니 속에 두

지 마시고 저축합시다. 흩어져 있으면 별 쓸모없는 잔돈이지만

모이면 생산자금으로 바뀝니다』하고 다니니 주민들이 나를 보며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목사님 정신 있는기요? 없는기요? 정신 차리시라요』

『왜 그러세요?』

『지금 끼니도 제대로 못 챙겨 죽도 아니고 밥도 아닌 꿀꿀이죽

을 먹고 지내는 터에 저축은 뭔 저축이야요. 목사님, 아직 치매

걸릴 나이도 아니신데 왜 그러고 다니세요?』

『그건 모르는 말입니다. 먹을 것이 있는 사람들은 저축을 안 해

도 되지만 우리처럼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은 저축해야 합니다.

있는 사람들은 언제든 가진 것으로 살아갈 수 있지만 우리처럼

갯벌 바닥에 내려와 맨몸밖에 없는 사람들은 무슨 희망으로 살겠

습니까? 각 가정에 흩어져 있는 푼돈들을 모아 목돈으로 만들어

생산적인 일에 투자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 장래가 있습니다. 지

금 굶을수록 저축하고 투자해야 미래가 열립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저축하면서 살자는 내 말에 일반주민들

보다 교인들의 반대가 더 심했다.

『목사님, 어리석은 짓 하지 마세요』

『왜요?』

『그러잖아도 돈이 없어서 교회 헌금도 못 하는 형편인데 저축하

고 나면 헌금을 더 못하게 되잖아요』

『그렇지 않습니다. 돼지도 길러서 잡아먹듯이 교인들에게 헌금

하게 하려면 먼저 경제력을 길러줘야지요. 지금 헌금한들 얼마나

하겠습니까? 부자 되게 만들면 헌금도 제대로 할 것 아닙니까?』

주민과 교인들에게 이런저런 핀잔과 비난을 들으면서도 나는 열

심히 저축을 권유하고 다녔다. 그런데 가장 자주 들려오는 핀잔

은 『그렇게 저축하여 기금을 만들어두면 엉뚱한 사람들이 챙긴

다』는 불신감이었다.

『목사님이 동네방네 다니며 애쓴 일이 결국 도둑놈 키우는 일밖

에 되지 않을 겁니다』

『그건 뭔 말씀이세요?』

『우리 한국 사람, 누굴 믿어요? 나중에 엉뚱한 놈이 그 돈 가지

고 도망가버리면 목사님만 어려워지지 않겠어요?』

『글쎄요. 그렇게만 생각하면 아무 일도 못하지요. 혹시 신용조

합에 사고라도 난다면 제가 책임을 져야지요. 다른 사람을 못 믿

으시겠으면 날 믿고 저축하세요. 절대로 잘못되지 않도록 제가

책임을 지겠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신용조합이 이제는 160억원의 자산을 이뤘다. 농

촌에서 그만한 자산이 모이니까 주민들의 경제운용에 큰 도움이

된다. 조합원들끼리 서로 보증을 서고 신용대부로 자금을 활용하

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나도 궁할 때면 신용조합에서 자금을 빌

려 이자를 지불하고, 힘이 되면 갚는다. 서민들이 서로 믿고 힘

을 모으면 큰 일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농림부장관의 공문

그렇게 겨울을 지내고 봄이 되자 우리는 못자리를 만들고 볍씨

뿌릴 채비를 하였다. 그런데 어느날 농림부에서 활빈교회 앞으로

공문을 보내왔다. 농림부장관 이름으로 작성된 문서에는 「남양

만 간척지에는 염분이 너무 많아 농작물이 자라기에 아직 적합하

지 못하니 금년에는 파종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만일에 파종

했다 수확에 실패할 경우 정부는 책임질 수 없다는 단서까지 붙

어 있었다.

나는 15개 마을 대표들을 활빈교회로 소집했다. 각 마을에서 2명

씩 30명의 대표들이 교회에 모여 이 문제에 대해 토론을 했다.

『우리가 겨울 동안 정성들여 물길을 트고 길을 닦고 개간한 이

남양만 땅이 소금기가 너무 많아 금년 농사는 짓지 말라는 통보

가 왔습니다. 이에 대해 마을 대표인 여러분들의 의견을 듣고자

합니다』

『아니 목사님, 그기 뭔 말입니까? 일이백 세대도 아니고 무려

1200세대가 모여 있는데 농사 짓지 않으면 어떡하라는 겁니까?

그렇게 되면 모두 거지가 될 터인데 목사님이 거지 왕초 하실라

요?』

『그러니 의논하자는 거 아닙니까?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어 봅시

다』

『목사님, 이야길 나누고 말고 할 것도 없시다. 간단하다구요.

농사를 하늘님이 짓는 게지, 농림부장관이 짓는 게 아닙니다. 대

한민국에서는 정부가 하라는 것에 반대로만 하면 일이 된다고 합

니다. 금년 농사도 정부에서 하면 망한다 했으니까 농사 지으면

반드시 성공할 겁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옳소.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요』

회의 분위기는 이렇게 돌아가고 모두가 의기투합했다. 나는 「대

한민국은 정부가 하라는 바의 반대로만 하면 성공하는 나라」라

는 그들의 말에서 관에 대한 민의 불신이 보통이 아님을 느꼈다.

지하자원도 자본도 없이 오직 사람만 많은 나라에서 관과 민이

서로 믿지 못한다면 나라의 장래가 어떻게 될까 자못 염려스러웠

다.

회의 막바지에 우리는 돼지 족발을 안주로 막걸리잔을 돌리면서

첫 파종에 전력을 다하기로 했다.

각 마을로 돌아간 대표들은 호별 방문하며 못자리 설치에 필요한

주의사항을 전달했다. 간척지에 소금기가 너무 많아 벼가 죽을

수도 있겠으니, 이에 대비해 볍씨를 많이 뿌려서 한두 차례 모내

기 실패에 대비하자는 내용이었다. 나는 마을사람들에게 제안했

다.

『우리 마을에서 각 농가의 평균 경작 면적이 2정보, 6000평입니

다. 각 가정이 제각기 못자리를 따로 하면 인력낭비, 예산낭비,

시간낭비가 심합니다. 그러니 10가정이 합하여 20정보에, 필요한

못자리를 함께 하는 공동체식 못자리를 만듭시다. 그래서 10가정

중에서 날마다 돌아가며 한 사람만 못자리를 돌보고 나머지 아홉

사람은 다른 일을 할 수 있도록 합시다. 그렇게 하면 예산, 시

간, 일손 모두가 절약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내 제안에 주민들이 호응하여 10세대 단위로 못자리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순번을 정해 날마다 한 사람씩 나와 못자리에 물을 대

는 일이며, 잡초를 제거하는 일 등을 맡았다.

그러나 이상과 현실에는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이 일도 순조롭

게 진행되지 않았다. 못자리에 자주 물이 마르고 잡초가 무성하

게 자라 보기에 민망했다. 개인이 하는 이웃 못자리들에 비해 모

가 자라는 모양이 볼품없었다.

벼농사는 못자리 농사가 절반을 차지하는지라 우리는 조급해졌

다. 공동체 못자리에 참여한 10가정을 모아 못자리가 제대로 되

지 않는 이유를 물었다. 그런데 모두가 한결같이 남의 탓으로 돌

렸다.

『내가 당번이었던 날에는 못자리에 물이 찰찰 넘쳤는데, 이씨가

물려받은 뒤로 잘못된 기야요』

『아니 이 사람이 뭔 소릴 그렇게 한당가. 사돈 남 말하고 있는

기여. 자네가 논바닥에 물이 바싹 마르게 해 놓은 걸 내가 제대

로 물을 댄기여. 사람이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하랬다고,

젊은 사람이 그런 소릴 하면 못 쓰는 기여―』

이런 식으로 시비만 늘고 못자리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우리

는 어쩔 수 없이 10가정 몫의 못자리를 다시 10등분하여 각자가

자기 몫만 돌보도록 했다. 그랬더니 며칠 안에 잡초는 씻은 듯이

없어지고 못자리에는 항상 물이 찰랑찰랑 넘쳤다.


연이은 모내기 실패

이런 우여곡절을 거치면서도 모는 자라서 모내기하는 시기가 됐

다. 첫 모내기를 끝낸 뒤로 나는 날마다 논에 나가 모가 제대로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지 살폈다. 벼는 생명력이 강한 작물인지라

한번 뿌리를 박고 나면 여간해서는 죽지 않는다. 그래서 날마다

뿌리를 박고 살아남는지 살피러 다닌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심어놓은 모들은 하루가 다르게 붉은 색으로

바뀌며 죽어가는 게 완연했다. 낙심은 됐으나 처음부터 한두 번

실패할 것을 각오하고 있던 터였다. 용기를 내 두 번째 모심기에

들어갔다. 나도 마을 사람들과 함께 논에 들어가 모심기에 참가

했다. 나는 한 포기 한 포기 모를 꽂을 때마다 기도했다.

『예수님, 이 모를 꼭 살려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계시

던 때에 죽은 나사로도 살리셨는데 이 모를 살리시는 것이야 문

제가 되겠습니까? 이 모를 꼭 살려주셔서 개척민들에게 행복한

가을걷이를 허락해주시옵소서』

모두들 한 논에서 줄을 지어 줄모를 심고 있는 동안 나는 기도하

며 심느라 지체하자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가 됐다. 곁에 있던 교

인이 내게 말했다.

『목사님, 지금 모 심는 기요? 예배 드리는 기요? 뭘 그리 꾸물

거리시요. 그러시려면 아예 빠져버리쇼』

『어―허, 난 지금 이 모를 살려달라고 기도하느라 늦어지고 있

는 게요』

『그럼 논둑으로 나가셔서 기도하십쇼』

그러나 두 번째 심은 모도 죽어갔다. 주민들의 실망은 처음에 비

할 바가 아니었다. 이러다간 농사도 망치고 돈도 떨어지고 갈 곳

없는 거지 신세가 되는 것이나 아닐까 하는 염려가 마음속으로

스며들었다.

도리없이 세 번째 모를 심을 때는 모두가 심각했다. 마을 사람들

이 두레를 이루어 모내기를 하는 자리는 항상 흥겹기 마련인데,

그때는 그런 흥이 일지 않았다. 이번에 심은 모마저 살아나지 못

하면 우리는 떼거지가 된다는 생각이 각자의 마음을 눌러 흥겨운

자리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세 번째 모심기가 끝난 뒤로는 날마다 날이 새기 무섭게 논으로

달려 나갔다. 밤새 모들이 살아나고 있는지 보기 위해서였다. 그

러나 우리의 기대는 무너져갔다. 드넓은 논바닥이 발갛게 타들어

가기만 했다. 논바닥이 그렇게 타들어가니 우리 마음도 함께 탈

수밖에 없었다.

며칠이 지나니 마을 주민들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어른들

이 어두운 얼굴로 있으니 아이들조차 말이 없었고, 아이들이 말

이 없으니 강아지들조차 풀이 죽은 듯했다. 주민들 중에는 땅을

헐값에 넘기고 이사 가려는 사람들까지 생겼다.

모 구하기 작전

나는 이런 때일수록 지도자의 처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낙심하고 있는 주민들을 찾아다니며 설득했다.

『우리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힘을 냅시다. 한번만 더

심어봅시다』

『목사님 이미 글렀어요. 철도 늦었고 모도 없잖습니까?』

『철이 늦은건 하늘에 맡기고 없는 모는 사방에서 모아봅시다』

『목사님, 어거지쓸 일이 따로 있지요. 없는 모를 어디서 모은다

는 겝니까? 모라는 게 가게에서 물건 사오듯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글쎄, 그렇게 안 되는 쪽으로만 생각하면 끝이 없어요. 여기까

지 와서 우리가 손 털고 말 일이 아니잖습니까? 다시 한 번 부딪

쳐 봅시다』

우리는 새벽녘에 트럭에 몇 사람씩 태워 사방에서 모를 구해오게

했다. 어디든 가다가 들판에 남아 있는 모가 보이면 주인을 찾아

가서 얻든 사든 구해오라고 시켰다.

그런데 한낮이 지나 용하게도 모를 한 트럭씩 싣고 돌아왔다. 모

내기를 하고 난 뒤 여기저기 논에 남은 모들이 제법 있었던 모양

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모가 모자라자 저녁 나절에 사람들

이 대책회의를 한답시고 모였다. 나는 모인 것을 보고는 일찍 잠

자리에 들었다. 막 잠이 들려는 데 세 사람이 찾아왔다. 옛날 서

울에서 함께 넝마주이를 했던 대원들이었다.

『목사님, 오늘 저녁은 목사님이 일찍 주무셔서 아무것도 모르는

것으로 합시다요』

『무슨 소리요?』

『우리 몇이 의논을 했는데, 이웃 동네에 가서 심어놓은 모라도

뽑아서 심자고 의견을 모았습니다. 그러니 나중에 문제가 생기더

라도 목사님은 몰랐던 것으로 합시다. 알리바인가 뭔가 하는 것

있잖습니까? 말하자면 우리 선에서 끝내겠다 이 말입니다』

나는 깜짝 놀라 단호하게 말했다.

『이 사람들이 정신이 있는 기여 없는 기여. 정말 큰일 낼 사람

들이구먼. 모기 다리에 피를 빼먹을 일이지 농민들이 심어놓은

모를 뽑아다 심어?』

『알게 뭡니까? 눈에 뵈는 게 모밖에 없는 판인데. 이제 와서 모

없다고 빈 논을 그냥 두고 있을 겁니까?』

『이 사람들아, 그렇게 마음쓰면 하늘님이 우릴 도와줄 수 없는

기여. 아무리 어려워도 순리를 따라야 하늘이 우릴 도와주는 게

지. 절대 그런 짓 하지 말게』

『그것 참, 그렇게 나올 줄 알았심더. 아무 말 하지 말고 그냥

해버리는 건데』

나는 그들에게 절대로 그러지 말라고 재삼 당부해 보냈다. 그런

데 이 소문이 어떤 경로인지 이웃 마을에 알려졌다. 이웃 마을에

서 주민들이 동원돼 한밤중에 논을 지키고 있었다. 활빈교회 패

들이 모 훔치러 온다는 소문에 놀라서 마을마다 비상이 걸린 것

이었다.

『비 좀 내려주소서』

그런 북새통을 겪으며 네 번째 모내기가 끝난 날 분위기는 더 심

각했다. 마지막 안간힘을 다한 뒤 심은 모가 사느냐 죽느냐에 따

라 우리의 진로가 바뀔 판이니 심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가 먼저 말한 것도 아닌데 마을 사람들이 이심전심으로 논둑에

모여들었고 기도회가 열렸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만 모인 것이

아니라 교회에 발걸음도 하지 않았던 사람들까지 모였다. 교인이

아닌 사람들도 급할 때는 기도가 소중한 줄을 알고 있었던지 교

인들에게 말했다.

『이 사람들아, 하늘님께 대고 기도혀. 이럴 때 좀 봐주시라고

기도하랑께』

기도 내용은 간단했다. 비를 내려달라는 기도였다. 소금기 있는

논에서 모가 살아남은 단 한 가지 해결책은 비였다. 이제까지 비

는 오지 않고 하늘에서 햇볕이 내리쬐니 논바닥 물이 끓게 되고

그 열기에 바닥의 소금기가 올라와 모 뿌리를 치니 모들이 말라

죽을 수밖에 없는 터였다. 비가 와서 논바닥의 소금기가 씻겨 내

려가고 구름이 햇볕을 가려 모가 뿌리를 내리게만 되면 벼농사는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활빈교회 교인들이 앞장서서 기도드리기 시작했다. 어른들만 기

도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이들도 따라서 기도회에 참가했다. 초등

학교 3학년, 4학년짜리들이 고사리 손을 모은 채 하늘을 향해 기

도드리는 모습이 보는 이들을 숙연케 했다.

『예수님, 비를 내려주세요. 모를 살려주셔요. 예수님, 아버지와

어머니와 마을 사람들이 애써 심은 모들이 말라죽지 않게 비를

내려주세요』

나는 어린이들의 그런 모습을 보며 가슴이 찡하고 눈물이 흘러내

려 참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지도자가 울고 서 있을 수도 없어

서 바닷가 풀더미 속으로 들어가 울며 기도했다.

『하나님, 우리 어른들의 기도는 안 들어주시더라도 저 아이들의

기도는 들어주십시오. 저 애들의 기도가 응답받지 못하고 비가

오지 않아 심은 모들이 다 죽으면, 제가 저들에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어떻게 설교하겠습니까. 제발 하나님, 저 애들의

기도를 들으셔서 비 오는 흉내나마 좀 내주십시오』

기적이 일어나다

그런 중에도 시간은 흘러 밤이 깊어지자 마을 사람들 거의가 집

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새벽녘까지 그 자리에서 기도를 계속하는

교인들이 있었다. 나는 풀더미 속에 앉아서 기도와 졸기를 되풀

이했다. 그런 와중에 날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밤 사이에 기적이 준비되고 있었다.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엔 한두 방울씩 떨어지더니 얼마

지나서부터는 제대로 비가 쏟아졌다. 그렇게 비가 오기 시작하자

마을 사람들은 마치 미친 것 같았다.

어떤 이는 감격에 겨워 소리를 지르며 남의 마누라까지 안고 뒹

굴고 야단이었다. 나는 빗줄기를 피할 생각을 않고 담뿍 비를 맞

으며 하늘을 우러러 감사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허물 많은 저희들을 사람 대접해주시어 저

희들의 기도를 들어주시니 감사드립니다』

그렇게 시작된 비는 장대비로 바뀌더니 일주일이 지나도록 계속

내렸다. 비가 갠 후에 논으로 나갔더니 논마다 모들이 파랗게 살

아 산뜻하게 자라고 있었다. 나는 논으로 들어가 벼포기에 엎드

려 입을 맞추며 말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모가 가을까지 살아남아 수확을 거두지

못할지라도, 이것만으로도 평생 감사드리겠습니다』

나는 그간에 쌓인 피로가 한꺼번에 풀리는 것을 느끼며 논둑길을

걸었다.

그렇게 살아남은 벼들이 예상외로 쑥쑥 자라더니 가을에는 풍작

이었다. 벼이삭들이 익어 고개를 숙이기 시작하자 나는 마음속으

로 다짐했다.

「하나님이 이렇게나 돌봐주시는데…. 평생을 진실하게 살아야

지. 세상의 것들을 추구하지 말고 오로지 하늘의 일에 전념해야

지…」

그런 다짐을 하며 집으로 돌아오는데, 논바닥에 엎드려 있던 한

주민이 나를 불러 세웠다.

『목사님, 우리집 벼는 올벼(早生種)가 돼서 수확할 때가 되었습

니다』

『아 그래요. 축하합니다. 우리 마을에서 제일 빠르겠군요. 그럼

언제 벼베기를 하시겠습니까? 그날은 저도 한몫 하지요』

『실은 오늘 벼를 베려고 몇 포기 베기 시작하다가 머뭇거려져서

목사님을 뵙고 말씀드려야겠다고 생각했구먼요』

『무슨 문제가 있으신지요?』

『금년 농사는 내가 지은 농사가 아니라 하늘이 지어준 농사인데

이렇게 베어서 먹을 일이 아니잖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

리가 벼 심을 때 생각이 나더라고요. 금년 농사가 우리들이 네번

째 모내기 해놓고 하늘이 비를 주지 않았으면 될 농산가요. 어림

도 없는 일이지요』

『옳은 말씀입니다. 그때 정말로 하늘이 도우셨지요』

『그래서요. 내 생각에 그냥 벼를 벨 것이 아니라 풍년제랄까 뭔

가 하늘에 감사를 드리고 수확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요』

『그것 참 좋은 생각이십니다. 교회에서는 그걸 풍년제라 하지

않고 추수감사예배라고 합니다. 해마다 11월 셋째 주일이면 그해

추수를 감사하는 예배를 드리는데 굳이 그날 드려야 하는 것은

아니니까, 금년에는 좀 앞당겨서 드리도록 합시다』

그래서 활빈교회는 1976년 추수감사예배를 여느 교회보다 한 달

앞당긴 10월에 드렸다. 그날은 온 마을의 축제였다. 감사예배를

드리고 나서 잔치가 열렸다. 햅쌀로 송편을 하고, 호박전을 부치

고, 또 바다에서 망둥이를 건져다가 무를 종종 썰어 넣고 매운탕

을 끓였다. 온 마을 사람들이 떡을 먹고 매운탕을 먹으며, 울고

웃고 야단들이었다. 어느 부인이 말했다.

『이 밥이 웬 밥인교. 실컷 묵자. 묵다 죽은 귀신은

혈색(血色)도 좋대여』

그 말에 맞추어 한 남정네가 말했다.

『옳은 말이여. 이 밥 못 묵고 죽은 귀신은 억울하제―. 어―이,

주방, 밥 자꾸 하라구. 이렇게 좋은 밥, 또 먹고 또 먹고 해지도

록 묵어 보자고』

그렇게 주고받는 이야기들을 한 식탁에서 듣고 있던 마을 주민

중에는 고개를 돌리고 눈물을 닦는 사람도 있었다. 나 역시 그런

장면을 보노라니 가슴이 찡하고 눈시울이 젖어와 그 자리를 피하

고 말았다.

그렇게 식사를 마친 후 교회 마당에 모여 농악놀이를 하고 질펀

하게 놀았다. 축제는 밤까지 계속돼 화톳불을 지피고 흥겹게 놀

았다. 나는 활빈교회의 추수감사 예배가 온 마을의 잔치가 된 것

이 기뻤다.

「기도농법」을 아시나요?

소식이 알려지자 11월 어느 날 농림부에서 두 명의 공무원이 나

를 찾아왔다.

『목사님 남양만 간척지에서 금년 농사가 예상외로 좋은 성과를

거뒀다기에 현지 답사차 나왔습니다. 간척지 농사는 일반적으로

5~6년이 지나야 정상적인 수확을 거둘 수 있는데 어떤 농법(農

法)을 쓰셨는지요. 다른 간척지 영농자료로 쓸까 합니다』

『그 문제라면 내가 답할 일이 아닌 것 같군요. 내가 농사 지은

건 아니니까요. 우리 교회 교민을 두어 명 부를 테니 직접 물어

보시지요』

나는 김집사와 이집사 둘을 불렀다. 『집사님들, 이 어른들은 농

림부 ○○부서에서 나왔대요. 우리의 금년 농사 성적이 좋다고

하면서 무슨 농법을 썼느냐고 물으러 왔답니다. 우리가 쓴 농법

을 잘 대주시라요』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김집사가 나서며 말했다. 가슴을 탁

벌리며 기세 좋게 말했다.

『우리가 무슨 농법을 썼느냐고요? 바로 기도농법(祈禱農法)을

썼시다』

기도농법을 썼다는 말을 농림부 사람들은 농담으로 받아들인 모

양이었다. 그들은 받아 적으려고 노트와 펜을 든 채 말했다.

『농담하지 마시고 진담으로 해주시지요』

『농담이라구요? 이 어른이 농담 먹고 컸나. 농림부에서는 금년

농사는 안 되니 책임지지 못 한다고 문서까지 보냈습니다만 우리

는 벼를 심어놓고 기도했고 하늘님이 비를 주셔서 농사에 성공한

겁니다. 그러니 기도농법 아닙니까? 정부에서도 괜시레 농민들에

게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지시해서 농민들 망하게 하지 말고 기

도농법을 전국에 보급하시라요. 그러면 나라가 잘 될 것잉게』

그래서 「기도농법」이란 말이 생겨났다. 지금은 살림살이가 그

때보다는 한결 좋아졌지만, 그래도 가끔 어려운 일을 당하면 일

꾼들 중에서 누군가가 말한다.

『목사님 염려할 것 뭐 있습니까? 기도농법으로 밀고 나갑시다』

한쪽에서 그렇게 말하면 다른 한편에서 호응한다.

『옳소, 이번 일도 기도농법으로 풀어 나갑시다. 기도농법은 우

리가 특허낸 농법이잖아요』

첫해 농사가 그렇게 성공한 이래로 다음 2년에 걸쳐서 풍작을 이

루었다. 첫 3년을 그렇게 성공하고 나니 우리는 신바람이 났다.


왕성한 지역주민운동

잇따른 성공으로 농민선교와 농민운동으로는 한국에서 최고의 팀

을 이루겠다고 의욕이 왕성해졌다. 교회가 그 지역에서 주민봉사

와 지역사회개발의 중심지가 됐다. 남양만 넓은 지역에서 이화리

에 세워진 활빈교회가 모(母)교회가 되고 화성군 쪽으로 독정리,

장안1리, 장안2리에 각각 교회가 들어섰고 평택군 쪽으로 호암

리, 원정리, 홍원리에 세 교회가 있었다. 이렇게 모두 여덟 교회

가 현장에서 뿌리를 내리며 자립교회로 발돋움했다.

처음에는 버스를 한 대 사서 이화리 활빈교회에 모두 모여 예배

를 드렸다. 개척지에서 400명 이상이 한자리에 모여 예배를 드리

니 서로 의지가 돼서 좋았다.

그러나 함께 모이는 것에 단점도 있었다. 각 마을에서 하는 활동

에 소홀해지고 지역사회를 섬기는 교회가 되겠다는 활빈교회의

설립정신이 실현되지 못했다.

그래서 2년 뒤 각 지역교회는 흩어져 예배를 드렸다. 우리는 각

지역에 주민회란 이름으로 주민조직을 결성하고는, 활빈교회와

주민회가 합하여 「남양만지역사회개발본부」를 조직했다. 활빈

교회 대표인 내가 본부장이 되고 주민회 회장이 부본부장이 됐으

며 사무총장제도를 두어 전체를 총괄하게 했다.

그리고 개발본부 산하에는 5개 분야의 분과위원회가 있어 분과별

로 활동했다. 주민교육분과, 지역사회보건분과, 협동조합분과,

농업개발분과, 문화활동분과가 그것이다. 분과마다 사업을 세분

하여 지역 문제를 발굴하고 기획하고 해결해 나가도록 했다.

예를 들어 주민교육분과 사업에는 다섯 가지 단위사업이 있었다.

첫째는 마을학교, 둘째는 교실, 셋째는 사랑방교실, 넷째는 경로

학교, 다섯째는 지도자교육과정이었다. 그중 마을학교는 다시 다

섯 단계로 교육과정을 세분했다. 첫단계는 임신에서 출산 후 3세

까지 산모와 육아들을 지도하는 과정이었다. 둘째는 4세에서 취

학전까지의 아동들을 대상으로 하는 어린이학교였다. 그중 어린

이학교 사업이 가장 활발했다. 남양만지역에 어린이학교를 세워

오전 8시에서 오후 5시까지 아이들을 맡아 돌보았다.

마을학교의 셋째 단계는 초등학교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했다. 학

교를 마친 후 마을회관이자 교실인 교회에 모여 여러 가지 지도

를 했다. 농촌의 어린이들이 도시에 비해 학력수준이 뒤지고 문

화적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것을 보완해 주는 프로그램이었다.

넷째 단계는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을 위한 과정이었다.

다섯째는 중학교나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진학하지 못한 청소년

들과 마을 청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과정이었다.

600명 아이들의 어머니들과 아버지들은 따로 조직하여 안방교실

과 사랑방교실을 열었다. 1년에 한두 차례, 이화리 본부에서 부

모들의 대회가 열렸다. 이런 행사에 지방 군수와 경찰서장을 초

청, 군 행정에 대하여 질의 토론케 하면 큰 효과가 있었다. 우선

몇백 명이 모여 있다는 데 놀라고, 지역사회내의 문제들에 대한

안목과 열성에 또 한 번 놀라움을 표시했다.

힘센 주민회 회장자리

그렇게 되니 지역에서 부녀회도 돋보였다. 단위 지역 주민회의

대표들이 모여 남양만 총주민회 회합을 가질 때면 그 열기가 대

단했다. 자연히 남양만 주민회를 대표하는 회장 자리는 좋은 보

직이 됐다. 왜냐하면 주민회 활동이 왕성해지니까 군수나 경찰서

장이 새로 부임하면 며칠 안으로 찾아와 인사를 하기도 하고, 명

절 때가 되면 관에서 연하장이나 선물도 보내오니 농민들로서는

대단한 자리로 인식됐다. 이런 이유로 남양만주민회는 평생 씻지

못할 상처를 입었다.

제2대 회장단 때의 일인 것 같다. 윤씨가 회장을 맡았고 박씨가

부회장을 맡았다. 둘 다 서울에서 함께 내려간 활빈교회 멤버였

다. 둘 다 내가 세례를 주고 교회 집사까지 지낸 일꾼들이었다.

그런데 하루는 사무총장이 내게 와서 둘 사이가 좋지 않음을 일

러주었다.

『목사님, 죄송스런 말씀입니다만 윤회장과 박부회장 사이를 목

사님이 좀 풀어주셔야 겠습니다』

『요즘 둘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나요?』

『말씀드리기 곤란하긴 합니다만… 사람 모인 곳에서는 다 있을

수 있는 일인데 둘의 관계가 고양이와 쥐 사이입니다』

『왜 그럴까? 둘 다 서울서부터 고생을 같이 해온 평생동지인데

…. 그렇게 갈등이 생긴 이유에 대해 뭔가 아는 바가 있나요? 사

연을 알면 화해 시키기가 쉬울 텐데』

『글쎄요.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주민회 총회가 얼마 안 남았

지 않습니까?』

『그랬던가? 벌써 총회할 때가 됐나? 그런데 총회가 있는 것과

둘 사이의 갈등이 무슨 관계가 있기에…』

『박부회장이 다음 회장 선거에 출마하려나 봐요』

『그래? 그럴 수 있겠지. 부회장으로 있었으니 차기에 회장으로

뽑힐 가능성도 있겠구먼. 그런데?』

『문제는 윤회장이 회장 자리를 내놓고 싶지 않은가 봐요』

『그래! 그 사람 열성도 있고 지도력도 괜찮은 것 같던데. 그럼

윤회장과 박부회장이 차기 선거에서 경쟁상대가 된단 말인가?』

『그런 셈이지요』

『그러면 투표에서 표가 많이 나오는 쪽이 차기회장직을 맡으면

될 것 아닌가? 별 문제될 것도 없을 것 같은데…』

『아이고 그게 그렇게 간단치가 않단 말입니다. 목사님은 매사를

너무 쉽게 생각해서 탈입니다. 그 일로 둘 사이가 틀어져서 지금

말도 안 하는 사이랍니다』

『그러면 안 되지. 그런 일로 사이가 틀어지면 다 졸장부인 게

지. 내 생각에는 별로 문제가 될 거 같지 않은데, 언제 둘을 불

러서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지. 그건 그렇고 각 지역 대표들은

어느 쪽으로 쏠리는 것 같은가?』

『지역 여론이 다음 회장감으로 박부회장을 밀기 때문에 생긴 문

제지요』

감투 둘러싼 살인사건

나와 사무총장 사이에 이런 대화가 오고 간 후로, 바쁜 일과에

밀려 둘 사이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 이것이 나에게

평생 씻지 못할 한이 되고 말았다. 얼마 후 윤회장이 주민회 모

임에서 박부회장에 대해 말했다.

『요즘 왜 박부회장이 안 보인다지?』

『글쎄, 그저께도 있었는데 오늘은 결석했구먼. 모임에 잘 빠지

지 않는 사람인데』

『혹시 소문이 사실이 아닌가?』

『뭔 소문인데』

『박부회장이 요즘 여자 문제가 좀 있다던데….』

『윤회장은 무슨 소리를 그렇게 해. 박부회장같이 착실한 사람이

뭔 여자 문제가 있을라구』

『아이고 이 사람,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는

말도 못 들었는가?』

『괜시리 멀쩡한 사람 험담하는 것 아녀…』

『험담이 아니라 소문이 그렇다는 거지. 혹시 사귀는 여자하고

야반도주라도 했는가 해서 하는 말이지』

주민회 대표들의 회합에서 이런 대화가 오고간 후로도 며칠이 지

나도록 박부회장은 나타나지 않았다. 집에도 없고 친척집으로 연

락해도 흔적조차 없었다.

그런데 얼마 후 마을 개가 뒷산에서 코를 땅에 대고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고 있었다. 지나던 사람이 개가 하는 짓이 이상해 가까

이 가보았더니 땅 속에서 삐죽 나온 옷자락이 보였다. 이상히 여

겨 파보았더니 시체였다. 바로 실종된 박부회장이었다. 경찰이

와서 조사를 하니 윤회장이 범인이었다. 윤회장이 수갑을 차고

끌려가던 날은 참으로 슬픈 날이었다. 나는 세상이 뿌옇게 보이

는 듯했고,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둘 다 내가 전도하

고 세례를 주었고 교회에서 집사로 세우고 주민회의 기둥 되는

일꾼으로 세웠는데, 한 사람은 죽임을 당하여 땅에 묻히고 한 사

람은 살인범이 돼 감옥으로 끌려 갔으니…도대체 어찌 된 노릇일

까?』

나는 도무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어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또 윤회장의 살인사건으로 그의 가족 전체가

궁지에 몰렸다. 마치 덫에 걸린 짐승과 같은 처지가 된 것이다.

윤회장이 구속되고 언론 보도가 나간 지 며칠 후 결혼한 딸이 시

댁에서 쫓겨나 친정으로 왔다. 결혼한 지 두 달 만에 일어난 비

극이었다. 그녀는 친정집 마당에 들어서면서 울음부터 터뜨렸다.

『우리 아버지도 참으로 원망스럽소. 사람을 죽이더라도 시집 간

내가 아들이라도 하나 낳은 뒤에 그럴 일이지, 시집 가자마자 일

을 저질러 이렇게 쫓겨났으니 이제 나는 어떻게 살라고…. 아버

지, 아버지 참으로 원망스럽소…』

그렇게 울며 들어오는 딸을 윤회장의 부인인 친정 어머니가 붙들

고 모녀가 서로 통곡을 하는 통에 주위에 사는 주민 모두가 눈물

을 흘렸다. 시집살이 두 달 만에 살인자의 딸이라고 해서 친정으

로 쫓겨왔으니 얼마나 한스러웠겠는가.

미쳐버린 부인

그러나 윤회장의 집은 피해자인 박부회장 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먼저 박부회장의 부인이 남편의 시체를 보고는 그 자

리에서 돌아버렸다. 장례식 날에도 꽃을 따러다니고, 윗옷을 벗

어던져 젖가슴을 드러낸 채로 해실해실 웃으며 골목길을 다니고

있었다. 죽은 사람이나 돌아버린 사람보다 정작 불쌍한 것은 자

녀들이었다. 장례식 날 어린 딸들이 아버지 관을 붙들고 흐느끼

며 관을 놓지 않았다.

『아버지 우린 어찌 살까예? 엄마까지 저레 미쳐버렸으니 우린

어찌 살아가야 하나요』

자녀들의 그런 애처로운 모습을 보고 눈물 짓지 않는 이가 없었

다. 나는 장례예배가 이어지는 동안 한켠에 앉아 걷잡을 수 없이

쏟아지는 눈물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중에도 마을 사

람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뭐 한다고 예배는 드려쌓노? 집사가 집살 죽였는데 먼 예배여.

그냥 가져다 묻어버리지─』

『그려. 활빈교회가 너무 잘 나가더라니까. 동리 다 잡아먹을 듯

이 설쳐대더만 이제 김 빠진 기제』

나는 처음으로 목사 된 것을 후회했다. 괜히 감당하지도 못할 사

람이 목사가 되어 이 지경을 당하는구나. 내 목회에서 이런 비극

이 일어났으니 이제 무슨 얼굴로 목회를 계속할 것인가? 장례가

끝내고 나면 목사직을 벗고 평민으로 돌아가야겠다. 그래서 화장

품 장사를 하든, 소나 돼지를 치든 바닥에서 새로 출발해야겠다

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갈등에 빠진 나는 장례가 끝난 즉시 담요 한 장을 들고 산

속으로 들어갔다. 사람의 자취가 끊어진 산속으로 들어가 소나무

아래 판판한 바위에다 담요를 깔고는 생각하고 기도하고, 기도하

고 생각하기를 거듭했다. 목마르면 골짜기에 내려가 물을 마시고

잠 오면 앉은 채로 졸며 일주일을 지냈다.

생각의 초점은 목사직을 그만두고 평민으로 돌아가는 일에 대해

서였다. 지금까지 벌여온 일들을 어떻게 마무리할 것인가? 무슨

일은 버리고 무슨 일은 살려야 할까? 그리고 남은 일들은 누구에

게 맡겨야 감당할 수 있을까? 생각은 끝없이 이어졌다.

새벽녘이 다가올 때쯤이면 나쁜 기운이 나를 누르는 듯한 감정에

사로잡혀 소나무 등걸을 안고는 『예수님─날 도와주세요─』 『

예수님 나를 도와주세요―』 하고 소리지르기를 반복하곤 했다.

엿새째 되는 날 다소 기력이 살아나는 듯하여 성경을 펼치고 「

요한복음」 1장1절을 읽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나는 산속에서 소나무 등걸에 기댄 채 이 말씀을 곰곰이 생각했

다. 문득 이 말씀에 비추어 내가 행했던 농민목회의 문제점이 짚

어졌다. 나는 농민선교의 기초에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농민들의

소득증대를 두었다. 나는 농민목회의 가장 「속 중심」에 진리가

아닌 주민조직을 두었던 것이다. 나는 남양만 갯벌에서 주민들과

더불어 밤낮을 잊고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그렇게 일한 바의 최

종 목표, 곧 궁극적 관심은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이 아니었고 물

질적으로 잘 사는 농촌의 건설이었다. 그리고 다음 설교활동은

시작에서 마지막까지가 생명과 진리와 사랑의 본체로서의 로고스

가 아니었고, 수단과 방법과 이기심이었다.

나는 결론에 이르렀다. 윤회장 사건으로 남양만을 떠날 것이 아

니라 제대로 본질적으로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결론이었다. 목사

직을 벗고 평민으로 돌아갈 것이 아니라 목사다운 목사가 돼야겠

다는 다짐이었다.


다시 교회 속으로

이화리 본부교회로 돌아오니 남녀 교인들이 모여 있다가 나를 보

고는 반색을 하며 맞았다.

『아이고 우리 목사님 어딜 갔었시요. 온 교인들이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고 염려 했습니다』

『기도하러 산엘 좀 다녀왔었지요』

『기도하러 가시더라도 어딜 간다고 말씀을 하고 가셔야 우리가

걱정을 안하지요. 그건 그렇고 얼굴이 왜 이래 그릇되었지요?』

『괜찮습니다. 곧 회복될 것입니다』

『우선 상부터 차려올까요?』

『아녜요. 미음이나 끓여주시고 따뜻한 자리에 이불 좀 깔아주세

요』

나는 미음 한 사발을 들이키고는 아랫목에서 정신없이 잤다. 이

틀 동안 잠만 자고 나니 한결 원기가 솟아나는 듯했다.

기동을 하려고 준비하고 있는데 손님들이 왔다기에 나가 보았다.

남양만에서 이전부터 터잡고 살아왔던 분들이었다. 남양만이 간

척지로 개간되기 전에는 그들은 어민들이자 농민들이었다. 갯벌

에 정치망을 쳐 고기잡이를 하고 한편으로 농사를 짓고 살았었

다.

그런데 남양만이 메워지고 갯벌이 농토로 바뀌자 그들은 어장을

잃고 경제적으로 손실을 입었다. 그래서 우리 입주민들과는 사이

가 좋지 않았다. 입주민들과 사이가 좋지 않으니까 자연히 활빈

교회와도 좋은 사이가 될 수 없었던 터였다.

『이거 아주 반가운 분들이 오셨군요』

『아니 속 썩이고 골치 아픈 사람들이 왔는데 반갑다 하시니 고

맙습니다』

『별 말씀을. 반갑잖구요. 제일 반가운 분들이지요. 그런데 오늘

웬일로 이렇게 여기까지 걸음하셨습니까?』

『이번 일로 목사님이 낙심하실까 봐 힘내시라고 격려차 왔습니

다』

『이번 일이라면 그 사건을 말하시는군요. 다들 들으셨구먼요』

『듣다 마다요. 온 나라에 알려진 사건인데 이웃에서 모를 턱이

있나요』

『그렇겠지요. 좌우지간 부끄럽습니다』

『아닙니다. 목사님이 왜 부끄럽습니까?』

『교회 울타리 안에서 일어난 일이니 목사 책임이 크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도 그간에 내왕은 없었습니다만 목사님

하시는 일은 익히 알고 있습니다. 목사님께서 농민 살리고 마을

살리려고 애쓰고 계시는 것에 우리 모두 감동했습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우리도 진작 목사님을 찾아뵙고 싶었는데 처음에 워낙 겁을 먹

어서 아직 길이 열리지 않았던 거지요』

『겁을 먹다니요?』

『말씀드리기 새삼스럽습니다만 「간첩목사」란 통에 우리가 겁

을 먹었던 것이지요』

『간첩목사라구요?』

『아니 목사님은 모르고 계십니까? 목사님이 서울에서 내려오기

전에 형사들이 마을에 와서 살다시피 하면서 말했었지요. 서울에

서 간첩목사가 내려오니 주의하라고요. 접촉하지 말고 혹시 집에

왔다 가면 대화 내용이 무엇인지 보고하라고 했었지요』

『그─래요? 그런 일이 있었구먼요』

『그 형사들 지금도 오나요?』

『아녜요. 반년 가량 그러구 다니더니만 그후로는 괜찮아졌습니

다』

『내가 간첩이면 잡을 것이지 왜 주민들더러 접촉을 하지 말라고

했을까요?』

『그러게 말입니다』

『난 그런 줄도 모르고 당황할 때가 많았습니다. 마을에 갈 때마

다 주민들이 차가운 표정으로 대하곤 해서 우리에게 바다를 빼앗

겼다고 생각하는가 했었지요』

『별말씀을요. 바다야 많진 않지만 보상금을 받았으니 문제가 아

니고, 또 바다를 막은 것도 정부가 한 것이지 입주민과 관계가

있나요? 간첩목사라구 자꾸 그러니 우리가 겁을 먹은 것이지요』

『지금은 저에 대한 인식이 어떤지요? 아직도 사상이 좋지 않다

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나요?』

『아녜요. 다 지나간 이야기지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야

우리가 이렇게 찾아올 수 있겠습니까?』

『다행입니다』

『그럼요. 목사님과 입주민들이 들어온 지 반 년 가까이 지난 뒤

부터는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말하자면 정부가 잘못하는

걸 잘못한다고 말한 사람이지, 간첩이란 말은 얼토당토 않다는

걸 알게 됐지요』

『그렇게 알아주시니 고맙습니다. 앞으로 내왕도 하고 일도 같이

하며 잘 지냅시다』

『우리가 부탁드리고 싶은 말입니다. 하시는 일에 우리들도 좀

참여시켜 주십시오. 잘 부탁드립니다』

돼지 파동

현지 주민대표들과 이런 만남이 있은 후로 간척지 입주민들과 현

지 주민들 사이에 유대가 깊어지고, 농업개발사업이나 주민봉사

활동에 그들도 참여했다.

그때쯤 호주에 주문해두었던 종돈 92마리가 도착했다. 간척지에

서 3년째 벼농사가 성공했지만 벼농사만으로는 겨우 먹고 살 만

한 정도였다. 농촌에서도 문화생활을 하려면 벼농사 이외의 수입

이 있어야 했다. 그래서 축산으로 관심을 돌렸다.

나는 농민들에게 돼지단지를 만들어 잘 사는 농촌을 이루자고 설

득하고는 좋은 종돈을 확보하기 위해 호주교회 브라운 선교사께

부탁해 최고 품질의 종돈 92마리를 도입했다. 국내에서 종돈 시

세가 6만원 정도일 때 마리당 42만원이었으니 최고급 종돈이었

다.

종돈을 배정받은 주민들은 처음엔 좋아했다. 그리고 돼지 시세가

좋았을 때는 아무 말도 없었다. 그러나 종돈을 들여온 지 1년여

가 지났을 때 돼지 파동이 일어났다. 전국적으로 돼지가 과잉생

산돼 값이 폭락한 것이다. 돼지고기 1근이 700원은 돼야 생산비

가 빠지는데 200원에도 팔리지 않을 만큼 폭락했다. 고기값은 내

리고 사료비는 오르는 데다 새끼가 태어나도 팔 곳이 없었다. 이

쯤 되니 교회를 원망하기 시작했다.

『예배당 말 듣고 돼지 길렀다가 폭삭 망하게 됐구먼』

『김진홍 목사는 설교나 하지 무슨 돼지 돼지 하고 다녀서 우릴

망하게 했잖아. 꼭 생긴 것도 돼지같이 생긴 양반이…』

마을을 방문한 나에게 등 뒤에서 노골적으로 그런 말들을 했다.

나는 듣고 있기에 민망해서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줌마, 그건 너무 하요. 내가 잘생기지 못한 줄이야 알고 있

지만 돼지보다야 낫지 않겠습니까?』

『목사님, 내 말에 너무 섭섭해하지 마시라요. 화가 나니 하는

말이지 실제로야 목사님이 돼지보다는 쪼께 낫습니다』

주민들이 교회 말 듣고 돼지 사업을 시작했다가 망하게 됐다고

원망을 하자 나는 마을에 들어가기도 난처했다. 돼지가 새끼를

낳았는데 팔리지는 않고 사료비는 없고 하니까, 마을 아주머니들

이 새끼돼지를 손수레에 싣고 갯벌에 버리는 일도 있었다.

그런데 갯벌에 버려진 새끼돼지들이 바닷속으로 들어가겠는가.

갯벌에서 꿀꿀거리며 있다가 밀물이 들어올 때 파도를 타고 몽땅

육지로 올라왔다. 신기하게 단 한 마리도 물에 빠져죽지 않고 살

아서 마을로 들어왔다. 몸에 뻘칠을 한 새끼돼지 200여 마리가

꿀꿀거리며 마을을 쏘다니니 마을이 수라장이 됐다.

짜증이 난 마을 부녀자들은 다시 손수레에 새끼돼지들을 싣고 교

회로 왔다.

『이 돼지새끼들! 돼지 좋아하는 김진홍 목사께 가져다 주자』

교회당 한켠에 사택이 있는지라 서재에 앉아 성경을 읽고 있던

나는 마당에서 마을 부녀자들이 『목사님』 『김진홍 목사님』

하고 부르는 소리에 무슨 반가운 일인가 하여 얼른 나갔다. 나를

본 마을 부녀자들이 말했다.

『목사님 돼지 좋아하시지예. 한 끼에 한 마리씩 드시라요』

그렇게 말하며 손수레에 실려 있는 새끼돼지들을 마당에 쏟아 놓

았다. 그러니 교회는 엉망이 됐다. 교회 안으로 새끼돼지들이 뛰

어 들어오는가 하면 부엌으로 들어와 세간살이를 엎고 야단이었

다. 어머니가 역정을 내시며 말했다.

『야야. 너는 목회를 왜 이래 별나게 하노? 니가 사람 목사가,

돼지 목사가? 성전에서 성도들 기도소리가 들려야지 돼지소리만

요란하게 들리니 이게 될 말이냐?』

『아이고 어머니, 내 속을 누가 알까? 돼지 농사를 내가 강제로

시킨 것도 아니고 자기들이 좋아서 한 것인데 잘 될 때는 아무

소리도 없더니 안 되니까 나만 원망하니 참 속이 시립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교회 청년들을 불러 큼지막한 구덩이를 파게

하고는 새끼돼지들을 구덩이로 모두 몰아넣었다. 그러나 그 다음

이 문제였다. 처음 생각에는 땅 속에 묻어 버리려고 했으나 막상

구덩이 속에 몰아넣고 나니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아무리 짐

승이지만 살아 있는 생명들 위에 흙을 덮어버린다는 것은 차마

못할 짓이었다. 그렇다고 그냥 두면 굶주림으로 죽을 때까지 소

리를 질러댈 것이니 그것도 어려운 일이었다.

죽어도 돼지 옆에는 안 갈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판인데 신문을 보니 정부가 인천

창고에 쌓아 두었던 수입 돼지고기를 서울 소비자들에게 판매하

고 있다는 기사가 있었다. 그 기사를 읽고 나는 열을 받아 가만

있을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청년들을 다시 불러들였다.

『어이 자네들. 가서 트럭 한 대 불러오게』

『대장님 트럭 불러 뭘 하려고요? 돼지 새끼 싣고 가서 버리려고

요?』

『그런 게 아니고 이 신문 좀 읽어봐라. 농민들은 돼지 먹이다가

망해서 눈알이 튀어나올 지경인데 정부가 대책은 세워주지 않고

수입 돼지고기를 서울에 팔고 있단다. 이깐 정부를 그냥 두고 볼

수 있겠냐. 구덩이에 들어가 있는 돼지 새끼를 몽땅 싣고 서울로

가자. 가서 중앙청 앞에다 확 풀어놔 버리자. 그리고 「총리고

장관이고 이 돼지 가져다 한 끼에 한 마리씩 먹어라」고 일러주

자.

이 말을 들은 청년들은 갑자기 얼굴이 확 펴지며 말했다.

『좋습니다. 한 건 합시다. 대장 맘 변하지 말기요』

그들은 얼른 가서 2.5t 트럭 한 대를 불러왔다. 우리는 트럭에다

돼지 새끼들을 싣고 서울로 향했다. 나는 독기가 오른 채 트럭

앞자리에 앉아 『서울로 갑시다』라고 출발했다. 그런데 그 사이

에 누군가 군청으로, 관할경찰서로 연락을 했다. 수원까지도 못

나갔는데 이미 군수 어른이 길가에다 지주를 세워놓고 차마다 뒤

지고 있었다. 군수는 나를 보더니 반가워하며 말했다.

『아이고 목사님, 혹시 못 만날까 봐 속을 태웠습니다. 목사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목사님이 이러시면 나는 집에 가서 애 봐야

합니다. 목사님 제발 차를 돌려주십시오. 우리가 꼭 강제집행하

지 않도록 자발적으로 돌려주십시오』

내가 뿌리친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산모퉁이 저켠에 경찰차가

보이고, 경찰관 몇이 대기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그 일도 제대

로 안 되는구나 생각하고, 군수어른께 돼지새끼를 차에 실은 채

넘겨주며 말했다.

『군수 어른, 이 돼지새끼 차떼기로 넘겨 드릴 테니 경찰서장 어

른하고 한끼에 한 마리씩 드시라요』

그때 돼지 때문에 얼마나 혼이 났던지 주위 사람들에게 말했다.

『내가 나중에 죽을 때 유언을 뭘 할끼냐? 손자들 앉혀놓고 「우

리 집안은 절대 돼지 옆에 가지 말지니라」고 유언할란다』 <다

음호에 계속>

남양만 주민회의 회장과 부회장 사이의 갈등이 살인으로까지 번진

사건이 있었던 후로부터 나는 선교활동을 영적이고 정신적인 방

향으로 이끌어가려고 애썼다. 그러나 한번 몸에 밴 체질을 바꾸

기는 쉽지 않았다. 남양만 지역사회 안에서 주민봉사와 지역사회

개발을 위한 모든 프로그램이 성경의 말씀 중심으로 진행되기를

희망했으나, 실제로 집행되는 과정에서 잘 반영되지 못했다.

나는 이런 상황에 내적 갈등을 느끼면서도 선교활동을 계속했다.

그간에 황인성군과 서경석군 등 당시 민주화운동 핵심인물들이

남양만 선교팀에 합류하여 막강한 팀워크를 이루게 되었다. 그러

나 이들 운동권 출신들은 그 의욕과 정열에 비해 현장에서의 경

험이 미숙해 간혹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간첩신고파동이 그 예다. 어느날 새벽 교회 마당에 까만색 지프

2대가 들어서더니 수사관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우리 팀의 일꾼들

3명을 연행해 갔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수사관이 『이

웃 마을에서 간첩신고가 들어와 조사해야 한다』고 대답했다. 물

론 조사 결과는 터무니없는 것으로 나타나 세 사람은 당일로 풀

려났지만, 자초지종을 확인해보니 웃고 넘길 일만은 아니었다.

사연인즉, 우리 선교팀 중에 운동권 출신 두 명이 농민교육을 한

답시고 마을에 들어가서 첫날 첫시간부터 『박정희는 독재자다.

이런 독재정권은 타도돼야 한다』고 교육을 하였던 것이다. 소위

주민의식화교육을 한답시고 반정부 강의를 열을 내서 했더니, 주

민들이 강의가 끝나자마자 『간첩 용의자가 우리 마을에 와서 불

온한 강의를 하였다』고 경찰서에 신고해버렸던 것이다.

이런 일이 있은 후 나는 일꾼들을 모아서 자체 교육을 실시했다.

낯선 마을에 낯선 일꾼들이 들어가 박정희 비판부터 하는 것은

말하자면 심한 조루증이 있는 사나이와 다를 바 없다. 농민운동

을 제대로 해나가려면 상당한 기간에 걸친 투자가 있어야 한다.

농민운동은 마치 농부들이 좋은 씨앗을 골라, 밭에 뿌려 거름을

주어 가꾸고 잡초를 제거하고 가을에 가서 수확을 하는 농사와

같은 것이다. 따라서 농민 의식화를 제대로 하려면 먼저 농민교

육을 해야 한다. 바람직한 농민교육은 농민들로부터 우선 신뢰를

받아야 한다. 농민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농민들을 섬기는

봉사활동이 앞서야 한다. 또 농민봉사활동을 제대로 하려면 농민

들과 격의없이 만나 대화하고 그 속에서 농민들이 맞닥뜨린 문제

점들을 발굴하고 풀어나가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농민들을 만나자마자 의식화교육을 한답시고 반정부

강의부터 하는 것은 자신의 의식이 철저하지 못한 탓이다. 이를

테면 아마추어 수준이다. 이런 내용의 강의와 대화를 통하여 선

교팀이 올바른 마음가짐으로 농민들을 대하도록 유도했다.

그 후로 우리는 주민들에게 민감한 문제인 정치나 체제에 대한

이야기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 주민들이 현실적으로 부딪

힌 문제들에 대하여 함께 토론하고 그 해결책을 찾아나가는 일에

집중했다.

잘 되면 제 덕, 못 되면 교회 탓

그런 과정을 거쳐 착수한 사업이 지역사회 주민들의 소득증대를

위하여 새마을 공장을 세우는 일과 축산단지를 조성하는 일이었

다. 새마을 공장은 일본여성들의 옷인 기모노의 허리띠를 제작했

다. 공장 건물을 세우고 지역 부녀자 100여명이 취업하여 일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량생산 단계에 들어가자 일본 바이어 쪽에서

값을 절반으로 떨어뜨리려 하는 통에 문을 닫고 말았다.

당연히 주민들로부터 욕을 먹었다. 무슨 일이든 좋은 뜻으로 시

작하였다가도 실패하게 되면 욕은 교회가 먹게 되고, 책임도 교

회가 지기 마련이었다.

한편 공동축산단지는 1977년 말부터 남양만주민회 산하의 농업개

발부에서 전담한 사업으로, 먼저 비육우단지 조성사업부터 시작

했다. 송아지를 사서 기르되 구입·사육·판매 일체를 마을 단위

로 하기로 계획을 세우고 먼저 송아지 구입에 나섰다.

그런데 한꺼번에 수백 마리의 송아지를 사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멀리 제주도까지 출장 가서 송아지를 사려 했으나 여

의치 않았다. 여러모로 궁리한 끝에 외국에서 송아지를 수입하기

로 했다. 각 농가에서 원하는 마리 수를 신청하고 송아지 값을

먼저 내면 외국의 농장과 직접 계약하여 송아지를 들여오는 계획

이었다. 그렇게 하면 중간 비용을 줄이게 되므로 송아지를 값싸

게 들여올 수 있었다. 그리하여 뉴질랜드 농가와 계약을 맺고 마

리당 39만7000원에 무려 500두를 주민들로부터 신청받았다. 전체

소값이 2억원에 이르는 액수여서 농민들로부터 전액이 입금되려

면 3개월은 걸릴 것으로 예상하였다. 그러나 불과 18일 만에 2억

원이 입금됐다.

우리는 주민들의 열렬한 호응에 놀라고 기뻤다. 이것은 그간의

선교활동에 대한 중간평가 성격이 있는 것으로 매우 의미있는 일

이었다. 주민회 간부들과 활빈교회 선교팀의 일꾼들은 주민들의

철저한 신뢰에 신바람이 났다.

영세농민들이 돈을 모아 외국에서 소를 직접 사들여오는 일은 단

군 역사 이래 처음 있는 일인지라 큰 보람을 느꼈다. 우리는 남

양만을 한국농민운동의 총본산으로 만들겠다는 결의를 다지곤 했

다.

1978년 8월 말 뉴질랜드로부터 493두의 비육소가 인천항에 도착

하였다. 일본의 노무라(野村基之) 목사가 뉴질랜드까지 가서 검

사하는 수고를 맡아주었다. 그는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사

재를 들여가며 우리 일을 도와주었다.

각 농가까지 소를 도착시키는 일에는 그간 닦아놓은 주민조직이

한껏 그 기능을 발휘하였다. 소가 각 농가에 도착한 후에 정산을

하니 두당 1만7000원씩 남아서 각 농가에 되돌려주었다. 당시 국

내 비육우 시세가 두당 90만원이었으니 엄청 싼값으로 소를 들여

온 셈이었다.

그런데 정부의 한 기관에서도 같은 기간에 뉴질랜드로부터 비육

우를 도입하였다. 공교롭게도 우리와 같은 배에 실려 각 농가에

분양되었는데, 소값은 60만원에 달했다. 실로 이상한 일이었다.

농민들이 직접 사들여온 값은 39만7000원에서도 1만700원이 남아

되돌려준 판인데 정부기관에서 사온 소는 왜 60만원일까? 차액은

누가 챙겼을까? 실로 궁금한 일이었다. 정부와 농민들 간에는 그

소값 차이만큼의 거리가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값 파동

그런데 소를 싼값에 들여와 각 농가에 분양하는 데까지는 성공하

였으나 그뒤가 문제였다. 국내 소값이 바닥을 모르고 떨어지는

데다가 사료값이 턱없이 치솟는 것이었다. 게다가 서울 빈민촌

출신들과 영세농민들은 축산경험이 없는지라 외국소 사육에 익숙

지 못해 실패가 잇따랐다. 또 뉴질랜드의 너른 풀밭에서 자란 소

들을 한국 농촌의 좁은 외양간에 매두고 마른 짚을 먹이니 소들

이 제대로 자라지 못했다.

당시에는 소 한 마리가 죽으면 농가 재산의 몇 분의 일이 그냥

날아가버리는 셈이었다. 한 마을에서 소가 몇 마리만 죽게 되면

나머지 집들은 지레 겁을 먹고는 소를 헐값에라도 팔려 했다. 비

육우는 송아지를 일년에 한 마리씩 낳는데, 그 송아지를 팔아 투

자한 자금을 건지기에는 여유돈이 부족한 영세농민들인지라 다급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금회전이 좀더 빠른 가축을 선택할 필요

가 있었다. 우리는 의논을 거듭한 결과 젖소를 도입키로 결정했

다. 젖소는 우유를 매일 짜기에 자금회전이 빠를 것이란 생각에

서였다.

나는 장로회신학대학 시절 은사였던 호주선교사 브라운 목사를

찾았다. 우량종 젖소를 공급해줄 호주 회사를 소개해달라고 부탁

했다. 브라운 교수는 달게사(Dalgety Australia Limited)를 추천

했다. 남양만주민회는 달게티사와 젖소 600두 수입 계약을 체결

했다. 두당 64만원이라는 가격은 국내 시세와 비교해볼 때 절반

남짓한 금액이었다. 매우 조건이 좋았다.

이번에는 젖소를 신청한 주민들로 하여금 회의를 열어 호주농장

으로 가서 소를 검사할 대표 2명을 뽑게 했다. 시골농민이 해외

여행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지라 선거는 치열한 운동을 거

쳐 민주적으로 치러졌다. 당선된 두 사람은 호주로 파견되었다.

젖소 때문에 재판까지

1979년 6월24일에 인천항에 소를 실은 배가 도착하였다. 그런데

도착한 소는 356두에 불과하였다. 공급회사측에서 준비하였던 소

들이 선적시 검사과정에서 자격미달로 대량 탈락되었다는 것이었

다. 달게티회사측에서는 「미안하다. 다시 한 배를 더 주문하든

지 아니면 얼마 후 일본으로 가는 배에 150두를 실을 빈자리가

있으니 그 배로 나머지를 보내고 싶다」고 전해왔다. 우리는 도

착한 소를 농가에 인도한 후 나머지 소에 대한 대책을 세우기로

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사고가 일어났다. 인천항에 도착하여 동물검

역소에 들어간 소들은 15일간의 검역기간이 지난 후 통관절차를

밟아 각 농가로 수송되는데 통관절차에 사단이 생겼다.

통관업무에 필요한 「원산지증명(The Certificate of Origin)」

이란 서류가 없었던 것이다. 공급하는 회사가 호주산 소임을 밝

히는 간단한 서류지만 이 서류가 없으면 통관이 되지 않고 소는

검역소에서 나올 수 없게 된다. 원산지증명 서류는 호주에서 소

를 선적하는 즉시 항공우편으로 보내기 때문에 소가 도착하기 전

에 서울에 와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소가 이미 도착하여 검역기

간이 끝나갈 때까지 원산지증명서는 도착되지 않았다. 법정검역

기간인 15일이 끝난 뒤에도 소가 계속 검역소에 머물게 되면 그

비용은 우리가 별도로 부담해야 했다.

초조해진 우리는 전보, 텔렉스, 전화 등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호주의 달게티사에 원산지증명서를 독촉했다. 그런데 호주 회사

는 서류를 보냈다고만 대답했다. 이미 검역기간이 끝난지라

356두의 소에 대해 사육비, 관리비, 치료비 명목으로 하루에

80만원씩 물고 있는 상황이었고 우리는 여기저기서 돈을 끌어와

그 비용을 충당해야 했다.

뒤늦게 호주측에서 잘못된 주소로 서류를 발송한 것이 밝혀졌다.

호주의 BNSW은행에서 서류를 발송할 때 주소를 그릇 타자했던 것

이다. 「Yongsan P.O.Box 117 Seoul Korea」로 보내야 하는 주소

를, 용산(Yongsan)을 빼먹고 「P.O.Box 117 Seoul Korea」로 보

내는 바람에 서류가 용산우체국이 아닌 중앙우체국 사서함 117호

로 들어갔던 것이다. 결국 우리 서류는 서울 중앙우체국 117호로

들어가 있다가 우편함 주인이 자기와 관계없는 서류인지라 그냥

쓰레기통에 넣어버려 실종됐던 것이다. 여기까지 확인한 우리는

호주측에 서류를 재발급하여 긴급으로 발송하라고 연락했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달게티사에서 재작성하여 보내려는

판에 호주 우체국 직원들의 노조파업이 발생했다. 파업으로 인해

우체국의 모든 업무가 중단되고 말았다. 우리는 안달이 나서 미

칠 지경이었으나 우리 힘으로 호주의 노조파업을 중단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파업이 끝나 서류가 한국에 도착한 것이 10월

초순, 인천항에 소가 도착한 지 3개월여가 지난 때였다.

이런 소동을 겪는 동안 활빈 선교팀과 남양만주민회의 조직 내부

에 혼란이 일어났다. 일이 너무나 복잡하게 얽히니 관리능력이

뒤따르지 못하게 되고 서로가 책임을 회피하려고만 했다.

소들의 검역소 체류비용을 대느라 여기저기서 돈을 끌어다 쓰는

동안에 재정관리체계도 흐트러졌다. 필요없는 분야에 돈을 지출

하였고 더러는 사적인 일에 돈을 쓰는 경우도 생겼다. 자연히 분

쟁이 일고 인화가 깨졌다.

혼란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막연하기만 했다. 천신만고 끝에

검역소의 소들을 각 농가에 인도하고 달게티사에 손해배상금으로

7만 달러를 요청했다. 그러나 달게티사는 은행측에서 잘못한 것

이니 은행이 변상할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달게티사와

은행 간에 소송이 제기되고 재판이 시작되었다.

재판은 시간만 질질 끌 뿐 결말이 나지 않았다. 소를 분양받지

못한 주민들은 활빈교회로 와서 항의하기 시작했다.

1979년 10월3일 활빈교회 창립 8주년 기념일에 결산을 해보니 부

채액이 무려 1억4000만원에 달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추가로

들여와 농가에 분양해주어야 할 150여두분의 젖소 값을 검역소

비용에 써버려 대책이 없다는 것이었다. 농민들에게 소를 주든지

아니면 소값을 돌려주어야 하는데, 우리는 이것도 저것도 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르렀다.

사기꾼 목사로 몰리다

자연히 농민들은 책임자인 나에게로 몰려들었고 나는 채무자로

몰리는 처지가 됐다. 주일 예배시간이면 채권자들이 15~16명씩

떼를 지어서 뒷자리에 앉아 있곤 했다. 내가 설교를 시작하면 그

들이 소리 높여 말했다.

『어―이, 김목사 말은 좋은데 빚을 갚아야제―. 우리 소값 사기

해 먹고서 설교는 잘허네』

그리고 내가 기도드리려면 빚쟁이들이 말했다.

『천당에 전보 치소-. 거 송금 좀 하라고 그러소』

예배를 마치는 때에 축도를 하려고 손을 올리면 그들은 또 말했

다.

『어, 목사가 손을 번쩍 올리며 뭔 바람을 잡는기여? 저렇게 바

람 잡아 놓고 뒷문으로 도망가버리려는 거 아녀? 뒷문 지키자고

』

더러는 예배가 끝나면 헌금함을 집적거리며 말했다.

『오늘 수금 얼마 들어온 거야? 우리가 계산하여 가져가도 되제

』

나는 그러는 그들을 나무랐다.

『여보세요들, 사정이 딱한 것은 알지만 하필이면 주일에 교회에

와서 이럽니까? 주일이 아닌 다른 날 와서 순리로 이야기합시다

』

『순리? 순리 좋아하네. 김목사, 생각해 보시요. 다른 날 오면

당최 김목사를 만날 수 있어야제. 그래도 주일날 이 예배당에선

장날이니까 김목사가 장 보느라 꼭 있을 거 아뇨. 돈만 주시라

요. 이깐 데 오라 해도 안 올테니깐』

주일마다 빚쟁이들이 몰려와 이렇게 북새통을 벌이니 교인들의

수가 가을날 나뭇잎 떨어지듯 떨어져 나갔다. 200명이 넘던 교인

들이 겨우 13명만 남아 한숨을 쉬며 예배를 드리곤 했다. 할머니

교인들은 울며 이렇게 기도드렸다.

『하나님, 우리 목사님이 이 시험에 넘어지지 말고 승리케 하여

주시옵소서』

농민들은 그렇게 떼를 써도 별반 효과가 없자 고소하는 방법을

취했다. 79년에서 80년 사이에 나는 사기죄로 일곱 번 고소를 당

했고 수원검찰청에 무려 21회나 출두하였다. 번번이 무혐의로 처

리되곤 하였으나, 피해 입은 농민들이 번갈아가며 고소를 하는

통에 나로서는 견뎌내기가 어려웠다.

한 검사의 기지

그러던 어느날 수원검찰청 출두 문제는 어느 검사의 도움으로 막

을 내리게 되었다. 예전처럼 수원검찰청 ○○호실로 출두하라는

통보를 받고 정한 시간에 검사실에 갔더니, 채권자인 농민들이

거의 다 모여 있었다. 내가 들어서니 담당 검사가 채권자들을 돌

아보며 말했다.

『여러분이 자꾸 고발하는 김진홍 목사가 여기 왔수다. 나는 밖

에 나가 있을 테니 여러분들이 김목사하고 실컷 이야기들 나누시

오. 그래서 오늘로 고발하는 일은 끝냈으면 좋겠수다』

이렇게 말하더니 검사는 앞문으로 나가버렸다. 검사가 그렇게 나

가자 채권자 중 한 분이 말했다.

『김목사님, 우리가 너무 괴롭혀서 미안합니다. 우리도 김목사님

이 만져보지도 못한 돈인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라도

해야 돈이 나올 것 같아서 한 것이니 그 점 이해를 하시라요』

『말씀은 이해하겠습니다만 여러분들이 나를 살려 놓으셔야 손해

보신 것을 해결할 길이 열리지, 지금처럼 내가 들볶여서는 아무

것도 되지 않습니다. 물론 내가 그럴 사람은 아닙니다만, 감당하

지 못하고 어디로 가버리거나 쓰러지면 여러분들이 당한 손해를

누가 살펴주겠습니까? 그러니 내 입장을 생각해서 나를 좀 가만

둬 주십시오』

『목사님이 억울한 것 우리가 알고, 목사님이 훌륭하신 분인 줄

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저희 입장

도 이해는 하셔야지요. 이잣돈 빌려서 소값을 내놓았는데 소도

못 받고 빚에 쪼들리고 있는 터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방구

석에 가만 있을 수는 없는 겁니다. 그래서 김목사라도 쪼아야 어

디서 무슨 수가 터질 것 같아 이러는 거지요』

이런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는데 앞문으로 나갔던 검사가 뒤편 칸

막이 뒤에서 나타났다. 그는 채권자들을 향해 꾸지람을 했다.

『에이, 여보시오들, 내가 칸막이 뒤에서 다 들었수다. 여러분이

김목사를 번갈아가며 고발을 해서 내가 실상을 알아보려고 연극

을 좀 했수다. 오늘 여러분들이 김목사께 한 이야기를 녹음해 놓

았으니 이후로 김목사를 고발하는 사람은 무고죄로 다스리겠소.

여러분 입으로 김목사가 죄없는 줄 안다고들 하면서 그렇게 연방

고발을 할 수는 없는 겁니다. 이제 그만들 돌아가시오』

사정이 이렇게 되니 채권자들은 어안이 벙벙해져 서로 얼굴만 쳐

다볼 따름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 검사 덕택으로 수원검찰청을

드나들던 일은 끝이 났다. 지금 생각하면 참 고마운 검사님인데,

경황중에 이름도 알아두지 못해 못내 아쉽다. 지금은 다소 살 만

한 처지가 된 터이니 알기만 하면 찾아뵙고 감사의 뜻이나마 전

하련만….

10만원 받고 교회에서 쫓겨나다

수원검찰청에서 곤욕을 겪은 그 다음 주일엔가 예배 후 교회당에

서 제직회가 열렸다. 회의 도중에 한 집사가 나를 비난하며 말했

다.

『교회를 이 지경으로 해놓았으니 목회자로서 최소한의 양심이라

도 있으면 그 자리를 사임하고 떠나야지 무슨 염치로 계속 눌러

있는 게요.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나는 김진홍 목사가 이 모

든 일에 책임을 지고 이 교회를 떠나야만 지금의 혼란이 수습된

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 말에 마음이 오히려 차분해져서 좌중을 돌아보며 물었

다.

『방금 집사님께서 사태의 책임을 지고 제가 교회를 떠나야 한다

고 하셨는데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

하신다면 저는 언제든 사임하겠습니다. 다만 제가 이 자리를 계

속 지키고 있었던 것은 문제를 해결하고 교회를 회복시키는 일에

도움이 될까 싶어서였습니다. 여러분 생각에 그마저 필요없다고

생각하시면 저는 기꺼이 떠나겠습니다』

이렇게 물으며 좌중을 돌아보았으나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

다. 모두가 꿀먹은 벙어리처럼 묵묵부답이었다. 이에 내가 말했

다.

『이럴 때 대답이 없으신 것은 사임하라는 집사님의 말에 동조하

신다는 뜻이 됩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저는 이

번 주로 이곳을 떠나겠습니다. 그러나 떠나서도 채무를 해결하는

일에 제가 할 수 있는 역할은 감당하겠습니다. 여러분께 마지막

으로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아무리 어렵더라도 활빈교회 간판은

내리지 마시고 꼭 교회를 지켜달라는 겁니다. 활빈교회는 언젠가

는 크게 일어설 교회입니다』

이렇게 하직 인사를 하고 나니 눈시울이 찡했다. 71년 청계천 빈

민촌에서 활빈교회를 시작한 지 꼭 10년 만의 일이었다.

다음날 회계 담당이 내게 10만원을 주며 넉넉히 드리지 못해 죄

송스럽다고 말했다. 예산이 70만~80만원 있는데, 후임으로 올 목

회자를 위해 비축해두어야 하겠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나는 30세

에 빈민촌에서 활빈교회를 시작한 지 10년 만에 10만원을 받고

활빈교회를 떠났다.

다른 대책이 없는지라 어머님은 누나집으로 보내고, 꾸린 짐은

제주도로 보냈다. 제주도 한라산 기슭 조천이란 곳에 백형수 집

사란 분이 있는데, 그곳에서 개척교회를 하자던 말이 있던 터였

다. 제주도로 짐을 부치고 비행기표를 사고 나니 겨우 5000원인

가 남았다. 그 길로 제주도로 가서 한라산 기슭의 한 마을에서

개척교회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2개월이 못돼 남양만 활빈교회에서 나를 데리러 왔다. 김

진홍 목사를 그렇게 보낼 수는 없는 것이니 다시 모시고 오자는

여론이 강하게 일어나 나를 모시러 왔노라고 했다. 나는 떨떠름

한 태도로 물었다.

『여러분들이 가라고 하기에 갈 데가 없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제 이곳에서 마음잡고 다시 시작하려는데 왜 데리러

왔습니까?』

나를 데려가겠다고 찾아온 집사가 말했다.

『목사님, 그 말씀은 틀린 말입니다. 누가 목사님더러 가시라고

했습니까. 이집사가 책임지시라고 강하게 말하긴 하였지만, 집사

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목사님 혼자서 말을 다 하시고는 떠나신

것이지 우리가 목사님을 떠나라고 한 것은 아니잖습니까?』

『집사님들이 나에게 떠나란 말은 안했어도 그런 자리에서 침묵

을 지키고 있는 건 떠나라는 데 동조하는 것과 다를 바 없어서

내가 떠난 것이지요. 그런 자리에 제가 구차스럽게 버티고 있으

면 목회자 꼴이 뭐가 되겠으며, 잘못하면 교회가 분열되는 경우

도 생기는 겁니다』

『목사님, 우리도 엉겁결에 당한 일이니 목사님께서 이해하시고

돌아가십시다. 가셔서 일 수습하시고 교회부흥도 시킵시다』

나도 남양만에서 저질러 놓은 일에 책임감도 있고 하여 돌아왔

다. 그렇게 되돌아오긴 하였으나 뾰족한 수가 있을 턱이 없었다.

여전히 채권자들에게 몰렸고 식사도 교인 집을 돌며 끼니를 때우

는 식으로 지냈다.

기도원에서의 「예언 세례」

79년 12월30일, 한 해를 마감하는 날 채권자들도 피하고 기도도

할 겸 기도원에 갔다. 강원도 철원에 있는 대한수도원이란 곳이

었다. 나는 연말 연초에는 금식하면서 하나님께 지금의 처지를

극복하고 나갈 길을 열어주시기를 기도드리기로 작정했다.

그런데 기도원측에서 내게 「안찰기도」를 받으라고 권했다. 안

찰기도는 안수기도와는 다른 점이 있다. 안수기도는 그냥 머리나

병든 부위 등에 손을 얹고 기도드리는 것이고 안찰기도는 손바닥

으로 몸을 때리거나 비비며 기도드리는 방법이었다. 나는 본래

안수기도나 안찰기도를 즐기지 않는 터인지라 기도원측의 제의를

사양하였다.

『모처럼 조용한 곳에 왔으니 혼자 조용히 기도드리다 가겠습니

다. 그러나 생각해 주시는 마음만큼은 고맙습니다』

『목사님, 우리가 그냥 기도받으라고 권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

사님을 본 순간 뭔가 영적인 느낌이 있어서 안찰기도를 받으라고

권하는 것이지요. 평소에 이런 일은 거의 없습니다』

『글쎄요. 그래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전 조용히

혼자 기도드리는 걸 좋아해서요』

『아닙니다. 목사님, 너무 그러시면 교만입니다. 우리가 진심으

로 권하는 일인데 자존심을 죽이시고 한번 받으세요』

거듭 사양하는데도 기도원 측에서는 강권하다시피 말했다. 내가

너무 사양하는 것을 교만이라고까지 말하는지라, 나는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 안찰기도를 받겠노라고 응했다.

얼마 후 두 분의 자매와 한 분의 형제가 불려오더니 나더러 누우

라고 했다. 그리고는 셋이서 손목에 힘을 빼고는 손바닥으로 온

몸을 자근자근 때리며 기도를 하는데 아프기가 이를 데 없었다.

뼛골이 시리듯이 아팠지만 나는 아프다는 소리도 못하고 이를 지

긋이 물고 참고만 있었다. 속으로는 이 사람들이 중앙정보부 출

신들인가, 왜 이렇게 사람을 아프게 할까 생각을 하며 그냥 참고

만 있었다. 그런데 얼마가 지난 후에 그들이 방언을 하며 예언을

했다. 예언 중에 한 분이 내게 말했다.

『앞으로 물권(物權)이 있습니다』

물권이란 많은 재물 혹은 재산을 움직이는 능력을 말한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물권이 아니라 빚권이겠지」 하고 속으로 생각

했다. 농민을 살린다고 일을 벌였다가 1억4000만원의 빚을 지고

산에까지 와서 금식기도하고 있는 사람에게 물권이 있겠다고 말

하는 것은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고 얼마 지난 후에 다른 자매 한 분이 『미국에 가겠습니다

』 하고 예언을 했다. 그 말에도 나는 속으로 웃기만 했다. 왜냐

하면 나는 정치범으로 아직 신분이 풀리지 않은 때였던지라 해외

여행은 생각할 수도 없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나는 흔히들 예언

이라고 하는 말들이 대충대충 그런 식으로 하는 것이려니 생각했

다. 그런데 안찰기도가 끝난 후에 기도원 원장이 말했다.

『목사님, 참 잘 참으십니다. 웬만한 장정들도 견뎌내지 못하는

데 목사님은 얼굴도 안 찌푸리시는구먼요』

『예, 제가 매 맞는 일에는 좀 은사가 있는 셈입니다』

『목사님 말씀도 재미있게 하시네요. 그게 은사라니요. 그건 그

렇고, 목사님께 나온 예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글쎄요?』

『아니, 글쎄요라고만 하시지 마시고 목사님 의견을 말씀해 보세

요』

『허허, 말씀드리기 미안해서요』

『아닙니다. 미안할 것이 무엇입니까? 느끼시는 대로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그래서 나는 속으로 느낀 점을 솔직하게 말해주었다.

그렇게 안찰기도를 받은 부위에는 퍼런 멍자국이 생겼으나 며칠

지난 후 멍도 사라졌다. 그와 함께 예언도 나의 기억에서 사라졌

다.

예언의 실현

그런데 그때로부터 2년이 지난 후에 미국 백악관으로부터 초청장

이 날아왔다. 레이건 대통령의 조찬기도회에 연설을 해달라는 취

지의 초청장이었다. 정부에 초청장을 덧붙여 여행허가신청서를

제출하였더니 쉽게 허가가 나왔다. 그때 함께 워싱턴으로 가서

조찬기도회에서 연설(speech)을 맡았던 분 중에는 원자력학자인

정근모 박사도 있었다.

미국 대통령의 연초 조찬기도회는 마치 부흥회 같았다. 2박3일간

열리는 이 행사에는 국내외 1600여명의 각 분야 지도자들이 모였

는데, 강연을 듣고 기도하고 세미나를 열었다. 나는 평생에 그런

자리는 처음인지라 촌닭 관청에 간 것처럼 쭈뼛거리고 행동거지

가 어색하기만 했다.

그런데 도착한 다음 날 점심시간엔가 식탁에 6명이 둘러앉았다.

음식이 나오기 전에 서로들 인사를 나누기에 나도 옆자리에 앉은

백인 신사에게 인사를 건넸다. 영어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터에

외국인에게 처음 건네는 인사인지라 어색하고 서투르고 우습기도

했을 것이다. 그렇다 치더라도 나의 인사를 받는 그 백인의 태도

는 너무나 예상 밖이었다. 무례하기 이를 데 없는 태도였다. 나

는 이렇게 말했다.

『I am Mr. Jin Hong Kim. I came from Korea. I am pastor in

presby-terim church(나는 김진홍입니다. 한국에서 왔습니다. 장

로회교회 목사입니다)』

이렇게 내 딴에는 정성스럽게 인사를 하고 악수하자고 손을 내밀

었는데, 그는 나를 힐끗 보더니 못본 척하며 다른 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잠시 당황해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나 가만히 숨길을 가누며 생각해보니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

었다. 내가 아무리 서툴다 하더라도 격식을 갖추고 인사를 하는

데 못본 척한다는 것은 사람의 도리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

것도 다른 모임이 아니라 크리스천들이 모이는 기도회에서 그럴

수는 없는 터였다. 그 사이 나는 마음이 가라앉으며 이 친구를

그냥 둘 일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한번 「걸기로」 마음을 굳

히고는 그의 손목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Why don’t you like yellow colour. Me too, I don’t like

white colour. So we can be friend(너는 왜 노란색을 안 좋아하

느나? 나도 마찬가지다. 나는 흰색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너와 나는 친구가 될 수 있다)』

그가 나를 홀대하는 것이 내가 볼품없는 동양인이라는, 일종의

인종차별적 태도에서 나온 듯해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이런 모

습을 보고 있던 우리 식탁 멤버들이 웃음을 터뜨리며 나에게 박

수를 보냈다. 나에게 억지로 손을 잡힌 상대는 얼굴 색깔까지 바

뀌며 당황스러워했다. 그러고는 몹시 불쾌하였던지 나를 좋지 않

은 눈길로 내려다보았다. 나는 그런 눈길에 개의치 않고 웃으며

그를 쳐다보았다.

「네가 그런 눈으로 날 보면 어쩔 것이냐?」

까짓 한판 붙으려면 붙자, 언제든지 맞상대해 주겠다는 식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 다음 시간에 내가 회중 앞에 나가 20분간 강연을 했

다. 강연 내용이 청중의 가슴에 닿았던지 박수를 받았다. 내가

박수를 받으며 강당에서 내려오자 나와 해프닝을 벌였던 그 백인

이 다가와 사과를 했다. 진심이 담긴 정중한 몸짓으로 『아까 일

은 미안하다. 크리스천답지 못하게 처신하여 부끄럽다. 용서하기

바란다』는 뜻의 말을 건넸다. 나도 그에게 무안을 준 것이 미안

스럽기도 하여 부담을 갖고 있던 터인지라 서로 악수를 나누고

격의없는 사이가 되었다.

그렇게 레이건 대통령의 조찬기도회에 참석했다가 주일을 맞아

한인교회를 찾아가 예배에 참석하였다.

그런데 낮예배가 시작되는 11시에서 20여분이 지나도 예배가 시

작되지 않고 회중이 계속 찬송가만 부르고 있었다. 그러더니 장

로 같은 분이 앞으로 나와 회중을 향해 물었다.

『여러분 중에 혹시 설교하실 수 있는 분이 안 계신지요? 목사님

이나 선교사님 이 계시면 오늘 예배에서 설교를 인도해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우리 목사님이 오시다가 교통사고를 당하셔서 병

원으로 가셨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다행히 목사님께서 많이 다치

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만 오늘 예배 인도는 못하시게 됐습니다.

설교하실 만한 분이 계시면 자진해서 나와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나는 좌우를 살펴보았으나 아무도 나서는 기미가 없는 듯하였다.

나는 본래 어느 자리에서나 「나서는 은사」가 있는 기질인지라,

성경과 찬송을 들고 일어서서 앞으로 나가며 말했다.

『다른 분이 안 계시면 제가 해보지요』

장로는 이렇게 나서는 내 모습을 아래위로 살피더니 미심쩍은 듯

이 물었다.

『목사님이신지요?』

『한국에서 온 김진홍 목사입니다』

『실례지만 목회하시는 교회가 어느 교회신지요?』

『예. 활빈교회라고 시골에 있는 교회여서 잘 모르실 겁니다』

『예─. 시골교회시라고요─. 그러면 어느 신학교를 다니셨고 교

단은 어느 교단이신지요?』

공전의 히트친 김진홍 설교 테이프

한국교회에는 워낙 사이비도 많고 사쿠라도 많아 혹시나 이단종

파나 족보도 없는 엉터리 목사인가 싶어 여러 가지를 묻는 그가

이해가 갔다. 그래서 안심하라고 자세히 일러주었다.

『신학교는 워커힐 곁에 있는 장로회신학대학을 나왔습니다. 교

단은 예수교장로회 통합측 교단 소속입니다. 신분이나 출신에는

하자가 없으니까 염려 놓으시기 바랍니다』

장로는 긴가민가 하던 표정이 밝아지더니 『그럼 부탁드립니다』

면서 강대 위로 안내하였다. 나는 갑자기 맡은 설교인지라 제대

로 준비할 할 겨를이 없어서 농촌교회에서 시무하면서 겪고 있는

경험들을 성경에 비추어 이야기식으로 설교하였다. 말하자면 「

이바구식(이야기의 경상도 사투리) 설교」라 하겠다. 그렇게 설

교를 하고 예배가 끝난 뒤에 도넛, 커피 등을 나누는 친교시간에

그 장로가 내게로 와서 물었다.

『설교에 은혜받았습니다. 교인들이 설교를 한번 더 듣게 해달라

고들 하는데, 괜찮으시다면 오후에 특별집회를 1시간 인도해주실

수 있을는지요?』

『글쎄요. 집회를 인도해본 경험도 없고, 또 준비도 되지 않아서

요裃裯

『준비가 따로 필요없으실 것 같은데요.아까처럼 이야기 스타일

로 해주시면 되겠습니다』

『그런 식으로 하는 것이라면 좋습니다』

이렇게 해서 오후 특별집회를 열게 됐다. 오후 예배는 시간이 느

긋한지라 나는 2시간 정도로 여유를 잡고 웃기기도 하고 진지하

게도 하면서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설교를 마쳤다. 집회가 끝난

후에 교인 몇이 모여서 의논을 하더니 내게 와서 물었다.

『3일간 특별성회를 인도하여 주실 수 있으신지요?』

『저는 시골에 있는 조그마한 교회 목사여서 아직 부흥회나 특별

집회를 인도해본 경험이 없어 곤란합니다』

『부흥회가 따로 있나요. 오늘 낮에 하신 것처럼 하면 됩니다.

듣는 교인들에게 은혜 되면 좋은 거지요. 사양마시고 맡아 주십

시오. 저희들의 신앙생활에 큰 도움이 되겠습니다』

그들이 진지하게 부탁하고, 나도 그런 식으로라면 못할 것도 없

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허락했다.

이렇게 해서 3일간 저녁시간에 집회를 이끌었다. 그런데 이 집회

가 조금 극적인 표현으로 말하자면 「공전의 히트」를 쳤다. 사

방으로 테이프가 돌고, 그 테이프가 한국으로 역수입되기도 했

다. 한국에서 그 테이프를 들은 사람들이 『한국에도 이런 목사

님이 계셨나. 우리도 한번 모시고 은혜받자』며 내게 집회요청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길로 나는 부흥사 아닌 부흥사가 되었다. 그때로부터 15년 남

짓 지난 지금은 내가 한국교회에서 청중동원으로는 최고의 강사

라고 하니 사람의 일이란 참으로 묘한 데가 있다.

돌이켜 보건대 대한수도원에서 안찰기도를 받을 때에 들었던 『

미국 가겠습니다』는 예언이 뭔가 일리가 있었던 셈이다.

그리고 『물권이 있겠습니다』라고 말했던 예언도 지금 생각하면

일리가 있다고 여겨진다. 내 앞으로 된 부동산이나 현찰은 없지

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백성들을 돕는 일에 쓸 수 있는 예산이 해

마다 늘어나고 있으니, 이런 것이 바로 물권이라면 물권이 아닐

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남양만 갯벌에서 시작하여 여기저기에 세워지고 있는 두레마을은

물론 미국과 중국에 세워진 두레마을 공동체농장, 그리고 북한

땅 나진-선봉에까지 세워진 두레마을을 생각하면 바로 이런 것이

물권을 받은 증거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

다.

마을 복판에서 발가벗겨지는 수모

각설하고, 남양만에서 호주산 젖소 도입 사업이 잘못돼 농민채권

자들로부터 곤란을 겪던 때의 이야기로 되돌아가보자. 강원도 철

원의 대한수도원에서 79년 말과 80년 초에 걸친 기도를 마치고

남양만으로 돌아오니 역시 채권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분들은 79년 연말이 지나도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한데다가

김진홍 목사마저 어디론가 피해버렸다고 생각,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있었다. 기도원에서 내려온 다음날 채권자 7~8명이 들이

닥치더니 무조건 나를 끌다시피하고는 마을 복판으로 데려갔다.

나는 그들의 서슬에 눌려 『왜들 이러세요?』 하면서도 끌어가는

데로 따라갈 도리밖에 없었다. 그들은 『야, 이 사기꾼 목사야.

오늘은 된통 한번 당해 봐라』며 큰일이라도 낼 사람들처럼 설쳐

대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동네 복판에 세우더니 동민들에게 말

했다.

『동네 사람들요. 이리들 모이세요. 사기꾼 목사 김진홍 버릇 좀

들입시다. 다들 이리 모여주세요』

그들이 몇 번인가 그렇게 소리를 질러대니까 부녀자들과 아이들

이 주위에 모여들었다. 관객이 모여들자 한 명이 장마당 약장수

처럼 소리를 높여 말했다.

『여러분, 이 김진홍 목사란 자는 목사가 아니라 사기꾼입니다

요. 목사를 앞세우고는 선량한 농민들을 울리는 사기꾼입니다.

우리가 오늘 이 사기꾼 목사를 버릇들이려 합니다요』

장정 둘이 양편에서 팔장을 끼고 나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는

옷을 하나씩 벗기기 시작했다. 먼저 상의를 벗겨 높이 쳐들며 말

했다.

『여러분 이건 사기꾼 김진홍 목사의 윗도리입니다. 이 옷을 얼

마에 파느냐, 단 돈 만원, 만원을 다 받느냐? 꺾어 5000원에 팔

겠습니다. 여러분, 이거 공짭니다. 공짜』

그렇게 말하면서 옷을 쳐들고는 좌중을 한바퀴 돌며 흔들어댔다.

다음에는 러닝셔츠를 벗겨서는 같은 식으로 소리질렀다.

『이번에는 김진홍의 런닝구. 이 런닝구를 얼마에 파느냐? 단돈

1000원. 1000원을 다 받느냐? 꺾어 500원』

다음에는 바지, 바지 다음에 양말 순서로 진행해 나갔다. 마지막

팬티 순서에 가까워지자 조바심이 났다. 다급해진 나는 눈을 감

고 기도드렸다.

『아이고 하나님, 제발 여기서 멈추게 해주세요. 이 사람들이 지

금 제정신이 아닙니다. 제발 제발 여기서 멈추게 해주시고 마지

막 팬티까지 가지 않도록 나를 지켜주세요』

다급하여 그렇게 기도를 드리고 있는데 주동자가 마지막 팬티에

까지 손을 대려했다. 그런데 그들 중에 한 명이 나서서 제지하며

말했다.

『형, 이쯤 끝냅시다. 이거까지는 너무하요』

『먼 소리요. 이 사기꾼 땜에 우리가 당한 것을 생각혀 봐』

『아니에요. 이 정도로 하고 맙시다. 지나치면 안 좋을 것 같수

다』

『아녀, 난 해야겠어. 난 이 새끼 붕알을 한번 만져봐야겠어. 목

사는 붕알에 금테를 둘렸는지 한번 봐야겠어』

그들이 승강이를 하는 동안에 나는 눈을 감은 채 기도만 하고 있

었다. 드디어 주동자가 말했다.

『그래 이만 하자구. 오늘 김진홍이의 껍데기를 홀랑 벗겨야 하

는 긴데 그만 둔다』

그들은 벗긴 옷들을 여기저기 뿌려둔 채 가버렸다. 나는 모인 사

람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흩어진 옷들을 주워 모아 순서대

로 차근차근 입고는 그 자리를 떠났다.

그 길로 바다를 막은 둑 위로 올라갔다. 한켠은 바다를 막아 만

들어진 논이고 다른 한켠은 바다였다. 나는 바다 가까이로 가서

신발을 벗었다 신었다를 5~6차례 되풀이했다. 신을 벗을 때는 바

다로 뛰어내려버리려는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막상 바다로 뛰어

들려니 그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농민들을 돕겠다고 일하다가 실패하였기로서니 자살한 몸

으로 예수님 앞에 설 수는 없지 않은가?」

이런 생각이 드니 바다 쪽으로 가던 발걸음이 멈춰질 수밖에 없

었다. 그러나 되돌아서 신발을 신고 둑을 내려오려니 그것도 허

락되지 않았다. 날만 새면 또 채권자들이 들이닥쳐 실랑이를 계

속할 것을 생각하니 다시 아득해졌다. 그래서 이런 상태를 계속

할 수는 없는 거다, 끝장내는 거라는 생각으로 다시 신발을 벗고

바다 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렇게 되풀이하다가는 끝내 신발

을 신고 둑을 내려보며 교회당 한쪽에 있는 기도실로 들어갔다.

예수님과의 결판

이제 세상 길은 다 막혔으니 하늘 길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에서였

다. 기도실에서 예수님을 만나 결판을 내는 거다, 예수님을 못

만나면 그 자리에서 죽는 거다, 바닷물에 뛰어들어 죽느니 기도

실에서 기도하다가 그 자리에서 죽자, 어차피 이런 상태로 계속

나갈 순 없는 거다. 이런 생각으로 기도실로 들어간 나는 방문을

닫아걸고는 방석으로 창문을 막고 담요로 방문을 막아 밤과 낮이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캄캄한 방을 만들고는 벽 앞에 꿇어 앉았

다.

기도를 시작하려다가 다시 일어나 밖으로 나가 활빈교회 집사 한

명을 불러서 일렀다.

『내가 이 방에서 예수님을 만나야겠으니 아무도 방해하지 마세

요. 내 발로 방에서 나오기 전에는 나를 건드리지 마세요. 교회

당에 불이 나더라도 내가 나오기 전에는 날 건드리지 마세요. 이

방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일에 목숨을 걸었으니 그리 아세요. 예

수님을 만나게 되면 이 방에서 나올 것이고 아니면 이 방에서 죽

을 작정입니다. 그러니 물도 음식도 들여보낼 생각을 마시고 가

만 두세요』

집사는 숙연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목사님 알겠습니다. 우리도 밖에서 금식기도에 동참하겠습니

다. 예수님이 목사님의 진심을 아시니 응답하실 줄로 믿습니다』

나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 벽 앞에 꿇어앉았다. 그리고 혼을 기울

여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억울합니다. 내가 그간에 잘하지는 못했지만 최선을 다

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돈을 챙겼습니까? 땅을 샀습니까? 내 자

신을 위해서는 신발 한 켤레 챙기지 않고 열심히 한 것을 하나님

도 아시잖습니까? 그런데 내가 이 지경에 이르도록 그냥 보고만

계십니까? 그래도 내가 명색이 하나님의 일꾼인데 세상 사람들에

게 이런 곤욕을 당하도록 그냥 보고만 계십니까? 오늘 이 자리에

좀 나타나 주십시오. 나타나 주시지 않으시면 난 이 자리에서 죽

을랍니다』

이렇게 기도를 시작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눈물이 흐르기 시

작했다. 눈물이 흐르면서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슬픔이 솟아

올라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나는 두 손바닥으로 앞의 벽을 밀

며 큰 소리로 울었다. 한참을 그렇게 울고나니 마음이 차분해지

기 시작했다.

나는 구약성경 중의 「열왕기하」 20장에 나오는 히스기야왕의

이야기를 생각했다. 히스기야왕이 병이 들어 죽게 되자 그는 벽

을 향하고 앉아 죽기를 작정하고 기도했다. 여호와께서 그의 기

도를 들으시고 또 그의 눈물을 보시고 응답하시어 그의 수명을

15년 더 연장하여주신 이야기다. 나는 이 성경 구절을 생각하고

는 지금 내가 마주 대하고 있는 이 벽이 바로 히스기야가 앉았던

벽이거니 생각하고 기도드렸다.

『여호와 아버지, 제가 15년 목숨을 더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제가 바라는 유일한 소원은 농민들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것과 지난 10년 세월 내 청춘을 투자하여 일으켰던 이 교회

를 위한 기도입니다. 하나님 이 교회가 나의 교회가 아니잖습니

까? 아버지의 교회 아닙니까? 이 교회가 무너지지 않게 붙들어주

시옵소서. 저의 생명을 하늘나라로 데려가셔도 좋습니다만 이 교

회만큼은 붙들어 주시옵소서. 그리고 피해를 입은 농민들에게 보

상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시옵소서』

나를 찾아온 여자

나는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다. 눈물 콧물이 연방 흘러내리는 것

을 손등으로 문질러 닦으며 기도하였다. 기도하다가 지치면 앉은

채로 졸았다. 졸음에서 벗어나면 또 소근소근 기도하기를 거듭했

다. 나는 물도 마시지 않은 채 그 시간이 얼마가 지났는지, 낮인

지 밤인지 분간도 못하고 마냥 기도만 계속했다. 그런데 어느 순

간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소리를 무시하

고 그냥 앉아 있었다. 방 안에서 반응이 없자 밖에서 부르는 소

리가 났다.

『목사님, 목사님, 누가 찾아오셨는데요』

『나를 그냥 두라고 했잖습니까?』

『그건 아는데요. 어떤 자매님이 와서 목사님을 꼭 뵙자고 합니

다』

그 판에 어떤 여자가 찾아왔다고 해서 내가 관심이 생길 리 없었

다.

『집사님, 그냥 돌려보내세요. 나를 방해하지 마세요. 지금 내가

누구를 만날 처지가 아닙니다』

그러나 밖에서 웅얼웅얼하는 소리가 나더니 다시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목사님, 잠시 몇 마디만 드리면 된답니다. 잠깐만 나왔다 들

어가시지요』

『지금 내가 나갈 형편이 아닙니다. 오신 분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냥 보내주세요』

그러나 밖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목사님, 자매님이 몇 마디만 말씀드리면 된답니다. 서울에서

일부러 오셨는데 잠깐만 대화를 나누시지요』

나는 슬그머니 짜증이 나서 밖을 향해 말했다.

『정 그렇게 할 말이 있다면 밖에서 말하라 하세요. 내가 여기서

들을 테니 말 하라고 하세요』

다시 대화하는 소리가 나더니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목사님, 그럼 밖에서 몇 말씀 드리겠습니다. 목사님, 지금 어

려움에 빠져 계시지요. 그 일 때문에 제가 일부러 왔습니다. 「

로마서」 8장 12절과 13절 말씀을 읽으십시오』

나는 뜨악한 생각이 들었다. 이 판에 웬 여자가 와서 말을 걸지

않나, 거기에다 무슨 여자가 목사에게 성경을 보라 하지 않나,

귀신 앞에서 머리 푼다는 식으로 어떤 여자기에 목사를 찾아와서

성경을 보라 할까 하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썩 내키지 않았다.

그러나 막상 성경 몇장 몇절을 읽으라고 찍어 말하는데 안보겠다

고 말하는 것도 도리가 아니었다.

슬며시 일어나 전등을 켜고는 성경을 찾아들었다. 로마서 8장

12절, 13절을 찾으려니 그간에 캄캄한 곳에 있었던지라 글자가

보이지를 않았다. 나는 눈을 부벼서 시력을 되찾은 후에 그 말씀

을 찾아 읽어내려 갔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

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

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

이 말씀을 읽는데 먼저 눈에 들어오는 부분이 「빚진 자」란 단

어였다. 나는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목사가 되기까지 로마서를

아마 수십 번은 읽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난 날에는 이 부분을

읽을 때에 「빚진 자」란 단어에는 관심이 기울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1억4000만원의 빚을 지고 채권자들에게 고초를 당하는 지

경에 이르니 빚진 자란 말이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그래서 「

야―. 성경에도 빚쟁이에 대한 말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그 구절을 다시 읽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빚진 자로되…』

이 말씀이 나 자신에게 비추어 「그러므로 김진홍 목사야 네가

1억4000만원 빚진 목사로되…」 하고 읽혔다. 그런데 그 다음 말

씀을 읽을 때 내 마음속에 한 깨달음이 왔다. 마치 번갯불을 보

는 듯한 깨달음이었다.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이 말씀을 읽으며 「그래, 내가 목사로서 합당치 못하게 살았었

구나. 영으로 살아야 할 목사가 육신적으로 살았었구나. 내가 영

적인 삶을 살아 육신적인 삶을 이겨야 하는데 영적인 것이 육신

적인 데에 죽고 육신적인 삶을 살았었구나. 그래서 이 점을 깨우

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이런 시련을 주셨구나」 하는 생각이

짧은 순간에 떠올랐다.

육(肉)적인 삶의 한계

실제로 나는 농민들을 돕는답시고 성직자 업무에는 너무나 등한

하였다. 소도입 일, 돼지단지 만드는 일, 각 지역 주민조직을 강

화하며 주민을 교육하는 일 등등으로 너무나 바쁜 세월을 살았

다. 그렇게 되니 기도할 시간은 물론이고 설교 준비할 시간조차

제대로 있을 턱이 없었다.

새벽기도회에 교인들에게 자습하라고 이르는 것은 물론이고 수요

예배 같은 때도 바쁘다는 핑계로 교인들끼리 모여 기도하고 성경

읽다가 흩어지게 하는 때도 있었다. 어떤 때는 설교준비가 돼 있

지 않아 강대상에 올라가 교인들이 찬송을 부르는 동안에 그날

설교할 본문 말씀을 찾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식으로 목회를 하

니 교인들이 영적으로 갈등에 빠질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날은 권사 한 분이 내게 꾸중처럼 말했다.

『목사님, 정신 차리시라요. 도대체 교인이 목사님 만나기가 왜

이리 힘들어요. 청와대에 있는 대통령 만나기보다 더 힘드네요.

대통령은 TV에서라도 만나지지만 우리 목사님은 와 그리 못 보겠

능기요』

『권사님 조금만 더 참으시라요. 이번 소 일만 끝나면 제자리로

돌아갈 겁니다』

『아니 목사님, 그 소 돼지 닭 소리 좀 그만하시라요. 목사가 말

씀 전하고 기도하셔야지, 만날 소 돼지 타령만 하고 계시니 이게

될 일이에요. 목사님 거 소 같은 소리 자꾸 하고 다니시면 하나

님이 목사님을 가만 안 두실끼요』

『아니 권사가 목사에게 공갈치는 것 같구만요』

『공갈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이 목사님을 가만 안 두실 낍니다.

나중에 후회하시지 말고 지금이라도 툭툭 털고 목사가 해야 할

일로 돌아오세요』

이런 대화를 나눈 것이 얼마 전이었다. 나는 로마서 8장의 「육

신에게 져서 육신으로 살았다」는 말씀이 바로 그간의 나 자신에

게 이르는 성령의 음성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이런 시련이 다가온 것이구나. 이번의 소 파동은 다른 이

유 때문이 아니라 바로 나를 깨닫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채찍

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번에 이런 문제가 일어

난 것은 그 이유가 경제적인 데에 있지 않고 영적인 데에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심령 속에서 시원한 기운을 느끼고 어깨를

짓누르고 있던, 천근만근이나 되던 짐이 굴러떨어지고 홀가분한

몸이 되는 것을 느꼈다. 이제는 차원이 바뀌어 감사기도를 드렸

다.

『여호와 아버지 감사합니다. 저를 이 속박에서 풀어주시니 감사

합니다. 저를 깨우쳐 주시려고 이번의 시련을 주심을 깨달았습니

다. 등록금이 비싸긴 합니다만 고맙습니다. 제가 워낙 육적인 사

람인지라 깨닫고 부서지게 하시려면 이런 강한 방법이어야 하겠

기에 이런 채찍을 사용하신 줄로 압니다. 하나님 이제부터 영적

인 삶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성령님을 의지하고 성경적으로 일하

고 목사답게 영적인 바탕에서 살고 일하는 자리로 돌아가겠습니

다. 나를 붙들어주시고 이끌어 주시옵소서』

거듭남을 위한 반성

이렇게 기도를 드리고는 홀가분한 마음이 돼 밖으로 나왔다. 그

다음날이 주일이었다. 나는 주일 예배시 설교하며 교인들에게 말

했다.

『여러분 그 동안 이 목사 탓으로 여러분들까지 고생이 많았습니

다. 이번 일은 전적으로 제가 잘못하여 일어나게 된 일임을 깨닫

고 여러분 앞에 회개합니다. 지난 주간에 기도하는 중에 로마서

8장 12절과 13절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통하여 저 자신의 모습

을 보게 되었습니다. 목사답지 못한 목사였기에 하나님께서 나를

깨우치시도록 우리 제단에 이번의 시련을 주셨음을 깨달았습니

다. 여러분 이제 새출발합시다. 그간에 육적으로 살아왔던 것을

바로잡아 고치고 영적인 교회, 신령한 은혜를 사모하는 교회로

거듭 태어납시다』

내가 눈물을 훔치며 이렇게 말하니 교인들이 함께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목사님, 목사님이 뭔 죄가 있습니까? 목사님이 우릴 살리려고

동서남북 뛰어다니다 그 고생을 당하시고. 다 못난 우리 탓이지

요』

교인들이 울며 그렇게 말하니 강대상 위에 있던 나는 말을 잇지

못하고 흐느끼며 교인들과 찬송을 불렀다. 찬송을 부르고 또 부

르다가 울음판이 벌어져 축도순서도 없이 예배가 끝나고 말았다.

그런데 이런 역사가 있은 후로 기적이 일어났다. 나 자신은 물론

교인들까지 마음도 뜻도 믿음도 새로워지면서 그렇게 엄청나게

느껴지던 빚더미가 별문제가 아닌 눈더미처럼 느껴지면서 해결의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글자 그대로 전화위복이 돼 오늘의 두레

공동체 운동에 기틀이 열리기 시작했다. <다음호에 계속>


소파동을 겪으면서 죽느냐 사느냐의 막다른 골목까지 몰렸던 나

는 금식기도를 시작한 지 닷새 만에 「로마서」 8장 12~13절의

말씀에서 은혜를 받고 새출발하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그때 나에게 찾아와 『목사님 어려운 일이 있으시지요. 로마서

말씀을 읽어보십시오』라고 일러주었던 그 여인은 지금 내 아내

가 돼 있다.

나는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좀 별난 여자라고 생각했다. 흔한

말로 「귀신 앞에 머리 푼다」는 식으로, 목사에게 와서 성경을

보라고 하니 좀 이상한 여자라고만 여겼다. 그러나 그 말씀을 읽

고 은혜를 받은 후에는 고마운 여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사생결단할 각오로 시작했던 금식기도에서 그렇게 은혜를

받은 후 활빈교회는 몰라보게 변했다. 나와 교인들은 마음을 합

하여 기도하고, 은혜를 사모하며, 영적인 삶을 살며, 영적인 교

회를 이루어나가려 애썼다.

그렇게 되자 빚쟁이들의 등쌀에 짓눌려 있던 마음들이 기를 펴고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사방이 막히고 하늘엔 먹구름만 가득했

었는데 마침내 하늘이 뚫리고 빛이 비쳐들기 시작하면서 막혔던

사방의 벽들도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빚쟁이들의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여느 때처럼 빚

을 독촉하러 왔던 이들이 유쾌하고 밝은 얼굴로 앉아 있는 나를

보더니 혼자서 주고 받고 말하고는 가버렸다.

『안녕하슈. 김목사…. 어…. 얼굴이 좋으시네. 좋은 소식이 있

으신 모양이지요. 김목사께 존(좋은) 일이면 우리께도 존 일이지

요. 우리는 김목사의 인격만큼은 믿습니다. 존 일이 생겨 김목사

일이 풀리면 우리에게 의리를 지켜줄 줄 믿습니다. 우리가 그간

너무 닦달해서 미안하외다. 이제는 여기 자꾸 올 것도 없고 집에

서 기다릴 테니 잘 선처해 주시오』

그렇게 자문자답하더니 선뜻 사라졌다. 그리고 그가 마을에 다다

르자 역시 소값을 냈다가 소도 돈도 못 받게 됐던 이웃이 그에게

물었다.

『너 활빈교회 김목사 만나러 갔었다며? 뭔 존 소식 있더냐?』

『그래. 김목사 얼굴이 훤해졌더라. 그간에 우리 그 어른께 너무

했었어. 존 일 있으면 우릴 모른 척할 사람은 아니잖아. 난 이제

돈 일로는 활빈교회 그만 가기로 했어. 우리 사정 다 알고 있으

니 가만 있어도 알아서 해줄 거야』

『그래? 그럼 나도 가만 있어 볼까?』

이래저래 빚쟁이들의 발길이 뜸해지자 나는 교인들과 힘을 합해

교회를 다시 일으키고 무너진 터전을 다시 세우는 일에 착수했

다.

그간 소용돌이를 겪으면서 나에게 가장 약점으로 느껴진 것이 가

정이 없다는 점이다.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떠나버린

지 6년여가 지나도록 일만 열심히 해왔는데 그 일이 실패하게 되

니 하늘 아래 나 한 몸 의지할 데 없는 적막한 처지가 된 것이

다. 특히 병이 들었을 때가 가장 처량했다.

여인들도 마찬가지겠지만 나이 들어서 남자에게 가정이 없다는

것은 마치 뿌리내릴 곳이 없는 나무와도 같고, 깃들일 곳이 없는

새와도 같았다.

홀아비 목사의 고독

나는 현재의 좌절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정을 꾸며야겠다

고 생각하고 재혼할 마음을 먹었다. 더욱이 그때는 빚쟁이들에게

밀려다니면서 아무 일도 벌일 수 없었기 때문에 할 일이 없을 때

결혼이라도 해두자는 생각으로 결혼 날짜를 먼저 잡았다.

80년 1월17일을 결혼일로 잡았다. 74년 내가 체포돼 감옥으로 들

어갔기에 1월17일을 기념해 결혼일로 잡은 것이다.

그리고는 결혼해줄 상대를 찾기 시작했다. 얼마 전부터 나와 결

혼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던 간호사 출신의 여인이 있었다. 원

래를 목사 부인이었는데 남편이 교통사고로 죽은 후 남매를 기르

며 살고 있는 여인이었다. 그녀가 여러 번 나와 결혼할 뜻이 있

음을 밝혀왔기에, 나는 내가 원하면 언제든지 결혼할 수 있으리

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서울로 올라와 그녀에게 1월17일로 결혼 날짜를 잡

았으니 결혼하자고 말했다. 그러나 그녀의 대답은 딴판이었다.

『목사님은 혼자 사실 분이지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실 분은 아니

에요. 저는 목사님과 결혼할 의사가 없습니다. 꼭 결혼을 하시려

면 다른 여성을 찾아보세요』

그녀가 똑 부러지게 말하기에 나는 어안이 벙벙해 되물었다.

『아니 그러면 그간 결혼해달라고 조르던 말은 무엇이요?』

『제가 여러 번 목사님께 그런 뜻을 비쳤었지요. 그러나 그때는

목사님을 잘 모르던 때였어요. 목사님도 생각해보세요. 제가 마

지막으로 목사님께 결혼하자고 말한 게 언제예요. 벌써 몇 달 전

이잖아요. 그간에 제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김진홍 목사님 같은

분은 매력은 있지만 결혼상대로는 합당치 않다는 생각입니다』

나는 갑자기 몸에서 바람이 빠져나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힘 없는 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그래요. 말이 되네요. 몇 달 안 만나는 사이에 퍽 똑똑해졌구

먼요』

나는 서울에서 남양만으로 내려오는 버스를 타러 정류장으로 가

다가 1월17일을 결혼 날짜로 잡은 것을 기억하고는 발걸음을 돌

려 전남 광주로 내려갔다. 신부감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광주 인근에 장로·권사 부부가 살고 있었고 그들에게 딸이 하나

있었다. 그녀는 결혼한 지 며칠 만에 자기가 보는 앞에서 남편이

교통사고로 죽어버리는 바람에 충격을 받아 정신질환에 시달리고

있는 터였다.

나는 형님이 군에서 제대하고 돌아온 후로 정신병이 생겨 10년

넘는 세월을 고생하다가 죽은 일을 체험했기 때문에 정신질환자

들을 대하면 느낌이 다르다. 뭔가 각별한 연민의 정을 느끼곤 한

다.

그래서 어차피 결혼할 바에야 정신질환으로 불행을 겪고 있는 여

인을 아내로 맞아 가정을 이루면 예수님께서도 기뻐하실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기특한」 생각으로 그 집을 찾아갔다. 권사님

을 만나서는 따님과 결혼할 의사가 있어 불원천리하고 찾아왔노

라고 말했다. 권사님은 나를 표정없는 얼굴로 한참이나 물끄러미

보더니 바깥어른과 의논해보겠노라고 했다. 모처럼 오셨으니 식

사나 하고 가시라고 하며 잘 차린 상으로 대접도 했다. 그러더니

집에 가 있으면 혼사를 의논해서 연락드리겠노라고 했다.

이틀 뒤에 연락이 왔다. 뜻은 고마우나 딸이 부족해서 어렵겠다

는 것이었다.

신부감 구하기 작전

나는 당황했다. 결혼날은 정해두었는데 신부감을 구하는 일에 번

번이 차질이 빚어지니 난처한 생각이 들었다. 세번째는 서울에서

빈민선교하던 때에 알고 지냈던 미스 J를 떠올렸다.

그런데 그녀가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점이 마음에 걸렸다. 그러

나 내심으로 나와 결혼해 목사 아내가 되면 개신교 신앙을 따르

겠거니 생각하고 그녀를 만나 결혼하자고 했다. 그랬더니 그녀가

맹랑한 소리를 했다.

『목사님, 저도 목사님을 좋아는 합니다. 그러나…』

그러나 하고는 말을 잇지 않기에 나는 조급증이 나서 물었다.

『그래서요? 좋아하면 된 것 아닙니까? 「그러나」는 왜 붙이시

오?』

『그러나 목사님께서 제가 원하는 조건을 들어주실 수 있겠는지

요?』

『조건을 들어줄 수 있겠느냐고요? 그 조건을 한 번 들어나 봅시

다. 맘에 드는 여자에게 장가들려면 들어줄 건 들어줘야겠지요』

『예, 다름아니라 우리 가정은 전통적인 가톨릭 가정이니 목사님

이 저와 결혼하시려면 가톨릭으로 개종하셔야 됩니다』

그 말에 나는 그만 말문이 막혔다. 그녀를 물끄러미 보다가는 말

했다.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거요? 나한테 개종하라고요. 내가 장

가 못가 환장한 사람인 줄 아시요? 내가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것

보다는 김수환 추기경님이 장로교로 옮겨 보는 것이 더 쉬울거요

』

열을 받은 내가 톤을 높여 말했더니,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고

개를 떨구고는 말했다.

『진정한 사랑이 있다면 그렇게 해주실 수도 있잖아요』

나는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 나 자신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

었다. 그래서 자리를 털고 일어서며 말했다.

『여자들에게는 사랑이 첫째 가는 것이겠지만 남자들에게는 사랑

보다 앞서는 것이 일과 명예예요. 그리고 자기 소신이에요. 자신

의 소신을 바꾸어가며 결혼할 수는 없는 거예요』

착하고 유능한 여자였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난번에 그

녀와 소위 데이트를 하다가 손을 잡았더니 그녀가 놀라 몸이 굳

어지면서 『아이고, 마리아님』하며 떨었다. 나는 『이런 분위기

에 웬 마리아님을 찾는 거예요』 하며 손을 놓은 적이 있었다.

그 뒤로 생각해보니 그렇게 순진한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이면 영

혼의 맑음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으려니 하는 마음이 들어 청혼

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천주교로 개종 운운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결혼에 대한 나의 마음가짐이 너무 감상적이니

좀더 현실적인 판단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기도 속에 떠오른 배우자감

나는 남양만 활빈교회 기도실에 앉아 결혼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

다. 결혼 상대자를 고르는 일인데 너무 서둘러 사냥하듯 할 것이

아니라 기도의 응답으로 하나님께서 보내주시는 사람이어야겠다

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2~3일간 차분한 마음으로 성경도 읽고 기도도 하며 생각

하는 중에 마음에 떠오르는 여인이 있었다. 지난번 소값파동으로

기도실에 앉아 금식하며 기도하고 있을 때 나를 찾아와 성경 말

씀을 읽으라고 일러주던 여인이었다.

내게 부족한 것이 깊은 영성과 안정된 보금자리인 만큼 그 여인

이라면 두 가지를 보완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가 다니는 일터를 찾아갔다. 교회여성들의 연합모임

인 「여전도회 전국연합회」란 곳이었다. 그런데 가는 도중에 버

스에서부터 치통이 시작되더니 그녀를 만나 다방에서 이야기를

나누려할 때는 견딜 수 없는 통증이 왔다. 찡그린 내 얼굴을 보

고 그녀가 물었다.

『목사님, 몸이 불편하세요?』

『아― 예. 갑자기 치통이 일어 그렇습니다』

『치통이 있으시면 치과에 가셔야지 그냥 참고 견딜 일이 아니잖

습니까?』

『허―, 치과에 갈 줄 몰라 안 가는 것이 아니고 집을 나선 후에

치통이 온 데다 주머니는 비어 있어서―』

『그러세요. 그럼 제가 치과 가실 돈을 꿔드릴게요. 나중에 갚으

세요』

『아이고 이거 지옥에서 부처님 만난 셈이군요. 꼭 갚겠습니다』

둘의 만남을 이렇게 돈 꾸는 데서부터 시작됐다. 그때 빌린 돈을

그뒤에도 갚지 못했기에, 결혼한 지 20여년이 되어가는 지금도

아내는 가끔 말한다.

『그때 치과 갈 때 꿔간 돈을 왜 아직 갚지 않는 거예요?』

그러면 난 『먼 소리여? 그간에 몸으로 다 갚았잖아요』라고 말

하곤 한다. 그 뒤로 세 번째 만났을 때 나는 청혼을 했다.

『미스 강, 내가 당신과 결혼하기로 결정하고 1월17일로 날짜까

지 잡아 두었습니다. 물론 기꺼이 받아들이겠지요?』

그녀는 선뜻 대답하지 않고 머뭇거렸다.

『글쎄요. 목사님 편에서 결정하셨다지만 저는 아직 결심하지 못

했습니다. 그런데 결혼 날짜부터 받으셨다니 당황스럽네요. 대답

을 들으시려면 좀 기다려 주셔야겠습니다』

『언제까지 기다리면 될까요?』

『저도 기도하여 응답이 오는 대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 기도드려 응답을 받아야겠다는데 목사가 무슨 말을 하

겠는가. 그렇게 헤어지고 이틀 후에 연락이 왔다. 강원도 철원에

있는 대한수도원에 기도를 드리러 함께 가자는 것이었다.

나는 속마음으로 함께 기도원으로 가서 결혼을 할 것인지 말 것

인지에 대한 응답을 받으려는 것이로구나 생각했다. 그러자고 대

답하고는 기도원으로 가는 날짜와 시간을 정했다.

안성경찰서에 수감되다

그러나 기도원으로 가기 사흘 전 안성경찰서에 수감이 되고 말았

다. 사연인즉 젖소도입 사업을 할 때에 안성 쪽 농가 몇 가정이

젖소도입회원으로 가입하고 젖소값을 지불했는데 젖소를 받지 못

하자 나를 사기로 고소했던 것이다.

종로 5가 기독교회관에 들렀을 때 안성경찰서 형사 둘이 다가와

무조건 수갑부터 채웠다. 나는 교회에 관계된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수갑을 차고 안성까지 호송돼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었

다.

나는 지금껏 잘 견뎌왔는데 막판에 벽에 부딪히는가 싶었다. 형

사들은 이틀밤을 재우고는 석방시켜 주었다. 사기하려 했던 일이

아니니 범죄가 성립되지 않는다며 구속영장이 기각되었다는 것이

었다.

안성경찰서 유치장에서 풀려나자마자 나는 기도원에 가기 위해

미스 강과 만나기로 했던 마장동 버스정류장으로 직행했다. 정류

장에 도착하니 정확하게 출발 5분 전이었다.

아내인 강선우씨의 말을 빌려보자. 그때 결혼을 해야 할지 말아

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아 기도하던 차에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한다. 기도원에 함께 가서 금식기도를 하게 되면 결혼을 하기로

하고, 일이 틀어져 그렇게 되지 않으면 결혼을 안 해야겠다고 마

음먹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버스 출발 5분 전인데도 내가 나타나

지 않아 「김진홍이란 사람과 결혼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게로구나」 생각하고 있는 차에, 내가 헐레벌떡 숨이 턱에 닿아

달려오더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 길로 기도원으로 가서 3일 금식기도를 드리고는 결혼

하기로 합의하고 함께 손잡고 기도드렸다. 그리고 이왕지사 결혼

하기로 했으니 내가 먼저 잡아놓은 1월17일에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다.

그런데 막상 결혼식을 올리려니 혼수 등 비용이 문제였다. 완전

히 빈털터리였던 나는 겨우 2만원을 비용으로 썼다. 그 2만원은

신부 될 사람과 명동을 지나다가 어느 양화점에서 구두를 한 켤

레 사준 것이다. 나 자신이 생각해도 염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

던지라 신부와 장모 되는 분에게 말했다.

『신랑 될 사람이 성품도 신체도 워낙 출중하니 다른 것 할 것

없이 이 구두 한켤레로 끝냅시다』

장모 되실 분은 농담이거니 생각했다가 결혼식이 끝날 때까지 실

제 아무것도 없으니까 많이 섭섭해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어쩔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는 천하에 백수건달이 돼 어디를 가려 해

도 버스삯이 없어 움직이지 못하고 있던 처지였다. 아무것도 할

일이 없어 결혼이라도 해두자는 마음에서 감행한 결혼이니 애초

에 격식을 갖출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결혼 축의금까지 챙긴 빚쟁이들

80년 1월17일은 매섭게 추웠다. 결혼식장인 서소문 부근의 서소

문교회 2층에는 축하객이 가득 차 있었고 아래층에는 빚쟁이들이

가득 찼다. 빚쟁이들은 교회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담배를

피워대니 교회당 안에 연기가 자욱했다. 축하하러 모인 객들이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데 난데없이 전화가 걸려왔다.

『거기가 김진홍 목사란 자가 결혼식 올리는 곳이오?』

전화 받은 분이 그렇다고 했더니, 험한 욕설을 해댔다.

『어떻게 사기꾼 목사가 그 거룩한 성전에서 식을 올리는 거요.

우리가 지금 깽판 놓으러 그곳으로 갈 테니 그리 알고 있으시오

』

이런 전화를 받은 사람이 다행히 장모였다. 장모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얼굴이 사색이 되어 딸에게 말했다. 신부가 심각한

얼굴로 나에게 소식을 전하기에 태연한 얼굴로 말해주었다.

『글쎄 어떤 사람들이 나타날는지 궁금하구먼요. 아마 별일 없을

거요. 결혼식장이 깽판 될 만큼 나쁜 일은 안 했으니까 괜찮을

겁니다』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을 하니까 신부는 일단 안심을 했다.

그러나 그 소식을 아는 사람들은 염려스러워 바늘방석에 앉은 듯

안절부절 못했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아래층에 잔뜩 모여 줄담배를 피워대는 빚쟁

이들이었다. 그들은 며칠 전부터 공개적으로 말하고 다녔다.

『김진홍 목사가 부잣집에 장가드는 모양인데 결혼식 올리기 전

에 돈을 좀 풀지 않으면 식장을 소란케 할 거다』

그런 말을 하고 다니던 사람이 그들 중에 끼어 있었기에 나는 마

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을 든든히 먹고 태연하게 결혼

식에 임했다.

그러나 결혼식이 끝나는 시간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빚쟁이들은 소란은 피우지 않았으나 대신 결혼축의금으로 들어온

돈을 몽땅 들고 가버렸다. 결혼식은 마쳤으나 신혼여행 갈 처지

가 아니었던 우리 부부는 광나루 한강호텔에서 넓은 방 한칸을

잡고 첫날밤을 맞았다.

신부가 만장같이 넓은 방을 보고는 내게 『웬 일로 이렇게 큰 방

을 얻었습니까』 하고 물었다. 나는 시치미를 떼고 『저녁에 손

님들을 청했기에 넓은 방이 좋을 것 같아서 큼직한 방을 얻었습

니다』 하고 대답했다.

곧이어 빚쟁이 15~16명이 모여들어 그 방에 둥그렇게 앉아서는

신부에게 말을 시켰다. 그들 중의 한 분이 신부에게 말했다.

『어쩌려고 백수건달 같은 김진홍 목사에게 시집을 오슈. 지금도

늦지 않으니 고무신 뒤로 신고 떠나슈』

화장실 없는 신혼 방

그런 말을 듣고만 있을 신부가 아니었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

게 대답했다.

『내 고무신을 앞으로 신든 뒤로 신든, 내가 알아서 할 일이지

댁이 웬 참견이에요?』

『어―허, 보통신부가 아니군. 그 남편에 그 아내라더니 짝을 잘

맞췄구먼―』

이렇게 이야기판이 벌어지자 여기저기서 한마디씩 거들었다.

『신부 관상을 보니 40만 지나면 탄탄대로가 열리겠다』

『신부 관상으로 말하면 우리 돈 떼일 염려는 없겠구먼』

이런 허드레 소리를 나누다가 그들은 요리와 술을 시켜먹고는 그

비용을 몽땅 우리 앞으로 달고 흩어졌다. 다음날 아내는 친구에

게 전화를 걸어 돈을 가져오게 해서 방값 음식값을 치렀다.

얼마 후 신부가 2.5t 트럭 한 대에 장롱이며 찬장이며 TV를 싣고

남양만에 왔다. 그러나 신접살림을 차릴 방이 마땅치 않아 미처

짓다만 방 한칸에 짐을 풀었다. 문도 등도 화장실도 없는 방이었

다. 짐을 풀어 방으로 나르던 아내가 내게 물었다.

『여보, 문이 없어 어쩐다지요?』

그때 마침 활빈교회 교인인 목수 한 분이 지나갔다. 나는 그를

가리키며 『문은 저기 걸어가네요. 저분이 목수니까 문을 짜달라

부탁하면 해결될 겁니다』 하고 일러 주었다.

신접살림을 차리는 집이 그 모양이니 아내는 제쳐두고 따라온 장

모가 심란해했다.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고는 아무말없이 가버리

는 것이었다. 대충 짐을 정리하는 동안 날이 저물었다. 담요를

문에 쳐서 가림하고, 양초를 켜고는 이부자리를 펴려는데 아내가

대답하기 난처한 질문을 했다.

『여보, 화장실은 어디에 있지요?』

참으로 난감한 물음이었다. 헛간 같은 집을 급히 살림집으로 고

치면서 미처 화장실을 짓지 못한 터였다. 그렇다고 신혼살림하러

온 색시에게 화장실이 없다는 말을 할 수도 없는 터여서 손전등

을 들고는 『나를 따라오세요. 내가 화장실로 안내하겠수다』 하

며 앞장섰다. 아내는 사정도 모르고 고맙다는 듯 따라 나섰다.

나는 밖으로 나가 마당가에 서 있는 큰 밤나무 아래에 서서는 아

내에게 일렀다.

『내가 가려줄 테니 볼 일 보세요』

아내는 영문을 모른 채 『볼 일 보다니요』 하고 물었다.

『아니, 화장실 가자 해서 나온 거니까 여기서 대변이든 소변이

든 보라는 것이지요』

『예? 여기서요?』

『그렇습니다. 사정이 여의찮아 아직 화장실이 마련되지 못했습

니다』

『어마나 말도 안 돼. 여기 맨 땅에서 대변을 보다니요?』

『어떻습니까? 사방이 확 트인 넓은 화장실이거니 생각하시면 됩

니다』

아내는 쭈뼛거리더니 어쩔 수 없음을 깨닫고는 그대로 볼 일을

보았다. 그리고는 아무 말 않고 앞서서 방으로 들어가더니, 한마

디도 하지 않고 그냥 잠자리에 들었다.

출산 퇴원비가 없어…

그렇게 결혼생활이 시작된 뒤로 아내의 고충이 이만저만 아니었

다. 우선 두 식구 살아갈 생활비가 없었다. 젖소파동사건 이래로

교회는 뿌리째 흔들려 있었고 어쩌다가 다른 데서라도 돈이 들어

오면 빚 갚는 일에 통째로 들어가기 마련이었다.

어쩔 도리없이 아내가 대학에 강의를 나가서 거기서 들어오는 얼

마 되지 않는 강사료로 살림을 꾸려나갔다. 그러니 아내의 어려

움이 말이 아니었다.

그렇게 말없이 감당해 나가는 아내에게 퍽 고맙고 미안스러웠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난 후 아내는 임신하게 되었다. 우리는 출산에

대비해 한달에 1만원 남짓씩 모았고 그 돈이 15만원 가량 됐다.

출산 진통이 시작되자 나는 아내를 서울로 데려가 중앙청 뒷골목

의 민산부인과에 입원시켰다. 아내가 처녀시절부터 잘 아는 의사

가 있다고 해서 그곳으로 갔다.

태어난 아이는 아들이었다. 아이 이름은 이미 74년 교도소에 있

을 때 아들이면 민혁(民革)이라 짓고 딸이면 민애(民愛)라 지어

두었던 터였다.

그런데 민혁이를 출산할 때 아내가 난산이어서 견디다 못해 제왕

절개로 출산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제왕절개 수술로 아이도 산모

도 건강에는 이상이 없게 되었으나 입원비가 문제였다. 1년 내내

모은 돈이 15만원인데 그 돈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속앓이만 하고 있는데 드디어 병원측에서 오늘 퇴원해도 좋다는

말이 나왔다. 입원비가 얼마냐고 물었더니 115만원이라고 했다.

간이 철렁하고 떨어질 만큼 큰 액수였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쪽

지를 들고 원장님을 찾아갔다. 염치 불구하고 깎아달라고 사정하

는 도리밖에 없었다.

『원장님, 멋진 아들 건강히 낳도록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죄

송스러워 입이 떨어지지 않습니다만 도리 없어 말씀드려야겠네

요. 실은 제가 시골교회 목사입니다. 늦게 아들을 낳게 되었는데

병원비가 제대로 마련되지 않았구먼요. 지난 열 달간 모은다고

모은 돈이 15만원밖에 안되는데 제왕절개 수술을 하게 돼 병원비

가 115만원이 나왔구먼요. 죄송스럽습니다만 병원측에서 할 수

있는 만큼 저희 부담을 줄여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내가 주눅이 들어 더듬거리며 하는 말을, 눈을 깜박거리며 듣던

원장님은 잠시 생각하더니 40만원을 감해줄 테니 75만원만 내라

고 했다. 병원 측으로는 크게 봐주는 것이었지만 115만원이나

75만원이나 내게는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더 깎아달라고 할 염

치도 없어서 『예, 오늘 나가서 돈이 마련되는 대로 퇴원토록 하

겠습니다』 하고는 원장실을 나왔다. 나는 아내와 아들 민혁이가

있는 입원실로 가서 말했다.

『여보, 오늘 퇴원해도 된대. 내가 나가서 준비해 올 테니 퇴원

준비하고 기다리세요』

『예─. 준비해 오시겠다구요─』

돈을 꾸러 다니다

눈치가 빠른 아내는 준비해 온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를 짐작하고

는 눈을 내리깔며 『일찍 들어올 수 있을까요?』 하고 물었다.

나는 남자의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보인답시고 기세좋게 『그럼

요. 곧장 들어올 테니 짐보따리 싸고 기다리쇼』 하고는 병원 밖

으로 나왔다.

그러나 너른 서울 바닥에서 돈 꾸는 일로는 갈 만한 곳이 없었

다. 중앙청 건물을 지나 세종로 길로 나서며 돈 꾸러 가볼 만한

곳을 더듬어 생각했다. 친척, 친구, 아는 교인들을 골고루 생각

해내 먼저 갈 곳과 나중 갈 곳을 정하며 걸었다. 그렇게 궁리한

대로 한 사람 두 사람 찾아다니며 60만원만 빌려달라고 부탁했

다. 그러나 허탕이었다.

돈 꾸는 일은 나와는 전혀 맞지 않는 일이었다. 기껏 다방에 불

러내 만났으나 끝끝내 돈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하고 엉뚱한 이야

기만 나누다가 헤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더욱이 찻값까지 내가

물고 나오는 것이었다.

천신만고 용기를 내 60만원을 빌려달라고 해도 한마디로 거절당

하기 일쑤였다. 그렇게 일곱 사람을 만나고 나니 나 자신이 처량

하기 그지없었다.

예수님의 일꾼이 되기 위해 목사가 된 것은 좋은데, 나이 40에

아들을 낳고는 병원에서 퇴원시킬 돈이 없어 서울 바닥을 헤매고

다니는 내가 한심스러웠다.

서울 바닥에 찾아갈 만한 사람들이 제한돼 있는지라 학창 시절에

는 같이 놀지도 않던 동창을 찾아가 쭈뼛거리며 돈을 꿔달라는

부탁을 하는 자신의 모습이 비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친구들이 나의 부탁을 듣고는 『왕년의 캠퍼스 스타 김진홍

도 사회에 나오니 맥을 못추는구먼. 나에게 돈을 꾸러 오다니裃

裯 하며 묘한 표정을 지을 때는 입술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병원에서 짐 싸놓고 기다리고 있을 아내와

그 품에 안겨 있을 민혁이를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여덟번째 사람을 만나러 가는데 내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슬며시 오기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이것봐라, 도대체 몇 곳이나 다녀야 60만원이 구해지는 거지?

연습이라고 생각하고 한번 끝까지 다녀봐야겠구나. 그리고 예수

님이 내게 이런 경험을 하게 하시는 데는 뭔가 의미가 있으실 게

다. 괜스레 서울 바닥에서 돈 60만원을 구하려고 이렇게 헤매게

하시는 것은 아닐 거야」

대학시절의 한 친구와 어느 다방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그리로

가는 중에 이런 생각을 하며 한 가지 유익한 결론에 이르게 되었

다. 오늘 이런 경험을 하면서 그저 자존심이 상하고 자신의 모습

을 비참하게 보는 마음에서 벗어나 유익하고도 생산적인 경험으

로 삼자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래도 나는 서울 바닥에 찾아다닐

곳이 일고여덟 군데나 있으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이런

경우에 아무 데도 찾아갈 곳이 없을 벽촌이나 외딴 섬에 있는 다

른 동역 목사들은 얼마나 슬프고 적막할 것인가? 그러니 이왕지

사 나선 걸음 도대체 몇 사람이나 만나야 60만원을 구할 수 있을

는지 연습삼아 한번 다녀보자. 그래서 앞으로 내게 좋은 시절이

온다면 다른 일보다 이렇게 어려운 처지에 이르러 한숨만 쉬고

있을 동료 농촌 목회자들을 돕는 일에 적극 나서야겠다. 예수님

께서 나로 하여금 이런 경험을 하게 하신 것은 훗날 어려움에 처

한 농어촌 목회자들을 돕는 일을 하라고 시키시는 거다. 그렇다

면 기죽지 말고 열심히 다녀보자.

이런 생각을 하니 기운이 솟고 자신을 비참하게 여기던 마음이

사라졌다. 그렇게 바뀐 마음으로 열세 사람을 만난 후에야 65만

원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미 오후 6시가 지나 있었다. 병원에 이르니 짐 싸놓고 온 종일

기다리던 아내가 반색을 하며 맞아주었다.

『저는 어디 교통사고라도 났는가 싶어 걱정했어요』

『별소리를… 나선 걸음에 여기저기 다니다 보니 늦었소』

『말 안해도 짐작이 갑니다』

병원에 75만원을 치르고 남은 돈으로 택시를 불러 남양만 집으로

향했다. 민혁이가 태어난 날이 81년 5월28일이었고, 하루 종일

서울 거리를 헤매고 다닌 날이 6월1일이었다. 세월이 흐른 후에

도 나는 그날 겪었던 일을 잊지 않았고, 그때 결심하였던 바를

실행에 옮겼다. 그로부터 9년이 지난 후에 농어촌교회의 목회자

들을 돕는 일을 시작했다. 9년 동안에 활빈교회는 기틀이 잡히고

나 자신도 여유가 생기면서 이제 다른 목회자들을 도울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목회자의 아내가 명 짧은 이유

89년 11월 어느 날 교계 신문을 보았더니 목회자들의 세미나가

열린다는 광고가 실려 있었다. 그런데 그 세미나에 참가할 수 있

는 자격을 쓴 부분이 마음에 걸렸다. 교인 1000명 이상인 교회의

당회장 목사만 자격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세미나가 열리는 장소

는 서울 강남의 어느 호텔이었고 강사는 널리 알려진 미국교회

목사였다. 그리고 참가자들은 세미나를 마친 후에 단체로 성지순

례를 간다는 내용이 실려 있었다.

그런 내용이니 참가비가 비쌀 수밖에 없었다. 참가비가 우리 같

은 농촌교회 목회자들에게는 일년치 월급을 전부 합친 액수에 버

금갔다. 그런 내용을 찬찬히 읽은 나는 심사가 뒤틀렸다.

『이─거 도대체 교인 천명 안 되는 교회 목사는 끼여들지도 못

하는 거 아냐. 언─눔 기죽이려는 게야 뭐야』

나는 혼자 투덜거리며 생각했다. 그리고 한 가지 멋진 아이디어

가 떠올랐다. 그쪽은 서울 호텔에서 천명 이상만 모인다니까 우

리는 50명 이하로 모여보자. 그리고 그쪽은 세미나 후에 세계일

주 하고 성지를 밟는다는데 우리는 두레마을 마당이나마 신명나

게 밟아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전국의 농촌이나 섬에서

개척선교하는 목회자 중에 전교인 수가 50명 이하인 교회의 목회

자들만 초청하여 두레마을에서 세미나를 열자는 결론에 이르렀

다.

멋진 생각이라 여겨 스스로 무릎을 탁 치며 일어선 나는 그 광고

문이 실린 신문을 집어던지고는 실천에 들어갔다. 그런데 행사

제목을 정하고 취지문을 쓰고 홍보자료를 만들고 하는 중에 또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시골 교회에서 목사보다 더 고생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으냐는 생

각이었다. 바로 목회자들의 아내인 사모(師母)였다. 그래도 목회

자들은 대접도 받고 존경이나마 받지만 목회자들의 아내들은 이

중 삼중고에 시달리기 마련이었다.

교인 숫자가 적을수록 목회자 가족은 두드러지기 마련이고, 그렇

게 가족들의 삶이 노출될수록 교인들로부터 받는 스트레스가 컸

다.

한국 국민 전체의 수준이 그러하듯이 교인들의 수준 역시 마찬가

지다. 예수를 믿거나 안 믿거나 한국사람들은 모이면 남의 이야

기를 하고, 남의 이야기라면 칭찬이나 격려보다 험담이나 깎아내

리는 이야기가 중심을 이루기 마련이다.

그래서 목회자 가족들이 당하는 피해는 상상을 넘어설 정도다.

그런 스트레스의 결과가 바로 목회자 아내들의 수명에서 나타난

다. 평균적으로 한국인들은 남성보다 여성이 더 오래 사는데 목

회자 가족의 경우는 반대다. 아내들이 목사들 보다 일찍 죽는 비

율이 훨씬 높다.

평소에 교인들로부터 받는 스트레스 때문이다.

내가 섬기는 활빈교회도 마찬가지다. 물론 우리 교회는 한국교회

의 평균치보다는 덜하겠지만 그래도 아내나 아들들이 교인들로부

터 스트레스 받기는 마찬가지였다.

사모에 대한 흉담

아내는 활달하고 적극적인 성격이다. 이런 성격이 교인들에게는

시빗거리가 되었다. 어느 날 여성들 몇이 나에게 말했다.

『목사님, 말씀드리기 죄송스럽습니다만 사모님이 좀 설쳐요. 그

래서 사모답지 못하다는 말이 있습니다요. 목사님이 집안 단속을

좀 하시라구 일러드립니다』

나는 여신도들의 말에 씁쓰레한 느낌이 들었으나 기분을 가라앉

히고 아내에게 말했다.

『여보, 교인들 말이 당신이 설친대』

『뭐라고요? 내가 설친다구요. 누가 그런 말 합디까?』

『그걸 누가 그러더라고 말할 수야 있나요. 좌우지간 그런 말이

교인들 중에 도는 건 당신 자신으로나 교회로나 이롭지 못하지요

』

『그래도 내 천성이 그런 걸 어떡합니까』

『천성이 그렇더라도 사모가 된 이상 좀 참고 조용히 지내도록

힘을 써야지요. 성질대로 다하면 목회가 되겠어요?』

내가 그렇게 말하니 아내는 시무룩해졌다. 그후로 교인들 모임에

서 입을 꼭 다물고만 있었다. 그랬더니 금방 다른 흉이 생겼다.

『강사모가 요즘 교만해졌더라. 지난번 만났더니 사람 무시하는

지 입도 안 떼고 무게잡고 있더만』

아내는 성격이 활달한 만큼 화장도 눈에 띄게 하고 귀고리도 하

면서 자신을 꾸미는 걸 좋아했다. 나도 그것을 인정해 귀고리도

사다주고 해외에 나갔을 때는 화장품이나 액세서리들을 사다 주

기도 한다.

그런데 교인들 간에는 이것이 흉이 되곤 했다. 사모가 너무 사치

하다는 흉이다. 몇 번 그런 흉을 듣고는 아내에게 일렀다.

『여보, 교인들 말이 당신이 사치하대. 조금 수수하게 차리고 다

니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사모가 돼서 그런 일로 교인들 입에 오

르내리는 것이 좋을 것 없잖아요?』

『그것 참, 그건 내 옷태가 좋아 그렇지 하나도 사치한 것 없어

요. 이 옷도 동대문 시장 난전에서 산 싸구려 옷인데 교인들은

비싼 메이커 옷으로 알고 사치한다고 그러던데요』

아내는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본인도 그런 말썽에

신경이 쓰였던지 그 다음 몇 주간을 허름한 옷차림으로 예배에

나갔다. 그랬더니 그새 다른 말이 나왔다. 사모가 식모 같아 보

인다는 소리였다.

『글쎄, 요사이 우리 강사모가 식모차림으로 다니니까 보기 안

좋아예. 지난번 교회에 손님으로 오신 분이 사모가 옆에 앉았는

데 날보고 사모님 되시느냐고 묻잖아요』

나는 그제서야 교인들 말을 다 듣다가는 아내를 바보로 만들거나

환자로 만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아내를 보호하고

아내의 입장을 세워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아내에게 말했다.

『여보, 교인들이 당신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는데 당신 앞으로

는 그런 말에 전연 신경 쓰지 말아요. 내가 이제 감잡았어요. 도

무지 교인들이 경우가 없습니다. 한 주일은 사치하다고 그랬다가

다음 주일에는 식모 같다 그러고, 이 주일엔 설친다 그러고 다음

주엔 교만하다 그러고. 도무지 어느 장단에 춤춰야 할지 대중이

없잖아요. 그러니 이제부터는 교인들 말에 신경 쓰지 말고 당신

생긴 대로 놀아버리시오』

『그래요. 아이고 속이 시원하구만요. 그런데 내가 그렇게 하려

면 당신이 날 도와줘야 할 수 있지요. 나 혼자 힘으로야 그렇게

할 수 있나요』

『암 도와주고말고지요. 사나이의 명예를 걸고 도와줄 테니 안심

하라요』

우리 부부간에 이런 대화가 오간 후로 아내는 자기 모습을 되찾

아 활발하게 처신했다. 아니나다를까 교인들 중에 내게 말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목사님, 사모님 좀 절제시키시라요. 사모 땜에 말이 좀 있습니

다요』

나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되받아 말했다.

『거 수준 낮게시리 집사람에 대하여 이러쿵저러쿵 하지들 마쇼.

여러 사람이 한 사람 빙신 만들겠시요. 내야 델꼬 살아보이 좋

소. 내 좋으면 되지 교인들이 왜 그리 말들이 많은거요』

평소와는 다르게 완강한 나의 말에 교인들이 눈이 휘둥그레지며

말했다.

『아이고 우리 목사님이 치매 걸린 거 맹꼬로 와 이라시는교. 안

하던 버릇이 나오는 기 이상하네요』

『글쎄요. 치매가 걸렸어도 할 수 없는 기요. 교인들 말 듣고 우

리 마누라 자꾸 기죽였다가 나중에 헤까닥해서 히죽히죽 웃고 다

니기라도 하게 되면 난 그만 목사일도 종치는 기라요. 그러니 마

누라가 도둑질 안하고 미친 짓만 안 하거든 가만 두쇼』

내가 아내를 그렇게 확실하게 감싸주니 효과가 즉시 나타났다.

그 뒤로는 소문이 어떻게 돌았는지 누구도 아내에 대하여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목사 자식이 받는 스트레스

교인들로부터 스트레스 받기로 말하면 목사의 아내만 그런 것이

아니다. 목사의 아들 딸도 마찬가지다. 둘째 아들인 애민이는 성

품이 느긋하고 심성이 고와서 누구와 다투는 일이 없는 아이다.

그런데 하루는 밖에서 울며 들어왔다. 그 애가 초등학교 3학년

때인 것 같다. 나는 울며 들어오는 그가 마땅찮아 나무랐다.

『야, 사내 녀석이 왜 징징 울고 다니냐. 쌈을 하면 죽기 아니면

살기로 하든지 아니면 참을 것이지 매 맞고 울고 다녀』

『매 맞아 우는 것이 아닙니더』

『매 맞은 것이 아니면 왜 우는 거냐』

앞뒤 사정 이야기를 듣고는 목사 아들로 태어난 그가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연인즉 이러했다. 학교에서 집으로 오던 길에

동급생 중 한 명과 치고받고 싸우고 있었다. 그때 지나가던 활빈

교회 여신도 한 분이 아들을 알아보고는 말했다.

『늬들 웬 쌈질이냐. 넌 목사님 아들 아니니. 목사 아들이 쌈꾼

이 되면 되냐?』

아들은 목사 아들이 웬 쌈질이냐는 말에 갑자기 풀이 꺾여 무방

비 상태가 됐다. 그 통에 늘씬하게 얻어맞은 모양이었다. 맞아서

우는 것이 아니라 싸움도 하지 못하고 얻어 맞기만 해야 하는 목

사 아들 신세가 서러워서 울었던 것이다. 나는 아들이 안쓰러워

말했다.

『그 여자가 잘못해도 크게 잘못했구먼. 도대체 누구지? 너 이제

부터는 그런 말에 신경쓰지 말아라. 앞으로 쌈할 때 그런 말 하

는 사람 있으면 말해라.

「아버지가 목사지 내가 목사인가요. 내가 뭐 목사 아들 될라꼬

신청해서 나온 줄 아시요. 나와 보니 아버지가 목사던데」라고

말해줘라.

그라고 너를 때린 녀석 어디로 갔냐. 뒤따라 가서 패줘라. 너 절

대 기 죽고 살지 마라. 알겠냐?』

그렇게 풀어주는 말에 그는 위로가 되었던지 울음을 그치고는 말

했다.

『이젠 됐어요. 그 친구 안 때려줘도 돼요. 나하고 친한 애예요

』

이런 식으로 성직자의 가족들은 스트레스를 받기 마련이다.

목회자 사모님 수양대회

목사 가족들의 그런 고충을 생각하고는 농어촌교회 목회자 수양

회를 열려던 마음을 바꾸어 목회자 사모 수양회를 열기도 했다.

두레마을에서 농촌과 어촌지역 교회 중에서 교인 수 50명 이하인

교회의 사모들을 위한 수양회를 열겠다는 홍보를 하였더니 150명

정원에 800여명이 신청하였다.

그들 중에서 제일 가난한 분 200명을 뽑아 제1회 농어촌 교회 사

모수양회를 열었다. 90년 1월 둘째 주간이었다. 개회예배 설교에

서 나는 말했다.

『사모님들 두레마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사모님들은 이 땅

에서 가장 외진 벽촌에서 또 가장 외딴 섬에서 이름없이 일하고

계시는 목사님들의 사모님들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결론 먼

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사모님들 이번 두레마을에 오셔서 은혜

받겠다, 성령충만 하겠다, 생각지 마시고 그냥 푹 쉬십시오. 은

혜 받는 것으로 말한다면 사모님들이 그간에 받은 은혜만으로도

충분할 것입니다. 은혜충만 성령충만한 체험과 고백 없이 누가

산골짜기나 외딴 섬에서 여러분처럼 헌신하겠습니까? 여러분 모

두 겪은 체험이 있고 받은 은혜가 있으신 분들일 테니까 이번 수

양회에서는 그냥 잘 잡수시고 푹 자고 마음 놓고 쉬시기 바랍니

다.

그래서 이번 행사 중에는 새벽기도회도 다 없앴습니다. 모처럼

늦잠들 마음놓고 주무십시오. 그러고 방방이 모여서 남편들 흉도

보고 교인들 중에 여전도회 회장이나 장로나 누구든지 속썩이는

사람들이 있으면 이번 기회에 껌 씹듯이 씹어버리십시오. 그래서

여러분 가슴에 쌓인 응어리와 한을 확 풀어버리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말했더니 여기저기에서 『아멘─ 아멘─』 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단번에 사모님들의 어깨가 펴지고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렇게 시작된 사모수양회는 효과 200%의 내용으로 진행되었다.

다른 무엇보다 나의 설교 시간만 되면 사모들이 울어서 설교하기

가 민망스러울 정도였다. 특히 시간마다 맨 앞자리에 앉는 사모

한 분이 유난스레 많이 울기에 휴식시간에 가 물었다.

『아니 사모님은 우는 은사를 받은 거요. 와 그래 울어쌌는 기요

』

『아이고 목사님 죄송스럽습니다』

『죄송타 할 것까지는 없지만 울어도 너무 웁디다. 평소에 그렇

게 눈물이 많으신 편인가요』

『그런 것은 아닌데 두레마을에 와서는 웬일인지 눈물이 쏟아지

는구먼요. 안 울라고 애를 써도 안 되는구먼요. 그냥 쏟아지는

눈물을 저도 감당키 어렵구먼요』

『사모님 내외분은 어디서 어떤 일을 하시는데요』

『우리 남편이 공무원을 하다가 은혜 받고 사명자로 나서겠다고

사표 내고 교역자 길에 들어선 게 9년 전입니다.』 어느 곳이든

일꾼 찾는 곳에 가서 섬기는 일생을 보내겠다고 서원하고는 찾아

간 곳이 지금 일하고 있는 섬입니다. 목포에서 배 타고 2시간을

가는 곳인데 그 섬에 들어간 지 9년 만에 이번에 처음 육지를 밟

았습니다. 9년 전 섬에 들어갈 때 신고 들어갔던 구두를 선반 위

에 얹어두었다가 이번에 닦아 신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목사님께

서 지난날 고생하시던 이야기를 들으니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것과 어쩜 그렇게 꼭 같을까요. 그래서 눈물이 쏟아지는 거지요.

이제는 안 울어야지 하면서도 목사님 얼굴만 봐도 눈물이 나고

얼굴 안 볼라고 눈을 감으면 목사님 음성이 들려 눈물이 납니다

』

그렇게 말하면서도 눈물을 질금질금 훔치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는 나도 가슴이 찡하며 눈시울이 젖어왔다.

『사모님 훌륭하십니다. 내외분이 그렇게 충성하시니까 예수님이

기뻐하실 것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기뻐하실 것을 생각하시

고 잘 견디시기 바랍니다』

『아무렴요. 우리가 그걸 믿고 충성하고 있는 거지요. 우리 부부

는 그 섬에서 일하다가 거기에 묻힐 작정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벌써 우리 부부가 묻힐 묘자릴 봐두었습니다』

진정으로 한국교회를 지키는 사람들

나는 이런 일꾼들이 한국교회를 지켜나가는 그루터기거니 생각했

다. 서울 중심부에 우뚝우뚝 선 큰 교회들이 한국교회를 지켜나

가는 것이 아니라 산골짜기에서, 외딴 섬에서 이름없이 섬기고

있는 이런 종들과 그런 교회들이 한국교회의 뿌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목회자의 아내들을 모시고 위로 잔치를 베푸는 일은

하게 된 것이 두레마을에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라 생

각했다.

행사가 시작되는 날 아침 7시경에 한 시골교회 사모로부터 전화

를 받았다. 전남 쪽 지리산 밑에 있는 교회의 사모라고 자기 소

개를 한 후 그녀는 말했었다.

『김목사님 오늘부터 두레마을에서 행사가 시작되지요. 꼭 참석

하고 싶은데 여비가 없어서요』

『그런 걱정일랑 하지 마세요. 우리 두레마을에서 계란 팔고 채

소 판 돈으로 사모님들 왕복차비를 봉투에 넣어두었습니다. 차비

걱정일랑 마시고 여기까지 오시기만 하세요』

『목사님도 참 딱하시네요. 그 봉투 받으려고 그곳까지 걸어가나

요. 가는 차비를 못 구했으니 하는 말이지요』

『사모님, 내가 그 사정을 짐작 못하는 거 아닙니다. 어디 가까

운 데서 오는 차비만 꿔서라도 오시라는 거지요』

『이 외딴 골짜기에서 돈 꿀 데가 있어야 말이지요』

『사모님, 정말 융통성이 없으시네, 어디 이장이나 조합장 집에

라도 가서 며칠뒤에 갚는다 하고 좀 꾸시지요. 설마 한 마을에서

차비 꿀 데도 없을까요』

『목사님, 그렇게 쉽게 말씀하시면 안됩니다. 다른 목사님은 그

렇게 말씀하시더라도 김진홍 목사님은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됩

니다』

『무슨 뜻인지요. 잘못 말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잘못하셨지요. 우리같이 밑바닥에서 일하는 일꾼들의 사정을

누가 알아주겠습니까? 서울 큰 교회 목사님들이야 우리 사정을

어찌 짐작이나 하겠습니까. 그래도 김진홍 목사님 같은 분은 우

리 사정을 알겠지 하고 위로를 받고 있는데 목사님마저 그렇게

쉽게 말씀하시면 안 되지요. 목사님, 우리 부부가 섬기는 교회의

사정이 어떤지 아세요. 지난 주일 출석 여덟 명에 헌금이 110원

입니다. 여덟 명 출석에 헌금 110원 나오는 교회의 사모가 어디

가서 돈을 꾸겠습니까?』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래서 다음 말을 일러주고 전화를 끊었

다.

『사모님 말씀 듣고 보니 내가 잘못했구먼요. 사모님 그곳 주소

가 어떻게 됩니까? 가까운 우체국이 어디지요. 그 우체국으로 송

금할 테니 받으시는 대로 늦더라도 올라오세요. 사모님 힘냅시다

』

전화를 끊고는 사모가 일러준 주소로 긴급 송금을 하였다. 그 사

모는 수양회가 끝날 즈음에 두레마을에 도착했다. 그런 분위기에

서 제1회 농어촌교회 사모수양회가 진행됐고 마치는 시간에는 두

레마을에서 푸짐한 잔치상을 마련해 주었다.

울음판으로 끝난 잔치상

이제 임지로 돌아가서 힘차게 사시라고 위로하는 뜻에서 마련한

잔치자리가 역시 울음바다로 변하고 말았다. 처음에는 한두 사람

이 간증으로 이야기하다가 눈물을 짓기 시작하더니 끝내는 울음

판으로 바뀌고 말았다. 그렇게 울음판으로 바뀐 것은 강원도 두

메산골에서 온 한 사모 때문이었다. 그녀는 앞자리로 나오더니

내 아내의 목에 자신의 금목걸이를 걸어주며 말했다.

『제가 가진 마지막 결혼 패물인 이 목걸이를 김진홍 목사님 사

모님께 드립니다. 제 남편 목사는 성질이 유별나서 한 마을에서

개척하여 자리가 잡혀갈 때쯤이면 다른 목회자에게 맡기고는 다

른 곳으로 다시 개척하러 갑니다. 그 교회가 천신만고 끝에 자리

잡혀갈 때쯤이면 또 교회 없는 골짜리로 옮기기를 거듭해왔습니

다. 그때마다 당하는 것은 처자식들이었지요. 나는 그간 그런 남

편을 원망 하고 헤어질까 생각도 하며 지냈습니다. 이번에 두레

마을에 와서 전국에서 모여 온 동료 사모님들을 만나보니 나 혼

자만 겪고 있는 고난이 아니구나, 오히려 나보다 더 어려운 여건

에서 충성하시는 사모님들도 많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

고 김진홍 목사님의 오늘이 있기까지 사모님의 공이 컸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금목걸이는 내가 시집올 때 마련해 왔던 패물들

을 그간 급할 때마다 팔아쓰고 마지막 남은 것입니다. 이번에 이

곳에 와서 받은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이 목걸이를 사모님께 드

립니다. 이제 불평없이 열심히 일하기를 맹세합니다』

그 사모님이 그렇게 말하고 눈물을 삼키며 아내의 목에 목걸이를

걸어주자 장내는 울음판으로 바뀌고 말았다. <다음호에 계속


이제 두레마을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할 때가 된 것 같다. 두레마을

은 한마디로 이스라엘의 농업 공동체인 키부츠와 비슷한 형태의

「한국형 농업 공동체」라 할 수 있다.

「두레」란 말은 우리 조상님들이 예부터 꾸려오던 「두레 공동

체」에서 따온 이름이다. 한반도에 터를 잡고 살아온 우리 조상

들은 본래부터 공동체 정신이 두터웠다. 그래서 태생적으로 서로

가 돕고 이끌어주는 삶, 즉 공동체적인 삶을 살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 귀한 전통이 세월이 흐르면서 이런저런 이유로 약화돼

버렸다. 「두레 공동체」 또는 「두레 정신」의 실질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글자로만 남게 된 것이다.

예를 들어 「두레박」이란 말을 보자. 옛날에는 한 골짜기에 마

을이 생길 경우 우물을 중심으로 집들이 옹기종기 들어섰다. 우

물은 주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온 마을사람이 같이 쓰는 공

동우물이었다. 그래서 우물 물을 뜨는 바가지도 공동으로 쓰기

때문에 「두레박」이라고 불렀다.

「원둘레」란 말도 마찬가지다. 이는 두레 공동체의 경계선이란

개념에서 쓰인 말이다. 이외에도 여럿이 함께 둘러앉아 사용하던

둥근 상을 「두레상」이라 불렀으며, 농촌에서 농번기에 서로 돌

아가며 품앗이하던 행위를 「두레 품앗이」라고 했다.

그런데 우리는 역사 공부를 할 때 「향약(鄕約)」이니

「대동계(大同契)」니 하는 말들은 배웠으나 두레라는 말은 제대

로 배우지 못했다. 또 이스라엘의 키부츠는 알아도 키부츠가 생

겨나기 수천년 전부터 존재했던 우리 고유의 두레는 알지 못했

다. 우리나라 역사 교육의 맹점이 바로 이런 데에 있다고 본다.

사실 대동계니 향약이니 하는 것들은 양반들이 주도한, 일종의

변형된 두레였다. 그런 것들이 생겨나기 훨씬 전부터 백성들은

스스로 두레란 이름으로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오고 있었는데, 중

국문자와 외래문화에 젖은 양반들이 이것을 한문자로 고쳐 향약

이니 대동계니 하고 불렀던 것이다.

이러한 두레 전통은 구한말까지도 매우 활발하였으나 본격적으로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를 거치면서 사그라들게 되었다. 농촌 두레

가 일제에 대한 저항운동의 온상임을 파악한 일본 헌병들이 두레

전통을 조직적으로 파괴하였기 때문이다.

두레전통과 기독교 신앙

그렇다면 우리 고유의 두레 전통이 오늘의 기독교 신앙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나는 두레 공동체의 전통이 바로 성경의 「사도

행전」(2장, 4장)에 나타나는 「성령(聖靈) 공동체」와 연관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도행전 2장 첫부분은 오순절에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면서 비로소 교회가 시작되었다고 기록하는데,

이것이 바로 초기 교회의 교인 모임인 성령공동체인 것이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

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

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

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사도

행전」 2장 42~47절)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

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

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줌이니라」(「사도행전」 4장 32~35절)

위에 인용한 두 말씀을 통하여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 나타나는

결과가 바로 공동체의 출현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공동체 정신

과 관련해 한국 교회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 교회에는

교인들의 열성이 뜨겁고 성령 체험도 왕성하지만, 공동체 정신은

결여돼 있었다.

그래서 나는 조상 때부터 내려온 고유의 두레 전통과 「사도행전

」의 성령 공동체를 접합시키면 무엇이 나타날까? 어떤 공동체가

출현할 수 있을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결국 이러한 질문이

오늘의 두레마을 탄생에 기본 발상이 된 것이다.

나는 이런 아이디어를 가지고 오랫동안 심사숙고한 결과 하나의

결론에 이르렀다. 민족적 전통과 성경적 내용이 합해져서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어 나간다면 공산주의의 모순과 자본주의의 결함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代案)」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결론이었

다.

감방에서 탄생한 두레 정신

내가 공동체 설립을 처음 생각하게 된 것은 1974년 옥중에 있을

때였다. 서대문에 있는 서울구치소에 수감돼 있을 무렵인데, 죽

독방생활을 하다가 한번은 8명의 죄수가 있는 방으로 옮겨졌다.

나까지 모두 9명의 죄수들이 1.7평 좁은 방에 살게 되었다. 그

좁은 공간에 화장실이 있고 9명의 짐까지 있으니 비좁기가 이를

데 없었다.

가장 불편한 것은 잠잘 때였다. 9명이 바로 누울 만한 공간조차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모로 누워 한쪽 어깨만 바닥에 붙이고 잠

을 잤다. 그런 잠을 「칼잠」이라 불렀다. 어깨를 칼날처럼 세워

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렇게 칼잠을 자다가 어쩌다 어

깨가 밀려나올 경우에는 다시 어깨를 들여놓을 틈을 마련할 수

없었다. 그때는 어쩔 수 없이 일어나 변소 옆에 앉아서 잘 수밖

에 없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죄수들 사이에 공동체 의식이 생겨나자

그렇게 비좁던 공간이 훨씬 넓게 느껴졌다. 서로가 자신을 희생

하고 상대를 편하게 해주려는 공동체 마음을 지니게 되니까, 공

간이 오히려 남을 지경이었다. 그때 나는 「한국 땅이 비록 좁기

는 하지만 온 국민이 공동체 정신을 갖고 살아간다면 좁은 땅도

넓게 살아갈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가졌다.

한편 내가 처음 일반 죄수들이 수감된 방에 들어갔을 때에 장소

가 좁다는 불편보다 더 심각하게 느낀 문제가 죄수들 간의 빈부

차였다. 옥중에서 돈도 못 쓰는데 무슨 빈부차가 있겠느냐고 생

각할지 모르지만, 죄수들은 돈을 못 쓰는 대신에 서로 물물교환

을 했다. 예를 들면 치약, 비누 등이 화폐 역할을 했던 것이다.

우리 방의 경우 한 사람은 치약이 없어서 손가락으로 양치질을

하는데 다른 한 죄수는 치약을 한 자루나 가지고 있었다. 또 다

른 죄수는 비누가 없어서 맹물에 세탁을 하는데 다른 죄수는 비

누를 박스째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런 분위기에 가슴이 짓눌리는 듯한 답답함을 느껴 동료

죄수들에게 내것 네것 할 것 없이 한살림으로 만들어 공동체 생

활을 해보자고 건의를 하였다. 처음에는 재산이 있는 쪽이나 없

는 쪽이나 함께 반발하였지만, 나중에는 내 뜻에 모두 호응해 가

진 것들을 공동재산으로 삼아 모두 살아가는 처지가 되었다.

그렇게 되니 하루가 다르게 방 분위기가 달라졌다. 밤낮으로 죄

짓는 이야기만 나누던 동료 죄수들이 밖에 있는 가족을 염려하게

되고 자신들의 장래도 걱정하면서 사람답게 살아갈 방법에 대해

토의하기도 했다. 그런 분위기가 더욱 발전하여 훗날에는 함께

예배를 드리고 성경 공부도 하는 방으로까지 변했다. 말 그대로

공동체 정신이 생겼던 것이다.

나는 그런 일을 겪으며 언젠가 석방돼 교회로 돌아가면 공동체

정신을 드러내는 방향으로 목회해보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렇게 이루어나갈 공동체 이름을 「두레 공동체」라고 미리 지

어놓았다. 말하자면 「두레」란 이름은 74년과 75년에 내가 겪었

던 감옥생활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다.

남양만의 두레 공동체 마을

나는 청계천 빈민들과 함께 지금의 남양만 간척지로 집단 귀농하

면서 옥중에서 다짐하였던 공동체 마을을 세워야겠다고 생각했

다. 갯벌을 논으로 개간하여 마을을 세우고 농장을 일으키는 일

이 본궤도에 오르자 나는 공동체 마을인 두레마을을 세우는 일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1978년 10월3일 활빈교회는 창립 7주년을 맞으면서 「두레마을

설립안」을 채택하였다. 6만평의 땅을 마련한 뒤 20세대를 단위

로 하는 공동체 마을을 설립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하여 79년

4월에 8세대가 입주함으로써 1차 두레마을이 시작되었다.

지금도 농촌에서 살아가는 농민들의 형편이 어렵지만, 그때는 훨

씬 더 어려웠다. 그때 우리는 두레마을 공동체가 농민들의 어려

움을 극복하는 데 확실한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한국의 농업 구조와 농민들의 삶의 조건에는 다

섯 가지 특징이 있다. 이 다섯 가지 특징이 한국 농촌을 정체시

키고 농민들의 삶을 불행하게 만드는 주범이라 하겠다.

첫째, 농가가 소유한 토지가 너무나 적다는 점이다. 한국 농가의

토지 소유 면적은 평균 310평에 불과하다. 이런 규모의 땅으로는

아무리 애써 일해도 잘 살기 어렵다. 게다가 그 좁은 땅도 전부

비옥한 평지가 아니라 비탈진 농지와 척박한 땅들까지 포함한 것

이다. 그러니 한국 농업과 농민들의 장래는 영세한 땅의 한계를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달려 있다.

둘째, 농가들이 고질적인 자금 부족에 허덕이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 농가들의 누적된 부채는 세월이 흐르고 정권이 바뀌어가며

더욱 악화돼 왔다. 최근에 정부가 농가부채 탕감을 논의하고 있

지만 농민이 빚을 질 수밖에 없는 구조가 남아 있는 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셋째, 한국농업은 아직도 벼농사 중심이어서 농한기의 노동력이

낭비되고 수입원이 너무나 한정돼 있다는 점이다. 벼농사를 짓는

농가들은 일년 중 작업하는 기간이 불과 4~5개월에 불과하고 나

머지 기간에는 일거리가 없다. 그만큼 수입원이 한정돼 있으므로

가난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넷째, 정부가 공업우대 정책을 편 결과 농업과 농민들이 소외당

하는 등 농업정책이 없다는 점이다. 그중 가장 심각한 문제가 농

산물 가격이 보장돼 있지 않아 농민들이 땀흘려 지은 농산물을

제값에 팔지 못할 뿐 아니라 판로마저 찾지 못해 탄식하고 있는

형편이다.

다섯째, 농민 문화가 너무 빈곤하다는 문제다. 문화의 빈곤 문제

는 농촌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 중에서 가장 심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문화는 사람들의 삶을 윤택하고 보람있게 하는 요소

다. 그런데 농촌사회에 문화가 없다는 것은 바로 농민들의 삶을

의미없고 삭막하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그래서 농촌의 젊은이들

은 도시로 떠나고 농촌은 텅텅 비게 된다.

활빈교회는 두레마을을 설립할 때에 이 다섯 가지 문제에 대하여

대안을 제시한다는 포부와 사명감으로 충만해 있었다. 그래서 첫

20세대가 한공동체를 이루어 토지를 합치고 자본을 집중하며 노

동력과 기술을 한곳으로 모아 한국농업의 모순을 고치고 농민들

의 어려움을 극복하려 하였다. 그리고 바람직한 농민문화를 창출

하여 농민들에게 희망을 주려 했었다.

예수가 이장(里長)인 두레마을

우리는 78년 10월3일에 활빈 두레마을을 세우는 세부계획을 발표

하고 이 계획에 참여할 동지들을 모집하였다. 이때 발표했던 취

지문의 요점은 이렇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主)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

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

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

이렇게 「베드로전서」에 나오는 말씀을 기본으로 한 취지문을

발표한 후 두레마을을 운영하는 세 가지 원칙을 정하였다.

첫째, 「두레마을은 예수님이 이장(里長)이시다」라는 원칙이다.

이는 두레마을이 기독교 정신에 바탕을 둔 공동체임을 나타낸다.

두레마을은 예수를 주인으로 모시고 섬기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

체니까 당연히 공동체 전체의 주인도 예수님이다. 그래서 「예수

공동체」라 부른다. 그리고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삶의 기준으로

삼으니 진리 공동체요, 예수님의 뜻을 세상에 펼쳐나가니 선교

공동체다. 그래서 두레마을의 장래는 모든 가족이 마을의 이장이

신 예수님을 얼마나 깊게 믿고, 바르게 실천하고, 넓게 전하느냐

에 달려 있다.

마을 운영의 둘째 원칙은 「두레마을에는 사랑의 법만 있다」는

것이다. 어느 사회든 지켜야 할 법이 많다는 것은 인심이 그만큼

사나워졌음을 뜻한다. 아담과 이브가 살던 에덴동산에는 단지 한

가지 법만 있었고 모세가 유대인들을 이끈 광야생활에서는 열 가

지 법인 「십계명」만 있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에는 육법

전서 속에 엄청나게 많은 법들이 수록되어 있다. 법의 공해(公

害)라고 할 정도다. 그러나 두레마을은 숱한 법들을 다 줄이고

예수님이 주신 「사랑의 법」 한 가지로만 살아가자는 뜻을 세웠

다.

두레마을에서는 무소유의 정신으로 너의 것, 나의 것에 대한 구

별이 없으니 재산문제로 다툴 일이 없다. 예수님이 대표니 우두

머리가 되겠다고 다툴 일이 없다. 약한 자를 예수님 모시듯 모시

자는 마음을 품고 시작한 마을이니 억울한 일이 있을 턱이 없다.

그리고 정직하게 살아가기로 결심한 사람들의 마을이니 속임수가

없다. 가족들 중에 어쩌다가 다른 형제 주머니의 돈을 자기 주머

니에 넣었어도 『도둑이다』 『훔쳤다』고 몰아세우지 말아야 한

다. 그것은 단지 돈이 있는 자리를 옮겼을 따름이고, 돈을 쓸 때

는 같이 쓰자는 넓은 마음을 품으면 되는 것이다.

두레마을에 들어온 사람은 누구든 소유욕을 버려야 하고, 명예욕

에서 벗어나야 하고, 그리고 자기 중심으로 살아가려는

이기심(利己心)을 떨쳐버려야 한다.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몸과 마음이 너무 지쳐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님 삶의 방식

을 가르쳐야 한다. 그래서 온유와 겸손함으로 삶이 쉼을 얻도록

해야 한다. 그런 보금자리를 이룩해 나가자는 것이 두레마을의

꿈이다.

두레마을 운영 원칙 중 셋째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

라 쓴다」는 것이다. 이 원칙은 재산과 노동, 성도의 교제와 형

제 사랑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세워진 것이다.

두레마을에서는 재산도 노동도 능력도 재능도 공유돼야 하고, 그

모든 것은 주인이신 예수님께 바쳐져야 한다. 그래서 두레마을

안에서는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 배운 사람과 못 배운 사람, 힘

있는 사람과 힘없는 사람, 건강한 사람과 건강하지 않은 사람

사이에 차이가 없어야 한다. 모두가 예수님의 사랑을 함께 나누

며 거룩한 가족 공동체로 살아야 한다. 그리고 누구든지 능력이

있는 사람은 자신이 지닌 능력만큼 일하고, 필요한 사람은 자신

이 필요한 만큼 마음놓고 쓰는 마을이 되자는 생각이다.

두레마을의 네가지 목표

79년 4월1일 제1차 두레마을이 시작되면서 앞에서 말한 마을운영

의 세 가지 원칙을 정하면서 다음의 4가지를 마을 목표로 정했

다.

두레 마을은 행복하게 사는 마을이다.

두레 마을은 믿음으로 사는 마을이다.

두레 마을은 섬김으로 사는 마을이다.

두레 마을은 협동으로 사는 마을이다.

이 4가지 목표에 대하여 살펴보자. 나는 예수를 믿는 신앙생활이

란 행복을 누리는 생활이라고 정의한다. 쉽게 말해서 예수를 제

대로 믿으면 행복을 누리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

수 믿는 것이 쉽고 즐겁고 행복해야 한다. 만일 누군가 예수를

믿는 데도 힘들고 짜증스럽고 불행하다고 느낀다면 그는 예수를

잘못 믿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 땅에서 슬프나 하늘에서는 행

복할 것이라 한다. 그러나 땅에서 얻어지지 않은 행복은 하늘나

라에서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하게 사는

마을을 세워 불행에 빠져 있는 이들을 불러 함께 행복을 나누고

누리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행복한 삶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바로 믿음에서

비롯된다. 믿음이 행복하게 살아가도록 하는 원동력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그의 말씀에 대한 믿음, 그리고 그가 죽

을 때까지 사랑한 인간에 대한 믿음이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바

탕이다. 흔히 우리는 예수만 믿고 사람은 믿지 않아도 된다고 생

각한다. 그러나 성경의 교훈은 전혀 그렇지 않다. 예수에 대한

우리들의 믿음은 사람에 대한 믿음으로까지 연결돼야 한다. 예수

를 믿는 만큼 사람을 믿는 믿음이 행복으로 이끄는 근본인 것이

다.

그렇다면 그 믿음이란 무엇인가? 바로 섬기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섬김에 대하여 그릇 생각하는 것이 있다. 섬김을 받는 자가

행복할 것이라는 생각이 그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섬기는 자가

복된 사람이라고 가르쳤다. 그래서 우리가 행복을 누리는 믿음을

지켜나가려면 섬김을 받는 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로서 살아가야

한다. 믿음은 자신의 내면에 있다. 이 내면에 있는 믿음이 밖으

로 나타날 때는 섬김이 된다. 즉 자기 속에 있는 믿음이 인간관

계를 통해 밖으로 나타날 때는 섬기는 삶으로 드러난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섬겨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까지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을 섬기고 사람을 섬기는 일은 혼자서는 어렵다.

반드시 더불어 할 일이다. 말하자면 협동과 봉사생활이 필요한

것이다. 결국 협동하여 함께 섬기며, 섬김으로 믿음이 자라, 그

믿음 안에서 행복을 누리는 삶을 살자는 것이다. 이것이 두레마

을의 목표다.

갈치 싸움

이런 목표를 세우고 시작한 두레마을이었으나, 실천하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모인 가족 모두가 공동체 생활에 뜻을 품은 대

단한 크리스천들이었지만, 사람과 사람이 만났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온갖 갈등이 여전히 나타나기 마련이었다.

예를 들어보자. 한번은 식사 시간에 갈치요리가 나왔다. 우리가

가꾼 무를 숭숭 썰어 넣고 갈치를 지진 요리 접시가 상 위에 올

랐다. 공동체 상인 「두레상」에 두레가족들이 모여 식사를 시작

했다. 그런데 호남에서 온 한 주부가 『우리 집 애가 갈치를 좋

아한다』며 갈치 접시를 끌어다 자기 아들 앞에 가져다 놓았다.

그렇게 하니 경상도에서 온 아줌마가 팔을 걷어붙이며 말했다.

『뭔 소리야. 누구 집 애는 갈치 싫어하는 줄로 아는 갑제』

경상도 아줌마는 갈치 접시를 끌어다 자기 아이 앞에 갖다 놓았

다. 그러니 호남 아줌마가 가만 있을 턱이 없었다.

『왜 이런 당가. 그 집 애는 숱하게 먹어쌌던디. 오늘만큼은 우

리 앨 멕여야겠당게』

『야, 이 예팬네야, 언 눔은 인삼 묵고 언 눔은 배추뿌리 묵나』

이렇게 실랑이를 하며 갈치 접시를 서로 자기 아이 앞으로 끌어

당기는 과정에 국물이 쏟아지고 무 토막과 갈치 토막들이 온 상

에 엎질러졌다. 그런 광경을 보며 공동체 안의 남자들이 한심하

다는 듯이 말했다.

『참말로 공동체는 여자들이 망치는구먼. 공동체가 되려면 여자

들은 빠져야 해.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여자를 창조한 것은 큰

실수야』

남자들이 이런 말을 하며 공동체의 장래를 염려했다. 그러나 몇

달 후에는 남자들 사이에 싸움이 일어났는데 여자들의 다툼은 그

야말로 봄 날씨에 불과했다. 여자들의 다툼은 기껏해야 반찬그릇

엎는 정도였으나, 남자들의 싸움은 아예 두레마을을 뿌리까지 흔

들리게 하는 큰 다툼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두레마을 가족들은 뜻을 품고 모인 사람들답게 열

심히 일했다. 터를 닦아 집을 짓고 우물을 파고 양계장을 지어

병아리를 길렀다. 땀을 모아 잘 사는 공동체를 이룩하겠다고 그

야말로 밤낮 구별없이 일하고 또 일했다. 그렇게 하여 닭과 돼지

를 기르고 채소를 가꾸었다.

그러나 함정은 곳곳에 있었다. 무엇보다 농산품 판매가 문제였

다. 판로가 확보되지 않은 농산물은 근심덩어리였다. 도리없이

전문 판매상들에게 맡겼다. 판매상들이 우리의 이익이 아니라 자

신의 이익을 앞세우는 것은 당연했다.

당시만 해도 농축산물 값이 미친년 널 뛰듯이 오르락내리락하던

때라 두레마을로서는 농사를 지으면 지을수록, 닭이나 돼지를 기

르면 기를수록 적자를 보게 되었다. 반면에 우리 농장의 생산품

을 가져다 파는 판매상들은 재미를 톡톡히 보고 있는 것이 눈에

훤했다. 우리는 닭을 길러 적자로 허덕이는데 우리가 기른 닭을

판매하는 상인들은 그 수입으로 땅 사고 집 사는 것이었다.

공동체의 분열

그렇게 공동체의 경제가 흔들리니 공동체 가족들도 흔들릴 수밖

에 없었다. 서로가 원망하고 티격태격하다가 끝내는 깨지게 되었

다. 두레마을을 해체하고 뿔뿔이 흩어지자는 제안이 마을 회의에

서 발의됐다. 나는 강력하게 반대했다.

『여러분, 그래서는 안 됩니다. 무릇 가치있는 일일수록 어려운

시기를 거쳐 성공에 이르기 마련입니다. 한국농업은 공동체 운동

으로 활로를 열어나갈 수밖에 없는 줄을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은 이 일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로, 처음 하는 사람이 희생과 실패를 각오하고 나서야

성공할 수 있는 것이 공동체 운동입니다. 남이 하지 못하는 이

일을 우리가 하겠다고 나선 것은 은혜고 축복입니다. 그런데 일

년도 안돼 잘 안 된다고 그만두려는 것은 언어도단입니다. 끝까

지 밀고 나갑시다. 반드시 성공할 것입니다』

내가 열을 뿜으며 이렇게 주장했으나, 이미 그들은 의욕을 잃고

있었다. 게다가 나를 원망하고 불신하는 마음이 가득 찬 상태였

다. 그들 중 한 명이 화가 치밀어 말했다.

『보시라요 김목사, 박태선 장로같이 우리를 꼬드겨서 이 지경으

로 만들어 놓고서 그렇게 무책임한 소리를 할기요?』

『아―니, 지금 나에게 박태선 같다고 말하는 건가요? 너무 심한

말 아닌가요?』

『심하긴 뭐가 심하다는 기요? 우리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오도

가도 못할 지경에 빠지게 된 긴가요? 괜스레 잘 살고 있는 사람

들을 온갖 감언이설로 꼬드겨 여기까지 오게 한 것이 아닌가요?

그랬으면 미안한 마음이라도 있어야지 뭐 끝까지 해보자구요? 끝

까지라면 어디까지가 끝이란 거요?』

『여기까지 나를 믿고 따라왔으면 그 믿음을 버리지 말고 끝까지

견뎌보자는 것이지요. 이 고비를 넘기면 언젠가는 나에게 고맙다

고 말할 날이 올 겁니다』

그러나 독기가 올라 있는 그들을 설득하려던 나의 노력은 소용없

었다. 끝내는 한 사람이 화를 삭이지 못해 내 뺨을 후려쳤다. 나

는 맞은 뺨을 만지며 말했다.

『내 뺨을 때려서 시원하다면 치십시오. 다만 좀 지나친 것 아닌

가요?』

『머이? 지나치다고? 속대로 한다면 다릴 분질러놓고 싶은데, 그

래도 목사라서 참는 기요, 참아』

그는 씩씩거리며 말했다. 주위에 둘러앉은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

하나 살펴보니 모두가 적개심을 품고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슬며시 그 자리를 떠나 간척지를 걸으며 생각했다.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꼬였을까? 하늘을 우러러 한 점 사심없

이 일을 했건만, 내가 하는 일은 왜 늘 이렇게 복잡하게 되어가

는가?」

다음날 우리는 다시 모여 두레마을을 해체키로 하되, 끝까지 두

레마을을 지킬 사람은 남고 떠날 가정은 각자가 갈 길을 가기로

했다. 이것이 79년 12월 어느 날의 일이었다. 결국 79년 4월1일

에 시작됐던 제1차 두레마을은 열매를 거둘 만한 시간도 없이

12월에 해체되고 말았던 것이다.

실패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다

두레마을이 해체되던 날, 나는 훗날 다시 일어설 때를 기약하며

1차 두레마을이 실패하게 된 원인을 살펴 메모 형식으로 기록해

두었다. 그 날의 메모를 보면 두레마을의 실패 원인은 4가지였

다.

첫째는 처음 두레마을을 시작할 때에 충분한 준비가 없었다는 점

이다. 세상사가 다 그렇듯이 충분한 연구와 토론, 준비와 협의

없이 졸속으로 시작했다가 급기야 실패하는 것이다.

둘째는 축산물 가격이 폭락했기 때문이다. 제1차 두레마을은 축

산을 중심으로 계획되었던 마을이었다. 그런데 때맞춰 육우·양

계·양돈 모두가 가격이 폭락하는 바람에 경영적자에 부딪혀 실

패로 돌아갔다.

셋째는 두레마을을 지원해야 할 활빈교회가 소도입 사업 실패로

인해 여유가 없어 이들을 지원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활빈교회

스스로도 시험에 들어 생존문제로 허덕였으니, 두레마을이 정신

적이고 실질적인 지원을 받지 못해 지탱할 힘을 잃고 만 것이다.

넷째는 인화(人和) 문제였다. 두레마을의 근본 이상(理想)은 사

람과 사람 간의 화목한 관계, 즉 인화가 기본이 되는 공동체다.

그런데 제각기 두드러진 개성의 사람들이 모여서 화목한 생활을

하지 못하게 되니 결국 공동체가 깨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런 점들을 살펴 언젠가 두레마을을 다시 시작할 경우를

대비해 몇 가지 사항을 기록해 두었다.

첫째는 교회 안에서 신앙이 좋다는 것과 공동체 정신을 가진다는

것은 다른 문제임을 인식해야 한다. 소위 신앙이 좋다는 교인들

이 더불어 사는 공동체 생활에는 적당치 않은 경우가 있다.

한국교회에서 흔히 「신앙이 좋은 교인」이라 할 때에 그 기준은

4가지다. 첫째 목회자에게 잘 순종하고, 둘째 성수 주일을 잘 하

고 새벽기도회까지 꼭꼭 참석하고, 셋째 십일조 헌금을 잘 하고,

넷째 술·담배를 하지 않는 경우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신앙이

좋다는 사람이 공동체에 참여할 경우 오히려 장애요소가 되기도

한다.

한국 교회 교인들의 신앙 내용이 전반적으로 이 점에서 문제가

있다. 예를 들어 농촌에서 새마을 운동을 하느라고 온 마을 사람

들이 마을 길을 닦고 있는데, 「신앙이 좋다」는 교회 장로나 집

사들은 넥타이를 매고 성경을 들고서 작업하고 있는 동민들을 지

나치면서 『할렐루야』 하고 말한다. 그런 모습을 보는 마을 사

람들은 화가 나서 말한다.

『뭔 짓이여. 온 동네 사람들이 땀흘려 일하는데 예수쟁이라고

일도 않고 지나치며 할렐루야인가 놀렐루야인가 개구리 같은 소

리를 내는 기여. 너 그 길로 천당으로 직행해버려라. 좌우지간

예수쟁이들은 밥맛 없다니까』

『그려. 나도 예수쟁이라면 기분이 잡쳐. 나 자식 낳아 예배당

보내면 사람새끼 아니여―』

교인들은 마을 사람들의 그런 말을 들으면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교회로 향한다. 그래서 교회는 마을에서 고립되고 전도의 길은

좁아진다.

교인들의 그런 모습은 사회생활에서도 마찬가지다. 모처럼 회사

동료들의 회식에 참여할 경우 교인들이 술을 안 마시는 것은 좋

은데 술좌석에 앉아 안주만 야금야금 먹어댄다. 그런데 실제로

비싼 것이 술보다 안주다. 교인들은 그렇게 비싼 안주만 먹다가

계산을 치를 때는 정신이 말짱하니까 얼른 앞에 나가버린다. 그

래서 교인들이 인색하다는 말을 듣고 융통성없이 고지식하다는

평을 듣는 것이다.

이런 점들이 한국교회 교인들의 공통된 성격이다. 「신앙이 좋다

」는 것이 예배당 안에서만 통하지 예배당 밖에서는 부적합한 것

이 돼버리는 것이다. 나는 제1차 두레마을을 세우면서 이런 점에

대한 배려가 없이 그냥 신앙이 좋은 사람들을 모은 결과 불과

1년이 못 돼 두레마을을 해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점을

되새겨 다음에 공동체를 시작할 경우에는 공동체적 삶에 적합한

신앙을 지닌 교인들을 기초 멤버로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제1차 두레마을을 통해 배운 둘째 교훈은 인간은 본성적으로 재

산·가구·개인생활권(privacy) 등에 대한 욕구와 집착이 매우

강하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두레마을을 다시 시작할 경우에는

공동체 정신을 손상시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개인과 각 가정의

프라이버시를 지켜주고 생활공간을 가능한 넓혀주는 것이 필요하

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공동체에 공공 부분과 개인 부분에 대한

지침을 확실히 세워둘 필요가 있었다.

셋째로는 아무리 좋은 사상과 뜻도 실천단계에서 제대로 관리되

지 않으면 결과적으로 여러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다는 점이었다.

레오나르드 다빈치의 『승화(昇華)되지 않은 진실은 허위보다 더

해독을 끼친다』는 말처럼 적합한 경영 능력이 뒷받침되지 않은

채 이상만을 실천하려 들 때에 결과는 참여자 모두에게 피해를

주게 되는 것이다. 1차 두레마을이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넷째로 외부 지원을 믿고 중대한 일을 시작해서는 안 된다는 사

실이다. 어떤 일이든 기초단계에서부터 마무리될 때까지 자립(自

立)·자조(自助)·자영(自營)의 원칙에서 기획되고 진행돼야 한

다. 약속되었거나 기대되는 외부 지원을 믿고 일을 시작했다가

그 지원에 차질이 생길 경우 일 자체가 무너지게 된다. 애초부터

자립정신으로 시작하여 기도와 땀과 정성으로 쌓아올려야 한다.

공동체 자체가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의 한도 내에서 일을 시작해

야 한다는 뜻이다.

다섯째, 두레마을을 다시 시작할 경우 일체감이 있는 소수 정예

가 작은 규모에서 시작하여 단계적으로 규모를 키워나가야 한다

는 점이다.

제1차 두레마을은 위와 같은 교훈을 남긴 채 끝을 맺고, 그로부

터 7년이 흐른 후에 두 번째 공동체 마을을 시작하게 되었다.

1986년 4월1일의 일이었다.

7년간의 기도

나는 그 7년 동안 두레마을을 다시 시작할 수 있게끔 여러 가지

준비를 진행해 나갔다. 두레마을을 시작하려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이 땅이었다.

먼저 두레마을을 세울 땅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기도하면

서 남양만 지역 안에서 적합한 땅을 물색했다. 마침 후보지가 나

타났다. 봉화산(峰火山)이란 이름의 야산이었다.

봉화산은 남양만 지역에서는 바다가 내다보이는 가장 좋은 위치

에 있는 산이었다. 예부터 그곳에 봉화대를 쌓고 바다 쪽을 지키

다가 왜구나 중국의 해적이 침입하면 중앙으로 알리는 봉홧불을

올렸다고 해서 봉화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봉홧불이 하나 오르

면 적이 나타났다는 신호였고, 둘이 오르면 상륙했다는 신호였으

며, 셋이 오르면 접근하고 있다는 신호였다. 또 낮에는 연기 기

둥으로 신호를 올렸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봉화를 올렸다. 남양만

의 봉화산에서 그렇게 봉홧불이 오르면 수원을 거쳐 서울 육사

부근 불암산에 있는 중앙 봉화대까지 신속하게 전달되는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나는 그 산의 이름과 모양새가 마음에 들어 산 중턱에 터를 정하

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아직 산 주인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태

에서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이 산을 활빈교회에 주시옵소서. 이 산에서 한국농촌

에 봉홧불을 올리겠습니다. 이 땅, 이 서러운 백성들이 살아가는

조국 땅에 성령의 봉홧불, 희망의 봉화를 올리겠습니다. 이 산을

저희에게 맡겨주시옵소서』

그렇게 7년간 기도를 했고 그 사이 산 주인도 여러 번 바뀌었다.

그러나 나는 산 주인이 누구로 바뀌든 아랑곳하지 않고 한결같이

하늘을 향해 기도하기를 계속했다.

그리고 틈이 나는 대로 산 속으로 들어가 산세를 살피며 산이 우

리 것이 된 후에 할 일들을 생각했다. 이곳에는 교회당을 세워야

지, 저곳에는 훈련원을 세우고, 두레마을 가족의 숙소는 여기쯤

이 좋겠다는 식으로 계획을 세워나갔다. 한번은 산 주인인 노인

이 못마땅한 듯이 말했다.

『왜 간첩처럼 남의 산을 오락가락하는 거요?』

『아―니, 할아버지 그 산 속에 뭐가 있다고 그런 말씀을 하세

요. 내가 사정이 좀 있어 산을 밟고 다니기로서니 간첩이란 말은

지나치십니다』

『아무튼 내 산을 밟고 다니는 것이 내게는 못마땅하니, 그리 아

시오』

그 뒤로는 새벽기도가 끝난 새벽녘이나 오후 늦은 시간에 산을

밟으며 기도하곤 했다. 그렇게 7년이 지난 어느 날, 산주인이 나

를 찾아와 말했다.

『목사님, 목사님이 봉화산을 좀 맡아주시지요』

『할아버지, 갑자기 왜 그러세요. 봉화산을 맡으란 말이 무슨 뜻

이지요?』

『이번에 집안에 일이 생겨 돈이 급해 봉화산을 팔기로 했습니

다. 그런데 복덕방에 내놨더니 서울 투기꾼들만 찾아와 목사님께

로 온 겁니다』

『저에게로 오신 것은 고마운 일입니다만 무슨 마음으로 오셨는

지요?』

『봉화산이 그래도 이 지방에선 명산인데 돈이 아쉽다고 해서 서

울 투기꾼들에게 팔아넘기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혹시 목

사님이 맡으실 의향이 있는지 해서 왔습니다. 목사님이 맡으시면

이 지역에 도움 되게 잘 쓰실 것 같아서요. 저희가 조건도 잘 해

드릴 테니 생각해보세요』

『참 고마운 말씀입니다. 그렇잖아도 그 산이 마음에 들어 여러

해 동안 살펴오고 있던 참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잘해 주시겠

다는 말은 어떤 내용인지요?』

『우선 급한 돈만 좀 마련해주시면 나머지는 시간을 두고 주시거

나 값을 좋게 매겨 넘겨드리는 방법을 말하는 것이지요』

나는 그 할아버지의 말을 듣고는 지난 7년간 드린 기도의 응답인

이상, 조건을 떠나 한번 시도해볼 값어치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

었다. 그래서 값을 흥정한 결과 4000만원으로 합의가 되었다.

3600만원의 헌금

나는 교회 일꾼들을 모아 의논하고 먼저 헌금을 했다. 그 결과

4000만원의 10분의 1인 400만원이 마련되었다. 그 돈으로 우선

계약금을 치르고는 중도금 잔금 할 것 없이 두 달 후에 3600만원

을 치르기로 약속했다.

그런 후로 온 교인들이 기도에 들어갔다. 주일 예배 때는 물론

새벽기도에서나 구역예배에서나 교인들이 모이기만 하면 3600만

원을 정한 기간에 지불할 수 있게 허락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런 한편 나는 곳곳으로 다니며 돈을 구하려고 애썼다. 교단 본

부에 가서 돈을 차용할 수 있는지 알아보기도 하고, 친지와 친구

들을 방문하여 융통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느라 꾸준히 돌아다녔

다.

그러나 어느 곳에서도 길은 열리지 않았다. 그런 중에 시간은 흘

러 계약 만기일이 불과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새벽기도가 끝난

후 여집사 한 분이 내게 와서 물었다.

『목사님, 물 건너갔지요?』

『예? 물 건너가다니요. 무엇이 물 건너가요?』

『계약금 치른 산 말이에요. 잔금 날짜가 다 됐는데 돈을 못 구

했으니 그만 물 건너간 것이 아닌가요? 계약금만 날리게 된 거

아닐까요. 그 돈으로 차라리 고기라도 사먹었으면 보신이라도 되

었을 텐데요』

『아직 날짜가 남았잖습니까?』

『이틀밖에 안 남았잖습니까? 그러니 다 끝난 것이지요』

『집사님, 미리 낙심할 것 없습니다. 이틀은 시간이 아닌가요?

아직 이틀이나 남았으니 이틀 후에도 돈이 마련되지 않으면 그때

가서 낙심해도 늦지 않습니다』

『목사님이 이렇게 느긋하신 것을 보니 어디 믿는 구석이 있는가

본데요?』

『아뇨. 믿는 데가 있긴 어디 있어요. 처음부터 개인사업 하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일 하려는 것이니까 되든 안 되든 하나님의

손 안에 달려 있는 일이지요. 그러니 먼저 낙심하거나 조바심을

낼 필요가 없다는 게지요』

이런 대화를 나눈 그날 오후에 한 손님이 나를 찾아왔다. 30대

후반에 생김새가 헌칠한 신사가 김진홍 목사를 찾는다기에 그를

서재로 맞아들였다. 방에 들어온 그는 자신이 미국 필라델피아에

서 온 박아무개 집사라고 소개했다. 나는 미국 땅에서 남양만까

지 찾아온 그가 신통해서 물었다.

『미국이 이웃 동네도 아닌데 그 먼 곳에서 어쩐 일로 찾아오셨

는지요?』

『목사님이 쓰신 책 「새벽을 깨우리로다」를 읽고 감명을 받았

기에 목사님 하시는 일에 도움이 될까 해서 헌금을 좀 하러 왔습

니다』

헌금하러 왔다는 그의 말에 감사의 뜻을 표했더니, 그가 봉투를

내밀었다. 봉투를 받아보니 봉해져 있었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이 봉투를 열어봐도 되겠습니까? 혹시 나중에 열어보고 빈 봉

투면 곤란하잖습니까?』

내 말에 그도 웃으며 말했다.

『열어보셔도 됩니다. 빈 봉투는 아니니 안심하시고 열어보십시

오』

봉투를 뜯어보니 수표 한 장이 나왔다. 나는 수표에 기록된 액수

를 읽고는 어리둥절한 느낌이 들어 거듭 확인했다. 틀림없이

3600만원이라고 적혀 있었다. 우리가 지난 두 달간 그렇게 열심

히 기도했던 액수가 적혀 있었던 것이다. 나는 머리가 띵해지는

것을 느끼며 그에게 물었다.

『아―니, 3600만원 아닙니까? 우리가 3600만원을 위해 두 달간

기도해온 것을 알고 계셨습니까?』

『아―녜요. 미국 땅에 있던 제가 어떻게 그걸 알겠습니까? 집안

에 어떤 일이 있어 꼭 그만큼 하나님께 드릴 수 있게 돼 목사님

께로 곧장 찾아온 것입니다』

나는 이것이 보통 일이 아님을 느꼈다. 이는 신실하신 하나님께

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 응답하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박집사에게 말했다.

『집사님, 참으로 신기한 일이구먼요. 우리가 지난 두 달 동안

한사코 하나님께 기도드린 것이 이 돈 3600만원입니다. 그 기도

가 이렇게 집사님을 통해 응답된 것이군요. 참으로 황송스럽고

감사하고 또 신기한 일입니다』

박집사도 놀라며 말했다.

『그러세요? 그런 일이 있었군요. 참으로 감사하네요. 저도 큰

보람을 느낍니다』

『저도 집사님도 함께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할 일이네요. 집

사님, 바쁘시겠지만 이번 주일에 우리 활빈교회에서 예배를 드리

고 미국으로 돌아가십시오』

『아닙니다. 이미 일정이 잡혀 있어서 내일 미국으로 떠나야 합

니다』

『집사님, 아직 모르시는군요. 이 동네에서는 제가 왕초여서 이

곳에 올 때는 마음대로 올 수 있지만 떠날 때는 왕초인 내 허락

이 떨어져야 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 스케줄 잊어버리고 내일 모

레 예배에 참석하셔서 교인들과 함께 예배드리고 가십시오』

『하나님도 짜다 짜!』

그런 내 말에 박집사는 잘 따라주었다. 그날이 금요일이었던지라

이틀 후인 주일예배 때 내가 교인들에게 알렸다. 박집사를 자리

에서 일어서게 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이 손님은 미국 필라델피아란 곳에서 온 박집사란 분

인데 저희 교회에 헌금을 했습니다. 그런데 헌금을 얼마나 했느

냐? 꼭 3600만원을 헌금했습니다. 그래서 지난 두 달간 우리가

열심히 기도드린 것이 이루어져 땅값을 무사히 치르게 되었습니

다』

내가 이렇게 소개하자 싱거운 소리를 잘하는 한 집사가 앉은 채

로 소리 높여 말했다.

『핫따, 그거 참 아깝구먼. 기도 제목을 한 두 배쯤 해서 7000만

~8000만원 밀어달라고 할 걸―. 산을 사면 등기도 해야 하고 우

물도 파야 하는디―. 하나님도 짜다 짜. 어떻게 꼭 3600만원만

주시나. 좀더 붙여주시질 않고…』

이 말에 온 교인들이 폭소를 터트렸다. 그런 과정을 거쳐 봉화산

이 활빈교회 소유가 되고, 그곳에 제2차 두레마을을 세울 수 있

었다. 바로 86년 4월의 일이었다. 나는 먼저 그 산에 들어서 있

는 잡목들을 베어내고는 두레마을 가족들이 머물 주택부터 지었

다. 이어서 2000두 규모로 사육할 수 있는 양계장을 지었고, 연

이어 공동체 생활에 필요한 시설들을 세워나갔다.

봉화산 중턱에는 평평한 공지가 있다. 내가 터를 잡고 7년간이나

「이 산을 저희에게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드렸던 자리였다. 산

이 우리 소유가 된 후 나는 그 자리에 다시 꿇어앉아 「바로 이

자리에 농민들을 훈련시킬 수 있는 훈련원을 짓게 해 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기도드린 지 3년만에 그곳에 「두레

마을 농민선교 훈련원」을 세울 수 있었다. 7억~8억원이나 소요

된 좋은 건물이었다. 그 훈련원에서 농민들과 청소년들을 대상으

로 하는 훈련을 실시해왔고 이제는 그 건물이 두레자연고등학교

건물로 바뀌게 되었다.

두레자연고등학교는 고등학교를 다니다 퇴학당한 학생들을 위한

학교다. 97년의 경우 한해 동안 퇴학당한 중·고등학생이 무려

5만3600명에 이른다. 그리고 자퇴한 중·고등학생도 6만명을 넘

어선다. 게다가 지난 한해 동안에 자살한 중·고등학생의 숫자도

800명이 넘는다.

이렇게 심각한 청소년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 일조를 할 목적으로

두레자연고등학교를 세운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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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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